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방시트콤 - 2부 1장
제2부 1장 : 미르의 전설
거지새끼라며 강제로 쫒겨난 PC방에 대한 불쾌감 보다 책상 위에 딸랑 올려질 수 있는 너무 작은 컴퓨터가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머리 속을 맴도는 기억들과 어림짐작으로 익숙하게 키보드를 쳐내는 솜씨로 봐서는 분명 어느 시기엔가 컴퓨터와 관련있는 일을 했던 것 같았지만 막상 기억을 떠올려 보니 먹구름처럼 머릿속이 띵하기만 하다.
“철호야, 동냥질이나 하러가자.”
“싫다며.”
“당당하게 돈내고 PC방 가면 될텐데 첨부터 튈 생각으로 데려가면 어떻해.”
“배 고프고 춥길래 모셔간거지예.”
“이런 죽일 놈, 겨우 튀는 대책이면 첨부터 얘길 했어야지.”
“PC방 맘에 드슈?”
“그러게 말야. 그 놈의 컴퓨터란게 신기하다.”
“그까짓것 밖에 버려진게 허다하우.”
“쓰레기루 버린다고?”
“거 머시냐. 산업폐기물 이라니까예..”
“세상 좋네. 귀한 걸 버리는 사람은 도대체 뭐야?”
“흔해 빠진게 컴퓨턴데 정말 딴나라에서 왔나.”
“좋아, 버려진 것 있으면 주워와봐.”
“무신, 무겁게 어딜 들구 다니라구예.”
“뜯어보고 싶다.”
“전파사라두 했는갑지.”
“널 위해 동냥질두 할테니까 일단 줏어와봐”
“증말?”
“얌마, 당장 지하철 입구에 나가자.”
“됐구마, 오늘은 가시나 만나는 날 아니요.”
“흐미, 정말 만날낀가.”
“기회가 맨날 있나. 이 참에 한 퀴...확!”
지저분한 가방을 한참 뒤지던 철호는 낡은 칫솔 하나를 꺼냈다. 우리네 사는 꼬라지야 버려진 밥으로 주린 배만 채우면 그뿐이지 하얀 이빨을 남들한테 보여줄 일 없으니 양치질을 잊은지 오래다. 가시나가 뭐길래 쓰레기통에서 주워 몇 달 째 묵인 칫솔을 꺼내들고 양치질까지 한답시고 깝죽거리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같이 갈라면 옷이나 챙겨 보슈.”
“단벌 신사가 무슨 옷이 또 있노?”
“행님도 뭔가 구멍을 찾아야 이 생활 벗어날꺼 아뉴.”
“날 풀리면 이 생활도 극낙 아니냐.”
“미래가 없다니까. 제발 앞 좀 보고 사슈.”
“네 놈이나 남 등칠 생각말구 열심히 살아라.”
“나처럼 바쁜 놈 있으면 나와보라 하슈.”
지하철 화장실을 전세낸 듯 요란하게 머리까지 감고 헤진 수건으로 머리를 툴툴 말리니 이 놈도 제법 훤칠한게 한 때는 여자께나 후렸겠구나 싶다. 기분좋게 휘바람을 길게 불며 지하도를 빠져나가는 철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지하철 입구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귀찮아두 안쫒겨 나려면 동냥질을 해야겠구먼.”
시간당 오백원하는 PC방에서 조차 쫒겨나서야 말이 안될 일이다 싶어 한참 서있었더니 벌써 몇 천원의 지폐가 손에 쥐어졌다. 이왕 서 있는 거,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잡는 시늉을 하며 적극적으로 동냥질을 해대니 또 삼만원이 손에 챙겨졌다. 이렇게 쉽게 돈 벌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이 짓거리를 해서라도 추위를 이길 수 있었을텐데 같은 거지 신세라도 알량한 자존심은 남아 손발에 어름베기지 않은 살이 없게 만들었는지 후회가 됐다.
꾸겨진 돈 끝을 꼼꼼하게 펴놓고 바라보니 조폐공사에서 막 찍어낸 돈처럼 빳빳한 것이 흐믓하게 삼만사천원이나 된다.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던 철호놈이 연애질을 하러 갔으니 혼자라도 어제 쫒겨난 PC방을 찾아 어슬렁 발길을 옮겼다.
“여긴 거지 들어오는데가 아냐.”
“돈 내고 할건데 그냥 가?”
나를 쫒아냈던 주인 코 앞에다 만원짜리 지폐를 살랑살랑 흔들어주자 치켜떳던 눈을 내리 감더니 웃음까지 띠며 손가락으로 빈자리를 가리킨다. 돈이 웬수였겠지. 주위를 둘러보니 겉만 멀쩡해 보일 뿐 내 몰골보다 더 한 년놈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여보슈, 주인장.”
“예, 예,,,”
“더러워서 어디 앉겠소. 청소 좀 해주슈.”
“더러워요?”
“담배꽁초가 수북하구 가래침 뱉어논 잿더리가 놓인 자리에 손님을 앉히면 어쩌라는거요?”
“아이구, 죄송합니다. 아르바이트 놈이 청소를 안했나보네.”
“무슨소리? 주인 양반이 후딱 치우면 될텐데.”
안절부절 다가와선 한 손으로 코를 쥐어 막고 눈살 찌푸린 채 쓰레기를 치우는 꼴을 보니 아르바이트 학생 관리도 허술한 것이 운영 면에서 선수는 아닌 듯해 보였다. 적어도 자기것을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남이 해주길 바라는 집이 잘될 턱이 없는 법인데 이 PC방 사장은 장사가 안될 요인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우스를 몇 번 누르니 화면이 밝아지고 모니터에 작은 그림들이 나타났다. 어떤 걸 누르면 채팅창이 뜨는지 이것 저것 마우스로 콕콕 눌렀지만 엉뚱한 것만 자꾸 화면에 솟구치는 것이 아무래도 철호가 없으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희 아빠!”
젊은 여자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내 옆자리에서 무슨 게임을 하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있는 사내를 큰 소리로 불렀다.
“어, 왔어?”
“밥은?”
“짜장면 시켜 먹을꺼야.”
“돈은 좀 벌었어?”
“그럼, 아이템을 많이 팔았거든.”
“얼마나?”
“오십만원 통장에 들어왔을테니까 은행가서 찾아와.”
“알았어. 영희 좀 보고 있으면 금방 돈 찾아올게.”
“야, 어린 앨 보면서 어떻게 게임하라구.”
“금방이면 되잖아. 후딱 같다올게.”
“아이 쓰발. 애가 거추장스러워서 아이템 못 얻는단 말야.”
“오늘 오십만원 벌었으면 그만 쉬면 안돼?”
“쉬라구? 이게 맨날 대박터지냐? 남들 상사 눈칫밥 먹고 버는 돈이나 여기서 버는 돈이나 공들이긴 마찬가진걸 몰라?”
“알지만, 잠깐 동안 쉬면 되잖아.”
“알았으니까, 금방 다녀와라.”
삼십쯤 되보이는 사내는 자신에게 맞겨진 영희라는 딸 아이가 몹시 귀찮은지 음료수랑 과자를 사서는 아이에게 안겨주곤 다시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만 했는데도 하루에 오십만원을 벌었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졌다. 하긴 잠시 지하철 입구에서 옷깃을 잡아 당기는 척만 했는데도 삼만원을 넘게 번 놈이 돈 벌 생각만 있으면 얼굴에 철판만 깔아도 금방 재벌 될 것 같았지만 이렇게 PC방에서 우아하게 게임만 하는데도 돈이 굴러 들어 온다는 말에 신기하기만 했다.
“어이, 형씨. 무슨 일을 했는데 오십만워늘 번거요?”
“아, 이거? 미르의 전설인데 아이템 팔았수.”
“미르의 전설은 또 뭐고 아이템은 뭐요?”
“이 동네 분 아니셔?”
“이 동네 터줏대감이지만 게임으로 돈번다는 얘긴 첨 들어서 말야.”
“아저씨두 한번 해 볼라우?”
“돈 되는거면 가르쳐줘.”
“첨엔 돈 안되지만 자꾸 하다보면 아이템 좋은걸 얻을 수 있수. 그걸 내다 팔면 돈 되고.”
“남들도 아이템 줏을꺼 아냐.”
“레벨 빨리 올릴려고 욕심내는 사람들은 이 게임에선 아이템이 돈 보다 더 중요해요.”
“어차피 줏을텐데 왜 돈내고 사지?”
“레벨 올릴라면 몹이란 걸 많이 잡아야 하는데, 몹 잡기가 쉽지 않아요. PC방에다 쏟아 붓는 돈이나 아이템 사서 빨리 레벨 올리는 것이나 비슷하니까 거래가 되죠.”
“난 이해가 안되는데 설명 좀 해줘.”
“좋아요. 그대신 배우면 내 휘하가 되야해요.”
“뭔 휘하?”
“아, 그런게 있어요. 이 게임은 혼자 하면 너무 힘들어서 문파를 만들고 문주한테 충성해야 하는데 내가 이 동네 문주거든요.”
“휘하가 되면 뭐가 좋은데?”
“큰 몹이랑 싸울 때 죽지 않도록 문파에서 도와주고, 대신 아이템 좋은 거 나오면 나한테 갖다 바쳐야 해요.”
“그딴짓 싫어서 혼자 사는데, 여기서도 그 짓거리야?”
“아저씨가 싫으면 그만이구. 만약에 한다면 혼자서는 절대 이십레벨 이상 못올라가니까 서로 필요해서 결성된 문파를 이용하는거니까 알아서 하시든지.”
"좋아. 일단 게임하는 법 좀 가르쳐줘.“
“우선 미르의 전설이 뭔지 개략적으로 알아야 왜 싸우는지 이유를 알테니까 설명해주죠.”
영희아빠라는 친구가 내 컴퓨터에서 어떤 그림을 마우스로 콕콕 누르니까 반나체의 여전사가 칼을 비스듬이 들고 있는 멋진 그림이 나타나면서 미르의 전설이라는 제목이 나타났다.
“여기 들어가면 여자들이 이렇게 예뻐?”
“예쁘긴, 지렁이나 딱정벌레처럼 작아요.”
“근데 그림은 엄청 야한데?”
“아저씨, 야한 여잘 찾아요?”
“있어?”
“이 게임 한참 하다보면 정말 야한 여자들 많이 먹을 기회가 생겨요.”
“컴퓨터끼리 먹는거야?”
“아뇨, 문파 모임이 있는데, 좀 괜찮은 여자를 꼬시려면 비장의 아이템을 줄테니까 한번 달라고 하면 돈주고도 사기 힘든 아이템일 때는 몸으로 떼우는 애들이 생긴다니까요.”
“그럼 영희아빠, 당신도 먹어봤어?”
“조용히 해요. 금방 애 엄마 올시간 됐으니까.”
“먹긴 먹어봤나보네?”
“아저씨가 내 문파에 들어와서 휘하로 들어오면 먹을 기회가 많을꺼요.”
“이봐, 여자 살맛 잊은지 오래됐거든. 나도 당신 휘하로 만들어줘봐.”
“아이, 세상에 공짜가 어딧어.”
“뭐야. 문파에 들어가서 휘하가 되는것도 돈 내야해?”
“아뇨. 일단 레벨을 이십까진 올려놓고 가입하든지 해야지요.”
“아씨블, 그냥 당신이 내 레벨 이십까지 후딱 올려주면 되잖아.”
“알았으니까, 일단 회원가입하고 시작합시다. 어차피 애 엄마 올때까진 나도 게임하긴 텃으니 아저씨 레벨을 확 올려줄게.”
“근데 문주 이름은 어떻게 되지?”
“싸이버 세상에선 이름 안밝히는게 예의라구요.”
“여긴 싸이버가 아니잖아, 같은 PC방에서 옆자리에 앉았는데 계속 영희아빠라고 하기도 뭐하니까 이름을 말해봐.”
“동수요. 내 이름은 김동수.”
“그래? 난 김갑수.”
“어차피 닉네임으로 게임하는거니까 가급적 이름은 부르지 말아요.”
“김동수씨 닉네임은 뭔데?”
“미르킹.”
“마네킹?”
“그만하고 이 화면을 먼저 읽어봐요.”
김동수가 펼친 화면에는 미르의 전설에 관한 줄거리가 쓰여있었다. 마계의 힘이 강해져서 몹이라는 괴물이 출현하고 차츰 그 힘이 강해져서 마을을 습격하더니 세상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마계의 세력이 약한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몹과 대항하기 위해 무공과 마법을 익히며 마계와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싸울 대상은 몹이겠구먼.”
“그렇죠. 아저씨는 무공이 약해서 몹을 잘못 건들면 죽어요. 몹을 많이 잡아야 레벨이 올라가는데 한단계씩 올라가려면 어깨가 빠질 정도로 노가다 작업이 되니까 문파에서 초보자를 위해 레벨 높은 사람들이 아저씨를 도와줄꺼고 그러면 몇십배 빨리 레벨을 올릴 수 있지요.”
“혼자서 몹을 잡다 지치는 것보다 협동으로 몹을 잡으면서 레벨을 올리자는거군?”
“그렇죠. 레벨을 올려야 무공이 강해져서 더 큰 몹을 잡을 수 있는데, 좋은 아이템만 있으면 같은 레벨이라도 몹 잡는게 수월하죠.”
“그럼 아이템이 미르의 전설에선 승부수겠네.”
“다른 게임도 똑같아요. 그래서 아이템 장사도 되는거구.”
“좋았어. 일단 시작은 내가 해 볼테니까 얼른 레벨업좀 시켜줘.”
게임이 시작되면서 기초무공을 익히는 부분부터 시작했다. 단조롭게 칼을 휘둘러서 맥없이 떨어져 나가는 몹이 많아질수록 공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어느정도 칼 질에 익숙해지자 이것처럼 형편없이 단조로운 게임도 없는데 왜 사람들이 문파까지 구성해가며 게임에 푹 빠져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저씨, 이제부턴 내가 해 줄테니까 우리 애 좀 잠깐만 봐줘요.”
김동수가 나를 밀어내고 대신 내 의자에 앉아 몇 개의 버튼을 누르면서 채팅창 같은 곳에다 뭐라 글을 올리니 문파에 속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몰려와서는 내 것을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처음 보는 괴물들과 반복적인 칼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연합게임을 하는 동안 펑펑 하면서 금방 레벨이 저절로 올라가는 것이 신기했지만 어차피 김동수가 영희라는 계집애를 봐주는 동안 적당한 레벨까지는 끌어올려줄 것이다.
“영희야, 아빠가 뭐하고 있는지 알아?”
“응, 아빤 게임해서 돈 버는 사람이야.”
“맨날 PC방으로 아빠 보러 오는거니?”
“응, 아빤 집에 안와.”
“아빠가 보고 싶었던거구나?”
“응, 엄마랑 맨날 있으니까 심심해.”
“아빠랑 동물원엔 가봤니?”
“아니, 울 아빤 PC방 죽돌이야.”
“죽돌이가 뭔데?”
“엄마가 그러는데 PC방에서 똥오줌 다 싸면서 집에 안가는 사람을 죽돌이래.”
“아빠가 죽돌이라서 좋아?”
“아니, 울 아빠 죽돌이 싫어.”
“아빠한테 말해 보지 그랬어?”
“말 안들어. 아빤 돈 벌어야된데.”
“엄마도 많이 화났겠구나?”
“화 안내. 엄만 돈이 좋데.”
“돈 벌어다주면 죽돌이도 괜찮데?”
“엄만 아빨 안좋아해. 그냥 돈 주니까 날 키우는거야.”
“저런, 영희가 어린데도 별걸 다 아는구나.”
“아냐, 엄마가 말해줬어. 아빠처럼 살면 안된다구.”
“엄만 게임 안해?”
“해. 밤새도록 채팅해.”
“어디서?”
“아빠 들어오려나 기다리면서 하루종일 채팅만 해.”
“밥은?”
“맨날 짜장면 시켜먹어.”
“밥도 안해주니?”
“귀찮데, 어떨 땐 영희도 귀찮다고 쳐다보지도 않아.”
“외롭구나, 우리 영희.”
“응, 아저씨랑 말하니까 좋아.”
인정머리 없는 부모를 만난 영희가 딱해 보였다.
“아저씨, 이리와봐요.” 김동수는 영희에게 먹을 것들을 사주고 쇼파에서 놀고 있는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 왜?”
“다 됐어요. 한달걸려서 레벨올릴 걸 단숨에 올려놨어요.”
“뭐, 한달 걸릴걸 벌써 다 했다구?”
“그래서 문파에 가입하면 좋은거잖아요.”
“그럼 나도 문파에 가입된거야?”
“그래요. 이젠 아저씨 아이디로 이세상 어딜 가서 해도 우리 문파가 된거죠.”
“이제부턴 문주한테 어떻하면 되는건데?”
“그냥 해봐요. 일단 레벨이 높으니까 아저씨 혼자서 만만해 보이는 몹이랑 싸워보고 문파간 전쟁이 벌어지면 마법사가 호출할텐데 그땐 싸우다 말고 즉시 호출에 따르면 되요.”
“뭔지 모르지만 일단 나 혼자 해보지.”
나는 김동수가 비워 준 자리에 앉아 키워 놓은 레벨에 맞는 적당한 몹을 향해 열심히 칼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허, 이 년이 영희를 맡겨놓고 어딜 튄거야.”
한참을 기다려도 마누라가 돌아와서 아이를 데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김동수는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년이 돈 몇푼 생길 때 마다 아일 맡겨놓고 사라지는데 무슨 꿍꿍이지?”
“왜? 애 엄마가 어딜간거야?”
“몰라요. 가끔 몇시간씩 사라진다니까요. 그래서 영희를 데려올 땐 겁이 더럭난다구요.”
“그럼, 오늘이 튀는 날이었나보지?”
“그런 것 같은데, 아쓰블, 왜 안오는거야?”
김동수는 자꾸 불안한 생각에 빠져 들었다. 벌써 몇 달 째 마누라 몸둥이를 안아주지 않은 동안 다른 사내라도 붙어 먹은 것은 아닌까하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문파를 통해 알게 된 젊은 여자들이랑 놀아나기 위해 돈을 벌기위해 밤새도록 게임만 한다는 핑계를 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오빠!!!”
PC방을 들어서면서부터 예쁘장한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김동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 명희왔니?”
“어, 근데 딸네미가 와있네?”
“그래, 너 잘 왔다. 우리 딸이랑 좀 놀구 있어라.”
“아이 싫어. 오빠 보고싶어 왔는데 귀찮게...”
“그런데, 애 엄마가 정말 튄건가?”
“얼마나 됐는데?”
“요 옆 은행에 가서 돈 좀 찾아오라고 시켰더니 벌써 두 시간째 안오네.”
“흥, 번개팅하나보지 뭐.”
“뭐? 번개?”
“오빠랑 나랑 채팅창으로 얘기하다 만난 것처럼 영희엄마두 종일 채팅한다며...”
“채팅만 하겠지 설마 애 놓고 번개까지 할라구.”
“어이쿠, 요즘 번개 없는 채팅이 어딨다구 그래?”
“요뇬이 정말 그랬단 죽인다.”
“오빠가 그럴 자격있어?”
“왜 없어?”
“오빠두 허구헌날 게임창으로 채팅하다 번개하잖아.”
“난 남자잖아.”
“헹,,, 오빠랑 만나는 사람은 여잔걸 몰라?”
“암튼 안돼. 애나 볼것이지...”
“기달려봐. 아이템 판 돈만 챙겨서 도망갈 여잔없을테니까.”
“하긴, 겨우 오십만원인데...”
거지새끼라며 강제로 쫒겨난 PC방에 대한 불쾌감 보다 책상 위에 딸랑 올려질 수 있는 너무 작은 컴퓨터가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머리 속을 맴도는 기억들과 어림짐작으로 익숙하게 키보드를 쳐내는 솜씨로 봐서는 분명 어느 시기엔가 컴퓨터와 관련있는 일을 했던 것 같았지만 막상 기억을 떠올려 보니 먹구름처럼 머릿속이 띵하기만 하다.
“철호야, 동냥질이나 하러가자.”
“싫다며.”
“당당하게 돈내고 PC방 가면 될텐데 첨부터 튈 생각으로 데려가면 어떻해.”
“배 고프고 춥길래 모셔간거지예.”
“이런 죽일 놈, 겨우 튀는 대책이면 첨부터 얘길 했어야지.”
“PC방 맘에 드슈?”
“그러게 말야. 그 놈의 컴퓨터란게 신기하다.”
“그까짓것 밖에 버려진게 허다하우.”
“쓰레기루 버린다고?”
“거 머시냐. 산업폐기물 이라니까예..”
“세상 좋네. 귀한 걸 버리는 사람은 도대체 뭐야?”
“흔해 빠진게 컴퓨턴데 정말 딴나라에서 왔나.”
“좋아, 버려진 것 있으면 주워와봐.”
“무신, 무겁게 어딜 들구 다니라구예.”
“뜯어보고 싶다.”
“전파사라두 했는갑지.”
“널 위해 동냥질두 할테니까 일단 줏어와봐”
“증말?”
“얌마, 당장 지하철 입구에 나가자.”
“됐구마, 오늘은 가시나 만나는 날 아니요.”
“흐미, 정말 만날낀가.”
“기회가 맨날 있나. 이 참에 한 퀴...확!”
지저분한 가방을 한참 뒤지던 철호는 낡은 칫솔 하나를 꺼냈다. 우리네 사는 꼬라지야 버려진 밥으로 주린 배만 채우면 그뿐이지 하얀 이빨을 남들한테 보여줄 일 없으니 양치질을 잊은지 오래다. 가시나가 뭐길래 쓰레기통에서 주워 몇 달 째 묵인 칫솔을 꺼내들고 양치질까지 한답시고 깝죽거리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같이 갈라면 옷이나 챙겨 보슈.”
“단벌 신사가 무슨 옷이 또 있노?”
“행님도 뭔가 구멍을 찾아야 이 생활 벗어날꺼 아뉴.”
“날 풀리면 이 생활도 극낙 아니냐.”
“미래가 없다니까. 제발 앞 좀 보고 사슈.”
“네 놈이나 남 등칠 생각말구 열심히 살아라.”
“나처럼 바쁜 놈 있으면 나와보라 하슈.”
지하철 화장실을 전세낸 듯 요란하게 머리까지 감고 헤진 수건으로 머리를 툴툴 말리니 이 놈도 제법 훤칠한게 한 때는 여자께나 후렸겠구나 싶다. 기분좋게 휘바람을 길게 불며 지하도를 빠져나가는 철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지하철 입구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귀찮아두 안쫒겨 나려면 동냥질을 해야겠구먼.”
시간당 오백원하는 PC방에서 조차 쫒겨나서야 말이 안될 일이다 싶어 한참 서있었더니 벌써 몇 천원의 지폐가 손에 쥐어졌다. 이왕 서 있는 거,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잡는 시늉을 하며 적극적으로 동냥질을 해대니 또 삼만원이 손에 챙겨졌다. 이렇게 쉽게 돈 벌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이 짓거리를 해서라도 추위를 이길 수 있었을텐데 같은 거지 신세라도 알량한 자존심은 남아 손발에 어름베기지 않은 살이 없게 만들었는지 후회가 됐다.
꾸겨진 돈 끝을 꼼꼼하게 펴놓고 바라보니 조폐공사에서 막 찍어낸 돈처럼 빳빳한 것이 흐믓하게 삼만사천원이나 된다.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던 철호놈이 연애질을 하러 갔으니 혼자라도 어제 쫒겨난 PC방을 찾아 어슬렁 발길을 옮겼다.
“여긴 거지 들어오는데가 아냐.”
“돈 내고 할건데 그냥 가?”
나를 쫒아냈던 주인 코 앞에다 만원짜리 지폐를 살랑살랑 흔들어주자 치켜떳던 눈을 내리 감더니 웃음까지 띠며 손가락으로 빈자리를 가리킨다. 돈이 웬수였겠지. 주위를 둘러보니 겉만 멀쩡해 보일 뿐 내 몰골보다 더 한 년놈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여보슈, 주인장.”
“예, 예,,,”
“더러워서 어디 앉겠소. 청소 좀 해주슈.”
“더러워요?”
“담배꽁초가 수북하구 가래침 뱉어논 잿더리가 놓인 자리에 손님을 앉히면 어쩌라는거요?”
“아이구, 죄송합니다. 아르바이트 놈이 청소를 안했나보네.”
“무슨소리? 주인 양반이 후딱 치우면 될텐데.”
안절부절 다가와선 한 손으로 코를 쥐어 막고 눈살 찌푸린 채 쓰레기를 치우는 꼴을 보니 아르바이트 학생 관리도 허술한 것이 운영 면에서 선수는 아닌 듯해 보였다. 적어도 자기것을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남이 해주길 바라는 집이 잘될 턱이 없는 법인데 이 PC방 사장은 장사가 안될 요인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우스를 몇 번 누르니 화면이 밝아지고 모니터에 작은 그림들이 나타났다. 어떤 걸 누르면 채팅창이 뜨는지 이것 저것 마우스로 콕콕 눌렀지만 엉뚱한 것만 자꾸 화면에 솟구치는 것이 아무래도 철호가 없으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희 아빠!”
젊은 여자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내 옆자리에서 무슨 게임을 하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있는 사내를 큰 소리로 불렀다.
“어, 왔어?”
“밥은?”
“짜장면 시켜 먹을꺼야.”
“돈은 좀 벌었어?”
“그럼, 아이템을 많이 팔았거든.”
“얼마나?”
“오십만원 통장에 들어왔을테니까 은행가서 찾아와.”
“알았어. 영희 좀 보고 있으면 금방 돈 찾아올게.”
“야, 어린 앨 보면서 어떻게 게임하라구.”
“금방이면 되잖아. 후딱 같다올게.”
“아이 쓰발. 애가 거추장스러워서 아이템 못 얻는단 말야.”
“오늘 오십만원 벌었으면 그만 쉬면 안돼?”
“쉬라구? 이게 맨날 대박터지냐? 남들 상사 눈칫밥 먹고 버는 돈이나 여기서 버는 돈이나 공들이긴 마찬가진걸 몰라?”
“알지만, 잠깐 동안 쉬면 되잖아.”
“알았으니까, 금방 다녀와라.”
삼십쯤 되보이는 사내는 자신에게 맞겨진 영희라는 딸 아이가 몹시 귀찮은지 음료수랑 과자를 사서는 아이에게 안겨주곤 다시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만 했는데도 하루에 오십만원을 벌었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졌다. 하긴 잠시 지하철 입구에서 옷깃을 잡아 당기는 척만 했는데도 삼만원을 넘게 번 놈이 돈 벌 생각만 있으면 얼굴에 철판만 깔아도 금방 재벌 될 것 같았지만 이렇게 PC방에서 우아하게 게임만 하는데도 돈이 굴러 들어 온다는 말에 신기하기만 했다.
“어이, 형씨. 무슨 일을 했는데 오십만워늘 번거요?”
“아, 이거? 미르의 전설인데 아이템 팔았수.”
“미르의 전설은 또 뭐고 아이템은 뭐요?”
“이 동네 분 아니셔?”
“이 동네 터줏대감이지만 게임으로 돈번다는 얘긴 첨 들어서 말야.”
“아저씨두 한번 해 볼라우?”
“돈 되는거면 가르쳐줘.”
“첨엔 돈 안되지만 자꾸 하다보면 아이템 좋은걸 얻을 수 있수. 그걸 내다 팔면 돈 되고.”
“남들도 아이템 줏을꺼 아냐.”
“레벨 빨리 올릴려고 욕심내는 사람들은 이 게임에선 아이템이 돈 보다 더 중요해요.”
“어차피 줏을텐데 왜 돈내고 사지?”
“레벨 올릴라면 몹이란 걸 많이 잡아야 하는데, 몹 잡기가 쉽지 않아요. PC방에다 쏟아 붓는 돈이나 아이템 사서 빨리 레벨 올리는 것이나 비슷하니까 거래가 되죠.”
“난 이해가 안되는데 설명 좀 해줘.”
“좋아요. 그대신 배우면 내 휘하가 되야해요.”
“뭔 휘하?”
“아, 그런게 있어요. 이 게임은 혼자 하면 너무 힘들어서 문파를 만들고 문주한테 충성해야 하는데 내가 이 동네 문주거든요.”
“휘하가 되면 뭐가 좋은데?”
“큰 몹이랑 싸울 때 죽지 않도록 문파에서 도와주고, 대신 아이템 좋은 거 나오면 나한테 갖다 바쳐야 해요.”
“그딴짓 싫어서 혼자 사는데, 여기서도 그 짓거리야?”
“아저씨가 싫으면 그만이구. 만약에 한다면 혼자서는 절대 이십레벨 이상 못올라가니까 서로 필요해서 결성된 문파를 이용하는거니까 알아서 하시든지.”
"좋아. 일단 게임하는 법 좀 가르쳐줘.“
“우선 미르의 전설이 뭔지 개략적으로 알아야 왜 싸우는지 이유를 알테니까 설명해주죠.”
영희아빠라는 친구가 내 컴퓨터에서 어떤 그림을 마우스로 콕콕 누르니까 반나체의 여전사가 칼을 비스듬이 들고 있는 멋진 그림이 나타나면서 미르의 전설이라는 제목이 나타났다.
“여기 들어가면 여자들이 이렇게 예뻐?”
“예쁘긴, 지렁이나 딱정벌레처럼 작아요.”
“근데 그림은 엄청 야한데?”
“아저씨, 야한 여잘 찾아요?”
“있어?”
“이 게임 한참 하다보면 정말 야한 여자들 많이 먹을 기회가 생겨요.”
“컴퓨터끼리 먹는거야?”
“아뇨, 문파 모임이 있는데, 좀 괜찮은 여자를 꼬시려면 비장의 아이템을 줄테니까 한번 달라고 하면 돈주고도 사기 힘든 아이템일 때는 몸으로 떼우는 애들이 생긴다니까요.”
“그럼 영희아빠, 당신도 먹어봤어?”
“조용히 해요. 금방 애 엄마 올시간 됐으니까.”
“먹긴 먹어봤나보네?”
“아저씨가 내 문파에 들어와서 휘하로 들어오면 먹을 기회가 많을꺼요.”
“이봐, 여자 살맛 잊은지 오래됐거든. 나도 당신 휘하로 만들어줘봐.”
“아이, 세상에 공짜가 어딧어.”
“뭐야. 문파에 들어가서 휘하가 되는것도 돈 내야해?”
“아뇨. 일단 레벨을 이십까진 올려놓고 가입하든지 해야지요.”
“아씨블, 그냥 당신이 내 레벨 이십까지 후딱 올려주면 되잖아.”
“알았으니까, 일단 회원가입하고 시작합시다. 어차피 애 엄마 올때까진 나도 게임하긴 텃으니 아저씨 레벨을 확 올려줄게.”
“근데 문주 이름은 어떻게 되지?”
“싸이버 세상에선 이름 안밝히는게 예의라구요.”
“여긴 싸이버가 아니잖아, 같은 PC방에서 옆자리에 앉았는데 계속 영희아빠라고 하기도 뭐하니까 이름을 말해봐.”
“동수요. 내 이름은 김동수.”
“그래? 난 김갑수.”
“어차피 닉네임으로 게임하는거니까 가급적 이름은 부르지 말아요.”
“김동수씨 닉네임은 뭔데?”
“미르킹.”
“마네킹?”
“그만하고 이 화면을 먼저 읽어봐요.”
김동수가 펼친 화면에는 미르의 전설에 관한 줄거리가 쓰여있었다. 마계의 힘이 강해져서 몹이라는 괴물이 출현하고 차츰 그 힘이 강해져서 마을을 습격하더니 세상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마계의 세력이 약한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몹과 대항하기 위해 무공과 마법을 익히며 마계와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싸울 대상은 몹이겠구먼.”
“그렇죠. 아저씨는 무공이 약해서 몹을 잘못 건들면 죽어요. 몹을 많이 잡아야 레벨이 올라가는데 한단계씩 올라가려면 어깨가 빠질 정도로 노가다 작업이 되니까 문파에서 초보자를 위해 레벨 높은 사람들이 아저씨를 도와줄꺼고 그러면 몇십배 빨리 레벨을 올릴 수 있지요.”
“혼자서 몹을 잡다 지치는 것보다 협동으로 몹을 잡으면서 레벨을 올리자는거군?”
“그렇죠. 레벨을 올려야 무공이 강해져서 더 큰 몹을 잡을 수 있는데, 좋은 아이템만 있으면 같은 레벨이라도 몹 잡는게 수월하죠.”
“그럼 아이템이 미르의 전설에선 승부수겠네.”
“다른 게임도 똑같아요. 그래서 아이템 장사도 되는거구.”
“좋았어. 일단 시작은 내가 해 볼테니까 얼른 레벨업좀 시켜줘.”
게임이 시작되면서 기초무공을 익히는 부분부터 시작했다. 단조롭게 칼을 휘둘러서 맥없이 떨어져 나가는 몹이 많아질수록 공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어느정도 칼 질에 익숙해지자 이것처럼 형편없이 단조로운 게임도 없는데 왜 사람들이 문파까지 구성해가며 게임에 푹 빠져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저씨, 이제부턴 내가 해 줄테니까 우리 애 좀 잠깐만 봐줘요.”
김동수가 나를 밀어내고 대신 내 의자에 앉아 몇 개의 버튼을 누르면서 채팅창 같은 곳에다 뭐라 글을 올리니 문파에 속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몰려와서는 내 것을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처음 보는 괴물들과 반복적인 칼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연합게임을 하는 동안 펑펑 하면서 금방 레벨이 저절로 올라가는 것이 신기했지만 어차피 김동수가 영희라는 계집애를 봐주는 동안 적당한 레벨까지는 끌어올려줄 것이다.
“영희야, 아빠가 뭐하고 있는지 알아?”
“응, 아빤 게임해서 돈 버는 사람이야.”
“맨날 PC방으로 아빠 보러 오는거니?”
“응, 아빤 집에 안와.”
“아빠가 보고 싶었던거구나?”
“응, 엄마랑 맨날 있으니까 심심해.”
“아빠랑 동물원엔 가봤니?”
“아니, 울 아빤 PC방 죽돌이야.”
“죽돌이가 뭔데?”
“엄마가 그러는데 PC방에서 똥오줌 다 싸면서 집에 안가는 사람을 죽돌이래.”
“아빠가 죽돌이라서 좋아?”
“아니, 울 아빠 죽돌이 싫어.”
“아빠한테 말해 보지 그랬어?”
“말 안들어. 아빤 돈 벌어야된데.”
“엄마도 많이 화났겠구나?”
“화 안내. 엄만 돈이 좋데.”
“돈 벌어다주면 죽돌이도 괜찮데?”
“엄만 아빨 안좋아해. 그냥 돈 주니까 날 키우는거야.”
“저런, 영희가 어린데도 별걸 다 아는구나.”
“아냐, 엄마가 말해줬어. 아빠처럼 살면 안된다구.”
“엄만 게임 안해?”
“해. 밤새도록 채팅해.”
“어디서?”
“아빠 들어오려나 기다리면서 하루종일 채팅만 해.”
“밥은?”
“맨날 짜장면 시켜먹어.”
“밥도 안해주니?”
“귀찮데, 어떨 땐 영희도 귀찮다고 쳐다보지도 않아.”
“외롭구나, 우리 영희.”
“응, 아저씨랑 말하니까 좋아.”
인정머리 없는 부모를 만난 영희가 딱해 보였다.
“아저씨, 이리와봐요.” 김동수는 영희에게 먹을 것들을 사주고 쇼파에서 놀고 있는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 왜?”
“다 됐어요. 한달걸려서 레벨올릴 걸 단숨에 올려놨어요.”
“뭐, 한달 걸릴걸 벌써 다 했다구?”
“그래서 문파에 가입하면 좋은거잖아요.”
“그럼 나도 문파에 가입된거야?”
“그래요. 이젠 아저씨 아이디로 이세상 어딜 가서 해도 우리 문파가 된거죠.”
“이제부턴 문주한테 어떻하면 되는건데?”
“그냥 해봐요. 일단 레벨이 높으니까 아저씨 혼자서 만만해 보이는 몹이랑 싸워보고 문파간 전쟁이 벌어지면 마법사가 호출할텐데 그땐 싸우다 말고 즉시 호출에 따르면 되요.”
“뭔지 모르지만 일단 나 혼자 해보지.”
나는 김동수가 비워 준 자리에 앉아 키워 놓은 레벨에 맞는 적당한 몹을 향해 열심히 칼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허, 이 년이 영희를 맡겨놓고 어딜 튄거야.”
한참을 기다려도 마누라가 돌아와서 아이를 데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김동수는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년이 돈 몇푼 생길 때 마다 아일 맡겨놓고 사라지는데 무슨 꿍꿍이지?”
“왜? 애 엄마가 어딜간거야?”
“몰라요. 가끔 몇시간씩 사라진다니까요. 그래서 영희를 데려올 땐 겁이 더럭난다구요.”
“그럼, 오늘이 튀는 날이었나보지?”
“그런 것 같은데, 아쓰블, 왜 안오는거야?”
김동수는 자꾸 불안한 생각에 빠져 들었다. 벌써 몇 달 째 마누라 몸둥이를 안아주지 않은 동안 다른 사내라도 붙어 먹은 것은 아닌까하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문파를 통해 알게 된 젊은 여자들이랑 놀아나기 위해 돈을 벌기위해 밤새도록 게임만 한다는 핑계를 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오빠!!!”
PC방을 들어서면서부터 예쁘장한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김동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 명희왔니?”
“어, 근데 딸네미가 와있네?”
“그래, 너 잘 왔다. 우리 딸이랑 좀 놀구 있어라.”
“아이 싫어. 오빠 보고싶어 왔는데 귀찮게...”
“그런데, 애 엄마가 정말 튄건가?”
“얼마나 됐는데?”
“요 옆 은행에 가서 돈 좀 찾아오라고 시켰더니 벌써 두 시간째 안오네.”
“흥, 번개팅하나보지 뭐.”
“뭐? 번개?”
“오빠랑 나랑 채팅창으로 얘기하다 만난 것처럼 영희엄마두 종일 채팅한다며...”
“채팅만 하겠지 설마 애 놓고 번개까지 할라구.”
“어이쿠, 요즘 번개 없는 채팅이 어딨다구 그래?”
“요뇬이 정말 그랬단 죽인다.”
“오빠가 그럴 자격있어?”
“왜 없어?”
“오빠두 허구헌날 게임창으로 채팅하다 번개하잖아.”
“난 남자잖아.”
“헹,,, 오빠랑 만나는 사람은 여잔걸 몰라?”
“암튼 안돼. 애나 볼것이지...”
“기달려봐. 아이템 판 돈만 챙겨서 도망갈 여잔없을테니까.”
“하긴, 겨우 오십만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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