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현재의 산만을 그리면 되는 것이다." 문득 도중향의 말과 손이 동시에 멎었다. 북궁후를 의식한 것이 다. 그는 천천히 북궁후를 바라보았다. 북궁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왠지 가슴 이 서늘해지는 괴이한 미소라고 도중향은 느꼈다. 갑자기 그는 거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그림을 보았느냐, 손을 보았느냐?" "눈(目), 나는 할아버지의 눈을 보았어." "눈을?" 일순 도중향의 깊숙한 동공에 괴이한 살기(殺氣)가 번뜩였다. '이 아이가 혹시?' 허나 그 살기는 이내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제아무리 뛰어난 귀재(鬼才)라 해도 한 번 보고 나의 화선 도극류(畵仙刀極流)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잠시 후 도중향은 주섬주섬 화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어 그것을 어깨에 걸머메며 북궁후를 향해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고맙다. 소야! 네 덕분에 우리의 대업(大業)이 앞당겨지게 됐 다!" 북궁후는 쪼그리고 앉은 채 눈을 반짝였다. "대업이라고?" "그렇다. 허허허...!" 도중향은 괴이한 웃음을 터뜨리며 산을 내려갔다. 과연 깨달음을 얻은 듯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 검 1권 제3장 뜻밖에 맺어진 남녀(男女) -8 ━━━━━━━━━━━━━━━━━━━━━━━━━━━━━━━━━━━ ⑧ 우르르릉! 엄청난 폭포수가 굉렬한 기세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폭포였다. 이때 돌연 한 줄기 백광(白光)이 천공을 갈랐다. 예의 백광은 엄 청난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정확히 일섬에 가르고 있었 다. 동시에 사위는 깊은 정적에 빠져 들었다. 헌데 놀랍게도 눈의 착각이련가? 진정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 는 일이었다. 한순간 폭포수가 양단된 것이었다. 수천만 근의 기세로 쏟아지던 폭포수가 베어지며 허공에 멈춰지다 니 뉘라서 이 일을 믿을 수 있겠는가! "크하하핫핫! 성공이다. 마침내 성공했다!" 돌연 우렁찬 앙천광소가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동시에 예의 폭포 수 속에서 한 줄기 흑영이 튀어 나왔다. 장발(長髮)의 흑포노인 (黑袍老人)이었다. 억세게 뻗친 반백반흑(半白半黑)의 잿빛 머리카락, 깡마른 몸매에 광대뼈가 툭툭 불거진 강팍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지옥의 무저갱처럼 움푹 패인 눈에서는 실로 죽은 자만이 떠올릴 수 있는 죽음(死)의 인광만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여기에 핏기라곤 한 점도 느낄 수 없는 창백한 피부, 흡사 무덤을 뚫고 뛰쳐나온 강시(疆屍)를 연상케 하는 섬뜩한 모습이었다. 우뚝 솟은 거암(巨岩) 위에 내려선 괴노인은 온몸을 흔들며 득의 의 광소를 터뜨렸다. "뇌극검류(雷極劍流)! 십 년, 십 년이 걸렸다! 크흐핫핫핫!" 이때 홀연 낭랑한 음성과 함께 남루한 청의소년이 나타났다. "베면 뭘해! 폭포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는데!" 순진한 얼굴에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년은 바로 북궁후였다. 일순 괴노인의 광소는 뚝 멎었다. 그는 북궁후를 내려다 보며 당 황에 찬 일성을 터트렸다. "뭐, 뭐야?" 북궁후는 발로 바윗돌을 툭툭 차대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치이! 그렇게 벨 것 같으면 나도 수천 번은 베겠다!" 괴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엇이라고?" 북궁후는 굉렬한 기세로 쏟아지고 있는 폭포수를 힐끗 보며 말했 다. "나도 이미 만 번도 더 베었어요. 마음 속으로! 저 폭포는 이미 베어진 것이야." 괴노인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갔다. 북궁후는 괴노인을 빤히 바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못믿겠어?" 일순 괴노인의 전신이 격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격동이었 다. 괴노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무서운 깨우침이다! 저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곧 뇌극검 류보다 백 배는 강한 심검류(心劍流)를 의미하는 것...!' 갑자기 괴노인의 어깨가 축 쳐졌다. 자신의 성취에 만족해 하던 그는 북궁후의 한마디에 자신의 성취가 보잘 것 없음을 깨달은 것 이었다. '저 소년이 깨우쳐준 검도(劍道)를 깨닫자면, 앞으로 백 년을 더 참오해도 부족할 것이다.' 허나 잠시 후 그는 움푹한 눈에 기광을 뿜으며 불현듯 입을 열었 다. "허나 지금의 뇌극검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 뇌소천(雷 天)! 이제야 임무를 수행하고 청아(淸兒)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이 충분하다는 것일까? 그의 목소리는 극렬한 환희에 떨리고 있었다. 허나 반면에 잿빛 머리칼 속에 가려진 눈빛은 어쩐지 어 둡고 쓸쓸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헌데 이 괴노인이 바로 뇌소천이었단 말인가? ■ 검 1권 제3장 뜻밖에 맺어진 남녀(男女) -9 ━━━━━━━━━━━━━━━━━━━━━━━━━━━━━━━━━━━ ⑨ - 검마(劍魔) 뇌소천. 천기신궁의 십대괴걸 중 일인으로서 이른바 천하최강의 검의 달인 (達人). 그의 검공은 실로 놀라워 그의 검 아래 삼초(三招)를 넘긴 고수가 없다고 했다. 실로 무적검(無敵劍)이라고나 할까. 헌데 그가 지난 십 년간이나 뇌극검류라는 한 가지 검초에 골몰해 왔다니 그 검초 는 과연 얼마나 대단한 검초란 말인가? 돌연 뇌소천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크흐핫핫핫! 청아야! 기다려라! 못난 아비가 이제야 너를 찾으러 간다!" 폭포수마저 흐트러 놓을 것 같은 우렁찬 광소였다. 허나 어쩐지 긴 세월의 고통이 진한 앙금처럼 깔려 있는 웃음소리같기도 했다. 잠시 후 그는 거대한 독수리처럼 흑포를 떨치며 사라져 가기 시작 했다. 북궁후는 말없이 멀어져 가는 뇌소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문득 그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업? 임무? 혹시 화선 도중향과 검마 뇌소천이 서로 관련이 있 는 것은 아닐까?" 헌데 이때 이십여 장 정도 떨어진 숲의 그늘 속에서 한 인영이 눈 을 빛내며 뇌소천이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은의(銀衣)를 걸친 꼽추괴노였다. 삼척단구에 축 늘어진 얼굴과 기이하도록 푸른 피부를 지닌 괴노였다. '아아, 도중향에 이어 뇌소천도 드디어 뇌극검류를 완성시켰는 가?' 멀어져 가는 뇌소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꼽추괴노의 눈빛은 이 순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뿐이 아니었다. 유난히 굽어있는 곱사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지 않은가! '아아! 마침내 때가 온 것이다! 노주(老主)의 신화가 무너질 때 가!' 꼽추괴노의 표정은 어둡고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문득 그의 눈이 폭포 앞에 홀로 서 있는 북궁후에게 돌려졌다. 그 눈빛은 이미 북 궁후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어느덧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잠시 후, 뇌소천이 완전히 사라지자 꼽추괴노는 천천히 북궁후에 게 다가왔다. "아, 은타(銀駝)!" 그제야 꼽추괴노를 발견한 북궁후가 반색했다. 은타는 바로 천기 신궁의 화초들을 보살피는 정원사였던 것이다. "소공자님. 노야(老爺)께서 찾으십니다." "나를?" "예. 긴히 할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셨으니 어서 가보십시오." 북궁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이 순간 긴장의 빛마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건 일체 신경조차 쓰시지 않던 분이 나를 왜 부르는 것일까?' ■ 검 1권 제4장 시작되는 음모 ━━━━━━━━━━━━━━━━━━━━━━━━━━━━━━━━━━━ ① 넓은 대청, 화려하고 고상한 기품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화원이 멀지 않은 듯 싱그러운 수목향기가 은은히 퍼져오고 있었다. 예의 대청의 중앙에 커다란 태사의가 놓여있었고 한 명 금포노인 (錦袍老人)이 그 위에 앉아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일견 평범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허나 안색이 매우 평온하여 자애 로운 인품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묵(墨)으로 힘찬 일획(一劃)을 찍어 그린 듯한 짙은 양 검미 사이에 실로 범접키 어려운 신태비범(神態非凡)한 서기가 서려 있 었다. 천기신군 모용선학, 그는 바로 이른바 중원의 하늘이라는 천기신궁의 궁주였다. 하지만 그의 용모는 어찌보면 너무도 평범하게만 느껴져 실로 천 하를 제패한 노영웅(老英雄)의 기태라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의 전면 서탁 위에는 검집과 헝겊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모용선 학은 무심한 얼굴로 검을 손질하기에 열중해 있었다. 헌데 문득, 그는 무심결인 듯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그의 안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북궁후가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노야! 부르셨습니까?" 북궁후가 소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듯, 모용선학도 노야로 불리 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실로 기이한 우연인 것이다. 일순 모용선학의 전신에서 무형의 위엄이 뻗어 나왔다. "게 앉거라!" "예!" 북궁후는 모용선학의 태도가 평소와 다름을 감지하고 더욱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선학의 눈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마주보기 어려운 위엄이 뻗어 나왔다. "네가 글서생 서문선생(西文先生)과 바둑을 두어 이겼다던데 사실 이냐?" 북궁후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도 서문선생이 네 돌을 단 한 점도 잡지 못했다면서?" "예!" 북궁후는 의혹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선학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그는 본궁의 빈객으로 원래 혜아(慧兒)의 글선생으로 들어온 사 람이다. 학식(學識)이 높고 혜지가 뛰어난 대학자(大學者)이지." "...?" "바둑 솜씨 또한 천하제일로 알려져 있어 이 노야도 번번이 패하 는 처지이다." 돌연 모용선학은 담담한 눈을 들어 북궁후를 바라보았다. 이어 의 미심장한 질문이 흘러 나왔다. "소야, 너는 이 노야가 바둑이 약해 번번이 그에게 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예에?" "바보같은 놈! 천하신동이라는 네 머리가 고작 그 정도였단 말이 냐? 네 부친이 서찰에 적기를 네가 부친을 실망시키고 있다고 했 다." 일순 북궁후의 얼굴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모용선학의 음성이 나 직이 이어졌다.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거늘 너는 점점 나를 실망시키고 있구나." 바둑판에서 이겼다고 이처럼 무섭게 질책하다니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닌가? 이 순간 모용선학은 다 손질된 검을 검집에 끼웠다. 그러면서 말 을 이었다. "나는 네가 뭔가 가슴에 새기고 있는 뜻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해서 짐짓 세상을 우롱하며 스스로를 감추고 있을 줄로만 생각한 것이다. 헌데...." 실로 준엄한 눈빛이었다. 그 눈길을 대한 북궁후는 미망속을 헤매 지 않을 수 없었다. 모용선학의 눈빛은 어찌보면 고요하기만 하다. 허나 또한 화광(火 光)을 내쏘는 듯 강렬한 것이었다. "내가 너를 잘못 보았느냐?" 북궁후는 감히 무어라 입을 열 수 없었다. 모용선학의 음성이 다 시 부드러워졌다. 그의 눈빛 역시 무언가를 이야기 하듯 뜨거워지 고 있었다. "후아야. 이토록 뛰어난 재질을 지닌 네가 왜 부친의 명대로 무공 을 익히지 않고 딴짓만 일삼느냐?" 일순 북궁후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그는 애써 장난기 어린 목소 리로 말했다. "난 무공엔 관심이 없습니다." 모용선학은 그의 미간에 깔린 음울한 그늘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아니, 이 녀석에게 이런 일면이 있었나?' 이윽고 그는 진중한 눈길로 북궁후를 응시하며 말했다. "후아야, 네게 말 못할 고충이라도 있느냐?" 그 음성에는 상대를 설득하는 강렬한 힘이 있었다. 북궁후는 당황 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준수한 얼굴이 처연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전혀 십오 세 소 년의 얼굴이라고 볼 수 없는 수심어린 표정이었다. ■ 검 1권 제4장 시작되는 음모 -2 ━━━━━━━━━━━━━━━━━━━━━━━━━━━━━━━━━━━ ② 잠시 후, 북궁후가 고개를 들었다. 보기드문 진지한 얼굴이어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야의 기질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그 어조도 정중하고 조심스러워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백부님. 소질이 무공을 익히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문득 북궁후의 시선은 모용선학의 침소 한곳에 있는 보검(寶劍)에 던져졌다. 쓸쓸한 미소가 솔직하게 그의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무학(武學)..., 남아의 기상을 오연히 떨칠 수 있는 무학을 소질 역시 한때는 간절히 열망했었습니다." 모용선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체질은 천고에 보기 드문 천품(天品)이다. 만약 네가 무공을 익힌다면 가히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체질? 훗!" 북궁후는 짧게 웃었다. 진한 허탈감이 배인 웃음이었다. 그는 희 미한 미소를 머금고 모용선학을 바라보았다. "백부님, 소질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체질때문이 었습니다." "체질 때문이라고?" 모용선학의 눈이 당혹감에 커졌다. 실로 의외의 말이었던 것이다. 북궁후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백부님께서는 혹시 광령천양지체(廣靈天陽之體)라고 들어 보셨습 니까?" 순간, 모용선학은 눈을 부릅뜨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광령천양지체! 네, 네가?" 북궁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선학은 경악에 찬 얼굴을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지금껏 한 번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 전설(傳說) 속의 신체를 네가 타고났다니!" - 광령천양지체. 전설지체(傳說之體). 이른바 극양(極陽)의 체질을 타고난 천고기맥(千古奇脈)을 일컫는 말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기맥을 타고난 광령천양지체는 하늘도 희롱할 정도의 뛰어난 오성(悟性)과 엄청난 신능(神能)을 타고난 다고 한다. 허나 십칠 세가 되면 전신혈맥이 타들어가 죽고 만다. 천하 어떤 영약이나 의술(醫術)로도 고칠 수 없다.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극음지체(極陰之體)인 태음한 령지체(太陰寒靈之體)와 음양교합(陰陽交合)을 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만 되면 양극(兩極)의 신체가 조화(造化)를 이루어 실로 엄 청난 광세기연을 얻게 되는 셈이 되는 것이다. 허나 태음한령지체 역시 광령천양지체만큼이나 희귀해 천하에 찾 기 힘든 것이라 했다. ■ 검 1권 제4장 시작되는 음모 -3 ━━━━━━━━━━━━━━━━━━━━━━━━━━━━━━━━━━━ ③ 모용선학은 무거운 신음을 토하며 물었다. "음, 내 견식(見識)이 짧지 않음에도 네가 광령천하지체임을 알아 보지 못했거늘 네가 어떻게 스스로 단언하느냐?" 북궁후는 담담했다. 실로 생사(生死)를 달관한 늙은 고승(高僧)처 럼 담담했다. 허나 청춘(靑春)의 뜨거운 피도 어찌 그처럼 담담할 수 있겠는가! 그의 눈빛은 이 순간 뜨거운 격동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황궁서고에는 의경총요(醫經總要)라는 절세적인 의록(醫綠)이 있 습니다. 저는 그것을 읽고서야 제가 저주의 광령천양지체임을 알 게 되었습니다." "의경총요?" "예! 광령천양지체는 오직 본인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헌데 듣기에는 너는 황궁서고에서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매 일 잠만 잤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 책은 읽을 수 있었느냐?" 모용선학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지자 북궁후의 입가에 씁 쓸해 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훗! 기실 저는 황궁서고에 든 지 이 년만에 그곳에 있는 책자를 한 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읽었습니다." "무엇이!" 모용선학이 입을 딱 벌렸다. 좀체로 표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던 그조차 이 순간 만큼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궁후가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태연히 말을 이었다. "헌데 공주가 제 말을 믿지 않고 자꾸 황궁서고로 데려가니 잠잘 일밖에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북궁후의 입가에 고소가 묻어났다. 모용선학이 신음을 흘려냈다. '으음...! 해서 짐짓 짓궂은 익살맞은 행동을 일삼아 내심의 고통 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것이련가...?' 자신의 천수를 알고 늘 죽음을 기다리고 살아가는 소년.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의 그림자는 다가오고, 아무것도 꿈꿀 수도 없고, 야심 또한 헛된 것이다. 그것은 정녕 십오 세 소년이 견뎌내기에는 가혹하고 처절한 운명 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북궁후는 자신의 운명을 알기에 공주와의 정혼을 파혼시 켜 달라고 했었단 말인가? 이 순간 북궁후의 깨끗한 미간에 진한 고통의 빛이 떠올라 있었 다. 심장을 칼로 후비는 듯한 괴로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젊은 육신(肉身)을 엄습한 것이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실 로 놀라운 의지력이었다. 모용선학은 감복과 안타까움이 뒤얽힌 복잡한 눈으로 북궁후를 직 시하고 있었다. '천하가 시기할 천고귀재(千古鬼才)의 운명치고는 너무 가혹하구 나. 허나...!' 돌연 그의 우묵한 눈이 관솔불처럼 타올랐다. '허나 나는 그의 짧은 생명의 불꽃을 활화산(活火山)처럼 터뜨려 주겠다!' 모용선학은 도대체 무슨 결심을 한 것이란 말인가? '하늘은 한 인간의 존엄(尊嚴)한 생(生)을 희롱했다. 허나 곧 저 아이에 의해 우롱당하리라. 그땐 천번지복(天飜地覆)의 개세천하 (開世天下)가 도래할 것이다!' 강하고도 여유로운 미소(微笑)가 그의 입가에 피어 오르고 있었 다. 천하패권을 한손에 쥔 웅주(雄主)다운 미소였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일어나 실내를 걷기 시작했다. "후아야. 남아(男兒)의 인생은 길다고 다 의미있는 게 아니란다. 진정한 무인(武人)이란 한순간의 멋진 산화(散化)를 위해 평생 한 자루의 검(劍)을 간다." 열린 창문으로는 어느새 맑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달빛을 받아 노웅(老雄)의 두 어깨가 더욱 강인하게 느껴지고 있 었다. 모용선학의 투지어린 음성이 잔잔히 이어지기 시작했다. "네 인생의 남은 이 년(二年)은 결코 짧지 않다." 순간 북궁후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보면 처절한 태도였 다. "그렇습니다. 짧지 않습니다. 제겐 오히려 이백 년처럼 길고 지루 할 뿐입니다." "지루하다고? 핫핫핫!" 모용선학은 갑자기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갑작스러운 웃 음이었다.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실내가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허나 북궁후는 웃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모용선학의 등을 응시하 고 있었다. 달빛이 눈부신 은사(銀絲)처럼 모용선학의 등에 투영되고 있었다. 모용선학의 웃음은 처음 터져나왔을 때처럼 역시 갑자기 멎었다. 모용선학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어 그의 눈은 지극히 담담하고 맑은 북궁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렇다. 앞날이란 언제나 멀다. 미래(未來)란 늘 불확실한 것이 기 때문에 누구나 새롭게 시작하고 가능(可能)을 꿈꾸는 것이다." "...." "하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은 비록 한순간 짧게 타오르다 스러진다 할지라도 만족스럽게 웃으며 가는 것이다. 그러면 족하지 않느 냐?" 북궁후의 눈빛이 잔잔히 격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점차 잔잔한 대 해(大海) 위로 퍼져가는 불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모용선학의 간단한 말 한마디에 그는 살아야 할 어떤 이유를 깨달 은 것이었다. 아니 적어도 죽음이 닥치기 전까지라도 만족할 줄 아는 방법은 배운 것이다. 잠시 후 북궁후는 명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족합니다!" 이 순간 모용선학은 보았다. 북궁후의 찬란한 동공에 용트림처럼 끓어오르는 웅지(雄志)를. 그것은 먹구름 낀 하늘이 굉음과 함께 열리는 듯한 전율을 주는 것이었다. 모용선학은 북궁후를 직시하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비록 짧은 생이 될지 몰라도 너는 너 나름대로의 뜻을 품어야 하며 또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달빛 때문이었을까? 한순간 북궁후의 두 눈에 물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가슴벅찬 격동이었다. ■ 검 1권 제4장 시작되는 음모 -4 ━━━━━━━━━━━━━━━━━━━━━━━━━━━━━━━━━━━ ④ 천기신궁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구 분되어 있었다. 내성은 바로 천기신군의 거처로서 철옹성을 방불케 할 정도로 완 벽한 방어와 경계태세가 갖춰져 있었다. 실로 개미 한 마리도 함 부로 접근할 수 없는 중지(重地)인 것이다. 외성은 또한 삼천여 명의 빈객과 오천여 명의 천기신궁 무사(武 士)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외성의 일백여덟 채의 전각 (殿閣)들은 항상 외부 빈객들로 초만원이었다. 실로 과거 맹상군이 식객(食客)들을 삼천여 명이나 수용하던 것과 비교될 정도인 것이다. 빈객들의 종류는 실로 다양했다. 명문대파의 제자나 고수들이 강호견식을 넓히기 위해 잠시 머무르 기도 하고, 오갈곳 없는 방랑객이 안주하기도 한다. 그들중에는 기행을 일삼는 괴걸(怪傑)들도 적지 않았다. 천기신궁 은 누구나 머무를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검왕전(劍王殿), 외성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화려한 전각, 이곳은 바로 북천검 왕(北天劍王)의 거처였다. 북천검왕 두우평(杜牛平)은 실로 북천(北天)에 떠도는 고성(孤星) 같은 이름이었다. 그는 바로 천기신군 모용선학의 오른팔로서 천 기신궁의 실질적인 주재자인 부궁주(副宮主) 신분의 인물인 것이 다. 그는 만일 천기신군 모용선학이 아니라면 서슴없이 당대 최고고수 로 꼽힐 인물이기도 했다. 화사하고 따사로운 양광(陽光)이 검왕전 처마에 내리쬐이고 있었 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5편 →
6편부터
6편
[무협소설]천중행 - 검 - 6편 (6/46)
훈풍이 감미로왔다. 그 훈풍속에 검왕전의 하얀 창문이 열렸다. 동시에 봄기운에 취한 나른한 탄성이 울려 퍼졌다. "아아! 참으로 화창한 날씨야!" 달콤하고 나긋나긋한 교성(嬌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