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행(김용) - 40편 (40/82)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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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40편 (4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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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다시 한 사람 의 팔이 손에 닿았는데 그 팔 역시 얼음과 같이 차갑게 굳어 버린 죽 은 사람의 팔이 아닌가?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사방을 더듬거리며 뒷 선실 쪽으로 갔다.
발밑에 밟히는 것은 모조리 시체들이었다.
손만 뻗쳐도 시체가 손에 와 닿았다.
그는 놀라움에 큰소리로 부르 짖지 않을 수 없었다.
[배......배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놀람과 당황함에 음성마저도 변해 있었다.
그는 허둥지둥 뱃고물에 이르렀다.
희미한 별빛 아래 갑판 위에는 어지럽게 십 여명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는데 모두 다 빳빳이 굳은 시체들이었다.
이때 강물은 세찬 가을바람에 일렁거려 배마저 흔들리고 있었고 돛 배가 펄럭펄럭 나부끼고 있었다.
거기다가 닻에 하나씩 끼워 놓은, 깨어진 통대나무가 바람이 스치게 되자 휙휙 하는 을씨년스러운 소리 를 내니, 그 소리는 마치 유령이 울부짖는 소리처럼 음산하고 공포스 러웠다.
석파천은 외롭게 자라온 사람이었으나 평소엔 대담했지만 이와 같은 밤중, 더구나 시체들이 가득 널려 있는 배 위에서 괴이한 소리를 듣 게 되자 죽어 있는 시체들이 모조리 살아나서 자기에게 덤벼들 것만 같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언덕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뱃전에 이르고 보니 배는 이미 둑에서 떠나 강물을 따라 두둥실하니 흘러가고 있었다.
원래 이 커다란 배는 윗쪽에서 자연도까지 흘러내려가고 있는 것이 었다.
그는 이날 밤 선실이나 뱃고물 쪽으로 가지 못했다.
그는 선실 위에 올라가 돛대를 얼싸안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이튿날 해가 솟아오르고, 사방이 환히 밝아오자 비로소 두려움이 가 셨다.
그는 뱃고물로 내려갔다.
선실 안팎에는 적어도 오륙십 구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시체에서는 핏자국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칼이나 검을 맞은 상처도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뱃머리로 가 보았다.
선실문 한복판에 두 조각의 번쩍번쩍 빛이 나는 하얀 구리패가 박혀 있었다.
손바닥 크기만한 한 조각 패에는 웃는 얼굴이 새겨져 있었는데 매우 부드럽고 인자한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조각의 구리패에는 흉칙한 흉신 악귀와 같은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두 조각의 구리패는 각기 쇠못으로 선실문 윗쪽에 박혀 있었는데 매 우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두 조각 구리패를 한참 동안 주시했다.
그런데 그 구리패의 사 람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이 느껴져 그는 더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 를 돌렸다.
시체들의 손에는 무기들이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했다.
그는 다시 자세히 살피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의 옷의 어깻죽지 부근에 날개가 달린 조그만 물고기가 하얀 실로 수놓아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배 위에 죽은 시체들은 본래 동료였는데 갑자기 강적을 만 나 모조리 전멸했다고 짐작했다.
배는 여전히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하류쪽으로 흘러 내려 가고 있었다.
정오 무렵에 이르러 맞은편에서 두 척의 배가 나란히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아랫쪽에서 올라오던 배에 타고 있던 뱃사공은 이쪽 배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흘러 내려오자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키를 바로 잡아요, 키를 바로 잡아요!] 그러나 이쪽의 배에서는 키를 잡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더군더나 강물은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며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석파천은 타고 있는 배는 빙글 돌면서 비스듬히 맞은편에서 올라오 던 배와 쾅, 하고 충돌해버렸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니 떠드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또 욕지거리가 곳 곳에서 터져나왔다.
석파천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저쪽의 배를 부수게 되었으니 그들은 반드시 이쪽 배에 탄 사람들 을 잡고 시비를 걸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었을 때 내가 이 배에 탄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누명을 쓰게 될 것이다.
어찌하면 좋지?) 그는 다급한 김에 그만 선실로 들어가 뱃바닥의 널빤지를 뜯고 그 밑으로 몸을 숨겼다.
이때 세 척의 배가 한 곳에 물려서 떠 있었다.
얼마 후에 이쪽 배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리고 곧이어 놀람 에 찬 소리가 들렸다.
[이들은 비어방(飛魚幇)의 사람들이다.
어째서......어째서 모두 다 죽었지?] 또 다른 사람이 놀라서 부르짖었다.
[앗......방주......성대양(成大洋)도 죽었구나......] 갑자기 그 누가 극도로 놀람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상선......상선벌악령(賞善罰惡令)이다!] 그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고, 두려움에 가득차 있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사람들은 하던 말을 뚝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정적만이 감돌았다.
석파천은 배 밑바닥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표정을 살 펴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뭇사람들이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중에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상선벌악령이 다시 강호에 나타날 때가 되었지.
아마 도 상선벌악 두 사자(使者)가 순찰을 돌려고 나왔다가 비어방이 너무 행패를 부리기 때문에 벌을 내리셨는가 보군......] 그리고 한숨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호(胡) 형님, 상선벌악령은 사람을 불러 협객도(俠客島)로 오라고 한다는데......섬으로 데려가서 다시 처벌을 내리되 당장에 죽이지는 않는다고 들었소이다.] 먼저 말했던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순순히 명을 받들어 협객도로 찾아간다면 그렇게 되지.
하지 만 찾아 가더라도 죽고 가지 않더라도 죽기는 마찬가지일세.
성대양 성 방주는 아마 그 명을 따르지 않고 무리를 이끌고 항거하다가 이와 같은 꼴을 당한 모양이네.] 음성이 뾰족하고 가는 자가 입을 열었다.
[상선벌악 두 사자의 공력이 매우 높아 무림에서는 감히 항거할 사 람이 없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호 형님이라고 불리운 자가 되물었다.
[자네의 의견은 어떤가?] 그 사람은 잠시 말이 없더니 잠시 후에야 나직이 말했다.
[상선벌악 사자가 다시 강호에 나타났으니 많은 방파에서는 재앙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군요.] 석파천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 배 위에 시체들은 모두 비어방인가 하는 무리들이고 그 방주마 저도 죽었다고 하는데......어이쿠! 야단났다.
상선벌악 사자들이 장 락방을 찾아가지 않을런지 모르겠구나.)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한시 바삐 장락방의 총타로 돌아가서 패 의원 등에게 이번 일을 알 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은 장락방의 석 방주로 오해 받고, 많은 귀찮은 일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몇 차례 목숨이 위태로운 적도 있었으나 장락방의 모든 사람들이 그 에게 공손하게 대했던 점을 생각하자 여러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선실의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한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호 형님, 이번 일이 우리들과 연관이 되리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리 고 두 사자가 우리 철차회(鐵叉會)로 찾아오리라고 보시오?] 호 형이라 불리운 자가 말했다.
[상선벌악 두 사자가 순찰길에 올랐다면 강호의 어떤 방파도 무사하 지는 못할 것이네.
다만 여러 사람들의 운수가 어떠한지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 그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말했다.
[이렇게 하지.
살그머니 명령을 내려 즉각 총타주(總舵主)님께 사람 을 보내 알리도록 하세.
두 척의 배에 있는 형제들도 모조리 이 배로 옮겨오도록 하고, 배 위의 물건은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고서 홍류항 (紅柳港) 밖의 조그만 어촌으로 가도록 하세......] 이어 그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상선벌악 두 사자가 이 배에 왔었으니 두 번 다시 나타날 리는 없 을 것이네.] 조금 전에 입을 열었던 사람이 좋아라고 맞장구를 쳤다.
[옮소이다.
호 형님의 계책은 역시 절묘하구료.
선악 두 사자가 이 배를 다시 발견하여도 비어방의 시체들로 가득차 있는 배라고 생각하 고 다시 올라오지는 않을 것이외다.....
내가 곧 달려가 변고를 알리 도록 하겠소이다.] 얼마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이 배 위로 몰려들었다.
석파천은 배 밑바닥에 숨어 있노라니 자연히 여러 사람들의 수근덕 거리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말투는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커다란 화가 금방머리 위에 떨어질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 철차회에서는 협객도에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상선벌악 두 사자가 우리들을 찾아올 리가 있을까?] 어떤 사람은 말했다.
[비어방에서 협객도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라구? 내가 보기에 강호 에는 십 년이나 이십 년마다 한번씩 이와 같은 액겁(厄劫)이 일어나 고 하는데 아마 이번에도......] 다른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았다.
[이 형, 총타주가 만약 그 영(令)을 받들어 협객도로 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이 형이라 불리운 자는 차갑게 코웃음쳤다.
[흥! 물론 가면 돌아올 수 없겠지, 삼십 년 동안 그 영을 받고 협객 도로 간 방주들과 총타주, 그리고 장문인들 가운데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들이 없었으니까 말일세.
총타주께서는 우리 형제들에게 결코 야 박하게 대하지 않았네.
우리가 죽음이 두렵다고 어찌 그 어르신 혼자 위험스런 곳으로 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그렇지! 그러니까 잠시동안 피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오.
다행히 천우신조로 우리가 일찍 발견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떤 화를 당하게 되었을지 모르게 되었을 것이외다.
홍 류항 밖의 그 조그만 어촌은 매우 은밀한 곳이니까 모두들 숨어 있어 도 선악 두 사자가 발견하기 힘들 것이외다.] 호 형이라고 불리우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과거 총타주가 그 어촌을 경영하게 된 것은 바로 오늘날과 같은 사 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네.
그야말로 난을 피하기 위한 세 외......세외도원이지.] 굵직한 음성이 입을 열었다.
[우리 철차회에서는 양자강(揚子江) 일대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황제까지 무시하며 제멋대로 행세를 해 왔는데 협객도의 두 사자인가 뭔가 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더니 모두들 개꼬리 감추듯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홍류항 어촌으로 가서 자라새끼처럼 목을 움츠린 채 숨어 살겠다니, 어디 말이나 되겠소? 설사 이번에 피한다 하더라 도 이후 무슨 낯으로 행세를 할 수 있느냔 말이오.
차라리 그들과 목 숨을 걸고 한번 싸운다면 더 떳떳할 것이고, 또 그렇다고 모두 목숨 을 잃게 될 리도 없다고 생각하오.] 그는 매우 용기가 있고 담이 큰 듯 호탕하게 그와 같은 말을 했는데 선실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말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호 형님이라 불리운 자가 말했다.
[그렇지.
우리 강호에서 밥을 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본래 칼끝에 피를 묻히는 짓을 하여 왔지 않은가? 제가랄! 자네들은 언제 저 나두 원(癩頭員) 왕노육(王老六)이 누구를 두려워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 가?] [물론 나 왕노육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소.
으악!] 한데 갑자기 호방하게 지껄이던 사람이 길게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소리가 멎어졌으나 선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곧이어 가볍 게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석파천은 갑자기 물방울이 자기의 손등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런데 손을 가까이 가져와 맡아보니 비린내가 왈칵 풍겼다.
바로 핏방 울이었던 것이다.
피는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뭇사람들이 바로 머리 위에 있기 때문에 조금도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피가 자기의 몸에 떨어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이때 호 형이라는 자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자네들은 이 나두원을 죽여도 마땅하고 생각하지 않는가?] 한 사람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연합니다.
왕노육은 말이 너무나 경솔했소이다.
그러니 호 형님 이 성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하지만......그는......본회에 서 항상 충성을 다해 왔는데......] 호 형이란 자가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나의 조처에 불복하겠다는 것인가?] 그 사람은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처참한 비명소리가 또다시 울려퍼졌다.
[악!] 아마도 그 역시 호가 성을 가진 사내에게 죽음을 당한 모양이었다.
다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석파천의 바로 머리 위에서 쓰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핏물은 그의 몸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호가라는 사내가 잇달아 두 사람을 죽이고 난 후 입을 열었다.
[나의 수단이 악랄한 것도, 의리를 돌보지 않는 것도 아니네.
사실 이번 일은 수백 명이나 되는 형제들의 목숨과 연관되어 있네.
조금이 라도 협객도의 상선벌악 두 사자의 비위에 거슬리게 되는 행동을 보 이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비어방의 친구들처럼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두원 왕노육은 스스로 잘난 체 큰소리를 쳤네.
자기 자신의 목숨 을 버리겠다는 것은 좋으나 총타주와 우리 모든 형제들이 함께 죽어 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느냔 말일세.] 뭇사람들은 일시에 호응했다.
[예, 옳습니다!] 호가하는 사내는 곧 명령을 내렸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선실에서 얌전히 엎드려 있게.
그리고 송 (宋) 형제, 자네는 키를 잡도록 하되 몸에 찢어진 돛배를 감아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발견할 수 없도록 하게.] 석파천은 배 밑바닥에 숨어서 그들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 었다.
선실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다만 뱃전에 찰랑거리 는 물소리만 들려왔다.
그는 더욱 더 인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을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협객도는 어떤 곳일까? 섬에서 파견되어 나온 상선벌악 두 사자는 어째서 그토록 흉악할까? 배에 탄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다니! 철 차회 사람들이 그토록 무서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한참 후에 그는 졸음이 오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속 에 빠진 그가 코고는 소리라도 내면 배 위의 사람이 발견하리라 생각 하고 눈을 크게 뜨고서는 애써 졸음이 오는 것을 참았다.
잠시 후에 철커덕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나고 배는 다시 요동하지 않 았다.
닻을 내리고 정박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자 호가라는 사내의 음성 이 들려왔다.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라.
나와서는 안 되네.
총타주가 왕림하시기 를 조용히 기다려서 그 어른신의 지시를 듣도록 하세!] 여러 사람들은 나직이 대답을 했다.
그들은 살금살금 언덕 위로 올 라갔다.
삽시간에 그들은 모두 배에서 떠나갔다.
석파천은 다시 반나절을 기다렸다.
모든 사람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으리라 생각되자 선실 밑바닥의 널 빤지를 들추고 바깥을 살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발걸음을 죽이고 그 안에서 걸어 나 왔다.
선실 안은 여전히 시체들로 가득차 있었다.
석파천은 한 자루의 칼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허리에 찼던 녹슨 칼 을 내버렸다.
이어서 죽은 시체의 주머니를 더듬어 은조각들을 몇 조각 찾아 내어 갈무리했다.
길을 가다가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 은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그 는 이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뱃고물로 가서 그는 가볍게 언덕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둑을 따라 허리를 굽힌 채 잽싸게 걸음을 옮겨놓았다.
일 마장 정도 달려가서야 그는 언덕가에서 도로로 들어설 수가 있었 다.
이때 그는 아직도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생각하고 역시 멀 리 떠나면 떠날수록 좋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힘껏 달렸다.
다행히 어촌은 외진 곳이어서 부근 십여 리 안에는 인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사람의 행인과도 마주치지 않은 채 길을 갈 수가 있었다.
그는 속으로 여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옛날에만 해 도 부근에는 드문드문 인가가 있었다.
그런데 철차회에서 모두 독을 써서 그들을 죽여 없애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사를 와서 살았지만 오래지 않아 철차회에서 풀어 놓은 독에 중독되어 죽 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인근 마을의 주민들은 홍류항 바깥쪽을 악귀와 염병이 도는 곳으로 간주하고, 칠팔 년간 사람들은 이 고장을 찾지도 않아 어촌은 철차회의 은밀한 소굴이 되었던 것이다.
석파천은 물론 그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다시 수 마장 나아가 게 되었을 때 어촌과는 상당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팠다.
숲속으로 들어가 과일이라도 따 먹으려고 했다.
한데 공교롭게도 몇 걸음을 옮겨 놓기도 전에 수풀속에서 후다닥 커다란 멧돼지가 한 마 리 나타났다.
그 멧돼지는 그를 보더니 고개를 숙인 채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 다.
그는 몸을 약간 구부리며 손으로 칼을 뽑아들고 금오도법 가운데 장 자절지(長者折枝)라는 초식으로 퍽, 하니 멧돼지의 머리통을 후려쳤 다.
멧돼지는 매우 흉악한 놈으로 머리통이 땅에 떨어졌으나 여전히 앞 으로 십여 걸음 달려나간 후에야 쿵, 하니 땅바닥에 쓰러져 죽었다.
그는 속으로 기뻐했다.
(나는 금오도법을 배우지 않았을 때는 멧돼지가 나타나면 고작 달아 날 생각만 했지 감히 죽일 생각을 못했었다.) 그는 한 조각 검은 돌멩이를 주워들고 칼등에다 쳐서 불꽃을 내어 불을 피웠다.
이어 그는 멧돼지의 네 다리를 잘라내 개울가로 가지고 가서 피를 깨끗히 씻었다.
그는 불을 지펴 놓은 곳으로 되돌아와 칼을 불에 빨갛게 달구어 멧 돼지 다리에 붙어 있는 털을 태웠다.
털을 다 태우자, 멧돼지 다리를 나뭇가지에 끼워 불 위에 굽기 시작 했다.
잠시 후에 짙은 고기 굽는 구수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 했다.
한참 고기가 맛있게 익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십여 장 밖에서 말하 는 소리가 들렸다.
[야! 향긋하다.
정말 식욕을 크게 돋우는 냄새인걸.]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저쪽에서 누가 들짐승을 잡아 구워먹는 모양이니 어디 가서 한 번 상의를 해보세나.
우리들에게 조금 나누어 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먼저 입을 열었던 사람이 말했다.
[그렇지, 그래.
가 보세.] 두 사람은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한 사람은 체구가 우람했고 둥근 얼굴에 귀가 컸으며 고동색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다른 한 사람은 키는 매우 컸지만 몸이 비쩍 말라 있었다.
몸에 남 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앞서 걸어오는 사람에 비하면 체구가 반 쪽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비쩍 마른 사람은 입가에 희끗희끗 쥐새끼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 며 얼굴빛은 매우 음침했다.
뚱보는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소형제, 이것은 무슨......] 석파천은 이미 두 사람이 주고받던 말들을 들었던지라 대답을 했다.
[멧돼지 고기인데 양이 무척 많아서 열 사람이 먹고도 남겠소이다.
두 분은 얼마든지 잡수시구려.] 뚱보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사양하지 않겠네.] 두 사람은 모닥불 옆에 앉았다.
불빛에 석파천의 옷차림은 매우 화려했으나 군데군데 해어졌으며 구 겨져 있을 뿐 아니라 핏방울까지 튕긴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띄웠다.
그들은 곧 불 위에서 구워지고 있는 멧돼지 다리에 시선을 옮겼으며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멧돼지 다리에서 기름이 뚝뚝 모닥불 위로 떨어졌고, 소나무 가지의 향기가 배인 멧돼지 다리고기는 먹음직스러웠다.
아직 입에 넣어보지 는 않았으나 맛이 좋을 것 같았다.
비쩍 마른 사내는 허리에서 남색의 호로병을 풀더니 병마개를 뽑고 호로병 안의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아! 술맛 한번 좋다.] 뚱보 역시 허리에서 주홍색의 호로를 풀더니 몇 번 흔들고 난 후 병 마개를 뽑고 호로 안의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아! 술맛 참 좋다.] 석파천은 사연객과 때때로 술을 마시기도 했었다.
술향기를 맡고 보니 통쾌하게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각기 자기의 호로에 든 술을 마실 뿐 자기에게 한모금 마 셔보라는 말이 없었다.
그는 한평생 남에게 구걸해본 적이 없는지라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 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 때, 멧돼지의 네 다리가 익자 석 파천은 입을 열었다.
[다 익었으니 잡수도록 하시오.] 뚱보와 홀쭉이 두 사내는 동시에 손을 뻗어서 통통한 멧돼지 다리를 다투어 뜯어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그들이 막 한 입 덥석 깨물려고 했을 때 석파천이 웃으면서 입을 열 었다.
[그 두 개의 멧돼지 다리가 크기는 하지만 뒷다리입니다.
맛은 앞다 리가 더 좋지요.] 뚱보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젊은이, 자네는 마음씨가 매우 곱군.] 그는 앞다리를 뜯어내더니 씹어 먹기 시작했다.
홀쭉이는 뒷다리를 한입 뜯어보더니 잠시 망설였으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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