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풍이 감미로왔다. 그 훈풍속에 검왕전의 하얀 창문이 열렸다. 동시에 봄기운에 취한 나른한 탄성이 울려 퍼졌다. "아아! 참으로 화창한 날씨야!" 달콤하고 나긋나긋한 교성(嬌聲), 은쟁반에 옥(玉)이 구르는 듯 청아하고 맑은 음성이었다. 이어 창을 통해 절세미녀(絶世美女)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략 스무 살 가량이나 되었을까? 검왕전의 전각들중 한 전각의 창에 모습을 드러낸 여인의 모습은 진정 아름다웠다. 구름결같은 흑발이 부드럽게 어깨 위로 흘러 내려져 있고, 하얀 나삼은 훈풍에 하늘거린다. 찬란한 햇살이 투영되는 피부는 백설보다 더 하얗다. 게다가 햇살 이 담긴 나른한 눈(目)은 서글서글하고 맑아 그 성품을 그대도 보 여주는 듯했다. 특히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 도톰하고 촉촉히 젖은 입 술은 매우 육감적(肉感的)이었다. 실로 성숙한 요염미(妖艶美)를 풍기는 미녀였다. 서효빈(徐孝彬), 그녀는 바로 북천검왕 두우평의 애첩(愛妾)이었 다. 서효빈은 창가에 턱을 괸 채 나른한 표정이 되어 춘광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 헌데 한순간, 나른하기만 하던 그녀의 눈 깊은 곳에 전광과도 같 은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지 않는가? 그녀의 눈은 후원의 한 그루 고송(古松)에 고정되었다. 고송의 나뭇가지에는 평범한 붉은 혈포(血袍) 한 조각이 묶여져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어찌보면 바람에 날려가던 헝겊 조각이 나뭇가지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허나 예의 혈포조각을 발견한 서효빈의 안색이 창백히 굳어들었 다. 뿐이랴! 그녀의 전신은 눈에 뜨이리만치 크게 경련을 일으키 고 있었다. '왔다! 드디어... 오 년만에 내게 임무가 떨어졌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격렬히 흔들리고 있 었다. 또한 해맑기만 하던 그녀의 눈속에는 착잡한 갈등의 빛이 물결치고 있었다. '헌, 헌데..., 나는 이미 그의 아기를 잉태하고 말았다.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이내 서효빈의 눈속에 어떤 절망의 빛이 솟아났다. 은은히 공포의 빛마저 그 속에 담겨있어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서효빈은 결심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보면 처 절한 표정이었다. '허나 어쩔 수 없어. 도저히... 명령에 거역할 수는 없어.' 무엇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일까? 절망과 공포의 검은 그림자로 뒤덮혀 있는 그녀의 얼굴은 이 순간 천천히 원래의 신색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무서운 여운이 담겨있는 음성이 조용히 흘러 나왔다. "임무는 수행될 것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덜컥! 이내 창문이 닫혀버림과 동시에 서효빈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밝은 햇살은 여전히 그 창문 위에서 하얗게 반사되고 있었는 데.... ■ 검 1권 제4장 시작되는 음모 -5 ━━━━━━━━━━━━━━━━━━━━━━━━━━━━━━━━━━━ ⑤ 영웅루(英雄樓), 이곳은 빈객들의 거처 중 한 곳으로서 이 한 채의 전각에만도 수 백 개의 내실(內室)이 있고, 중앙에는 수백 명이 군집(群集)할 수 있는 넓은 대청이 있었다. 바로 그 넓은 대청의 한구석에서 언제부터인가 기세좋게 코고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대청의 한구석에서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인물은 초라한 행색의 흑포인이었다. 새둥지를 연상케 하는 더러운 봉두난발, 수십 군데나 꿰맨 낡고 꾀죄죄한 흑포. 게다가 흑포인의 피부는 거무죽죽하고 무척이나 더러워 보였다. 허나 허리에 질끈 동여맨 오결의 새끼줄은 곧 예의 흑포인이 개방 ( )의 인물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 개방 장문인이 칠결이다. 허니 이 인물의 신분이 어느 정도인 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의 흑포인은 개방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죽치고 있는 지가 벌써 삼 년째였다. 게다가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취하도록 마시고 늘어지게 잠 을 자는 것 뿐이었다. 이때 휘이잉! 소리와 함께 문득 한줄기 미풍이 대청으로 스며들었 다. "으음!" 예의 미풍때문인지 흑포인은 술이 깬 듯 몸을 뒤척였다. 새끼줄에 매인 호로병과 한 개의 붉은 타구봉(打球棒)이 유독 쓸쓸해 보이 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흑포인은 눈꼽이 덕지덕지 낀 눈을 부시시 뜨며 습관적인 듯 호로병을 입 안에 거꾸로 처박았다. 그러나 술은 한 방울도 나 오지 않았다. "끄응! 빌어 먹을!" 흑포인은 둔한 몸을 일으켜 휘적휘적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 다. 이때 어디선가 이죽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여봐! 적봉취개(赤棒醉 ), 또 술이 떨어진 모양이구만!" 허나 흑포인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걸어나가고 있다. 헌데 놀랍지 않은가. 보잘것 없어 보이는 이 초라한 흑포인이 바 로 적봉취개였단 말인가! - 적봉취개 나한룡(羅漢龍). 개방의 풍운사십구걸(風雲四十九傑) 중 일인(一人). 그는 일신 기 학(奇學)은 물론 각방면의 지략(智略)에 뛰어나 다음대 장문인 후 보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적봉취개는 이내 대청을 벗어나 난간으로 나왔다. 이어 햇살이 눈 부신 듯, 그는 잔뜩 때가 낀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천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은 멍청해 보일 만큼 흐렸다. 영락없이 술에 쩐 폐인같은 눈빛이었다. 헌데 돌연, 그의 두 눈에서 짙은 화광(火光)이 쏘아져 나왔다. '왔다! 드디어 때가 왔다!' 뿐이랴! 언제부터인지 그의 전신은 격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분명 핏덩이가 뭉쳐있는 듯한 혈포였다. 영웅루 전면 광장에 서 있는 한 그루 거목의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혈포 조각이 햇살 속 에 그의 동공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이 순간 그의 눈에서는 단 한점의 취기(醉氣)도 찾아볼 수 없었 다. 취기 대신 그의 눈에 떠돌고 있는 것은 실로 가공스러운 살기 (殺氣)뿐이었다. ■ 검 1권 제4장 시작되는 음모 -6 ━━━━━━━━━━━━━━━━━━━━━━━━━━━━━━━━━━━ ⑥ 전삼(全三), 그의 이름은 전삼이었다. 바로 천기신궁의 일만여 식솔들의 음식 을 주관하는 향적주의 방장(房長)이었다.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황실(皇室)의 어선방까지 지냈다는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인 것이다. 허리가 굽은 육손(六手) 노인인 그의 손을 거친 음식은 무엇이든 천하의 별미(別味)가 되었다. 헌데 지금 평생 음식만을 만들어오며 살아온 그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 떠져 있었다. 혈포, 그저 우연인 듯 장난스레 향적주 문턱에 걸려 있는 평범한 붉은 천이 비수처럼 그의 동공 속에 깊숙이 파고 들고 있었던 것 이다. 도대체 그 헝겊이 무엇이기에 이미 인생을 다 살아버린 그의 노안 을 격동으로 파도치게 만들고 있단 말인가? "왔군! 드디어 왔어!" 잠시 후 그는 격동어린 음성을 흘려 내며 품안에서 한통의 약봉지 를 꺼내들었다.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는 손동작으로 보아 실로 중 요한 약재같았다. 동시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무형지독(無形之毒)에 극랄한 산공산(酸空散)까지 섞은 무형산절 독(無形散絶毒), 이 한봉이면 수만 마장의 동정호(洞庭湖)도 죽음 의 호수로 만들 수 있다!' 잠시 후 노인은 조용한 걸음걸이로 분주하기 이를데 없는 향적주 안으로 들어섰다. 향적주 안에서는 수많은 인부들이 음식을 만드 느라 부산하기만 했다. 노인이 곧바로 다가든 곳은 거대한 국솥이었다. 그 국솥은 거대하 기 이를데 없어 그야말로 천기신궁의 빈객 전체가 먹을만한 분량 의 음식을 한꺼번에 조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움직여 무형산절독을 예의 국솥에 털어넣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고 해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다. 무엇인가 거대하면서도 피비린내 나는 무서운 음모가 이 렇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득한 지평선 저쪽부터 진홍색으로 채색되 어 오는 조양은 어찌보면 일대 장관이랄 수 있었다. 허나 오늘 석양은 어쩐 일인지 더욱 붉게만 느껴져 섬뜩하기까지 했는데.... ■ 검 1권 제4장 시작되는 음모 -7 ━━━━━━━━━━━━━━━━━━━━━━━━━━━━━━━━━━━ ⑦ 천기신궁 내궁의 천기신군의 침소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불도 밝혀지지 않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북궁후와 모용선 학이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음인지 월광이 넓은 내실에 사선으로 비껴들고 있었다. 때문에 불을 밝히지 않아도 실내는 과히 어둡지 않았다. "후아야." "예." "너는 천기비고에 들어가야 한다." 모용선학의 얼굴에는 어딘가 조급해 하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북 궁후는 그것을 느끼고 다소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천기비고요?" "본궁의 모든 것이 비장되어 있는 곳이다. 천하무학이 총망라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지!" 북궁후는 모용선학이 헛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경악 을 금치 못했다. "헌데 언제 그곳으로 들라는 말씀이신지?" "바로 지금이다!" "예?" 북궁후는 차라리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문득 모용선학의 얼굴 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실, 시간이 없음이다. 내가 너에게 지금 곧 천기비고에 들라함 은 사실 단순히 무공을 익히게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북궁후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모용선학의 음성이 침중해졌으나 그 눈은 북궁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허허롭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세인(世人)들은 천기신궁의 신화(神話)가 영원하리라고 믿고 있 으나 그 신화는 곧 깨어질 것이다." 북궁후의 눈에 기광(奇光)이 번뜩였다. 실로 놀라운 말이 모용선 학의 입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네가 이곳에 온 시기가 좋지 않았다. 본궁(本宮)은 지금 혈 겁(血劫)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북궁후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에 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천기신궁이 혈겁에?"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지난 오십 년간이나 천하무 림 위에 군림해 온 무림의 신화, 곧 살아 있는 전설로 일컬어지고 있는 천기신궁이 혈겁을 눈 앞에 두고 있다니 뉘라서 믿을 수 있 단 말인가? 북궁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머리를 흔들며 반문했다. 장난 기마저 어린 음성이었다. "제가 보기엔 아무런 동정도 없이 평화스럽기만 한데요?" 모용선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지금 강호에는 어마어마한 암류 (暗流)가 흐르고 있다. 노부의 직감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 암 류는 바로 본궁에서 표면화 될 것이다." 모용선학의 음성에는 점차 긴장이 떠돌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천기신궁내에서 시작되고 있는 무서운 음모에 대해 이미 적지 않 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편 이 시각, 검왕전의 한 침상에서는 거친 숨결이 뿜어져 나오 고 있었다. "아아!" "아음." 욕정에 달뜬 비음을 터트리고 있는 여인은 바로 북천검왕 두우평 의 애첩인 서효빈이었다. 그녀의 나신 위로는 단단한 두우평의 몸 이 겹쳐져 있었다. 뜨겁게 뒤얽힌 남녀(男女), 두우평의 크고 두툼한 손은 거칠고도 부드럽게 서효빈의 매끄러운 나신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민감 한 여체(女體) 구석구석에 한창 마(魔)의 불길을 피워 올리고 있 는 중이었다. 바로 육욕의 불길이었다. "으음." 두우평의 우람한 동체는 부드럽고도 뜨거운 여체 속을 헤집고 있 었다. 거칠기 이를데 없는 그 동작에 여체는 더욱 더 뜨겁게 달아 올랐다. 양지유(羊脂乳)로 빚은 듯, 매끄럽게 뻗어내린 복부와 그 아래로 흐르는 깊숙한 계곡의 짙은 방초. 단단하면서도 거칠게만 보이는 사내의 나신과 부드럽기 이를데 없 는 희디 흰 여체가 뒤엉켜 있는 모습은 서로 상반된 시각적인 질 감으로 인해 더욱더 환상적이기만 하다. "아아, 음...!" 애첩 서효빈의 입에서 격정에 달뜬 비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두우 평의 전신은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가(大哥)!" 서효빈은 연신 달콤한 비음(鼻音)을 토하며 백옥같은 지체(肢體) 로 그의 몸을 휘어 감았다. 동시에 매끄러운 두 팔 역시 두우평의 등 뒤로 돌려져 그의 굵은 목덜미를 힘껏 끌어 안는다. 두우평은 문득 자신의 가슴 밑에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인을 내려다 보았다. 요물(妖物), 서효빈의 새하얀 나신은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요염함 의 정화(精華) 그 자체였다. 일순 두우평은 가슴에 활화산(活火山)같은 욕정이 솟구침을 느끼 며 더욱 세차게 파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 검 1권 제4장 시작되는 음모 -8 ━━━━━━━━━━━━━━━━━━━━━━━━━━━━━━━━━━━ ⑧ 서효빈은 그의 손에 길들여진 여인이었다. 때문에 두우평이 그녀 의 전신을 불태우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서효빈 역시 두우평을 더 욱 뜨겁게 유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출렁이는 나신들의 움직임에 따라 밤꽃 향기같은 심혼(心魂)을 뇌 쇄시키는 아찔한 육향(肉香)이 실내 가득히 번지고 있었다. "아아... 대가!" 서효빈은 더욱더 희열에 찬 비음을 발하며 뱀처럼 감겨들었다. 그 녀는 한없이 그를 갈구했다. 은은한 사향내음을 동반한 성숙한 여 인의 관능적인 체취에 두우평은 지배자였으되 또한 노예였다. 두우평의 건강한 육체가 한순간 무섭게 꿈틀거렸다. "허억...!" 절정에 이르고 있음인가? 두우평의 몸짓에 따라 서효빈 역시 광란 에 가까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두우평은 마직막 절정을 향해 치달리는 듯 숨 막힐 정도로 거세게 그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한순간, 두우평의 몸은 무섭게 경직되었다. 동시에 그의 내부에서 폭죽 터지듯 무엇인가가 강렬하게 분출해 나갔다. 헌데 바로 이 순간 돌연 두우평의 목을 끌어 안고 희열에 전신을 떨던 서효빈의 눈이 살며시 떠지지 않는가! 그 눈은 결코 방금 전 까지 욕정에 몸을 떨던 눈빛이 아니었다. 실로 가공할 살기가 번 뜩이고 있는 눈이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그녀의 땀에 젖은 손이 소리없이 두우평의 명문혈(命門 穴)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길이 다섯치의 예리한 비수 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이 자는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이다. 사혈(死穴)은 단 한 곳뿐...!' "크... 흑!" 두우평의 몸이 묵직한 비명과 함께 펄쩍 뛰어 올랐다. 이미 그의 명문혈에서는 분수처럼 핏줄기가 뻗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거구를 휘청하며 찢어지도록 눈을 부릅떴다. "아니, 네, 네년이...?" 서효빈은 벌떡 일어서 한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날카로운 교소와 함께 소리쳤다. "호호호, 두우평. 너는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순간 두우평의 용목(龍目)이 무서운 분노와 절망감에 타올랐다. "그렇다면 네 년이 오 년 전에 내게 접근한 것은 나를 죽이기 위 한 계획이었단 말이냐? 하지만 무엇때문에?" "호호호! 그 이유는 네가 죽는 순간에 알게 될 것이다." 두우평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오 른 것이었다. '궁주께서 위험하다!' 두우평은 이미 명문혈 깊숙이 비수가 박힌 상태였으나 굳굳히 선 채 서효빈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안색도 평정을 되찾고 있어 실로 놀라운 심득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조소하듯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지난 오 년간을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렸다...? 네 수고가 실로 가 상하다만 너는 결코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호호, 과연 그럴까?" 두우평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서효빈이 빙그시 미소했다. 이어 그 녀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미처 손뼉소리가 허공에 울리기도 전이었다. 허공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가 싶은 순간 돌연 엄청난 검기 가 사방에서 폭사해 들지 않는가! "크아악!" 두우평은 쌍장을 휘둘러 막아가며 급급히 신형을 날렸다. 허나 이 미 호신기공(護身奇功)이 파괴된 그의 몸은 처참하게 피보라를 뿌 리고 있었다. ■ 검 1권 제5장 천기신궁(天機神宮)의 대혈전(大血戰) ━━━━━━━━━━━━━━━━━━━━━━━━━━━━━━━━━━━ ① 모용선학의 침실, 북궁후는 긴장감을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곧 혈겁이 닥친다는 걸 알고 계시다면서 어째서 대처하지 않습니 까?" 모용선학의 음성은 무겁게 어둠 속으로 깔려 들고 있었다. "나는 지난 이십 년간이나 이 음모의 실마리를 풀려고 심력(心力) 을 다해 왔으나 아직도 맥(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북궁후는 내심 뭉개구름처럼 치솟는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 다. '이십 년간이나? 실로 그 얼마나 가공할 음모이기에 백부님의 이 목을 속인 채 오히려 천기신궁 깊숙이 파고 들 수 있단 말인가?' 북궁후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떠올리는 순간 모용선학의 음성이 이어졌다. "또한 내가 너에게 천기비고에 들어가라고 하는 두번째 이유는 바 로 너를 피신시키기 위한 것이다." 북궁후가 눈을 크게 떴다. "소질이 피신을?" "그렇다. 재질이 뛰어난 인물은 그 재질이 남의 눈에 드러날 경우 오히려 살신지화를 초래하는 법.... 너는 이미 세 사람에게 너의 뛰어난 재질을 드러냈다. 화선, 검마, 그리고 글서생 서문선생에 게 말이다." 북궁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흠칫 표정을 굳히지 않을 수 없 었다. 모용선학의 말이 의미하는 내용이 실로 놀라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로 백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암류의 구성원들이 란 말씀입니까?" 모용선학이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놀라운 내용이 그의 입 에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들 뿐이 아니다. 현재 본궁에 머물고 있는 빈객들 중 태반이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음은 물론이고, 본궁의 수하들 대부분 역 시 이미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모용선학의 음성에는 은은히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너 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빈객들은 둘째치고 수하들 대부분이 이미 그를 배신했음이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 중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세 명을 주목하고 있 었다." "...!" "그 첫번째 인물이 화선 도중양인데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자신의 필법(筆法)을 연구해 오고 있다. 바로 천하무적의 무공을 말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숨은 실력을 모두 드러낸다면 어쩌면 그의 무공 은 이미 나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설마... 화선 도중양이라는 사람이 그 정도란 말입니까?" 북궁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 렸다. 모용선학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두번째 인물은 검의 달인 검마 뇌소천이다. 만약 그가 뇌극검류 를 완성시켰다면 천하에 그것을 능가할 무공은 결코 많지 않을 것 이다." 모용선학의 음성은 오히려 차분해 결코 적을 필요 이상으로 과 대 평가하는 것같지는 않았다. 북궁후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모용선학의 음성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세번째로는 서문선생이다. 그는 그야말로 무서운 인물로서 깊은 심계(心計)와 지략(智略)은 가히 세치 혀만으로도 능히 천하의 반 을 움켜쥘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모용선학의 눈에서 점차 잔잔한 화광(火光)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한편 북궁후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 게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그들이 그토록 무서운 인물들이란 말씀이십니까?" 모용선학이 서슴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암운이 어려있는 눈빛이었다. "그렇다. 허나 더욱 무서운 점은 그들이 아직 숨어있는 상태라는 점이다. 원래 보이지 않는 화살이 더 막기 어려운 법이 아니겠느 냐!" ■ 검 1권 제5장 천기신궁(天機神宮)의 대혈전(大血戰) -2 ━━━━━━━━━━━━━━━━━━━━━━━━━━━━━━━━━━━ ② 금도북령신(金刀北靈神), 천기신궁의 외삼당(外三堂)을 관장하는 천기삼절(天機三絶) 중 일 인, 그의 무공수위는 명문대파의 장문인을 능가할 정도였다. "크윽!" 허나 그 가공할 고수가 지금 한줄기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목덜미 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막 침실에 돌아와 옷을 갈아 입던 참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뒷쪽에서 암습이 전개된 것이었다. "크으흑! 적봉취개, 네, 네가?" 금도북령신은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느리게 몸을 돌렸다. 그 의 눈은 이 순간 극도의 경악과 불신에 차 있었다. 그의 전면에는 적봉취개가 커다란 금도를 안고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금도북령신의 애병(愛兵)으로 금도북령신의 목덜미를 그어버 린 것이었다. 시뻘건 핏덩이가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금도북령신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핏줄기를 보며 적봉취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클클클! 그대의 금도(金刀)는 참으로 쓸만하오." "왜? 왜...?" 금도북령신의 산악처럼 우람한 몸체가 휘청했다. 그는 꺼져드는 음성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으나 채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그 자리 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적봉취개가 침상에 걸터 앉으며 음침한 괴소를 날렸다. "흐흐흐! 왜냐고 물었소이까? 이유는 단지 하나, 그대의 죽음이 이미 오래전에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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