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건……그건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애 가 협객도로 왔다고 하던데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노부도 잘 모 른다.] 석파천은 그 여자의 몸매가 왜소하고 얼굴에는 두꺼운 흑사(黑 紗)로 가리고 있어서 얼굴 모습을 잘 살펴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흉악하고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정불사가 어째서 그녀를 두려워할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종과 북소리가 크게 일었다. 한 명의 황의 사내가 나타나더니 낭랑히 외쳤다. [협객도의 용(龍) 도주와 목(木) 도주께서 삼가 귀빈들을 만나 뵙겠다고 합니다.] 뭇 사람들은 흠칫했다. 그제서야 모든 사람들은 협객도에 두 사람의 도주가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는 성이 용이요 하나는 성이 목가라 는 것도 겨우 알게 된 것이다. 중문(中門)을 열어 젖히면서 키가 크고 작은 남녀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들어왔다. 오른쪽 남녀들은 황의를 걸치고 있었고 왼쪽 남녀들은 청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 찬례(贊禮)의 사내는 다시 부르짖었다. [용 도주와 목 도주의 뭇 제자들이 귀빈들에게 인사를 드립니 다.] 그리고 보니 동패를 주고 갔던 상선벌악의 두 사자도 뭇 제자 들 속에 끼여 있었다. 장삼은 노란 옷을 입고 오른쪽에서 열한 번째 되는 위치에 서 있었으며 이사는 푸른 옷을 입고 왼쪽으로부터의 열세 번째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등뒤로도 각기 이십여 명 남짓한 남녀 들이 서 있었다. 뭇 사람들은 그만 숨을 들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장삼과 이사의 무공을 모두들 친히 본 바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동문의 사형제들이 있으 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따라서 삼십 년 간 중원의 일류 고수들이 협객도의 사람들을 당해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상선벌악의 두 사자만 손을 쓴다 하더라도 중원무림에서 명성을 떨친 사람은 이십 초도 견디지 못할 것이 뻔했던 것이 다. 두 줄의 제자들은 좌우 양쪽으로 늘어섰다. 그리고 공손히 뭇 호걸들에게 인사를 했다. 호걸들은 재빨리 일어나 답례했다. 장삼과 이사는 동패를 나누어 주게 되었을 때 웃으면서 살인을 했고 또 한 번 손짓에 문파나 방회의 무리들이 도살을 당했던 터였는데 지금은 곁눈질도 한 번 하지 않는 것이 매우 공손하고 근엄했다. 곧이어 주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 늙은 노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나왔다. 한 사람은 황의를 걸치고 있었고 한 사람은 청의를 걸치고 있 었다. 찬례의 사내는 다시 부르짖었다. [폐도의 도주께서 여러 귀빈들이 왕림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용 도주와 목 도주는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불초와 목 형 우리 두 사람은 이 황량한 섬에서 오 늘 고귀하신 분들을 대하게 되니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다 만 황량한 섬이라 있는 물건이 간소하여 대접에 있어서 소흘한 점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인데 여러분께서는 이해해 주십시오.] 말투는 매우 차분했고 온화했다. 협객도는 남해 한복판에 외로이 떠 있는 섬인데 그는 바로 중 원의 말씨를 쓰고 있었다. 목 도주도 한마디 인사를 했다. [여러분들도 앉도록 하십시오.] 그의 음성은 날카로웠는데 아마도 복권성이나 광동성 사람이 분명한 것 같았다. 군웅들이 자리에 앉았다. 주인 자리라는 것은 바로 서쪽 아래켠의 한 탁자 곁에 마련되 어 있었다. 협객도 사람들은 자리가 없어 각기 양쪽에서 공손히 시립해 서 있었다. 군웅들은 협객도의 사람들이 중원에서는 매우 거칠게 놀면서도 섬에서는 매우 예의를 깍듯이 차리자 또 한번 무슨 꿍꿍이 속셈 으로 이런 식으로 나올까 하고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사형수들도 목을 자르게 될 때는 잘 먹 이고 좋은 말로 위로를 한다고 하는데 이 연회가 바로 그런 것 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뭇 사람들은 두 도주를 찬찬히 살폈다. 용 도주는 수염과 눈썹이 모조리 희었으나 얼굴만 어린애처럼 불그스레했다. 목 도주는 길다란 수염이 희끗희끗했는데 아직까지도 검은 빛 깔의 수염들이 흰 수염보다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얼굴은 주름살로 가득 뒤덮혀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아볼 수 없었는 데 아무리 봐도 육십 세에서 구십 세 정도인 것 같았다. 만약 두 사람의 나이가 백 세를 넘겼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느 껴지지 않았으리라. 각자 자리에 앉게 되자 섬에서 일보던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술을 따랐고 곧이어 음식들을 날라 놓았다. 한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에는 네 개의 접시와 네 개의 그릇이 놓이게 되었데 여덟 가지의 찬은 골고루 산해진미를 갖추고 있 었고 향긋했을 뿐 이상한 점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석파천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각기 탁자에 앉아 있는 손 님들 쪽을 살폈다. 상청관의 주인인 천허 도인도 와 있었고 관동 사대문파의 범일 비, 풍랑, 여정평, 고삼 낭자도 와 있었다. 그 사람들은 긴장과 초조에 휩싸여 있었는데 석파천과 시선이 맞부딪치게 되었을 때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소리는 내지 않았 다. 용, 목 두 도주는 술잔을 들고 권했다. [자! 드시지요.]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영웅호걸들은 잔속의 술이 파란데 술 향기가 매우 짙었으나 서 로 꺼림칙해서 마시기를 못했다. 술속에 어떤 독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부분이 입술까지 가져갔다가 입술에 한 번 대기만 했을 뿐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다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곳에서 자기들을 해치려고 한다면 저들의 한번 손짓과 발짓에 뜻을 이룰 수 있으니 술속에 독을 타도 좋다는 체념하에서 점잖게 잔을 비웠고 옆에서 시중들던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술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용, 목 두 도주가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석 잔의 술을 들었다. 그리고 용 도주는 왼손을 들어올리자 시중들던 사람들이 쟁반 에 뜨끈뜨끈한 한 대접의 팥죽을 목판에 받쳐들고 차례로 걸어 나와 귀빈들 앞에 한 대접씩 놓았다. 군웅들은 바로 강호에서 이름만 듣고도 안색이 변한다는 그 죽 이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뜨거운 죽은 막 솥에서 퍼낸 모양으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는데 똑같이 짙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이상야릇했다. 원래 동지팥죽은 팥과 새알이 주종을 이루게 되고 그 외에 고 명으로 약간 다른 것들을 넣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죽 안에 든 건데기는 채소도 풀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나무뿌리를 쪼개놓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고구마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 후 잘라놓은 것 같기도 했다. 군웅들은 독물이 대체로 청녹색 빛을 띄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팥죽은 짙은 녹색에 사람의 얼굴까지 파란 빛이 돌 지경이었고 약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으로 보아 극독이 들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고삼 낭자는 약 냄새를 맡자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얼마나 많은 독사, 지네, 거미, 전갈 등이 들어갔을까 생각하 니 구역질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접의 죽을 탁자 가 장자리로 밀어놓고 코를 소맷자락으로 가렸다. 이때 용 도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멀리서 오셨는데 폐도에서는 달리 대접할 것이 없 군요. 하오나 이 동지팥죽으로 말하면 다른 곳에서 좀처럼 먹기 힘들 것입니다. 이 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약은 단장식골부심초 (斷腸蝕骨腐心草)라고 하는데 꽃이 피어야 효과가 있습니다… …] 그는 군웅들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 풀은 십 년마다 한 번씩 꽃이 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들은 강호의 동도들을 십 년만에 겨우 한 번씩 청해 함께 즐기 도록 한 것인데 이제 헤아려 보니 이번까지 네 번째가 되는군 요. 자, 사양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이렇게 말을 한 그는 목 도주와 더불어 왼손으로 죽 대접을 들 고 오른손에 젓가락을 들고서 권하는 시늉을 했다. 군웅들은 단장식골부심초라는 이름을 듣고 간이 바짝 오그라드 는 것을 느꼈다. 애당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팥죽에 든 독초의 이름이 그토록 어마어마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다 용 도주는 공공연히 그와 같은 사실을 털어놓고 있으니 모든 사람들은 그만 안색이 홱 변하고 말았다. 이때 용과 목 두 도주는 각기 젓가락을 들어 뭇 사람들에게 둥 근 원을 그려서는 함께 들자는 시늉을 하고 즉시 대접을 들어서 는 죽을 먹기 시작했다. 군웅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생각들을 했다. '당신들의 그 두 대접의 죽 그릇에는 무슨 인삼이나 연와(燕 窩)와 같은 종류의 대보품(大補品)이 들었겠지.' 그런데 갑자기 동쪽 머리에 앉아 있던 한 명의 대한이 벌떡 몸 을 일으키더니 용과 목 두 도주를 손가락질하며 호통을 내질렀 다. [용씨와 목씨는 들으시오! 이 관서(關西) 해문표(解文豹)는 협 객도에 이르기 전에 이미 후사를 처리해 두었소! 이 해모는 하 늘을 이고서 땅에 우뚝 선 굳은 사내이오. 당신네들이 죽이든 살을 발라내든 이 해가 어찌 눈 한번 깜박이겠소? 그러나 나보 고 이와 같은 더러운 독물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가 없는 것이오.] 용 도주는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이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해 영웅이 죽을 먹기 싫어한다면 우리들이 어찌 강요를 하겠 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성낼 것은 뭐요? 자, 앉도록 하시오.] 해문표는 호통을 내질렀다. [이 해가는 이미 목숨을 떼어붙였소.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오? 굳이 당신네들의 억센 힘만 믿고서 날뛰며 이 인간세상에 화를 뿌리는 개같은 남녀들의 비위를 좀 거슬려보아야겠소.] 그리고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뜨거운 죽 대접을 들어서는 용 도주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자 두 탁자를 격하고 있던 한 명의 노인이 벌떡 몸을 일으 키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해 아우님! 거친 행동을 해서는 안되네.] 그리고 소맷자락을 떨치더니 한 가닥 세찬 바람을 일으켜서는 허공 중에 붕 떠 있는 그 죽대접을 살짝 막았다. 그 죽대접은 다시 앞으로 날아가지 않고 잠시 멈칫거리더니 아 래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청화대해완(靑花大海碗)이라는 죽대접 이 땅바닥에 떨어져서는 박살이 나고 한 대접의 죽이 온 땅바닥 에 뿌려질 것 같았다. 바로 이때 한 명의 옆에서 술을 따르던 하인이 비스듬히 몸을 날려 허리를 구부리고 팔을 길게 뻗쳐서는 그 대접을 낚아채게 되었다. 이때에 대접의 밑바닥은 땅과 이미 몇 치 정도밖에 남 겨 두지 않은 상태여서 정말 아슬아슬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 기도 했다. 군웅들은 참을 수 없어 모두 소리쳐서 갈채를 보냈다. [매우 탁월한 재간이군!] 갈채를 보내는 소리가 막 끝나게 되자 군웅들의 얼굴에 띤 우 수의 빛은 더욱더 짙어졌다. '한 명의 술을 따르는 하인마저도 저와 같은 솜씨를 가지고 있 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서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여러 사람들은 똑같은 생각에 그만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집안의 아들과 손자들의 재산을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커다란 원한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 기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죽고 난다면 본방의 그 엄청난 기업이 그만 풍지박산이 되고 말리라는 아쉬운 정감 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더욱더 어떤 사람들은 협객도 가 동지의 팥죽연회 기간이 다가오기 전에 진작 왜 깊은 산속에 몸을 숨기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를 했다. 그리고 어찌됐든 간에 줄곧 요행심을 바라고 연회에 참석해 달 라는 구리패가 자기의 손에까지는 전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있다가 커다란 화가 머리 위에 떨어지게 되자 다시 협객도 사람들의 무공이 소문에 듣던 것처럼 무섭지 않기를 바 랐던 것이나 이곳에 와서 이제 그 하인이 몸을 날려 죽대접을 받아드는 것을 보고 최후의 요행을 바라는 마음까지도 끝내 종 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 명의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중년의 서생이 몸을 일으키더니 낭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협객도주께서 거느리고 있는 아랫사람들만 하더라도 중원에 이르게 된다면 충분히 명성을 떨칠 수 있소. 두 분의 도주께서 만약에 무림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 되고자 하는 뜻을 가지게 된다면 그 뜻을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이룰 수 있을텐데 굳이 이와 같이 커다란 심기(心機)를 써서까지 우리를 이곳으로 불렀 소이까?……] 그리고 그는 잠시 좌우를 둘러보고 난 이후 다시 입을 열어 말 을 이어갔다. [불초가 귀도에 찾아든 이상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진작부터 단념한 처지이지만 다만 마음속에 한 커다란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소. 그러니 아무쪼록 두 분 도주께서는 불초에게 깨달음을 갖게 해준다면 불초는 그 즉시 목을 길게 빼고 죽음을 받아들이겠소.] 이와 같은 말은 원래 모든 사람들이 다 하고자 하던 말이었다. 다만 이 중년의 사내처럼 점잖으면서도 적절하게 표현을 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하나같이 자기 마음에 품고 있는 뜻을 남김없이 전달해 준 것 같아 속이 시원한 것을 느꼈다. 동시에 수백 가닥의 시선이 모두 용과 목 두 도주의 얼 굴에 집중되었다. 용 도주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서문(西門) 선생은 너무나 겸손해 할 것 없소.] 군웅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거의 약속이나 한듯 모두 다 그 서생쪽을 바라보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바로 이십 년 전 강호에서 명성을 진동시 켰던 서문수재(西門秀才) 서문관지(西門觀止)이었 말인가? 그의 나이가 불과 사십여 세 밖에 되지 않아 보이지만 이십여 년 전에 한 쌍의 맨손으로 섬북칠패(陝北七覇)를 격살했으며 사 흘 동안에 한 자루의 빈철(빈鐵)로 만들어진 판관필(判官筆)로 하북(河北)에 있는 여덟 곳의 녹림산채(綠林山寨)를 뒤엎어 놓 았다. 소문에 들으니까 그때 그는 이미 사십 안팎이라고 했으며 그 이후 곧 종적이 감추었기 때문에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볼 때에 다른 사람 같지만 복성(複姓)인 서문(西門)이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은 본 래 많지 않다. 당금 무림에서는 더욱더 서생 차림을 한 고수가 없으니 십중팔구 그 사람이 틀림없을 것 같구나.' 이때 다시 용 도주의 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서문 선생은 과거 일 장으로 칠패를 격살했으며 한 자루의 판 관필로 여덟 곳의 산채를 뒤엎었으니……] 이때 군웅들은 과연 그 사람이 틀림이 없구나 하고 고개를 끄 덕이며 계속 용 도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불초와 목 형제는 흠모한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 이와 같 이 풍모를 접하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는데 어찌 서문 선생에 대 해서 무례한 행동을 할 수가 있겠소?] 서문관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불초가 옛날 저지른 그와 같은 조그만 일은 중원에서 어쩌면 한 때 뽐낼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두 도 주의 눈으로 볼 때 그야말로 동자(童子)들이 칼을 휘두르는 듯 웃음만 사게 될 것이오.] 용 도주는 그 말을 받았다. [서문 선생께서는 너무나 겸손하시구료. 귀하가 조금전에 질문 을 한데 대해서 우리 두 사람은 정히 여러분들에게 명백히 하려 던 참이었소. 다만 이 죽을 쓴 단장식골부심초는 뜨끈뜨끈할 때 마셔야만이 그 효력이 비교적 많은 셈이니 여러분들은 먼저 죽 을 마시도록 하시지요. 그러고 난 이후 불초가 다시 상세히 말 씀을 드리겠습니다.] 석파천은 그들 두 사람이 겸손하게 깍듯이 예의를 차려 주고 받는 말들 가운데 숙어나 문자들이 너무나 많은 편이라 반쯤 아 는둥 마는둥 했다. 따라서 그만큼 그들이 주고 받는 말에 관심 을 가질 수 없었고 배에서 쪼르륵 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찾 아드는 허기증에 낭패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용 도주가 그와 같 은 말을 하자 재빨리 죽대접을 들고는 후루룩거리면서 거진 다 마시게 되었다. 죽에서는 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 났지만 입안에 들어가자 달콤한 것이 결코 먹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 삽시간에 그는 대접 의 바닥이 하늘 아래 드러나도록 다 마셔버리고 말았다. 군웅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저 녀석은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 줄을 모르 고 일시적인 호기를 부린 것도 허사로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귀문관(鬼門關)으로 간다 하더라도 서둘 것은 없지 않은 가?' '어찌됐었든 죽기는 매일반이니 저 젊은 영웅처럼 행동하는 것 이 오히려 시원시원하고 깨끗해 좋겠구나.' 이때 백자재는 갈채를 보냈다. [어, 참 멋있다. 우리 설산파의 손자 사위는 역시 남과 다른 데가 있늘걸.] 지금도 그는 설산파가 천하무림의 다른 문파들보다는 한 수 높 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고 석파천이 설산파의 장문인인 자기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라고 기특하게 생각했다. 능소성에 있는 석옥 안에서 벌인 한바탕 격투에서 백자재는 이 미 예기가 크게 꺾여져 있던 터라 그와 같은 석파천의 호기에 감탄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럽게 생각했다. '천고이래로 천하에서 검법이 제일인데다가 권각법이 제일이고 내공이 제일이며 암기가 제일인 대영웅 몇 대호걸이고 대협사이 시며 대종사라고 자칭했던 명호 가운데 내공이 제일이라는 한마 디는 반드시 생략해야겠구나.' 그러다가 그는 그 술을 따르던 하인이 몸을 날려 죽그릇을 받 는 솜씨를 보고 역시 은근히 주눅이 드는 것도 금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권각법이 제일이라는 한마디도 약간 믿을 수가 없게 되었구나. 그러나 협객도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무공이 정말 기 이하도록 높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저 하인은 어쩌면 바로 협객도에서는 으뜸가는 고수인데 다만 하인 모양을 하고서는 다 른 사람을 겁주려고 했을 뿐인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설산파의 손자사위가 죽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고 덩달 아 호기가 치밀었다. 즉시 죽 대접을 들고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몇 모금 마시고 좌 우를 돌아보며 득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 석동 대청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 녀석과 나만이 죽을 마셨다. 이래가지고야 다른 사람들은 영웅 호걸이라 자처할 수 없겠지?'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생각했다. '나는 두 번째로 죽을 먹었으니 영웅 호걸이라 하더라도 이 세 상에서 두 번째밖에 되지 않는다. 대영웅, 대호걸이란 존칭도 반드시 삭제해야 되겠군.' 이런 생각이 들자 그만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왕 먹고 죽을 바에야 제일 먼저 먹고 죽는 것인데 천하 제 이인자라니 재미가 없는걸.' 자기 자리에 앉아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탄식하느라고 용 도주 가 나중에 한 말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용 도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사십 년 전 나는 목 형제와 교분을 고 의기투합하여 본래 손잡고 강호에서 한 번 상선벌악의 큰일을 하고 싶었소. 그런데 강호에 나서자마자 한 장의 지도를 발견했소. 그 지도에 달아놓 은 작은 글씨의 주해를 세밀히 연구한 결과 어느 이름없는 섬에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무공비결이 있다는 걸 알았소.] 이때 아까 불평을 토로했던 해문표라는 사십 대의 사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곳은 협객도인데 어째서 이름없는 섬이라는 것이오?] 죽대접을 막았던 노인이 호통을 내질렀다. [해 형제, 용 도주의 말을 가로채지 말게.] 해문표는 못마땅한 어조로 응수했다. [죽으라 하고 아첨을 해봤자 저 사람이 당신의 목숨을 살려줄 것 같소?] 노인은 대노해서 죽을 들어 쭉 들이키고는 외쳤다. [자네와 나는 반평생을 두고 사귀어 온 사람이 아닌가? 도대체 이 정광지(鄭光芝)를 뭘로 알았는가?] 해문표는 크게 후회했다. [형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소제가 사과를 드리지요.] 그리고 그는 엎드려 큰절을 세 번 하더니 옆의 탁자 위에 놓인 죽을 단숨에 들이켰다. 정광지는 달려가 그를 얼싸안고 말했다. [형제, 과거 우리가 의리로 맺어질 때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 나지 못했지만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자고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우리들의 뜻을 이룰 수 있어 기쁘네.]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은 채 기쁨과 서글픔에 얽혀 함께 눈물 을 흘렸다. 석파천은 같은 날, 시에 죽자는 말을 듣고 불현듯 떠오르는 생 각이 있어 장삼과 이사를 바라보았다. 장삼과 이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웃더니 용 도주와 목 도 주를 바라보았다. 목 도주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삼과 이사는 뭇 사람을 헤치고 나와 각기 팥죽을 들고 석파 천의 곁으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소형제, 이 형들도 이 죽을 들겠네.] 석파천은 재빨리 말했다. [아니지요. 두 분 형님은 나와 같이 죽을 필요가 없소이다. 나 는 다만 형님들께서 장래에 수아를 좀 돌봐주었으면 하는……] 장삼은 그 말을 가로챘다. [형제, 우리가 결의형제로 맺어지던 날 앞으로 고락을 같이 하 기로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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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편
협객행(김용) - 76편 (76/82)
] 이사 역시 그 뒤를 이어 한마디 했다. [자네가 이미 동지팥죽을 먹었는데 우리 형들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죽대접을 깨끗이 비웠다. 이어 그들은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