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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 천왕15


제13장 萬劫九重闕에서 만난 女人

승상 막대공, 그는 창가로 다가서며 지극히 침중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네게는...... 이미 피할 수 없는 혼담이 들어와 있는 상태다!
하물며 노부보고 어찌 한낱 오랑캐 계집을 며느리로 인정하란 말이냐?"
막붕비는 그 말에 흠칫했다.
"호...... 혼담이 들어왔단 말씀입니까?"
막대공은 뒷짐을 지며 돌아섰다.
"그렇다! 그 혼담은 황상께서 직접 내리신 것이다!"
"황상...... 께서 말입니까?"
막붕비는 그제서야 사태가 지극히 심각한 것임을 깨달았다.
황제(皇帝)의 명은 곧 법(法)이고 절대의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아무리 승상인 막대공이라 해도 그것을 거역하거나 회피할 수는
없었다.
막붕비는 암담한 심정이었다.
"상...... 상대는 누구입니까?"
그는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막대공, 그는 아들의 괴로와 하는 표정을 바라보며 내심 탄식했다.
하나 그의 음성은 여전히 낮고 침중했다.
"너도...... 잘 아는 아이다!"
"장미...... 공주입니까?"
막붕비는 신음하듯 물었다.
막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황상께서는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너를 부마로 맞고
싶어하신다!"
하나, 막붕비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는 안됩니다! 소자와 철접의 사이는 이미 사실상의
부부입니다! 장미공주이든 누구든......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막대공의 굵은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세상 일이 모두 네 마음대로만 되는 것이 아님을 아직도 모르느냐?"
쾅!
그는 세차게 발을 구르며 노성을 내질렀다. 그러다 문득, 그는 홱
문쪽으로 돌아섰다.
"너는 언제까지 도둑고양이같이 숨어 있을 작정이냐?"
그는 문 밖에 대고 냉엄한 음성으로 일갈했다. 순간,
"죄...... 죄송합니다, 아버님!"
문득 문 밖에서 처연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어,
스스......
처마쪽에서 하나의 왜영이 날아내리며 문 밖에 꿇어 엎드렸다.
서시독후 철접,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접근은 막붕비조차 알지 못했다. 하나, 막대공은 그녀가 백
장 내로 다가설 때부터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누가 너보고 노부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라 했느냐?"
막대공의 분노는 마침내 철접에게 떨어졌다.
"용...... 용서하십시오!"
철접은 교구를 바들바들 떨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죄했다.
똑똑......
꿇어엎드린 그녀의 손 끝으로 뜨거운 눈물이 굴러내렸으며
애처롭게도 그녀의 전신은 사시나무 떨리듯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
그 처연한 모습에 막대공은 일순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큰소리를 쳐서 미안하다! 하지만 노부는......!"
단호하게 잘라 말하려던 막대공, 그는 일순 멈칫했다.
철접의 교구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지고 막붕비의 눈빛이
절망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막대공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림을 보였다.
(노부가 저 계집아이를 내치면...... 저 두 아이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는 내심 갈등을 겪으며 소리없이 신음했다.
그는 동영의 계집들이 얼마나 지독한지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막대공이 철접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는 절망과
수치심으로 자진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막붕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문가지였다. 마침내,
(내가...... 졌다!)
막대공은 탄식하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어, 그는 철접을
주시하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아이야! 너는 네 목숨을 바꾸어서라도 붕비와 맺어지기를
원하느냐?"
그 순간, 그는 철접과 막붕비의 몸에서 완연하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철접, 그녀는 막대공의 물음에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예...... 아버님!"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 대답과 함께,
막붕비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막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그럼 한 가지 조건을 걸겠다! 그것을 완수하면 노부는 너를
며느리로 인정하겠다!"
"......!"
"......!"
막붕비와 철접은 긴장하며 막대공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막대공의 입에서 침중한 일성이 떨어졌다.
"장성(長城)...... 너머에 한 놈의 골칫덩어리가 있다. 그 놈의 목을
잘라오너라!"
순간 막붕비의 안색이 홱 변했다.
"북원(北元)의 황제 적붕천황(赤鵬天皇) 말씀입니까?"
막대공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황상은 늘 그 놈 적붕천황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계신다.
그 때문에 곧 북벌(北伐)을 단행하실 작정이다! 만일 네가 먼저 북원에
가서 적붕천황의 목을 베어오면 이번 북벌은 반은 성공한 셈이 되는
것이다!"
막붕비는 그 말에 강경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아버님! 그것이 얼마만한 위험을 수반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막대공을 바라보았다.
하나, 막대공은 그런 막붕비를 쳐다보지도 않고 철접에게 말했다.
"네가 적붕천황의 목을 베면 노부는 그 공을 핑계로 황상께
장미공주와 붕비의 혼담을 거두어 주시도록 주청할 수 있다!"
"......!"
철접은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막대공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나,
고개숙인 그녀의 두 눈은 어느 덧 모종의 결심으로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오랫 동안 잊었던 인자(忍者)로서의 본능이 그녀의 내부에
끓어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어떠냐? 할 수 있겠느냐?"
막대공은 철접을 바라보며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철접은 그 물음에 낮으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붕비를...... 위해서라면!"
순간,
"누...... 님! 당신은......!"
철접의 말을 저지하려던 막붕비는 멈칫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철접의 눈빛이 너무도 결연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철접은 염려로 가득한 막붕비의 시선을 받으며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적붕천황은...... 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누님......!"
막붕비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철접,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래의 시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연함이 담긴 다부진 음성으로 말했다.
"한 달...... 이내로 적붕천황의 목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소녀가 아버님이라 부르도록 허락해 주세요!"
막대공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돌아오길 빈다!"
"감사하옵니다! 하오면 한 달 후에......!"
슥......
말을 마친 철접은 그 즉시 밖으로 날아나갔다. 순간,
"누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막붕비는 다급히 외치며 철접을 쫓아나갔다. 하나, 이미 어디에도
철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일단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려 작정하면 아무도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다.
문득,
"걱정 말아요, 붕비! 당신을...... 사랑해요!"
멀리서 우수 어린 철접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
막붕비는 멍하니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어, 그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훗......!"
사라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막대공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애비를 용서해라, 붕비......!)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문득 밖에 대고 말했다.
"대호(大虎)! 들어오너라!"
그러자,
"예! 주군!"
뚜벅!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한 명의 거구청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대호(大虎)!

그는 바로 막붕비의 경호전담이던 그 호한이었다.
그의 눈빛은 비범한 신광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발걸음이 경쾌한
것으로 보아 만만치 않은 무공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막대공은 탄식하며 문득 한 권의 고경을 대호에게 건네 주었다.
"이것을...... 붕비에게 전해 주어라! 그 아이는 아마도 곧 먼
여행을 떠날 듯하구나!"
고경, 그것은 검은 표지로 되었으며 아주 낡아보였다.

<비파철혈경(琵琶鐵血經).>

고경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황실의 수많은 무공들 중 최강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비파철혈경----
그것을 지은 자는 진시황 시절 그의 경호전담이었던
비파은황(琵琶隱皇)이라고 한다. 한데, 그것이 어떤 경로로 막부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막대공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본래 붕비가 약관을 지나면 줄 생각이었는데...... 지금 주어도
괜찮을 것 같구나! 붕비에게 그렇게 전해라!"
"예! 주군!"
대호는 비파철혈경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공손하게 대경했다. 지금
그의 화후는 신비각 사대영반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윽고, 대호는 뒷걸음질 치며 서재에서 물러갔다.
막대공은 쓸쓸한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 변황의 거친 바람을 쏘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다시
애비에게 돌아올 때면...... 좀 더 성숙해 있겠구먼!)
그는 침울한 눈빛으로 창 밖을 주시했다.
왠지 가슴이 텅 비는 공허한 느낌이었다.

"......!"
성큼성큼 승상부의 서재 밖 월동문(月洞門)을 지나던 막붕비, 그는
문득 흠칫하며 멈추어섰다.
월동문 밖,
"흑......!"
한 명의 소녀가 벽에 얼굴을 묻고 선 채 오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나이는 십 오 세 정도, 일신에 헐렁한 자포를 걸친
미소녀였다.
(장미(薔薇)......!)
막붕비는 자포소녀를 보는 순간 괴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장미공주 주약금, 자포소녀는 바로 장미공주였다.
막붕비와 혼담이 오간 바로 그 장본인, 막붕비는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과 나의 대화를 모두 들었겠군!)
그렇다. 장미공주 주약금은 막붕비가 막대공의 서재에 들어갈 때부터
가슴 설레며 두 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자신과 막붕비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은근히 자신이 막붕비의 아내가 된 상상을
하곤 했다. 한데 그런 그녀의 기대가 오늘 무참하게 깨지고 만
것이었다.
문득,
"장미의...... 어디가 그 여자만 못하지요?"
주약금은 고개를 홱 치켜들며 막붕비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봉목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발그레한
두 볼은 눈물 자욱으로 가득했으며 그녀의 작은 두 손은 피가 나도록
꼭 움켜쥐어져 있었다.
막붕비, 그는 주약금의 눈물 어린 시선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되도록 주약금의 시선을 피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공주는...... 아주 아름답소! 철접 누님에 비해 조금도 못한 점이
없소!"
"그런데...... 왜 장미를 거절하지요?"
주약금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막붕비는 한숨을 내쉬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은...... 내가 철접 누님을 먼저 알았기 때문이오! 나를......
용서하시오!"
이어,
뚜벅......!
그는 성큼성큼 자기의 처소인 붕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바보! 멍청이! 먼저 알고 늦게 알고가 무어 그리 중요해요?"
주약금은 막붕비의 뒤에 대고 울음섞인 음성으로 외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왕!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막붕비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무겁게 탄식하며
주약금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 * *

옥문관, 중원의 서북단.
서역변황과 중원의 문물을 교류하는 관문이었다.
남(南)으로는 광활한 청해성(靑海省), 북(北)으로는 징기스칸의 후예
북원(北元)이 아직도 군림하고 있는 대초원.
그 서쪽으로는 전설과 신비의 광막한 대지---- 신강(新疆)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래로, 중원의 뭇 왕조들과 서역제국 사이의 끝없는 쟁패의 대상이
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옥문관의 서북방----
아미태산의 산맥에 이어진 하나의 험한 바위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천 개의 검날을 거꾸로 박아놓은 듯한 험산(險山).

-천궐마황산(千闕魔皇山).

그것이 바위산의 이름이었다.
천 개의 봉우리가 쌓인 천 개의 계곡이 벌려져 있다 하여 그 같이
불려졌다.
산역은 별로 넓지 않았다.
하나, 그 험악함은 천하를 뒤져도 비교될 산이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누구도 섣불리 천궐마황산의 권역에 들어가지 못했다. 잘못
들어갔다가는 미로와 같은 계곡에 빠져 영영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천궐마황산의 어딘가에 그 옛날 저 위대한 사대천왕
중 만겁마종의 궁전이 있었다고 한다.
만겁마종, 그는 그곳에서 다른 사대천왕을 꺾을 광세적인 마공을
연마했다는 것이다.
하나,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이었다. 아무도 천궐마황산 중에
있다는 만겁마종(萬劫魔宗)의 궁궐을 찾지 못했다.

<만겁구중궐(萬劫九重闕).>

만겁마종의 그 잊혀진 궁궐은 그와 같이 불렸다.
만겁구중궐을 찾으면 만겁마종의 절세마공을 얻어 고금제일인이 될
수 있다는 소문도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 소문은 천 년 내내 뭇
무림인들의 흥미를 끌며 이어왔다.
하나, 과연...... 그 소문의 진실이 밝혀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만겁마종(萬劫魔宗)의 전설은 정말 풀릴 것인지......!

* * *

천궐마황산(千闕魔皇山)----
가을의 천궐마황산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천 개의 깊은 계곡마다 낙엽이 전설처럼 쌓이고 있었다.
휘---- 이잉!
바람이 분다. 세찬 모래바람이 신강쪽에서 불어와 천궐마황산을
휩쓸고 있었다.
황혼 무렵, 인적없는 천궐마황산에 노을이 음산한 피안개처럼 흐르고
있었다.
한데,
"......!"
화드득!
두터운 마직의 바람막이를 펄럭이며 한 명의 인물이 천궐마황산의
칼날 같은 봉우리 위에 우뚝 서 있었다.
흩날리는 장발과 우수가 깃든 유현한 눈빛...... 피풍 사이로 언뜻
한 자루의 장도(長刀)와 핏빛 손잡이의 장검(長劍)이 어깨 위로 드러나
보였다.
막붕비! 바로 그였다.
그는 사랑하는 서시독후 철접의 종적을 쫓아 이곳 옥문관 근처까지
온 것이었다.
문득, 그는 천궐마황산의 근역을 돌아보며 우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만겁마종! 살아서 아무리 큰 이름을 얻는다 한들 무엇하는가? 이제
죽어 천 년이 흐르자 그의 종적조차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그는 옥문관을 지나다 토착민들에게 만겁구중궐의 전설을 듣고 이
천궐마황산에 들른 것이었다.
사상최강의 위대한 마황(魔皇)---- 만겁마종(萬劫魔宗)!
그러나, 천 년의 세월은 그의 이름을 허망하게 흩어 버린 것이었다.
만겁마종은 그저 사람들이 지어낸 전설 속의 한 인물인 양
가공화되어 간간이 의구함이 회자될 뿐이었다.
막붕비는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며 내심 탄식했다.
(행여나...... 위대한 대마종(大魔宗)의 자취라도 볼 수 있을까 하여
들렸건만 시간만 낭비했군!)
이어, 그는 눈을 들어 막막한 서북방을 주시했다.
(누님은 이미 적붕천황의 신변 가까이 육박해 있을 것이다!
서둘러야만 한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마음은 한시도 철접을 잊은
적이 없었다.
(누님의 실력으로 적붕천황의 목을 베는 것은 별게 아니다! 하나 그
자의 목을 벤 후가 문제다!)
문득 그의 눈빛이 염려의 빛으로 어두워졌다.
변황이 가까와질 수록 막붕비는 적붕천황이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적붕천황(赤鵬天皇) 철극륜(鐵剋輪), 그는 몽고족의 이대부족인
오이랍부(烏而拉府)와 달단부(達丹府) 중 오이랍왕부 출신이었다.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칭하며 그는 이미 새북 일대를 거의 장악한
상태였다. 대막(大漠)과 대초원(大草原), 신강과 막북이 이미 그 자의
손 안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에 반해, 북원(北元) 중 온건파인 달단왕부(達丹王府)는 신강의
오지로 밀려나야만 했다.
또한, 적붕천황은 청해성(靑海省)과 서장에까지 마수(魔手)를 뻗치는
중이었다.
그 결과---- 서장에서는 신화적 영웅 티무르와 대치 중이었고
청해성에서는 오정 중 유리성의 첨예들이 대집중되어 있었다.

티무르----
후일 서역 일대에 거대한 제국 티무르 제국을 세웠던 신화적 영웅.
그 무렵 그는 서역 일대를 제압하여 호시탐탐 중원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옥문관 일대에는 영락제가 보낸 육십만의 명제국 최강의
군단이 포진하여 티무르와 대치중이었다.
한데, 그런 상태에서 적붕천황이 서장으로 진출하자 티무르는 부득불
중원침공을 미루고 적붕천황과 대치 중이었다.
티무르의 입장에서 보아도 적붕천황은 실로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적붕천황의 세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것이 아니었다.
철접은 아마도 별 어려움 없이 적붕천황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 직후 그녀는 적붕천황의 백만강병이 버티고 있는 이천여 리의
대초원을 빠져 나와야만 한다.
그녀가 무사히 대초원을 빠져 나온다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막붕비가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막붕비는 검미를 모으며 침음했다.
(시간이 별로 없다! 오늘은 옥문관...... 사막을 건널 준비를 한 후
곧장 오이랍부의 적붕성으로 가야만 한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천궐마황산을
돌아보고 옥문관으로 갈 작정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스---- 윽!
멀리서 한 줄기 인영이 빠르게 서북방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막붕비는 검미를 꿈틀했다.
(무림인이 나 말고도 이 천궐마황산에 들어온 자가 있다니......!)
그는 불끈 호기심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옥문관에 가도 할 일이 없으니 저 자를 쫓아가 볼까?)
다음 순간,
슥!
그는 산봉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어,
피---- 잉!
그의 신형은 순간적으로 세 가지 경공을 한꺼번에 펼치며 날아갔다.
먼저, 쏘아진 화살같이 몸을 튕겨올린 것은 귀수왕의 비폭탄궁의
경공이었다.
그 후 허공에서 신형을 수평으로 날린 것은 유령음부경상의
유령잔마영의 경공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빛살같이 허공을 가르며
괴인영을 추적하는 경공은 바로 비파철혈경상의
비파천류행(琵琶天流行)이었다.
막붕비, 그는 옥문관까지 오며 비파철혈경을 수시로 연마했다.
비파철혈경에는 막붕비가 지금까지 연마한 그 어떤 무공보다 강맹한
다섯 가지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른 바 비파오절(琵琶五絶)!
비파천류행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것의 순발력은 비폭탄궁보다 크게 뛰어나지 않았다.
하나, 비파천류행은 시전하면 시간이 지날 수록 빨라져 마침내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이르게 된다.
가히 고금최강과 겨룰 수 있는 경공이 그것이었다.

푸---- 하악!
막붕비의 신형은 그대로 일직선으로 폭사되어 괴인영이 사라진
곳으로 나아갔다.
그는 단번에 삼십 리를 주파했다.
그러자, 문득 그의 앞에 하나의 은밀한 협곡의 입구가 나타났다.
석벽의 한쪽, 언뜻 풍상에 삭은 글자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기이하게도 그것은 문양 하나가 사람의 크기만 했다.
다른 글자들은 다 풍상에 지워져 있었으며 한 자만이 겨
우 판독이 가능했다.

<마(魔).>

그것은 바로 마(魔)라는 글자였다.
막붕비, 그는 경이의 시선으로 협곡을 바라보았다.
(이것 봐라......? 여기가 혹시 만겁구중궐의 유적지란 말인가?)
그는 기개와 호기심을 느꼈다. 다음 순간,
스윽!
그는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협곡 안으로 폭사되어
갔다.
한 순간,
"......!"
막붕비는 갑자기 눈앞이 환해짐을 느꼈다. 광활한 대분지가 갑자기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폭이 족히 사방 십여 리나 되어 보이는 엄청난 넓이의 대분지!
분지의 사방은 깎아 지른 듯한 바위 산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사나운
모래 바람이 주위를 소용돌이 치며 흐르고 있어 여간하여 발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보라! 그 소용돌이 치는 모래바람 속.
겨우 형태를 갖춘 석성(石城)의 폐허가 광활하게 벌려져 있지
않은가?
막붕비는 경이의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만겁구중궐의 폐허인가?)
다음 순간,
위---- 익!
그는 섬광같이 폐허 위를 스쳐 지나갔다. 문득,
(저 친구로군!)
막붕비의 두 눈이 기광으로 번쩍 빛났다.
분지의 끝, 하나의 인영이 외롭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아 가냘프고 왜소한 체격의 여인으로 보였다.
막붕비는 기이한 눈빛으로 검미를 모았다.
(웬 계집이기에 천 년 간 아무도 찾지 못했다는 이 만겁구중궐의
유적을 찾아온 것일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어,
스읏!
그는 질풍같이 분지 끝의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
막붕비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멍하니 등을
돌린 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검은 면사로 가려져 있었으며 일신에는 평범한 마의를
걸치고 있었다.
하나, 수수한 마의를 걸쳤음에도 고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한데,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눈이 내린 듯 새하얀 은발이 아닌가?
그것은 고아한 그녀의 분위기와 어울려 기이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때,
스윽!
막붕비는 마의여인의 뒤로 내려 서며 그녀가 멍하니 바라보는 맞은
편을 주시했다.
그들의 앞,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가로 놓여 있었다.
그 백 장 저 편, 반질반질한 청강석의 석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데, 석벽 중앙, 그곳에는 한 자 깊이의 글이 파여져 있었다.

<마황천세(魔皇千世).>

글의 내용은 그러했다.
용(龍)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龍飛鳳舞) 웅혼한 기상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 글은 최근 몇 십 년 내에 쓰여진 듯했다.
그 글을 본 막붕비의 눈꼬리가 일순 파르르 떨렸다.
(이럴 수가......! 누가 있어 일백 장을 격하고 저 청강석의 벽에 한
자 깊이로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청강석의 석벽에 쓰여 있는 글, 그것은 누군가 백 장 떨어진
이곳에서 내공의 힘으로 새긴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내공이 아닐 수 없었다.
양극천강을 얻어 일로에 내공이 증가한 막붕비, 그조차 백 장 저
편에 글을 새긴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당세에 그 누군가가 있어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한 것이다.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막붕비를 아연케 만들었다.
문득,
(여기서...... 내공을 발출했다!)
그는 기광을 빛내며 한 쪽의 돌바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큼직한
두 개의 족적이 남아 있었다.
그 신비초인은 그곳에 서서 맞은 편 석벽에 글을 새긴 것이었다.
막붕비는 침중한 안색으로 검미를 모았다.
(마황...... 천세! 만겁마종(萬劫魔宗)의 후예 중 누가 쓴 것일까?)
그는 자기 발보다 커보이는 족적을 주시하며 침음했다.
한데 그때,
주르르......
문득 맞은 편 석벽을 주시하던 여인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막붕비는 흠칫하며 여인의 옆 얼굴을 주시했다.
조각 같이 단아하고 기품 있는 얼굴, 백발인 것에 비해 그녀는
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신비한 은색 머리결 때문인지 아주 성숙해 보였으며 묘한
매력을 풍기는 여인이었다.
막붕비는 마의여인을 바라보며 검미를 모았다.
(왜...... 우는 거지? 이 은발녀는 저 글을 쓴 사람과 모종의
관계라도 있단 말인가?)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
마의여인은 그제서야 막붕비의 기척을 감지한 듯 고개를 돌려
막붕비를 바라보았다. 순간,
"......!"
"......!"
막붕비와 마의여인은 동시에 몸을 부르르 경련했다.
막붕비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저 눈빛...... 눈에 익다!)
그는 뚫어지게 마의여인을 주시했다.
기이하게도 마의여인의 눈빛은 매우 눈에 익었던 것이다. 하나, 그는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얼른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이......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마의여인은 두 눈에 한 줄기 파문이 일었다. 그녀는 막붕비가 자신을
주시하자 행여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봐 황망히 시선을 떨구었다.
"소저...... 그대는......?"
막붕비는 한 걸음 다가서며 마의여인에게 말을 건네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우---- 우!"
돌연 한 줄기 사나운 장소성이 만겁구중궐의 입구 쪽에서 들려 왔다.
순간,
(읏!)
막붕비는 귀를 막으며 신형을 휘청했다.
흡사 사나운 표범의 울부짖음 같은 날카로운 장소성.
놀랍게도 그 장소성은 막붕비의 모든 내공을 일시에 흐트러 버릴 듯
무서운 내공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의 내공을 지닌 고인을 막붕비는 이제껏 만난 적이 없었다.
이때,
"실혼여제(失魂女帝)!"
마의여인은 경악성을 발하며 분지의 입구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교구가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견하여 그녀는
장소성의 주인을 극히 두려워 하는 듯했다.
막붕비는 흠칫했다.
(실혼...... 여제! 그럼 방금의 장소성은 계집이 지른 것이란
말인가?)
그는 경악하며 마의여인과 함께 만겁구중궐의 입구 쪽을 주시했다.
그때, 두 사람의 눈에 하나의 회색 점이 질풍같이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기---- 이잉!
그 회색 그림자는 놀랍게도 한 번 도약할 때마다 무려 백여 장씩
폭사되어 날아왔다.
막붕비는 회영의 경공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내심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무...... 서운 경공이다! 비파천류행 이상이다!)
그때,
"악마...... 같은 계집! 벌써 쫓아오다니......!"
문득 마의여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소맷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순간,
(종(鐘)이 아닌가?)
막붕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마의여인의 손에 들린 것을 주시했다.
그것은 하나의 종(鐘)이었다.
크기는 반 자가 겨우 될까말까할 정도, 전체가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기이하게도 은은한 핏빛 노을이 종의 주위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종의 표면, 그곳에는 알 수 없는 글과 문양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문득,
"실혼여제! 너는 영원히 이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마의여인은 면사 속에서 두 눈을 싸늘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흘깃 막붕비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그 핏빛 종을 그대로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피---- 잉!
막붕비가 흠칫하는 순간 핏빛 종은 순간적으로 단애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흐흐! 실혼여제! 너는 헛 수고를 한 것이다!"
마의여인은 발작하듯 날카롭게 웃어 제쳤다. 이어,
쐐---- 액!
그녀는 작은 발로 힘껏 지면을 박찼다. 그녀의 가냘픈 교구는
유성같이 북방으로 날아갔다. 그녀 역시 한 번의 도약으로 오십 장을
날아간 것이었다. 그것은 막붕비의 경공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은
경공이었다.
직후,
"......!"
기이잉----!
굉렬한 선풍을 일으키며 예의 회색인영이 막붕비의 삼 장 앞에 내려
섰다.
"......!"
막붕비는 흠칫하며 회색인영을 주시했다.
회의인영 역시 여인이었다. 서른 전후 정도 되었을까? 기이하게도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음울한 회색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일신에도 역시 빛 바래고 헐렁한 회색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암울하게 가라앉은 잿빛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 그녀는
조각같이 섬세하고 미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 기이하게도 알 수 없는 허무의 그늘이 그녀의 옥용 가득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회의여인, 그녀는 등에 한 자루의 고검(古劍)을 짊어지고 있었다.
손잡이와 검집이 모두 자색(紫色)인 고검.
언뜻, 그것의 손잡이엔 검명(劍名)이 설화석고로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천존(天尊).>

그 두 글자였다.
이때,
"......!"
츠으......
회의여인은 음울한 회색의 눈동자로 막붕비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짙은 허무와 고독으로 가득한 눈빛, 그 시선을 받는 순간.
(가슴이...... 뚫어지는 것 같다!)
막붕비는 마치 심장이 파열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몸을 휘청였다.
회의여인, 그녀의 시선에는 다만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격살할
수 있는 무서운 마력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막붕비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 마! 저 계집은 전설 중의 의형살인(意形煞人)의 경지에
이른 초고수자란 말인가?)
그는 양극마강을 일으켜 여인의 눈빛에 대항하며 중얼거렸다.

-의형살인(意形煞人)!
무도의 구극(究極)적인 최종단계.
그 경지에 이르면 다만 눈짓 한 번으로 천 리 밖의 적(敵)을 살상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달리 이심제기(以心制氣), 의형즉살(意形卽煞)의 경지라고도
일컫는다.
하나, 그것은 전설로만 내려올 뿐 고금 이래 누구도 그 같은 경지에
이른 적이 없었다. 저 위대한 사대천왕조차도 의형살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데...... 막붕비의 앞에 서 있는 실혼여제(失魂女帝)라는
신비여인, 그녀에게서 그와 흡사한 기도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막붕비는 내심 찬바람을 들이키며 실혼여제를 주시했다.
(이 계집은 어느 문파의 계집이기에 이토록 터무니없이 강해
보이지?)
과연 그러했다.
실혼여제---- 그녀는 이미 강(强)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지경에 이른 듯했다. 어찌보면 전혀 무공을 연마하지 않은 듯도 보일
지경이었다.
"......!"
츳!
한동안 막붕비의 아래 위를 살피던 실혼여제, 그녀의 눈가로 문득 한
가닥 놀라운 기색이 흘렀다
"양심...... 초극마공...... 비파일맥에 신강지옥성이라......!"
그녀는 혼잣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 놀랍지 않은가?
믿을 수 없게도 그녀는 한눈에 막붕비가 익힌 모든 무공의 내력을
간파해 낸 것이었다.
"만겁...... 마종만큼은 강해지겠지만......!"
실혼여제는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막붕비에게서 시선을 뗐다.
이어 그녀는 마의여인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순간,
"잠깐! 소저는 만겁마종을 아시오?"
막붕비는 급히 입을 열어 그렇게 물었다.
실혼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지! 저 글을 쓴 자도 바로 만겁마종(萬劫魔宗)이지!
불출(不出)한 만겁마가의 후손인......"
그녀는 막붕비를 돌아보지도 않고 손으로 건너편 석벽에 쓰여진
마황천세라는 글을 가리켰다.
"저 글을 만겁마종이 썼단 말씀이오?"
막붕비는 경이의 표정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그는 석벽의 글과 실혼여제를 번갈아 주시했다.
그러자,
"귀찮은...... 아이로구나, 너는......!"
실혼여제는 힐끗 막붕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어,
스---- 읏!
그녀의 교구가 문득 깃털같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빙화정(氷花精)! 이 정도의 여유를 주었으니 본 여제에게
잡히더라도 불만은 없겠지?"
그녀는 음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슬쩍 옥보를 허공으로 움직였다.
순간,
피---- 잉!
그녀의 교구가 순간적으로 백 장 저편으로 날아가 있었다.
그때,
"빙화정...... 여협! 잠깐만......"
막붕비는 실혼여제의 마지막 말을 듣고 아연하여 급히 그녀를
불러세웠다. 하나, 실혼여제의 모습은 이미 삼천 장 저편을 날아가고
있었다.
문득, 한줄기 우울한 음성이 막붕비의 귓전을 울렸다.
"이상...... 도 하구나! 너 어린아이를...... 꼭 다시 만날 것만
같으니......!"
쉬---- 이잉!
목소리와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실혼여제의 모습은 까마득히
막붕비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빙화정! 아아...... 그렇다! 그 은발계집은 바로 혈관음
빙화정이었다!"
그는 발을 구르며 실혼여제가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혈관음(血觀音) 빙화정(氷花精)!

그렇다. 은발의 면사여인은 바로 그녀였다.
혈관음교의 제이교주이며 만겁마종의 양녀인 바로 그녀.
그녀의 눈빛이 막붕비의 눈에 익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막붕비는 낮은 신음성을 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데......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의 머리가
백발로 변했지?"
이어, 그는 다시 석벽에 새겨진 글을 주시했다.
빙화정이 그 글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막붕비는 검미를 모았다.
(설마...... 만겁마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 실혼여제라는 무서운 계집은 또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그의 뇌리에는 의혹이 구름같이 피어올랐다.
그러다 문득, 그는 생각난 듯 단애의 끝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 핏빛 종은 예삿물건이 아닌 듯싶었다. 그것 때문에 빙화정은
실혼여제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는 시력을 돋우어 아래를 주시했다.
휘---- 이잉!
고오오......!
단애 아래에서는 음산한 음풍이 치솟고 있었으며 주위는 온통 자욱한
안개가 끼어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단애가 얼마나 깊은지 추측할 수 없었다.
막붕비는 검미를 모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빙화정의 마지막 눈빛은 무엇인가 부탁하는 듯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단애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내가 그 혈종(血鐘)을 회수하기를 바란 것일까?
어쩌면 이 단애는 별로 깊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심 염두를 굴리던 막붕비,
그는 마침내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계집을 믿고 내려가 보자!)
결정을 내린 순간,
휙!
그는 즉시 단애 아래로 몸을 날렸다.
쐐---- 액!
귓전으로 비단폭 찢기는 듯한 소성을 들으며 막붕비의 몸은 아래로
떨어져 운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땅이다......!)
막붕비는 삼십 장을 채 못 내려가 전면으로 시커먼 지면이 확
닥쳐드는 것을 느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그 단애는 별로 깊지 않았다. 단지 운무에 가려
아주 깊어 보였을 뿐이었다.
일순,
콰---- 쾅!
막붕비는 확 다가서는 지면을 향해 장력을 후려쳐내고 그 반동을
이용하여 가볍게 지면으로 내려섰다. 이어, 그곳에서 위를 올려다 보니
겨우 칠십여 장이 될까말까한 높이였다.
막붕비는 고소를 지었다.
(안개 때문에 속았군!)
그는 눈을 빛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츠으......
멀지 않은 곳에서 핏빛이 번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막붕비는 성큼 그곳으로 다가섰다.
과연 그곳에 예의 핏빛 종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떨어지는
충격으로 바위에 반쯤 박혀져 있었다.
하나, 종 자체에는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았다.
막붕비는 그제서야 그 종이 보통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별로 좋은 기분이 들지는 않는 물건인데......"
그는 검미를 모으며 혈종(血鐘)을 바위에서 빼냈다.
그리고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종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무슨 글자 같은데 언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변왕 어느 부족의 글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막붕비는 검미를 모으며 종의 안쪽을 살펴보았다. 순간,
"엇...... 글이 아닌가?"
그는 흠칫 놀랐다.
종의 안쪽, 그곳에는 최근에 새긴 듯한 글이 쓰여져 있었다.
깨알같이 빽빽이 들어찬 글씨.
"......!"
막붕비는 긴장하며 그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이 부디 나의 사랑하는 딸 화정(花精)에게 전해지길 빌며 나
만겁마종(萬劫魔宗)이 적는다.>

글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만...... 겁마종!"
막붕비는 경악하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아! 그 글은 놀랍게도 만겁마가의 가주 만겁마종이 적은 것이었다.
막붕비는 아연긴장하며 계속 이어지는 글을 읽어나갔다.

<먼저 이 종의 내력을 말해 주겠다. 이 종은 천 오백 년 전
악마성황(惡魔聖皇)이 만든 악마삼보(惡魔三寶) 중 하나인
악마혈종(惡魔血鐘)이라고 한다. 종의 표면에 새겨진
악마심황결(惡魔心荒訣)을 해독하여 이 종을 울리게 되면 십 리 내의
모든 생명을 말살시킬 수 있다는 전설을 지닌 마물(魔物)이 이것이다.>

"악마혈종! 이것이 악마삼보 중 하나란 말인가?"
막붕비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신음성을 발했다.

-악마삼보(惡魔三寶)!

막붕비는 그 이름을 두 번째 접한다.
처음, 악마삼보의 이름도 바로 지옥저주마경에서 발견되었었다.

천 년 전, 오패천 중 신강지옥성은 그 악마삼보 때문에 멸망당했다고
신강지옥황은 적고 있었다.
즉, 신강지옥성은 우연히 대막의 오지에 자리한 하나의 고대석전에서
악마삼보를 얻었다.
한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당시의 사대천왕이 동시에
신강지옥성을 습격하여 악마삼보를 빼앗아간 것이었다.

-악마혈종(惡魔血鐘)!
-흡혈마황검(吸血魔皇劍)!
-천년마녀(千年魔女)!

그 세 가지가 악마삼보라고 알려졌다.
하나, 그 이름만 알려졌을 뿐 구체적으로 악마삼보가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대천왕---- 그들은 천 년 전 신강지옥성을 괴멸시킨 후 악마삼보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후일, 사대천왕이 생사의 격돌을 벌인 직접적인 원인도 바로 그
악마삼보 때문이었다.
그 결과, 악마혈종은 만겁마종이, 천년마녀는 자부천존이, 마지막
흡혈마황검은 철사대제와 태양성황이 가져갔다고 한다.
한데...... 이미 천 년 전에 사라졌다던 악마삼보 중 악마혈종이
지금 막붕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만겁마종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놈들은 이미 천년마녀를 거의 부활시킨 상태였다. 애비는 그것을
저지하려다가 자부황에게 암습당해 중상을 입었다. 겨우 놈들의 소굴을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천라지망에 걸려들어 탈출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거기에서부터 글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만겁마종의 내상이
심각하여 제대로 내공이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막붕비는 침중한 안색으로 나머지 글을 읽어 내려갔다.

<화정......! 애비는 너를 사랑한다. 영리한 네가...... 애비 대신
놈들에게서 네 어머니와 만겁마가를 잘 지키리라 믿는다. 그리고......
십 년 전에 막북 천빙곡을 괴멸시킨 자를 알아냈다. 그 놈은 바로
단목(丹木)......!>

글은 거기에서 돌연 끝나 있었다. 아마도 그때 만겁마종의 종적이
추적자들에게 발견된 듯했다.
"......!"
막붕비는 안타까운 눈으로 다시 한 번 글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아깝구나! 이십 년 전 막북 천빙곡을 괴멸시킨 원흉을 알 수
있었는데......"
그는 만겁마종의 글이 더 이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만겁마종은 이것을 십 년 이전에 썼다. 그때는 빙화정이 혈관음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문득, 막붕비는 안면에 의혹의 빛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 만겁마가를 지배하며 겁풍을 일으키는 만겁마종은
누구지? 이 글을 남긴 만겁마종이 그 후 신비집단의 포위망에서 빠져
나왔단 말인가?"
그는 검미를 찌푸리며 염두를 굴렸다.
악마혈종---- 그것은 아마도 최근에 빙화정에 의해 발견된 듯했다.
그 결과 빙화정은 막붕비가 모르는 또 다른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막붕비는 몸을 일으켰다.
"북원(北元)에 갔다온 후 빙화정을 꼭 찾아내어 만나봐야겠다. 이
글의 내용만으로는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구나!"
이어, 그는 악마혈종을 조심스럽게 허리춤에 찼다.
한데 그때, 문득 한 가닥 역겨운 냄새가 막붕비의 후각을 자극했다.
막붕비는 검미를 꿈틀했다.
(무엇인가 썩고 있는 듯한 냄새인데......)
그는 곧 냄새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막붕비는 하나의 석벽 앞에서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왜소한 체구를 지닌 사내의 시체였다. 시체는 석벽에
무엇인가 쓰다가 엎어져 죽어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되지 않은 듯
시체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데, 그 사내는 겉옷을 누군가 벗긴 듯 속옷만 입고 있었다.
(흠...... 이것 봐라? 이 사람은 누군데 이런 곳에 와서 죽어
있지?)
막붕비는 호기심으로 눈을 번뜩였다. 이어,
툭!
그는 발 끝으로 엎어져 있는 시체를 바로 눕혔다. 순간,
"윽!"
그는 입을 감싸며 신형을 비틀했다. 하마터면 그는 토할 뻔했다.
아! 끔찍하게도 그 시체는 얼굴가죽이 누군가에 의해 통째로 벗겨져
있지 않은가? 가죽이 벗겨진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
막붕비는 그 끔찍한 몰골에 몸서리를 쳤다. 이어, 그는 자칫 토할
것을 억누르고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얼굴없는 시체에 심상치 않은 내력이 있음을
감지했다.
(누군가 인피면구를 만들기 위해 이 자의 얼굴가죽을 벗긴 후 이
계곡에 던져 버린 것이 분명하다!)
막붕비, 그는 시체의 부패 상태를 살피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대략 열흘 정도 전에 죽었다. 이 자의 얼굴을 벗겨간 자도 지금쯤
이 사람의 인피면구를 완성했을 것이다!)
그는 검미를 모으며 침음했다.
시체에서는 아무런 단서나 소지품도 발견되지 않았다. 흉수는 사내의
얼굴 뿐 아니라 소지품과 의복까지 완전히 탈취해 간 것이었다.
하나, 한 가지 단서는 있었다.
흉수가 사내를 이곳에 투기했을 때 그는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내는 숨이 끊어지기 전에 사력을 다해 석벽에 무엇인가를
썼다.
하나, 그 글은 아주 흐릿하여 잘 판독이 되지 않았다.
"......!"
막붕비는 한참을 끙끙거린 후에야 겨우 그 글을 판독해 낼 수
있었다.
시체의 주인은 죽기 직전 십여 자의 글을 석벽에 남겼다.

<유(琉)...... 리(璃)...... 옥황(玉皇)......
환마령(幻魔靈)에게......>

그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유리옥황! 이 인물이 설마 유리옥황이란 말인가?"
막붕비의 눈빛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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