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무원, 연인, 여자 - 15부
"인간이란
어찌 이리 죄 많은 존재인가
증오하고 비난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그럼에도 용서를 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가 없다
하지만 용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 때..
그렇게나 용서해 주기를 바랐거늘
사람은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미안해요
엄마.."
끼룩...끼룩....끼룩~~!!!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처량하다.
갈매기들은 떼를 지어 항구의 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바닷바람은 차갑고 매섭다.
간혹 뜨거운 열기의 바람이 그 속에 간간이 섞여 휙 불어옴을 얼굴에 닿는 순간에 느낄 수가 있다.
태훈은 또 다시 소주를 잔에 부었다.
담배 한 모금을 확~빨아 당기고 나서 휙~하니 다시 연기를 내 뱉았다.
그리고 또 다시 얼른 따라놓은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휴우~~!!!
또 다시 자신이 내뱉는 한숨 소리 한모금이 자신의 귓가에 생생히 들려왔다.
애가 탄다....속이 끓어오른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생각나질 않는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봐도 해결방법은 생각나질 않는다....
결국....결국....하지만....휴우~~~
문득 집에서 혼자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옥임이 걱정된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고민될지라도 어디 옥임만큼이야 하겠는가....
태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서두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머릿 속은 연이어 거듭되는 온갖 상념과 고민으로 한가득 점철되고 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어째서 내 인생은 고작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세상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현실감각과는 도대체 거리가 멀었으니 이 모양 이 꼴이 아닌가....
생각하면 할수록 자괴감에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았다.
옥임을 생각하니 더욱 더 마음이 쓰라려 오고, 빠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에 시야가 흐려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옥임이 자리에 누워있다.
얼마 전까지 한바탕 고통과 싸움을 치르느라 지쳤는지 초췌한 얼굴에 땀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곁에는 태훈과 옥임이 가장 사랑하는 딸이 새근새근 엄마 곁에서 잠들어 있다.
그 모습을 보고 태훈은 자신이 술집에 잠시 들렀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얼른 더운 물에 수건을 적셔와 옥임의 얼굴에 맺힌 땀을 정성껏 닦아준다.
"으음..." 옥임이 짧고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약간 뒤척인다.
태훈은 옥임이 깨지않도록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선 옥임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 본다.
불쌍한 내 아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내 여자...
밝고 맑던 아름다운 얼굴이 초췌해져 있다...
얼마나 힘이 들까....
신랑을 잘못 만나가지고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그동안 불평 한마디 거의 하지 않았다.
태훈은 눈을 돌려 잠들어 있는 어린 딸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딸의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꾸역꾸역 흘러내린다.
한평생의 회한이 태훈의 뇌리 속에 한순간에 파도처럼 밀려온다.
태훈은 고아였다.
대구의 작은 고아원에서 자라난 태훈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마음씀씀이가 성숙되고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매우 따뜻하고 상냥하며 외모도 잘생겼다.
고아원의 여성원장님과 선생님들은 그런 태훈을 특히 아껴주었고, 일정한 나이로 자라난 태훈은 원장님을 도와
고아원의 여러가지 잡무를 함께 돌보며, 공고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공고를 졸업하고는 고아원에서 나와 사회로 뛰어들었다.
플라스틱 사출공장에 들어가 거기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
야간수당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야간근무까지 열심히 뛰며 일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길러준 고아원에 얼마되지 않는 월급의 일부까지 송금해가면서
원장님과 아이들을 챙기곤 했다.
지난 시절의 대부분의 선배들이 그렇듯이 힘들고 고달픈 시절의 연속이었지만
성실과 보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태훈은 꿋꿋했다.
그런 태훈에게 더 큰 마음의 위안을 주는 것은 고아원 시절부터 마음의 안식이 되어준 신앙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갈 때마다 태훈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접하며
살아가는 용기와 격려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훈은 교회에서 한줄기 크나큰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주일부터 교회에 네 명의 아가씨들이 새로 나오고 있었다.
그 중의 한사람이 옥임이었다.
옥임의 미모는 네 사람 중에서 단연 사람들의 눈에 띄기에 충분할만큼 아름다웠다.
피부는 다소 그을리고 거칠었으며, 또 어떤 날은 피곤에 절어 약간 초췌해 보이는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비교적 깨끗한 피부와 본바탕을 이루는 하얀 살결,
계란형의 작고 예쁜 얼굴, 웃을 때 뺨에 피어나는 보조개는 일품이었다.
태훈은 옥임을 처음 볼 때부터 자신의 심장이 마구 펑펑 뛰어오르며 침착한 마음에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떤 전율마저도 일어났고, 옥임을 바라 볼 때에는 옥임만이 커다란 빛의 형상처럼 느껴지며,
주변의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옥임의 미모가 뛰어났던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태훈이 참 좋아하는 그런 타입에 들어맞았기에 더욱 더 그러했을 것이다.
세상에 미녀는 많지만, 그 미녀에 대한 선호도는 또 사람마다 다를테니 말이다.
태훈의 마음을 가장 끌었던 부분은 옥임의 이미지에 가득 배어있는
청순함과 깨끗함...순수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태훈은 그날부터 유심히 옥임을 남몰래 지켜보았다.
옥임은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고, 교회사람들과도 무척 잘 어울렸다.
사람들도 옥임의 밝은 이미지를 좋아하고 친근하게 잘 대해 주었다.
옥임의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는 태훈도 용기를 내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옥임을 비롯한 옥임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점차 그녀들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다.
서로가 왕성한 젊은이들이다보니 서로 쉽게 친근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그들을 아는 주변사람들 모두가 태훈과 옥임을 한쌍의 커플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태훈의 친근한 외모와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성격은 옥임의 마음마저도 쉽게 끌어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옥임 역시 인근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옥임이 일하는 곳은 섬유공장이었고, 옥임은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가 많았다.
처음에는 얼굴 반반하니 끼도 많을 것이라고 뒤에서 깎아내리며 시샘하던 동료들도 오랜 시간동안 지켜보면서
그녀의 순수하고 꿋꿋한 성격을 알게되고는 거의 모두 입을 다물게 되었다.
옥임의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태훈은 옥임이 병약한 홀어머니만을 모시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옥임의 어머니는 어떤 부잣집 사장의 첩살이를 했었고,
그래서 옥임을 홀로 낳은 후 몰래 숨어서 사장으로부터 생활비와 양육비를 보조받으며 옥임을 길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나서 기분이 그랬는지 밝은 옥임의 얼굴에 때때로 깊이 스며드는
어떤 우울함 같은 분위기를 태훈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고아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부터 웬지 모르게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다시 살펴보는 듯하던
그녀의 눈빛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만이 깊이 느낄 수 있는 동병상련의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장의 사내들 중에는 옥임의 미모를 탐내고 은근히 유혹하는 사람들도 몇 명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옥임의 성격이 꿋꿋한지라, 그런 유혹에는 단호한 자세로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태훈은 한편으로는 속이 쓰리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 태훈은 옥임을 더욱 더 소중히 대하고 아끼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그녀에게 언제나 웃음과 밝은 표정만을 남겨 줄 수 있도록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마저도 일었다.
그들의 만남과 교우...그리고 교제...연애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어느 날 태훈은 한 밤의 공원에서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옥임은 조용히, 그러나 확신있는 태도로 태훈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순결한 약속을 상징하는 듯한 둘의 깊고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병상에 누워 신음하고 있던 옥임의 어머니 두사람의 인사와 결심을 전해 듣고는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힘없는 손을 힘겹게 뻗어서는 태훈의 손을 꼭 잡고 어루만졌다.
고아원의 원장선생님은 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주며,
없는 재정이었지만, 결혼식만이라도 순조롭게 이룰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같은 고아원 출신의 친구이며, 늘 대담하고 수완 좋던 성태는 자신이 현재 일하고 있는
강릉과 속초 쪽의 수산업관련 사업이 아주 전망이 좋다는 말과 함께,
나중에 그 곳 수협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번 힘써주겠다면서, 멀리서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열심히 벌어놓았던 돈과 함께 고아원의 도움을 약간 빌려, 둘은 결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결혼식은 두사람의 소중한 지인들만 초대하여 최소한으로 간결하고 간단하게 작은 규모로 올렸다.
앞으로의 둘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단칸 방으로 시작한 초라한 살림이었지만, 서로 사랑하는 두 아름다운 젊은이는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옥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픈 일을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구한 인생살이에 온갖 고달픔을 다 겪었고, 병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딸의 지극한 정성과 간호 덕분에 간신히 연명하던 옥임의 어머니는 딸의 결혼식으로 인해
영혼의 안식을 얻었는지, 한시름을 놓으며 간신히 지탱하던 생명을 다하고 만 것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옥임의 손을 꼭 잡은 채
어깨와 등을 어루만져주며 태훈도 아내의 슬픔을 함께 나누어 주었다.
옥임의 어머니의 장례식에 찾아온 친척이라곤 단 두사람 뿐이었다.
옥임 어머니의 동생인 외삼촌 한 분과 옥임의 배다른 오빠 한 분 뿐이었다.
옥임의 외삼촌은 누님의 영정을 노려보며 한스러운 눈물만 하염없이 흘릴 뿐이었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조카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도 가진 것이 없어
아무 것도 제대로 해줄 수 없음을 술잔을 기울이며 자책하고 있었다.
태훈은 옥임의 배다른 오빠를 거기서 처음 보았다.
옥임의 아버지라는 작자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자신의 아이까지 낳은 여인의 죽음이 아니던가.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지만 성실하고 바르게만 자라 온 태훈으로서는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아버지에 서로 다른 어머니를 가진...배다른 옥임의 오빠...
그는 예의가 바르고 무척 상냥한 젊은 남자였다.
그는 옥임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배다른 여동생을 정성껏 위로해 주었다.
어머니는 달라도 자신의 아버지가 뿌려놓은 또 다른 자신의 혈육이 아닌가.
그는 그런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같은 아버지의 남매라서 그런지 몰라도 두사람의 얼굴도 몹시 닮았다고 느꼈다.
옥임에게 저런 친오빠가 늘 곁에서 한분만 계셨어도....
태훈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눈시울이 붉어옴을 느꼈다.
그렇게 장례식은 끝나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강릉에 있는 친구 성태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곳 수협 관련 회사로 와서 한번 일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큰 도시보다는 물가도 훨씬 싸고, 조용한 곳인데다가,
적어도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좀 더 나을 것이라는 연락이었다.
신중한 의논을 거친 후에 젊은 신혼부부는 결국 강릉으로 보금자리를 옮겨갔다.
성태의 도움으로 강릉의 단칸 방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채용되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아무 것도 없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였지만,
그래도 두 젊은이는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어가며
나름대로 행복한 신혼생활의 불씨를 힘차게 지펴나갔다.
친구 성태는 모질고 거친 친구였지만, 늘 수완이 좋았다.
건장하고 대가 찬 성격으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교능력도 무척 뛰어난,
한마디로 사회생활에 능한 실전형 인간이었다.
건장하고 주먹도 잘 쓰고, 여기저기 어울려 노는 짓도 잘했다.
가끔씩이라도 친구인 태훈부부를 위해서 나름대로 도움도 베풀었다.
처음 몇번은 태훈을 데리고 술집에도 드나들고 아가씨들도 불렀다.
하지만 태훈이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못마땅하다는 듯이 토라지면서도
다음부터는 그런 곳에 데리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옥임도 인근의 수산관련 공장에 취업하여 그곳에서 일을 했다.
젊은 부부는 각자 열심히 일하며,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옥임이 아이를 가졌다.
지금 자신들의 처지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옥임은 몹시 당황하고 조심스럽게 태훈의 의견을 물었으나,
고아로 자라난 태훈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태훈은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낌에 온 몸에서 전율이 일었고, 얼굴 표정에서부터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에게 내 피를 물려받은 아이가 있다!
나에겐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다...나는 가장이다...
내가 아빠가 된다....
내 아이에게는 부모가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새로운 부담을 주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태훈은 아내의 손을 감싸쥐며 그저 계속 고맙다고만 했다.
아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성스러운 모습으로 태훈의 눈에는 비쳤다.
옥임 역시 남편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윽이 안심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한줄기 눈물을 떨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채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홀로 자라난 젊은 청년과
기구한 운명 속에서 지금까지 홀로 외로운 고달픔을 지고자라난 아가씨...
그들은 그렇게 세상의 각박한 운명 속에서 희롱당하며 자라난 젊은이들이 아닌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외로움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가 내 곁에 있으니.
둘이 함께 짊어지고 나갈 미래와 희망이 있으니.
우리의 모든 것이 섞여 새롭게 창조되고 우리를 이어갈 새로운 생명이 있으니...
두 사람은 함께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 후 태훈은 점점 배가 불러가는 아내를 위해 자신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며 직장과 집을 오가며 헌신했다.
옥임은 출산일이 가까워 옴에 따라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텐데도 일부러 태훈을 위해서
더욱 조심하며 히스테리를 부리지도, 어떤 부담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스러운 딸이 나타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
그렇다, 이 세상의 새로 태어나는 생명은 하나같이 모두 천사의 형상을 띄고 있다.
아기는 옥임의 아름다움과 태훈의 빼어남을 꼭 반반씩 물려받은 것 같은 얼굴이다.
간호사들 말로는 우는 소리도 엄청나게 우렁차댄다.
태훈은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꼭 쥐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땀과 수고로움으로 힘들었던 옥임은 남편을 올려다보며 햇살같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여인...
지혜롭고 아름다운 나의 아내...
그런 내 아내를 꼭 빼닮은 내 사랑하는 딸...
안 혜미.
사랑한다...사랑한다...우리의 소중한 딸 혜미야...
부디 지혜롭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무럭무럭 자라다오.
두 사람은 세상과 주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현상이 하나 있다.
하늘은 언제나 착하고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시련을 안겨주는 법이다.
세상에는 악하고 모질고 다른 사람들의 연약한 마음에 대못을 펑펑 꽂아대는 놈들이 가득한데도
희한하게도 그런 놈들은 잘먹고 잘산다.
살아가는데 전혀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걸 보면 확실히 이 세상은 모질고 독한 마음 먹고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자기도 그럭저럭 의식주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구조가 짜여져 있는 것이다.
사람도 지구상에 생존하는 생명체의 하나이니 자연의 법칙인 약육강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보다.
어느 날, 옥임이 일터에서 쓰러졌다.
소식을 들은 태훈은 심장이 터질듯한 충격과 초조감을 느꼈다.
병원의 진단으로는 원래 앓고 있던 결핵에 만성피로가 겹쳐지며 발병이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지나치게 무리를 한데다가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몸인지라 디스크에 의한 무리까지 겹쳐버렸다.
우선 한바탕 수술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장기적인 치료로 나아가야 한다.
너무나도 악화되어 버린 옥임의 몸상태로는 우물쭈물하다가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를 치료해야 한다.
치료는 해야 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옥임의 건강을 반드시 되찾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말이다...
그녀는 내 생명이다!
그녀가 없으면 나도 없다.
하지만....하지만...
어떤 이는 분유 값이 없어서 자신의 아기를 위해 분유를 훔치다 붙잡혀서 뉴스화면에서 오열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사고로 자기 눈 앞에서 쓰러지는 순간
뇌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병원치료비가 없다는 생각이었다고도 한다.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지만, 틀림없는 실화이다.
어떤 이들에게 세상이란 그토록 비참한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세상이란 그토록 냉혹한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세상이란 그토록 가혹한 것이다.
태훈은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너무나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밤 태훈은 옥임의 손을 맞잡았다...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세상의 온갖 슬픔과 서러움이 눈물 속에 회한이 가득한 채로 맺쳐 아내의 얼굴로 굴러 떨어졌다.
아내가 조용히 위로 손을 뻗어 태훈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힘없지만..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걱정말아요...자기야...나 안죽어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 목소리에 태훈은 더욱 더 오열했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봤지만, 선뜻 거액의 목돈을 빌려줄만한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태훈이 아무리 성실하다 해도 새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환경에서
그렇게 선뜻 큰 도움을 베풀만큼의 교제를 가진 사람도 거의 없다.
착하고 성실하다는 것 뿐이지, 요령도 변변히 피울줄 모르는 샌님같은 태훈이 아니던가.
차라리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교사나 목사가 되었더라면 딱 좋았을 태훈일 뿐이었다.
지친 태훈은 낙담했다.
고지식한 태훈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활로도 찾을 수가 없다고 느껴졌다.
방 안에서 잠든 아내의 지친 얼굴과 혜미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태훈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성태였다.
친구 성태...
명색은 수협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성태는 잘 나가고 있었다.
어떤 루트를 통해서 어떤 부업을 하면서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수완 좋은 성태라면 틀림없이 어떤 방법을 내놓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성태를 찾아가자,
그 놈이라면 무슨 수가 있을거다.
다음 날 아침, 직장에 나가 성태에게 연락을 했다.
성태는 많이 바쁘니까 저녁에 술 한잔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태훈은 먼저 집으로 달려가 옥임을 돌봤다.
혜미를 목욕시키고 엄마 곁에 뉘인 후에 치료때문에 급한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안심시킨 후에 집을 나갔다.
성태가 먼저 약속한 장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태도 옥임의 일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성태가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쓰라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훈은 이런저런 사정을 말하면서 성태에게 조언을 구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갚아줄테니 목돈을 좀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씨팔~!!!"
갑자기 욕설을 내뱉으며 성태가 쾅~!화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건장하고 힘센 성태의 팔힘에 테이블이 순간적으로 쎄게 울리고 놀란 주인아주머니가 바라본다.
그리고 다소 취기가 오른 듯한 목소리로 쏜살같이 말을 이었다.
"씨팔 젠장....정말 세상 헛살았다 헛살았어!!!
너도 알다시피 너나 나나 힘이 있냐 빽이 있냐...!!!
둘 다 천지간에 부모없는 고아로 자라서 지금까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이 더러운 놈의 세상에서 아둥바둥하고 있는거 아니냐.
세상에 하나뿐인 친구란 넘이 자존심까지 접어가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애처로운 꼬라지 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으니 나라는 놈 팔자도 정말 똥이다 똥!!!!"
성태가 스스로 또 한잔 소주를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켜 버린다.
그리고 태훈에게 쏘아댄다.
"너 말이야!!!
이 병신같은 놈아!!! 넌 그동안 도대체 뭐했냐???
고아원에서 어릴때부터 원장선생님한테 그토록 칭찬 들어가며,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처럼 굴길래, 난 정말로 네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건 뭐 한마디로 바보 천치 꼴통새끼지 뭐냐.
너 그동안 돈 한푼 제대로 못 모으고 도대체 뭐하고 살았냐!!"
생각할수록 성태가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 또 소주 한잔을 입으로 쏟아넣더니,
담배를 꺼내서 한모금 빨아제낀다.
태훈은 묵묵히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괴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 이 자식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아...
자신이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결혼따위를 하지 말았어야지....
쥐뿔도 없는 놈이 분수에 넘치는 짓거리 하다가 옥임이 마저도 망쳐버리고 있다....
성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할 줄 아는게 뭐냐?"
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해봐 새꺄, 너 도대체 할 줄 아는게 뭐냐고!!"
성태의 언성이 높아지자 놀란 아주머니가 바라본다.
"나가자!"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성태가 나가자고 한다.
계산을 치르고 먼저 나간다.
태훈도 묵묵히 따라 나선다.
바닷바람을 마시며, 어느덧 부두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아~좋다아~~"
성태가 기지개를 한껏 켜면서 큰 소리로 외쳐댄다.
그리고 돌아선다.
"야 임마, 힘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야, 자식아!!!"
태훈이 묵묵히 성태의 그런 모습을 바라본다.
성태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담배를 건넨다.
"한대 빨아라."
태훈이 담배를 건네받자, 성태가 불을 붙여준다.
태훈이 한 모금 빨았다.
담배연기가 휙~하며 바람부는 항구의 밤하늘을 시원하게 가른다.
"방법이 있긴 있다."
성태의 한마디가 순간 태훈의 온 뇌리를 강타한다.
"뭐냐?"
태훈이 황급히 성태를 바라보며 묻는다.
"근데 네가 할 수 없는 일이야."
"뭔데?"
"괜히 말했나 보다."
"뭐냐고!!!!"
태훈이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성태의 멱살을 붙잡는다.
성태는 놀라지도 않고 가만히 태훈의 팔을 잡고 내려놓는다.
"네가 뭘 할수 있겠어?"
냉정하게 되묻는 성태의 목소리다.
"할 수 있어."
힘있는 목소리로 태훈이 대답한다.
"네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
태훈이 순간 흠칫한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선뜻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할 수 있어."
성태가 고개를 절래절래 가로 젖는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가득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태훈의 가슴 속에 순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격렬하게 피어오른다.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온 몸이 터져넘칠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본다.
빈 소주병이 서너개 저편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다.
태훈이 달려가서 소주병 두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힘껏 바닥으로 하나를 태질쳤다.
"쨍그랑!!!!"
소주병이 박살이 나고 파편조각이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성태가 이건 뭐야? 하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태훈을 바라본다.
"할 수 있어!!!!"
태훈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또 한병을 태질쳐 버린다.
"쨍그랑~!!!"
태훈의 자조섞인 분노와 서러움이 가득 찬 힘에 의해 이번 소주병도 박살이 나서 산산조각이 나고만다.
"할 수 있다고...이 새끼야!!!"
태훈이 숨을 헉헉 가쁘게 쉬면서 성태를 노려본다.
그런 태훈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성태가 가까이 다가온다.
"진정해."
태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한다.
태훈은 숨을 가쁘게 쉬면서 자신을 점차 진정시킨다.
그런 태훈을 위로하려는 듯 성태가 씨익 미소를 지어보이며 치아를 드러낸다.
"힘 아껴둬, 임마."
그리고 태훈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바닷바람을 따라 서서히 걸어나간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태훈은 성태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섰다.
돌아서 걸어가는 태훈의 얼굴에는 뭔가 초조하고 착잡하면서도 불안한 빛이 가득하다.
하지만 애써 자기자신을 진정시키려는 빛도 역력하다.
태훈은 그렇게 집으로 향해 갔다.
멀어져가는 태훈의 뒷모습을 성태가 담배를 피우며 바라보고 있었다.
후욱~!!!하고 담배연기가 허공을 갈랐다.
머릿 속이 텅 빈것만 같다.
하지만 담배는 무척 맛있게 느껴진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던 성태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감돈다.
"킥킥킥....!"
자신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킬킬하고 튀어나온다.
이윽고 미친듯이 킥킥킥 웃어댄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배를 부둥켜 잡고 털썩 주저앉아서도 미친듯이 웃어댄다.
담배꽁초를 저쪽으로 멀리 집어던진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탁~! 내리
어찌 이리 죄 많은 존재인가
증오하고 비난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그럼에도 용서를 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가 없다
하지만 용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 때..
그렇게나 용서해 주기를 바랐거늘
사람은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미안해요
엄마.."
끼룩...끼룩....끼룩~~!!!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처량하다.
갈매기들은 떼를 지어 항구의 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바닷바람은 차갑고 매섭다.
간혹 뜨거운 열기의 바람이 그 속에 간간이 섞여 휙 불어옴을 얼굴에 닿는 순간에 느낄 수가 있다.
태훈은 또 다시 소주를 잔에 부었다.
담배 한 모금을 확~빨아 당기고 나서 휙~하니 다시 연기를 내 뱉았다.
그리고 또 다시 얼른 따라놓은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휴우~~!!!
또 다시 자신이 내뱉는 한숨 소리 한모금이 자신의 귓가에 생생히 들려왔다.
애가 탄다....속이 끓어오른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생각나질 않는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봐도 해결방법은 생각나질 않는다....
결국....결국....하지만....휴우~~~
문득 집에서 혼자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옥임이 걱정된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고민될지라도 어디 옥임만큼이야 하겠는가....
태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서두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머릿 속은 연이어 거듭되는 온갖 상념과 고민으로 한가득 점철되고 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어째서 내 인생은 고작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세상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현실감각과는 도대체 거리가 멀었으니 이 모양 이 꼴이 아닌가....
생각하면 할수록 자괴감에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았다.
옥임을 생각하니 더욱 더 마음이 쓰라려 오고, 빠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에 시야가 흐려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옥임이 자리에 누워있다.
얼마 전까지 한바탕 고통과 싸움을 치르느라 지쳤는지 초췌한 얼굴에 땀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곁에는 태훈과 옥임이 가장 사랑하는 딸이 새근새근 엄마 곁에서 잠들어 있다.
그 모습을 보고 태훈은 자신이 술집에 잠시 들렀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얼른 더운 물에 수건을 적셔와 옥임의 얼굴에 맺힌 땀을 정성껏 닦아준다.
"으음..." 옥임이 짧고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약간 뒤척인다.
태훈은 옥임이 깨지않도록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선 옥임의 얼굴을 찬찬히 내려다 본다.
불쌍한 내 아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내 여자...
밝고 맑던 아름다운 얼굴이 초췌해져 있다...
얼마나 힘이 들까....
신랑을 잘못 만나가지고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그동안 불평 한마디 거의 하지 않았다.
태훈은 눈을 돌려 잠들어 있는 어린 딸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딸의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꾸역꾸역 흘러내린다.
한평생의 회한이 태훈의 뇌리 속에 한순간에 파도처럼 밀려온다.
태훈은 고아였다.
대구의 작은 고아원에서 자라난 태훈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마음씀씀이가 성숙되고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매우 따뜻하고 상냥하며 외모도 잘생겼다.
고아원의 여성원장님과 선생님들은 그런 태훈을 특히 아껴주었고, 일정한 나이로 자라난 태훈은 원장님을 도와
고아원의 여러가지 잡무를 함께 돌보며, 공고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공고를 졸업하고는 고아원에서 나와 사회로 뛰어들었다.
플라스틱 사출공장에 들어가 거기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
야간수당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야간근무까지 열심히 뛰며 일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길러준 고아원에 얼마되지 않는 월급의 일부까지 송금해가면서
원장님과 아이들을 챙기곤 했다.
지난 시절의 대부분의 선배들이 그렇듯이 힘들고 고달픈 시절의 연속이었지만
성실과 보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태훈은 꿋꿋했다.
그런 태훈에게 더 큰 마음의 위안을 주는 것은 고아원 시절부터 마음의 안식이 되어준 신앙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갈 때마다 태훈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접하며
살아가는 용기와 격려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훈은 교회에서 한줄기 크나큰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주일부터 교회에 네 명의 아가씨들이 새로 나오고 있었다.
그 중의 한사람이 옥임이었다.
옥임의 미모는 네 사람 중에서 단연 사람들의 눈에 띄기에 충분할만큼 아름다웠다.
피부는 다소 그을리고 거칠었으며, 또 어떤 날은 피곤에 절어 약간 초췌해 보이는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비교적 깨끗한 피부와 본바탕을 이루는 하얀 살결,
계란형의 작고 예쁜 얼굴, 웃을 때 뺨에 피어나는 보조개는 일품이었다.
태훈은 옥임을 처음 볼 때부터 자신의 심장이 마구 펑펑 뛰어오르며 침착한 마음에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떤 전율마저도 일어났고, 옥임을 바라 볼 때에는 옥임만이 커다란 빛의 형상처럼 느껴지며,
주변의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옥임의 미모가 뛰어났던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태훈이 참 좋아하는 그런 타입에 들어맞았기에 더욱 더 그러했을 것이다.
세상에 미녀는 많지만, 그 미녀에 대한 선호도는 또 사람마다 다를테니 말이다.
태훈의 마음을 가장 끌었던 부분은 옥임의 이미지에 가득 배어있는
청순함과 깨끗함...순수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태훈은 그날부터 유심히 옥임을 남몰래 지켜보았다.
옥임은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고, 교회사람들과도 무척 잘 어울렸다.
사람들도 옥임의 밝은 이미지를 좋아하고 친근하게 잘 대해 주었다.
옥임의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는 태훈도 용기를 내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옥임을 비롯한 옥임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점차 그녀들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다.
서로가 왕성한 젊은이들이다보니 서로 쉽게 친근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그들을 아는 주변사람들 모두가 태훈과 옥임을 한쌍의 커플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태훈의 친근한 외모와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성격은 옥임의 마음마저도 쉽게 끌어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옥임 역시 인근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옥임이 일하는 곳은 섬유공장이었고, 옥임은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가 많았다.
처음에는 얼굴 반반하니 끼도 많을 것이라고 뒤에서 깎아내리며 시샘하던 동료들도 오랜 시간동안 지켜보면서
그녀의 순수하고 꿋꿋한 성격을 알게되고는 거의 모두 입을 다물게 되었다.
옥임의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태훈은 옥임이 병약한 홀어머니만을 모시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옥임의 어머니는 어떤 부잣집 사장의 첩살이를 했었고,
그래서 옥임을 홀로 낳은 후 몰래 숨어서 사장으로부터 생활비와 양육비를 보조받으며 옥임을 길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나서 기분이 그랬는지 밝은 옥임의 얼굴에 때때로 깊이 스며드는
어떤 우울함 같은 분위기를 태훈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고아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부터 웬지 모르게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다시 살펴보는 듯하던
그녀의 눈빛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만이 깊이 느낄 수 있는 동병상련의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장의 사내들 중에는 옥임의 미모를 탐내고 은근히 유혹하는 사람들도 몇 명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옥임의 성격이 꿋꿋한지라, 그런 유혹에는 단호한 자세로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태훈은 한편으로는 속이 쓰리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 태훈은 옥임을 더욱 더 소중히 대하고 아끼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그녀에게 언제나 웃음과 밝은 표정만을 남겨 줄 수 있도록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마저도 일었다.
그들의 만남과 교우...그리고 교제...연애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어느 날 태훈은 한 밤의 공원에서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옥임은 조용히, 그러나 확신있는 태도로 태훈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순결한 약속을 상징하는 듯한 둘의 깊고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병상에 누워 신음하고 있던 옥임의 어머니 두사람의 인사와 결심을 전해 듣고는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힘없는 손을 힘겹게 뻗어서는 태훈의 손을 꼭 잡고 어루만졌다.
고아원의 원장선생님은 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주며,
없는 재정이었지만, 결혼식만이라도 순조롭게 이룰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같은 고아원 출신의 친구이며, 늘 대담하고 수완 좋던 성태는 자신이 현재 일하고 있는
강릉과 속초 쪽의 수산업관련 사업이 아주 전망이 좋다는 말과 함께,
나중에 그 곳 수협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번 힘써주겠다면서, 멀리서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열심히 벌어놓았던 돈과 함께 고아원의 도움을 약간 빌려, 둘은 결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결혼식은 두사람의 소중한 지인들만 초대하여 최소한으로 간결하고 간단하게 작은 규모로 올렸다.
앞으로의 둘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단칸 방으로 시작한 초라한 살림이었지만, 서로 사랑하는 두 아름다운 젊은이는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옥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픈 일을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구한 인생살이에 온갖 고달픔을 다 겪었고, 병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딸의 지극한 정성과 간호 덕분에 간신히 연명하던 옥임의 어머니는 딸의 결혼식으로 인해
영혼의 안식을 얻었는지, 한시름을 놓으며 간신히 지탱하던 생명을 다하고 만 것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옥임의 손을 꼭 잡은 채
어깨와 등을 어루만져주며 태훈도 아내의 슬픔을 함께 나누어 주었다.
옥임의 어머니의 장례식에 찾아온 친척이라곤 단 두사람 뿐이었다.
옥임 어머니의 동생인 외삼촌 한 분과 옥임의 배다른 오빠 한 분 뿐이었다.
옥임의 외삼촌은 누님의 영정을 노려보며 한스러운 눈물만 하염없이 흘릴 뿐이었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조카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도 가진 것이 없어
아무 것도 제대로 해줄 수 없음을 술잔을 기울이며 자책하고 있었다.
태훈은 옥임의 배다른 오빠를 거기서 처음 보았다.
옥임의 아버지라는 작자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자신의 아이까지 낳은 여인의 죽음이 아니던가.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지만 성실하고 바르게만 자라 온 태훈으로서는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아버지에 서로 다른 어머니를 가진...배다른 옥임의 오빠...
그는 예의가 바르고 무척 상냥한 젊은 남자였다.
그는 옥임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배다른 여동생을 정성껏 위로해 주었다.
어머니는 달라도 자신의 아버지가 뿌려놓은 또 다른 자신의 혈육이 아닌가.
그는 그런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같은 아버지의 남매라서 그런지 몰라도 두사람의 얼굴도 몹시 닮았다고 느꼈다.
옥임에게 저런 친오빠가 늘 곁에서 한분만 계셨어도....
태훈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눈시울이 붉어옴을 느꼈다.
그렇게 장례식은 끝나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강릉에 있는 친구 성태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곳 수협 관련 회사로 와서 한번 일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큰 도시보다는 물가도 훨씬 싸고, 조용한 곳인데다가,
적어도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좀 더 나을 것이라는 연락이었다.
신중한 의논을 거친 후에 젊은 신혼부부는 결국 강릉으로 보금자리를 옮겨갔다.
성태의 도움으로 강릉의 단칸 방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채용되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아무 것도 없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였지만,
그래도 두 젊은이는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어가며
나름대로 행복한 신혼생활의 불씨를 힘차게 지펴나갔다.
친구 성태는 모질고 거친 친구였지만, 늘 수완이 좋았다.
건장하고 대가 찬 성격으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교능력도 무척 뛰어난,
한마디로 사회생활에 능한 실전형 인간이었다.
건장하고 주먹도 잘 쓰고, 여기저기 어울려 노는 짓도 잘했다.
가끔씩이라도 친구인 태훈부부를 위해서 나름대로 도움도 베풀었다.
처음 몇번은 태훈을 데리고 술집에도 드나들고 아가씨들도 불렀다.
하지만 태훈이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못마땅하다는 듯이 토라지면서도
다음부터는 그런 곳에 데리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옥임도 인근의 수산관련 공장에 취업하여 그곳에서 일을 했다.
젊은 부부는 각자 열심히 일하며,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옥임이 아이를 가졌다.
지금 자신들의 처지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옥임은 몹시 당황하고 조심스럽게 태훈의 의견을 물었으나,
고아로 자라난 태훈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태훈은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낌에 온 몸에서 전율이 일었고, 얼굴 표정에서부터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에게 내 피를 물려받은 아이가 있다!
나에겐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다...나는 가장이다...
내가 아빠가 된다....
내 아이에게는 부모가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새로운 부담을 주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태훈은 아내의 손을 감싸쥐며 그저 계속 고맙다고만 했다.
아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성스러운 모습으로 태훈의 눈에는 비쳤다.
옥임 역시 남편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윽이 안심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한줄기 눈물을 떨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채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홀로 자라난 젊은 청년과
기구한 운명 속에서 지금까지 홀로 외로운 고달픔을 지고자라난 아가씨...
그들은 그렇게 세상의 각박한 운명 속에서 희롱당하며 자라난 젊은이들이 아닌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외로움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가 내 곁에 있으니.
둘이 함께 짊어지고 나갈 미래와 희망이 있으니.
우리의 모든 것이 섞여 새롭게 창조되고 우리를 이어갈 새로운 생명이 있으니...
두 사람은 함께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 후 태훈은 점점 배가 불러가는 아내를 위해 자신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며 직장과 집을 오가며 헌신했다.
옥임은 출산일이 가까워 옴에 따라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텐데도 일부러 태훈을 위해서
더욱 조심하며 히스테리를 부리지도, 어떤 부담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스러운 딸이 나타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
그렇다, 이 세상의 새로 태어나는 생명은 하나같이 모두 천사의 형상을 띄고 있다.
아기는 옥임의 아름다움과 태훈의 빼어남을 꼭 반반씩 물려받은 것 같은 얼굴이다.
간호사들 말로는 우는 소리도 엄청나게 우렁차댄다.
태훈은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꼭 쥐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땀과 수고로움으로 힘들었던 옥임은 남편을 올려다보며 햇살같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여인...
지혜롭고 아름다운 나의 아내...
그런 내 아내를 꼭 빼닮은 내 사랑하는 딸...
안 혜미.
사랑한다...사랑한다...우리의 소중한 딸 혜미야...
부디 지혜롭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무럭무럭 자라다오.
두 사람은 세상과 주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현상이 하나 있다.
하늘은 언제나 착하고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시련을 안겨주는 법이다.
세상에는 악하고 모질고 다른 사람들의 연약한 마음에 대못을 펑펑 꽂아대는 놈들이 가득한데도
희한하게도 그런 놈들은 잘먹고 잘산다.
살아가는데 전혀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걸 보면 확실히 이 세상은 모질고 독한 마음 먹고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자기도 그럭저럭 의식주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구조가 짜여져 있는 것이다.
사람도 지구상에 생존하는 생명체의 하나이니 자연의 법칙인 약육강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보다.
어느 날, 옥임이 일터에서 쓰러졌다.
소식을 들은 태훈은 심장이 터질듯한 충격과 초조감을 느꼈다.
병원의 진단으로는 원래 앓고 있던 결핵에 만성피로가 겹쳐지며 발병이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지나치게 무리를 한데다가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몸인지라 디스크에 의한 무리까지 겹쳐버렸다.
우선 한바탕 수술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장기적인 치료로 나아가야 한다.
너무나도 악화되어 버린 옥임의 몸상태로는 우물쭈물하다가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를 치료해야 한다.
치료는 해야 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옥임의 건강을 반드시 되찾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말이다...
그녀는 내 생명이다!
그녀가 없으면 나도 없다.
하지만....하지만...
어떤 이는 분유 값이 없어서 자신의 아기를 위해 분유를 훔치다 붙잡혀서 뉴스화면에서 오열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사고로 자기 눈 앞에서 쓰러지는 순간
뇌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병원치료비가 없다는 생각이었다고도 한다.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지만, 틀림없는 실화이다.
어떤 이들에게 세상이란 그토록 비참한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세상이란 그토록 냉혹한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세상이란 그토록 가혹한 것이다.
태훈은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너무나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밤 태훈은 옥임의 손을 맞잡았다...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세상의 온갖 슬픔과 서러움이 눈물 속에 회한이 가득한 채로 맺쳐 아내의 얼굴로 굴러 떨어졌다.
아내가 조용히 위로 손을 뻗어 태훈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힘없지만..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걱정말아요...자기야...나 안죽어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 목소리에 태훈은 더욱 더 오열했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봤지만, 선뜻 거액의 목돈을 빌려줄만한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태훈이 아무리 성실하다 해도 새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환경에서
그렇게 선뜻 큰 도움을 베풀만큼의 교제를 가진 사람도 거의 없다.
착하고 성실하다는 것 뿐이지, 요령도 변변히 피울줄 모르는 샌님같은 태훈이 아니던가.
차라리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교사나 목사가 되었더라면 딱 좋았을 태훈일 뿐이었다.
지친 태훈은 낙담했다.
고지식한 태훈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활로도 찾을 수가 없다고 느껴졌다.
방 안에서 잠든 아내의 지친 얼굴과 혜미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태훈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성태였다.
친구 성태...
명색은 수협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성태는 잘 나가고 있었다.
어떤 루트를 통해서 어떤 부업을 하면서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수완 좋은 성태라면 틀림없이 어떤 방법을 내놓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성태를 찾아가자,
그 놈이라면 무슨 수가 있을거다.
다음 날 아침, 직장에 나가 성태에게 연락을 했다.
성태는 많이 바쁘니까 저녁에 술 한잔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태훈은 먼저 집으로 달려가 옥임을 돌봤다.
혜미를 목욕시키고 엄마 곁에 뉘인 후에 치료때문에 급한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안심시킨 후에 집을 나갔다.
성태가 먼저 약속한 장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태도 옥임의 일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성태가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쓰라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훈은 이런저런 사정을 말하면서 성태에게 조언을 구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갚아줄테니 목돈을 좀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씨팔~!!!"
갑자기 욕설을 내뱉으며 성태가 쾅~!화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건장하고 힘센 성태의 팔힘에 테이블이 순간적으로 쎄게 울리고 놀란 주인아주머니가 바라본다.
그리고 다소 취기가 오른 듯한 목소리로 쏜살같이 말을 이었다.
"씨팔 젠장....정말 세상 헛살았다 헛살았어!!!
너도 알다시피 너나 나나 힘이 있냐 빽이 있냐...!!!
둘 다 천지간에 부모없는 고아로 자라서 지금까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이 더러운 놈의 세상에서 아둥바둥하고 있는거 아니냐.
세상에 하나뿐인 친구란 넘이 자존심까지 접어가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애처로운 꼬라지 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으니 나라는 놈 팔자도 정말 똥이다 똥!!!!"
성태가 스스로 또 한잔 소주를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켜 버린다.
그리고 태훈에게 쏘아댄다.
"너 말이야!!!
이 병신같은 놈아!!! 넌 그동안 도대체 뭐했냐???
고아원에서 어릴때부터 원장선생님한테 그토록 칭찬 들어가며,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처럼 굴길래, 난 정말로 네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건 뭐 한마디로 바보 천치 꼴통새끼지 뭐냐.
너 그동안 돈 한푼 제대로 못 모으고 도대체 뭐하고 살았냐!!"
생각할수록 성태가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 또 소주 한잔을 입으로 쏟아넣더니,
담배를 꺼내서 한모금 빨아제낀다.
태훈은 묵묵히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괴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 이 자식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아...
자신이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결혼따위를 하지 말았어야지....
쥐뿔도 없는 놈이 분수에 넘치는 짓거리 하다가 옥임이 마저도 망쳐버리고 있다....
성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할 줄 아는게 뭐냐?"
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해봐 새꺄, 너 도대체 할 줄 아는게 뭐냐고!!"
성태의 언성이 높아지자 놀란 아주머니가 바라본다.
"나가자!"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성태가 나가자고 한다.
계산을 치르고 먼저 나간다.
태훈도 묵묵히 따라 나선다.
바닷바람을 마시며, 어느덧 부두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아~좋다아~~"
성태가 기지개를 한껏 켜면서 큰 소리로 외쳐댄다.
그리고 돌아선다.
"야 임마, 힘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야, 자식아!!!"
태훈이 묵묵히 성태의 그런 모습을 바라본다.
성태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담배를 건넨다.
"한대 빨아라."
태훈이 담배를 건네받자, 성태가 불을 붙여준다.
태훈이 한 모금 빨았다.
담배연기가 휙~하며 바람부는 항구의 밤하늘을 시원하게 가른다.
"방법이 있긴 있다."
성태의 한마디가 순간 태훈의 온 뇌리를 강타한다.
"뭐냐?"
태훈이 황급히 성태를 바라보며 묻는다.
"근데 네가 할 수 없는 일이야."
"뭔데?"
"괜히 말했나 보다."
"뭐냐고!!!!"
태훈이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성태의 멱살을 붙잡는다.
성태는 놀라지도 않고 가만히 태훈의 팔을 잡고 내려놓는다.
"네가 뭘 할수 있겠어?"
냉정하게 되묻는 성태의 목소리다.
"할 수 있어."
힘있는 목소리로 태훈이 대답한다.
"네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
태훈이 순간 흠칫한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선뜻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할 수 있어."
성태가 고개를 절래절래 가로 젖는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가득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태훈의 가슴 속에 순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격렬하게 피어오른다.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온 몸이 터져넘칠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본다.
빈 소주병이 서너개 저편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다.
태훈이 달려가서 소주병 두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힘껏 바닥으로 하나를 태질쳤다.
"쨍그랑!!!!"
소주병이 박살이 나고 파편조각이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성태가 이건 뭐야? 하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태훈을 바라본다.
"할 수 있어!!!!"
태훈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또 한병을 태질쳐 버린다.
"쨍그랑~!!!"
태훈의 자조섞인 분노와 서러움이 가득 찬 힘에 의해 이번 소주병도 박살이 나서 산산조각이 나고만다.
"할 수 있다고...이 새끼야!!!"
태훈이 숨을 헉헉 가쁘게 쉬면서 성태를 노려본다.
그런 태훈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성태가 가까이 다가온다.
"진정해."
태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한다.
태훈은 숨을 가쁘게 쉬면서 자신을 점차 진정시킨다.
그런 태훈을 위로하려는 듯 성태가 씨익 미소를 지어보이며 치아를 드러낸다.
"힘 아껴둬, 임마."
그리고 태훈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바닷바람을 따라 서서히 걸어나간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태훈은 성태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섰다.
돌아서 걸어가는 태훈의 얼굴에는 뭔가 초조하고 착잡하면서도 불안한 빛이 가득하다.
하지만 애써 자기자신을 진정시키려는 빛도 역력하다.
태훈은 그렇게 집으로 향해 갔다.
멀어져가는 태훈의 뒷모습을 성태가 담배를 피우며 바라보고 있었다.
후욱~!!!하고 담배연기가 허공을 갈랐다.
머릿 속이 텅 빈것만 같다.
하지만 담배는 무척 맛있게 느껴진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던 성태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감돈다.
"킥킥킥....!"
자신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킬킬하고 튀어나온다.
이윽고 미친듯이 킥킥킥 웃어댄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배를 부둥켜 잡고 털썩 주저앉아서도 미친듯이 웃어댄다.
담배꽁초를 저쪽으로 멀리 집어던진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탁~! 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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