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 호르돈 06 (환관 카이만)
#01-06 세리(稅吏) 호르돈
"호르돈군, 잠시 이야기좀 할 수 있을까?"
서류와 문서로 가득차 두툼해진 가방을 양쪽 어깨에 한 개씩 맨체 느릿하게 걸어가던 호르돈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기아트"님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돌린 호르돈은 오른쪽 뒤의 복도에 서 있는 풍체좋은 노인의 모습을 발견하곤 고개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그의 이름은 "기아트 타르바리엔"으로 레오니아 제국 "정무부상(政務府相)"의 자리에 위치한 자였다.
"호르돈군 자네는 여전 하군. 참..."
기아트는 호르돈이 매고 있는 두툼한 가방을 한번 스윽 내려다 보고서 말했다.
"뭐 그다지 무거운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제 일이니까요."
"내가보기엔, 곧 이 대 제국의 "세무부상(稅務府相)"자리에 오르게 될지도 모를 사람이 해야 일이 고작 짐꾼노릇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그는 살짝 한심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아트 타르바리엔. 이 사람은 아마도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면서 부터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나왔을 지도 모르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레오니아 제국 400여년간의 역사동안 무려 4명의 재상을 배출한 "타르바리엔"가문은 제국 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유서깊은 "흑족"의 혈통이었다.
기아트는 극히 제한된 몇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땐 언제나 반말과 명백한 하대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이기도했다. 심지어 직접 하대를 당하고 있는 사람이 느끼기에도 말이다!
"흥... 자넨 흑족이자 왕족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야. 당연히 그 혈통과 위치에 걸맞는 위엄을 지켜야만 하는 것일세. 그것 또한 지배자의 일이자 역할인거야. 앞으론 그런건 시종에게 들도록 하게."
"글쌔요, 요즘 계속 책상에만 앉아있어서 그런지, 차라리 짐꾼들과 일을 바꾸고 싶을 지경입니다만..."
"그... 참..."
기아트는 못마땅한듯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호르돈의 얼굴을 한번 살짝 쏘아보고선, 다시 표정을 고쳐잡으며 말했다.
"호르돈군, 자네 제국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나?"
호르돈은 머리속으로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모른척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황제폐하의 광영(光榮)과 함께 만세를 누리겠지요."
호르돈의 말을 무시하기라도 하듯이 기아트는 담담하지만 뚜렷한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말리어스공은 뛰어난 사람이지. 그의 힘이 없었다면 제국이 지금보다 휠씬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는 너무 늙었다네, 제국에는 그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할거야."
"그리고 그 지도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요, 기아트공?"
기아트 타르바리엔은 그야말로 타고난 지배자이자 동시에 뛰어난 지도자라고나 해야할만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야심과 명예욕 또한 큰 남자였다. 제국의 부서들중에서도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무부(政務府)"의 "상(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재상(宰相)"이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번의 동방에 대한 의견차이로 생겨난 지도층의 다툼이야 말로, 재상의 입지를 하락시키고, 나아가 실각시킬 수도 있을만한 실마리를 끌어낼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쇄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호르돈이었다.
"호르돈군, 나는 평소에도 자네의 능력을 아주 높이 사고 있다네. 자네는 아직 젊고 모르는게 많다는게 조금 문제이긴 하지만, 분명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네. 특히나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일세."
현 재상 "페르데 말리어스", "혼음황제(昏淫皇帝) 루스타 레오노스"가 했던 일중에서 유일하게 한 가지 잘한 일이 있다면, 바로 페르데 말리어스를 재상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다재다능"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거의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판단력과 행동력을 보여주고 있었며, 동시에 절제력과 충성스러움, 그리고 놀라운 용기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도 단점이라 할만한 것이 있었으나, 어찌보면 그것이야 말로 오히려 그의 진정한 장점이라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는 "말리어스"가문이라는 꽤 유력한 기사가문의 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걸 이용한적이 없었다(-물론 제국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 구조상 파벌이란 만들기도 어렵고, 그 영향력도 크지 않았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지독한 금욕주의자였으며, 동시에 한 번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도무지 타협할 줄을 모르는 옹고집통이기도 했기에, 소위 정치게임을 통해 힘과 영향력을 키워가는 다른 귀족들에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괴짜취급을 받곤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제국 상부의 귀족과 장관, 정치가들이 자신을 껄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천공의 방"이라는 데몬스트레이션을 앞세워 가며, 그들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기아트가 자신의 파벌을 모아 의견을 다져 모으기 이전에, 이렇게나 빠르고 갑작스러운 회의를 마련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그 너무나 외롭고 청렴한 재상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가 조금만 정치공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진작 호르돈에게 손을 뻗혀왔었을 것이다. 물론 그 공작을 과연 호르돈이 받아 주었을지 어떨지는 몰랐지만...
"글쌔요. 저는 그저 "부상(副相)"일 뿐입니다. 세자이로님께서 뭔가 말씀을 해주셨다면 모를까, 대리인 제가 보여드릴것은 이것 뿐이 없습니다."
호르돈이 어깨에 맨 두툼한 서류가방을 툭툭치며 말하자, 기아트는 두 눈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빛을 듬뿍 띠우며 말했다.
"흐흠, 그렇지, 그렇지. 자아 어서 가세. 천공의 방은 너무나 높으니까."
* * *
"오! 호르돈공 이거 오랜만이외다! 얼굴 보기 참 힘들구려."
재무부상(財務府相) "포어겔스 무어"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활짝 웃으며 회전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호르돈을 반겼다. "5.5크린(181cm 정도)"을 훌쩍 넘기는 큰키에 떡벌어진 어깨, 그리고 곰처럼 커다란 체구는 그를 문관이라기 보다는 마치 기사나 전사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포어겔스는 2년 전 아내를 잃고, 작년에 새장가를 든 이후로 꽤나 살이 불어 있었다. 물론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히 담겨진 규벌결혼이었지만, 그의 경우에는 아마도, 별달리 그 어떤 불만도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결혼이었을것이다. 왜냐하면 신부가 17살의 소녀, 그것도 엄청나게 아름다운 미소녀였기 때문이었다.
서방 대륙 "엘스링드"라는 작은 왕국의 공주였던 그녀는, 우유를 쏟아 부은 것처럼 하얗고 고운 피부와, 가느다란 몸의 선과는 달리 꽤 뚜렷한 굴곡을 보이는 몸매, 곱게 흘러내린 푸른 곱슬머리와, 샤파이어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그야말로 막 피어난 꽃봉오리같이 아름다운 신부였다.
호르돈은 결혼식내내, 히죽거리던 포어겔스의 얼굴만큼이나 그녀의 모습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저 그녀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고, 호르돈은 어느새 그 어린 신부의 모습을 자신의 큰 딸 라샤의 모습과 겹쳐보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죽었다가 깨어나도 라샤가 저런식으로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결혼하는 꼴을 볼 생각은 없었지만...
포어겔스는 그 능력 자체는 평범한 편이었으나, 위와 아래를 막론하고 언제나 좋은 평판을 달고 다니는, 말하자면 "덩치에 안어울리게" 뛰어난 처세술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적인 모습이었고 그 사생활 자체는 "난잡"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향락적인 면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무어공."
"아아아... 이거 우리사이에 뭘 그리 딱딱하게 그러시오? 이름으로 불러달라니까 참..."
"예. 깜빡했군요. 안주인과는 잘 지내시고 있습니까?"
호르돈의 말에 포어겔스는 호쾌하게 웃으며 호르돈의 어깨를 살짝 끌어 잡아당기고선, 슬금 슬금 음흉한 웃음을 얼굴에 띤체 작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나의 사랑스러운 "나이샤"와 내가 얼마나 잘지내고 있는지 직접 보여줄 수가 없어서 아쉬울 정도로 말이죠. 클클클."
그러고 보면 새신부를 들인 이후로 포어겔스의 주색잡기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는 소문을 들어본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허허허. 너무 무리하시는거 아닙니까?"
물론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호르돈의 가슴 한 구석에선 왠지 이제 막 18살뿐이 안된 소녀가, 51살씩이나 된 이 남자를 상대로 고생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일었다.
"무리뿐입니까? 그보다 더한거라도 할 만큼 나랑 나이샤는 궁합이 잘 맞는다오. 클클클."
"허어... 그렇다면 다행이겠지요."
"클클클. 호르돈공이 나를 이렇게나 신경써주다니 이거 참 몸둘바를 모르겟구려."
포어겔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하곤, 주변을 한번 쑥 훑어보았다. 보아하니 이미 재상 페르데를 제외한 모든 상(相)들과 장관들이 모인듯했고, 여기 저기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포어겔스는 정무부상 기아트와 그의 파벌들을 슬쩍 훑어보고는 나직히 소리를 죽여 말했다.
"이거 잘하면 오늘 재상각하께서 끝장 나실지도 모르겠구먼, 안그렇소 호르돈공?"
분명히 그랬다. 이렇게 회의시간을 앞당겨서 기아트와 그 파벌의 영향력을 줄이는게 고작일뿐이었고, 특히나 호르돈이 중립 즉 기권을 선택한다면 재상에겐 거의 승산이 없다 할 수 있었다. 결국 아무리 재상의 권한이 국정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고 있다한들 모든 부서와 상, 장관들이 반대를 무시할 순 없는 것이었다. 물론 최종 결정은 오로지 한 사람 황제만이 내리는 것이긴 했지만...
"..."
"자아 아직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자리에 앉아서 조금 정리를 해봅시다."
기아트가 작게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마치 벌써 자신이 의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회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약 30분 정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아트에겐 자신의 최종승리를 점검할 소중한 시간이리라.
"안건은 이미 모두들 알고 있듯이 동방부의 공왕(共王)이 제위(帝位)의 칭함을 허가해 달라는 것인데, 공왕은 이에 많은 황금과 보물을 황제폐하의 광영에 대한 감사의 예로서 덧붙이겠다 하였소. 우리 모두는 대 레오니아 제국의 지혜롭고 충성된 종복들로서 위대하신 황제폐하의 결정을 도와 드려야하는대 이에 어떤 의견들이 있다면 내놓아 보시오."
다들 작게 웅성거릴 뿐 대답이 없자. 좌중을 한바퀴 둘러본 기아트는 천천히 오른손바닥을 한 사람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무래도 황금에 관련된 일은 무어군, 자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지?"
기아트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놀란 호르돈은 지명된 포어겔스를 처다보았다. 재상의 편이라는 것이 분명한 재무부상 "포어겔스 무어"에게 첫번째 발언을 시켜 버린다면, 시작부터 이 회의의 분위기가 재상쪽으로 기울어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호르돈은 머리속에 의아함을 가득 담은체 자리에서 일어나는 포어겔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회의가 아직 시작된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첫번째로 불러주시니 일단 영광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인사를 마친 포어겔스는 갑자기 마치 장난을 치려는 아이처럼 짖굳은 표정을 순간적으로 지어보이고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잘 아시다시피 현재 우리 제국의 재정은 급격히 악화되어있습니다. 각왕국이나 영지는 물론이고, 저 멀리 동방이나 서방에까지 발행한 국채는 물론하고, 선황제 폐하께서 제 3황궁을 건축하시면서 쌓은 국채까지도 절반 이상 남아있는것이 현 상황이지요. 빚이 또 다른 빚을 만들어 내는 악순환이 60년 넘게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포어겔스는 동방에서 제위의 대가로서 주기로 약속한 보화의 목록이 적혀진 누런 종이를 왼손으로 살짝 쥐고선 오른손의 검지로 툭툭 치곤,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60년전에 이정도의 황금이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제국에는 황궁이 서너 채 정도는 더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포어겔스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호르돈은 자리에 앉아 있는 포어겔스의 얼굴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비릿한 미소를 보고서야, 이미 그가 기아트에게 포섭당해서 재상을 배신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어찌보면 배신이라고 말할순 없었을지도 모른다. 애시당초 포어겔스나 다른 사람들의 일방적인 추종이었을뿐, 재상은 원래부터 그 누구도 파벌로 하지 않았었으니까.
"자아... 그럼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볼까요?"
기아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듬뿍 머금은체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좌중을 향하여 승리의 선포라도 하듯이 말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커다란 목소리가 천공의 방을 울렸다.
"이런 독수리둥지같은 곳에 옹기 종기 모여서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는가?"
한 사나이가 회전계단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화. 화... 황제 폐하!"
거의 6크린(198cm)에 달하는 근육질의 거한은 다름아닌, 레오니아 제국의 황제 "가이론 레오노스"였다.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
타원형의 탁자에 둘러 앉아 있었던 신하들이 일제히 일어나 돌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예를 올렸으나, 천공의 방에 들어선 황제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시녀들을 잔뜩 이끌고, 성큼성큼 걸어가 원탁의 끝 머리쪽에 자리한 큼직한 석조 왕좌에 걸터 앉으며 가볍게 왼손을 들었다.
"황제폐하의 광영에 감사드립니다."
"황제폐하의 광영에 감사드립니다."
"황제폐하의 광영에 감사드립니다."
...
신하들은 일제히 황제의 답에 다시 예를 올리며 공손하게 탁자에 앉았다. 의자다리가 살짝 바닥을 긁는 소리, 옷자락이 사그락거리는 소리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좌중에서는 이미 어떤 웅성거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도대체 왜 황제폐하계서 지금 이곳에 와 계신가?"
약간씩 다르긴 하겠지만 좌중의 머리속에 공명하고 있는 단 한마디의 말은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좌중을 한바퀴 둘러본 황제는 뭔가 떨떠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흐음... 재상은 아직 안왔나보군."
하지만 이때 호르돈의 머리속을 갑자기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재상 페르데 말리어스는 이미 자신의 패배를 알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비록 겉치례뿐일지라도 이 레오니아 제국에서 최종결정을 내리는 것은 다름아닌 황제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황제의 눈앞에서 싸움을 해 보겠다는 것.
분명 이것이 재상이 준비한 최후의 노림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