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소." 무당신검 장경신은 쇠마의 앞에 우뚝 섰다.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마구 휘어잡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뜻밖이로구나. 네게 우리 십마가 삼십 년에 걸쳐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릴 능력이 있었다니. 내가 아무래도 너를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그래, 나를 이리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이냐?" "당신한테 갚을 빚이 있기 때문이오." "빚이라……." 쇠마는 곰방대를 허리춤에 찔러넣고 두 팔을 살짝 벌렸다. 그의 입가에 기묘한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빚이 있다면 갚아야 하겠지. 너 혼자냐?" "그렇소." "흐흐, 제법 간이 크구나. 그러나 그러한 만용은 언제나 화를 부르는 법이지.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때도 너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지 않았느냐." "무를 익히는 사람에게 하루란 때로는 천 년처럼 길기도 한 법이오. 그때의 장경신이 지금의 장경신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달라졌다는 말인가? 흐흐, 그거 재미있구나. 그러나 나는 여전히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쇠마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장경신은 등 뒤의 검을 뽑아들었다. 삼색 수술이 달린 보검이 스르릉 용음을 흘렸다. 그는 보검이 햇빛에 반사되는 것을 보고 있었다. '파천황결이라면 저자를 꺾을 수 있다.' 장경신은 머릿속이 갑자기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두려운 마음은 일지 않았다. "오시오, 쇠마." 그가 움직였다. 쇠마도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그를 마중오고 있었다. * * * 복청양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장경신이 다가오는 것을 별다른 감동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오지 않았소?" 장경신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곧 올 것이오." 복청양이 다시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의 손에는 풀피리가 하나 들려 있었는데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필릴리필리 풀피리가 소리를 내며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좋은 소리구려." 장경신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풀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풀피리 소리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저 작고 가냘픈 풀이 이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도 몰랐다. 문득 풀피리 소리가 멎었다. "쇠마는 어찌 되었소?" "죽었소." 장경신은 복청양이 공연한 것을 묻는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단황뿐이오. 그리고 그도 곧 죽게 될 것이오." 복청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장경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좀더 먼 곳, 몇 사람이 다가오는 방향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풀피리가 떨어졌다. 장경신은 몸을 바로 세웠고 나무 뒤에서 남궁격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다같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단황을……. 단황은 동정화상이 암혼에 의해 죽어가는데도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삼절묵창을 꺼내들고 있는 복청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난번에 그는 복청양을 한 번 살려준 일이 있었다. 지마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는 했다. 그것은 순전히 복청양이 그가 어렸을 적에 만났던 어떤 사람과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흡사한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똑같았다. 복청양을 처음 보는 순간 그는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혹시 이십오 년 전의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일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세상에 닮은 사람은 많다. 쌍둥이처럼 흡사한 사람도 많다. 복청양이 과거의 어떤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은 다만 우연일 뿐이었다. 기막힌 우연. 그러나 우연이든 어쨌든 그는 복청양을 죽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복청양을 죽일 수 있었다. 인정은 한 번이면 족하다. 두 번씩은 필요없다. 섬전도와 장경신이 복청양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섬전도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단황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지마와 쇠마가 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배신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가 가장 신뢰했던 인물에게서. 언제나 그렇다. 신뢰하던 사람이 등을 돌리지 않는다면 굳이 배신이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므로. 이상하게도 분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우스울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처음으로 인정을 베푼 사람과 그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이 한꺼번에 등을 돌리는 이 모든 것이. 세상이란 이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패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아무리 세 사람이 힘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황이고 천하마주였기 때문이다. 남궁격은 편안하게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심장도 심하게 뛰지 않았고 호흡이 빨라지지도 않았다.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승부는 한순간에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 승부에 그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은 전무했다. 세 사람이 이기면 모든 것은 끝이 날 것이다. 그의 야망이 허무하게 무너졌던 것처럼 단황의 야망도 허망하게 스러질 것이다. 그리고 단황이 이긴다면 그때는 그가 죽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소용이 없었다. 인간이 아무리 빠르게 달려봐야 결국은 하늘 아래인 것처럼. 그러니 그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철저한 방관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편안했다. 그리고 편안함이 지나쳐서 졸음이 오려고 할 때 마침내 그 일이 시작되었다. '저게 뭔가?' 단황은 세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하늘을 찌르고 있던 검과 중단을 가리키고 있던 창과 땅을 향하고 있던 도가 일시에 움직이는 것까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세 사람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물이 모두 사라졌다. 하늘도 사라졌고 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공기마저도 자취를 감추었다. 무였다. 완전한 무(無).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그리고 그 무형의 기운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겹겹이 에워싸며 다가오고 있었다. 완전했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았다. 완전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 속에는 분명히 빈틈이 있었다. 단황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멋지다.' 그는 이토록 멋진 일초는 처음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이런 일초를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히 빈틈이 있었고, 그는 그 빈틈을 뚫고 들어갈 자신이 있었다. 절대로 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철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빈틈을 향해 찔러갔다. 남궁격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졌으며 한순간에 지나갔다. 그것은 환상을 보는 것처럼 황홀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단황의 철검은 장경신의 심장 깊숙이 박혀 있었다. 철검을 타고 너무도 선명하고 아름다운 피 한 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섬전도는 오른팔을 잃었다. 앞으로 다시는 도를 쓸 수 없을 것이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복청양의 삼절묵창은 여러 조각으로 동강이 나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는 몹시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으며 입가로 가는 피 한 줄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단황은 장경신의 보검을 가슴에 꽂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 * * "이제 뭘 할 거요?" 복청양이 물었다. "아직 한 가지 일이 남았소." 남궁격은 너무도 푸른 하늘을 보고 있었다.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졌으면 좋겠다. "화화궁으로 가야 하오. 거기서 청산해야 할 일이 있소." "그렇군." 복청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거기 가면 당신은 죽을지도 모르오." "그게 뭐 대수겠소. 하지만 다행히 살아 남는다면 당신을 찾아가겠소. 당신과 한 번 취하도록 마시고 싶으니까. 이번에는 독을 타지 않은 술로." 남궁격은 떠났다. 그는 화화궁으로 갔는데 거기서 그는 이제까지 겪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겪게 될 것이다. "나도 가겠네." 섬전도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나를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에게로 가야지. 그들이 나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형님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자네는 어디로 갈 건가?"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는 형님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긴……." 섬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를 부탁하네. 그 아이는 지금까지 너무 외롭게 살았어. 하지만 자네라면 그 아이의 빈 가슴을 채워줄 수 있을 걸세." * * * 노파는 오두막 양지바른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노파의 흰 머리가 무릎 사이에 박혀 있었다. 죽장은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떨어질 수 있게끔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이 든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겨울의 찬바람도 그녀의 곁에서만은 조심스럽게 비켜가는 것 같았다. "교희……." 잠시 노파를 보고 있던 복청양이 천천히 바닥에 몸을 앉혔다. 그는 노파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 大 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