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행(김용) - 74편 (74/82)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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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74편 (7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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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아무리 사방을 시력을 다해 둘러보아도 바다에는 한 척의 배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배를 타고 협객도에서 보내온 배를 뒤따라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사 노파는 놀람과 분노에 손을 뻗쳐서는 그 사내의 정수리를 후려치려고 했으나 손이 반쯤 떨어지게 되었을 때에 다시 멈추 며 석파천에게 당부했다.
[제자야, 너는 구리패를 나에게 주려므나.
내가 너 대신 가야 겠다.
이 할망구는 어찌됐든 간에 늙은 미치광이와 함께 죽어야 겠다.] 그 황의의 사내는 그 말을 받았다.
[도주께서는 만약 사람을 잘못 안내하여 온다면 소인을 참하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소인의 부모와 처자식마저도 누를 입게 되어 모조리 참수를 당하게 되리라는 영이 계셨소이다.] 사 노파는 노해서 그 말을 받았다.
[참하라면 참하라지 뭐가 대수로운가?] 그러나 말을 해놓고 보니 그렇게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이 녀석에게는 그야 말로 큰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지.' 그와 동시에 그녀는 즉시 한 계책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제자야, 그렇다면 너는 장락방의 방주 자리를 나에게 양보해 다오! 내가 방주라면 이 사람이 사람을 잘못 맞아가는 일은 없 을 것이다.] 석파천은 망설였다.
[그건……아무래도……] 그 황의의 사내는 그 말을 가로채듯 입을 열었다.
[상선벌악의 두 사자께서는 장락방의 방주가 나이 겨우 약관의 젊은 영웅이며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할머니가 아니라고 분 명한 설명이 있었소이다.] 사 노파는 노해서 고함을 질렀다.
[개방귀 같은 소리 하지 말게! 자네가 또 어떻게 내가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내 나이는 비록 많 지만 덕망은 하나도 높지 않네!] 그 황의의 사내는 빙긋이 웃더니 곧장 바닷가로 가서는 배의 밧줄을 풀었다.
사 노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좋다.
제자야, 네가 가거라.
그러나 너는 이 사부의 한마 디를 들어보아라.] 석파천은 공손히 대답했다.
[물론 사부님의 분부를 공손히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사 노파는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만약에 한 가닥의 생기(生機)라도 보인다면 너는 한사코 스스 로 탈출해서 도망쳐 오도록 해라.
할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스 스로 막다른 곳에 빠져드는 일이 없도록 하란 말이다.
이것은 이 사부의 엄명이니 결코 어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석파천은 아연해져서는 말똥말똥 사 노파만 쳐다보았다. '어째서 사부님께서는 그녀의 남편을 구하지 말라는 것일까? 설마하니 그녀는 마음속으로 아직도 미워하는 마음을 가라앉히 지 못했다는 것일까?' 이와 같은 생각과 더불어 할아버지는 반드시 구해야 된다는 생 각에 사 노파의 그와 같은 신신당부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 노파는 다시 당부를 했다.
[너는 가서 늙은 미치광이에게 내가 이곳에서 삼 개월간 기다 리겠다고 해라.
그리하여 명년 이월 말까지 만약에 이곳으로 달 려와 나와 만나주지 않는다면 나는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버릴 터이니 다시는 벽라산으로 가라는 등의 엉티리 말을 하지 말라 고 해라.
그렇지 않을 때 나는 죽어 악귀가 된다 하더라도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석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수아는 말했다.
[오라버니, 나……나 역시도 마찬가지예요.
이곳에서 오라버니 를 삼 개월 동안 기다리겠어요.
만약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바로……할머니를 따라 바다에 뛰어들고 말겠어요.] 석파천은 마음속으로 흐뭇한 한편 또한 처량하고도 괴로움을 느끼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수아는 그럴 필요가 없소.] 수아는 한사코 말했다.
[나는 그러겠어요.] 그 한마디의 음성은 매우 나직했으나 조금도 후회하지 않겠다 는 굳건한 뜻이 가득 서려 있었다.
민유는 입을 열었다.
[소형제, 아무쪼록 무사히 돌아오기를 모두 이곳에서 빌어주겠 네.] 석파천은 공손히 대답했다.
[석 부인께서도 몸 보중하시고 아들 때문에 걱정을 하지 마십 시오.
그는 사 선생을 따라갔으니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장락방의 방주는 가짜이니 어쩌면 저들이 저를 되돌려 보내줄지도 모릅니다.
장 삼과 이사는 또 저와 의형제들이니 정말 위급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이 제가 죽는 것을 보고도 구해주지 않을리가 없을 것입니 다.] 민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쪼록 그렇기를 바라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젊은이는 무림의 인심이 얼마나 험악하다는 것을 모르는구 나! 그와 같은 결의형제를 그 어찌 진정으로 받아들이겠는가?' 석청 역시 한마디 당부를 했다.
[소형제, 섬에서 만약에 그 누가 손을 쓰게 되었을 적에 자네 는 내력을 돋우고는 우격다짐으로 싸우되 무슨 초식이고 도법이 고 아랑곳할 필요가 없네.] 그는 석파천의 내력이 놀라우니 만큼 한가닥의 생기는 바로 그 내력에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었다.
석파천은 이번에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석 장주께서 지도해 주신 말씀에 사의를 드립니다.] 백자재은 그의 손을 잡고서는 말했다.
[사위, 우리는 이제 한집안사람이네.
우리 부친으로 말하면 연 세가 많으시니 자네가 반드시 많이 돌보아줘야 할 것이네.] 석파천은 그가 자기를 사위라고 불러주자 그만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대답했다.
[그 점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자학과 제자면 그리고 양자진 세 사람은 표현은 안 했 지만 고소하게 잘 됐다는 심정에 가득 사로잡혀서는 똑같이 생 각을 했다. '삼십 년 동안 이미 세 패의 무림고수들이 협객도로 떠났으나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
네 녀석도 머리 셋 달리 고 팔이 여섯 달린 사람이 아닌 만큼 어찌 예외가 될 수 있겠는 가?' 하지만 그들은 각기 조심하라느니 아무쪼록 장문인을 잘 돌봐 달라느니 하는 유의 인사치레의 말을 한마디씩 했다.
즉시 석파천은 여러 사람들과 헤어져서는 모래바닥에 들어서게 되었다.
뭇 사람들은 모래사장가까지 전송을 했는데 수아와 민유 두 사 람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사 노파는 갑자기 그 황의의 사내 앞으로 다가서더니 철썩 하 니 그의 따귀를 세차게 때리고는 호통을 내질렀다.
[자네는 윗어른에 대해서 무례하게 행동했으므로 좋고 그른 것 을 알도록 해주는 바일세.] 그런데 그 사람은 반격을 하지 않고 얻어 맞은 뺨을 어루만지 며 빙그레 웃더니 조그만 배 위로 올랐다.
석파천은 뭇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고 그 사내의 뒤를 이어 배에 올랐다.
그 조그만 배는 두 사람을 태우게 되자 뱃전이 바닷물과는 이 미 몇 치도 되지 않는 곳까지 이르게 되었다.
진정 한 사람도 더 태울 수 없는 배였다.
그리고 천만다행인 것은 지금이 겨울철이라는 것이었다.
겨울 철에는 남해에 바람이 자고 물결이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그렇 지 않고 조금이라도 물결이 일게 된다면 조그만 배는 뒤집혀지 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협객도에서 동짓날을 택하게 된 것은 바로 어쩌면 그런데에 이 유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사내는 노를 몇 번 저어서는 배를 모래사장에서 떼어놓더니 뱃머리를 돌렸고 곧이어서는 하나의 누런 세모꼴의 돛을 올리는 것이었다.
돛은 즉시 천천히 불어오는 북풍을 싣고 남쪽으로 나 갔다.
석파천은 북쪽을 바라보았다.
사 노파와 수아 등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들은 바닷가의 벼랑에 서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 다.
그러다가 점점 그 사람들은 조그마한 검은 점으로 변하더니 끝 내 다시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밤이 된 이후 배는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흘째 되는 날 따지고 보면 바로 동짓날인데 그 사내는 앞쪽 의 까맣게 보이는 선(線)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것이 바로 협객도이외다.] 석파천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리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마음은 긴장됐고 가슴은 쿵쿵 뛰었다.
다시 한 시진 가게 되었을 때 섬에 높다랗게 솟아 있는 돌산을 볼 수가 있었다.
산에는 울창하게 나무들이 자라나 있었다.
신시 패(牌) 무렵에 조그만 배는 섬 남쪽의 바람을 등진 곳에 닿게 되었다.
그 사내는 정중히 말했다.
[석 방주께서는 뭍으로 오르십시오.] 섬 남쪽은 바로 넓은 모래사장이었다.
동쪽 벼랑 아래에 사십 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석파천은 속으로 짚히는 바가 있었다. '이곳의 배들이 적지 않으니 섬에서 목숨을 건지게 된다면 이 곳으로 도망쳐와 한 척의 조그마한 배를 빼앗아 탄다면 위험에 서 벗어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그는 뭍으로 올랐다.
그 사내는 밧줄을 들고 뭍으로 오르더니 밧줄을 커다란 바위에 감아매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소라를 꺼내 우우 하고 불었다.
얼마 후 산 뒤쪽에서 네 명의 사내가 달려나왔다.
한결같이 누 런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석파천 앞으로 달려오더 니 허리를 구부렸다.
[도주께서는 영빈관에서 삼가 석 방주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가보시지요.] 석파천은 백자재가 걱정되어 물었다.
[설산파의 장문인 위덕 선생은 이미 도착하셨소?] 앞장을 선 황의의 사내가 대답했다.
[소인은 전문적으로 석 방주를 돌보도록 지정이 되어 있기 때 문에 다른 사람의 일은 잘 모른답니다.
석 방주께서 영빈관에 이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앞장을 서서 걸어갔으며 석파천은 뒤를 따랐다.
나머지 네 명의 황의의 사내들은 칠팔 보 정도 떨어져 따라오 고 있었다.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자 양쪽은 모두 숲속인데 한 가운데로 산 길이 뚫려 있었다.
석파천은 주위의 경치를 유심히 살폈다.
도망칠 때 길을 잃지 않으려면 눈에 익혀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수 마장을 걸어 들어가게 되자 바위들이 어지럽게 서 있는 산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왼쪽은 깊은 낭떠러지로 세찬 산개울 물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절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곧이어 길은 벼랑을 따라 오르게 되었는데 두어 번 모퉁이를 돌게 되자 십여 장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있었 다.
아마도 그 폭포가 바로 산개울의 수원지인 것 같았다.
길을 안내하던 그 사내는 길 옆 한 그루 커다란 나무 뒤에서 기름 먹인 비옷을 꺼내 석파천에게 건네 주었다.
[영빈관은 바로 저 수락동(水樂洞) 안에 있습니다.
석 방주께 서는 옷이 젖지 않도록 비옷을 입으십시오.] 석파천은 비옷을 받아 입었다.
사내는 폭포로 다가가더니 몸을 날려 뛰어들었다.
석파천 역시 몸을 날렸다.
안쪽에는 기다란 통로가 있었다.
양쪽에 기름등이 켜져 있어 침침하기는 했으나 길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사내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통로는 산허리에 뚫려 있는 천연적인 동굴을 다듬어 만든 것이 었다.
인공으로 다듬은 것 치고 매우 좁았으나 때로는 탁 트일 정도로 넓은 곳도 있었다.
점차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동굴 안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 가 졸졸 들렸다.
그 소리는 매우 맑고 고와 옥으로 만든 북을 두드리는 것 같았 다.
동굴 안에는 갈림길이 무척 많았는데 석파천은 일일이 외워두 었다.
동굴 안에서 약 이 마장 쯤 나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눈앞에 옥석으로 깎아서 만든 동굴문이 나타났다.
문 위에는 세 개의 커다란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석파천은 글씨를 몰라 슬쩍 물었다.
[이곳이 바로 영빈관이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그는 씌어 있는 것을 왜 굳이 물어보나 하고 이 상하게 생각했다.
옥석으로 된 동굴 문 안으로 들어가자 땅바닥에 청석을 깔아 놓은 통로가 나타났다.
사내는 석파천을 왼쪽의 첫번째 석동(石洞)으로 데리고 들어가 며 말했다.
[석 방주께서는 잠시 이곳에서 머물러 주십시오.
나중에 연회 가 베풀어지게 된다면 도주께서는 석 방주를 만나보게 될 것입 니다.] 동굴 안에는 탁자와 의자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세 자루 의 붉은 촛대가 석실 안을 환히 밝혀주고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나이 어린 동자가 차와 네 가지 간단한 음식을 갖다주었 다.
석파천은 음식을 대하게 되자 남으로 내려오면서 석청이 당부 하던 말을 떠올렸다.
[소형제 삼십 년간 협객도로 간 영웅 호걸들이 한 사람도 살아 서 돌아온 사람이 없네.
협객도의 사람들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 더라도 그 많은 무림의 고수들을 일망타진하리라고는 보지 않네 ……] 그의 당부는 계속되었다.
[나의 짐작으로 섬에서는 틀림없이 비열한 수단을 썼을 것이 네.
기관 함정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음식에다가 극독을 탔을 것 같네.
그들이 공공연히 사람들을 청해 동지팥죽을 맛보게 한다 고 떠들어대었으니 그 한 그릇의 팥죽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 는 것이라 어쩌면 이상야릇한 점이 없을 수 있겠으나 되려 흔히 보는 다과나 밥과 찬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네! 다 만 이와 같은 도리는 무척 얕은 것이라 이 석청이 생각할 수 있 는 것을 보면 명문대파의 우두머리격인 인물들도 어찌 생각을 못했겠는가? 그들이 협객도로 가게 되었을 때는 자연히 여러 가 지 해독약을 가져갔을 터인데 어째서 끝내 그 사람들의 독수에 당하게 되었는지 실로 그 해답을 얻기가 힘드네.
자네는 심지가 곧고 인정이 많아서 어쩌면 하늘이 착하고 어진 사람을 돌본다 는 말이 있듯이 어떤 고약한 보답을 받지 않을지도 모르지.
어 찌되었든 간에 조심을 하도록 하게나.] 그는 그와 같은 석청의 당부를 뇌리에 떠올리기는 했으나 향긋 한 음식의 냄새를 맡게 되자 시장기가 몰려왔다. '배가 고픈데 섬에 와서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않을 수는 없 지 않은가? 더군다나 장삼과 이사는 나와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 로 고락을 같이 하기로 맹세했는데 나를 해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그는 즉시 소매(燒賣), 춘권(春捲), 전병(前餠), 증 고(蒸고) 네 가지의 갖다놓은 음식을 먹어치우고 한 주전자의 찻물도 반이나 비워버렸다.
석동에서 약 한 시진쯤 기다리게 되었을 때 갑자기 요란한 종 소리와 북소리 등이 크게 울렸다.
길을 안내했던 사내가 석동의 입구에 나타나 허리를 굽혔다.
[도주께서 석 방주가 연회에 참석하도록 청하십니다.] 석파천은 그를 따라 나섰다.
몇 개의 석실을 지나게 되자 종소리와 북소리가 더욱더 요란하 게 들려왔고 눈앞이 훤히 밝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알고보니 한 커다란 석동 안에 소의 기름을 짜서 만든 촛불이 잔뜩 켜져 있었고 백여 개나 되는 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손님들은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석동 안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많은 탁자를 나 열해 놓았으나 조금도 비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수백 명이나 되는 황의의 사내들이 오락가락하면서 손 님들을 맞아 자리로 안내를 했다.
모든 손님들은 각기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셈이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손님을 옆에 모시고 앉는 주인쪽의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다.
뭇 손님들이 자리에 앉자 주악소리가 곧 멈추어지게 되었다.
석파천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대뜸 백자재가 가슴을 펴고 앉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백발이 성성할 뿐만 아니라 위맹(威猛)하게 생긴 그는 뭇 사람 들 가운데 앉아 있었지만 체구가 유난히 커서 군계일학(群鷄一 鶴)격이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석옥 안에서는 너무나 어두워 석파천은 그를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훤히 켜진 불빛 아래서 보니 정말 위덕 선생이야 말로 절간에 모셔다 놓은 신상처럼 장엄하고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숙연한 기분을 느끼게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그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객청에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으나 안내를 하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음성을 낮추었고 모든 사람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심사가 무거웠던지라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 았다.
그런데 석파천이 그와 같이 갑작스럽게 부르짖게 되자 모든 사 람들의 눈길은 자연 그에게 쏠리게 되었다.
백자재는 싸늘히 코웃음을 쳤다.
[흥! 분수를 모르는 녀석 같으니.
네 녀석 때문에 나의 손녀가 자손을 보지 못하게 되었지 않느냐?] 석파천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잠시 후에 그는 그 뜻을 알아차렸다.
원래 백자재는 그가 협객도로 죽으러 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써 수아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아들과 딸 자식을 둘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석파천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촌에서 할아버지를 삼 개월간 기다리겠 다고 했습니다.
이월 말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바다로 뛰어들 어 자살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백자재는 길다란 눈썹을 곤두세웠다.
[벽라산에 가지 않겠다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날 욕하던?] [늙어 망녕이 났다고 했습니다.
정불사와 같은 경박한 자가 혓 바닥을 날름거리는 것을 곧이 듣는 것으로 보면 늙어 망녕이 난 할아버지가 멍청하다구 그리고 언젠가는 정불사를 만나게 된다 면 금오도법으로 그의 팔 한쪽을 잘라내고 혓바닥을 자르겠다고 했습니다.] 백자재는 그 말에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맞았다, 맞아.
응당 그렇게 해야지.] 갑자기 대청의 한모퉁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째서 나에게 그토록 욕을 하는 것일까? 내가 언제 그녀에 대해서 경박한 태도를 취했단 말이냐? 나는 그녀에 대한 지성의 사랑 때문에 늙어서도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데……그녀는 강철 같은 심장으로 벽라산에 한걸음도 디딜 생각 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의 혓바닥과 팔을 자르겠다니… …] 석파천은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정불사가 팔꿈치를 탁자 위에 대고 턱을 고인 채 전신을 부들 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를 본 석파천은 나이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 러운 줄도 모르고 저렇게 울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 다.
만약 평소였다면 영웅 호걸들은 정불사에게 비웃음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사람들은 자기 발등에 액운이 떨어지게 되었 다는 공포감에 심사가 무거워져 같이 울고 싶은 참담한 기분이 라 그 누구도 그를 비웃지 못했다.
이 한떼의 영웅 호걸들은 명문대파의 장문인이 아니면 바로 어 느 방이나 어느 회의 우두머리이며 한평생 칼과 검의 끝에서 뒹 굴며 살아온 사람들이라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말을 그들에게 사 용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칼이나 한 자루의 창을 사용하되 목숨을 건 싸움이 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죽는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자 기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자부심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적이 죽 고 자기가 살리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상황은 크게 달랐다.
이 섬에 오르게 된다면 반 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어떻게 죽는 것인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죽어야할 운명에 다시 두렵고도 의심스러운 생각마저 가지게 되어 옛날의 커다란 적을 눈앞에 두고 남이 볼 수 있도록 정당하게 겨루는 광경보다 그야말로 감당해 내기가 훨씬 힘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서쪽 모퉁이에서 목쉰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흥! 흥! 뭐가 지성이고 늙기까지 장가를 안 가! 사소취에게 그토록 미련이 남았다면 어찌하여 우리 언니와 더불어 딸을 가 졌지?] 삽시간에 정불사는 얼굴이 새빨겨져서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물었다.
[너는……누구냐? 어떻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느냐?] 그 여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우리 언니 일을 내가 왜 몰라요! 당신의 딸은 어떻게 되었나 요? 죽었나요 아니면 살았나요?] 정불사는 그만 쿵 하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너무나 세차게 앉는 바람에 우지끈 뚝 하는 소리와 함 께 대나무로 만든 의자의 네 다리가 분지러졌다.
여인은 다시 다그치 듯 질문을 던졌다.
[그 계집애는 죽었나요? 살아 있나요? 빨리 말해 봐요!] 정불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 여인은 날카로운 어조로 조롱하듯 말했다.
[언니가 돌아가실 때 반드시 당신을 찾아내어 그 딸의 행방을 알아내야 한다고 당부했어요.
그리고 나보고 돌보라고 했는데 짐승만도 못한 도적 같으니! 우리 언니의 한평생을 그릇치고도 모자라서 남의 여편네만 생각하고 있다니……] 정불사는 그만 얼굴이 흙빛이 되어 두 무릎을 꿇었다.
의자가 부러졌기 때문에 그는 두 다리로 앉은 자세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다리에 맥이 빠지자 그만 꿇어 앉게 되었던 것이었 다.
하지만 그는 역시 무공이 뛰어나 재빨리 똑바로 섰다.
여인은 다시 날카롭게 외쳤다.
[도대체 그 계집에는 죽었나요 살아 있나요?] [이십 년 전 그 애는 살고 있었지만 그 후는 나도 모른다.] [어째서 그 애를 찾아보지도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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