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핫핫! 그야말로 배꼽을 잡게 만드는군." 이에 화만자가 냉랭히 외쳤다.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들으셨죠? 사 선배님은 거지는 본래 사람이 아 니니 그와 같은 약속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녀가 비난을 하는 사람이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머지의 사람들 은 소리내어 웃었을 것이다. 적어도 설산파의 동문들은 반드시 맞장구 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아무도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연객의 얼굴에도 다시 푸른 기운이 번쩍하고 빛나더니 곧 사라졌 다. '이 계집애는 말로써 나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하는구나. 남들이 나 를 등뒤에서 이 사모가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말을 하도록 만드는 군.' 그는 갑자기 흠칫 하더니 몸을 떨었다. '아차! 큰일이다. 혹시 저 거지는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함정이 아닐까? 내가 이미 영패를 빼앗아 들었으니 그에게 되돌려 줄 수도 없 는 일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 그는 흠칫했으나 곧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 "하하하! 천하에 어떤 일도 이 사가로 하여금 난처하게 할 수는 없 지" 그는 매우 의젓하게 나이 어린 거지를 향해 말했다. "이 꼬마 거지야. 너는 나를 따라가자. 어떤 부탁이라도 있으면 나에 게 부탁을 해라.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 현철령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는 나이 어린 거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으나 혹시한 나이 어린 거지가 누구의 교사를 받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어려운 문제를 제출하 게 되면 매우 난처한 노릇이라 생각하고 나이 어린 거지를 사람이 없 는 곳으로 데리고 가 자세히 물어볼 작정이었다. 이때 화만자가 한 걸을 다가서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꼬마 형제. 그대는 착한 사람이지? 이 노백부님은 사람 죽이는 것을 가장 좋아해. 그러니 앞으로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세찬 바람이 그녀의 안면으로 밀어닥쳤다. 화만자는 그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을 하라는 말을 마저 할 수 없었다. 원래 화만자는 사연객이 반드시 한마디 말을 내뱉으면 실천하는 사람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전 그녀는 검으로 그의 얼굴을 찌르 려고 했던 것 뿐인데 사연객은 그것을 외상장부에 적어놓았다가 후에 기분이 나쁠 때 갚아 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 그녀 자신은 사연객에 의해 얼굴에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여섯 명의 사형제 가운데 왕만인 외에는 모두 다 그에게 일 검의 빚 을 지고 있는 셈이니 그 빚을 갚게 되었을 때 반드시 몇 사람의 목숨 을 바쳐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연객의 분 노를 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나이 어린 거지에게 앞으로 다시는 사 람을 죽이지 못하게 부탁하도록 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만약에 어린 거지가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된다면 사연객은 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와 다섯 명의 사형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사연객은 그녀의 속셈을 짐작하고 소맷자락을 휘둘러 세찬 소 맷바람을 내쏟음으로써 그녀가 말을 끝맺지 못하다록 만든 것이다. 사연객은 큰소리로 노갈을 터뜨렸다. "아니! 이 계집애가 왜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는 거지?" 그는 다시 한 번 세차게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세찬 바람이 들이닥치 자 화만자는 그대로 서 있지 못하고 뒤로 벌렁 나가 쓰러지고 말았다. 화만자는 뒤로 벌렁 쓰러졌으나 즉시 몸을 일으켰으며 다시 소리치려 고 했을 때 사연객은 이미 나이 어린 거지의 손목을 잡고 앞쪽 골목길 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사연객은 그 나이 어린 거지에게 다른 사람의 교사를 받지 않도록하 려는 것이 분명했다. 뭇사람들은 사연객이 일 장 밖에서 소맷자락을 한번 떨쳤을 뿐인데 화만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 누구도 감히 사연객을 뒤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사연객이 사라지자 석청은 두 걸음 다가서며 경만종과 왕만인에게 포 권의 예를 취했다. "경 아우님, 그리고 왕아우님. 저 사매의 담력이 남자보다 낫구료." 그는 다시 말했다. "혹시 강호에서 이름이 자자한 한매 여협(寒梅女俠) 화만자 사매가 아니시오? 그리고 나머지 네 분 사형제들도 경 아우님이 좀 소개를 해 주구료." 경만종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 었다. "이 곳에서 석 장주 부부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 더 바랄 게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강남 땅으로 갈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 다." 이 것은 바로 석청이 하는 말을 무시하고 자기네들 사형에게 하는 말 이었다. 석청은 일곱 명이 안색이 별로 호의에 차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처음 엔 그들이 사연객의 손아래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불쾌해서 그런가 보 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만종은 자기와 평소 교분이 두터웠으며 타지 에서 만나게 된다면 응당 매우 반가워 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매정하고 무뚝뚝한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경만종은 평소 그를 석형님, 석형님하고 따랐었는데 어째서 갑 자기 칭호마저 바꾸어 말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하던 석청은 얼핏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나의 아들 놈이 또 화를 일으킨 것이 아닐까?' 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경 아우님, 나의 그 장난꾸러기 아들 녀석이 또 아우님을 화나게 만 든 모양이군. 이 형이 사과를 하겠네." 그는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 자 내가 한턱 톡톡히 낼테니 일곱 분은 변량성으로 가서 한 잔 합시다." 안봉일은 석청이 설산파의 제자들에게 매우 다정하게 구는 반면에 설 산파의 제자들이 자기에게 오만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자 설산파를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과 통성명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약간 화가 나기도 하고 겸연쩍어진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흥! 설산파가 뭐가 대단하다고? 거만하기 짝이 없구나. 석장주와 같 이 인의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이지.' 이와 같은 생각에 그는 석청과 민유에게 포권을 취했다. "석 장주, 그리고 석부인. 이 안모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석청은 두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안 채주, 용서하구료. 저의 자식놈인 석중옥(石中玉)이 설산파 봉 (封) 사형의 문하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소이다. 자식놈의 일을 묻느라 고 그 만 안채주에게 예의를 차리지 못했구료." 안봉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이야 당신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와 같이 생각을 하면서 그는 말했다. "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다시 만납시다!" 그는 포권의 예를 하고는 산채의 형제들을 이끌고 떠나버렸다. 경만종등 일곱 사람은 시종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안봉일이 멀리 떠난 후에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겸연쩍음, 난처함, 분노, 치욕 등의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 누구도 먼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석청은 그의 아들을 설사파의 제자인 풍화신룡(風火神龍) 봉만리(封 萬里)의 제자로 들여보낸 것이었다. 거기에는 피치 못할 여러가지 사 연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 너무나 짓궂고 장난이 심할 뿐 아니라 민유가 여러모로 두둔하는 데다가 자기 자신은 엄하게 가르칠 수 없는 까닭이 있기 때 문에 봉만리의 제자로 들여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경만종 등의 태도를 보니 그 아들이 어떤 큰 사고를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백(白) 선배님과 사모님께서도 안녕하신지? 그리고 풍화신룡 봉사형 도 편안하시오?" 왕만인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저의 사부님과 사모님은 당신의 그 개.... 아드님 때문에 울화통이 터져 죽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라오." 그는 본래 '개잡종' 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민유의 측은하고도 맥빠 진 얼굴을 보고는 그만 더듬거리며 끝내 잡종이라는 말을 삼킨 것이었 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욕지거리는 참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그가 말하 고자 하는 본 뜻을 헤아리고 있었으니 크게 욕을 한 것과 다름이 없었 다. 민유는 눈가를 붉히며 입을 열었다. "왕 오라버니, 우리 옥이는 정말 장난기가 너무 심해요. 여러분들에 게 죄를 지었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절을 하려고 했다. 설산파의 일곱 명 제자들은 급히 반례했다. 왕만인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며 더듬거렸다. "석 아주머니, 석 아주머니께서 낳으신 그 개... 그 꼬마 녀석은 너 무나 버릇이 없습니다. 반푼이라도 형님이나 아주머니 두 분을 닮았더 라면 더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했다. "이 왕만인에게 죄를 지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요. 두 분의 얼 굴을 보아서라도 그 녀석을 잡아서 한번 때려주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지요." 그는 다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의 사부님과 사모님에게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백 사형께서는 성질이 열화와 같으시니 야단이란 말입니다. 석 장주, 내 가 우리 문파를 대신해서 말할 자격은 없지만 아무래도 알려드려야 하 겠기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만 우리 백사형은 얼마나 화가 나셨는 지 현소장을 불태우려고 떠나셨습니다. 두...... 분은 잠시 피하도록 하십시오." 그는 침을 삼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술을 사주시겠다는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마실 수가 없습니다. 백 사 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앞으로 저와 상종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 다." 그는 수다스럽게 말을 마구 지껄여 놓았으나 시종 석중옥이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석청과 민유 두 사람을 들으면 들을수록 간담이 서늘해졌다. 사실 이 들 부부는 설산파와 각별한 교분을 가지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백만 검(白萬劍)이 현소장을 태울 정도로 화가 났다니 얼마나 큰 죄를 지었 길래 그 같이 나오나 싶어 두려움이 앞섰다. 그리하여 석청은 연신 자 식놈을 욕했다. "이 못난 자식이 또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지른 모양이군요. 죽어 마땅 한 녀석이 어찌하여 큰나으리와 마나님에게까지 못된 짓을 했단 말인 가?" 경만종이 입을 열었다. "이 곳은 시비가 있었던 곳이니 오래 머물러 있다간 화를 당할지 모 르니 다른 장소로 옮기시지요?" 그는 자기의 장검을 땅바닥에서 뽑아들고 다시 말했다. "석 장주, 가시지요!" 석청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민유와 함께 서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들의 두 필의 말이 천천히 뒤에서 따라왔다. 경만종은 다섯 사제와 사매를 석씨 부부에게 소개했으며 그들 사제와 사매도 석씨 부부에게 오래 전부터 익히 들었다는 등의 말로 인사를 나누었다. 일행이 칠팔 마장을 나아가게 되었을 때 큰 길 옆에 세 그루의 밤나 무가 서 있었다. 경만종은 그 나무를 가르키며 말했다. "석 장주, 저기 보이는 나무 밑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석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소." 그리하여 아홉 명은 나무 아래의 바위와 나무뿌리에 각기 나누어 앉 게 되었다. 석청부부는 매우 초조했으나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다. 경만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석 장주, 불초와 두분과는 매우 교분이 두터웠던 사이지만 솔직히 듣기 싫은 말을 털어놓는데 대하여 원망은 하지 마십시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불초의 의견을 말할 것 같으면 장주는 역시 자제분들을 우리에게 넘 겨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불초가 힘써 사부님과 사모님, 그리고 백 사형 부부에게 사정한다면 자제분의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설사 그의 무공을 제거하게 되더라도 두 집안이 반목하여 원수가 되 어 싸우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석청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아들 놈이 귀파에 들어간 후 삼 년동안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 경 형이 숨김 없이 이야기를 해보시오." 본래 그는 경만종을 아우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상대방이 노 기등등해 있는 것을 보자 아우님이라고 칭하지 않고 경 형이라 고 호 칭을 바꾼 것이었다. 경만종은 물었다. "석 장주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십니까?" 석청은 더욱 궁금한 듯 말했다. "정말 모르오." 경만종은 평소 그의 위인됨을 잘 알고 있었다. 쟁쟁한 명성을 가진 그가 결코 속이거나 허튼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알고보니 석 장주님께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군요." 민유는 궁금하다는 듯 그 말을 가로챘다. "옥이가 능소성(凌素城)에 없나요?" 경만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개... 꼬마녀석이 능소성에 있었다면 끝장이 났을 거외다." 석청은 은근히 속으로 화가 났다. '옥이를 너희들 문하에 들여보내 무공을 익히게 한 것은 백 큰 나으 리와 봉 사형의 위인됨을 존경했기 때문이고 설산파의 무공을 높이 샀 기 때문이다. 설사 옥이가 나이가 어리고 장난질이 심해 문규(門規)를 어겼다 해도 우리 부부의 얼굴을 보아서 죽인다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게 아니냐?' 이와 같은 생각과 더불어 설산파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고 사람의 수가 많다 해도 강호의 이치에 어긋나게 일을 처리할 수 없을 것이라 고 생각하며 언짢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귀파의 문규가 평소 엄하지 않소? 그것은 불초가 이미 알고 있는 일 이외다. 내가 자식 놈을 능소성으로 보내 무공을 익히게 한 것은 좀더 얌전해지기를 바래서였소." 경만종은 약간 안색을 굳혔다. "석 장주께서는 과분한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석중옥 그 녀석은 정 말 황당하기 이를 데 없을 뿐 아니라 몰염치하고 극악무도합니다. 결 코 우리 설산파가 가르칠 수 있는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석청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어린 아이게 황당하고 몰염치하며 극악무도하다고 욕을 한다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군요. 어떤 연유에서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이오?" 경만종은 화만자에게 말했다. "화 사매, 사방을 좀 살펴보고 오구려. 다른 사람이 엿듣고 있나없 나." 화만자는 급히 검을 들고 즉시 사방을 살폈다. 석청부부는 서로 알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화만자를 이 자리에서 피하게 하는 것을 보면 여자들이 들어서는 안 될 거북스런 말인가 싶어 다시 한번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만종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석 장주, 석 아주머니. 저의 백 사형에겐 아들이 없고 딸하나 뿐입 니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나의 사질녀로 말하면 금년에 겨우 열세 살이며 총명하고 천진스럽 고 귀여운 애입니다. 백 사형은 그녀를 여간 총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부님과 사모님도 그 질녀를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했었습니다." 그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의 그 사질녀로 말하지면 대설산 능소성의 공주나 다름이 없으 며 우리 사남매들도 그녀를 봉황처럼 모시지요." 석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아들 녀석이 그 공주님에게 죄를 지었군요. 그렇지요?" 경만종은 계속 말했다. "단순히 죄를 지었다면 괜찮을 것입니다만 그는 너무나 당돌했습니 다. 놀랍게도 우리 사질녀의 수족을 묶고 강간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 다." 순간 이말을 듣고 있던 석청과 민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민유의 안색이 백지창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석청은 놀람을 억제하지 못하며 말했다. "그런, 그런 일이? 중옥은 이제 겨우 열다섯 살 먹은 어린애에 지나 지 않소. 이 중간에는 어떤 오해가 있을 것이외다." 그러나 경만종은 안타까운 빛을 띠운 채 계속 말했다. "우리들도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절대 틀림없는 사실이 니 어떻게 하시겠소? 사질녀를 돌보는 두명의 시녀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방안으로 달려들어가자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도와 달라고 고함 을 지르게 되었는데 고함을 질렀다고 해서 그 녀석은 한 시녀의 한쪽 팔을 잘랐고 또 다른 한 시녀의 다리를 잘랐습니다. 두 시녀는 정신을 잃고 말았지요." 그렇게 말하던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행히 이렇게 되자 그 녀석은 피를 보고 놀라서 사질녀에게 더이상 행패를 부리지 못하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무림에서는 무엇보다도 색계(色戒)를 범하지 못한다. 흑도에 몸을 담 고 있는 호걸이 남의 재물을 빼앗고 살인방화를 하는 것은 그런대로 흔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만약 색계를 범하게 된다면 동료들에게 멸시 를 당하기 마련이었다. 부녀를 강간하는 일은 녹림의 도적들도 감히 가겹게 범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협의도 인물이 그런 짓을 했다면 그것은 완전히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민유는 이때 그만 안색이 홱 변해서 남편인 석청의 옷자락을 잡고는 애원하듯 말했다. "사형, 이 이을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죠?" 석청은 갑자기 황당한 말을 듣자 극도로 심사가 어지러웠다. 만약 그 아들이 사람을 죽이고 화를 일으켰다면 아무리 큰 일이라해도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일은 그로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 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늘이 보우하시어 백소저는 순결을 지킬 수 있었겠구료?" 경만종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몸을 더럽힌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저의 사부님의 성 질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즉시 명을 내려 그 녀석을 불러들이라고 했 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를 보기만 하면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왕만인이 그 다음 말을 이었다. "저의 사부님은 말씀하셨지요. 장주와의 교분이 얕지 않으니 만약 그 녀석을 차마 석장주님의 눈앞에서 죽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장주님 몰래 그를 잡아와 단칼에 죽이는 것이 깨끗할 것이라고 말씀하 셨지요." 경만종은 그를 흘겨보았다. 그가 너무 말이 많은 것이 못마땅한 모양 이었다. 왕만인은 경만종을 바라보았다. "사부님은 분명히 그렇게 분부하지 않았소? 내가 말을 잘못했소?" 경만종을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만약에 두 시녀만 해친 것이라면 큰일을 저질렀다고는 할 수 없습니 다. 그러나 우리 사질녀는 나이도 어린데다가 성격이 매우 꿋꿋했습니 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말했다.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수치를 당하지 세상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다 며 이틀 밤낮을 계속 울더니 사흘째 되던 날 밤 살그머니 뒤창으로 빠 져나가 높은 절벽에서 골짜기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석청과 민유는 다시 한번 놀람에 찬 소리를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 다. "아!" 석청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목숨을 구했소?" 경만종은 말했다. "능소성 밖의 골짜기는 석장주께서도 알다시피 돌이 떨어진다 해도 가루가 날 정도입니다. 가냘픈 아가씨가 몸을 던졌으니 박살이 나지 않고 견디어냈겠습니까?" 이때 설산파 제자 가운데 가만균(柯萬鈞)이라는 젊은이가 입을 열었 다. "가장 억울한 사람은 대사형이십니다. 그는 사부님께 오른팔을 잘리 고 말았습니다." 매우 울분에 찬 어조였다. 석청은 깜짝 놀랐다. "풍화신룡이 팔을 잘렸단 말이오?" "그렇잖고요. 저의 사부님께서는 손녀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또 댁의 아들을 잡지 못하게 되자 크게 노하시어 봉사형에게 제자를 잘못 가르쳤다고 길길이 뛰시다가 갑자기 봉사형의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 을 뽑아서 그의 왼팔을 잘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저의 사모님께서는 사부님의 너무 과격한 처사에 반발하시었고, 두 분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언쟁을 벌이게 되었으며 점자 갈수록 감정이 대립되어서는 옛날 일을 들먹이기에 이르셨습니다." 이어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서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셔서 그만 사모님의 뺨을 후려쳤 습니다. 사모님은 대노해서 문밖으로 달려 나가며 다시는 능소성 안으 로 한 걸음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석청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봉만리의 무공을 흠모하여 외동아들을 그의 문하로 들여보냈거늘 그 에게 폐인이 되는 재앙을 안겨줄 줄이야.' 봉만리의 검법은 강맹하고 신랄한 것이 광풀열화(狂風烈火)와 같았 다. 그래서 풍화신룡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이다. 성격이 열화같은 그는 많은 원수를 맺고 있어 무공을 잃게 된다면 아마 한평생 대설산 에서 내려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석청의 친구에 대한 죄책감은 그야말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왕만인은 이어 다시 입을 열었다. "가 사제, 대사형이 억울하다고 하지만 우리 백사형은 더욱 억울하지 않소? 딸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형수님께서는 실성하고 말았지 않소?" 석청과 민유는 들을수록 놀라운 사실에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 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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