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달 - 99부
현희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썩 좋은 학교는 아니라도 현희가 이미 대학에 합격한 후라
정석과 경숙은 홀가분하고 대견한 마음으로 현희의 졸업식에 참석을 했다.
나한철이 현희의 졸업식에 오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두 사람 사이를 모르는 정석과 경숙은 바쁜데 뭘 오느냐며 나한철을 말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졸업식에서 보니까 현희가 자신들보다는 나한철과 더 많이 사진도 찍고
나한철에 매달려 애교까지 부리는 것을 보며 둘 사이가 언제 그렇게까지 가까워졌는지 의아해 했다.
그래도 그냥 현희가 나한철을 삼촌처럼 생각해서 따르나보다고만 여기고 딴 생각은 안 했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나한철이 현희와 함께 정석 부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뭔 일인가 어리둥절해 있는 정석과 경숙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현희를 저에게 주십시오!"
"응? 현희를?.....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얘기라 정석은 얼빠진 말로 나한철에게 되물었다.
"저 현희와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엉? 그게 무슨 소리야?......"
정석과 경숙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가 나한철과 현희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어떻게 된 일인지를 상대방에게 눈으로 물었다.
"현희야! 너 이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경숙이 현희에게 물었다.
"엄마아!.......나 삼촌이랑 결혼할래!......."
현희가 숙였던 고개를 겨우 들고 경숙을 향해 구원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뭐?.......너 미쳤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경숙의 입에서 과격한 말이 나왔다.
"그게 아니고!.....나 삼촌 사랑한단 말이야!......."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현희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경숙은 숨이 탁 막혔다.
"뭐? 사랑?.........하이고!.......얘가 정말 정신이 나갔나?!........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내가 무슨 피가 안 말라?!......나도 다 컸는데?!......."
입을 삐죽거리며 말대꾸를 하는 현희를 보자 경숙은 머리를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나한철이 한없이 미워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현희를 나한철이 살살 꼬드겨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경숙이 나한철을 못 마땅한 눈으로 노려봤다.
정석은 옆에서 한숨만 내쉬다가 담배를 피어 물었다.
나한철이 일단 현희와 혼인신고를 해놓고 현희가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자기가 뒷받침을 하다가
현희가 대학교를 졸업하면 그 때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누구 마음대로 혼인신고를 하고 무슨 결혼식을 올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경숙이 나한철을 향해 쏘아댔다.
"형수님! 죄송합니다!.......하지만 꼭 현희를 행복하게 해 줄 거예요!......"
"행복은 무슨 얼어죽을 행복이야?.....
어디 여자가 없어서 현희 같이 어린애를 건드리고.......사람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경숙은 자신과의 일도 있는데 딸까지 건드렸다는 생각을 하니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튼 그 날은 그런 정도로 끝이 났다.
그 날부터 정석과 경숙은 현희의 일로 골머리를 싸맸다.
경숙은 끝까지 안 된다는 주장이었지만 정석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정석도 처음 나한철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동안 자신이 나한철에게 어떻게 했는데
나한철이 자신의 어린 딸까지 넘보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편으로 그게 꼭 그렇게 나쁜 일 같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나한철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 나한철은 능력도 있고 사람의 심성도 착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과 회사를 만들어 이만큼 키워놓은 것도 전부 나한철의 공이었다.
만일 주변에 나한철의 나이에 걸 맞는 참한 색싯감이 있었다면
정석은 조금의 주저 없이 나한철을 최고의 신랑감으로 소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희의 신랑감으로는 걸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현희 쪽으로 보면 결혼 운운하기에는 아직 너무 나이가 어렸다.
나한철은 현희와 나이 차가 많이 난다는 것,
한 번 결혼을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경숙과의 과거 일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경숙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그나마 근래에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했다.
나한철과 현희의 관계가 어느 정도 깊이까지 갔는지를 물어봤더니
경숙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갈 데까지 다 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몰리는 것은 여자 쪽이라는 생각에
정석은 어느 날 나한철과 술자리를 마련했고 나한철의 확고한 결심을 듣고는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대학을 졸업한 후가 되든 언제가 되었든 시집을 보내야 할 것이라면
그것이 지금이면 또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철만한 사윗감도 드물다는 생각과 회사의 앞일을 생각하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거기다 두 사람이 좋다는데 굳이 반대해서 서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회한을 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경숙도 처음에는 펄펄뛰며 안 된다고 우겼지만 결국 정석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현희를 불러 절대 나중에 후회하거나 부모를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다짐을 받은 뒤에
나한철과 현희를 함께 불러 허락을 했다.
나한철의 부모도 만나서 서로 상견례를 한 뒤 현희가 나한철의 집으로 들어갈 날까지 잡아놓은 어느 날
경숙은 살림에 필요한 것도 미리 챙길 겸해서 현희와 함께 나한철의 집을 갔었다.
유진이 가져왔던 살림살이가 다 그대로 있어서 굳이 새로 장만할 살림은 거의 없었다.
경숙이 나한철의 방에 있는 옷장을 열어봤다.
옷장에 여자 옷이 빽빽했다.
그런데 옷들이 하나같이 이상한 옷들이었다.
무슨 간호사 옷 같은 게 있는 가 하면 여러 종류의 회사 유니폼에 일본 여학생들이 입는 세라복,
차이나 드레스, 속이 훤히 비치는 이브닝 드레스에 웨딩 드레스까지 있었다.
"현희야! 이게 다 뭐야? 누구 옷이야?......"
경숙은 나한철의 먼저 와이프가 아직도 옷을 다 안 가져갔나 보다고 생각을 했었다.
"이거?.........내 꺼!....."
"니 꺼?.......니가 언제 이런 옷들이 있었어?......."
"..................삼촌이 사 줬어!.............."
"삼촌이?..................삼촌이 왜 옷을 사줘도 너한테 이런 옷들을 사줬어?.....
이런 옷들을 언제 입으라고 사 준 거야?........."
".....................그냥.........외출할 때도 입고........집에서도 입고......"
"외출할 때?...........아니 이런 옷을 입고 어딜 무슨 외출을 해?"
경숙이 속이 훤히 비치는 빨간 드레스를 흔들어 보이며 다그쳤다,
"누가 그런 옷을 입고 외출을 해?.......그거야 집에서 입는 거지!...."
"이걸 집에서 입어?.........삼촌 앞에서 이걸 입고 있었어?.......이런 정말......"
경숙은 미친년이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걸 겨우 참았다.
경숙은 옷 장 밑의 서랍을 열어봤다.
거기에는 갖가지 형형색색의 속옷이 들어있었다.
경숙이 하나씩 들어보니 같은 여자로서도 차마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조그맣기도 하려니와 그 모양이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브래지어는 온전히 가슴을 가리는 것은 거의 없고 개중에는 젖가슴 부분이 뻥 뚫린 것이 있는가 하면
팬티는 가운데가 툭 터진 거, 손바닥보다도 작은 헝겊이 달린 끈 팬티,
그렇지 않으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망사 팬티에 가죽팬티까지 있었다.
그 밑의 서랍은 가터 벨트에 또 갖가지 스타킹이 있었다.
"어이구! 어이구!....미친 년!......"
경숙은 자신도 모르게 현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대충 그 옷과 속옷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짐작이 갔다.
딸이 나한철의 집에서 이런 것들을 입고 온갖 짓을 다 할 때에
아무 것도 모른 채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지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경숙은 그제야 현희를 얼른 나한철에게 보내길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현희가 나한철의 집으로 들어간 날,
경숙은 집으로 돌아와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그 해.
경숙이 울 일은 그 일만이 아니었다.
그 해 추석도 지나고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던 때였다.
영철이 안 방에 들어오더니 정석과 경숙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한다는 얘기가 결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니가 지금 학생이.......거기다 몇 달 있으면 군대갈 놈이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현희의 일이 늘 마음에 맺혀있던 경숙이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그럴 일이 있어요!........"
"그럴 일은 무슨 그럴 일이야?.....뭐 니가 남의 집 귀한 딸 임신이라도 시켰다는 거야?...."
".......네!......"
천연덕스러운 영철의 대답에 경숙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뭐?.........아이구! 아이구!....내가 못 살아!......"
경숙이 가슴을 치며 신세 한탄을 해대자 그 때까지 옆에서 가만히 있던 정석이 끼어 들었다.
"그래, 여자가 누군데?..........같은 학교 학생이야?......."
"......아니요!.............저 고등학교 때 공부 가르쳐 줬던 누나예요!...."
"그럼?!..........그 뭐냐?! 니 친구 누나란 말이야?......"
"친누나는 아니고........친척 누나예요!......."
"그럼 너보다 나이가 많겠네?!......"
"네!....좀 많아요!....."
"얼마나 많아?........한 두 세 살 차이가 나는 거야?...."
".........아니요!..............더 많아요!...."
"더 많다면.......도대체 몇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아홉 살이요!......"
"뭐? 아홉 살?.....안 돼! 안 돼!.....이번엔 죽어도 안 돼!......"
경숙이 옆에서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펄펄뛰었다.
"당신은 좀 잠자코 있어요! 영철이 얘기 다 안 끝났잖아?!.........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들어보긴 저깐 놈의 얘기를 뭘 더 들어요?........난 싫어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 안 돼요!......아냐! 아냐!....내가 죽어도 그건 안 돼!...."
"허허!.......글세, 좀 가만히 있으래두!.....
안 되면?.....그럼 여자 집에서 가만히 있겠어?.......영철이 감옥 보낼 거야?........"
그 소리는 겁이 나는지 경숙이 잠잠해졌다.
"그래서?.....그 누나가 너 때문에 임신을 했어?......"
".....네!......."
정석은 쓴 입맛을 다셨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 농사만큼은 마음대로 안 되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나는 뭐래?......아이를 낳겠대?....."
"..........아직 그런 얘기는........."
"그럼......그 집안에서도 그런 사실을 알아?.....어른들 말이야!"
"그 누나 친부모님은 시골에 계시고.....서울에는 작은어머니가 계시는데 그 분은 아셔요!..."
"그래 그 분은 뭐라셔?......."
"부모님 한번 뵙자고........"
"언제?....."
"시간 되시는 대로 가능한 빨리 뵈었으면 좋겠다고......."
정석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럼 영철이 너는.........그 친구 누나가 임신한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야?
아니면 그 여자가 정말 좋아서 결혼하겠다는 거야?....."
"......그 누나가 좋아서요!...."
"아이구! 저런 미친 놈!......어디 여자가 없어서....."
경숙이 영철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알았어!........니 방으로 올라가!......내가 생각 좀 해볼게!......"
"아버지!........죄송해요!......"
영철이 방을 나가자 경숙이 정석에게 다가앉으며 다그쳐 물었다.
"당신, 정말 영철이 말대로 그 여자하고 결혼시켜줄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죠?......
난 무조건 반대예요!........난 정말 그 꼴 못 봐요!"
"..........그럼? 그 여자는 어떡하고?......."
"아, 그거야 뭐 어떻게 달래서 우선 수술부터 시키고 봐야죠!.......
뭐 돈을 달라면 돈이 들더라도 그렇게 하구요!........"
"참! 이 여자가?!..........당신도 같은 여자면서 사람이 왜 그래?.......
당신이 만일 그런 일 당했는데 상대편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은 기분이 어떻겠어?
더군다나 이건 기분 문제가 아니라 그 여자의 운명이 걸린 일이야!.....
그런데 거기다 어떻게 수술 얘기부터 하고 돈 얘기를 꺼내나?.......
당신은 자식 있는 사람이 그 정도 양식도 없어?........"
".............그럼.........어떡하자는 거예요?.........영철이 결혼시킨다구요?........."
"그러니까 우선 그 쪽을 만나봐야지!......
만나보고 그 쪽 얘기를 들어보는 게 순서지!...."
"그러다 그 쪽에서 결혼하자고 그러면요?......"
"그럼 하는 수 없지 뭐!.....결혼시켜야지!....."
"아유! 난 싫어요!........아니 영철이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 여자를 어떻게 며느리로 들여요?
난 못 해요!......그리고 막 말로.....그 여자가 임신이 된 게 그 여자가 먼저 꼬리를 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영철이 실수를 해서 그런 건지 어떻게 알고 그 쪽 말만 들어요?......
괜히 영철이만 억울하게 당하는 건지 누가 알아요?..."
"참 나 이 사람이?!.........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나?.....
아니 영철이 저 놈이 여자가 꼬리를 쳐서 당할 때까지 가만히 있을 놈이야? 응?.....
아무리 지 자식 감싸는 것도 좋지만 그동안 그렇게 보고도 몰라?......."
"............................."
경숙이 생각해도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수작은 영철이 먼저 부렸을 게 확실했다.
"....아니 근데!.......저 놈은 무슨 후딱하면 여자들 애를 배게 해?......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경숙이 진호엄마를 생각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가만히 있던 정석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이가 갑자기 실성을 했나?!.......아니 지금 상황에 웃음이 나와요?......"
"하하하하!........여보!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후손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응? 영철이 씨가 저렇게 좋으니 결혼하면 자식도 많이 나을 거야? 그지?......하하하하!"
"허이구 참!....이게 지금 좋아서 웃을 일이에요?......
당신은 그 여자가 어떤 여잔지 알지도 못 하면서 아무 걱정도 안 돼요?......"
"걱정하면 뭐 하나?........
그 여자가 어떤 여자든 다 영철이 지 팔자고 다 지 복이지!.......
영철이 타고난 팔자를 우리가 무슨 수로 막겠어?!........"
그래서 며칠 후 정석부부와 영철이 그리고 김미자와 송아영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정석이 먼저 허리를 숙여 김미자에게 사과를 했다.
"자식놈을 오랫동안 맡겨놓고 폐를 끼치면서도 그동안 인사 한번 못 드린 것만도 죄송한데
또 이렇게 심려를 끼쳐드려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별 말씀을!...오히려 이번 일로 제가 더 송구스러운데요!...."
정석과 김미자는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첫 눈에 상대방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졌다.
김미자는 혹시 영철의 부모가 경우 없이 나올까봐 상당히 걱정을 했다가
정석의 첫 인사를 듣고는 경우가 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또한 정석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 오늘 큰 소리를 내지 않고도 얘기를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적이 마음이 놓였다.
정석은 김미자와 함께 식당에 들어서는 송아영을 보는 순간부터
예쁘고 참해 보이는 모습에 송아영이 단번에 마음에 들었었다.
하지만 경숙은 달랐다.
오히려 아영의 참해 보이는 모습에 더 반감이 생겼다.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 년이 할 짓이 없어서 나이도 어린 영철이하고 놀아나다 애까지 배?......"
그래서 그런지 아영의 모습이 새침을 떼고 있는 불여우처럼 보였다.
정석과 김미자는 아영의 임신 얘기는 제쳐두고 영철이 오랫동안 친구네 집에서 신세진 일,
아영의 덕분에 영철이 마음을 잡아 대학에 들어간 일을 놓고 서로 덕담을 나누었다.
일단 지난 일에 대한 인사치레가 끝나자 정석이 아영과 영철의 얘기를 끄집어냈다.
"지난 얘기보다는.... 지금 두 사람의 일이 더 걱정이실 텐데....
김여사님은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으세요?....."
"글세 그거야 뭐............저희 쪽 의견보다는 영철이와 부모님 의견이 더 중요할 듯 싶네요!
사실 우리 조카가 나이도 좀 있어서 일방적으로 저희 쪽 의견만 주장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더욱 고맙습니다.
김여사님!...제 생각엔 말이죠.......당사자들 의견이 제일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들 일이니까 두 사람이 결정하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정말 좋으신 말씀이네요!.......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죠?.......영철아! 그럼 영철이 너부터 어떡할 생각인지 말을 해봐라!......
단, 지금부터 네가 하는 말은 전적으로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아버지!....저 아영이 누나랑 결혼할래요!....."
"그럼.....송아영이라고 했나?........그 쪽은?........."
"............허락해 주시면.......아내와 며느리로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뭐 더 얘기할 것도 없네!.......김여사님!....아니 사장께서도 이의가 없으시죠?"
"아유! 그러믄요!.......너무 잘 됐네요!.......
사실 저는 얼마나 가슴을 조리며 나왔는지?!........."
김미자가 곁에 앉은 송아영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경숙을 제외한 네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경숙도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먹고 술도 서로 한잔씩 하면서 영철과 아영의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가 오간 끝에
일단 아영이 영철의 집으로 들어와 살기로 하고 결혼식은 영철이 대학을 졸업하면 하기로 했다.
"바깥사돈은 성격도 호탕하고 너를 꽤 마음에 들어하던 눈치든데......
어째 안사돈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얼굴색이 안 좋더라?!......
너 시집에 들어가서 시어머니 때문에 마음 고생하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영철네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미자가 아영에게 걱정스럽게 말을 했다.
"아마 제가 나이가 많아서 그러셨을 거예요!.....
다 앞으로 저 하기 나름이죠 뭐!...."
"그래!.....혹 니가 마음 고생이 되더라도 니가 참고 견뎌야지 어떻게 하겠니?!......"
"걱정 마세요!....제가 잘 할게요!.....
저는 그보다도 작은어머니가 더 걱정인데.......작은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난 지금 일이 잘 돼서 너무 너무 좋다!...."
"괜히 제가 영철이를 빼앗은 것 같아서........"
"쓸 데 없는 소리하지 말아라!.....빼앗긴 누가 뭘 빼앗아?......
영철이가 너랑 결혼 안 하면 뭐 영철이가 평생 나하고 살겠니?......
다 제 짝 찾아서 가는 거고....거기다 그 짝이 너라는 게 나는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영철이 자주......작은어머니한테 들리게 할게요!......."
"아이구! 아이구! 그런 쓸 데 없는 소리 입에도 담지 마라!
이제 니네 둘 사이에 내가 왜 끼여드니?!.......내 걱정말고 너나 잘 살아!....."
".....작은어머니! 그 큰집에서 적적해서 이제 혼자 어떻게 지내실 거예요?......
작은어머니 이 참에 좀 작은 집으로 옮기시면 어때요?......"
"글세! 나도 그럴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데......."
"작은어머니! 그럼 아예 영철이 사는 동네로 이사하면 어떠시겠어요?....
그럼 저도 작은어머니 자주 찾아뵙고 좋을 것 같은데......."
"나도 그러면 좋기는 한데 니 시댁될 집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
그거야 뭐 천천히 생각해 보자꾸나!......
그나저나 너도 이제 영철이 영철이 하고 부르는 거 고쳐라!.....
나이가 어려도 니 신랑될 사람인데!........"
"네! 알았어요! 고칠게요!....."
그리고 며칠 후 정석에게서 아영에게 전화가 왔다.
한번 만날 일이 있다면서 아영이 사는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아영이 일러준 대로 정석이 김미자의 집을 찾아왔다.
"아이구! 집이 상당히 크네요!......
이렇게 큰집에 몇 식구나 사세요?......"
"식구랄 게 뭐 있나요?.....저하고 조카며....저기 질녀하고 단 둘이죠!...."
하마터면 아영을 조카며느리라고 부를 뻔한 김미자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영철이 아영이 결혼했던 사실을 아직 집에 얘기를 못 했다며
나중에 자신이 얘기할 때까지 당분간은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를 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바깥어른이나 자제분들은?......."
"아유! 저는 오래 전에 혼자됐어요!........"
"아! 그러세요?........저는 영철이 친구네 라고 해서......"
"저기.... 영철이 친구는 저희 친척인데요........지방대학에 들어가서 이제는 여기 안 살아요!"
아영이 옆에서 얼른 끼여들어 둘러댔다.
"아! 그렇군요!..........그나저나 이제 그러면 사장께서는 적적해서 어떻게 혼자 이 큰집에서 지내시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게 좀 걱정이네요!......
아영이를 그동안 딸처럼 의지하며 살았는데......뭐 어디 조그만 집을 얻어서 옮길까 생각 중이에요!...."
"정말 그러셔야겠네요!.......아! 그러시면 아예 저희 동네로 이사를 오시죠?.....
그러면 저희 며느리도 자주 찾아뵐 수 있을 거고!.....그러면 덜 적적하시죠!...."
"아이구! 말씀은 고마운데......원래 측간하고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잖아요?...
괜히 제가 그 동네에 이사가면 사돈댁에서 불편해 하실까봐......."
"어이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아무 염려말고 저희 동네로 이사 오세요!...."
"아유!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 모르겠네요?......"
"저희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럴 게 아니라 제가 저희 동네에 나온 집이 있나 알아봐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김미자가 그런 수고까지 끼칠 일이 뭐 있느냐고 몇 번 사양을 했지만
정석이 끝까지 고집을 부려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며늘아!.....이제는 내가 그렇게 불러도 되지?...."
"네! 아버님!...."
"며늘아!....이거 얼마 안 되지만 니가 우리 집에 들어올 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장만하는데 보태 써라!
정석이 양복 안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아영의 앞으로 밀었다.
"아니에요, 아버님!......제게도 그만한 돈은 있어요!....이렇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럼요! 사돈어른!....저도 있는데 왜 이러세요?...."
아영과 김미자가 모두 사양을 했지만 정석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건 그냥 시아버지로서 제 며느리에 대한 제 마음이니까 사장께서도 그냥 모른 체 해두세요!....
며늘아! 근데 이거는 우리 집사람한테는 비밀이다!...."
영철에게 아영의 시골집이 어렵다는 사정을 들은 데다
경숙이 아영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터에 혹 아영이 해오는 혼수를 놓고 두고두고 트집을 잡을지 몰라
걱정되는 마음에 정석이 경숙 몰래 아영을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영이 영철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김미자가 아영을 부르더니
생각지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아영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니가 그동안 나에게 맡겼던 돈 굴린 거에다 내가 조금 더 보탠 거니까 아무 말 말고 받아둬!"
그렇게 해서 아영이 영철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얼마 뒤에는 김미자도 정석이 소개해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영철의 집과는 5분 거리에 있는 이층집이었는데 위층은 세를 주고 김미자가 아래층을 썼다.
"쟤가 그래도 살림은 잘하네요!....."
"그래?......음식도 또 얼마나 잘 해?!....."
"에이그!.....나이만 영철이보다 어렸으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이 사람아!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나이 어리면 뭘 해? 어디 가서 저런 며느리를 얻어?...."
"여보! 나는 말이에요.....쟤를 보면 오히려 나서방에게 딱 맞는데!...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허허! 당신도 그런 생각을 했어?......
나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우리가 미쳤어?...저런 며느리를 왜 나서방을 줘? 아깝게!..."
"아니 이이가?......아니 쟤는 아깝고 우리 현희는 안 아깝다는 얘기예요?......
아까우면 우리 현희가 더 아깝지?!....이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
우리 나서방이나 며늘아기나 다 잘 얻은 거야!.......당신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잘 얻긴 뭘 잘 얻어요?......이제 뭐 얼마나 됐다고......더 두고 봐야 알지!.....
난 자식 둘이 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사는 게 다른 사람들 보기에 얼마나 창피한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남이 무슨 상관이야!.....다 지들 행복하면 그만이지!.....
아, 둘 다 결혼식은 나중에 올리기로 했잖아?!.....그러면 됐지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아유! 그래도 난 속 상해요!......."
정석은 매일 같이 아영이 먹을 것을 사들고 들어왔다.
임신했을 때는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그러니까 뭐든지 말만 하라면서
술이 취해도 아영이 먹을 과일이나 음식을 싸들고 들어왔다.
정석의 아영에 대한 지극 정성에 경숙은 괜히 옆에서 은근히 샘이 났다.
"시아버지면 좀 체신을 지켜요!.....
그러다 괜히 며느리 버릇만 나빠져요!...."
"이 사람이 왜 또 심통을 부리고 그래?.....
아니 며느리 배속에 들어있는 애가 누구 앤데 당신이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어떻게 된 사람이 갈수록 점점 더 철이 없어져?....."
"그럼 당신이 나 애들 임신했을 때 그렇게 신경 써 줬어요?.........
며느리한테 하는 것처럼 나한테 해줘봤냐구요?....."
"아, 그 때야 먹고살기 바빠서 그랬지!.....그 때 우리가 무슨 여유가 있었어?.....
그리고 막말로 그 때 형편에 그만큼 했으면 됐지 뭘 어떻게 더 해?......이 사람이 정말?!...."
"당신이 뭘 어떻게 해줬는데요?......뭘 해준 거나 있는 것처럼.......
하이고!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러 저런 앙금 때문에 경숙은 아영을 밉게 생각지 않으면서도 아영에게는 늘상 좀 냉기가 돌게 대했다.
"엄마! 아직도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어?....응?.....우리 와이프한테 좀 잘 해주면 안 돼?...."
어느 날 영철이 경숙에게 그렇게 투정을 부렸다.
"왜? 니 집사람이 시어머니가 시집살이시킨다고 너한테 일러바치데?...."
"일러바치긴 누가 뭘 일러바쳐?......그냥 엄마가 하는 거 보면 다 아는 거지!...."
"내가 뭘 어쨌기에?.........이 놈이 벌써부터 지 마누라 편만 들고 그러네?!...."
"에이! 편은 내가 무슨 편이야?!.....나야 엄마 편이지!..."
그러면서 영철이 경숙을 껴안고 경숙의 볼에다 입을 맞췄다.
"이 놈이 지 마누라 있는 놈이 나는 왜 껴안고 입을 맞추고 그래?......
이런 짓 할려면 지 마누라한테나 할 일이지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엄마! 우리 와이프 임신 중이잖아?!...."
그러면서 영철이 경숙을 방바닥에 눕히고 경숙의 배 위로 엎드렸다.
"아유! 하지마!......니 집사람 보면 어떡하려구 이래?......
빨리 저리 비켜! 응?.....비키라니까!....."
하지만 영철은 비키기는커녕 경숙의 사타구니에 자신의 사타구니
썩 좋은 학교는 아니라도 현희가 이미 대학에 합격한 후라
정석과 경숙은 홀가분하고 대견한 마음으로 현희의 졸업식에 참석을 했다.
나한철이 현희의 졸업식에 오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두 사람 사이를 모르는 정석과 경숙은 바쁜데 뭘 오느냐며 나한철을 말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졸업식에서 보니까 현희가 자신들보다는 나한철과 더 많이 사진도 찍고
나한철에 매달려 애교까지 부리는 것을 보며 둘 사이가 언제 그렇게까지 가까워졌는지 의아해 했다.
그래도 그냥 현희가 나한철을 삼촌처럼 생각해서 따르나보다고만 여기고 딴 생각은 안 했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나한철이 현희와 함께 정석 부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뭔 일인가 어리둥절해 있는 정석과 경숙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현희를 저에게 주십시오!"
"응? 현희를?.....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얘기라 정석은 얼빠진 말로 나한철에게 되물었다.
"저 현희와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엉? 그게 무슨 소리야?......"
정석과 경숙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가 나한철과 현희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어떻게 된 일인지를 상대방에게 눈으로 물었다.
"현희야! 너 이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경숙이 현희에게 물었다.
"엄마아!.......나 삼촌이랑 결혼할래!......."
현희가 숙였던 고개를 겨우 들고 경숙을 향해 구원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뭐?.......너 미쳤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경숙의 입에서 과격한 말이 나왔다.
"그게 아니고!.....나 삼촌 사랑한단 말이야!......."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현희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경숙은 숨이 탁 막혔다.
"뭐? 사랑?.........하이고!.......얘가 정말 정신이 나갔나?!........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내가 무슨 피가 안 말라?!......나도 다 컸는데?!......."
입을 삐죽거리며 말대꾸를 하는 현희를 보자 경숙은 머리를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나한철이 한없이 미워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현희를 나한철이 살살 꼬드겨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경숙이 나한철을 못 마땅한 눈으로 노려봤다.
정석은 옆에서 한숨만 내쉬다가 담배를 피어 물었다.
나한철이 일단 현희와 혼인신고를 해놓고 현희가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자기가 뒷받침을 하다가
현희가 대학교를 졸업하면 그 때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누구 마음대로 혼인신고를 하고 무슨 결혼식을 올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경숙이 나한철을 향해 쏘아댔다.
"형수님! 죄송합니다!.......하지만 꼭 현희를 행복하게 해 줄 거예요!......"
"행복은 무슨 얼어죽을 행복이야?.....
어디 여자가 없어서 현희 같이 어린애를 건드리고.......사람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경숙은 자신과의 일도 있는데 딸까지 건드렸다는 생각을 하니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튼 그 날은 그런 정도로 끝이 났다.
그 날부터 정석과 경숙은 현희의 일로 골머리를 싸맸다.
경숙은 끝까지 안 된다는 주장이었지만 정석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정석도 처음 나한철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동안 자신이 나한철에게 어떻게 했는데
나한철이 자신의 어린 딸까지 넘보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편으로 그게 꼭 그렇게 나쁜 일 같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나한철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 나한철은 능력도 있고 사람의 심성도 착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과 회사를 만들어 이만큼 키워놓은 것도 전부 나한철의 공이었다.
만일 주변에 나한철의 나이에 걸 맞는 참한 색싯감이 있었다면
정석은 조금의 주저 없이 나한철을 최고의 신랑감으로 소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희의 신랑감으로는 걸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현희 쪽으로 보면 결혼 운운하기에는 아직 너무 나이가 어렸다.
나한철은 현희와 나이 차가 많이 난다는 것,
한 번 결혼을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경숙과의 과거 일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경숙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그나마 근래에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했다.
나한철과 현희의 관계가 어느 정도 깊이까지 갔는지를 물어봤더니
경숙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갈 데까지 다 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몰리는 것은 여자 쪽이라는 생각에
정석은 어느 날 나한철과 술자리를 마련했고 나한철의 확고한 결심을 듣고는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대학을 졸업한 후가 되든 언제가 되었든 시집을 보내야 할 것이라면
그것이 지금이면 또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철만한 사윗감도 드물다는 생각과 회사의 앞일을 생각하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거기다 두 사람이 좋다는데 굳이 반대해서 서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회한을 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경숙도 처음에는 펄펄뛰며 안 된다고 우겼지만 결국 정석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현희를 불러 절대 나중에 후회하거나 부모를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다짐을 받은 뒤에
나한철과 현희를 함께 불러 허락을 했다.
나한철의 부모도 만나서 서로 상견례를 한 뒤 현희가 나한철의 집으로 들어갈 날까지 잡아놓은 어느 날
경숙은 살림에 필요한 것도 미리 챙길 겸해서 현희와 함께 나한철의 집을 갔었다.
유진이 가져왔던 살림살이가 다 그대로 있어서 굳이 새로 장만할 살림은 거의 없었다.
경숙이 나한철의 방에 있는 옷장을 열어봤다.
옷장에 여자 옷이 빽빽했다.
그런데 옷들이 하나같이 이상한 옷들이었다.
무슨 간호사 옷 같은 게 있는 가 하면 여러 종류의 회사 유니폼에 일본 여학생들이 입는 세라복,
차이나 드레스, 속이 훤히 비치는 이브닝 드레스에 웨딩 드레스까지 있었다.
"현희야! 이게 다 뭐야? 누구 옷이야?......"
경숙은 나한철의 먼저 와이프가 아직도 옷을 다 안 가져갔나 보다고 생각을 했었다.
"이거?.........내 꺼!....."
"니 꺼?.......니가 언제 이런 옷들이 있었어?......."
"..................삼촌이 사 줬어!.............."
"삼촌이?..................삼촌이 왜 옷을 사줘도 너한테 이런 옷들을 사줬어?.....
이런 옷들을 언제 입으라고 사 준 거야?........."
".....................그냥.........외출할 때도 입고........집에서도 입고......"
"외출할 때?...........아니 이런 옷을 입고 어딜 무슨 외출을 해?"
경숙이 속이 훤히 비치는 빨간 드레스를 흔들어 보이며 다그쳤다,
"누가 그런 옷을 입고 외출을 해?.......그거야 집에서 입는 거지!...."
"이걸 집에서 입어?.........삼촌 앞에서 이걸 입고 있었어?.......이런 정말......"
경숙은 미친년이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걸 겨우 참았다.
경숙은 옷 장 밑의 서랍을 열어봤다.
거기에는 갖가지 형형색색의 속옷이 들어있었다.
경숙이 하나씩 들어보니 같은 여자로서도 차마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조그맣기도 하려니와 그 모양이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브래지어는 온전히 가슴을 가리는 것은 거의 없고 개중에는 젖가슴 부분이 뻥 뚫린 것이 있는가 하면
팬티는 가운데가 툭 터진 거, 손바닥보다도 작은 헝겊이 달린 끈 팬티,
그렇지 않으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망사 팬티에 가죽팬티까지 있었다.
그 밑의 서랍은 가터 벨트에 또 갖가지 스타킹이 있었다.
"어이구! 어이구!....미친 년!......"
경숙은 자신도 모르게 현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대충 그 옷과 속옷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짐작이 갔다.
딸이 나한철의 집에서 이런 것들을 입고 온갖 짓을 다 할 때에
아무 것도 모른 채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지낸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경숙은 그제야 현희를 얼른 나한철에게 보내길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현희가 나한철의 집으로 들어간 날,
경숙은 집으로 돌아와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그 해.
경숙이 울 일은 그 일만이 아니었다.
그 해 추석도 지나고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던 때였다.
영철이 안 방에 들어오더니 정석과 경숙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한다는 얘기가 결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니가 지금 학생이.......거기다 몇 달 있으면 군대갈 놈이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현희의 일이 늘 마음에 맺혀있던 경숙이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그럴 일이 있어요!........"
"그럴 일은 무슨 그럴 일이야?.....뭐 니가 남의 집 귀한 딸 임신이라도 시켰다는 거야?...."
".......네!......"
천연덕스러운 영철의 대답에 경숙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뭐?.........아이구! 아이구!....내가 못 살아!......"
경숙이 가슴을 치며 신세 한탄을 해대자 그 때까지 옆에서 가만히 있던 정석이 끼어 들었다.
"그래, 여자가 누군데?..........같은 학교 학생이야?......."
"......아니요!.............저 고등학교 때 공부 가르쳐 줬던 누나예요!...."
"그럼?!..........그 뭐냐?! 니 친구 누나란 말이야?......"
"친누나는 아니고........친척 누나예요!......."
"그럼 너보다 나이가 많겠네?!......"
"네!....좀 많아요!....."
"얼마나 많아?........한 두 세 살 차이가 나는 거야?...."
".........아니요!..............더 많아요!...."
"더 많다면.......도대체 몇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아홉 살이요!......"
"뭐? 아홉 살?.....안 돼! 안 돼!.....이번엔 죽어도 안 돼!......"
경숙이 옆에서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펄펄뛰었다.
"당신은 좀 잠자코 있어요! 영철이 얘기 다 안 끝났잖아?!.........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들어보긴 저깐 놈의 얘기를 뭘 더 들어요?........난 싫어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 안 돼요!......아냐! 아냐!....내가 죽어도 그건 안 돼!...."
"허허!.......글세, 좀 가만히 있으래두!.....
안 되면?.....그럼 여자 집에서 가만히 있겠어?.......영철이 감옥 보낼 거야?........"
그 소리는 겁이 나는지 경숙이 잠잠해졌다.
"그래서?.....그 누나가 너 때문에 임신을 했어?......"
".....네!......."
정석은 쓴 입맛을 다셨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 농사만큼은 마음대로 안 되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나는 뭐래?......아이를 낳겠대?....."
"..........아직 그런 얘기는........."
"그럼......그 집안에서도 그런 사실을 알아?.....어른들 말이야!"
"그 누나 친부모님은 시골에 계시고.....서울에는 작은어머니가 계시는데 그 분은 아셔요!..."
"그래 그 분은 뭐라셔?......."
"부모님 한번 뵙자고........"
"언제?....."
"시간 되시는 대로 가능한 빨리 뵈었으면 좋겠다고......."
정석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럼 영철이 너는.........그 친구 누나가 임신한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야?
아니면 그 여자가 정말 좋아서 결혼하겠다는 거야?....."
"......그 누나가 좋아서요!...."
"아이구! 저런 미친 놈!......어디 여자가 없어서....."
경숙이 영철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알았어!........니 방으로 올라가!......내가 생각 좀 해볼게!......"
"아버지!........죄송해요!......"
영철이 방을 나가자 경숙이 정석에게 다가앉으며 다그쳐 물었다.
"당신, 정말 영철이 말대로 그 여자하고 결혼시켜줄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죠?......
난 무조건 반대예요!........난 정말 그 꼴 못 봐요!"
"..........그럼? 그 여자는 어떡하고?......."
"아, 그거야 뭐 어떻게 달래서 우선 수술부터 시키고 봐야죠!.......
뭐 돈을 달라면 돈이 들더라도 그렇게 하구요!........"
"참! 이 여자가?!..........당신도 같은 여자면서 사람이 왜 그래?.......
당신이 만일 그런 일 당했는데 상대편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은 기분이 어떻겠어?
더군다나 이건 기분 문제가 아니라 그 여자의 운명이 걸린 일이야!.....
그런데 거기다 어떻게 수술 얘기부터 하고 돈 얘기를 꺼내나?.......
당신은 자식 있는 사람이 그 정도 양식도 없어?........"
".............그럼.........어떡하자는 거예요?.........영철이 결혼시킨다구요?........."
"그러니까 우선 그 쪽을 만나봐야지!......
만나보고 그 쪽 얘기를 들어보는 게 순서지!...."
"그러다 그 쪽에서 결혼하자고 그러면요?......"
"그럼 하는 수 없지 뭐!.....결혼시켜야지!....."
"아유! 난 싫어요!........아니 영철이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 여자를 어떻게 며느리로 들여요?
난 못 해요!......그리고 막 말로.....그 여자가 임신이 된 게 그 여자가 먼저 꼬리를 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영철이 실수를 해서 그런 건지 어떻게 알고 그 쪽 말만 들어요?......
괜히 영철이만 억울하게 당하는 건지 누가 알아요?..."
"참 나 이 사람이?!.........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나?.....
아니 영철이 저 놈이 여자가 꼬리를 쳐서 당할 때까지 가만히 있을 놈이야? 응?.....
아무리 지 자식 감싸는 것도 좋지만 그동안 그렇게 보고도 몰라?......."
"............................."
경숙이 생각해도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수작은 영철이 먼저 부렸을 게 확실했다.
"....아니 근데!.......저 놈은 무슨 후딱하면 여자들 애를 배게 해?......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경숙이 진호엄마를 생각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가만히 있던 정석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이가 갑자기 실성을 했나?!.......아니 지금 상황에 웃음이 나와요?......"
"하하하하!........여보!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후손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응? 영철이 씨가 저렇게 좋으니 결혼하면 자식도 많이 나을 거야? 그지?......하하하하!"
"허이구 참!....이게 지금 좋아서 웃을 일이에요?......
당신은 그 여자가 어떤 여잔지 알지도 못 하면서 아무 걱정도 안 돼요?......"
"걱정하면 뭐 하나?........
그 여자가 어떤 여자든 다 영철이 지 팔자고 다 지 복이지!.......
영철이 타고난 팔자를 우리가 무슨 수로 막겠어?!........"
그래서 며칠 후 정석부부와 영철이 그리고 김미자와 송아영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정석이 먼저 허리를 숙여 김미자에게 사과를 했다.
"자식놈을 오랫동안 맡겨놓고 폐를 끼치면서도 그동안 인사 한번 못 드린 것만도 죄송한데
또 이렇게 심려를 끼쳐드려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별 말씀을!...오히려 이번 일로 제가 더 송구스러운데요!...."
정석과 김미자는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첫 눈에 상대방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졌다.
김미자는 혹시 영철의 부모가 경우 없이 나올까봐 상당히 걱정을 했다가
정석의 첫 인사를 듣고는 경우가 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또한 정석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 오늘 큰 소리를 내지 않고도 얘기를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적이 마음이 놓였다.
정석은 김미자와 함께 식당에 들어서는 송아영을 보는 순간부터
예쁘고 참해 보이는 모습에 송아영이 단번에 마음에 들었었다.
하지만 경숙은 달랐다.
오히려 아영의 참해 보이는 모습에 더 반감이 생겼다.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 년이 할 짓이 없어서 나이도 어린 영철이하고 놀아나다 애까지 배?......"
그래서 그런지 아영의 모습이 새침을 떼고 있는 불여우처럼 보였다.
정석과 김미자는 아영의 임신 얘기는 제쳐두고 영철이 오랫동안 친구네 집에서 신세진 일,
아영의 덕분에 영철이 마음을 잡아 대학에 들어간 일을 놓고 서로 덕담을 나누었다.
일단 지난 일에 대한 인사치레가 끝나자 정석이 아영과 영철의 얘기를 끄집어냈다.
"지난 얘기보다는.... 지금 두 사람의 일이 더 걱정이실 텐데....
김여사님은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으세요?....."
"글세 그거야 뭐............저희 쪽 의견보다는 영철이와 부모님 의견이 더 중요할 듯 싶네요!
사실 우리 조카가 나이도 좀 있어서 일방적으로 저희 쪽 의견만 주장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더욱 고맙습니다.
김여사님!...제 생각엔 말이죠.......당사자들 의견이 제일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들 일이니까 두 사람이 결정하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정말 좋으신 말씀이네요!.......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죠?.......영철아! 그럼 영철이 너부터 어떡할 생각인지 말을 해봐라!......
단, 지금부터 네가 하는 말은 전적으로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아버지!....저 아영이 누나랑 결혼할래요!....."
"그럼.....송아영이라고 했나?........그 쪽은?........."
"............허락해 주시면.......아내와 며느리로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뭐 더 얘기할 것도 없네!.......김여사님!....아니 사장께서도 이의가 없으시죠?"
"아유! 그러믄요!.......너무 잘 됐네요!.......
사실 저는 얼마나 가슴을 조리며 나왔는지?!........."
김미자가 곁에 앉은 송아영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경숙을 제외한 네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경숙도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먹고 술도 서로 한잔씩 하면서 영철과 아영의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가 오간 끝에
일단 아영이 영철의 집으로 들어와 살기로 하고 결혼식은 영철이 대학을 졸업하면 하기로 했다.
"바깥사돈은 성격도 호탕하고 너를 꽤 마음에 들어하던 눈치든데......
어째 안사돈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얼굴색이 안 좋더라?!......
너 시집에 들어가서 시어머니 때문에 마음 고생하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영철네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미자가 아영에게 걱정스럽게 말을 했다.
"아마 제가 나이가 많아서 그러셨을 거예요!.....
다 앞으로 저 하기 나름이죠 뭐!...."
"그래!.....혹 니가 마음 고생이 되더라도 니가 참고 견뎌야지 어떻게 하겠니?!......"
"걱정 마세요!....제가 잘 할게요!.....
저는 그보다도 작은어머니가 더 걱정인데.......작은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난 지금 일이 잘 돼서 너무 너무 좋다!...."
"괜히 제가 영철이를 빼앗은 것 같아서........"
"쓸 데 없는 소리하지 말아라!.....빼앗긴 누가 뭘 빼앗아?......
영철이가 너랑 결혼 안 하면 뭐 영철이가 평생 나하고 살겠니?......
다 제 짝 찾아서 가는 거고....거기다 그 짝이 너라는 게 나는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영철이 자주......작은어머니한테 들리게 할게요!......."
"아이구! 아이구! 그런 쓸 데 없는 소리 입에도 담지 마라!
이제 니네 둘 사이에 내가 왜 끼여드니?!.......내 걱정말고 너나 잘 살아!....."
".....작은어머니! 그 큰집에서 적적해서 이제 혼자 어떻게 지내실 거예요?......
작은어머니 이 참에 좀 작은 집으로 옮기시면 어때요?......"
"글세! 나도 그럴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데......."
"작은어머니! 그럼 아예 영철이 사는 동네로 이사하면 어떠시겠어요?....
그럼 저도 작은어머니 자주 찾아뵙고 좋을 것 같은데......."
"나도 그러면 좋기는 한데 니 시댁될 집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
그거야 뭐 천천히 생각해 보자꾸나!......
그나저나 너도 이제 영철이 영철이 하고 부르는 거 고쳐라!.....
나이가 어려도 니 신랑될 사람인데!........"
"네! 알았어요! 고칠게요!....."
그리고 며칠 후 정석에게서 아영에게 전화가 왔다.
한번 만날 일이 있다면서 아영이 사는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아영이 일러준 대로 정석이 김미자의 집을 찾아왔다.
"아이구! 집이 상당히 크네요!......
이렇게 큰집에 몇 식구나 사세요?......"
"식구랄 게 뭐 있나요?.....저하고 조카며....저기 질녀하고 단 둘이죠!...."
하마터면 아영을 조카며느리라고 부를 뻔한 김미자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영철이 아영이 결혼했던 사실을 아직 집에 얘기를 못 했다며
나중에 자신이 얘기할 때까지 당분간은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를 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바깥어른이나 자제분들은?......."
"아유! 저는 오래 전에 혼자됐어요!........"
"아! 그러세요?........저는 영철이 친구네 라고 해서......"
"저기.... 영철이 친구는 저희 친척인데요........지방대학에 들어가서 이제는 여기 안 살아요!"
아영이 옆에서 얼른 끼여들어 둘러댔다.
"아! 그렇군요!..........그나저나 이제 그러면 사장께서는 적적해서 어떻게 혼자 이 큰집에서 지내시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게 좀 걱정이네요!......
아영이를 그동안 딸처럼 의지하며 살았는데......뭐 어디 조그만 집을 얻어서 옮길까 생각 중이에요!...."
"정말 그러셔야겠네요!.......아! 그러시면 아예 저희 동네로 이사를 오시죠?.....
그러면 저희 며느리도 자주 찾아뵐 수 있을 거고!.....그러면 덜 적적하시죠!...."
"아이구! 말씀은 고마운데......원래 측간하고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잖아요?...
괜히 제가 그 동네에 이사가면 사돈댁에서 불편해 하실까봐......."
"어이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아무 염려말고 저희 동네로 이사 오세요!...."
"아유!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 모르겠네요?......"
"저희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럴 게 아니라 제가 저희 동네에 나온 집이 있나 알아봐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김미자가 그런 수고까지 끼칠 일이 뭐 있느냐고 몇 번 사양을 했지만
정석이 끝까지 고집을 부려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며늘아!.....이제는 내가 그렇게 불러도 되지?...."
"네! 아버님!...."
"며늘아!....이거 얼마 안 되지만 니가 우리 집에 들어올 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장만하는데 보태 써라!
정석이 양복 안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더니 아영의 앞으로 밀었다.
"아니에요, 아버님!......제게도 그만한 돈은 있어요!....이렇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럼요! 사돈어른!....저도 있는데 왜 이러세요?...."
아영과 김미자가 모두 사양을 했지만 정석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건 그냥 시아버지로서 제 며느리에 대한 제 마음이니까 사장께서도 그냥 모른 체 해두세요!....
며늘아! 근데 이거는 우리 집사람한테는 비밀이다!...."
영철에게 아영의 시골집이 어렵다는 사정을 들은 데다
경숙이 아영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터에 혹 아영이 해오는 혼수를 놓고 두고두고 트집을 잡을지 몰라
걱정되는 마음에 정석이 경숙 몰래 아영을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영이 영철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김미자가 아영을 부르더니
생각지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아영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니가 그동안 나에게 맡겼던 돈 굴린 거에다 내가 조금 더 보탠 거니까 아무 말 말고 받아둬!"
그렇게 해서 아영이 영철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얼마 뒤에는 김미자도 정석이 소개해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영철의 집과는 5분 거리에 있는 이층집이었는데 위층은 세를 주고 김미자가 아래층을 썼다.
"쟤가 그래도 살림은 잘하네요!....."
"그래?......음식도 또 얼마나 잘 해?!....."
"에이그!.....나이만 영철이보다 어렸으면 더 바랄 게 없는데....."
"이 사람아!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나이 어리면 뭘 해? 어디 가서 저런 며느리를 얻어?...."
"여보! 나는 말이에요.....쟤를 보면 오히려 나서방에게 딱 맞는데!...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허허! 당신도 그런 생각을 했어?......
나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우리가 미쳤어?...저런 며느리를 왜 나서방을 줘? 아깝게!..."
"아니 이이가?......아니 쟤는 아깝고 우리 현희는 안 아깝다는 얘기예요?......
아까우면 우리 현희가 더 아깝지?!....이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
우리 나서방이나 며늘아기나 다 잘 얻은 거야!.......당신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잘 얻긴 뭘 잘 얻어요?......이제 뭐 얼마나 됐다고......더 두고 봐야 알지!.....
난 자식 둘이 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사는 게 다른 사람들 보기에 얼마나 창피한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남이 무슨 상관이야!.....다 지들 행복하면 그만이지!.....
아, 둘 다 결혼식은 나중에 올리기로 했잖아?!.....그러면 됐지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아유! 그래도 난 속 상해요!......."
정석은 매일 같이 아영이 먹을 것을 사들고 들어왔다.
임신했을 때는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그러니까 뭐든지 말만 하라면서
술이 취해도 아영이 먹을 과일이나 음식을 싸들고 들어왔다.
정석의 아영에 대한 지극 정성에 경숙은 괜히 옆에서 은근히 샘이 났다.
"시아버지면 좀 체신을 지켜요!.....
그러다 괜히 며느리 버릇만 나빠져요!...."
"이 사람이 왜 또 심통을 부리고 그래?.....
아니 며느리 배속에 들어있는 애가 누구 앤데 당신이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어떻게 된 사람이 갈수록 점점 더 철이 없어져?....."
"그럼 당신이 나 애들 임신했을 때 그렇게 신경 써 줬어요?.........
며느리한테 하는 것처럼 나한테 해줘봤냐구요?....."
"아, 그 때야 먹고살기 바빠서 그랬지!.....그 때 우리가 무슨 여유가 있었어?.....
그리고 막말로 그 때 형편에 그만큼 했으면 됐지 뭘 어떻게 더 해?......이 사람이 정말?!...."
"당신이 뭘 어떻게 해줬는데요?......뭘 해준 거나 있는 것처럼.......
하이고!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러 저런 앙금 때문에 경숙은 아영을 밉게 생각지 않으면서도 아영에게는 늘상 좀 냉기가 돌게 대했다.
"엄마! 아직도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어?....응?.....우리 와이프한테 좀 잘 해주면 안 돼?...."
어느 날 영철이 경숙에게 그렇게 투정을 부렸다.
"왜? 니 집사람이 시어머니가 시집살이시킨다고 너한테 일러바치데?...."
"일러바치긴 누가 뭘 일러바쳐?......그냥 엄마가 하는 거 보면 다 아는 거지!...."
"내가 뭘 어쨌기에?.........이 놈이 벌써부터 지 마누라 편만 들고 그러네?!...."
"에이! 편은 내가 무슨 편이야?!.....나야 엄마 편이지!..."
그러면서 영철이 경숙을 껴안고 경숙의 볼에다 입을 맞췄다.
"이 놈이 지 마누라 있는 놈이 나는 왜 껴안고 입을 맞추고 그래?......
이런 짓 할려면 지 마누라한테나 할 일이지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엄마! 우리 와이프 임신 중이잖아?!...."
그러면서 영철이 경숙을 방바닥에 눕히고 경숙의 배 위로 엎드렸다.
"아유! 하지마!......니 집사람 보면 어떡하려구 이래?......
빨리 저리 비켜! 응?.....비키라니까!....."
하지만 영철은 비키기는커녕 경숙의 사타구니에 자신의 사타구니
추천56 비추천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