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모 42회
누나들과 상의한 끝에 우리는 아침을 간단히 먹기로 했다. 우유에 과자 말아 먹는 정도로 간단하게는 아니고 빵과 샐러드, 계란, 베이컨 등이었다. 조리가 간단해지니 나와 누나들 전부가 부엌에 들어갈 필요도 없어 대학생이 되면서 아침에 가장 여유가 있는 연주누나가 거의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결 여유가 생겼다.
“남녀 합반 했다며?”
“응. 1학년만..2.3학년은 그대로고..”
“.......”
“컥..나를 죽일 생각이야?”
“짜증나!”
작년까지만 해도 건물 자체가 달랐는데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남녀합반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연주누나는 넥타이를 매 주면서 그걸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대답을 해줬는데 넥타이가 목을 조였다.
“왜?”
“너..바람피우면 죽어!”
“허...참...엄밀히 말하면 누나도 남녀공학인데?”
“너랑 내가 같아? 흥! 나는 백설처럼 청순한 소녀고..너는..흥!! 전과가 있잖아..”
“흐응~알았어. 알았어. 나 늦겠다.”
“흥! 하여간 걸리기만 해...”
순간 머릿속에서 슬기누나가 지나갔다. 찔리는 것이 있어 서둘러 가방을 들고 나가자 누나가 계속해서 따라오면서 쫑알거렸다. 어제 밤의 일이 누나에게는 아주 큰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고, 동시에 양심이 아팠다.
“그냥 가?”
“쭙~”
“히히. 끝나고 일찍 와~”
“응..”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환하게 웃으며 배웅하던 누나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행복에 젖은 미소와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 그 사이로 조금 삐져나온 혀는 꿀을 발라 놓은 홍시처럼 먹음직스러웠다.
‘미친놈. 누나를 먹음직스럽다고 느끼다니..’
사람의 인식은 대체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는 모양이다. 사랑을 얻는 방법이었던 ‘결합’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랑은 없고 결합이 목적이 되어간다. 정말 사랑이 목적이라면 절대로 누나를 여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정말 누나를 사랑한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양심이 말한다.
‘하지만 누나도 원하잖아? 거절당하면 더 상처받을 수도 있고...’
“와~~”
탕탕탕!
“조용!!”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1교시가 시작되고 국어선생님과 어떤 여자가 들어왔던 모양이다. 17세 젊은 수컷들이 선생님과 함께 들어온 젊은 암컷을 보며 함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생각이 끊어졌다.
탕탕탕!!!
“조용해. 이 짐승 같은 놈들아!”
슬기누나. 상미누나 또래로 보였다. 깔끔한 정장이 어색해 보였다. 그녀 스스로 불편해 하고 있는 느낌이다. 옷도 이 자리와도 동화되지 못하고 겉돌았다.
“직접 소개하시죠..”
“네..이번에 교생으로 온 한소연이에요. 잘 부탁합니다.”
“와~~~”
다시 요란한 박수와 함성이 살아났다. 아까의 생각 때문에 환영하는 것보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우~ 짐승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옆줄에 앉은 여자애들이 그런 남자애들을 힐난한다. 그러나 다음 시간에 들어온 남자 교생을 보고는 여자애들 역시 그들의 본성을 드러냈다. 새로운 교생 선생님들의 등장은 교실을, 아니 학교 전체에 눈부신 활력을 선물했다. 쉬는 시간마다 애들끼리 모여 교생 선생님들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리고 5교시. 점심을 먹고 봄날의 따듯함에 나른하게 젖어 있는데 그녀가 들어왔다. 순간 환상이거나 꿈이라고 생각했다.
“이 수영이에요. 잘 부탁해요.”
“.........”
지금까지 여자 교생 선생님이 들어올 때마다 울렸던 함성도 멋진 남자 교생을 맞이했던 비명도 없었고, 못생긴 선생님을 맞이하는 매너 박수도 없었다. 남자를 양으로도 만들고 늑대로도 변하게 하는 그녀의 페르몬. 익숙하면서도 잊혀져가던 그것이었다.
두근. 두근.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녀를 만났기 때문인지, 여전히 강력한 유혹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업시간 내내 내 뒤에 바짝 붙어 서 있기 때문인지 계속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 그녀의 냄새가 몇 가지 과일냄새와 섞여 솔솔 다가왔다.
‘오랜만이죠?’
끄덕..
‘잘 지냈어요?’
끄덕..
‘학교 끝나고..가지 말고 기다려요. 할 말 있어요..’
끄덕..
등 뒤에 있음에도 그녀가 미소 지었다고 느꼈다. 그녀는 종소리와 함께 떠났는데 그녀의 냄새가 남은 수업시간 내내 주변을 맴돌았다. 오늘 맡았던 냄새 뿐 아니라 내 기억 속에 있던 냄새들까지 느껴진다. 그녀의 아랫입에서 흘러나오던 냄새와 욕실 안에서 힘겹게 맡았던 무거운 냄새.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의 땀 냄새. 가슴을 빨면서 느꼈던 젖 냄새.
‘그녀를 보고 싶었던 걸까?’
남은 시간이 지루했다. 평소보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나는 지금 그녀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종례를 마치고 교단 옆, 학교와 역사를 같이 했다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황급히 몰려 나가는 애들을 바라봤다. 움켜진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빠져나가 학교는 금방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즈음 또각 거리는 소리를 내며 수영이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이 낮술이라도 한잔 한 것처럼 불그스레했다. 그러나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더 잘 알았다. 그녀가 그런 얼굴이 되었을 때, 치마 속은 폭우가 쏟아지곤 했다.
“...............”
“...............”
아름드리나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섰다. 수영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 오히려 많은 편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알고 있는지. 희주는 잘 있는지. 더욱이 그녀가 교생 같은 걸 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듯이 그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
“한번은 오실 줄 알았어요.”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찾아 왔어요..”
“나를?”
“.....네...”
오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왜?’ 라고 묻는다면 내숭일까? 그녀 마음을 몰라준다고 섭섭해 할까? 묻지 않는다면 오만일까? 내가 생각하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버지 일이나 희주 때문 일수도 있고..’
“..............”
하지만 말로는 묻지 못하고 침묵으로 물었다. 그동안 시간의 단절이 우리 사이의 나무처럼 벽이 되었다.
“전...당신이...”
“...............”
“당신은 왜...”
“..............”
“...........저를 버린 건가요?”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나 아닌 사람은 역시 알아듣지 못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전부 이해되었다.
‘전...당신이...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왜 저에게 체벌을 가하고 명령을 했나요?’
‘전부 거짓이었나요? 아니면 사랑이 식었나요?’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남자에게 의존하고 지배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여자였다. 내가 그녀에게 보여줬던 행동이 그녀의 이상에 조금은 부합되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녀의 방식으로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던 듯하다.
‘이제 겨우 17살인데...’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할지. 대견하다고 할지 심란했다. 교문을 향해 나도 모르게 몇 걸음을 걸어갔다.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였을 수도 있었다.
‘병신..비겁한 것도 정도가 있지..’
고개를 돌려 수영을 바라봤다. 떨고 있었다. 최소한 그녀는 나를 17살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사회적 통념이 어떻든 그녀가 나를 어른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른인 것이고, 애라고 생각한다면 애가 맞다.
‘...........’
나는 내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녀는 또한 그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것이 서로 맞지 않으면 오해가 되고 불신이 쌓인다. 반대로 일치한다면 긴 말이 필요 없는 관계가 된다. 모 대통령이 말한 ‘코드’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수영과 나는 그 코드가 맞다. 내가 한번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 의중을 읽고 기쁜 미소를 지으면서 따라왔다. 한 걸음의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그녀는 존경하는 스승을 따르는 제자나 왕족의 수발을 드는 시녀같이 조심스럽다.
‘그게..수영의 기질이었지..’
“어디 살아?”
“AD동에...”
“한번 찾아 올 줄 알았다더니?”
“.........”
이사는 했어도 내가 자기를 찾아 올 수 있는 방법은 강구해 두었다는 의미다. 그런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 수줍은 미소로 대답한다.
“오실래요?”
“...응...”
“그럼...이쪽으로..”
집에서 작은누나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반짝 반짝 빛나는 얼굴로 한껏 기대하며 묻는데 차마 안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작은 누나 입장에서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수영은 나를 이끌고 소형차에 태워 달렸다.
“운전은 언제부터?”
“얼마 안돼요..”
밀폐된 차 안에 앉으니 그녀의 냄새가 진해졌다. 차에 밴 냄새가 아니라 새롭게 나오는 진한 페르몬이었다. 그것을 느끼고 예전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남자를 끓어 당기는 야릇한 표정이 아닌 차분한 얼굴도 그렇고 교생 일 때문이겠지만 옷차림도 많이 얌전해졌다.
‘저 안의 몸도 변했을까?’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몸을 그려낼 수 있었다. 더욱이 지금은 봄이었고, 그만큼 옷도 가벼워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려가면서 하나하나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으음...운전하는데...그러지 마요..”
“뭘?”
“...그런..눈으로..보면..힘들어져요..”
“뭐가 힘들어지는데?”
“아이~”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젖어 있는지, 젖었으면 예전의 그녀처럼 팬티를 입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되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또 아기처럼 매끄러운 털 없는 아랫입도 다시 보고 싶었다.
“지금은 싫어요..무서워요..”
“뭘?”
“.....만지려고 했잖아요..”
“......싫어?”
“....거의 다 왔어요..”
그녀 말처럼 차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고, 탁아소를 겸하고 있는 유치원에 들려 희주를 안고 돌아왔다. 또 얼마 안가서 한산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수영은 유치원에서부터 별다른 말없이 희주를 나에게 안겼다. 그 태도가 너무나 당연해서 덩달아 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많이 컸네?”
“얼마나 떼쟁이인지 몰라요..낯가림도 심해서 아무나 못 안는데..오랜만에 봤어도 아빠는 기억하고 있나 봐요?”
“그래?”
‘아빠?’
오빠라는 말을 잘못 들었겠지만 순간 철렁했다. 수영이 저녁을 하는 동안 희주를 안고 있으면서 생각해보니 아빠라는 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앞으로 수영을 아버지의 여자로만 대한다면 오빠가 될 것이지만 내 여자로서 받아들이면 아빠라고 해 두는 것이 갈등의 소지가 적었다.
‘수영도 잘못 말한 것이 아니라 그걸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고..’
“여보..식사하세요..”
“..응....”
상미누나와 보라누나가 떠날 때 섭섭하고 가슴 아팠던 것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 어쩔 수 없이 떠나가는 그녀들 덕분에 내가 ‘나쁜 놈’이 돼야 하는 순간은 비켜갔다.
다시 꼬이고 있다. 마음이 복잡했다. 기쁘고 불안하다. 한순간 어긋난 선택을 해서 이 모든 것들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긴장된다. 긴장과 함께 전율도 있었다. 또한 엄마. 동연누나. 수영. 상미누나. 보라누나의 경험으로 떠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떠나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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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점심시간에 100번째 꽃바구니가 오지 않아 웬일인가 했더니 퇴근할 무렵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꽃다발과 함께 다이아반지를 내미는 명수였다.
‘참...창의력 없는 사람..’
“현주씨. 사랑합니다. 저랑 결혼해 주십시오.”
“죄송하지만..결혼 생각이 없어요..”
“네?”
명수씨가 너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 덩달아 놀랐다. 마치 100%의 확신을 갖고 있었던 듯 했다. 무엇이 그에게 그런 확신을 주었을지 궁금하다. 100개의 꽃바구니였을지, 아니면 내가 그에게 오해의 소지를 주었던 것인지.
‘꽃을 받으면 안 되는 거였나?’
“왜?”
“네? 아..그야..명수씨와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어정쩡한 태도가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면 확실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제는 질질 끌면 서로 힘들다. 그러니 차갑고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옳다.
“왜요? 왜 사랑하지 않는데요?”
“...........”
너무 똑똑한 사람이라 사랑하는 이유도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1+1이 2가 되는 것은 다소 어렵지만 증명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나로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내 마음이 그래요..”
“다시 생각해 보세요..”
“.........”
대화가 안 된다는 느낌. 오래전부터 계속 받아 왔다. 이런 것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설명하기 어렵고 귀찮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그의 사랑도 신뢰성을 잃었다. 그의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요..사랑은 가슴으로 하고 싶어요..”
“...................”
무슨 소리냐는 눈빛.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니 그럴 수도 있겠고, 그의 잘못은 아니다. 단지 내 남편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런 눈빛을 보낸다면 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것이다.
“그러니...저보다 좋은 사람...만나길 빌게요...안녕히 계세요..”
“.............”
반지를 움켜진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그의 눈빛에도 분노가 어렸다. 핸드폰을 식탁 밑으로 잡고 재석에게 문자를 보냈다.
“전 명수씨 상대로는 모자라는 것 같아요..”
“그건! 그건 내가 감수할 문제에요. 현주씨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니요. 서로 수준이 맞아야죠.”
무섭기도 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하는 남자라서 불쌍한 마음에 위로라도 해 주려고 했는데 말을 나누면서 더욱 기분만 상했다. 어쩐지 그는 내가 자신보다 쳐진다는 내 말을 쉽게 수긍하는 듯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청혼하면서 100% 확신을 가졌던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자기가 손해라고 생각하면서 나랑 결혼하겠다는 이유는 뭐야?’
‘좋아하기는 하는 건가?’
나는 그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가 나랑 결혼하자고 하는 이유가 사랑해서였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는 의미가 다르더라도 최소한 ‘좋아하는 마음’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 말이 듣고 싶었다.
“저랑 결혼하고 싶은 이유가 뭐에요?”
“......그거야....착하고..예쁘고..”
“저보다 착하고 예쁜 여자는 많아요..”
“............”
청혼을 거절한 것은 분명 나인데 어째 대화가 길어지면서 더 열이 받는다. 마침 커피숍 입구로 재석이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서웠던 마음도 사라지고 동정심도 없어졌다.
“그럼 전 이만...”
“현주씨!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전 끝났어요..”
“........”
“아파요...”
“아직 안 끝났다고 말했다..”
명수는 일어나 떠나려는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목이 시큰할 정도로 강하고 위협적이라 순간 당황했고 위축되었다. 또 주변의 시선이 몰려드는 것이 너무 창피했다.
“누나!”
“재석아~”
“..........”
“당신...그...검사?”
“너 이사람 알아?”
“누나야 말로 어떻게 알아?”
“..............”
박명수는 지금까지 당당하고 위협적이던 모습은 씻은 듯 사라지고 당황해 하다가는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그런 변화에 나도 재석이도 할 말을 잃고 바라만 봤다. 뭔가 불길하고 의도적인 냄새가 난다. 그러면서 몇 달 전 도둑 사건이 상기되면서 새로운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걱정 마 누나..”
“..응...”
재석이가 안아 준다. 재석이가 안아주고 싶어질 만큼 나는 몸이 떨렸다. 그리고 신비한 마법처럼 재석이 품 안에서 진정되었다. 이 험한 세상에 단 하나, 안전하고 따듯한 그 곳을 찾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