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관동의 군호들은 객점에서 돼지와 양을 잡고 크게 잔치를 벌이게 되었는데 석파천을 굳이 수석에 앉혔다. 정당은 정불사와 자기 관계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매번 고삼 낭자 와 범일비가 이야기를 빙글 돌려서 석파천과 그녀의 사문 내력을 알 아보려고 했을 적에는 언제나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군호들은 그들이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더 묻 지를 않았다. 고삼 낭자는 석파천과 정당의 사이가 매우 친밀해 보이고 정당이 석 파천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 더욱 두 눈에 정이 담뿍 서려 있는 것 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은공(恩公)과 이 소매는 아마도 십중팔구 야간도주를 한 한 쌍의 연인인 것 같구나. 우리들은 그야말로 눈치없이 이들 두 사람의 좋은 일을 방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범일비 등은 관동에서 평소 대단한 위엄을 토하고 있었으며 그야말 로 불가일세(不可一世)로 날뛰었는데 이번에 중원으로 들어와서는 정 불사와 일전을 벌인 결과 하마터면 전멸을 당할 뻔했는지라 마음속으 로 여간 꺼림칙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정평은 자기의 힘이 되는 제자가 죽었는지라 더욱더 마음 이 우울했다. 그러나 석파천과 정당의 앞에서는 억지로 정신을 차리 고 기운을 내어서는 배불리 술과 음식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회석이 파한 이후에 고삼 낭자는 범일비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석파천과 정당의 팔을 잡고서는 한 칸의 객실로 들여보냈 다. 범일비는 씩 웃고서는 물러갔는데 고삼 낭자는 웃으며 한마디를 했 다. [은공! 우리 이 새색시가 예쁘지 않나요?] 석파천은 얼굴을 붉히고 정당을 한번 바라보았다. 정당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두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추 파를 던질 것 같았다. 석파천은 그만 그와 같은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쿵 뛰는 것을 느끼 게 되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동시에 머리를 돌리고 각기 뒤로 두 걸음을 물러 서서는 벽에 기대어 섰다. 고삼 낭자는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오늘 밤 두 분은 동방화촉을 밝히게 되었는데 이토록 부끄 럼을 타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이와 같이 멀찍기 떨어져 있는 것은 그야말로 손님처럼 서로 공경하자는 뜻인가요?] 그리고 왼손으로 방문을 닫으면서 오른손을 휙 하니 휘둘러 한 자루 의 비도를 날려보내 휘황하게 켜진 촛불의 심지를 잘랐다. 그런데 그 비도는 심지를 자르고도 기운이 뻗쳐서 조금도 누그러짐이 없이 창문 으로 날아나갔다. 이렇게 되자 방은 이미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고 기분이 좋아진 고삼 낭자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삼가 두 분이 백 년 동안 금실좋게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시기 를 빕니다.] 그리고는 꽝 하니 방문을 닫아주었다. 석파천과 정당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게 되었고 가슴속으로는 잔잔 한 물결이 일듯 흥분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별안가 석파천은 다시 수아를 떠올렸다. (수아가 나의 이 광경을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화를 내게 될 것이 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녀는 그때부터 나의 아내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다?) 갑자기 마당에서 한 사내의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영웅호걸이라면 우리 칼과 창을 꼬나쥐고 남이 보는 앞에서 한바탕 붙어보자구! 슬쩍 몰래 한 자루의 비도를 날려보내다니 그러고서야 무슨 호걸이고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그야말로 구웅(狗熊)이 지.] 정당은 이때 가볍게 콧소리를 내며 웃는 듯하더니 석파천 앞으로 다 가왔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잡게 되고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 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고삼 낭자는 그 비도로서 우리의 촛불을 꺼주자는 것인데 그만 남 의 오해를 받게 되었구나.) 석파천이 입을 열고 해명을 하려고 했을 적에 한 부드럽고도 매끄러 운 손이 와서 그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때 마당에서는 그 사내가 계속해서 욕지거리를 했다. [이 비도는 정말 음흉하고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보아 십중 팔구 관동의 그 염치없는 계집애가 사용하는 것 같구나. 소문에 들으 니까 요동에는 무슨 만마장이 있고 고씨 성을 가진 과부가 무공을 제 대로 배우지를 못해 걸핏하면 비도를 던져 사람을 암살한다고 들은 바가 있지. 우리 중원의 강호 동도(同道)들은 그래도 그와 같은 형편 없는 암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고삼 낭자는 자기가 던진 비도가 남에게 오해를 받게 되자 약간 모 욕적인 말을 듣고도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덮어두려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그 욕지거리는 더욱더 심해지고 바로 자기 자신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나의 비도를 알아보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저 아무렇게 나 오는대로 씨부렁거려 본 것일까?) 그런데 그 사내는 더욱더 신이 나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관동이라는 고장은 너무나 곤궁해서 도적들이나 마적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고 들었다. 빌어먹을 무슨 만도문(慢刀門)인가 하는 문파의 칼은 빠르게 휘두르지를 못해 오로지 몽한약(蒙汗藥)으로 사람을 해 친다는 소문이다. 거기다가 청사문(靑蛇門)이라는 문파에서는 몇 마 리의 독사들을 가지고 문전걸식을 한다고 들었다. 거기다가 범가 성 을 가진 사람은 일비낙수(一飛落水)라고 하던가 두 자루의 똥을 푸는 막대기를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웃다가 입이 삐뚤어질 지경이 군.] 그 사람이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말을 듣게 되자 관동의 군 호들은 그만 하나같이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 사내가 바로 자기네들 일행을 노리고 찾아온 사람임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 다. 여정평은 손에 자금도를 들고서는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그러고 보니 한 왜소한 사내가 손짓 발짓을 해가며 신이 나서 욕지 거리를 하고 있었다. 여정평은 호통을 내질렀다. [친구! 당신이 이곳에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은 무슨 의도 이지?] 그 사람은 제법 큰소리를 쳤다. [무슨 의도가 있다는 것인가? 노부는 관동 사람들의 납작한 골통을 보기만 하면 속으로부터 화 치밀어 하나하나 그 머리통을 잘라서는 대들보에 걸어놓고 싶은 심정이다.] 여정평은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여 보였다. [매우 좋다. 납작한 골통이 바로 이곳에 있으니 어디 한 번 쳐보시 지.] 그리고 몸을 흔들하며 어느덧 그의 옆으로 다가들면서 자금도를 들 어 옆으로 쓸어쳤다. 대뜸 그 사내는 허리깨로부터 두 동강이가 나게 되었고 상반신은 일 장밖으로 날아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 바람에 온 마당에 선혈을 뿌 리게 되었다. 이때에 범일비와 풍량, 그리고 고삼 낭자 등은 모두다 마당으로 나 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 왜소한 사내가 어떤 신기한 무공을 펼 칠 것인지 심지어 여정평을 두 동강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주시 를 했던 것인데 그와 같은 광경에 그만 놀람과 의아함에 입이 딱 벌 어지고 말았다. 여정평으로서는 더욱더 놀라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 사내는 큰소리를 치며 관동 사대문파의 무공을 한푼어치의 가치 조차 없는 것으로 매도했는데 그 점으로 보아 놀라운 재간이 없다 하 더라도 여정평과 몇 수는 겨루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전 혀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그들로서는 천만뜻밖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군호들이 정히 어처구니가 없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을 때 에 갑자기 지붕 위에서 그 누가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훌륭한 재간이군! 훌륭한 재간이야. 관동의 쾌도문 여 대협은 한 칼에 차를 나르고 밥을 나르는 점소이를 두 동강이 내었군.] 관동의 군호들은 고개를 쳐들고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 사람이 몸에 잿빛 장포를 걸치고 옆짐을 지고서 지 붕 위에 서 있었다. 군호들은 즉시 여정평이 죽인 사내가 바로 이 객점의 점소이이며 틀 림없이 저 지붕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은자를 받고 마당으로 나서서 는 터무니없는 욕을 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사내는 은 자 몇 푼에 목숨을 잃은 셈이지만 진정 어처구니 없는 결과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고삼 낭자는 오른손을 휙휙 하니 휘둘러 세 자루의 비도를 지 붕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로 세차게 쏘아보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왼손을 뻗치더니 대뜸 한 자루의 칼자루를 거머잡 고서는 왼쪽으로 몸을 날려 나머지의 두 자루를 피하더니 길게 웃음 을 터뜨렸다. [우헤헤헤! 관동 사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 이곳까지 와 주셨으니 아 예 우리들은 이 고을 북쪽 십이 리 떨어진 소나무 밭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만약에 오기 싫다면 그만둬도 좋다네.] 그리고 그는 범일비 등의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날려 지붕 위에서 길로 내려서더니 나는 듯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고삼 낭자는 물었다. [그곳으로 가야 할까요?] 범일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이 누구이든 간에 우리에게 도전을 해온 이상 우리들로서는 반드시 그 장소로 나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오.] 고삼 낭자는 맞장구를 쳤다. [맞았어요. 어찌됐든 간에 우리들로서는 관동 무림의 명예를 땅바닥 에 떨어뜨릴 수는 없는 거예요.] 그녀는 석파천의 창밑으로 다가가서는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석 은공, 그리고 소매. 우리들은 남의 도전을 받고 먼저 떠나게 되 었소. 내일 앞쪽 고을에서 다시 만나 함께 술을 마시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으나 석파천의 대답소리를 들을 수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이미 살인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약간 일이 번거롭게 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외다. 그러니 두 분 역시 일찌감치 출발을 해서 누를 입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구려.] 그녀는 석파천과 정당 두 사람에게 함께 자기네들이 약속한 장소로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낮에 정불사를 상대로 격전을 벌이게 되었 을 때에 석파천이 그들 네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만약에 다시 석파천에게 함께 가자고 초청을 하게 된다면 마치 그의 보호를 애걸 하는 것 같아질 것이고, 또 그렇게 됨으로써 관동 사대문파가 너무나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알려지게 될까봐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 다. 이때 객점에서는 점소이가 피살된 것을 알고는 모두 다 왁자하니 떠 들면서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강인(强人)들이 사람을 죽였소! 목숨을 구해주시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급히 외쳤다. [빨리 관가에 알리시오!] 그러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직이 당부하며 말했다. [아무 소리 하지 마시오. 강인들은 아직 떠나지 않았소.] 석파천은 나직이 물었다. [어떻게 하지?] 정당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어찌됐든 간에 이곳에서는 머물수 없게 되었으니 그들을 따라 가서 구경이나 하도록 해요.] 석파천은 걱정스러운듯 말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겠구려. 혹시 당신의 넷째 할아버지 가 아닐까?] 정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우리 두 사람은 얼굴을 내밀어서는 아니 되어요. 어쩌면 우리 할아버지일지도 몰라요.] 석파천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놀라 말했다. [그렇다면 야단났구려! 나는……나는 역시 안 가겠소.] 정당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바보! 만약에 우리 할아버지라면 우리가 뺑소니를 치면 될 것이 아 니겠어요? 지금 당신의 무공이 이토록 강하니 할아버지도 당신을 죽 을 수가 없어요. 나는 걱정되지 않는데 당신은 되려 겁을 내는군요.] 그와 같은 말을 하는 사이에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고 관동의 군호 들이 잇달아 객점에서 나서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 고삼 낭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곳에 이백열 냥의 은자가 있다. 열 냥은 숙박비이고 이백 냥은 그 점소이의 장례비와 집안을 돌보는 비용이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산동의 마적인 왕대호(王大虎)이니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 록 하라.] 석파천은 나직이 물었다. [어째서 또 산동의 마적 왕대호가 툭 튀어나오는 것이오?] 정당은 설명을 했다. [그것은 가짜예요. 관가에 알리게 되었을 때에 변명을 하기 좋게 하 느라고 그러는 것이죠.] 그리하여 두 사람도 객실에서 나오게 되고 객점을 나서게 되었는데 객점의 문앞 말뚝이 있는 곳에 두 필의 말이 매여 있었다. 그들은 관동의 군호들이 자기네들에게 남겨준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즉시 말에 올라타고는 북쪽을 향해 달려갔 다. 석파천과 정당은 멀리서 관동의 군호 뒤를 따랐다. 약 십여 리를 나 가게 되었을 적에 앞쪽에 새까맣게 소나무숲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곧이어 범일비가 낭랑히 외쳤다. [어느 친구분이 기다리고 있으시오? 관동의 만마장과 쾌도문, 청룡 문, 그리고 학필문이 삼가 인사를 드리오.] 두 사람은 몸을 날려서는 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허리를 구부리 고 관동 사호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다가 마침 한 커다란 바 위가 있는 것을 보고 그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범일비 등은 말발굽 소리를 듣고서는 두 사람이 따라온 것을 알고 있었으나 여전히 아는 체를 하지 않고 다만 눈을 들어서는 소나무 밭 쪽을 살폈다. 이때 네 명의 장문인들은 앞쪽에 서 있게 되고 십여 명의 제자들은 일 장의 간격이 떨어진 뒷쪽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소나무밭은 조용하니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현달은 그렇게 밝지 못한 편이었는데 온 들판에 늘어서 있는 소나 무밭에 반사되어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푸른빛을 띄우고 있었다. 한참 후 숲속에서 피리소리가 들리고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기 한 줄 의 흑의인들이 달려나왔는데 한 줄에 족히 오륙십 명은 되었다. 백여 명이나 되는 그들은 관동 군호 및 석파천과 정당의 등뒤로 돌 아가 포위를 한 채 서서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무 기를 뽑아들 자세였다. 곧이어 숲속에서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걸어나왔다. 그들 역시 한 일자로 늘어섰다. 석파천은 그들을 보고 엇 하고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옆에 있는 정당이나 들었을 뿐 아무도 주의하지 못했다. 나타난 사람들은 꼭 열 명인데 바로 장락방의 내오당 정부 향주들로 미횡야, 진충지, 전비 등이었다. 이 열 사람이 줄을 지어 서자 다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바로 착수회춘 패해석이었다. 그는 한 일자로 늘어선 사람들 앞으로 두세 걸음 나서더니 잔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관동의 사대문파 장문인들께서 왕림하셔서 폐방의 형제들은……어 흠, 어흠……감히 총타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특별히 이곳까지 멀리 영접을 나왔소이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는 너무나 늦게 도달하셨기 때문에 폐방의 아래 위 사람들 모두 매우 기다리기에 초조해졌소이 다.] 범일비는 그가 말을 하는 사이에 연신 기침을 하는 소리를 듣고 무 림에서 크게 이름이 나 있는 패해석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따 라서 상대방이 바로 자기네들이 이번에 찾아나섰던 장본인이라는 것 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으나 장락방의 세력이 대단한 것을 보고 되려 마음을 놓았다. (상대를 해야 할 사람들이 장락방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생사영욕 (生死榮辱)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할 수 있을 것이며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불사 등과 귀찮게 얽혀드는 것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불사를 머리에 떠올리게 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패 선생께서 멀리까지 나와 주셨으니 뭐라고 고마운 말 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불초는 와호구(臥虎溝)의 범일비로 소이다.] 곧이어 그는 여정평과 풍량 및 고삼 낭자 등 세 사람을 소개시켜 주 었다. 석파천은 그들이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인사말을 나누는 것을 보고 는 안심을 했다. (그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로구나.) 그리하여 그는 나직이 정당에게 말했다. [모두 한 집안 사람이구려. 우리 나가서 만나보도록 합시다.] 정당은 그의 팔을 잡으며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 본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이때 범일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지난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귀방을 찾아 인사드리려고 했 으나 뜻밖에도 도중에 어떤 일로 인해서 지체되는 바람에 그만 늦었 으니 아무쪼록 패 선생과 여러 향주들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패해석은 정중히 그 말을 받았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하지만 폐방의 석 방주께서는 며칠 동 안 삼가 기다렸으나 여러분들이 왕림하는 것을 볼 수 없게 되자 여러 분들이 이미 약속한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는 줄 알고 또한 다른 볼 일이 있어 다시 더 기다리지 못했소이다.] 범일비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석 영웅호걸께서는 어디로 거셨는지요? 솔직히 패 선생에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만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중원땅으로 온 것은 귀방 의 석 영웅호걸과 한 번 만나자는 데 있었소이다. 만약에 석 영웅을 만나보지 못한다면……그야말로……우리들로서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외다.] 패해석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는 몇 번 기침을 했을 뿐 그 말에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범일비는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약간의 관동에서 나는 토산품과 몇 장의 초피(貂皮), 몇 근의 인삼을 석 영웅과 패 선생 그리고 여러 향주들에게 드리고자 하 나이다. 너무나 약소해서 경의(敬意)가 되지 않지만 그저 천리 먼 길 에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성의를 봐서라도 여러분들은 웃으면서 받 아주시기를 바라오이다.] 그리고 그는 왼손을 들어 한 번 흔들었다. 그러자 즉시 세 명의 제 자가 말 옆으로 가더니 말 등에서 세 개의 보따리를 끌어내리고는 공 손히 패해석의 앞에다 갖다놓았다. 패해석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이건 너무나 황송하구려. 여러분들께서 이토록 두터운 예 물을 주시니 진정……어흠, 어흠……진정 거절한다는 것은 불경스러 운 일일 것이고 받자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 고맙소이 다.] 미횡야 등은 세 개의 보따리를 받아서 저쪽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범일비는 또 자기의 등에 지고 있던 물건들 가운데서 한 조 그마한 보따리를 끌어내려서는 두 손으로 받쳐들고 세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낭랑히 입을 열었다. [귀방의 사도 방주께서는 옛날 관동에 오시게 되었을 적에 불초및 이 세 분 친구들과 무척 사이좋게 지냈으며 사도 방주께서 예쁘게 보 아준 덕택으로 우리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 정도로 깊은 교분을 맺 게 되었소이다. 이곳에는 한 뿌리의 형태를 갖춘 천년묵은 산삼으로 말한다면 복용을 하게 되었을 적에 수명을 누리게 되고 몸을 건강하 게 하는 효능이 있는 등 그야말로 매우 희귀한 물건이라 할 수가 있 는데 사도 큰형님에게 전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그리고 그는 두 손으로 보따리를 받쳐들고 패해석을 바라볼 뿐 얼른 보따리를 디밀지 않았다. 석파천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또 한 명의 사도 방주가 있다는 것일까?) 이때 패해석은 몇 번 기침을 하고 또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 었다. [어흠, 어흠……아……폐방의 전방주였었던 사도 형님으로 말하면 어흠 어흠……몇 년전 한 가지 불쾌한 일로 인해서 그만 낙심을 한 나머지 다시는 방의 일을 돌보기 싫어하게 되었소이다. 따라서 방의 커다란 일은 모두다 석 방주에게 맡기게 되었고 사도 형님께서……그 어르신께서……어흠 어흠……산속으로 들어가 은거하게 되었고 오래 전부터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 그렇지 않아도 방의 옛날부터 자리를 같이 해온 오래된 형제들은 모두다 매우 그리워하고 있는 편이지요. 따라서 여러분들의 이 두터우신 예물을 그 어르신의 손으로 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수월하지 않을 것 같소이다.] 범일비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도 형님께서는 어느 곳에 은거하고 계시며 또 어인 일로 은퇴를 하셨는지 모르겠구려.] 말뜻은 점차 엄해지는 것 같았고 은연중 다그치는 뜻이 서려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패해석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불초는 그저 사도 방주의 부하로서 그 어르신의 사사로운 일에 대 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많지 않소이다. 범 형 등 몇 분이 사도 방주 와는 그야말로 목숨을 같이 할 수 있는 교분을 가지고 있다하니 불초 로서는 정히 장락방이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되었을 무렵에 사도 방주 께서 갑자기 그 방주의 무거운 짐을 석 방주에게 내맡기게 되었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소이다.] 이렇게 되자 주객이 전도하게 되었으며 범일비의 다그치는 듯한 언 사를 반박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범일비로 하여금 좀처럼 대답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범일비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건……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소이까?] 패해석은 입을 열었다. [사도 방주께서 무거운 임무를 벗게 되었을 때 뭇 형제들은 석 방주 의 인품이나 무공에 대해서 그야말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다 만 그의 나이가 무척 젊고 무림에서는 또 아무런 명망이 없었기 때문 에 석 방주가 군호들을 인솔한다는 데에 대해서 솔직히 말해 모두들 마음속으로 약간 승복할 수 없는 심정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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