[야설록]천객 - 3 - 7편 (7/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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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3 - 7편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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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저 노인이 이처럼 지쳐 있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바쁘겠지만 이리 좀 앉게." 노인이 옆 자리를 가리킨다.
백아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노인의 곁에 몸을 앉혔다.
사실 그녀는 지금 복청양의 일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서 빨리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의 음성에는 왠지 거역하기 힘든 힘이 실려 있었다. "비가 올 것 같군.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봄비는 약이지.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면 대지는 생기를 회복하니까.
하지만 가을비는 그렇지 않아.
가을비는 낙조처럼 쓸쓸한 기운을 담고 있지.
자네처럼 젊은 사람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내 나이가 되면 가을비를 보는 게 무서워진다네.
가을비가 오면 겨울이 오고, 겨울은 나처럼 나이든 사람에게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계절이지." 백아아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이 노인이 어째서 이런 소리를 하는지는 몰랐지만 왠지 그냥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모릅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알 필요도 없지.
나는 지난날의 사람이야.
흘러가는 바람과 같고 다가오는 겨울과 같지.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나를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자네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나는 지마와는 잘 아는 사이라네." "네……." "그리고 저 아이의 사부이기도 하지." "그럼?" 백아아가 놀라 복청양을 보았다.
복청양은 여전히 죽은 것처럼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미리 확인하지 않았다면 다시 다가가 숨이 붙어있는지 확인했을 그런 모습이었다. "어르신께서 천산오조이십니까?" "한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웠지." 노인, 천산일로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한때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었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지난날의 이름이 아무리 화려했다고 해도 지금은 그저 잊혀진 존재일 뿐." 아마도 이 노인은 과거에 상당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인 듯했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자네를 붙들고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천산일로가 잠시 말을 끊었다. "이 일은 지마의 원대한 계획에서 시작되었네.
천품신성 악자량에게 비참한 패배를 당한 십마는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지.
그들은 절치부심하여 복수를 하늘에 맹세하고 이십 년의 세월을 바쳐 한 인물을 키워냈네.
그게 누구인지 알겠는가?" "짐작은 갑니다." "그래, 그는 위대한 인물이지.
그는 십마가 기대하는 것보다도 더 크게 자랐네.
그의 위대함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였지.
하지만 지마는 그 한 사람만 키워낸 것이 아니라네.
십마는 십 년 전에 다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우리 천산오조에게 맡겼네.
그 사람이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지.
이 일은 순전히 지마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천노살성이라는 허수아비가 필요했던 걸세." "그럼 복공자가?" "바로 맞았네." 천산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가장의 불행은 저 아이가 우리 밑으로 들어올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지.
세상에 우연이란 아무 것도 없네.
모든 일이 미리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지.
지마는 무서운 인물이라네.
자네는 그걸 알아야 하네." "그런 일이……." 백아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십 년이 훨씬 지난 전부터 이 모든 일이 예비되어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통천삼십삼마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던 사이라네.
통천삼십삼마가 하나씩 죽어갈 때 우리 역시 사지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맛보았지.
그러기에 우리는 한 아이를 키워달라는 지마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네.
어차피 그때 우리는 이미 세상에 얼굴을 내놓고 살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다지 어려운 청도 아니었지." 천산일로의 눈에 아득한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네.
그리고 우리는 점차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지.
저 아이가 애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걸세.
저 아이의 장점은 자네도 이미 파악하고 있을 걸세.
저 아이는 마음이 너무 여리지.
그래서 지금까지 사람을 하나도 죽이지 못했고, 그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았네.
자고로 무림의 세계라는 것은 내가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상대가 나를 죽이는 걸세.
상대를 짓밟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가 없지.
그런데도 저 아이는 그러지 못했네.
십마의 시각에서 보면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고 우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차츰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저 아이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사람의 목숨은 귀중한 것이야.
누구도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네.
어떠한 명분으로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저 아이는 우리에게 그런 간단한 이치를 일깨워 주었네." "어르신……." 전신이 피범벅이 된 한 노인의 고백은 백아아에게 이상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저 아이가 좋아졌네.
그래서 처음의 목적과는 달리 저 아이에게 함빡 정을 쏟았지.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저 아이가 무서운 운명을 안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네.
그 동안 십마도 우리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일이 다 끝난 줄 알았지.
하지만 복가장의 참변 소식을 듣는 순간 우리는 그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네.
십마는 결코 무엇을 잊는 사람들이 아니지." 원래 계획대로라면 천산오조는 복청양을 하산시킴으로써 모든 임무가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복청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를 따라서 하산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내가 왜 자네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는지 알겠나?" "소녀의 부족한 머리로는 어르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건 자네만이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일세.
이 아이를 부탁하네.
우리는 지금까지 줄곧 이 아이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자네가 이 아이에게 어떤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네.
자네라면 반드시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있을 걸세." "소녀가 어찌……." "아닐세." 천산일로가 노인 특유의 고집스러움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네.
그리고 자네라면 그 일을 할 수 있지.
이 아이에게 예정된 불행은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닐세.
앞으로 이보다 더한 시련이 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 걸세.
그때 자네가 이 아이의 옆에서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네." "어르신이 무얼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소녀보다 어르신께서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후후, 나는 과거의 사람일세.
형제들마저 가고 없는 지금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네.
과거의 사람은 그저 과거로 흘러가야지.
세월을 거역할 수는 없네.
하늘의 뜻은 무서운 것이야.
우리는 마땅히 없어져야 할 폐물들이고 그건 십마 역시 마찬가지지.
그런데도 십마는 지금 그 간단한 이치를 모르고 어리석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야." 말을 마친 천산일로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호수 앞에 서더니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정말 좋군.
한바탕 비가 쏟아졌으면 좋겠어." 천산일로의 음성은 기이하도록 높았다. "어르신!" 문득 어떤 불길한 생각에 백아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를 돌아보는 천산일로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저 아이에게는 알리지 말게.
우리는 저 아이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지었어.
생각 같아서는 저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 또한 사람의 욕심이 아니겠나? 나는 저 아이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네.
이것이 부질없는 생각인 줄은 알지만 자신을 이용한 사람의 하나로 기억되기는 싫단 말일세."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천산일로의 입에서 한 줄기 핏물이 주르르 흐르더니 고목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악! 어르신!" 백아아가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몸을 날렸다.
그녀는 천산일로가 땅에 쓰러지기 전에 그를 받아 안았다.
그러나 천산일로의 얼굴은 이미 잿빛이었으며 살아있는 사람의 생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스로 심맥을 진동시켜 자결한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백아아는 천산일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몸을 세우며 망연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천산일로에게서 들은 말은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어서 그녀를 정신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느라 그때까지도 죽은 듯이 누워있던 복청양의 손이 주먹을 움켜쥐는 것을 보지 못했다. "사부님……."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두두두두 밤길을 사두마차가 무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막 내리기 시작한 비가 청년의 얼굴을 적셨다.
그러나 청년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마차를 모는 데만 열중했다.
지금까지 권태롭기만 하던 그의 입은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두 눈은 반짝반짝 빛을 냈다.
청년은 마치 마차를 모는 일에 그의 인생이 걸려있다는 듯이 전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마차의 진동을 느껴가며 백아아는 복청양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손은 시체처럼 차가웠으나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서 이 사람을 무독옹에게로 데려가야만 한다.
지마가 내게 이 사람을 무독옹에게 데려가라고 한 것은 이 모든 일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마는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그러나…….' 백아아는 문득 천산일로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피맺힌 한을 떠올렸다. '지마가 하고 있는 일이 모두 옳은 것일까? 그분은 진정으로 위대하시다.
그러나 그분은 지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마가 하고 있는 일은 절대로 옳지 못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다.
아무리 그 명분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지마의 지금 행동은 단순히 복수심에만 기인된 것일 뿐 절대로 옳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과연 복공자를 지켜줄 수 있을까?' 백아아는 복청양에게 더한 시련이 닥칠 것이라는 천산일로의 마지막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지금의 복청양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일을 과연 그녀가 해낼 수 있을까.
그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후두둑 후둑! 비가 뿌린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그러나 아직 빗발이 거세지지는 않았다.
콩알만한 빗방울이 하나 둘씩 심심풀이라도 하듯이 던져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비가 폭우로 변할 것이라는 조짐은 여러 곳에서 보여지고 있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고 스산한 바람이 쉴새없이 불어온다.
공기도 습기를 머금어 눅눅하다.
남궁격의 거처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을 향해 걸어가면서 금수근은 조금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배분으로 따지자면 남궁격은 분명히 그의 새카만 후배였다.
배분상으로는 아마도 두 배분은 아래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금수근은 남궁격이 그의 상전이고 그는 남궁격의 수하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참으로 지랄맞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홀로 이처럼 큰 세력을 키워오면서 그는 누구의 명도 듣지 않았다.
만인이 부러워하는 십방좌에 오른 후에도 역시 그랬다.
십방좌는 언제나 대등한 입장이었으므로 누가 누구의 수하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남궁격이 중원검보에 들어오면서 이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대놓고 금수근의 상전 행세를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남궁격은 예의를 깍듯하게 지키는 게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지랄맞은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물론 남궁격은 아직 젊었다.
젊은이가 혈기를 앞세우는 것은 나무랄 일이 못 된다.
더구나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십방좌의 일인인 철궁도의 도주였다.
수평적인 신분으로는 그와 대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남궁격이 약간의 위세를 부리는 것도 이해해 줄 만하다.
더구나 그는 차기 단심백결회의 회주에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는 인물이 아닌가! '사람이 옹졸하기는…….' 금수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누구냐?" 그가 가까이 가자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힐문이 터져나왔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담겨있는 짙은 살기를 금수근은 느낄 수 있었다.
금수근은 걸음을 멈췄다.
필경 철궁도의 고수일 것이다.
남궁격은 중원검보에 들어온 후에도 자신의 거처에는 철궁도의 고수들로 경비를 세웠다.
이 역시 중원검보를 무시하는 처사는 아닌지……. "나다." 금수근은 갑자기 치솟아 오르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 보주님."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말했다. "이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그건……." "보주님은 내가 보시자고 했다." 뒤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남궁격의 처소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거기에 남궁격이 나와 있었다.
불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그의 얼굴이 다소 어두워 보였다. "죄송합니다." 목소리와 함께 그토록 날카롭게 찌르던 살기가 말끔히 사라졌다.
주위에는 다시 후두둑거리는 빗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대단한 고수군.' 금수근은 새삼 철궁도의 감춰진 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런 고수가 셋만 있다면 그 자신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어서 오시지요.
결례가 많습니다." 남궁격이 앞으로 나오며 두 손을 모았다.
그는 아까 입고 있던 옷 대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그새 목욕을 했는지 머리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빠르군.' 금수근은 내심 그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남자가 여자처럼 목욕을 하고 옷에나 신경쓰는 것은 역시 곱게 보아줄 일이 못 된다. "도주가 이 야밤에 나를 보자고 한 이유를 모르겠소." 그러나 금수근의 음성에는 그런 불쾌감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우선 들어가시지요." 남궁격이 돌아선다.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탁자 위에는 한 병의 술과 두 개의 술잔이 놓여 있었고, 간단한 안주가 마련되어 있었다.
남궁격이 미리 마련해 놓은 것이 분명하다. "이게 웬 술이오?" 금수근이 의아해서 남궁격을 보았다.
느닷없는 침입자에 놀라 격전을 치른 지가 얼마인데 다시 술타령을 하자는 것인가! "우선 한 잔 드시지요." 남궁격이 소매를 걷어올리며 술을 따랐다.
철궁도의 도주 신분으로 직접 술을 따르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고맙소." 금수근은 사례하며 술잔을 받았지만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왜 드시지 않고……?" "미안하오.
난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소." 금수근이 술잔을 한옆으로 밀었다.
명백한 거절의 표시였다. "하지만……." 남궁격이 의아해서 그를 보다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것이 나를 의심하는구나.' 필경 금수근은 그가 술에 산공독을 타서 복청양을 사로잡은 일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권하는 술을 꺼려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것.
너 따위를 잡으려고 그런 얄팍한 수단을 쓰지는 않는다.' 남궁격은 새삼 금수근의 옹졸함을 알 수 있었다.
금수근은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속내를 들여다본다면 여인처럼 세심한 데가 있다. '하지만 네가 아무리 조심해도 내가 손을 쓰기로 작정만 한다면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격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럼, 저 혼자 마시겠습니다." 남궁격이 자작으로 술을 따라 훌쩍 마셨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의 술은 채워놓기만 하고 손을 대지는 않았다. "보주님." 금수근을 보는 남궁격의 눈에 빛이 일었다. "보주님은 오늘밤의 일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생각하고 말고나 있겠소? 오늘밤의 일은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소!" 금수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늘밤에 그들은 괴인들의 기습을 받아 인질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비록 침입자들의 상당수를 베었다고는 하나 인질을 빼앗긴 것은 그의 수치였다.
아니, 중원검보의 수치라 할 수 있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남궁격이 의외로 태연하게 말을 했다. "어차피 천노살성은 이제 이용가치를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그자가 알고 있는 일도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으니까 그자를 빼앗긴 것에 대해 너무 마음쓸 것 없습니다.
천노살성의 뒤에 십마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했으니까 오히려 수확이 적다고 할 수 없지요.
이제는 십마가 직접 전면에 나설 때지요.
천노살성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십마도 언제까지나 그 그늘에 숨어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일은 십마가 전면에 나선다는 일종의 의사표시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좀더 진행된다면 십마의 뒤에 숨어있는 그 신비의 인물도 나서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요." "도주는 정말로 십마의 뒤에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틀림없습니다." 남궁격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의 어조는 너무나 자신에 차 있어서 듣는 사람에게 정말로 그럴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금수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믿지 못하겠소." "무엇을 믿지 못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십마가 어디 보통 인물들이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인물들이오.
십마가 무서운 것은 그들 하나하나가 너무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오.
그리고 십마가 두렵지 않은 것은, 조금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오." "보주님의 말씀은 너무 심오해서 알아듣기가 힘이 드는군요." "그럴 리가 있겠소.
천하의 청룡인데." 금수근이 미소를 지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삼십 년 전, 통천삼십삼마가 횡포를 부릴 때 그들의 토벌에 참여하지 못했소.
그 당시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으니까.
하지만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통천삼십삼마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소.
그 결과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이 개성이 강한 위인들이라는 것이오.
그들은 각자가 너무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나머지 하나로 합쳐지지를 못했소.
개개인이 모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지.
그 결과 그들은 천품신성에게 각개격파를 당했고 강호에서 통천삼십삼마라는 이름을 내리게 된 것이오.
그런데 그 후 아무리 긴 세월이 지났다지만 그처럼 자존심이 강한 인물들이 하나도 아니고 열씩이나 남의 수하로 들어갔다고는 믿겨지지 않는 일이오." "그들이 지난날의 실수를 거울삼아 하나로 뭉쳤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소." 금수근이 수긍했다. "나는 작금의 상황을 바로 그런 시각에서 보고 있소.
그들이 하나로 뭉쳤다면 그 지도자는 당연히 쇠마가 될 것이오.
쇠마야말로 통천삼십삼마 중 제일인자였으니까.
하지만 쇠마의 뒤에 다시 신비인이 존재한다는 도주의 말은 진정 믿어지지 않소." "제 말이 믿기지 않는 것은 이해합니다." 남궁격이 말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난날의 삼십삼마보다 지금의 십마가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보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그들은 뛰어난 인물들입니다.
그런 만큼 그들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니 그들이 다른 십마의 수하로 들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제삼의 인물을 내세워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은 것이 아닐까요?" "난…… 모르겠소." 금수근이 고개를 저었다.
간접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남궁격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뜻이다.
남궁격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튼 십마가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라니? 구체적으로 누굴 가리키는 것이오?" "물론 단심백결회지요." 금수근은 말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단심백결회의 이름이 남궁격의 입에서 거론되는 것은 그가 일종의 복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일단 남궁격의 속셈을 알아보자는 뜻이다.
남궁격이 잠시 숨결을 가다듬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단심백결회를 이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단심백결회는 지금 선장이 없는 배나 같습니다.
물론 보주님을 비롯한 십방좌가 잘 이끌어 나가고는 있지만 정작 십마의 일사불란한 공격을 받는다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천노살성이 단심백결회를 천하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는데도 단심백결회가 그 일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알 만하지 않습니까?" "하긴 나도 그게 불만이오." 금수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천노살성의 일에 단심백결회는 너무도 무력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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