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이를 가졌던 그녀 - 1부
2011년도 이제 저물어간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여태까지 그 누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시작부터 끝까지 일반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성당을 찾아 고해성사를 해볼까 고민했지만 차마 신부님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얼마 전 어리고 예쁜 여자친구를 얻었다. 더 늦기 전에 어딘가에 이 이야기들을 풀어내지 않으면 평생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했던 비디오와 녹음 자료들을 꺼내보며 추억을 되살려본다. 그녀와 헤어진 후 잠시 억누르고 있었던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새 여자친구에게 마약과도 같은 그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 헛기침을 하고 나 자신을 추슬러본다. 실수를 두 번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이 곳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털어놓고 이제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보고 싶다.
내가 대학에 갓 입학하여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의 2003년 여름. 우리는 캠퍼스에서 만났다. 그녀는 학교 앞 분식집에서 야식을 사서 기숙사로 들어가는 길이었고, 나는 동기들과의 단합대회가 끝난 후에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녀와 내가 가장 가까이 스치려던 그 찰나의 순간, 나보다는 내 동기가 그녀를 먼저 발견했다.
“야, 우석아! 빨리, 빨리! 12시, 12시!”
윤호가 그렇게 말조차 이어가지 못하며 나의 어깨를 쳤던 바로 그 때, 그녀는 온 몸으로 나의 눈빛을 사로잡았다. 어깨를 살짝 건드리는 발랄한 생머리, 수수한 베이지색 반바지 아래로 곧게 뻗은 하얀 다리, 달라붙을 듯 팔랑이는 분홍색 티셔츠로 미처 다 가리지 못한 그녀의 볼륨감까지.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그녀의 친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에 그녀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야, 진짜 예쁘지 않냐? 말 걸어볼까? 어떡하지?”
“...쟤네도 두 명이니까 같이 가자”
신입생 동기들끼리의 단합대회에서 거나하게 취하지 않았다면 그녀들에게 말을 걸거나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등의 행동은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갓 대학물을 먹기 시작한 윤호와 나의 호기는 술기운을 등에 업고 그녀들의 뒤를 따라가게 한다.
“저기요! 저기요!”
내가 다급하게 여러 번 소리치자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조명 아래 은은하게 보이는 옅은 갈색의 눈썹, 큰 눈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긴 속눈썹,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입술과 그에 이어지는 입꼬리까지. 이 기회를 놓친다면, 혹은 내가 조금이라도 말을 건네는 게 늦어져 이 여자를 동기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말했다.
“저기..유학생이세요?”
“아닌데요.”
그녀와 내가 나눴던 첫 대화였다.
“아..꼭 여기 국제관 사는 일본인 유학생처럼 보여서..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 소리 가끔 들어요.”
그녀가 대답과 함께 보여줬던 미소에는 여성이 밤 늦은 시각에 다가온 남자에게 흔히 보일 수 있는 경계심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이상하게 느낌이 좋았다. 동기 윤호는 부끄러웠는지, 혹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지 그냥 내 옆에서 웃고만 있었다.
“여기는 노윤호라고 하고, 저는 최우석이라고 합니다. 경제학과에요. 여기 남자 기숙사에 살고 있어요. 저 실례지만..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는 미소를 조금 더하며 대답했다. 아름답다. 나이는 어느정도 될까? 겉보기에는 동갑일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3~4학년이라면..그런데 그녀정도 되는 여자라면 평소에도 분명히 나처럼 말을 거는 남자가 많아서 귀찮을 법도 한데, 그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그냥 습관적일까.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혹시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일까?
“저는 이소진, 여기 제 친구는 민원희에요. 경영대.”
“아, 소진씨..갑자기 말 걸어서 죄송해요. 저희는 막 단합대회 끝마치고 왔어요. 취한 것 같지는 않죠? 술김에 여성분한테 이러는 거 실례가 될 수도 있잖아요.”
“단합대회? 신입생이세요?”
“네. 스무살이에요.”
“반갑네요. 저도 1학년이에요.”
그녀도 신입생이다! 나이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 어찌됐든 동갑이거나, 끽해야 재수 해서 한 살 정도 차이 나겠지. 설마 여자가 삼수 하지는 않았을테니까. 삼수 했으면 또 어떠랴, 어차피 똑같은 1학년인데. 혹시나 그녀가 3학년이거나 4학년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니 터질 것 같이 두근거리던 가슴이 놀라울 정도로 진정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와 같이 있었던 윤호나 그녀의 친구 원희는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도, 나도 이상하리만큼 서로간의 대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영어에서 말하는 chemistry, 이끌림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흥분감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대학생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기소개, 즉 나이와 학과 나열이 끝나니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계속 두근거린다면 아까처럼 말도 안 되는 말을 꺼내기라도 할텐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할 때쯤에 고맙게도 그녀는 먼저 나에게 말을 건네주었다.
“1학년 과목은 경영대나 경제학과나 저학년 때는 서로 겹치는 게 많죠? 기초경제수학이나 경영학 원론, 경제학 원론같은 전공기초과목들을 2학기 때 듣는다던데, 사실 1학기 때는 전공과목은 못 듣고 대학영어나 대학국어같은 기본소양과목 듣느라 대학 공부가 조금 지루했어요.”
화제가 던져지니 대화를 풀기가 조금은 쉬워진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2학기에 전공 관련 과목들 들으면 되게 재밌을 것 같아요. 방학 때 준비 잘 해서 학점도 잘 받아야지..그래도 이번 주말까지는 놀고 싶어요. 다음 주에 방학 하면 공부 해야죠.”
“네. 저도 수능 볼 때 선택과목이 경제가 아니라서 조금 걱정이에요. 경제는 진짜 하나도 모르는데..경제수학이나 경영통계도 자신이 없고..”
“토요일에 뭐하세요?”
나의 데이트 신청은 그렇게 뜬금없이 이뤄졌다.
“네?”
“아니..제 자랑이긴 한데요. 하하. 사실 제가 경시대회 출신이라 수학에는 자신이 있거든요. 선택과목도 경제였었고. 어차피 전공도 다들 비슷하고 기숙사 사는데..이번 주말에 모여서 같이 놀기도 하고, 다음 주부터는 스터디 같이 짜서 공부해보는 거 어때요? 토요일에 시간 있으세요?”
윤호를 슬쩍 쳐다보니 괜찮다는 눈치다. 생각 외로 잘 풀려가서 기분이 좋아보인다. 그녀도 그녀의 친구와 잠깐 얘기를 하는 듯 하더니 나를 바라봤다.
“좋아요.”
2003년 6월 18일. 나의 아이를 가졌던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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