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때, 창을 박살내며 두 줄기 인영이 곧바로 적봉취개를 향 해 쏘아져 들어왔다. 창을 부수며 뛰어든 두 사람은 혈뢰장(血雷掌) 유조림(有祖林)과 천잔마혼(天棧魔魂) 냉군염(冷軍髥)으로서 금도북령신과 더불어 천기삼절로 불리는 초절정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천기신군의 오랜 지기들이기도 했다. 냉군염과 유조림은 방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퇴로를 막으며 적봉 취개의 전면에 내려섰다. 냉군염이 가공할 살광(殺光)을 뿜으며 적봉취개를 노려보았다. "적봉취개, 네놈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금도북령신은 네 놈을 친형제처럼 돌봐주었거늘 어떻게 이런...!" 두 사람이 퇴로를 막고 있는 상태이건만 적봉취개는 태연하기 그 지 없었다. 그는 냉군염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ㅋㅋㅋ!" 뿐이랴! 그는 당장이라도 덮쳐들 듯한 두 사람을 무시한 채 태연 히 허리의 호로병을 끌러내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찰나 냉군염은 분노의 노호를 지르며 무시무시한 장력(掌力)을 뿜 어냈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죽어랏!" 순식간에 엄청난 기세의 장력이 격탕노도처럼 적봉취개를 덮쳐갔 다. 적봉취개는 여전히 호로병을 목에 병채로 털어넣고 있어 완전 무방비상태 같았다. 헌데 바로 이 순간, 옆에 있던 유조림의 뱀눈에 기광이 번뜩이지 않는가? "가라!" 동시에 태양(太陽)이 폭발하는 듯, 눈부신 핏빛 혈광이 냉군염의 정수리 위에 작렬했다. "크아악!" 냉군염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한구석에 나가 떨어졌다. 놀랍 게도 유조림이 느닷없이 냉군염을 향해 살수를 뻗어낸 것이었다. 냉군염은 같은 동료인 유조림이 살수를 뻗어올 줄은 추호도 예측 하지 못한 듯 너무도 어이없이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간신 히 눈을 부릅뜨며 필사적으로 한마디를 내뱉았다. "유조림, 네가 왜...?" 상대방이 자신에게 살수를 뻗어낸 이유를 전혀 짐작조차 할수 없 다는 질문이었다. 이 한마디는 이미 싸늘히 한 구의 시신이 되어 버린 북천검왕과 금도북령신 역시 남기지 않았던가. 적봉취개가 빈 호로병을 흔들며 킬킬거렸다. "왜냐고? 이 모든 것은 혈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클클!" "혈포?" 냉군염은 마지막 그 순간까지 의혹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적 봉취개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냉군염의 귀로 이 순간 적봉취개의 음 침한 음성이 흘러 들었다. "클클클, 지금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너 하나만이 아니니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마라. 천기신궁 외성의 전 인원이 소리없이 너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니 말이다" 허나 냉군염은 이미 그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차라리 들을 수 없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리라. ■ 검 1권 제5장 천기신궁(天機神宮)의 대혈전(大血戰) -3 ━━━━━━━━━━━━━━━━━━━━━━━━━━━━━━━━━━━ ③ 외성이 소리없이 무너지고 있는 이 시각에도 내성은 고요하기만 했다. 침실, 북궁후는 의아로운 눈으로 모용선학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부께선 왜 그들이 궁에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더구나 항상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들을 대하시지 않았습 니까?" 북궁후의 질문에 모용선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나운 맹수(猛獸)를 곁에서 놀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을 가까 이서 지켜보며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궁후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놀라운 심기(心機)다! 아니, 이것은 심기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철벽같은 담력이다! 오직 천기신군만이 가능한!' 이때 북궁후는 불현듯 얼마 전에 만난 바 있는 검마와 화선의 중 얼거림을 생각해내고 급히 입을 떼었다. "백부님, 소질이 보기에 그들은 이미...." 북궁후의 말을 끊으며 모용선학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음모가 본격화될 시각이 가까이 온것을 말이다. 검마와 화선이 이미 그들의 무공을 완성했으니 곧,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 침묵과 긴장, 터질 듯 팽팽한 압박감이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을 조 여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천기신궁을 감싸고 도는 혈겁의 피 비린내가 실체를 지닌 채 풍겨오는 듯했다. 하지만 북궁후의 눈에는 조금도 두려워 하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은 이 순간 신비하도록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대단한 흥미거리를 발견한 것 같은 악동의 눈빛같기 도 했고 또 어찌보면 투지로 불타는 눈빛같기도 했다. 문득 모용선학이 오연한 냉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허나 그들은 한 가지를 모르고 있다. 그들은 이 모용선학의 오푼 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선학은 새삼 북궁후를 직시했다. 동시에 더할 나위없이 부드 러운 미소가 소리없이 그 입가에 맺히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미소는 실로 북궁후로 하여금 강한 확신과 신뢰감을 주 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북궁후는 자신도 모르게 모용선학을 따 라 싱긋 웃었다. 모용선학의 말이 이어졌다. "천하인들이 믿고 있는 무림의 거봉(巨峯) 천기신궁은 기실 빈껍 데기에 불과하다." 일순 북궁후는 해연히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수십 년간 무림의 평화를 지탱시켜온 무림의 하늘, 천하인들의 절 대적인 신뢰 속에 일대 불가사의로 여겨져온 천기신궁이 사실 빈 껍데기였다니 천하의 누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천기신군의 수하들만도 오천여 명, 하나같이 뛰어난 고수(高手) 요, 일세무림을 질타할만한 범재들이 아니던가! 모용선학이 자신감에 넘치는 음성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천하의 어느 누구도 모르는 비밀조직(秘密組織)이 있 다. 그것이 진정한 천기신궁이지." 북궁후는 할 말을 잊은 채 놀람과 경외의 눈으로 모용선학을 바라 보았다. 문득 모용선학은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북궁후를 주시했다. "나는 적당한 후계자를 찾지 못해 딸아이에게 그 어렵고 위태로운 일을 맡기려 했다. 헌데... 이제 네가 있으니 네게 은기령주(銀旗 令主)의 직책을 맡기겠다." "은기령주?" "천기신궁에는 모두 오개령이 있다. 그 첫째가 금기령(金旗令)으 로서 금기령주(金旗令主)는 천기신궁의 모든 권한을 지니며 전체 를 관장한다. 노부가 바로 그 금기령주이다." "아!" "두번째가 은기령(銀旗令)으로서 두 명의 은기령주(銀旗令主)가 있다. 은일령주(銀一令主)는 바로 혜아(慧兒)가 맡고 있다." "혜아라시면 바로 백부님의...?" ■ 검 1권 제5장 천기신궁(天機神宮)의 대혈전(大血戰) -4 ━━━━━━━━━━━━━━━━━━━━━━━━━━━━━━━━━━━ ④ - 천지일란(天地一蘭) 모용혜(募容慧). 이 이름은 그야말로 전 무림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천기신궁의 살아 있는 꽃(花)으로 추앙되고 있는 천하제일미. 그 녀는 비단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놀라운 재지와 무공을 지니고 있 어 일명 천기삼교(天機三巧)라 불리우기도 했다. 허나 어쩐 일인지 그녀는 삼 년 전에 천기신궁을 떠나 그 뒤로 그 녀의 모습을 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모용선학이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지금 은일령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오랜 수련(修練)을 쌓고 있다. 물론 서문선생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본궁을 떠난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어지는 모용선학의 말에 북궁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백부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일을 안배해 놓으셨 구나.' 모용선학의 눈에 돌연 항거하기 어려운 위엄이 떠돌기 시작했다. "너는 은이령주(銀二令主)가 된다." 동시에 모용선학은 품 속에서 작은 원형(圓形)의 은패(銀牌)를 꺼 내 북궁후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북궁후는 공손히 예의 은패를 받아 들었다. 모용선학의 엄숙한 음성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옥기령에는 세 명의 령주가 있다. 그들은 이미 은거(隱居)한 지 오래인 전대고인(前代高人)들이다." - 천경유사(天景儒士) 제갈우(諸渴雨). - 독불(毒佛) 백리천악(百里天嶽). - 무절교조(無絶敎祖). 모용선학은 이내 세 명의 옥기령주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북궁후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무림삼주(武林三柱)! 수십 년 전에 천하를 종횡무진(縱橫無盡)으 로 누볐다는 전대의 고인들이 아닌가? 황궁서고에서 읽은 무림군 영보(武林君英譜)에 의하면 무림삼주는 오십 년 전 천기신군의 등 장과 함께 홀연 사라졌다고 적혀 있었다! 헌데 그들이 비밀리에 천기신군의 휘하에 들어와 있었다니....' "동기령(銅旗令)에는 네 명의 령주가 있다." 북궁후의 놀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모용선학의 설명은 담담하게 계속되었다. 천기신궁의 비밀세력에 대해 밝혀지고 있는 순간인 것이다. 모용선학의 설명에 의하면 사 인(四人)의 동기령주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신분은 각양각색이었다. 명문대파(名門大派)의 장문인(掌 門人)이 있는가 하면, 한 번도 강호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는 그야말로 무명의 인물도 있었다. "그리고... 철기령(鐵旗令)이 있으며 철기령에는 다섯 명의 철기 령주들이 있다." ■ 검 1권 제5장 천기신궁(天機神宮)의 대혈전(大血戰) -5 ━━━━━━━━━━━━━━━━━━━━━━━━━━━━━━━━━━━ ⑤ 다섯 명의 철기령주, 이들은 곧 실질적인 활동대(活動隊)라 할 수 있었다. 동기령까지는 금기령주의 특별한 존명(尊命)이 있기 전에는 일체 움직이지 않는다. 허나 다섯 명의 철기령주들은 강호전역에 퍼져 은밀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천하에 산재해 있는 주루(酒樓), 기루(妓樓), 육방(肉房), 포전 (布典) 등 천하의 모든 상인(下流商人)들이 바로 철기령의 실체인 것이다. 어찌보면 철기령의 세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진정 놀라운 것은 옥기령주 이하의 하부세력들은 서로를 알 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 방대한 비밀 전체를 알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금기령 주와 은기령주 뿐이었다. 그밖에 모용선학은 하부세력들의 구성과 연락망, 그리고 비밀세력 의 확장방법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북궁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 대단하다! 그토록 엄청난 조직을 그림자처럼 움직일 수 있다 니! 과연 천하의 모든 상점들이 철기령의 휘하라면 철기령의 정보 망은 가히 천하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때 모용선학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가 품 속에서 한 개의 금낭(錦囊)을 꺼냈다. "받아라. 안에 금기령이 들어 있다. 은기령만으로는 옥기령을 명 령할 수 없다. 만약 내게 위험이 닥칠 경우, 너는 내 후계자가 되 어 금기령주가 된다." 북궁후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 자신에게 천기신궁의 모든 것을 거 침없이 맡기는 의미임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백부님...." "그들은 무림을 독패(獨覇)하기 위해 치밀한 안배로 먼저 나를 죽 일 것이다. 허나 기실 나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음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북궁후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머금으며 반문했다. "죽은 다음에 말입니까?" 모용선학은 담담히 허공을 응시했다.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심계가 깊숙한 동공 속에 잠겨 있는 눈빛이었다. "세인들은 믿는다. 천기신궁의 신화가 영원할 것이라고 말이다. 허나, 신화는 무너질 것이다. 허나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새로 운 신화를 창조(創造)해 내기 위한 진통이라는 것을!" 문득 모용선학의 눈에서 두 줄기 신광(神光)이 길게 번뜩였다. 가 공할 기세였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무섭게 경직되었다. 일순 실내에는 질식할 듯한 긴장과 침묵이 내려 앉았다. 허나 그 것도 일순, 이내 모용선학의 미미하게 떨리는 음성이 정적을 흔들 었다. "드디어, 드디어 깨어지기 시작했다! 천기신궁의 신화가...." 아아, 그는 이미 외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살륙을 감지해낸 것이란 말인가? ■ 검 1권 제5장 천기신궁(天機神宮)의 대혈전(大血戰) -6 ━━━━━━━━━━━━━━━━━━━━━━━━━━━━━━━━━━━ ⑥ "누구냐? 으악!" 이때 돌연 침실 밖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요란한 폭음과 함께 황혼같은 불빛이 창가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모용선학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드디어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돌연 그는 허공을 향해 나직이 일갈했다. "은타!" "예, 노야." 마치 벽속에서 스며나오듯, 은타가 소리도 없이 어두운 실내 한구 석에 나타났다. 모용선학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후아를 데리고 빨리 이곳을 탈출해라!" "예!" 헌데 바로 이 순간 갑자기 은타의 꼽추등이 쭉 펴지지 않는가! 동 시에 그의 얼굴 근육도 기이하게 꿈틀거리며 변해가고 있었다. 헌데 이내 드러난 그 얼굴은 바로 모용선학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허나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곁에 있던 모용선학까지 변하기 시작 했다는 점이다. 청수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피폐한 모습으로 바뀌 며 바로 은타의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실로 절정의 역 골공(易骨功)과 변환술(變幻術)로만 가능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막상 모용선학으로 변장한 은타는 침실에 남아 있고 은타로 변신한 모용선학이 북궁후를 끼고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실로 절묘한 심계로서 설사 적이 가까이 있어 들었다 하더 라도 영락없이 은타가 북궁후를 데리고 탈출하는 것으로만 알게 분명했다. 모용선학은 한줄기 화살처럼 창 밖으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기 쾌하기 짝이 없는 속도였다. 헌데 창을 벗어나자 천기신궁 전체를 뒤덮고 있는 화염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암천(暗天)은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크아아악!" 폭음(暴音)과 화염(火焰), 그리고 처참한 비명성, 그렇다! 중원의 하늘이 자 천하인들이 절대성역(絶代聖域)으로 숭앙했던 무림의 신화인 천기신궁이 이렇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마(火魔)는 악마의 혓바닥처럼 외성은 물론이고 어느새 내성마 저 휘감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검은 구름이 밀려오듯 정체불명의 흑의복 면인들이 물밀 듯 외성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황산 천도봉의 수백여 리에 걸쳐져 장엄하게 누워있던 천기신궁의 구석구석에서 폭음과 비명소리가 줄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흑의복면인들의 기세는 실로 가공스러워 천기신궁 전체가 이내 아 비규환의 아수라지옥(阿修羅地獄)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암천을 가르는 유성(流星)이련가? 은타로 변신한 모용선학은 북궁 후를 옆구리에 낀 채 번개처럼 후원 한곳을 움직여 가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가 가로지르고 있는 후원만은 아직까지 깊은 정적과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어느 한순간 모용선학은 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지면에 내려섰다. "흐흐흐!" 헌데 바로 이때 음침한 괴소와 함께 한 인영이 불쑥 앞에 나타나 지 않는가. 나타난 인영은 손에 한 자루 판관필을 쥐고 있었는데 예의 판관필에서는 은은한 칠채광휘가 번뜩이고 있었다. 일순 모용선학의 눈썹이 무섭게 꿈틀했다. '화선 도중향!' "크크ㅋ!" 그때 모용선학의 바로 등 뒤에서 또 다른 괴소가 터져 나왔다. 짙 은 살기가 맴돌고 있는 괴소성이었다. 모용선학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 들렸다. '검마 뇌소천마저!' 검마 뇌소천은 칠흑같은 어둠의 일부분인 듯 낡은 흑포를 펄럭이 며 심유한 눈으로 모용선학을 응시하고 있었다. 허나 그의 손은 이미 허리에 꽂혀있는 한 자루 묵검(墨劍)을 향해 서서히 미끄러 지고 있어 당장이라도 무서운 검기가 폭발할 듯했다. '음, 이 자들이 이미 나의 변장을 눈치챘단 말인가?' 모용선학은 내심 당혹성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또다른 음성이 모용선학의 귀 로 흘러 들었다. "후후후, 모용궁주! 나를 그 정도의 잔꾀에 넘어갈 인물로 보았다 면 너무 과소평가한 게 아니겠소?" 음성은 무척이나 천천히 들려왔다. 허나 그 음성의 주인은 이미 좌측 어둠 속에 불쑥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단아한 풍도의 중년문사(中年文士)였다. 한 자루 섭선을 접었다 폈다하며 신비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에게서는 실로 범상치 않 은 기도가 풍겨 나왔다. 어찌보면 평생을 책에 둘러싸여 보낸 문사를 보는 듯하다. 허나 잔잔한 그 눈빛과 입가의 부드러운 미소는 그가 상대하기 어려운 심기를 지닌 인물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때 북궁후의 귓속으로 다급한 천기신군의 전음이 파고 들었다. (후아야! 너는 기회를 틈타 몸을 피해야 할 것이다!) 북궁후는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선학의 말뜻을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모용선학과 그들이 싸움을 시작하면 그를 내버려 두 고 몸을 피하라는 지시인 것이다. 북궁후는 긴장에 휩싸인 눈으로 눈 앞의 세 인물을 쓸어보았다. 질식할 듯, 팽팽한 긴장감이 전신을 휘감아 오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느끼는 피비린내 풍길 듯한 살기(殺氣)였다. 돌연 뇌소천의 눈에 한기가 스쳤는가 싶더니 그의 손에서 가공스 러운 검세가 폭발했다. "이제 가랏!" 그 검세는 실로 놀라워 태산이라도 가를 듯 했는데 단지 일검만으 로도 이미 모용선학의 서른여섯 군데 요혈이 한꺼번에 노출되고 있었다. 모용선학은 한마디 침음성과 함께 신형을 뒤집어 젖혀냈다. "여기도 있다!" 이 순간 도중향이 벽력일갈을 토하며 판관필을 휘둘렀다. 순식간 에 어지러운 필영(筆影)이 빽빽이 허공을 뒤덮으며 모용선학의 좌 측을 파고 들었다. ■ 검 1권 제6장 기연(奇緣) ━━━━━━━━━━━━━━━━━━━━━━━━━━━━━━━━━━━ ① 모용선학은 이대고수의 협공을 맞이해 쌍장을 들어 엄청난 경력을 두 가닥으로 나누어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견해 무척이나 느린 손움직임이었다. 허나 그 느린 손에서 뻗어 나오고 있는 경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 후발선지(後發先 至), 오히려 먼저 발출된 뇌소천의 검세나 도중향의 공세보다 더 욱 빨리 상대를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뇌소천과 도중향이 모용선학이 뿜어낸 경력에 휘말려 뒤 로 밀려났다. 순간 모용선학은 승기를 잡았다는 듯 거침없이 뇌소천을 향해 미 끄러져 들었다. 이 광경을 대한 도중향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모용선학이 뇌소 천을 공격하는데 주력하느라 빈틈을 보인 것이었다. 화선 도중향이 지면을 박차며 모용선학을 덮쳐갔다. 뇌소천을 향 해 무서운 기세로 덮쳐가고 있는 모용선학을 다시 도중향이 덮쳐 가고 있는 이런 광경은 마치 세 마리의 매가 서로 꼬리를 이은 채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실 모용선학은 이미 배후에서 쏘아져 오고 있는 도중향의 공격 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상황대로라면 그가 뇌소천을 격패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배후의 공세에 적중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용선학은 도중향의 공세를 무시했다. 일단 승기를 잡은 이상 두 명의 고수중 한 명이라도 먼저 쓰러뜨려야 전세가 유리해 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은 모용선학의 착각이었다. 그의 신형이 미처 뇌소천에 이르기도 전에 등 뒤에 전해져 오는 날카로운 예기는 어느새 그가 펼쳐놓은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빠름과 날카로움은 실로 모용선학으로서도 처음 대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허엇!" 모용선학은 뇌소천을 포기한 채 황급히 오른쪽 어깨죽지를 움켜쥐 며 옆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오른쪽 어깨에서는 핏줄기가 솟구치고 있었 다. 모용선학은 망연히 눈을 들어 도중양의 손에 쥐어져 있는 판관필 을 응시했다. "그게 무엇이기에 나의 호신강기(護身 氣)를 파괴할 수 있더란 말이냐?" 화선 도중양이 태연히 입을 열었다. "천환신필(天幻神筆)을 아시오?" "천환신필...?" 모용선학의 입에서 비명같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상대의 수중에 쥐어져 있는 병기가 천하 사대병기(四大兵器) 중 서열 삼위(三位) 에 달하는 기병임을 알게 된 때문이었다. 천환신필은 그 날카롭기가 금강석(金剛石)을 두부베듯 한다는 전 설적인 신병이었던 것이다. 허나 미처 놀랄 사이도 없었다. 천환신필이 또 한 차례 눈부신 광채를 폭사했다. 한 번 허공에 그어질 때마다 그 끝에서는 실로 무지개처럼 영롱한 칠채광휘가 번뜩이는데 그 광채가 너무도 강렬해 막상 신필의 끝 이 어디를 노리고 파고드는지 발견할 수 없었다. "화선도극류!" 또다시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천환신필이 허공에 불꽃을 터트렸 다. 작렬하는 빛의 난무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 광채 뒤에 숨어 일식 (一式)에 수만 가지 변화가 내포되어 있는 초식이 전개되고 있음 이니 과연 천하의 어떤 무공으로도 막아낼 수 없을 듯했다. 모용선학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도대체 어디로 노리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다니!' 허나 그는 재빨리 내공을 운기해 비스듬히 우장(右掌)을 후려쳐냈 다. "패천(覇天) 일후(一吼)!" 엄청난 잠력(潛力)이 격탕노도처럼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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