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순 북궁후가 냉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놈은 누군가?" 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투령신옹이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 다. "환사(幻邪)다!" "저... 자를 아시오?" 북궁후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짧게 물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승소진이 재빨리 책을 읽듯이 외워댔다. "환사! 만류교의 삼대환공(三大幻公) 중 한 명! 그의 사술은 추측 불능, 만류교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 북궁후의 낯빛이 약간 변했다. '만류교, 끈질기게 따라 붙는군. 좋다. 맛을 보여 주겠다!' 이 순간 환사는 쉰 듯한 괴소를 흘리며 북궁후를 노려보고 있었 다.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시커먼 동굴같은 눈구멍이 노려 본다는 것은 실로 으시시한 일이었다. "북궁후... 잘 만났다. 본교에서는 네놈을 찾고 있었다. 흐흐!" "나를?" "흐흐, 군사(軍師)께서 말씀하셨지. 네놈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고...!" 일순 북궁후의 눈썹이 꿈틀했다. "군사?" 이때 승소진이 또다시 책을 읽듯 외웠다. "만류교의 군사는 서문유허! 육십 년 전 천하를 뒤엎을 모계를 꾸 미다 천기신군에 패해 세외변방으로 도주했던 서문규의 아들! 깊 은 심기의 소유자이며 실상 만류교의 교주!" 순간 북궁후의 얼굴빛이 미미한 변화를 일으켰다. '서문유허가 바로 만류교의?' 서문유허라면 바로 천기신궁의 글선생으로 머물던 자가 아닌가! 환사의 뱀처럼 찢어진 입술이 달싹였다. "이제 그만 수급을 내놔라!"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쭉 뻗어 나왔다. 옆에서 긴장한 채 지켜보 던 아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팔이 고무줄 늘어나듯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북궁후의 몸을 휘감아 오는 속도는 기막히게 빨랐다. 아랑 이 놀래서 소리를 치려는 순간 북궁후의 신형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크크크, 제법이군!" 순식간에 그의 손은 원래의 길이로 다시 줄어 들었다. 천하의 온 갖 사악한 기운으로 뭉쳐진 듯 소름끼치는 동공이 이상한 광채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또다시 환사의 팔이 늘어나며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 순간 박쥐의 날개처럼 그의 겨드랑이에서 늘어난 팔을 따라 기다란 암 경(暗勁)이 형성되는가 싶더니 그 주위의 흙들이 핏빛으로 물들며 어망(魚網)처럼 쏜살같이 북궁후를 뒤덮어 갔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박쥐가 활짝 펴진 날개를 펄럭이면서 폭풍 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 검 1권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6 ━━━━━━━━━━━━━━━━━━━━━━━━━━━━━━━━━━━ ⑥ 북궁후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놀랍군! 천하에 저런 사공(邪功)이 존재했다니!' 내심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는 가볍게 쌍장을 휘둘렀다. 무형의 투 명한 암경이 뻗어나가며 마주오는 피구름 속을 일직선으로 갈랐 다. 순간 어망같은 혈류는 크게 확산되어 사방 십 장 주위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때 실로 전율스러운 광경이 벌어졌다. 사방으로 확산된 핏빛 가루에 스친 물체는 소리도 없이 녹아버리 지 않는가! 바위, 나무 등, 핏빛 가루의 사정권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물체가 순식간에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승소진, 천낭중 등은 급급히 뒤로 신형을 날리며 눈을 휩뜨고 있 었다. "이, 이게 뭐냐?" "독(毒)도 아니다!" "크크크!" 환사의 몸이 기괴무쌍하게 늘어나면서 또다시 북궁후를 향해 피바 람을 일으켰다. 방원 수십 장 내는 완전히 핏빛 혈광에 뒤덮였다. 북궁후도 예외없이 혈막에 갇히고 말았다. 천낭중과 아랑 등이 안색이 급변해 부르짖었다. "소야!" "대형!" 허나 그 순간 그들은 보았다. 북궁후의 허리에서 눈부신 백광(血光)이 치솟고, 허공을 달리는 뇌전(雷電)처럼 한 가닥 백광이 직하(直下)해 환사를 향해 내리찍 히는 것을 말이다. 일체의 변식(變式)을 배제한 오직 필살의 검(劍)이었다. 그 무엇 으로도 그 빠름과 절묘함을 표현할 수 없었다. 휘황한 검광이 허공을 수놓는 순간, 외마디 비명성이 허공의 적막 을 찢으면서 피분수가 폭죽처럼 터졌다. 환사의 몸이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동강이가 되어 바닥에 처 참히 나뒹굴고 있었다. 숨 한모금 몰아쉬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질 식할 것 같은 침묵속에 빠져 들었다. 모두의 크게 떠진 눈은 환사 의 양단된 동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피안개처럼 가라앉고 있는 핏빛의 가루에 의해 그의 옷자락과 갈 라진 동체가 서서히 녹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전개한 사공(邪功)에 의해 자신의 몸이 제물이 되어 녹아 내리고 있는 것이니 진정 끔찍한 일이었다. 북궁후는 지면으로 내려서며 그 광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눈 은 극히 무심했다. 그는 이제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투명한 검을 검집에 꽂았다. "가자!" 그들 일행은 분분히 신형을 날렸다. 이때 추린은 내심 간담이 서 늘해옴을 느끼고 있었다. '음, 만류교의 삼대환공 중 하나를 저렇게 간단히 처치하다니, 천 하를 몽땅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나이지만 그에 대해서만은 일푼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경이에 찬 눈으로 북궁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지면을 박찼 다. 낡고 으슥한 지붕 밑에서 이야기는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강호명숙대실록은 여러 가지 색깔의 글씨로써 거기 수록된 자들 의 비중을 나누었소." "비중?" "그것은 그 인물의 성격이나 야심,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한 강호 정세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오." "예를 들면 붉은 글씨는 일류고수이면서 야심을 품은 자(者), 여 기에는 대개의 사파(邪派)인물들이 속해 있었소." "그리고?" "은색(銀色) 글씨는 무림의 정세를 좌우할 수 있는 인물로, 여기 에는 그가 무공을 익혔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 무서움을 파해쳤 소." 모두들 진지한 표정으로 승소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문득 말없이 듣고만 있던 북궁후가 입을 열었다. "소진, 내가 알고자 했던 인물은?" 그가 알고자 하는 인물은 바로 승소진이 단 한 사람에 대해서만 모르고 있다고 했던 그 인물이 아닐까? 승소진이 말했다. "그는 금색(金色) 글씨의 구분에 들어 있었소." 북궁후가 눈에 이채를 띠며 짧게 물었다. "금색 글씨는?" "그들의 향방에 천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바로 당 대의 영웅(英雄)과 효웅(梟雄)을 말하는 것이오." "말해보게." 이때 모두의 시선은 약간 긴장된 채 승소진을 주시했다. 투령신옹 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의혹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쥐방울만한 귀신, 소야 북궁후가 모르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가 를! 승소진은 역시 책을 읽듯이 말했다. <천기신군(天機神君) 모용선학, 출신문파(出身門派) 불명. 출신에 엄청난 비밀이 있으리라 추측되 며 그 지닌 바 무공 내력 역시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음. 알려진 무공으로는 천령무황의 무공과 스스로 창안한 무수한 절기(絶技) 가 있으며, 가공할 마공(魔功) 또한 소유한 것으로 추측됨. 육십 년 전, 천하제패를 노리던 마라천무존(魔羅天武尊) 서문규를 축출하고 중원의 구성(救星)으로 등장, 천외신궁 외에 또다른 비 밀세력을 갖고 있음. 허나 그의 심중(心中)은 하늘도 모른다.> ■ 검 1권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7 ━━━━━━━━━━━━━━━━━━━━━━━━━━━━━━━━━━━ ⑦ "으음!" 승소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의미를 알 수 없는 무거운 신음이 여 러 사람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헌데 북궁후는 돌연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틀렸다. 그것은 진정한 천기신군에 대해 절반도 적지 못했다." 추린은 북궁후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말에 기이한 표정으로 북궁후를 쳐다 보았다. 두려움인지 감탄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그의 두 눈 속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추린은 문득 한 가지 의혹이 불길처럼 일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새 삼 북궁후를 바라보았다. 이 괴물같은 꼬마가 왜 천기신군에 대해 깊숙이 알고자 하는 걸까? 북궁후는 그에게 일별도 던지지 않은 채 승소진에게 재차 물었다. "소진, 그밖에 금색 글씨 속의 다른 인물은?" 승소진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천기신군 외에는 네 명이 더 있었소." <신기서생(神機書生) 서문유허. 마라천무존(魔羅天武尊) 서문규의 아들, 가공할 심계의 소유자로 서 그의 심기와 무공은 마라천무존 서문규를 능가함. 세외의 이십팔 개 세력을 이미 통일해 수중에 넣었음. 허나 아직 강호에 본격적인 활동을 펴지 않은 것은 천기신군을 의 식한 탓인 듯함. 현재 암중(暗中) 강호에 상권(商權)과 군소문파들을 잠식해 가고 있음.> 북궁후의 깊숙한 동공 속에서 번갯불같은 신광이 튀었다. '서문유허! 백부께서 말씀하셨지. 세치 혀만으로도 능히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라고, 이제 드디어 서서히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구나!' 그는 무심한 듯한 눈길을 승소진에게 던졌다. 그러자 다시 승소진 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 검 1권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8 ━━━━━━━━━━━━━━━━━━━━━━━━━━━━━━━━━━━ ⑧ <무오선사(武悟禪師). 소림삼천불(少林三天佛) 중 막내. 현재 백 년째 폐관연수 중임. 무공은 삼천불 중 제일 약하나 기실 소림삼천불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천기를 깨달아 심오한 지혜(知慧)와 선각(禪覺)의 경지에 이르러 있음.> <심마존(心魔尊), 혈륜마성의 혈륜마존 중 일마존(一魔尊)임. 심마존은 일대효웅(一 大梟雄)으로서의 다섯 가지 강점(强點)을 모두 갖추고 있다. 천하를 깨부술 가공할 마공(魔功), 무서운 심계(心計), 잔인극랄 한 성품, 패도적 야심, 그리고 영웅을 알아보는 눈이 그것이다. 심마존은 혈륜마성을 열기보다 천하를 독패하려는 흉심을 품고 있 다.> "어떻습니까 대형?" 이야기를 마친 승소진이 북궁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북궁후는 잠 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짐작대로다." 그는 승소진을 향해 말했다. "그럼 마지막 한 명은?" 그러자 승소진은 그의 특징인 원숭이 웃음을 지었다. "ㅋ, 그것은 누구보다 대형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 "바로 북궁후, 대형입니다." 북궁후가 아연해 하는 순간 승소진의 전음이 그의 귓가로 파고 들 었다. (그것은 십 년 전의 기록이었습니다. 아마도 투령신옹은 이미 오 래 전부터 대형을 주시해온 듯 합니다.) 일순 북궁후의 눈가에 미묘한 변화(變化)가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러나 입가에는 여전히 예의 담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원숭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추린에게 시선을 돌 렸다. "신옹의 안목은 놀랍구료." 추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클클, 과찬이오." "헌데 본인이 생각하건대 신옹께선 강호명숙대실록을 저술함에 있 어 한 가지 실수를 하셨소." 추린의 눈이 동그레졌다. "그것은 바로 신옹 자신에 관한 기술(記術)을 빠뜨린 것이오." "으음!" 추린은 순간적으로 가슴 밑바닥으로 한기가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 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허나 그는 이내 안색을 회복하고 입맛을 다셨다. "쩝쩝, 이 늙은이야 뭐 하찮은...." 북궁후의 입가에 냉혹한 한기가 스쳤다. "당신은 또 틀렸소. 신옹, 당신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야 심을 갖춘 권모가(權謀家)가 아니오?" 북궁후의 말에 추린은 익살스럽게 얼굴의 주름살을 꿈틀거리면서 말했다. "소협이 도와준다면야 천하에 그 무엇인들 못하겠소. 안그렇소? 하하하!" 추린의 대답은 북궁후의 질문을 인정하는 것 같기도 했고 부정하 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자연스럽게 북궁후 의 난처한 질문을 받아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궁후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단지 추린을 바라보며 한차례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추린은 애매모호한 미소로 대응하였지만 마 치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내심 섬뜩하였다. '으음, 이 애송이야말로 밖으로 드러낸 것보다 수십 배의 무서운 능력을 갖춘 복호잠룡(伏虎潛龍)이다!' 그는 힐끗 북궁후의 옆 얼굴을 훔쳐 보았다. '자칫하다간, 이 자때문에 지난 세월 애써 쌓아올린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구나.' 허나 그의 입가에는 곧 음랭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흐흐, 그러나 은령궁(銀令宮)이 문을 여는 날, 너는 우리의 제물 (祭物)이 될 것이다!' 이때 북궁후의 뇌리로는 한 사람의 영상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바로 귀래거에서 마주쳤던 천마협 사마기였다. '만일 이 자의 머리(智)와 사마기의 패도적인 힘(力)이 합쳐진다 면?' 갑자기 그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 를 저었다. ■ 검 1권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9 ━━━━━━━━━━━━━━━━━━━━━━━━━━━━━━━━━━━ ⑨ 한편, 죽어 있는 환사의 몸에서 이 순간 괴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펼친 사공에 의해 머리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 분의 신체가 핏물로 화해버린 환사. 양단되어 양쪽에 뒹굴고 있던 그의 머리가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 가. 감겨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돌연 눈을 번쩍 떴다. 뒤이어 나머지 한쪽 눈도 떠지면서 점차 소름끼치는 핏빛의 광채 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뿐이랴, 한줌의 핏물로 녹아있던 그의 몸이 꿈틀거리며 다시 형체 를 되찾고 있었다. 잠시 후, 소리도 없이 환사는 몸을 일으켰다. 경이롭게도 그는 다 시 살아나고 있었다. 핏물로 녹아버린 몸이 다시 뭉치면서 부활하 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덜 만들어진 그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음침한 괴소가 흘러나 오고 있었다. "크크크, 북궁후! 본좌가 상대해온 적수 중 가장 무서운 자였다. 허나, 크크크! 네 놈은 몰랐을 것이다. 이 환사가 사중생(死中生) 의 밀공(密功)을 익혔다는 사실을!" 환사의 신형은 한 무더기 혈무처럼 흐늘거리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기억해 둬라! 네놈은 오늘의 실수로 천추의 한(恨)을 씹게 될 것이다. 크흐흐!" 아아, 뉘라서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으랴! 환사의 신형은 모래에 물 스미듯 땅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환사의 숨겨진 사공기예(邪功奇藝)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북궁후의 시선은 달빛이 곤두박질치는 허공 한 점에 모아지고 있 었다. 그리고 이내 점점 강렬해지기 시작한다. 횃불같은 눈빛과 전신에서 폭출되는 신기어린 위엄에 중인들은 모 두 숨죽이고 그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순 북궁후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나직이 중얼거렸다. "풍운(風雲), 이제 풍운이 천하를 뒤덮을 것이다!" 아아, 풍운천하(風雲天下)! 드디어 이렇게 그 나래를 펼치기 시작 함이니.... ■ 검 1권 제11장 무황궁(武皇宮) 무너지다 ━━━━━━━━━━━━━━━━━━━━━━━━━━━━━━━━━━━ ① 북우산 중턱 위에는 한 채의 거대한 궁성이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회백색 웅장한 성채, 산등성을 휘감으며 산 세와 어울려 있는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건 축미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무황궁(武皇宮), 실로 나는 새도 근접치 못한다는 절대적 위엄을 지닌 철옹성이 아 니겠는가! 날씨는 지독히도 음울했다. 시커먼 먹장구름은 손에 잡힐 듯 낮게 깔려 있었고 음습한 바람이 당장이라도 폭우를 몰아올 듯한 기세 였다. 무황궁의 거대한 철문 앞에는 지금 여섯 명의 위맹해 보이는 흑포 위사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철퇴로 내려쳐도 끄덕도 않을 것 같은 강맹해 보이는 태도로 미루어 한결같이 뛰어난 고수임을 짐 작케 했다. 허나 자연의 위세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들의 우람한 어깨 가 움츠러 들고 있었다. "에이, 날씨 한번 더럽군!" "비라도 오려나?" 덥석부리 장한이 낯을 찌푸리며 멀리 허공을 응시했다. 헌데 그 순간 그의 눈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점(點), 하나의 점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허공 저쪽에 찍혀 있지 않은 가? 예의 한 점은 덥석부리 장한이 보고 있는 그 순간 점점 확대 되며 무황궁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덥석부 리 장한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저 친구, 표정이 왜 저래?" 더벅부리 장한의 기이한 표정을 발견한 동료 한 명이 의아해 하며 눈을 들었다. 덥석부리가 눈을 고정시키고 있는 허공쪽이었다. 이 내 그의 눈에도 경악의 빛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들은 본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도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가까 워지며 또렷히 드러나기 시작한 한 인영의 모습을 말이다. 눈처럼 흰 백의를 입은 미청년이다. 어깨에는 흰 피풍을 펄럭이고 있다. 황홀하리만큼 수려준미한 얼굴에 유심(有心)인 듯, 무심(無心)인 듯 떠도는 괴이한 기운은 기이하게도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위사들은 일순 자신들의 혈관이 차디차게 식어감을 느꼈다. 백의청년은 미끄러지듯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는데 그 속 도는 섬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일순 덥석부리 장한은 이 정체불명의 공포를 떨어버리려는 듯 버 럭 소리쳤다. "멈춰라!" 나머지 오 인 역시 분분히 몸을 날려 백의청년의 앞을 막아섰다. 백의청년의 입에서 냉혹한 음성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물러나라!" 순간 흑포위사들은 질식할 듯한 위압감을 느끼며 한꺼번에 소리쳤 다. "네, 네놈은 누구냐?" 문득 백의청년의 시선이 허공을 향하며 심유무심한 음성이 그의 입술을 떨치고 나왔다. "화령!" 그 뿐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백의청년의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듯 돌연 한 가닥 뇌전이 먹구름을 뚫고 작렬하면서 엄청난 열기가 여섯 명 의 장한들을 휘감아 버렸다. "크아악!" 창졸간에 위사들의 몸은 수십 갈래로 찢겨 궁문 앞에 흩어졌다. 실로 전율스러운 일이 아닌가. 백의청년은 바로 북궁후였다. 북궁후는 앞으로 걸어나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앞을 막지 마라. 거역하는 자는 죽는다." 마치 지옥염왕의 음성처럼 무심냉막했다. 거대한 묵철강문( 鐵鋼門)이 그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다시 북 궁후는 허공에 대고 나직이 외쳤다. "화령!" "예!" 허공에서 정중한 대답이 울린 순간, 쐐애액! 하는 섬전이 일직선 으로 묵철강문을 후려쳤다. 빠지직! 하는 음향과 함께 석자 두께 의 묵철강문이 그대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커다란 구멍 이 뻥 뚫려 버렸다. 북궁후는 다시 안으로 진입했다. "무황궁, 너희들의 야욕을 내 이미 짐작하고 있다. 없애리라!" 그의 음성에는 차가운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궁내의 드넓은 광장에는 시커먼 흑포인들이 두텁게 포진해 있었다. 줄잡아 오백 여 명, 실로 기민한 대응이었다. 음풍이 몰아치는 궂은 하늘 아래 그들의 기세는 실로 하늘을 쪼갤 듯했다. 북궁후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쓸어보았다. 그의 눈이 번쩍 했다. 그들중에 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 검 1권 제11장 무황궁(武皇宮) 무너지다 -2 ━━━━━━━━━━━━━━━━━━━━━━━━━━━━━━━━━━━ ② 철탑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턱끝엔 팔자(八 字) 수염이 펄펄 날리는 호안(虎眼)의 팔순 가량의 백포노인이었 다. 사방을 압도할 듯 우람한 전신에선 산악같은 기개가 뻗어나오 고 있었다. "놈, 네놈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잘못 들어왔다. 본궁의 침입자는 절대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노인은 한 발 나서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북궁후의 입가에 얼음보다 더 차가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는 대뜸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노인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호랑이같은 눈이 부릅떠졌다. '이,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놈이!' 생각같아서는 당장에 쳐죽이고 싶었지만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고 어차피 살려서 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므로 그는 잔인하게 미 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노부는 본궁의 총관인 묵모(墨某)이니라." 북궁후가 빙긋이 웃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후후, 탑천사존(塔天邪尊) 묵양(墨楊)이로군." - 탑천사존 묵양. 나이 이미 백이십 세, 팔 척 거구에서 폭풍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 의 벽력천강(霹靂天剛)은 너무나 유명했다. 그는 이미 육십 년 전부터 천하를 떨어울리는 정사백대고수의 반 열에 올라있는 고수였다. 허나 북궁후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궁주를 불러오너라." 너무나 광오한 기세였다. 묵양의 두 눈에선 무시무시한 정광이 불 화살처럼 쏟아졌다. "노옴!" 천둥같은 노호(怒號)와 함께 거구가 번뜩이며 북궁후를 덮쳤다. 솥뚜껑같은 쌍장이 칼날처럼 세워지면서 스물일곱 가닥의 강기( 氣)가 쏟아져 나왔다. 태산이라도 가루로 날려버릴 듯한 기세였 다. 이때 성난 맹수처럼 달려드는 묵양의 공세를 맞이한 북궁후는 놀 라기는커녕 오히려 눈가에 은은한 노기까지 피어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겁없이 날뛰는 하룻강아지를 보는 사자(獅子)의 노여움같 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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