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천년 7-8장
第7章 원시천존(元始天尊)의 유물(遺物)
현음마모(玄陰魔母)가 남긴 글은 실로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때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末期)! 혼탁하기 이를 데 없던 당시 강호에는
한 명의 절세기인(絶世奇人)이 있었다. 그는 상고시대의 온갖 무공을 수습하
여 중원무림의 터를 닦았다고 알려진 일대기인이었다.
-원시천존(元始天尊)!
바로 이 인물이었다.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의 첫째로 꼽히는 원시천존은 그러나 너무나도
오래전의 인물이라서 당금무림에는 그런 인물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
졌을 정도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원시천존은 인간이 이를 수 었는 최후경기까지 다다랐던 인
물로서 그의 무예는 너무도 깊고 넓어서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원시천존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태양신군(太陽神君)!
-현음마모(玄陰魔母)!
바로 그들이었다.
본래 원시천존의 절학은 기오막측하기 이를 데 없어 절세기재가 아니면 연마
할 수가 없었다.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원시천존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절기를 이어받을 재목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실패했다.
원시천존 자신은 천고에 보기 드문 기재였던 바, 그런 원시천존 같은 기재가
같은 하늘 아래 또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해서 원시천존은 차선책으로 그나마 인중용봉(人中龍鳳)이라할 수 있는 두
명의 남녀를 제자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무공을 분할하여 전수했다. 즉, 남제자에게는 양강
(陽强)한 절기를, 여제자에게는 음유(陰柔)한 절기를 각각 전수한 것이다.
두 사람은 원시천존에게 절기를 전수받은 후 무림에 출도하여 천하를 주유했
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삼초지적(三招之敵)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원시천존의 무공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무림에 나온 태양신군과 현음마모는 각기 하나의 문파를 세웠다.
태양신군은 숭양무벌(崇陽武閥)을, 현음마모는 현음마궐(玄陰魔闕)을 각기 세
웠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무림에는 정사(正邪)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태양신군과 현음마모에 의해 비로소 정사(正邪), 그리고 흑백(黑
白)으로 나뉘어져 무림판도를 구축하게 되었다.
본래 동문(同門)인 두 남녀는 서로를 사랑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나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보다 더한 호승심(好勝心)이었다.
남에게 결코 지기 싫어하는 성격!
그것은 연인 사이라 해도 다를 리 없었다. 서로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
에 두 사람 사이는 결국 파경(破鏡)을 맞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철천지한을 지닌 원수처럼 대립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태양신군과 현음마모는 동시에 스승
인 원시천존으로부터 호출을 받게 되었다.
원시천존은 드디어 천수(天壽)를 다하고 우화등선(羽化登仙)하게 되었으며,
해서 세상을 벗어나기 전에 두 제자를 불러 유언을 남기려 한 것이다.
스승의 거처로 달려간 태양신군과 현음마모에게 원시천존은 두 가지의 물건
을 내놓았다.
-태극보정(太極寶鼎)!
-초연심결(超然心訣)!
바로 그것이었다.
태극보정(太極寶鼎)!
그것은 원시천존의 상징이었다.
즉, 원시무맥(元始武脈)의 종사(宗師)를 상징하는 보물이 바로 태극보정인 것
이다.
본래 태극보정은 상고의 성왕(聖王) 순(舜) 임금이 구주(九州)를 순행(巡行)한
뒤 만들었다는 신주구정(神州九鼎)의 하나로서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것이었
다.
하지만 신주구정은 주(周)왕조가 흉노(匈奴)의 침공을 받아 동천(東遷)하는
과정에서 모두 유실(流失)되고 말았다.
그 신주구정 중 하나가 어찌어찌하여 원시천존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것의 이름이 태극보정이다. 태극보정을 얻은 원시천존은 그것을 자신의 징
표로 삼았다. 해서 태극보정을 물려받는 자는 명실상부한 원시천존의 후계자
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극보정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아무런 묘
용이 없었다.
초연심결(超然心訣)!
그것은 실로 엄청난 유혹을 지닌 것이었다.
즉,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의 초절기예의 정수가 담겨져 있는 바, 그것을 연
마해내는 자는 제 이의 원시천존이 될 수 있었다.
원시천존은 두 제자에게 태극보정과 초연심결 중 한가지씩만 선택하라고 말
했다.
이에 두 남녀는 깊이 고심했다. 상징적인 태극보정과 실질적인 초연심결은
실로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오랜 고심 끝에 태양신군과 현음마모는 두 보물들 중 한가지씩을 선택
하게 되었다.
즉, 태양신군은 태극보정(太極寶鼎)을, 그리고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선택하
게 된 것이었다. 태양신군은 일신의 절예를 습득하는 것보다는 존경하는 스
승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했다. 해서 그는 태극보정을 선택했다. 반면 현음마
모는 사형인 태양신군을 이겨보겠다는 호승심에 초연심결을 선택했다.
과연 두 사람 중 누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 * * *
-어리석구나, 종선(宗仙)이여! 네 자신의 그릇도 모르고 감히 스승님의 초극
절예를 넘보다니!
현음마모의 유언은 깊은 회한과 탄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현음마모 종선(宗仙)!
그렇다. 결론은 그녀의 패배였다.
그녀는 초연심결을 익히기 위해 현음마궐조차 해산하고 이곳 현음동천(玄陰
洞天)으로 은둔했다. 오로지 원시천존의 최후절예인 초연심결을 익히기 위해
서, 하지만 현음마모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된 것에는 오랜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원시천존이 남긴 심득은 너무나 난해했다. 무려 백 년 간의 깊은 고뇌에도
불구하고 현음마모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검한이 본 두루마리의 그림은 바로 원시천존이 남긴 최후 심득인 초연심결
의 도해(圖解)였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스승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분은 어리석은 제
자로 하여금 그 분으 기예를 수천 년 이후의 시대에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 분은 내가 초연심결을 연마하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체하고 이곳에 은거할
것까지도 모두 미리 예견하셨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의 운명 역시 저 위대한 원시천존(元始天尊) 사부님
의 안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라!
이검한은 해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내가 누란왕후(樓蘭王后)를 통해 이곳을 발견한 것도 모두 원시천존이란 분
의 안배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
그는 믿기지 않는 듯 망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는 원시천존이라는 상고기인의 깊은 뜻에 깊은 경외감을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
-이제 본녀가 네게 지우려는 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리라. 그대의 시대에
는 악마(惡魔)의 화신(化身)이 등장할 것이며 그 악마의 분신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초연심결(超然心訣)을 기필코 완성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네게 지우려는 짐이니라. 내 사랑하던 이의 후손이여!
현음마모의 유언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유언의 마지막 구절을 읽은 이검한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 무슨 말씀이시지? 내가 저분이 사랑하던 분의 후손이라니? 」
그는 멍한 표정으로 현음마모의 시신을 올려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그의 뇌리를 스치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아연실색했다.
「 설마 내가 태양신군이라는 분의 후손이란 말인가? 」
이검한의 머리 속은 갑자기 혼란에 휩싸였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란 말인가?)
그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비록 스스로 비천하다 자탄했지만 현음마모는 고금제일여고수로서 조금도 손
색이 없는 능력자였다. 죽음에 이르러서기는 하지만 그년는 천기(天機)를 읽
을 수 있는 능력마저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천기를 읽게 되자 그녀는 비로소 사부 원시천존의 심오한 안배와 이천여 년
이 흐른 후 이곳 현음동천에서 벌어질 일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해서 이곳에 자신이 현음마공(玄陰魔功)을 익히는 데 이용했던 태백한정(太白
寒精)을 준비해놓아 이검한이 화망단정의 열독에 타죽지 않도록 안배를 한
것이다.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분이니 내가 태양신군의 멈 후손이라는 말씀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검한은 새삼 현음마모의 유해를 올려다 보았다.
(난 누구일까? 어떤 경로로 태양신군과 인연이 닿아있는 것일까?)
상념에 빠진 이검한은 현음마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음 속에 마치 선녀(仙女)와 같은 자태로 부유하듯 떠있는 현음마모의 신비
한 모습은 지난 이천여 년 동안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으리라.
* * * *
밤[夜]이다.
신강의 광활한 사막 위로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과벽(大戈壁)!
수천 리를 동서로 이어진 그 거대한 단애는 적막 속에 거대한 모습을 누이고
있다.
막 서쪽 하늘로 스러져가는 가녀린 초승달이 창백한 빛을 대과벽 일대에 흩
뿌리고 있었다.
쐐애애액!
문득 서쪽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밤하늘을 가르며 질풍같이 대과벽을 향해
날아왔다.
화라라락!
밤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대과벽 끝으로 내려서는 그 인물은 삼십대 초반
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장한이었다.
무쇠로 빚은 듯 강건한 체격을 지닌 그 인물은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경장을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검붉은 색의 철부(鐵斧)를 한 자루 차고 있었다.
흑의장한은 두 팔에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다.
두터운 천에 감싸인 그것은 한 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십 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눈같이 새하얀 피부에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였다. 한눈에 보
아도 그 소녀는 서역의 색목(色目) 계통의 피를 이어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수혈(睡穴)이 찍힌 듯 장한의 품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 헉! 헉! 」
장한은 먼길을 달려온 듯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그런 그의 전신은 온통 땀
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이윽고 대과벽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흑의장한은 빠르게 한차례 주위를 둘러
보았다.
「 여기로군! 」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두 눈은 초조함과 죄책감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소신(小臣)은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는 잠든 금발소녀를 내려다 보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 천애고아인 소신 포대붕(包大鵬)에게는 안사람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소중
합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 음흉한 철목풍(鐵木風)의 요구를 듣지 않
을 수 없었습니다. 」
그는 비통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포대붕(包大鵬)!
이것이 흑의장한의 이름이었다.
그는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녀 신강 일대에는 그의 용맹함이 자자하게 알려
진 역사(力士)였다. 또한 신강의 제부족들은 그를 철부신장(鐵斧神將)이라 부
르며 경원했다.
그 포대붕에게는 한 명의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고아내(高娥乃)라는 이름을 지닌 정숙한 여인인데 그녀가 얼마 전 한 명의
흉한에게 납치 당하고 말았다. 고아내를 납치한 흉인은 포대붕에게 아내를
구하고 싶으면 한 명의 소녀를 납치해 오라고 협박했다.
그 소녀는 다름아닌 포대붕이 섬기는 여주인의 딸이었다.
포대붕은 번뇌에 빠졌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주인을 배신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몇날 며칠을 갈등으로 고민하던 포대붕, 결국 아내에 대한 염려가 주인에 대
한 충성심을 이겼다. 만일 자신이 흉한의 협박을 모른 척한다면 아내인 고아
내가 어떤꼴을 당할지는 명약관화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는 숱한 사내들
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해서 포대붕은 눈물을
머금고 소주인(少主人)을 납치하고자 마음 먹었다.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가 바로 포대붕이 섬기는 주인의 딸이었
다.
-철산산(鐵珊珊)!
이것이 금발소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저 위대한 정복자 성길사한(成吉思汗)의 피를 이은 고귀한 신분이었
다.
비록 원(元)제국은 붕괴되었지만 황금씨족(黃金氏族)이라 불리는 징기스칸의
핏줄들은 여전히 새외변경의 민족들에게 최고의 공경과 대우를 받고 있다.
포대붕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내려다 보며 죄
책감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철목풍이 제 아무리 사갈 같은 독심을 지닌 흉악자라고 해도 징키스칸님의
핏줄을 이은 산산(珊珊) 공주님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소신의 아내만 구해내면 저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철목풍
을 쳐죽일 것입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했다.
바로 그때였다.
「 흐흐! 그래도 제법 현명하구나, 포대붕! 」
돌연 포대붕의 뒤에서 한 가닥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포대붕은 깜짝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 보았다.
언제였을까? 포대붕의 뒤쪽 삼 장 정도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짙푸른 장포를 두른 사십대 중반의 장한인데 아주 음침한 인상을 지
녔다.
이 자의 얼굴은 언뜻 보기에는 상당히 수려하다. 하지만 작은 눈자위가 쉴
새없이 움직이고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입술은 아주 얄팟하여 교활하고
잔혹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가 있다.
청의장한의 허리춤에는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한 자루의 반월도(半月刀)
가 꽂혀 있었다. 또한 그 자의 청포 소맷자락 밖으로 하나의 특이한 팔찌를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무쇠로 만든 팔찌였는데 팔찌위에는 한 마리
푸른 늑대(靑狼)가 칠보(七寶)로 상감(象嵌)되어 있었다.
푸른 늑대[靑狼]!
그것은 저 징기스칸의 상징이 아닌가?
「 철목풍! 」
청포인을 본 포대붕은 이를 부득 갈며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철목풍(鐵木風)!
그렇다. 그 자가 바로 포대붕의 아내 고아내를 납치한 장본인이었다.
철목풍은 음침한 눈으로 포대붕으로 품에 안긴 철산산을 주시했다.
「 후훗! 그 어린 계집이 바로 달단여왕(??女王) 나유라(羅維羅)의 딸이로군! 」
포대붕은 분노와 증오의 눈으로 철목풍을 노려 보았다.
「 그렇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산산 공주님을 모셔 왔으니 안사람을 내놓아
라! 」
그는 두 팔로 철산산을 꽉 안은 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 말에 철목풍은 음산한 눈빛을 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 약속은 지킨다. 본왕야(本王爺)는 장차 북원(北元)제국의 황제가 될 존
귀한 몸인데 약속을 어기겠는냐? 」
이어 그 자는 문득 뒤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히히힝!
직후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십여 필의 말들이 어둠 속으로 달려왔다.
말 위에는 포악한 인상의 장한들이 한 명씩 타고 있는데 맨앞쪽에서 달려오
는 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한 마리 끌고 오고 있었다.
사람이 타지 않은 대신 그 말의 고삐에는 누군가 두 팔이 묶인 채 질질 끌려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여보! 」
의복이 갈가리 찢긴 채 두 손이 묶여 끌려오는 그 여인을 본 순간 포대붕의
입에서 비통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파앗!
그는 분노와 안도의 마음이 교차되는 심정으로 급히 끌려오는 여인을 향해
마주 날아가려 했다.
「 잠깐! 」
콰르릉!
철목풍이 날카롭게 외치며 일장을 날려 포대붕을 저지했다.
「 철목풍! 네놈이·········! 」
포대붕이 이를 갈았지만 철목풍이 날린 막강한 잠경에 막혀 어쩔 수 없이 도
로 지면으로 내려섰다.
두두두! 히히히힝!
그 사이에 십여 필의 말이 장내에 이르러 멈춰섰다.
맨 앞쪽에서 말을 타고 온 장한은 말에서 뛰어내려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여
인에게 다가가 그 여인의 머리를 움켜쥐고 위로 쳐들었다.
축 늘어져있던 여인의 얼굴이 쳐들려졌다. 그녀는 후덕한 인상을 지닌 삼십
대 초반의 중년여인인데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 으으으! 」
여인의 무참한 얼굴을 본 포대붕은 치를 떨었다.
고아내!
그렇다. 말에 묶여 끌려온 여인은 다름아닌 포대붕의 아내인 고아내였다. 한
눈에 보아도 그녀는 잡혀있는 동안 모진 시달림을 당한 것 같았다.
아내의 무참한 모습에 치를 떠는 포대붕을 보며 철목풍은 음흉하게 히죽 웃
었다.
「 흐흐! 부부상봉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어린 계집을 본왕야에게 넘기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느냐? 」
「 죽일 놈! 」
포대붕은 분노를 금치 못하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하자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받아라! 」
파앗!
포대붕은 입술을 악물며 안고 있던 철산산을 철목풍을 향해 던졌다.
「 으핫하! 그래야지! 」
철목풍은 득의의 광소를 터뜨리며 날아드는 철산산을 급히 안아들었다. 그
자의 교활한 두 눈에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드디어 세조(世祖)께서 남기신 유물을 얻을 열쇠가 내 손에 들어왔구나!)
그 자는 득의만면하며 흥분의 빛을 지었다.
화라라락!
그 사이에 포대붕은 급히 말에 매여 끌려온 여인 쪽으로 날아갔다.
「 이런 쳐죽일········! 」
헌데 막 아내의 곁으로 달려간 포대붕의 입에서 분노의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찢긴 저고리 사이로 수밀도 같은 젖무덤과 허연 하복부가 그대로 드러나 보
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고아내의 아랫도리에는 실오라기 한 올 조차 걸
쳐져 있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무참하게 벌거벗겨진 아랫도리는 말의 뒤에 끌려오는 도중에 찢겨진 것이 아
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벗겨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명약관화했다. 고아내는 이미 수많은 사내
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힌 상태였다.
그녀의 온 몸에는 능욕당한 흔적이 너무도 역력했다.
포대붕은 극심한 분노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능욕당한 아내의 무참한
모습을 본 포대붕의 두 눈에 시뻘겋게 핏발이 섰다.
「 이 더러운 놈! 나는 그래도 네놈이 철목진(鐵木眞)님의 후손을 자처해서 약
속을 지킬 줄 알았다! 」
그는 급히 아내의 손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며 철목풍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하지만 철목풍은 지극히 태연했다.
「 물론 나는 약속을 지켰다! 」
그 자는 철산산을 안은 채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 나는 네 마누라의 목숨을 보장한 것이지 정조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
「 뭐······ 뭐라고? 」
포대붕은 어이가 없어 절로 말문이 막혔다. 철목풍의 그 파렴치한 말에 그는
돌로 자신의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 본왕야의 용맹스러운 수하들은 오랫동안 계집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그들
이 네 마누라의 몸뚱이가 필요하다는 데는 어쩔 수 없었지! 」
철목풍은 음흉한 음성으로 태연하게 말했다.
철목풍의 주위에 둘러서 있던 십여 명의 장한들도 키득거리며 고아내의 허옇
게 드러난 하체를 힐끔거렸다. 그자들도 고아내를 유린하는 데 동참했던 것
이다.
「 흐흐! 하여간 볼만했다. 네 마누라는 혼자서 내 부하들을 백여 명이나 즐겁
게 해주었으니까! 」
「 이······· 이 짐승만도 못한·········! 」
철목풍의 뻔뻔스러운 말에 포대붕은 치를 떨며 전율했다. 너무나 기가막혀
오공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포대붕에게 있어 당장 철목풍을 쳐죽이는 것보다 아내를 돌보는
것이 더 시급했다.
「 오냐!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의 골통을 박살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고 말
겠다! 」
그는 이를 갈며 급히 아내의 혈도를 문질러 주었다.
「 으으음! 」
포대붕이 내공을 주입하자 고아내는 미약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아내가 정신을 차리자 포대붕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 여보! 이젠 안심하시오. 내가 왔소! 」
그는 회한의 눈길로 고아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르르!
고아내는 눈을 부릅뜨며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경련했다.
무참히 능욕당하던 와중에서도 결코 잊지 않았던 남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
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사실은 기쁨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자신의 몸은 이미 숱한 사내들
에게 유린당해 더렵혀질 대로 더렵혀지지 않았는가?
그녀는 몇 명인가의 사내들이 자신의 몸을 올라타는 데까지만 기억하고 정신
을 잃었었다.
얼굴 위에 토해지던 발정난 사내들의 뜨겁고 역겨운 숨결, 무자비하게 파고
들던 이물질의 느낌, 유린당하는 자신을 둘러싼 채 낄낄대던 숱한 사내들의
모습.
「 컥! 」
다음 순간 고아내는 한소리 신음과 함께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해냈다.
토해진 핏속에는 잘려진 혀바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수치심
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의 앞에서 스스로 혀를 깨문 것이었다.
「 여·········· 여보! 」
포대붕은 아연하여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고아내의 머리가 힘없이 옆으로 구른 후였다.
「 이········ 이런! 」
포대붕은 자결한 아내의 시신을 바라보며 전신을 푸들푸들 떨었다.
「 쯧쯧! 어리석은 계집이로군. 강물에 배가 지나간다고 흔적이 남기라도 한단
말인가? 죽긴 왜 죽어! 」
보고 있던 철목풍이 끌끌 혀를 찼다.
「 뭐········ 뭐라고? 」
아내의 갑작스러운 자결에 망연자실해 있던 포대붕은 진저리를 쳤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음담패설을 서슴치 않는 철목풍이 인간 같이 않게 보
이는 그였다.
「 흐흐! 이 얘기도 해주어야겠군! 가장 먼저 네 마누라를 즐긴 것은 바로 나였
다. 내 단단한 물건에 처음 아랫도리를 정복당하는 순간 지었던 네 마누라의
표정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구나! 」
철목풍은 음흉한 음성으로 이죽거렸다.
「 ···············! 」
포대붕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휘청거렸다. 철목풍에게 깔려 울부짖는
아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
「 죽········ 죽인다! 」
쐐애애액!
다음순간 포대붕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벼락같이 철부를 꼬나들고 그대로
철목풍을 덮쳐갔다. 그 기세는 흉맹하기 이를데 없어 마치 성난 황소 같았다.
쩌어어엉!
포대붕의 쇠도끼는 대지를 두쪽 낼 듯한 무서운 기세로 철목풍의 머리통을
뽀개갔다.
「 커억! 」
콰당탕!
하지만 다음순간 피를 뿌리며 뒤로 벌렁 나자빠진 것은 철목풍이 아니라 오
히려 포대붕이었다.
포대붕이 불맞은 황소처럼 덮쳐드는 순간 철목풍은 섬전 같은 지력(指力)을
날려 포대붕의 가슴에 구멍을 낸 것이었다. 본래 포대붕은 철목풍과 능히 백
초 이상을 겨룰 수 있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는 극도로 분노하여 마구잡이
로 덤빈 바람에 철목풍의 단 일 초도 견디지 못하고 거꾸러진 것이었다.
철목풍은 포대붕을 흥분시키기 위해 일부러 자신이 고아내를 능욕한 사실을
떠벌인 것이다.
「 크으··········· 이············ 짐승만도 못한 놈! 」
포대붕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일으키려 사력을 다해 바르작거렸다. 하지
만 불가능했다. 그는 이미 가슴의 중혈 몇곳이 파괴되어 전신이 마비되어 버
린 것이었다.
철목풍은 그런 포대붕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잔혹하게 히죽 웃었다.
「 너를 내 손으로 죽이지 않겠다, 포대붕! 」
그자는 음흉한 눈을 번득이며 이죽거렸다.
「 이 밤이 새기 전에 아마도 달단여왕이란 계집이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 계
집이 딸을 납치한 범인인 네놈을 어떻게 처형할지 궁금하구나. 으하하하하! 」
철목풍은 유쾌한 듯 껄걸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간악하게도 그 자는 포대붕의 주인인 달단여왕 나유라로 하여금 포
대붕을 처형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철목풍은 두 눈에 야릇한 광망을 번듯이며 히죽 웃었다.
「 그 색목 계집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으니 네놈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
주겠다! 」
이어 그 자는 안고 있던 철산산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 네, 네놈, 설마! 」
포대붕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찌익! 찌직!
철산산을 바닥에 누인 철목풍은 서슴없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포대붕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 안된다. 이놈! 공주님께 더러운 손을 대지 마라! 」
그는 악을 쓰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자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철목풍을 저지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지 않은가?
그 사이에 철목풍은 철산산의 겉옷을 모두 벗기고 속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귀여운 비단 속옷이 벗겨지며 드러나는 수줍은 소녀의 교구는 실로 눈부셨다.
백옥같이 희고 매끄러운 피부, 이제 겨우 봉긋하게 융기가 돋기 시작한 풋풋
한 젖가슴이 음적의 손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속치마와 고의마저 벗겨지자 가녀리고 미끈한 소녀의 하체가 부끄럽
게 노출되었다. 아직 여자라고 부르기도 어설픈 몸이다. 철산산의 하얀 허벅
지 사이의 둔덕은 그저 보송보송한 솜털이 자잘하게 덮여 있을뿐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 솜털들이 검은 색이 아니라 은은한 황금빛을 띠고 있다는 점
이었다.
철산산의 은밀한 곳을 본 철목풍의 두 눈에 도착적인 욕정의 빛이 번득였다.
「 흐흐! 특별하군! 정말 특별해! 」
그 자는 철산산의 여린 몸을 쓰다듬으며 음험하게 웃었다. 이어 그자는 인어
같은 철산산의 알몸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음탕한 색마의 손길에 너무도 청
초한 소녀의 알몸이 제멋대로 이지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포대붕의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 제발! 공주님을 해치지 마라! 부탁한다! 」
그는 철목풍을 향해 울부짖다 못해 애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미 짐승으로 화해 버린 철목풍의 귀에 포대부의 애원 따위가 들어
올 리 없었다. 그 자의 두 눈은 도착적인 욕정으로 이미 벌겋게 충혈되어 있
었다.
마침내 그 자는 철산산의 허벅지를 좌우로 벌리고 그 사이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하의를 까내렸다.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철목풍의
흉측한 것을 본 포대붕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 이········· 이놈!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크헉! 」
포대붕은 악을 쓰다가 한모금의 선혈을 울컥 토해냈다. 철목풍이 소주인의
비소에 흉기를 가져가는 것을 본 그는 마침내 분노를 견디다 못해 기혈이 뒤
집혀 기절하고 만 것이다.
「 흐흐! 이제 머잖아 달단부의 모든 계집이 나 철목풍의 것이 되리라! 」
철목풍은 사악한 음소를 흘리며 히죽 웃었다.
한 손으로 철산산의 비소를 벌리고 자신의 흉기 끝을 그 벌려진 꽃잎에 잇댄
그 자는 부르르 전율하며 숨을 헐떡였다. 흉기 끝에 닿는 소녀의 더할 수 없
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살점의 감촉이 철목풍을 미치게 만든 것이다.
철목풍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흉기를 철산산의 비소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그 자의 거대한 흉기가 밀려들자 철산산의 교구에 세찬 경련이 일었다.
하지만 철목풍의 흉기는 쉽사리 소녀의 동굴로 진입하지 못했다. 철산산은
아직 덜 성숙된 몸인데다 처녀인 그곳의 방어막이 제법 완강하게 저항을 보
였기 때문이었다.
철목풍은 음흉하게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 흐흐! 제법 버티는데! 」
이어, 그 자는 흉기의 끝을 조금 뒤로 물렸다가 재차 세차게 찰산산의 동굴
속으로 밀어 넣어 갔다.
헌데 바로 그때 였다.
「 쯧쯧! 보기 흉한 꼴이로군! 」
돌연 등 뒤에서 한줄기 싸늘한 소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억!)
막 철산산을 유린하려던 철목풍은 질겁하며 급히 일어났다.
이어 황급히 바지를 추스르며 뒤를 돌아보던 철목풍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 네놈은! 」
언제였을까? 한 명의 소년이 대과벽의 깎아지른 절벽의 끝을 밟고 표연히 서
있지 않은가? 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수도 없게···
第8章 징키스칸의 후예(後裔)들
마치 유령같이 나타난 그 소년은 아주 영준하면서도 호방한 인상을 지녔다.
마치 무쇠로 빚어진 듯 강건한 체격을 지닌 소년인데 특이하게도 그의 머리
카락은 아주 짧다. 빡빡 밀었다가 다시 나는 듯한 소년의 짧은 머리카락은
은은히 붉은 빛을 띠고 있어 이채롭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그 건장한 몸에
타는 듯 붉은 장포를 걸쳤고 역시 같은 색의 바람막이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파라라락!
그 바람막이는 밤바람에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이검한(李劍恨)!
그렇다. 소년은 바로 이검한이었다.
그는 이 대과벽 아래쪽에 자리한 현음동천(玄陰洞天)에서 이미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었다. 그를 이곳까지 태워다 준 철익신응(鐵翼神鷹)이 어디론가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철익신응이 태워다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이곳 대과벽에서 곤륜까지 걸
어가야 할 판이었다.
이곳에서 곤륜까지는 무려 삼천여 리나 되었다. 가면 못갈 것도 아니지만 열
사의 사막을 가로질러 삼천여 리나 걸어갈 생각을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검한은 생각 끝에 황역사천왕(荒域四天王)의 무공을 연마하며 이곳 현음동
천에서 철익신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오늘 밤에도 무공연마에 몰두하던 그는 현음동천 위쪽의 대과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 의아함을 느끼고 날아 올라온 것이다.
(저 애송이가 언제 나타났지?)
이검한을 발견한 철목풍은 일순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그 자 역시 절정
의 내가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이 언제 나타났는지 전혀 알 수 없
었던 것이다.
만일 이검한이 암습을 할 작정이었다면 철목풍은 꼼짝없이 변을 당하고 말았
으리라.
그것을 생각하자 철목풍은 절로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러면서도 아직 치기가 가시지 않은 이검한의 어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게 되었다.
「 흐흐! 운이 나쁜 놈이로군! 하필이면 못볼 것을 보다니! 」
철목풍은 이검한을 노려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와 함께 그자는 오른 손에
내공을 끌어 모았다.
「 죽어랏! 」
그 자는 사납게 외치며 오른손으로 벼락같이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꽈르르릉!
그 자의 장심에서 주홍빛 노을이 확 일어나 이검한의 가슴을 짓쳐들었다.
「 잔양강살(殘陽?煞)! 」
마침 정신을 되찾은 포대붕이 그것을 보고 기겁하며 부르짖었다.
철목풍이 시전한 일장은 잔양강살이라 불리는 양강한 마공이었다. 그것에 단
지 스치기만 해도 전신의 심맥이 타들어가 죽고 만다.
콰아아앙!
다음 순간 철목풍의 잔양강살은 그대로 피풍을 두르고 있는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죽였다!)
철목풍은 자신의 일장이 그대로 이검한의 가슴을 강타하자 득의의 웃음을 머
금었다.
하지만 그 자의 득의의 웃음은 떠오를 때보다 더 빨리 사라져야만 했다.
잔양강살에 격중된 이검한은 그저 한차례 신형을 휘청했을 뿐 한 걸음도 밀
려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철목풍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가 바로 화룡
잠(火龍蠶)이란 천고의 보물로 짠 희세의 호신지보인 적룡풍(赤龍風)임을.
마화삼보(魔火三寶)의 하나인 그것은 용암의 열기에도 견디어낼 수 있다. 그
렇거늘 어줍잖은 잔양강살 따위가 어떤 충격을 가할 수 있겠는가?
「 저럴 수가! 」
철목풍은 이 놀라운 사태에 두 눈을 부릅떴다.
「 죽········· 죽여랏! 」
직후 그 자는 부하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은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이
검한에게서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그 자는 부하들을 방패로 자신
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철목풍이 대동한 자들은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다.
그 자들이라면 최소한 몇십 초는 이검한을 막아줄 것이다. 철목풍은 부하들
이 이검한을 상대하는 동안 그의 무공을 저울질해 보고 이검한이 자신의 능
력으로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고 판단되면 즉시 달아날 작정을 했다.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은 철목풍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 와아! 」
「 죽여라! 」
십여 명의 장한들이 기세좋게 함성을 지르며 이검한을 덮쳐간 것과,
퍼퍼퍽!
「 케에엑! 」
「 크에엑! 」
그 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져 나온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
다.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 나뒹군 장한들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으
깨져 버렸다. 아무도 이검한이 언제 어떤 수법을 써서 그자들을 격살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 흐억! 」
부하들이 단번에 몰살당하자 철목풍은 경악과 불신으로 두눈을 부릅뜨며 신
음을 발했다.
(달······················ 달아나야만 한다!)
철목풍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발가벗은 채 사나운 맹수 앞에
선 기분이 이러할 것이다.
헌데 그자가 달아나야 한다고 느낀 바로 그때였다.
스읏!
돌연 이검한의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삽시에 철목풍과 포대붕의 시야에
서 사라졌다.
「 크에에엑! 」
우두두둑!
그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엇인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 두········ 두고 보자! 」
피이이잉!
이어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철목풍의 외침과 함께 그 자의 신형은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 자는 전궁보법(電弓步法)으로 유령같이 다가선 이검한에게 속수무책으로
일장을 얻어맞고 늑골이 부러진 채 달아난 것이다.
이검한은 그자를 추격하여 격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난생 처음 살인을 해보고 가슴이 덜컹해진 상태였다.
철목풍의 수하들이 달려드는 순간 이검한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고 거
의 무의식적으로 가볍게 주먹을 흔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자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해버린 것이다.
이검한이 보기에 그자들은 너무 약했다. 또 마치 죽기를 원하기라도 한 듯
자신의 그 간단한 주먹질도 피하지를 않았다. 그자들이 피하지 않은 것이 아
니라 피하지 못한 것임을 안 것은 우두머리인 철목풍도 역시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는 것을 확인한 후의 일이었다.
(내가 살인을 하다니···········!)
이검한은 주위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둘러보며 부르르 치를 떨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검한의 시야로 발가벗겨진 채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 철
산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겁탈당할 뻔한 그녀의 무참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은 안
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 부득!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이런 몹씁 짓을 하다니·················! 」
이검한은 새삼 철목풍에 대해서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본의 아니게 철산산의 활짝 벌린
다리 사이로 은밀한 비소를 직시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여자의 알몸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
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여자의 알몸을 속속들이 보았을 뿐 아니라 누란왕후
에게 겁탈당해 동정을 잃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누란왕후 흑요설 때는 공포가 앞서서 지금처럼 흥분되지는 않았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녀가 알몸으로 누워있는 모습은 입 안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게 만든다.
민망함으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검한은 내심 안도했다.
(다행히 수혈이 짚여 있어서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철산산에게 다가가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 옷을 입혀주
기 시작했다.
자신이 능욕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철산산이 모르게 해주려면 가능한 원래와
비슷하게 입혀주어야만 한다. 철목풍을 한주먹에 날려보낸 이검한이건만 가
녀린 소녀의 몸에 옷을 입혀주면서 식은땀을 비오듯 쏟아내야 했다.
아연긴장하고 있던 포대붕은 이검한이 자신의 어린 여주인의 알몸에 옷을 입
혀주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대과벽 위에 하나의 작은 무덤이 생겨났다.
물론 그것은 포대붕의 아내인 고아내의 무덤이었다.
효웅 철목풍에게 납치 당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끝내 혀를
물어 자결한 비운의 여인, 포대붕은 땅을 파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묻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윽고 시신을 안장시킨 철부신장 포대붕은 철산산 앞에 오체복지하며 죄를
청했다.
「 부디 못난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요, 공주님! 」
그는 회한과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내게 미안해 할 것 없어! 」
철산산은 푸른 벽안을 지혜롭게 반짝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아주머니를 구하려고 한 짓이잖아? 포역사가 그만큼 부인을 사랑한 증거로
알고 나를 납치한 일은 불문에 부치겠어! 」
그녀는 오히려 포대붕을 위로하며 의젓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힐끗 옆에 서 있는 이검한을 훔쳐보았다.
「 ················! 」
이검한은 붉은 피풍으로 몸을 감싼 채 대과벽 끝에 서서 멀리 남쪽을 주시하
고 있었다.
파라라락!
붉은 피풍을 밤바람에 펄럭이며 오연히 서 있는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
이 늠연하고 신비로워 보였다.
철산산은 그런 이검한의 모습을 은밀하게 훔쳐보며 문득 옥용을 붉혔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 무섭고 교활한 철목풍을 쫓아버
렸다니········!)
그녀의 숨결이 자신도 모르게 다소 가빠졌다.
몽고족의 거친 사내들만 보아온 그녀에게 영준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인상을
지닌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철산산은 이검한의 주위를 끌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 하여간 오늘밤 일은 마음에 두자 말아. 감사하려면 이공자님께나 하면 돼! 」
그녀의 말에 이검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주종을 돌아보았다.
「 감사는 무슨·········! 」
그러자 포대붕이 이검한을 향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 아닙니다, 공자님! 」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굳은 결의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 공자님은 소인과 달단왕부의 대은인이십니다. 앞으로 소인 포대붕은 분골쇄
신,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
이검한은 포대붕의 단호한 태도에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럽군!)
하지만 거절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포대붕의 태도로 보아 하늘이 무
너져도 결심이 변할 것 같지가 않다.
이검한은 포대붕과 철산산의 이목을 환기시키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 그보다 달단여왕께서도 지척에 이르셨겠군! 」
그 말을 들은 포대붕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 큰일났습니다! 」
그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안절부절했다.
그 모습에 철산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왜 그래 포역사? 」
포대붕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부비며 말했다.
「 여왕님께서는 공주님을 구하시려고 미처 호위를 대동치 못하시고 속하를 추
적해 오시는 중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위는 이미 철목풍의 수하들에게
장악당한 상태니········! 」
그 말에 철산산의 안색도 홱 변했다.
「 정말 큰일이야! 철목풍이 엄마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잖
아! 」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듣고 있던 이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대붕에게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 여왕께서 오시는 방향은 어디요? 」
「 저쪽입니다! 」
포대붕은 서북쪽을 가리켜 보였다.
이검한은 침중한 표정으로 포대붕을 향해 말했다.
「 내가 먼저 그쪽으로 가보겠으니 포역사는 공주님을 모시고 오시오! 」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포대붕은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파앗!
이검한은 그대로 지면을 차고 날아올랐다.
날아올랐다 느낀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서북쪽의 지평선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아! 」
이검한의 그 신쾌무비한 경신술에 포대붕과 철산산은 절로 입을 쩍 벌렸다.
「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
포대붕은 이검한이 사라지는 곳을 주시하며 근심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멋있는 분이야!)
근심에 젖은 포대붕과는 달리 철산산의 푸른 벽안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반짝
이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의 신부가 될 거야!)
그녀는 설레임에 부푼 표정으로 꿈꾸며 중얼거렸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소녀의 분홍빛 꿈, 그 은밀한 설레임 속에 신강의 밤도
어느덧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여명 무렵,
사막의 긴 밤이 지나가고 동쪽 지평선이 불그스래 밝아오고 있었다.
쐐애애액!
막 떠오르기 시작한 찬란한 일륜의 광휘 속을 헤치며 한 명의 여인이 질풍같이
사막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 바득! 산산의 머리털 한올이라도 건드렸다면 오이랍부의 씨를 말려버리고 말
겠다! 」
여인은 분노와 초조로 가득찬 표정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 중반 정도,
화사한 비단 궁장을 걸친 이 여인의 머릿결은 찬연한 금발이었다.
그리고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바다처럼 푸른 벽안(碧眼)이었다.
여인의 금발과 벽안은 옥(玉)같이 흰 살결과 대비되어 아주 신비롭고 이국적
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언뜻 보기에도 실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인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인상이
너무 도도하고 차가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본래 일국(一國)의 공주(公主)인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 최상의 공경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받드는 환경 때문
에 여인은 자연히 모든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도도함이 몸에 배여있는 것이
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대단한 미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
실이었다.
비록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쇠락하지 않은 눈
부신 아름다움이 있었다. 젊고 싱싱한 분위기대신 그녀에게는 난숙하고 농염
한 육감적인 풍미가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단 옷에 감싸인 터질 듯 농염한 육체에는 중원 여인들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이국적인 관능미가 숨쉬고 있었다.
땅을 박차고 도약할 때마다 세차게 출렁이는 가슴의 융기는 절로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이 금발미부는 손에 한 자루 활(弓)을 들고 있었으며 등에는 백여 개의 화살
이 든 전통을 짊어지고 있었다. 또한 허리에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반월도
(半月刀)를 차고 있었다.
쐐애애액!
그같이 중무장한 몸이건만 금발미부가 질주하는 속도는 가히 섬전과 같았다.
그로 미루어 그녀의 일신의 무공이 결코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제발 무사하거라, 산산아!)
도도하고 차가운 여인의 봉목엔 지금 근심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자식을
지닌 여자라면 누구나 지니게 되는 모성애(母性愛)였다.
산산(珊珊)!
그렇다. 여인은 바로 철산산의 생모였다.
-달단여왕 나유라!
몽고(蒙古)의 양대부족 중 하나인 달단족(??族)의 젊은 여왕(女王)이 바로
그녀다.
금발벽안으로 알 수 있듯이 나유라는 몽고족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나먼 서역 대식국(아라비아)의 공주였던 여인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대식국의 황제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달단
왕부(??王府)와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여러 공주 중 한 명을 달
단왕과 정략결혼시켰다.
그때 불운하게도 선택된 것이 바로 나유라였다.
당시 열 다섯 살에 불과했던 나유라는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머나먼
몽고로 달단왕 철고륜(鐵古倫)에게 시집왔었다.
그녀는 철고륜과의 사이에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었다.
하지만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 그들 부부 사이에 애정이 깊어
질 수 없었다. 비록 둘 사이에 일남일녀의 자녀를 두기는 했으나 그들 부부
사이는 늘 냉랭하고 의례적인 것에 불과했다.
달단왕 철고륜은 나유라의 몸에 밴 도도함과 당찬 기도에 이내 싫증내어 따
로 이궁(離宮)을 짓고 그곳에 각지의 미녀들을 모아 쾌락을 즐겼다.
나유라는 불과 스무 살도 안된 젊은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드센 기질상 떠나간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다른 여자들
처럼 애교를 부린다든지 애원을 하는 짓 따위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얻은 두 자녀를 양육하는 한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
공연마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녀는 달단왕부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될 수 있
었다.
헌데 몇 년 전 그나마 남편이라고 있던 달단왕 철고륜이 급사하고 말았다.
나유라는 여자로서는 한창인 서른 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되고 만 것이다.
철고륜은 수치스럽게도 여자와 방사를 즐기던 도중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복상사(腹上死)를 두고 한때 독살(毒殺)이라는 추측도 분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고륜을 복상사시킨 여자는 달단부의 숙적인 오이랍부 출
신이었고, 철고륜이 죽은 직후 실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여간, 갑자기 왕이 급사해 버리자 달단부는 일대혼란에 휩싸였다. 대원제국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오이랍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달단부로서는 영
도자의 부재는 심각한 위기일 수밖에 없는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까지 칩거하고있던 나유라가
전면에 등장하여 압도적인 영도력과 기도로 사태를 수습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열 살에 불과한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달단왕부를 자신
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다. 몽고족에 지금껏 여왕은 없었고 또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나유라는 교묘한 협박과 회유로 내부의 저항을 일소시키고 어렵지 않
게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나유라는 뛰어난 통솔력으로 달단왕부를 지배했으며 급기야 달단여왕
이라 불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비록 철혈(鐵血)의 간담을 지녔다는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였다.
그녀는 딸 철산산이 피랍되자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단신으로 포대붕을 추적
해 온 것이었다.
화라라락!
헌데 달단여왕 나유라가 막 하나의 모래 언덕을 날아 넘을 때였다.
파앗!
돌연 측면에서 하나의 창이 날아와 나유라 앞에 꽂혔다.
「 누구냐? 」
나유라는 버럭 교갈을 내지르며 급히 멈춰섰다.
「 흐흐흐! 오랜만이오, 여왕! 」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한 가닥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슥!
이어 모래 언덕 뒤에서 한 명의 청포인이 날아올라 나유라앞에 내려섰다. 아
주 음침하고 교활한 인상을 지닌 사십대 중반의 장한이었다.
「 철목풍(鐵木風)! 」
그 청포장한을 본 나유라의 푸른 벽안에 격렬한 분노와 노기가 번득였다.
철목풍!
그렇다. 그 자는 바로 대과벽에서 이검한에게 혼이 나 쫓겨갔던 철목풍이었
다. 그 자는 장포 속의 가슴 부분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는데 상처에서 흘
러나온 피가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바득! 간덩이가 부었구나, 철목풍! 」
나유라는 손에 든 강궁을 불끈 움켜쥐며 노성을 내질렀다.
철목풍은 다름아닌 오이랍부의 신왕(新王)이었다. 그 자는 자신의 숙부인 전
대 오이랍부의 왕 철납아(鐵拉兒)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간웅(奸雄)이었다.
또한 철목풍은 나유라의 남편이었던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했다고 의심 받기
도 했었다. 그 자가 달단부와 오이랍부를 통합하여 대원(大元)제국의 부활을
노리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철목풍은 노기로 파르르 아미를 떠는 나유라를 바라보며 음충맞은 표정으로
느물거렸다.
「 하하! 흥분하지 마시오, 여왕! 화내시는 모습도 한층 매력적이기는 하오만! 」
그 자의 그런 태도에 나유라는 이를 갈며 노성을 내질렀다.
「 육시를 할 놈! 산산은 어찌했느냐? 」
말과 함께 그녀는 한 자루 강전을 활시위에 걸었다.
그녀의 말에 철목풍은 능글맞게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 진정하시오. 그렇잖아도 따님 문제로 여왕폐하 앞에 나타난것이니! 」
짝짝!
그 자는 뒤를 향해 손뼉을 마주쳤다.
스읏!
그러자 철목풍의 뒤로 한 명의 거한이 나타났다. 흉악한 인상을 지닌 그 거
한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금발소녀가 축 늘어진 채 끼어져 있었다.
「 산산아! 」
금발소녀를 본 나유라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비록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소녀의 의복과 체형으로 보아 영락없는 철산산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유라는 더 이상 냉정할 수가 없었다.
「 이놈! 산아를 내놓아랏! 」
쐐애애액!
그녀는 분노에 찬 교갈을 내지르며 득달같이 거한을 향해 덮쳐갔다.
「 어딜! 」
꽈릉!
철목풍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소를 터뜨리며 나유라를 향해 장력을 후려
쳤다. 그 자가 손을 휘두르자 은은한 노을빛이 확 주위를 물들였다.
잔양강살!
바로 그것이 시전된 것이다.
거한을 덮쳐가던 나유라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일장을 마주 쳐냈다.
퍼엉!
「 으음! 」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나유라는 강렬한 잠경에 밀려 신음과 함께 제자리로 돌
아갔다.
철목풍도 순간적으로 상체를 휘청했다.
나유라의 무공은 철목풍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고, 그 사실에 철목풍
은 내심 은은한 놀라움을 느꼈다.
(놀랍군. 저 계집이 철고륜의 무공과 서천 신월동맹(新月同盟)의 절기를 연마
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하지만 철목풍은 내심의 놀라움을 결코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자
는 음흉한 눈빛으로 나유라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 흐흐흐! 여왕! 여왕이 지닌 한 가지 물건을 내놓으면 따님을 돌려드리겠소! 」
「 ··········! 」
그 자의 말에 나유라는 내심 찔끔했다.
그녀는 최근 한 장의 장보도(藏寶圖)를 얻었었다.
그 사실은 달단부 내에서도 최고비밀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철목풍이 어떻
게 알아낸 것이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
나유라는 내심의 놀라움을 감추며 냉랭하게 일갈했다.
그러자 철목풍은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 흐흐흐! 시침떼어도 소용없소! 본왕야는 여왕께서 최근 세조(世祖) 홀필열
(忽必烈)님이 세우신 보고(寶庫)의 장보도를 얻었음을 알고 있으니까! 」
그 자의 구체적인 말에 나유라는 나직한 신음성을 발했다.
(바득! 대체 어떤 작자가 그 사실을 저놈에게 알렸단 말인가?)
그녀는 아미를 상큼 치뜨며 이를 갈았다. 비로소 그녀는 측근 중에 철목풍과
내통자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하지만 분통을 터뜨려봐야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비록 장보도가 중요하다
고 하지만 딸의 안전과 바꿀만한 것은 못되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입술을 잘끈 깨물며 입을 열었다.
「 좋다. 장보도를 주겠다. 먼저 산아를 이리 던져라! 」
그녀는 품 속에서 한 장의 낡은 양피지를 꺼내들어 보였다.
그것을 본 철목풍은 탐욕의 눈을 번득이며 히죽 웃었다.
「 흐흐흐! 그럴 수야 있나? 따님을 돌려받고 싶으면 장보도부터 내놓으셔야
지! 」
나유라는 치미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싸늘한 눈으로 철목풍을 노려 보았다.
「 그럼 어렇게 하자! 장보도를 던질 테니 동시에 산산이도 이쪽으로 보내라! 」
그 말에 철목풍도 동의했다.
「 좋소. 그럼 공평하겠지! 」
그 자는 뒤의 거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받아라! 」
피잉!
나유라는 교갈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양피지를 철목풍을 향해 던져냈
다.
화라락!
동시에 거한도 안고 있던 금발소녀를 나유라 쪽으로 던져보냈다.
나유라는 즉시 몸을 날려 금발소녀를 받아갔다.
스읏!
두 팔로 금발소녀를 받아 안은 나유라는 급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 산산아! 이제 안심······ 흑! 」
두 팔로 금발소녀를 안아들고 내려서던 나유라는 돌연 두 눈을 부릅떴다. 금
발소녀의 머리카락이 갈라지며 나타나는 얼굴은 나유라의 딸 철산산의 얼굴
이 아니지 않은가?
나이는 십 팔 세 가량되었을까? 철산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그 소녀
는 철산산 못지 않게 아름다우나 아주 표독스러운 인상을 지니고 있엇다.
물론 그녀의 금발도 가짜였다. 흩어지는 가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칠흑같
이 검은 흑발(黑髮)이었다.
나유라는 경악과 불신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 너는 산산이 아니구나········· 흑! 」
경악에 차 신음하던 나유라의 입에서 돌연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당탕!
그와 함께 그녀의 풍만한 교구가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
던 가짜 철산산이 그대로 나유라의 마혈을 찍어버린 것이다.
「 호호호! 드디어 내 손에 걸렸구나, 더러운 오랑캐 계집! 」
나유라를 쓰러뜨린 가짜 철산산은 발딱 일어서며 요악한 교소를 터뜨렸다.
「 흐윽! 이런 치졸한 함정에 걸려들다니! 」
나유라는 자신의 딸 철산산으로 변장하고 있던 하후진진에게 마혈을 짚이고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마혈이 찍힌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하후진진은 모멸감에 떠는 나유라를 노려보며 독살스러운 음성으로 외쳤다.
「 바득, 잘 걸렸다! 악독한 계집! 드디어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구
나! 」
콰득!
말과 함께 소녀는 악독한 표정으로 힘껏 나유라의 풍만한 젖가슴을 발로 짓
밟았다.
「 크윽······· 너는 누구냐? 」
나유라는 고통과 굴욕의 신음을 발하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소녀는 발작적인 교소를 터뜨렸다.
「 호호호!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냐? 네년의 손에 무참하게 고문당하고 죽은
하후란(夏候蘭)이란 분의 딸인 나를? 」
찌직!
말과 함께 그녀는 거칠게 자신의 앞가슴 의복을 찢어냈다.
찢겨진 그녀의 저고리 사이로 빙결같이 새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이제 막 여
자의 형상을 이룬 소녀의 젖가슴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단단한 탄력을 지녀
아주 매혹적이었다.
「 흐윽! 」
헌데 나유라는 소녀의 젖가슴을 보는 순간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발하며 봉
목을 치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소녀의 그 소담스러운 젖가슴 사이에 열십
자로 갈라진 끔찍한 흉터가 선명하게 나 있지 않은가?
그것을 본 나유라는 교구를 바르르 떨었다.
「 너는 진진(眞眞)! 」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악성을 발했다. 비로소 그녀는 눈앞의 소
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소녀는 나유라의 그런 모습에 원독에 찬 교소를 터뜨렸다.
「 호호! 그렇다. 내가 바로 하후진진(夏候眞眞)이다! 」
나유라는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 되었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그녀
현음마모(玄陰魔母)가 남긴 글은 실로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때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末期)! 혼탁하기 이를 데 없던 당시 강호에는
한 명의 절세기인(絶世奇人)이 있었다. 그는 상고시대의 온갖 무공을 수습하
여 중원무림의 터를 닦았다고 알려진 일대기인이었다.
-원시천존(元始天尊)!
바로 이 인물이었다.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의 첫째로 꼽히는 원시천존은 그러나 너무나도
오래전의 인물이라서 당금무림에는 그런 인물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
졌을 정도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원시천존은 인간이 이를 수 었는 최후경기까지 다다랐던 인
물로서 그의 무예는 너무도 깊고 넓어서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원시천존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태양신군(太陽神君)!
-현음마모(玄陰魔母)!
바로 그들이었다.
본래 원시천존의 절학은 기오막측하기 이를 데 없어 절세기재가 아니면 연마
할 수가 없었다.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원시천존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절기를 이어받을 재목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실패했다.
원시천존 자신은 천고에 보기 드문 기재였던 바, 그런 원시천존 같은 기재가
같은 하늘 아래 또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해서 원시천존은 차선책으로 그나마 인중용봉(人中龍鳳)이라할 수 있는 두
명의 남녀를 제자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무공을 분할하여 전수했다. 즉, 남제자에게는 양강
(陽强)한 절기를, 여제자에게는 음유(陰柔)한 절기를 각각 전수한 것이다.
두 사람은 원시천존에게 절기를 전수받은 후 무림에 출도하여 천하를 주유했
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삼초지적(三招之敵)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원시천존의 무공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무림에 나온 태양신군과 현음마모는 각기 하나의 문파를 세웠다.
태양신군은 숭양무벌(崇陽武閥)을, 현음마모는 현음마궐(玄陰魔闕)을 각기 세
웠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무림에는 정사(正邪)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태양신군과 현음마모에 의해 비로소 정사(正邪), 그리고 흑백(黑
白)으로 나뉘어져 무림판도를 구축하게 되었다.
본래 동문(同門)인 두 남녀는 서로를 사랑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나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보다 더한 호승심(好勝心)이었다.
남에게 결코 지기 싫어하는 성격!
그것은 연인 사이라 해도 다를 리 없었다. 서로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
에 두 사람 사이는 결국 파경(破鏡)을 맞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철천지한을 지닌 원수처럼 대립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태양신군과 현음마모는 동시에 스승
인 원시천존으로부터 호출을 받게 되었다.
원시천존은 드디어 천수(天壽)를 다하고 우화등선(羽化登仙)하게 되었으며,
해서 세상을 벗어나기 전에 두 제자를 불러 유언을 남기려 한 것이다.
스승의 거처로 달려간 태양신군과 현음마모에게 원시천존은 두 가지의 물건
을 내놓았다.
-태극보정(太極寶鼎)!
-초연심결(超然心訣)!
바로 그것이었다.
태극보정(太極寶鼎)!
그것은 원시천존의 상징이었다.
즉, 원시무맥(元始武脈)의 종사(宗師)를 상징하는 보물이 바로 태극보정인 것
이다.
본래 태극보정은 상고의 성왕(聖王) 순(舜) 임금이 구주(九州)를 순행(巡行)한
뒤 만들었다는 신주구정(神州九鼎)의 하나로서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것이었
다.
하지만 신주구정은 주(周)왕조가 흉노(匈奴)의 침공을 받아 동천(東遷)하는
과정에서 모두 유실(流失)되고 말았다.
그 신주구정 중 하나가 어찌어찌하여 원시천존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것의 이름이 태극보정이다. 태극보정을 얻은 원시천존은 그것을 자신의 징
표로 삼았다. 해서 태극보정을 물려받는 자는 명실상부한 원시천존의 후계자
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극보정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아무런 묘
용이 없었다.
초연심결(超然心訣)!
그것은 실로 엄청난 유혹을 지닌 것이었다.
즉,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의 초절기예의 정수가 담겨져 있는 바, 그것을 연
마해내는 자는 제 이의 원시천존이 될 수 있었다.
원시천존은 두 제자에게 태극보정과 초연심결 중 한가지씩만 선택하라고 말
했다.
이에 두 남녀는 깊이 고심했다. 상징적인 태극보정과 실질적인 초연심결은
실로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오랜 고심 끝에 태양신군과 현음마모는 두 보물들 중 한가지씩을 선택
하게 되었다.
즉, 태양신군은 태극보정(太極寶鼎)을, 그리고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선택하
게 된 것이었다. 태양신군은 일신의 절예를 습득하는 것보다는 존경하는 스
승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했다. 해서 그는 태극보정을 선택했다. 반면 현음마
모는 사형인 태양신군을 이겨보겠다는 호승심에 초연심결을 선택했다.
과연 두 사람 중 누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 * * *
-어리석구나, 종선(宗仙)이여! 네 자신의 그릇도 모르고 감히 스승님의 초극
절예를 넘보다니!
현음마모의 유언은 깊은 회한과 탄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현음마모 종선(宗仙)!
그렇다. 결론은 그녀의 패배였다.
그녀는 초연심결을 익히기 위해 현음마궐조차 해산하고 이곳 현음동천(玄陰
洞天)으로 은둔했다. 오로지 원시천존의 최후절예인 초연심결을 익히기 위해
서, 하지만 현음마모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된 것에는 오랜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원시천존이 남긴 심득은 너무나 난해했다. 무려 백 년 간의 깊은 고뇌에도
불구하고 현음마모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검한이 본 두루마리의 그림은 바로 원시천존이 남긴 최후 심득인 초연심결
의 도해(圖解)였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스승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분은 어리석은 제
자로 하여금 그 분으 기예를 수천 년 이후의 시대에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 분은 내가 초연심결을 연마하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체하고 이곳에 은거할
것까지도 모두 미리 예견하셨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의 운명 역시 저 위대한 원시천존(元始天尊) 사부님
의 안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라!
이검한은 해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내가 누란왕후(樓蘭王后)를 통해 이곳을 발견한 것도 모두 원시천존이란 분
의 안배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
그는 믿기지 않는 듯 망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는 원시천존이라는 상고기인의 깊은 뜻에 깊은 경외감을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
-이제 본녀가 네게 지우려는 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리라. 그대의 시대에
는 악마(惡魔)의 화신(化身)이 등장할 것이며 그 악마의 분신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초연심결(超然心訣)을 기필코 완성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네게 지우려는 짐이니라. 내 사랑하던 이의 후손이여!
현음마모의 유언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유언의 마지막 구절을 읽은 이검한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 무슨 말씀이시지? 내가 저분이 사랑하던 분의 후손이라니? 」
그는 멍한 표정으로 현음마모의 시신을 올려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그의 뇌리를 스치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아연실색했다.
「 설마 내가 태양신군이라는 분의 후손이란 말인가? 」
이검한의 머리 속은 갑자기 혼란에 휩싸였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란 말인가?)
그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비록 스스로 비천하다 자탄했지만 현음마모는 고금제일여고수로서 조금도 손
색이 없는 능력자였다. 죽음에 이르러서기는 하지만 그년는 천기(天機)를 읽
을 수 있는 능력마저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천기를 읽게 되자 그녀는 비로소 사부 원시천존의 심오한 안배와 이천여 년
이 흐른 후 이곳 현음동천에서 벌어질 일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해서 이곳에 자신이 현음마공(玄陰魔功)을 익히는 데 이용했던 태백한정(太白
寒精)을 준비해놓아 이검한이 화망단정의 열독에 타죽지 않도록 안배를 한
것이다.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분이니 내가 태양신군의 멈 후손이라는 말씀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검한은 새삼 현음마모의 유해를 올려다 보았다.
(난 누구일까? 어떤 경로로 태양신군과 인연이 닿아있는 것일까?)
상념에 빠진 이검한은 현음마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음 속에 마치 선녀(仙女)와 같은 자태로 부유하듯 떠있는 현음마모의 신비
한 모습은 지난 이천여 년 동안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으리라.
* * * *
밤[夜]이다.
신강의 광활한 사막 위로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과벽(大戈壁)!
수천 리를 동서로 이어진 그 거대한 단애는 적막 속에 거대한 모습을 누이고
있다.
막 서쪽 하늘로 스러져가는 가녀린 초승달이 창백한 빛을 대과벽 일대에 흩
뿌리고 있었다.
쐐애애액!
문득 서쪽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밤하늘을 가르며 질풍같이 대과벽을 향해
날아왔다.
화라라락!
밤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대과벽 끝으로 내려서는 그 인물은 삼십대 초반
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장한이었다.
무쇠로 빚은 듯 강건한 체격을 지닌 그 인물은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경장을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검붉은 색의 철부(鐵斧)를 한 자루 차고 있었다.
흑의장한은 두 팔에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다.
두터운 천에 감싸인 그것은 한 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십 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눈같이 새하얀 피부에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였다. 한눈에 보
아도 그 소녀는 서역의 색목(色目) 계통의 피를 이어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수혈(睡穴)이 찍힌 듯 장한의 품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 헉! 헉! 」
장한은 먼길을 달려온 듯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그런 그의 전신은 온통 땀
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이윽고 대과벽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흑의장한은 빠르게 한차례 주위를 둘러
보았다.
「 여기로군! 」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두 눈은 초조함과 죄책감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소신(小臣)은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는 잠든 금발소녀를 내려다 보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 천애고아인 소신 포대붕(包大鵬)에게는 안사람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소중
합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 음흉한 철목풍(鐵木風)의 요구를 듣지 않
을 수 없었습니다. 」
그는 비통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포대붕(包大鵬)!
이것이 흑의장한의 이름이었다.
그는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녀 신강 일대에는 그의 용맹함이 자자하게 알려
진 역사(力士)였다. 또한 신강의 제부족들은 그를 철부신장(鐵斧神將)이라 부
르며 경원했다.
그 포대붕에게는 한 명의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고아내(高娥乃)라는 이름을 지닌 정숙한 여인인데 그녀가 얼마 전 한 명의
흉한에게 납치 당하고 말았다. 고아내를 납치한 흉인은 포대붕에게 아내를
구하고 싶으면 한 명의 소녀를 납치해 오라고 협박했다.
그 소녀는 다름아닌 포대붕이 섬기는 여주인의 딸이었다.
포대붕은 번뇌에 빠졌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주인을 배신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몇날 며칠을 갈등으로 고민하던 포대붕, 결국 아내에 대한 염려가 주인에 대
한 충성심을 이겼다. 만일 자신이 흉한의 협박을 모른 척한다면 아내인 고아
내가 어떤꼴을 당할지는 명약관화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는 숱한 사내들
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해서 포대붕은 눈물을
머금고 소주인(少主人)을 납치하고자 마음 먹었다.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가 바로 포대붕이 섬기는 주인의 딸이었
다.
-철산산(鐵珊珊)!
이것이 금발소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저 위대한 정복자 성길사한(成吉思汗)의 피를 이은 고귀한 신분이었
다.
비록 원(元)제국은 붕괴되었지만 황금씨족(黃金氏族)이라 불리는 징기스칸의
핏줄들은 여전히 새외변경의 민족들에게 최고의 공경과 대우를 받고 있다.
포대붕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내려다 보며 죄
책감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철목풍이 제 아무리 사갈 같은 독심을 지닌 흉악자라고 해도 징키스칸님의
핏줄을 이은 산산(珊珊) 공주님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소신의 아내만 구해내면 저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철목풍
을 쳐죽일 것입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했다.
바로 그때였다.
「 흐흐! 그래도 제법 현명하구나, 포대붕! 」
돌연 포대붕의 뒤에서 한 가닥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포대붕은 깜짝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 보았다.
언제였을까? 포대붕의 뒤쪽 삼 장 정도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짙푸른 장포를 두른 사십대 중반의 장한인데 아주 음침한 인상을 지
녔다.
이 자의 얼굴은 언뜻 보기에는 상당히 수려하다. 하지만 작은 눈자위가 쉴
새없이 움직이고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입술은 아주 얄팟하여 교활하고
잔혹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가 있다.
청의장한의 허리춤에는 금은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한 자루의 반월도(半月刀)
가 꽂혀 있었다. 또한 그 자의 청포 소맷자락 밖으로 하나의 특이한 팔찌를
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무쇠로 만든 팔찌였는데 팔찌위에는 한 마리
푸른 늑대(靑狼)가 칠보(七寶)로 상감(象嵌)되어 있었다.
푸른 늑대[靑狼]!
그것은 저 징기스칸의 상징이 아닌가?
「 철목풍! 」
청포인을 본 포대붕은 이를 부득 갈며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철목풍(鐵木風)!
그렇다. 그 자가 바로 포대붕의 아내 고아내를 납치한 장본인이었다.
철목풍은 음침한 눈으로 포대붕으로 품에 안긴 철산산을 주시했다.
「 후훗! 그 어린 계집이 바로 달단여왕(??女王) 나유라(羅維羅)의 딸이로군! 」
포대붕은 분노와 증오의 눈으로 철목풍을 노려 보았다.
「 그렇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산산 공주님을 모셔 왔으니 안사람을 내놓아
라! 」
그는 두 팔로 철산산을 꽉 안은 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 말에 철목풍은 음산한 눈빛을 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 약속은 지킨다. 본왕야(本王爺)는 장차 북원(北元)제국의 황제가 될 존
귀한 몸인데 약속을 어기겠는냐? 」
이어 그 자는 문득 뒤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히히힝!
직후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십여 필의 말들이 어둠 속으로 달려왔다.
말 위에는 포악한 인상의 장한들이 한 명씩 타고 있는데 맨앞쪽에서 달려오
는 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을 한 마리 끌고 오고 있었다.
사람이 타지 않은 대신 그 말의 고삐에는 누군가 두 팔이 묶인 채 질질 끌려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여보! 」
의복이 갈가리 찢긴 채 두 손이 묶여 끌려오는 그 여인을 본 순간 포대붕의
입에서 비통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파앗!
그는 분노와 안도의 마음이 교차되는 심정으로 급히 끌려오는 여인을 향해
마주 날아가려 했다.
「 잠깐! 」
콰르릉!
철목풍이 날카롭게 외치며 일장을 날려 포대붕을 저지했다.
「 철목풍! 네놈이·········! 」
포대붕이 이를 갈았지만 철목풍이 날린 막강한 잠경에 막혀 어쩔 수 없이 도
로 지면으로 내려섰다.
두두두! 히히히힝!
그 사이에 십여 필의 말이 장내에 이르러 멈춰섰다.
맨 앞쪽에서 말을 타고 온 장한은 말에서 뛰어내려 말고삐에 묶여 끌려온 여
인에게 다가가 그 여인의 머리를 움켜쥐고 위로 쳐들었다.
축 늘어져있던 여인의 얼굴이 쳐들려졌다. 그녀는 후덕한 인상을 지닌 삼십
대 초반의 중년여인인데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 으으으! 」
여인의 무참한 얼굴을 본 포대붕은 치를 떨었다.
고아내!
그렇다. 말에 묶여 끌려온 여인은 다름아닌 포대붕의 아내인 고아내였다. 한
눈에 보아도 그녀는 잡혀있는 동안 모진 시달림을 당한 것 같았다.
아내의 무참한 모습에 치를 떠는 포대붕을 보며 철목풍은 음흉하게 히죽 웃
었다.
「 흐흐! 부부상봉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어린 계집을 본왕야에게 넘기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느냐? 」
「 죽일 놈! 」
포대붕은 분노를 금치 못하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하자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 받아라! 」
파앗!
포대붕은 입술을 악물며 안고 있던 철산산을 철목풍을 향해 던졌다.
「 으핫하! 그래야지! 」
철목풍은 득의의 광소를 터뜨리며 날아드는 철산산을 급히 안아들었다. 그
자의 교활한 두 눈에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드디어 세조(世祖)께서 남기신 유물을 얻을 열쇠가 내 손에 들어왔구나!)
그 자는 득의만면하며 흥분의 빛을 지었다.
화라라락!
그 사이에 포대붕은 급히 말에 매여 끌려온 여인 쪽으로 날아갔다.
「 이런 쳐죽일········! 」
헌데 막 아내의 곁으로 달려간 포대붕의 입에서 분노의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찢긴 저고리 사이로 수밀도 같은 젖무덤과 허연 하복부가 그대로 드러나 보
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고아내의 아랫도리에는 실오라기 한 올 조차 걸
쳐져 있지 않는 것이 아닌가?
무참하게 벌거벗겨진 아랫도리는 말의 뒤에 끌려오는 도중에 찢겨진 것이 아
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벗겨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명약관화했다. 고아내는 이미 수많은 사내
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힌 상태였다.
그녀의 온 몸에는 능욕당한 흔적이 너무도 역력했다.
포대붕은 극심한 분노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능욕당한 아내의 무참한
모습을 본 포대붕의 두 눈에 시뻘겋게 핏발이 섰다.
「 이 더러운 놈! 나는 그래도 네놈이 철목진(鐵木眞)님의 후손을 자처해서 약
속을 지킬 줄 알았다! 」
그는 급히 아내의 손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며 철목풍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하지만 철목풍은 지극히 태연했다.
「 물론 나는 약속을 지켰다! 」
그 자는 철산산을 안은 채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 나는 네 마누라의 목숨을 보장한 것이지 정조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
「 뭐······ 뭐라고? 」
포대붕은 어이가 없어 절로 말문이 막혔다. 철목풍의 그 파렴치한 말에 그는
돌로 자신의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 본왕야의 용맹스러운 수하들은 오랫동안 계집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그들
이 네 마누라의 몸뚱이가 필요하다는 데는 어쩔 수 없었지! 」
철목풍은 음흉한 음성으로 태연하게 말했다.
철목풍의 주위에 둘러서 있던 십여 명의 장한들도 키득거리며 고아내의 허옇
게 드러난 하체를 힐끔거렸다. 그자들도 고아내를 유린하는 데 동참했던 것
이다.
「 흐흐! 하여간 볼만했다. 네 마누라는 혼자서 내 부하들을 백여 명이나 즐겁
게 해주었으니까! 」
「 이······· 이 짐승만도 못한·········! 」
철목풍의 뻔뻔스러운 말에 포대붕은 치를 떨며 전율했다. 너무나 기가막혀
오공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포대붕에게 있어 당장 철목풍을 쳐죽이는 것보다 아내를 돌보는
것이 더 시급했다.
「 오냐!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의 골통을 박살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고 말
겠다! 」
그는 이를 갈며 급히 아내의 혈도를 문질러 주었다.
「 으으음! 」
포대붕이 내공을 주입하자 고아내는 미약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아내가 정신을 차리자 포대붕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 여보! 이젠 안심하시오. 내가 왔소! 」
그는 회한의 눈길로 고아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르르!
고아내는 눈을 부릅뜨며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경련했다.
무참히 능욕당하던 와중에서도 결코 잊지 않았던 남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
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사실은 기쁨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자신의 몸은 이미 숱한 사내들
에게 유린당해 더렵혀질 대로 더렵혀지지 않았는가?
그녀는 몇 명인가의 사내들이 자신의 몸을 올라타는 데까지만 기억하고 정신
을 잃었었다.
얼굴 위에 토해지던 발정난 사내들의 뜨겁고 역겨운 숨결, 무자비하게 파고
들던 이물질의 느낌, 유린당하는 자신을 둘러싼 채 낄낄대던 숱한 사내들의
모습.
「 컥! 」
다음 순간 고아내는 한소리 신음과 함께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해냈다.
토해진 핏속에는 잘려진 혀바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수치심
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의 앞에서 스스로 혀를 깨문 것이었다.
「 여·········· 여보! 」
포대붕은 아연하여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고아내의 머리가 힘없이 옆으로 구른 후였다.
「 이········ 이런! 」
포대붕은 자결한 아내의 시신을 바라보며 전신을 푸들푸들 떨었다.
「 쯧쯧! 어리석은 계집이로군. 강물에 배가 지나간다고 흔적이 남기라도 한단
말인가? 죽긴 왜 죽어! 」
보고 있던 철목풍이 끌끌 혀를 찼다.
「 뭐········ 뭐라고? 」
아내의 갑작스러운 자결에 망연자실해 있던 포대붕은 진저리를 쳤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음담패설을 서슴치 않는 철목풍이 인간 같이 않게 보
이는 그였다.
「 흐흐! 이 얘기도 해주어야겠군! 가장 먼저 네 마누라를 즐긴 것은 바로 나였
다. 내 단단한 물건에 처음 아랫도리를 정복당하는 순간 지었던 네 마누라의
표정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구나! 」
철목풍은 음흉한 음성으로 이죽거렸다.
「 ···············! 」
포대붕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휘청거렸다. 철목풍에게 깔려 울부짖는
아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
「 죽········ 죽인다! 」
쐐애애액!
다음순간 포대붕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벼락같이 철부를 꼬나들고 그대로
철목풍을 덮쳐갔다. 그 기세는 흉맹하기 이를데 없어 마치 성난 황소 같았다.
쩌어어엉!
포대붕의 쇠도끼는 대지를 두쪽 낼 듯한 무서운 기세로 철목풍의 머리통을
뽀개갔다.
「 커억! 」
콰당탕!
하지만 다음순간 피를 뿌리며 뒤로 벌렁 나자빠진 것은 철목풍이 아니라 오
히려 포대붕이었다.
포대붕이 불맞은 황소처럼 덮쳐드는 순간 철목풍은 섬전 같은 지력(指力)을
날려 포대붕의 가슴에 구멍을 낸 것이었다. 본래 포대붕은 철목풍과 능히 백
초 이상을 겨룰 수 있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는 극도로 분노하여 마구잡이
로 덤빈 바람에 철목풍의 단 일 초도 견디지 못하고 거꾸러진 것이었다.
철목풍은 포대붕을 흥분시키기 위해 일부러 자신이 고아내를 능욕한 사실을
떠벌인 것이다.
「 크으··········· 이············ 짐승만도 못한 놈! 」
포대붕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일으키려 사력을 다해 바르작거렸다. 하지
만 불가능했다. 그는 이미 가슴의 중혈 몇곳이 파괴되어 전신이 마비되어 버
린 것이었다.
철목풍은 그런 포대붕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잔혹하게 히죽 웃었다.
「 너를 내 손으로 죽이지 않겠다, 포대붕! 」
그자는 음흉한 눈을 번득이며 이죽거렸다.
「 이 밤이 새기 전에 아마도 달단여왕이란 계집이 너를 찾아낼 것이다. 그 계
집이 딸을 납치한 범인인 네놈을 어떻게 처형할지 궁금하구나. 으하하하하! 」
철목풍은 유쾌한 듯 껄걸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간악하게도 그 자는 포대붕의 주인인 달단여왕 나유라로 하여금 포
대붕을 처형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철목풍은 두 눈에 야릇한 광망을 번듯이며 히죽 웃었다.
「 그 색목 계집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으니 네놈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
주겠다! 」
이어 그 자는 안고 있던 철산산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 네, 네놈, 설마! 」
포대붕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찌익! 찌직!
철산산을 바닥에 누인 철목풍은 서슴없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포대붕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 안된다. 이놈! 공주님께 더러운 손을 대지 마라! 」
그는 악을 쓰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자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철목풍을 저지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지 않은가?
그 사이에 철목풍은 철산산의 겉옷을 모두 벗기고 속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귀여운 비단 속옷이 벗겨지며 드러나는 수줍은 소녀의 교구는 실로 눈부셨다.
백옥같이 희고 매끄러운 피부, 이제 겨우 봉긋하게 융기가 돋기 시작한 풋풋
한 젖가슴이 음적의 손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속치마와 고의마저 벗겨지자 가녀리고 미끈한 소녀의 하체가 부끄럽
게 노출되었다. 아직 여자라고 부르기도 어설픈 몸이다. 철산산의 하얀 허벅
지 사이의 둔덕은 그저 보송보송한 솜털이 자잘하게 덮여 있을뿐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 솜털들이 검은 색이 아니라 은은한 황금빛을 띠고 있다는 점
이었다.
철산산의 은밀한 곳을 본 철목풍의 두 눈에 도착적인 욕정의 빛이 번득였다.
「 흐흐! 특별하군! 정말 특별해! 」
그 자는 철산산의 여린 몸을 쓰다듬으며 음험하게 웃었다. 이어 그자는 인어
같은 철산산의 알몸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음탕한 색마의 손길에 너무도 청
초한 소녀의 알몸이 제멋대로 이지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포대붕의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 제발! 공주님을 해치지 마라! 부탁한다! 」
그는 철목풍을 향해 울부짖다 못해 애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미 짐승으로 화해 버린 철목풍의 귀에 포대부의 애원 따위가 들어
올 리 없었다. 그 자의 두 눈은 도착적인 욕정으로 이미 벌겋게 충혈되어 있
었다.
마침내 그 자는 철산산의 허벅지를 좌우로 벌리고 그 사이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하의를 까내렸다.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철목풍의
흉측한 것을 본 포대붕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 이········· 이놈!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크헉! 」
포대붕은 악을 쓰다가 한모금의 선혈을 울컥 토해냈다. 철목풍이 소주인의
비소에 흉기를 가져가는 것을 본 그는 마침내 분노를 견디다 못해 기혈이 뒤
집혀 기절하고 만 것이다.
「 흐흐! 이제 머잖아 달단부의 모든 계집이 나 철목풍의 것이 되리라! 」
철목풍은 사악한 음소를 흘리며 히죽 웃었다.
한 손으로 철산산의 비소를 벌리고 자신의 흉기 끝을 그 벌려진 꽃잎에 잇댄
그 자는 부르르 전율하며 숨을 헐떡였다. 흉기 끝에 닿는 소녀의 더할 수 없
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살점의 감촉이 철목풍을 미치게 만든 것이다.
철목풍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흉기를 철산산의 비소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그 자의 거대한 흉기가 밀려들자 철산산의 교구에 세찬 경련이 일었다.
하지만 철목풍의 흉기는 쉽사리 소녀의 동굴로 진입하지 못했다. 철산산은
아직 덜 성숙된 몸인데다 처녀인 그곳의 방어막이 제법 완강하게 저항을 보
였기 때문이었다.
철목풍은 음흉하게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 흐흐! 제법 버티는데! 」
이어, 그 자는 흉기의 끝을 조금 뒤로 물렸다가 재차 세차게 찰산산의 동굴
속으로 밀어 넣어 갔다.
헌데 바로 그때 였다.
「 쯧쯧! 보기 흉한 꼴이로군! 」
돌연 등 뒤에서 한줄기 싸늘한 소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억!)
막 철산산을 유린하려던 철목풍은 질겁하며 급히 일어났다.
이어 황급히 바지를 추스르며 뒤를 돌아보던 철목풍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 네놈은! 」
언제였을까? 한 명의 소년이 대과벽의 깎아지른 절벽의 끝을 밟고 표연히 서
있지 않은가? 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수도 없게···
第8章 징키스칸의 후예(後裔)들
마치 유령같이 나타난 그 소년은 아주 영준하면서도 호방한 인상을 지녔다.
마치 무쇠로 빚어진 듯 강건한 체격을 지닌 소년인데 특이하게도 그의 머리
카락은 아주 짧다. 빡빡 밀었다가 다시 나는 듯한 소년의 짧은 머리카락은
은은히 붉은 빛을 띠고 있어 이채롭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그 건장한 몸에
타는 듯 붉은 장포를 걸쳤고 역시 같은 색의 바람막이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파라라락!
그 바람막이는 밤바람에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이검한(李劍恨)!
그렇다. 소년은 바로 이검한이었다.
그는 이 대과벽 아래쪽에 자리한 현음동천(玄陰洞天)에서 이미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었다. 그를 이곳까지 태워다 준 철익신응(鐵翼神鷹)이 어디론가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철익신응이 태워다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이곳 대과벽에서 곤륜까지 걸
어가야 할 판이었다.
이곳에서 곤륜까지는 무려 삼천여 리나 되었다. 가면 못갈 것도 아니지만 열
사의 사막을 가로질러 삼천여 리나 걸어갈 생각을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검한은 생각 끝에 황역사천왕(荒域四天王)의 무공을 연마하며 이곳 현음동
천에서 철익신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오늘 밤에도 무공연마에 몰두하던 그는 현음동천 위쪽의 대과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 의아함을 느끼고 날아 올라온 것이다.
(저 애송이가 언제 나타났지?)
이검한을 발견한 철목풍은 일순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그 자 역시 절정
의 내가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이 언제 나타났는지 전혀 알 수 없
었던 것이다.
만일 이검한이 암습을 할 작정이었다면 철목풍은 꼼짝없이 변을 당하고 말았
으리라.
그것을 생각하자 철목풍은 절로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러면서도 아직 치기가 가시지 않은 이검한의 어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게 되었다.
「 흐흐! 운이 나쁜 놈이로군! 하필이면 못볼 것을 보다니! 」
철목풍은 이검한을 노려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와 함께 그자는 오른 손에
내공을 끌어 모았다.
「 죽어랏! 」
그 자는 사납게 외치며 오른손으로 벼락같이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꽈르르릉!
그 자의 장심에서 주홍빛 노을이 확 일어나 이검한의 가슴을 짓쳐들었다.
「 잔양강살(殘陽?煞)! 」
마침 정신을 되찾은 포대붕이 그것을 보고 기겁하며 부르짖었다.
철목풍이 시전한 일장은 잔양강살이라 불리는 양강한 마공이었다. 그것에 단
지 스치기만 해도 전신의 심맥이 타들어가 죽고 만다.
콰아아앙!
다음 순간 철목풍의 잔양강살은 그대로 피풍을 두르고 있는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죽였다!)
철목풍은 자신의 일장이 그대로 이검한의 가슴을 강타하자 득의의 웃음을 머
금었다.
하지만 그 자의 득의의 웃음은 떠오를 때보다 더 빨리 사라져야만 했다.
잔양강살에 격중된 이검한은 그저 한차례 신형을 휘청했을 뿐 한 걸음도 밀
려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철목풍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가 바로 화룡
잠(火龍蠶)이란 천고의 보물로 짠 희세의 호신지보인 적룡풍(赤龍風)임을.
마화삼보(魔火三寶)의 하나인 그것은 용암의 열기에도 견디어낼 수 있다. 그
렇거늘 어줍잖은 잔양강살 따위가 어떤 충격을 가할 수 있겠는가?
「 저럴 수가! 」
철목풍은 이 놀라운 사태에 두 눈을 부릅떴다.
「 죽········· 죽여랏! 」
직후 그 자는 부하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은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이
검한에게서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그 자는 부하들을 방패로 자신
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철목풍이 대동한 자들은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다.
그 자들이라면 최소한 몇십 초는 이검한을 막아줄 것이다. 철목풍은 부하들
이 이검한을 상대하는 동안 그의 무공을 저울질해 보고 이검한이 자신의 능
력으로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고 판단되면 즉시 달아날 작정을 했다.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은 철목풍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 와아! 」
「 죽여라! 」
십여 명의 장한들이 기세좋게 함성을 지르며 이검한을 덮쳐간 것과,
퍼퍼퍽!
「 케에엑! 」
「 크에엑! 」
그 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져 나온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
다.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 나뒹군 장한들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으
깨져 버렸다. 아무도 이검한이 언제 어떤 수법을 써서 그자들을 격살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 흐억! 」
부하들이 단번에 몰살당하자 철목풍은 경악과 불신으로 두눈을 부릅뜨며 신
음을 발했다.
(달······················ 달아나야만 한다!)
철목풍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발가벗은 채 사나운 맹수 앞에
선 기분이 이러할 것이다.
헌데 그자가 달아나야 한다고 느낀 바로 그때였다.
스읏!
돌연 이검한의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삽시에 철목풍과 포대붕의 시야에
서 사라졌다.
「 크에에엑! 」
우두두둑!
그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엇인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 두········ 두고 보자! 」
피이이잉!
이어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철목풍의 외침과 함께 그 자의 신형은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 자는 전궁보법(電弓步法)으로 유령같이 다가선 이검한에게 속수무책으로
일장을 얻어맞고 늑골이 부러진 채 달아난 것이다.
이검한은 그자를 추격하여 격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난생 처음 살인을 해보고 가슴이 덜컹해진 상태였다.
철목풍의 수하들이 달려드는 순간 이검한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고 거
의 무의식적으로 가볍게 주먹을 흔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자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해버린 것이다.
이검한이 보기에 그자들은 너무 약했다. 또 마치 죽기를 원하기라도 한 듯
자신의 그 간단한 주먹질도 피하지를 않았다. 그자들이 피하지 않은 것이 아
니라 피하지 못한 것임을 안 것은 우두머리인 철목풍도 역시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는 것을 확인한 후의 일이었다.
(내가 살인을 하다니···········!)
이검한은 주위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둘러보며 부르르 치를 떨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검한의 시야로 발가벗겨진 채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 철
산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겁탈당할 뻔한 그녀의 무참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은 안
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 부득!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이런 몹씁 짓을 하다니·················! 」
이검한은 새삼 철목풍에 대해서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본의 아니게 철산산의 활짝 벌린
다리 사이로 은밀한 비소를 직시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여자의 알몸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
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여자의 알몸을 속속들이 보았을 뿐 아니라 누란왕후
에게 겁탈당해 동정을 잃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누란왕후 흑요설 때는 공포가 앞서서 지금처럼 흥분되지는 않았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녀가 알몸으로 누워있는 모습은 입 안이 바싹바싹 타
들어가게 만든다.
민망함으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검한은 내심 안도했다.
(다행히 수혈이 짚여 있어서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철산산에게 다가가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 옷을 입혀주
기 시작했다.
자신이 능욕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철산산이 모르게 해주려면 가능한 원래와
비슷하게 입혀주어야만 한다. 철목풍을 한주먹에 날려보낸 이검한이건만 가
녀린 소녀의 몸에 옷을 입혀주면서 식은땀을 비오듯 쏟아내야 했다.
아연긴장하고 있던 포대붕은 이검한이 자신의 어린 여주인의 알몸에 옷을 입
혀주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대과벽 위에 하나의 작은 무덤이 생겨났다.
물론 그것은 포대붕의 아내인 고아내의 무덤이었다.
효웅 철목풍에게 납치 당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끝내 혀를
물어 자결한 비운의 여인, 포대붕은 땅을 파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묻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윽고 시신을 안장시킨 철부신장 포대붕은 철산산 앞에 오체복지하며 죄를
청했다.
「 부디 못난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요, 공주님! 」
그는 회한과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내게 미안해 할 것 없어! 」
철산산은 푸른 벽안을 지혜롭게 반짝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아주머니를 구하려고 한 짓이잖아? 포역사가 그만큼 부인을 사랑한 증거로
알고 나를 납치한 일은 불문에 부치겠어! 」
그녀는 오히려 포대붕을 위로하며 의젓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힐끗 옆에 서 있는 이검한을 훔쳐보았다.
「 ················! 」
이검한은 붉은 피풍으로 몸을 감싼 채 대과벽 끝에 서서 멀리 남쪽을 주시하
고 있었다.
파라라락!
붉은 피풍을 밤바람에 펄럭이며 오연히 서 있는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
이 늠연하고 신비로워 보였다.
철산산은 그런 이검한의 모습을 은밀하게 훔쳐보며 문득 옥용을 붉혔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 무섭고 교활한 철목풍을 쫓아버
렸다니········!)
그녀의 숨결이 자신도 모르게 다소 가빠졌다.
몽고족의 거친 사내들만 보아온 그녀에게 영준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인상을
지닌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철산산은 이검한의 주위를 끌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 하여간 오늘밤 일은 마음에 두자 말아. 감사하려면 이공자님께나 하면 돼! 」
그녀의 말에 이검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주종을 돌아보았다.
「 감사는 무슨·········! 」
그러자 포대붕이 이검한을 향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 아닙니다, 공자님! 」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굳은 결의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 공자님은 소인과 달단왕부의 대은인이십니다. 앞으로 소인 포대붕은 분골쇄
신,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
이검한은 포대붕의 단호한 태도에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럽군!)
하지만 거절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포대붕의 태도로 보아 하늘이 무
너져도 결심이 변할 것 같지가 않다.
이검한은 포대붕과 철산산의 이목을 환기시키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 그보다 달단여왕께서도 지척에 이르셨겠군! 」
그 말을 들은 포대붕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 큰일났습니다! 」
그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안절부절했다.
그 모습에 철산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왜 그래 포역사? 」
포대붕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부비며 말했다.
「 여왕님께서는 공주님을 구하시려고 미처 호위를 대동치 못하시고 속하를 추
적해 오시는 중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위는 이미 철목풍의 수하들에게
장악당한 상태니········! 」
그 말에 철산산의 안색도 홱 변했다.
「 정말 큰일이야! 철목풍이 엄마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잖
아! 」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듣고 있던 이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대붕에게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 여왕께서 오시는 방향은 어디요? 」
「 저쪽입니다! 」
포대붕은 서북쪽을 가리켜 보였다.
이검한은 침중한 표정으로 포대붕을 향해 말했다.
「 내가 먼저 그쪽으로 가보겠으니 포역사는 공주님을 모시고 오시오! 」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포대붕은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파앗!
이검한은 그대로 지면을 차고 날아올랐다.
날아올랐다 느낀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서북쪽의 지평선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아! 」
이검한의 그 신쾌무비한 경신술에 포대붕과 철산산은 절로 입을 쩍 벌렸다.
「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
포대붕은 이검한이 사라지는 곳을 주시하며 근심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멋있는 분이야!)
근심에 젖은 포대붕과는 달리 철산산의 푸른 벽안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반짝
이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의 신부가 될 거야!)
그녀는 설레임에 부푼 표정으로 꿈꾸며 중얼거렸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소녀의 분홍빛 꿈, 그 은밀한 설레임 속에 신강의 밤도
어느덧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여명 무렵,
사막의 긴 밤이 지나가고 동쪽 지평선이 불그스래 밝아오고 있었다.
쐐애애액!
막 떠오르기 시작한 찬란한 일륜의 광휘 속을 헤치며 한 명의 여인이 질풍같이
사막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 바득! 산산의 머리털 한올이라도 건드렸다면 오이랍부의 씨를 말려버리고 말
겠다! 」
여인은 분노와 초조로 가득찬 표정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 중반 정도,
화사한 비단 궁장을 걸친 이 여인의 머릿결은 찬연한 금발이었다.
그리고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바다처럼 푸른 벽안(碧眼)이었다.
여인의 금발과 벽안은 옥(玉)같이 흰 살결과 대비되어 아주 신비롭고 이국적
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언뜻 보기에도 실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인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인상이
너무 도도하고 차가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본래 일국(一國)의 공주(公主)인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 최상의 공경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받드는 환경 때문
에 여인은 자연히 모든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도도함이 몸에 배여있는 것이
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대단한 미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
실이었다.
비록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쇠락하지 않은 눈
부신 아름다움이 있었다. 젊고 싱싱한 분위기대신 그녀에게는 난숙하고 농염
한 육감적인 풍미가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단 옷에 감싸인 터질 듯 농염한 육체에는 중원 여인들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이국적인 관능미가 숨쉬고 있었다.
땅을 박차고 도약할 때마다 세차게 출렁이는 가슴의 융기는 절로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이 금발미부는 손에 한 자루 활(弓)을 들고 있었으며 등에는 백여 개의 화살
이 든 전통을 짊어지고 있었다. 또한 허리에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반월도
(半月刀)를 차고 있었다.
쐐애애액!
그같이 중무장한 몸이건만 금발미부가 질주하는 속도는 가히 섬전과 같았다.
그로 미루어 그녀의 일신의 무공이 결코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제발 무사하거라, 산산아!)
도도하고 차가운 여인의 봉목엔 지금 근심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자식을
지닌 여자라면 누구나 지니게 되는 모성애(母性愛)였다.
산산(珊珊)!
그렇다. 여인은 바로 철산산의 생모였다.
-달단여왕 나유라!
몽고(蒙古)의 양대부족 중 하나인 달단족(??族)의 젊은 여왕(女王)이 바로
그녀다.
금발벽안으로 알 수 있듯이 나유라는 몽고족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나먼 서역 대식국(아라비아)의 공주였던 여인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대식국의 황제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달단
왕부(??王府)와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여러 공주 중 한 명을 달
단왕과 정략결혼시켰다.
그때 불운하게도 선택된 것이 바로 나유라였다.
당시 열 다섯 살에 불과했던 나유라는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머나먼
몽고로 달단왕 철고륜(鐵古倫)에게 시집왔었다.
그녀는 철고륜과의 사이에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었다.
하지만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 그들 부부 사이에 애정이 깊어
질 수 없었다. 비록 둘 사이에 일남일녀의 자녀를 두기는 했으나 그들 부부
사이는 늘 냉랭하고 의례적인 것에 불과했다.
달단왕 철고륜은 나유라의 몸에 밴 도도함과 당찬 기도에 이내 싫증내어 따
로 이궁(離宮)을 짓고 그곳에 각지의 미녀들을 모아 쾌락을 즐겼다.
나유라는 불과 스무 살도 안된 젊은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드센 기질상 떠나간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다른 여자들
처럼 애교를 부린다든지 애원을 하는 짓 따위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얻은 두 자녀를 양육하는 한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
공연마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녀는 달단왕부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될 수 있
었다.
헌데 몇 년 전 그나마 남편이라고 있던 달단왕 철고륜이 급사하고 말았다.
나유라는 여자로서는 한창인 서른 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되고 만 것이다.
철고륜은 수치스럽게도 여자와 방사를 즐기던 도중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복상사(腹上死)를 두고 한때 독살(毒殺)이라는 추측도 분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고륜을 복상사시킨 여자는 달단부의 숙적인 오이랍부 출
신이었고, 철고륜이 죽은 직후 실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여간, 갑자기 왕이 급사해 버리자 달단부는 일대혼란에 휩싸였다. 대원제국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오이랍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달단부로서는 영
도자의 부재는 심각한 위기일 수밖에 없는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까지 칩거하고있던 나유라가
전면에 등장하여 압도적인 영도력과 기도로 사태를 수습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열 살에 불과한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달단왕부를 자신
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다. 몽고족에 지금껏 여왕은 없었고 또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나유라는 교묘한 협박과 회유로 내부의 저항을 일소시키고 어렵지 않
게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나유라는 뛰어난 통솔력으로 달단왕부를 지배했으며 급기야 달단여왕
이라 불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비록 철혈(鐵血)의 간담을 지녔다는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였다.
그녀는 딸 철산산이 피랍되자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단신으로 포대붕을 추적
해 온 것이었다.
화라라락!
헌데 달단여왕 나유라가 막 하나의 모래 언덕을 날아 넘을 때였다.
파앗!
돌연 측면에서 하나의 창이 날아와 나유라 앞에 꽂혔다.
「 누구냐? 」
나유라는 버럭 교갈을 내지르며 급히 멈춰섰다.
「 흐흐흐! 오랜만이오, 여왕! 」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한 가닥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슥!
이어 모래 언덕 뒤에서 한 명의 청포인이 날아올라 나유라앞에 내려섰다. 아
주 음침하고 교활한 인상을 지닌 사십대 중반의 장한이었다.
「 철목풍(鐵木風)! 」
그 청포장한을 본 나유라의 푸른 벽안에 격렬한 분노와 노기가 번득였다.
철목풍!
그렇다. 그 자는 바로 대과벽에서 이검한에게 혼이 나 쫓겨갔던 철목풍이었
다. 그 자는 장포 속의 가슴 부분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는데 상처에서 흘
러나온 피가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바득! 간덩이가 부었구나, 철목풍! 」
나유라는 손에 든 강궁을 불끈 움켜쥐며 노성을 내질렀다.
철목풍은 다름아닌 오이랍부의 신왕(新王)이었다. 그 자는 자신의 숙부인 전
대 오이랍부의 왕 철납아(鐵拉兒)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간웅(奸雄)이었다.
또한 철목풍은 나유라의 남편이었던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했다고 의심 받기
도 했었다. 그 자가 달단부와 오이랍부를 통합하여 대원(大元)제국의 부활을
노리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철목풍은 노기로 파르르 아미를 떠는 나유라를 바라보며 음충맞은 표정으로
느물거렸다.
「 하하! 흥분하지 마시오, 여왕! 화내시는 모습도 한층 매력적이기는 하오만! 」
그 자의 그런 태도에 나유라는 이를 갈며 노성을 내질렀다.
「 육시를 할 놈! 산산은 어찌했느냐? 」
말과 함께 그녀는 한 자루 강전을 활시위에 걸었다.
그녀의 말에 철목풍은 능글맞게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 진정하시오. 그렇잖아도 따님 문제로 여왕폐하 앞에 나타난것이니! 」
짝짝!
그 자는 뒤를 향해 손뼉을 마주쳤다.
스읏!
그러자 철목풍의 뒤로 한 명의 거한이 나타났다. 흉악한 인상을 지닌 그 거
한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금발소녀가 축 늘어진 채 끼어져 있었다.
「 산산아! 」
금발소녀를 본 나유라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비록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소녀의 의복과 체형으로 보아 영락없는 철산산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유라는 더 이상 냉정할 수가 없었다.
「 이놈! 산아를 내놓아랏! 」
쐐애애액!
그녀는 분노에 찬 교갈을 내지르며 득달같이 거한을 향해 덮쳐갔다.
「 어딜! 」
꽈릉!
철목풍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소를 터뜨리며 나유라를 향해 장력을 후려
쳤다. 그 자가 손을 휘두르자 은은한 노을빛이 확 주위를 물들였다.
잔양강살!
바로 그것이 시전된 것이다.
거한을 덮쳐가던 나유라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일장을 마주 쳐냈다.
퍼엉!
「 으음! 」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나유라는 강렬한 잠경에 밀려 신음과 함께 제자리로 돌
아갔다.
철목풍도 순간적으로 상체를 휘청했다.
나유라의 무공은 철목풍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고, 그 사실에 철목풍
은 내심 은은한 놀라움을 느꼈다.
(놀랍군. 저 계집이 철고륜의 무공과 서천 신월동맹(新月同盟)의 절기를 연마
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하지만 철목풍은 내심의 놀라움을 결코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자
는 음흉한 눈빛으로 나유라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 흐흐흐! 여왕! 여왕이 지닌 한 가지 물건을 내놓으면 따님을 돌려드리겠소! 」
「 ··········! 」
그 자의 말에 나유라는 내심 찔끔했다.
그녀는 최근 한 장의 장보도(藏寶圖)를 얻었었다.
그 사실은 달단부 내에서도 최고비밀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철목풍이 어떻
게 알아낸 것이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
나유라는 내심의 놀라움을 감추며 냉랭하게 일갈했다.
그러자 철목풍은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 흐흐흐! 시침떼어도 소용없소! 본왕야는 여왕께서 최근 세조(世祖) 홀필열
(忽必烈)님이 세우신 보고(寶庫)의 장보도를 얻었음을 알고 있으니까! 」
그 자의 구체적인 말에 나유라는 나직한 신음성을 발했다.
(바득! 대체 어떤 작자가 그 사실을 저놈에게 알렸단 말인가?)
그녀는 아미를 상큼 치뜨며 이를 갈았다. 비로소 그녀는 측근 중에 철목풍과
내통자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하지만 분통을 터뜨려봐야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비록 장보도가 중요하다
고 하지만 딸의 안전과 바꿀만한 것은 못되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입술을 잘끈 깨물며 입을 열었다.
「 좋다. 장보도를 주겠다. 먼저 산아를 이리 던져라! 」
그녀는 품 속에서 한 장의 낡은 양피지를 꺼내들어 보였다.
그것을 본 철목풍은 탐욕의 눈을 번득이며 히죽 웃었다.
「 흐흐흐! 그럴 수야 있나? 따님을 돌려받고 싶으면 장보도부터 내놓으셔야
지! 」
나유라는 치미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싸늘한 눈으로 철목풍을 노려 보았다.
「 그럼 어렇게 하자! 장보도를 던질 테니 동시에 산산이도 이쪽으로 보내라! 」
그 말에 철목풍도 동의했다.
「 좋소. 그럼 공평하겠지! 」
그 자는 뒤의 거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받아라! 」
피잉!
나유라는 교갈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양피지를 철목풍을 향해 던져냈
다.
화라락!
동시에 거한도 안고 있던 금발소녀를 나유라 쪽으로 던져보냈다.
나유라는 즉시 몸을 날려 금발소녀를 받아갔다.
스읏!
두 팔로 금발소녀를 받아 안은 나유라는 급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 산산아! 이제 안심······ 흑! 」
두 팔로 금발소녀를 안아들고 내려서던 나유라는 돌연 두 눈을 부릅떴다. 금
발소녀의 머리카락이 갈라지며 나타나는 얼굴은 나유라의 딸 철산산의 얼굴
이 아니지 않은가?
나이는 십 팔 세 가량되었을까? 철산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그 소녀
는 철산산 못지 않게 아름다우나 아주 표독스러운 인상을 지니고 있엇다.
물론 그녀의 금발도 가짜였다. 흩어지는 가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칠흑같
이 검은 흑발(黑髮)이었다.
나유라는 경악과 불신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 너는 산산이 아니구나········· 흑! 」
경악에 차 신음하던 나유라의 입에서 돌연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당탕!
그와 함께 그녀의 풍만한 교구가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
던 가짜 철산산이 그대로 나유라의 마혈을 찍어버린 것이다.
「 호호호! 드디어 내 손에 걸렸구나, 더러운 오랑캐 계집! 」
나유라를 쓰러뜨린 가짜 철산산은 발딱 일어서며 요악한 교소를 터뜨렸다.
「 흐윽! 이런 치졸한 함정에 걸려들다니! 」
나유라는 자신의 딸 철산산으로 변장하고 있던 하후진진에게 마혈을 짚이고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마혈이 찍힌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하후진진은 모멸감에 떠는 나유라를 노려보며 독살스러운 음성으로 외쳤다.
「 바득, 잘 걸렸다! 악독한 계집! 드디어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구
나! 」
콰득!
말과 함께 소녀는 악독한 표정으로 힘껏 나유라의 풍만한 젖가슴을 발로 짓
밟았다.
「 크윽······· 너는 누구냐? 」
나유라는 고통과 굴욕의 신음을 발하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소녀는 발작적인 교소를 터뜨렸다.
「 호호호!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냐? 네년의 손에 무참하게 고문당하고 죽은
하후란(夏候蘭)이란 분의 딸인 나를? 」
찌직!
말과 함께 그녀는 거칠게 자신의 앞가슴 의복을 찢어냈다.
찢겨진 그녀의 저고리 사이로 빙결같이 새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이제 막 여
자의 형상을 이룬 소녀의 젖가슴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단단한 탄력을 지녀
아주 매혹적이었다.
「 흐윽! 」
헌데 나유라는 소녀의 젖가슴을 보는 순간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발하며 봉
목을 치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소녀의 그 소담스러운 젖가슴 사이에 열십
자로 갈라진 끔찍한 흉터가 선명하게 나 있지 않은가?
그것을 본 나유라는 교구를 바르르 떨었다.
「 너는 진진(眞眞)! 」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악성을 발했다. 비로소 그녀는 눈앞의 소
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소녀는 나유라의 그런 모습에 원독에 찬 교소를 터뜨렸다.
「 호호! 그렇다. 내가 바로 하후진진(夏候眞眞)이다! 」
나유라는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 되었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그녀
추천69 비추천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