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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계약 #17장(2)


 



근처에 있는 분위기 좋은 비스트로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크지 않아서 소란스럽지 않고 테이블마다 비치된 조명 장식이 어두운 공간을 운치 있게 밝히는 곳이었다.



“여기 마음에 드네요. 조용하고.”


“다행이군.”



주문을 마친 정혁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조명 때문인지 더 부드러워 보였다. 정혁이 팔을 뻗어 테이블 위 희민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



손깍지가 얽혀 드는 모습을 희민이 가만히 바라봤다. 맞잡은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손을 잡게 된 이후 정혁은 수시로 손을 잡았다. 

손을 잡거나 가만히 손깍지를 끼는 자잘한 행동들 속에 그의 체온에도 어느새 익숙해진 것 같았다.



“그땐 안에만 있어서 답답했을 거 같아서.”



정혁의 말에 희민의 시선이 손에서 그의 얼굴로 옮겨졌다. 잠시 그를 보던 희민이 말했다.



“답답하진 않았지만…… 한 번 나갔던 적은 있었죠. 왔던 날.”


“아아. 그날.”



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깍지를 낀 채 제 손을 엄지로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던 그녀가 눈을 살짝 가늘였다.



“당신이 말도 안 되는 걸로 화낸 거 알아요?”


“알아. 질투였어. 그건.”



의외로 정혁이 곧바로 인정하자 가느다랗게 떴던 희민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순순히 인정하네요?”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내 감정을 다 깨닫고 보니 알겠더군.”



정혁이 손깍지를 풀어 희민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왜 다른 남자들의 시선이 네 몸에 박히는 게 그렇게 싫었는지……. 네가 다른 남자를 쳐다보는 걸 보고 왜 그리 화가 났는지.”



그의 눈이 깊게 침잠했다.



그 자신은 그때 질투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엔 그저 분노로만 그 감정을 인식하고 있었다.

희민이 어떤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으니까.



“……미안했어. 그날은.”



정혁이 희민에게 똑바로 시선을 맞추고 사과했다. 

자신의 분노가 희민의 잘못 때문도 아닌데 그때 그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한 건 잘못된 행동이었다.



“네가 떠난 뒤 네 곁을 맴도는 시간 동안 그때의 내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어. 그러다가 알게 된 거야. 그날의 내 감정은 질투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합당한 이유나 이성 같은 건 완전히 배제된 채 오로지 감정적인 태도로 희민을 괴롭힌 건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때 당신의 질투를 보지 않았다면…….”



희민이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내 감정도 그렇게 커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


“그때 당신은 하나도 이해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그 순간엔 조금 인간같이 보였으니까요. 수수께끼 같은 모호하기만 한 사람에서 나름의 감정이 있고,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도 가지고 있는 남자라고.”




그날 처음으로 절정의 순간 사정을 참지 못한 그의 모습을 보고 더 그렇게 느꼈었다. 

사람은 의외로 말보다 행동에서 더 진심이 느껴질 때가 있다. 

평소와 다르게 그녀 안에서 거칠게 터뜨리던 그의 욕망이 그 순간 그의 그런 감정을 깨닫게 했었다.



희민의 말을 가만히 듣던 정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 감정은 너에게만 반응해.”



속삭이듯 말한 정혁이 잡고 있는 손을 놓고 희민의 얼굴로 팔을 뻗었다.



“육체도, 감정도 너에게만 반응하는 거야. 오직 한희민에게만.”


“…….”



그가 희민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특별하게 느껴졌었어. 혼자 조사하며 알아 온 시간들을 생각해 보면 실제로 만났을 때는 괴리감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자신의 감정을 정혁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희민은 조용히 들었다. 그가 어렵게 단어를 골라 가며 표현하려고 하는 모습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옆에 있었던 사람처럼, 그리워하던 사람처럼, 그렇게 오래 기다려 온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어.”



그는 습관처럼 말을 떠올리다가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희민은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 기다렸다.

그가 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혁은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자신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수려한 얼굴에 긴장이 비쳤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타인의 감정이나 기분 같은 거 궁금했던 적도 없고.”


“…….”


“그런 성격이 살아가는 데 불편하지 않았어. 오히려 편했지. 가까이 있는 차 실장 역시 비슷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 거야.”



희민은 그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이 비슷하게 느껴졌던 적이 몇 번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성격 때문에 더 비슷하게 느꼈던 걸까?



“나라는 사람 자체가 그런 사람이었어. 널 만나기 전까진.”



애피타이저가 나왔지만 두 사람은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는 정혁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났다.



“그래서 누군가가 날 궁금해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런 식의 감정을 전혀 몰랐던 거야. 왜 상대방이 궁금해지는지. 왜 상대방의 마음이 알고 싶어서 그렇게…… 미칠 것 같은지.”



계약이 종료되던 날 희민이 위험하더라도 그를 알고 싶다고 했을 때 정혁은 내심 무척 당황했다. 

그 전에 말해 둔 게 있었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러길 바랐다.

그래야만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으니까.



희민이 선을 넘어 버리는 순간 그는 계약을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그녀를 계속 옆에 두고 싶었기에 그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으니까.

희민이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 버리면,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서도 자신을 알려 든다면.



“그땐 계약을 종료해야 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라지 않았던 거야.”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희민은 선을 넘는 발언을 했고 그렇게 끝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몰랐다.



“널 내보낸 이후 모든 순간이 지옥 같아질 줄은 정말, 몰랐어.”



정혁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그때의 감정이 떠오른 듯 그의 곧은 눈썹이 찡그려졌다. 

희민에게 계약 종료를 말하고 서재로 돌아온 순간부터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게 느껴졌다. 

뒤늦게 든 실감이 어지러울 정도로 심장을 쿵쿵 울리게 만들고 있었다.



잡아야 해. 아니, 끝내야 해.



두 가지 마음이 치열하게 내부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알려 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희민은 이 계약 외의 다른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녀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마음은 그녀를 놓을 수 없다고 끊임없이 아주 깊은 내부에서부터 외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억지로 짓누르고 있는데 차 실장이 들어왔다.



“차 실장이 임신 확률이 더 높은 새로운 여자와의 계약을 권하는 순간 완전하게 깨달았어. 난 오로지 한희민만 원하는 거구나. 내 몸도, 마음도 단 한 여자에게 완전히 향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때까지는 무시하고 있던 마음이라는 것이, 감정이라는 것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북받쳐 올랐다.



듣고 있던 희민이 입을 열었다.



“왜 그때 잡지 않았어요?”



정혁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쳐 지났다.


“……무시했으니까. 사라질 감정이라 치부했어.”



사라질 감정이어야 했다. 

이런 식의 동요 같은 건 앞으로의 일에 전혀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치부가 될 뿐이다. 

한희민이 반드시 내 약점이 될 거라는 건 뉴욕과 한국을 하루 만에 오가는 그때 언뜻 느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나아지질 않는 거야. 그 감당할 수 없이 북받친 감정이…… 하루 종일 날 완전히 망쳐 놓고 있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한희민이 떠올라서 정말 돌아 버릴 정도더군.”



떠올리는 순간 육체는 한희민을 미친 듯이 원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조금씩 나아질 거라 생각했던 그 반응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심해졌다.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정신 차려 보니 네 곁을 맴돌고 있었어. 보기라도 하면…… 좀 나아졌으니까.”


“…….”



희민이 그의 가라앉은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표현하려 노력하는 건 처음이었다.



제 뺨에 닿아 있는 그의 손 위에 희민이 조용히 제 손을 덮었다.



“당신이 감정 표현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아니 어쩌면  감정 그 자체에도 낯설어하는 사람이라는 거.”



그의 손등을 보드라운 손바닥으로 덮은 채 희민이 정혁과 시선을 마주쳤다.



“서운했던 지난 일들은 떠올리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당신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 줘요.”


“…….”


“그 노력만으로도 나는 정혁 씨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녀의 섬세하고 투명한 눈동자가 은은한 조명에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빛을 내는 그 눈을 정혁이 깊이 응시했다.



“나머지는 천천히 해 나가면 되죠.”



희민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요.”



정혁이 자신의 감정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조급함을 느끼고 있다는 게 방금 전 그의 말들에서 느껴졌다.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더 이상은 그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희민이 그의 손을 뺨에서 내려 테이블 위에서 가만히 잡았다.



“손만 잡고 있어도 이렇게 설레는 기분, 나도 처음이니까요.”



아마 정혁도 처음 느끼는 그 모든 감정들에 당황한 거겠지. 



사람은 처음 겪는 일에는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 혼란을 느끼는 그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감정이란 걸 거의 모르고 살았다면 더 그럴 거였다.



“…….”



미소 짓고 있는 희민을 정혁이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의 일렁이는 눈동자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녀도 마주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정혁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만큼 설레진 않을 거야.”



정혁이 그녀의 잡은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촉, 그녀를 잡기 위해 나타났을 때와 똑같은 행동에 희민이 눈을 깜빡였다. 

손등에 입술을 댄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시선을 맞춰 왔다.



아…….



순간 희민은 그의 눈동자에서 지독한 뜨거움을 느꼈다.



“그때 말했듯, 이젠 다신 놓치지 않을 거야.”



소유욕 어린 목소리로 말한 그가 천천히 손을 놔 줬다. 풀려난 손에도 그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내가 너무 배고프게 만들어 버렸군. 식사부터 하지.”


“……네.”



방금 그가 놔 준 손으로 포크를 잡은 희민이 작게 대답했다. 

그의 열기가 맺힌 눈동자가 심장을 떨리게 해서 식욕이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다른 욕망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뜨겁게 조여들게 만들어서 희민은 일단 정혁이 따라 준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희민은 와인을 머금으며 심장의 떨림을 남몰래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정혁이 희민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희민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결 좋은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 넘겼다.



“와인을 마셔서 그런가, 좀 피곤하네요.”



정혁이 희민의 얼굴을 살피듯 내려다봤다.



“시차 때문일 수도 있을 거야.”


“그런가?”



희민이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정혁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그가 곧 전화를 받았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바로 옆에서 개의치 않고 통화하는 정혁 때문에 업무적인 전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짧게 통화를 마친 정혁이 다시 희민의 안색을 살폈다.



“많이 피곤한가?”


“아뇨. 그건 아니지만…….”



침실을 향해 걸어가던 희민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정혁 씨. 혹시 여기에서 산 적 있어요?”



그녀의 말에 정혁이 시선을 내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지금 생각났는데 전에 왔을 때도 궁금했거든요. 완벽한 미국식 발음이라.”



“일을 오래 했으니 살았다고 볼 수 있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그를 본 희민이 다시 물었다.



“당신 부모님도 여기 계세요?”


“…….”



정혁이 말없이 보고 있자 이상함을 느낀 희민이 말을 덧붙였다.



“한국에 계신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그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 저택에도 정혁 혼자 살고 있었고 왕래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어서 식구들이 미국에 있나 갑자기 생각이 들어 물은 거였다.



희민을 잠시 내려다보던 정혁이 입을 열었다.



“부모님은 안 계셔.”


“아…… 그랬구나.”



그래서 들은 적이 없던 거였다는 걸 깨닫자 희민은 괜한 걸 물어봤나 후회가 됐다.



“그럼…….”



뭔가 말하려던 희민이 침실로 들어서다 문득 멈춰 섰다.



세상에, 이게 다…….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흔들렸다. 침실이 온통 장밋빛이었다. 

화사한 색감의 장미 꽃잎들이 침대 위와 테이블, 소파, 러그 위, 그리고 바닥까지 온통 뿌려져 있었다. 

신경 써서 장식된 꽃잎들과 분위기 있게 배치된 수많은 초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분위기 있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장미로 가득한 침실을 바라봤다. 

정혁은 이런 이벤트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됐었다. 그래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놀란 것일지도 모른다.



정혁이 뒤에서 커다란 팔로 그녀를 안았다.



“난 평생을 목적으로만 살았어.”



희민의 귓가에 정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이든 무엇이든 애착을 가진 대상이 없었어.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지만 사람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었고.”


“…….”



희민은 등 뒤에 닿아 있는 그의 단단한 몸을 느끼며 그가 자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도 정혁만큼은 아니지만 엄마 외엔 애착을 가진 사람도 없었고 오로지 성공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살아왔었다. 

정혁은 부모님이 안 계셨기에 더 애정의 상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정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서 당신이 날 당황하게 했어. 당신이 내게 온 뒤 드러내진 않았지만 난 늘 당황하고 있었어.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성욕에,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던 감정에…….”



귓가에 그의 깊은 한숨이 느껴졌다.



“그 모든 게 날 어쩔 줄 모르게 만들더군. 한희민만 떠올리면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어딘가 들뜨고 열이 났어.”



조용히 듣고 있던 희민이 자신을 안고 있는 정혁의 팔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나도 그랬어요. 꼭 감기 같았어. 열도 나고, 어지럽고…….”


“…….”


“계약이 끝났을 때 난 용도 폐기 된 쓰레기가 된 느낌이었어요. 그게 너무 싫고 상처가 깊어서 다신 당신과 얽히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



그녀를 안고 있는 정혁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희민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 굳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을 크게 들썩거린 정혁이 잠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미안해. 희민아.”



“그래서 힘들어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결국은 당신에게 향하고 있었어요. 내 발이…… 내 마음이, 내 모든 게 전부 다.”



희민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를 안은 채 움직임이 없던 그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때…… 한희민이 날 보지 않는 시간 동안, 혼자 많은 걸 상상했어.”



정혁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이번엔 어떻게 해야 놓치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그 전의 일을 만회할 수 있을지 매일 고민했어. 누군가로 인해 머리가 가득 찬 상태로 오직 그 생각만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어.”


“…….”


“기다리는 동안 생전 보지도 않던 로맨스 영화들도 봤어. 그 전엔 어쩌다 TV에서 하는 걸 지나가다 보게 되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여자 주인공을 한희민이라고 생각하니 전혀 다른 감정이 되더군. 모든 여주인공을 한희민이라고 생각하며 봤어.”



희민이 그의 팔을 풀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럼 이거…… 영화에서 배운 거예요?”



시선을 맞춘 희민이 물었다.



“거기선 여자가 좋아하던데, 마음에 들지 않나?”



정혁이 긴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의 반응을 살피는 그의 걱정이 담긴 눈빛에 희민은 가슴 한편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을 위해 서정혁이 로맨스 영화까지 보며 공부했다니.



입술 끝을 끌어 올린 희민이 정혁의 셔츠 위로 손을 가져갔다.



“거기 남주인공도 당신처럼 미남이었어요?”



그녀의 질문에 정혁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둡게 잠겼다. 그 눈에 시선을 맞춘 희민이 그의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었다.



“당신처럼…… 몸도 좋고?”



위험하고 야릇한 미소가 희민의 입술에 걸렸다. 손바닥 안에 느껴지는 근육질 가슴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의 눈썹이 찌푸려지며 탁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여주인공보다 한희민이 아름다운 건 확실해.”



강렬한 눈동자에 희민이 입술을 휘어 올린 채 한 걸음 물러섰다.



“거기 잠시만 서 있을래요?”



몸매를 드러내는 원피스를 입은 희민이 몇 걸음 물러서 침대 앞에 섰다. 

흐드러지게 펼쳐진 장미 꽃잎과 희민의 여성스러운 몸의 실루엣이 촛불의 은밀한 빛에 비쳤다.



“지금부터 당신이 나에게 말하는 대로 따를 거예요.”



정혁에게 말한 희민이 도발적인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게 어떤 거든지.”


“…….”



야릇한 뉘앙스를 흘리는 말에 똑바로 선 정혁의 얼굴이 굳었다. 

목울대를 크게 꿈틀거린 그가 짐승처럼 눈을 번득였다. 

희민은 그의 지시를 기다리듯 가만히 서 있었다. 

어둡게 잠긴 시선을 박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우선 원피스를 벗어.”



희민이 머리칼을 한쪽으로 치우고 손을 등 뒤로 뻗었다.

원피스 지퍼를 내린 뒤 아래로 벗어 내자 브래지어와 팬티, 그리고 스타킹만 신은 몸이 드러났다. 

검은 스타킹 안에 감싸인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시선으로 훑어 내린 정혁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스타킹도.”



그녀가 그의 말대로 따르자 미끈한 맨다리가 드러났다. 그가 혀로 입술을 축이고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것도 전부 벗어.”



등 뒤 후크를 풀고 브래지어를 벗어 내자 탄력적인 젖가슴이 허공에서 출렁거렸다. 

허리를 숙인 희민이 손바닥만 한 팬티를 다리 아래로 끌어 내렸다. 

완전한 나신이 된 희민의 몸에 정혁의 어둡게 물든 눈동자가 박혀 들었다.

시선으로 핥아 내듯 집요한 눈길에 희민의 동그란 유두가 허공에서 땡땡하게 곤두섰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희민의 숨결도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하나씩 옷을 벗어 낼수록 묘한 긴장과 흥분이 그녀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잡아먹을 듯 시선을 박고 있던 정혁이 느릿하게 말했다.



“침대 위에 앉아.”



희민이 순순히 따랐다. 

하아, 엉덩이와 은밀한 골짜기에 닿는 장미 꽃잎의 감촉이 야릇하게 피부로 느껴졌다. 

희민이 더운 숨을 흘리는데 정혁이 미간을 좁혔다.



“하…… 너무 아름다워.”



허스키한 음성으로 감탄을 내뱉은 정혁이 가슴을 크게 들썩거렸다.



“그대로 날 보면서 다리를 벌려.”



모아져 있던 그녀의 하얀 두 무릎이 천천히 양옆으로 벌어졌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시선을 향한 그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후우.”



정혁이 자신의 벨트를 풀더니 바지 버클을 풀고 드로어즈를 찢을 듯 발기해 있는 페니스를 꺼내 잡았다. 

선액이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근육 덩어리를 커다란 손으로 거머쥔 그가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손으로 가슴을 잡아.”



강렬한 시선을 박은 정혁이 하는 말에 희민이 두 손을 제 가슴 위로 가져갔다. 

탐스럽게 솟아 있는 둥근 젖가슴을 가느다란 손가락을 펴서 가만히 쥐자 손가락 사이로 유두가 툭 불거졌다.



“하아.”



그의 시선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제 젖가슴을 쥐고 있으니 희민의 입술에서 더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관능적으로 흐트러진 육체를 노려보며 정혁이 그의 굵게 휘어 올라간 페니스를 손으로 천천히 쓸어 올렸다.



“주물러 봐. 그래…… 그렇게.”



희민이 제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하자 동그란 모양이 야릇하게 흐트러지며 땡땡하게 피가 몰린 유두가 손가락에 비벼졌다.



“아…… 아아.”


“시선은 날 봐.”



희민이 신음을 흘리며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까는데 정혁이 저지했다. 

흐릿하게 물든 희민의 눈동자가 다시 그를 향하자 정혁이 강렬하게 시선을 포박했다.



“한 손을 아래로 내려 봐.”



정혁이 핏대가 툭툭 불거진 사나운 음경을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가 내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욕망으로 짓눌린 듯 낮게 깔렸다.



희민은 정혁을 보며 쥐고 있던 젖가슴 한쪽을 놓고 천천히 제 몸을 훑어 아래로 내려갔다. 

손을 따라 내려가는 타오를 듯한 눈동자가 희민의 목 안을 바짝 조여들게 했다. 

그녀의 손끝이 오목한 배꼽을 지나자 정혁의 턱이 단단하게 굳는 게 보였다.



“더…… 좀 더 아래로.”



탁하게 잠긴 목소리가 명하는 대로 희민의 손이 아래로 향했다. 

벌리고 있는 허벅지 사이 까끌한 음모에 손가락 끝이 닿자 그녀의 손이 멈칫거렸다.



“거기야. 거길 벌려서 보여 줘.”



정혁이 숨을 몰아쉬며 머뭇거리는 희민의 손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새까맣게 잠긴 듯한 묘한 빛깔의 눈동자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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