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잠깐 휘청하였지만 공력을 운용하자 이내 무게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복청양은 키가 커서 그녀가 업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백아아는 천천히 만독화원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만독화원은 백 종(種)이 넘는 독화(毒花)로 이루어진 화원이었다. 만독화원의 오묘한 점을 모르는 사람이 잘못 들어섰다가는 열 걸음도 걷지 못해 어지럼증을 느끼고 쓰러지고 만다. 그것은 공력이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전설상에 나오는 만독불침의 신체가 아닌 이상 만독화원의 독기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몸에 신물을 지니고 있는 백아아는 만독화원의 독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전 처음 업어보는 남자의 몸이었다. 복청양의 무게가 전신을 짓누르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백아아는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무독옹의 앞에 도착했다. "흥!" 무독옹이 나직한 코웃음소리를 내었다. 뭔가 그의 비위를 크게 거슬리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움직이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무독옹의 목옥은 지난번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약향이 진동했다. 한편에는 나무로 만든 침상이 있었는데 무독옹은 가벼운 손짓으로 그 침상을 가리켰다. "저기 눕혀라." 백아아는 복청양을 침상에 눕혔다. 그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으며 호흡이 가늘었다. 외양만 보아서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복청양을 살펴보는 무독옹의 얼굴은 시덥잖은 표정이었다. "어디 보자." 무독옹이 복청양의 몸을 감은 하얀 천을 좌우로 잡아 찢었다. 그러자 전신에 지렁이가 기어간 것 같은 끔찍한 상처가 나타났다. 상처는 어떤 것은 아무는 중이었으며 어떤 것은 화농하여 고름이 잡히고 있었다. "어머나!" 백아아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것아, 다친 사람을 처음 보느냐?" 퉁명스럽게 면박을 준 무독옹이 복청양의 손목을 잡았다. 백아아는 나무의자에 몸을 앉히고 무독옹의 진맥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무독옹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복청양의 손을 놓았다. "되었다." "어떻습니까?" 백아아가 다급히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초조감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흥, 너는 이 녀석을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무독옹의 음성에는 가시가 맺혀 있었다. 아직도 백아아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못한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소녀가 어찌……." 감정의 내면을 들킨 것 같아 백아아가 얼굴을 붉혔다. "하여튼 계집들이란 그저 얼굴이 반반한 사내를 보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노선배님!" "알았다, 알았어. 그저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뭐 틀린 말을 했느냐?" 무독옹이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나 백아아나 같은 주인을 모시는 신분이다. 이제는 지난날과 달라 동등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함부로 말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아무튼 걱정 마라. 이 녀석은 명이 길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보기에는 상당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만 이 녀석의 상처는 전부 외상이다. 영약을 쓰면 한 달 이내에 멀쩡한 몸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녀석이 복용한 산공독인데……." "산공독이라고요?" 백아아가 놀라움을 삼켰다. 그녀는 아직도 복청양이 중독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몰랐단 말이냐?" "몰랐습니다." "어리석기는…… 이 녀석이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지마가 구태여 내게로 데려가라고 했을 것 같으냐. 이 녀석의 외상은 일반 의원이라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시일이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대단치 않다. 하지만 산공독은 다스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노선배님이시라면 가능하겠죠?" "너는 내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신은 아니지만 설사 신이라도 독에 관한 한은 노선배님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하긴…… 내가 평생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부심이 있다. 더욱이 그것이 자신이 평생을 걸고 이룩한 일이라면 그 자부심은 타인의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다. 백아아는 교묘하게 그 자부심을 건드렸고 그것이 주효하여 무독옹은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산공독은 다스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일반적인 독물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주된 효과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나 사실은 독물의 약효가 클수록 다스리기도 쉬운 법이다. 하지만 산공독은 인체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으며 오로지 진기만을 흩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더욱 다스리기가 힘이 든다. 더구나 이 녀석은 산공독을 복용한 지가 오래 되어서 진기가 완전히 흐트러져 버렸다." "그럼 가망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누가 가망이 없다고 했느냐? 좀 어렵다는 것뿐이지. 적어도 아직은 내 손에서 해독하지 못할 독물은 없다." "다행이군요." 백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서 손을 쓰십시오."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늦었는데 조금 일찍 손을 쓰나 조금 늦게 손을 쓰나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런데 지마는 이 녀석에게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구나. 이 녀석이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할 텐데." "지마의 깊은 마음속을 소녀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 바로 그게 문제다. 지마의 교활한 속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너한테니까 말이다만 그 어른 곁에서 지마는 없어져야 할 해로운 물건이다. 두고 보아라. 지마는 그 교활함으로 인하여 결국은 그 어른을 망치고 말 것이다." "감히 누가 마주님을 망치겠습니까? 그런 말씀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는 것이 독밖에는 없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견문은 어린아이보다도 못하다. 하지만……." 무독옹이 의자를 끌어다 몸을 앉혔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는데 단황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그랬다. "자고로 머리를 쓰는 자는 머리에 망하고 검을 쓰는 자는 검에 망하는 법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 정도의 이치는 알고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그냥 먹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나이를 먹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긴단 말이다. 그러니 너도 내 말을 귀담아 들어두는 게 좋다. 지마는 비록 그 재간이 뛰어나지만 언젠가는 마주님을 망치고 말 것이다. 그는 해약이 없는 독을 지닌 독사와 같다. 주인에게 충성할 때는 더없이 든든한 수하가 되지만 언제든 머리를 돌려 주인을 물면 그 즉시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명색이 독을 다루는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뭐하다만, 뱀은 절대로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그 주인을 물기 전에 머리를 밟아 죽여야만 한다." "노선배님의 말씀은……." "지마가 마주께 해를 입히기 전에 기회를 봐서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독옹의 음성이 낮아졌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만독화원이었지만 그 역시 지마를 꺼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지마의 존재는 십마 중 그 누구보다도 이들의 가슴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마의 제거는 마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 마주님 역시 지마의 해악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손으로 그 일을 할 수 없기에 누군가가 대신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설마 그럴 리가……." "내 말이 허황된 것은 아니야." 무독옹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는 마주께서 어째서 지마를 꺼려 하면서도 가까이 두고 있는지 아느냐?" "그야 그들이 마주님께 큰 힘이 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무독옹이 말했다. "이 일은 알고 있는 사람이 극히 적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지. 사실 지마는 마주의 사부이다." "예?" 백아아의 음성이 높아졌다. 그만큼 그녀의 놀라움은 큰 것이었다. 지마가 마주의 사부라니! 누가 그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마뿐만이 아니다. 십마가 모두 마주의 사부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은 지난 삼십 년 전의 원한에서 비롯된 일이다. 천품신성에게 참패한 십마는 설욕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여 결국은 한 사람의 공동전인을 키워냈다. 그것이 바로 마주인 것이다." "그렇군요……." 그제야 백아아는 십마가 마주에게서 차지하는 비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십마는 오늘날의 마주를 탄생시킨 커다란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주는 그 그늘을 뚫고 우뚝 자라난 거대한 나무지. 하지만 그늘은 나무가 자라기 전에 폭풍우를 막아주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나무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늘은 오히려 자람에 방해만 될 뿐이다. 필요없는 그늘을 과감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그 나무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 오늘날 마주가 지니고 있는 한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럼 결국 노선배님께서는 마주를 위해 지마를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이시로군요?" "그게 내 생각이다. 지마뿐 아니라 때가 되면 십마 모두를 제거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일을 거론할 때가 아니다. 아직은 단심백결회의 세력이 너무 크니 일단 십마의 힘이 필요하다. 지금은 있는 힘을 하나로 합칠 때이지, 가지고 있는 힘을 분산시킬 때가 아니다." 무독옹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놓고 상당히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그 일은 다음에 다시 거론하자.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니 일단은 이 녀석을 살리는 데 주력하기로 하자. 지마가 이 녀석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이 녀석이 이용가치가 있는 모양이다." "천노살성은 언제 그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장담하지 못한다. 외상을 치료하는 것은 환자의 체력과 의지, 그리고 치료하는 자의 의술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이자가 일단 내 손에 들어왔으니 보름을 넘기지 않고 일어나게 만들 수 있다." "그럼 산공독은요?" "그게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역시 사흘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산공독 하나를 사흘 이내에 해독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어찌 독을 만진다고 할 수 있겠느냐." 무독옹의 음성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사람이었다. '복공자…….' 백아아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복청양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비록 저런 모습이지만 그가 무사할 거라는 얘기를 듣자 마음이 놓였다. '내게 있어 저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백아아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무독옹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저 복청양을 치료하는 데 전력을 투입해야만 한다. * * * 열흘이 지났다. 그 사이 복청양은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무독옹의 장담처럼 그가 입은 상처는 전부 외상이었다. 그러기에 무독옹이 영약을 쓰자 금방 상처가 아물었고 상처가 아뭄에 따라 체력도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회복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백아아의 정성스런 간호였다. 백아아는 무독옹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만독화원을 떠나지 않고 복청양을 간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녀가 복청양에게 기울이는 정성은 무독옹이 옆에서 보아도 시샘이 날 지경이었다. '저것이 내 며느리가 되었더라면…….' 백아아의 곰살맞은 손길을 보면서 무독옹은 그런 생각으로 배아파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궁격의 암수에 걸려 복용한 산공독도 완전히 회복이 되어 복청양의 공력은 팔 할 이상이 돌아와 있었다. 당장 움직여도 지장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복청양은 침상에서 털고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는 깊은 내상을 입은 사람처럼 내내 허공을 보며 침상에 누워 있었으며 어쩌다 백아아가 말을 걸어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길도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저 녀석은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언젠가 무독옹이 백아아에게 불쑥 던진 말이었다. 겉에 입은 외상보다는 마음속에 입은 상처가 커서 얼른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야. 스스로 극복하고 일어나야지. 하지만 저러다간 저 녀석은 폐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지마가 저 녀석을 어디에 이용해 먹으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아무런 쓸모도 없어질지도 모르겠군." 그런 말을 하면서 무독옹이 킬킬 웃었다. 그는 복청양이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보다 지마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 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백아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복공자는 어쩌면 사부들의 죽음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괴로워하는지도…….' 백아아는 몇 번인가 사부들의 죽음을 화제로 올리려고 했으나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무독옹의 말마따나 그것은 그녀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복청양이 스스로 극복하고 일어서기 전에는. 밤이 깊다. 어디선가 밤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산에서 듣는 밤짐승의 울음소리는 공연히 으스스한 기분을 안겨 준다. 그것은 무공의 고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하지만 복청양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밤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려서부터 산에서 생활해 온 그가 아닌가. 언제나 밤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짐승들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만 듣고도 그것이 어떤 짐승의 울음인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복청양은 침상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불이 꺼진 방안은 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도 백아아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새로 마련한 침상에 몸을 눕히고 저쪽에서 잠들어 있다. 하루 종일 그를 간호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무독옹은 집에 없었다. 그는 전서구의 연락을 받고 사흘 전에 집을 나갔다. 전서구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그는 모르지만 백아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묻는다면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을 것이나 그는 묻지 않았다. 그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부님…….' 천산오조. 백아아는 그가 그들의 죽음을 모르고 있는 줄 알지만 그는 안다. 사부의 마지막 유언을 그가 듣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었을까. '나 때문에 사부님들이 모두 돌아가셨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도 나 때문이다. 내가 천산오조의 제자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버님의 불행은 예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걸 알지 못했다. 그저 이 모든 일들이 운 나쁘게 우리에게 닥쳐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마의 노회하고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지마는 그를 보며 비실비실 웃고 있었다. '지마…….' 복청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만은 용서하지 않겠다.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은 나이지만 너만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너만은 내 손으로 꼭 죽이겠다.' 만일 지마가 그의 이런 결심을 안다면 꽁꽁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부님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비록 지마의 계획에 의해 나를 가르쳤지만 내게 대해준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분들이 베풀어준 은혜를 잊는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다.' 천산오조와 함께 산에서 생활하던 시절은 진정 행복했다. 하지만 그 좋은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언제나 물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은 혹독한 현실뿐이다. 복청양은 머리를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하면서 몸을 뒤척였다. 이대로 영원히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그것은 밤바람 특유의 냉기였다. 산의 습한 기운을 머금은 냉기가 그의 전신을 덮고 있는 것이다. 복청양은 눈을 떴다. 무슨 소리인가가 들렸다. 바람소리였다. 바람이 문을 흔드는 소리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바람이 그 문을 요란하게 흔들고 있었다. 덜컹! 덜컹! 복청양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어쩌면 밤바람의 냉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 흔들리는 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복청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움직였으므로 전신이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파왔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눈앞이 환하다. 짙은 어둠이 사라지고 시야가 탁 트였다. 작은 목옥 안의 정경이 그대로 보일 정도다. 백아아가 안에 없다는 것조차 쉽게 알 수 있었다. 날이 밝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방이 온통 붉었다. 그리고 더운 열기가 느껴졌다. 붉은 기운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목옥을 온통 휘어감고 있었다. '불이다.' 복청양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만독화원이 불타고 있다!' 원래 살아있는 식물은 불에 잘 타지 않는다. 그런데도 만독화원은 불길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길이 훨훨 춤을 추며 만독화원을 삼켜버리고 목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목옥을 삼킬 듯한 기세였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사람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여자의 음성이었다. 쨍쨍한 것이 백아아의 음성이 분명했다. 그녀가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간간이 폭음소리도 섞여서 들려왔다. 장력과 장력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복청양은 그제야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만독화원에 침입해 온 것이다. 침입자는 만독화원으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자 밖에서 불을 놓은 모양이었다. 그 불길이 만독화원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백아아는 그 침입자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누굴까? 백소저가 고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의 고수인 모양이군.' 복청양은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비록 공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상처도 아물었다지만 오랫동안 침상에 누워 생활했기 때문에 걷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심한 어지럼증이 몰려온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아 어지럼증은 사라지고 걷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복청양이 목옥의 문가로 나갔을 때였다. 문득 눈앞에 무엇인가가 번뜩하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누구요?" 복청양은 얼떨떨해서 그 사람을 보았다. 여인이었다. 중키에 평범한 몸집이었지만 그 이상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전신에 헐렁한 흑의를 걸치고 얼굴은 두터운 면사로 가리고 있었다.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어서 몸 밖으로 노출된 신체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두터운 면사를 뚫고 쏘아지는 그녀의 안광이 예사롭지 않았다. "복청양." 면사여인이 조금 웅얼거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나를 따라오거라." "당신은 누구요?" 복청양은 물으며 두 손에 공력을 모았다. 여차하면 이 여인과 일전을 겨룰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런 복청양의 마음을 읽은 듯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나는 너의 적이 아니다." "적이 아니라니? 그러면 친구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면사여인이 말했다. "내가 누구냐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움직일 수 있겠느냐?" "아직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오." "그럼 됐다. 가자." 면사여인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흑의는 듬성듬성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만독화원을 뒤덮은 불길을 뚫고 들어오느라 옷이 탄 모양이었다. 복청양은 더 머뭇거리지 않고 여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몰랐고 적이 아니라는 말도 믿지 않았다. 적이 아니라면 친구라는 뜻인데 지금의 그에게 친구라는 말을 사용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그것은 그가 이 만독화원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청양은 잠자코 여인의 뒤를 따랐다. 목옥에서 나오자 강렬한 불길이 그를 덮쳤다. 만독화원을 뒤덮은 불길은 생각보다도 대단한 것으로, 사방을 온통 열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 연기가 가득했으며 그 연기는 견디기 힘든 악취를 풍겼다. 머지않아 저 불길은 만독화원과 목옥을 재로 변하게 만들 것이다. 무독옹이 평생을 걸려 이룩한 진귀한 것들이 모두 재로 변할 것이다. 무독옹이 알면 기절을 할 일이었다. "무엇 하느냐?" 면사여인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복청양의 눈길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불길에 온통 뒤덮이고 재가 풀풀 날아다니는 바닥에 백아아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부상을 입었는지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은 꼭 감고 있었으며 안색은 지극히 창백했다. 입가에는 가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별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잃은 게 분명했다. "백소저는 죽었소?" 복청양이 면사여인을 돌아보며 사납게 물었다. "그렇지는 않다. 다만 의식을 잃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 이대로 놓아둔다면 백소저는 분명히 죽을 것이오." "그렇겠지." 면사여인이 별다른 감정의 동요없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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