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군다나 그가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는데 석파천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그의 놀람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곧 화섭자를 내던지고는 장검을 들고 토지묘 밖으로 달려나가 사방을 살폈으나 사람은켜녕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 유령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곧 자기가 땅바 닥에 쓰러져 있는 사제의 품속에서 화석과 화지를 더듬고 있을 때 호 시탐탐 노리고 있던 그 누가 나타나서 석중옥을 구해간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십중팔구 패 의원의 짓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급히 지붕위로 날아올라가 사방을 살펴보니 동서쪽에 몸을 숨길 만한 숲이 보였다. 그는 즉시 그 숲가로 달려가 호통을 내질렀다. "몸을 숨기는 자를 어찌 호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빨리 나와서 사생 결단을 내자!" 숲속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부르짖었다. "패 의원, 당신이오?" 숲속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때 그는 적이 숲속에서 벼락같이 암산을 가하여 오면 자기 자신이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돌보지 않고 검을 들고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숲속은 텅 비어 있었고 차가운 바람만이 소나무가지와 나뭇잎들을 우수수 떨어뜨리며 지나갔다. 백만검은 노기가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조금전의 일전으로 그 는 천하영웅들을 앝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무렵 그는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말을 새삼 깨달고 있었다. 딸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하니 구슬픈 심정이 다시 복받쳐 올라 자기도 모르게 빰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석파천은 민유의 검에 찔려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는 별로 아픈 줄을 몰랐다. 석청과 민유 두 사람이 곧이어 대전 밖으로 사라지자마자 곧 대전 의 불이 꺼지고 주위는 칠흑과 같은 어둠속에 휩싸였다. 갑자기 뒤 에서부터 누군가가 자기의 입을 틀어막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그의 몸이 공탁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그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불빛이 번쩍하고 빛나더니 백만검이 화섭자를 들고 놀라서 중얼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그의 몸이 곧 절간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석파천은 백만검이 자기가 마루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토 지묘 밖으로 쫓아나가는 것을 보자 속으로 웃었다. 그 순간, 자기의 입을 틀어막았던 사람이 자기를 끌어안고 재빠른 걸음으로 토지묘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한참 달려가더니 조그만 배 위로 오르게 되었고, 곧이어 등불이 켜 졌다. 석파천은 자기의 곁에 등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정당인 것을 보고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띠땅! 누가 나를 안고 왔소?" 정당은 입술을 비쭉했다. "물론 할아버지죠. 누구긴 누구겠어요?" 석파천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정불삼은 뱃머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석파천은 의아하여 물었다. "할아버지, 어째서......나를 안고 이곳으로 달려왔나요?" 정불삼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당아, 저 녀석은 백치다. 그런데 왜 저 녀석에게 시집을 가려 고 하느냐? 어찌 되었든 그와 동방화촉을 밝히지 않았으니 차라리 이때 한칼에 없애버리자." 정당은 다급해서 소리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천 오라버니는 큰병을 앓고난 이후 많은 일 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래요. 병이 나으면 다시 제정신이 회복될 거 예요......" 그녀는 석파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천 오라버니, 어디 상처 좀 봐요." 그녀는 그의 가슴팍 옷자락을 제치고 손으로 상처 옆의 핏자국을 닦아내고는 약을 발라 주었다. 그런 후에 자기의 옷자락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 주었다. 석파천은 고마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띠땅, 고맙소. 당신과 할아버지는 그 공탁 밑에 숨어 있었소? 숨 박꼭질을 하는 것 같아서 매우 재미있더군." 정당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재미있다니요?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백가와 무공을 겨루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석파천은 의아햐여 말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라구? 그 흑의를 입은 사람이 나의 아버지이 고 그 예쁘게 생긴 여인이 나의 어머니란 말이오? 그 여인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에요. 우리 어머니는 그녀만큼 잘 생기지도 못했다 오." 정당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 오라버니, 이번 병에 아마도 가볍지 않은 해를 입은 것 같아 요. 부모님의 모습마저도 잊어버리다니......내가 보기에 당신이 쓰 는 설산검법도 매우 생소하더군요. 설마하니 진짜 무공마저도 깡그 리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요? 그럴 수도 있나요?" 본래 석파천이 백만검에게 토지묘까지 붙잡혀 가게 되었을 때 정불 삼과 정당은 줄곧 그들의 뒤를 쫓아왔던 것이다. 백만검이 토지묘 밖을 순시하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아래로 숨어 들었다. 그러다가 석청 부부가 들어와 싸움을 벌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 던 것이다. 본래 정불삼은 석파천이 일부러 실성한 척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속셈이 있어서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가 검초를 펼치는 수법이 영 엉터리인 것을 보고 크게 울 화통이 터지는 것을 간신히 참긴 했으나 속으로는 욕을 퍼부었다. '에잇! 저런 멍텅구리가 있나!' 그는 백만검이 화섭자를 찾기 위해 사제의 몸을 더듬을 때 석파천 구출해낸 것이었다. 이때 석파천은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무공을 안다는 것이지? 나는 무공이라고는 무자도 모르 는 사람이오. 당신의 그 말은 더욱 알 수가 없구료." 정불삼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서 고개를 돌리고 날카롭게 외쳤다. "당아, 도대체 너는 어떻게 하여 그토록 넋을 빠뜨렸느냐? 저렇게 바보같은 녀석에게 시집을 가겠다니, 내 일 장으로 그를 때려죽이고 말겠다......" 그는 다시 언성을 높여 말했다. "준수하고 총명하며 도량이 넓은 신랑감을 이 할아버지가 책임지고 구해 주겠다." 정당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흐느끼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저는 다른 사람은 싫어요. 천 오라버니는 바보가 아니 에요. 다만......하번 병을 앓게 되어 일시적인 어지러움으로 착각 이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아요......" 정불삼은 노해 부르짖었다. "뭐가 일시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단 말이냐? 그의 부모님은 분 명히 무공이 뛰어난 사람인데 자신을 스스로 개잡종이라 일컫고 있 다. 그가 백치가 아니라면 너의 할애비가 백치란 말이냐? 그가 검법 을 쓰던, 그 어처구니 없던 모양을 생각해 보아라. 정말 울화통이 터지지 않고는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무공을 펼친다는 것이 꼭 어 린애 장난하는 것처럼 손짓 발짓을 하다니 정말 눈뜨고는 차마 못 보겠더라......" 이어 그는 싸늘히 냉소를 흘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흐흐흐......상대방인 어미가 검을 거두어 들이려고 하는데 이녀 석은 일부러 몸을 검끝에 갖다 부딪쳐서 상처를 입었으니 저와 같은 밥통을 내가 죽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 게 될 것이 뻔하고, 손녀사위가 다른 사람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퍼 졌는데도 이 정불삼이 가만히 있다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강호에서 행세를 하겠느냐? 안 돼! 반드시 내손으로 저놈을 죽여야 돼!" 정당은 입술을 깨물며 비통에 찬 어조로 물었다. "할아버지, 어떻게 해야 그를 죽이지 않으시겠어요?" 정불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핫하하......죽이지 않겠느냐구? 반드시 죽여야 돼. 그렇지 않으 면 정불삼의 체면이 크게 깎이게 된다. 정불삼이 자기의 손녀사위를 죽였다는 것은 별로 대단할 것이 없어. 하지만 정불삼의 손녀사위가 남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내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돌아다니겠느냔 말이다." 정당은 참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어떡하죠? 할아버지는 그러한 경우 원한을 갚아주어야 할 것 이 아니겠어요?" 정불삼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핫하하......저 밥통 같은 녀석을 위해 원한을 갚아? 이 할아버지 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정당은 울먹이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저 사람과 혼례를 올리도록 강요를 했어요. 그는 이미 나의 남편이 된 몸이에요. 그를 죽인다면 저는 바로 청상과부가 되 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불삼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그때 나는 그를 시험해 보았다. 나는 그의 내공이 제법 심후해서 나의 손녀사위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저렇게 백치일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너의 뜻이 굳이 그렇다면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정당은 그 말에 기쁨을 금치 못하여 귀가 솔깃해져서 물었다. "어떤 방법이에요? 빨리 말씀을 해보세요, 할아버지!" 정불삼은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그가 백치이기 때문에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그 가 백치가 아니니 죽이지 말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말을 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말이다. 열흘 안으로 백만검과 무공을 겨루어 그 기한서북 백만검을 죽이거나 패배시키도록 해라. 그러면 나는 그를 용서해 주고 너희들이 부부가 되는 것을 허락하겠다." 정당은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백만검의 검술이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조금 전에 친히 목격하지 않았던가! 석파천이 어찌 그와 같은 검술의 대가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앞으로 이십 년간 무공을 더 연마한다 하더라도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가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런 제의를 하시면 어떻게 해요." 정불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려워도 어쩔 수 없고, 쉬워도 어쩔 수 없다. 백만검에게 이기지 못할 시엔 나는 일 장으로 그를 쳐 죽이고 말겠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내건 조건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도 모 르게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정당은 원망어린 눈빛으로 석파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석파천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 아닌가! 정당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물었다. "천 오라버니, 할아버지는 당신에게 열흘 안으로 백만검을 패배시 켜야 한다고 했어요. 어떡하죠?" 석파천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백만검의 검법은 매우 훌륭한데 내가 어떻게 그를 이긴단 말이 오?" 정당은 그만 목이 메인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를 이기지 못하면 당신을 죽인다고 했어요." 석파천은 헤벌쪽 웃으며 말했다. "왜 무고한 나를 죽인단 말이오?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농담으로 한 말을 당신은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오?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지, 나쁜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할아버지가 어째서 ......나를 죽이겠 느냔 말이오." 정당은 한숨을 토해 내쉬었다. '이 사람은 정말 병이 들어 바보가 되었구나. 사리도 따질 줄모르 니 지금의 형세로서는 먼저 할아버지의 조건에 응낙하고 열흘 동안 기회를 보아 도망치도록 해주자.' 이윽고 그녀는 정불삼에게 말했다. "좋아요! 할아버지, 제가 응낙을 하죠. 열흘 안으로 그가 백만검을 패배시키도록 하겠어요." 정불삼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냉랭히 웃었다. "이 할아버지는 배가 고프다. 어서 밥을 해 오너라. 한데 내 미리 말해두지만 첫째 나는 백치인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 며, 둘째로 너는 그를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열 흘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서 쳐 죽일 것이다. 셋째로 나는 그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정당은 원망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가 백치라고 할아버지가 말씀을 하셨으니 설사 할아버지가 그에 게 무공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는 제대로 배우지 못할 것이에요. 그러니 그와 같은 맹세는 할 것 없지 않겠어요?" 정불삼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할아버지가 설사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가 열흘 안으로 어떻게 백만검을 이길 수 있겠느냐? 십 년간 가르친다 하더라도 아마 그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당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건 할아버지가 사람을 가르치는 재간이 나쁜 탓이죠. 천하무적 의 무공으로써 훌륭한 제자를 가르쳐내지 못한다면 말이나 되겠어 요? 더군다나 설산파의 백자재 제자를 이기지 못한다면 바로 위덕선 생 백자재가 할아버지보다 강하다는 결론이잖아요?" 정불삼은 빙그레 웃었다. "당아, 너는 격장지계를 쓰는가 본데 나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다. 저런 백치는 신서이라도 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정당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너는 석청 부부가 백만검에게 하는 말을 못 들었느냐? 이 백치는 설산파에서 다년간 무공을 배웠는데 그 결과 그와 같이 보잘것 없는 검법밖에는 익히지 못했지 않느냔 말이다." 이때 그들이 타고 있는 배는 양자강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 다. 날은 점점 밝아오고 있었고 강물 위에는 하얀 안개가 잔잔히 깔려 있었다. "좋아요!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지 않겠다면 제가 가르쳐 주겠어요. 할아버지, 저는 밥을 짓지 않겠어요. 저는 천 오라버니에게 무공을 가르쳐야 하니까요." 정불삼이 노하며 외쳤다. "네가 밥을 짓지 않겠다면 이 할애비를 굶겨 죽일 작정이냐?" 정당은 말했다. "할아버지가 저의 남편을 죽이려 하니 저도 할아버지를 굶길 수 밖 에요." 정불삼은 침을 뱉었다. "퉤! 잔소리 말고 빨리 밥을 지어 와라." 정당은 그를 본 체도 않고 석파천에게 말했다. "천 오라버니, 내가 한 가지 재주를 가르쳐 주겠어요. 열흘 안이면 반드시 백만검을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정불삼은 못마땅하여 툭 말을 내쏘았다. "터무니 없는 소리 말아라! 이 할애비도 하지 못하는 일을 너같은 계집애가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들 조손은 서로 양보하지 않고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 당은 마음속으로 여간 근심되는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괴팍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이제 빌어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방법을 써야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궁리 해 보았다. '밥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굶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배가 고파 허덕이다가 고을로 들어가서 음식을 사 먹으려고 하겠지. 그때 기회 를 보아 천 오라버니를 도망치게 하면 될 것이다.' 한데 석파천은 정불삼이 배가 고파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배가 고픈 것을 느꼈다. 그는 정당의 생각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 다. "제가 밥을 해드리지요." 정당은 순간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당신이 왜 밥을 짓는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 면 어떻게 해요!" 정불삼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우리 정씨 집안의 금창약은 효과가 뛰어나서 바르는 즉시 치유가 된다. 그가 입은 상처는 심하지 않은데 왜 덧난단 말이냐?" 그는 달래는 투로 석파천에게 말했다. "역시 네 녀석은 착하구나. 빨리 이 할아버지에게 밥을 지어다오." 그는 밥이 먹고 싶어 이번에는 석파천을 백치하고 부르지 않았다. 정당은 애원하는 투로 말했다. "그가 밥을 지어 할아버지에게 드리는데도 할아버지는 그를 죽이겠 어요?" 정불삼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밥을 짓는 것은 밥을 짓는 것이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 이는 것이지. 이 두 가지 일은 서로 상관이 없는 일인데 어째서 함 께 논하는 것이냐?" 석파천은 가슴팍의 상처를 살짝 건드려 보았다. 통증은 별로 심하 지 않았다. 그는 뒤쪽으로 가서 쌀을 꺼내 밥을 짓기 시작했다. 뱃고물에서는 늙은 사공이 키를 잡고 있었다. 늙은 사공은 그들 세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전혀 못들은 척 자기 할일만 하고 있었다. 원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것이 석파천이 가장 자신을 가지고 있는 일이라 삽시간에 두 마리의 물고기를 지지고 한 솥의 쌀밥을 지어냈다. 정불삼은 그 음식을 먹으면서 칭찬을 했다. "너의 무공이 만약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것처럼 훌륭하다면 이 할아버지는 결코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날 네가 당아와 혼례 를 올리지 않고 나의 요리사가 되었더라면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이 너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아! 그런데 애석하게도 내가 먼저 열흘이라는 기간을 정해 놓고 말았구나. 이 정불삼은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 정정하는 성미가 아 니다. 만약에 내가 한 달이라는 기일을 잡았더라면 이십 일은 더 네 가 지어주는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를 끝낸 후 석파천과 정당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뱃고물에 앉 아서 밥그릇과 수저를 씻었다. 정당은 할아버지가 뱃머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나중에 금나수법(擒拿手法)을 한 가지 가르쳐 드리겠으니 잘기억 하도록 하세요." 석파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무공을 배워 백 대협과 겨루어 보라는 것이오?" 정당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당신은 정말 백치가 아니겠지요? 천 오라버니, 당신은......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어요." 석파천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옛날에는 어떠했었소?" 정당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옛날 당신은 나를 보기만 하면 달콤한 말을 연신 속삭였으며 또 세심하게 저를 아껴주곤 했어요. 하시는 말씀마다 남들이 전혀 생각 하지 못하는 일들을 들먹이곤 했는데 이제는 정말 바보처럼 느껴져 요." 석파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본래 그대의 천 오라버니가 아니오. 그러면 당신의 환심을 살 줄 알았겠으나 나는 그런 것을 모르오. 당신은 역시 당신의 천 오라버니를 찾아가는 것이 좋겠소." 정당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천 오라버니, 저에게 화를 내는 것인가요?" 석파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내가 화를 내겠소?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뿐이오. 그런데도 당신은 전혀 믿지 않으니 나로서도 더이상 어쩔 도리가 없구료." 정당은 뱃전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 했다. "언제나 옛날처럼 아껴주며 세심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까?" 그녀는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대접을 강물속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대접은 파란 물결에 두어 번 흔들거리더니 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석파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띵땅, 나는 영원히 당신의 천 오라버니가 될 수 없을 것이오. 만 약에 내가 영원히 ......이렇게 바보스럽다면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정당은 흐느낄 듯 구슬픈 얼굴을 하며 말했다. "몰라요......몰라요......" 그녀는 마음속이 답답한 듯 손에 잡히는대로 그릇들을 강물 속에 던져버렸다. 석파천은 침울하여 말했다. "나는 ......언변도 좋지 못하오. 그래서 말을 하더라도 당신의 환 심을 살 수가 없구료. 그러니 나는 차라리 온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그래도 나는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오. 하지만......그러나 나는 정말 당신의 그 천 오라버니가 아니오. 나더러 가장을 하라 하 더라도 나는 가장을 할 만한 재간이 없소." 정당은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무렵 햇살이 막 동녁 하늘 위로 떠오르는 때이므로 석파천의 얼 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두 눈에는 영기기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으며, 얼굴은 매우 간곡하 고도 진지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정당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은 나의 천 오라버니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내가 옛날에 물어 서 남긴 상처 자국이 있죠?" 그녀는 구슬픈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어째서 당신도 꽃을 꺾기 좋아해서 장락방의 전 향주의 아내를 유 혹했으며 또 설산파의 화 소저를 희롱했죠? 그런데 당신이 나의 천 오라버니라면 어째서 갑자기 멍청해졌으며 옛날의 풍류남아적이며 소탈한 언행이 사라지고 말았느냔 말이에요?" 석파천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남편이오. 남편이라면 좀 점잖은 것이 좋지 않소?" 정당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차라리 당신이 옛날처럼 짓궂고 장난기가 많았으 면 좋겠어요. 남의 아내를 훔쳐도 좋고 남의 규수를 희롱해도 좋아 요. 너무나 얌전한 당신의 태도는 마음에 끌리지 않아요." 석파천은 남의 아내를 훔쳤다는 그 말에 대해서 시종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넌즈시 물었다. "남의 아내를 훔쳤다고 했는데 훔쳐서 무얼하는 것이오? 그 백부님 도 남에게 먼저 말하지 않고 남의 물건을 가진다면 바로 도적이라 했소. 내가 남의 아내를 훔쳤다면 나 역시 도적이 되는 것이 아니 오?" 정당은 그가 말하는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을 느끼고 그만 화 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대뜸 손을 뻗쳐 그의 귀를 잡고 피가 맺혀나도록 힘주어 잡 아당겼다. 석파천은 너무 아파서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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