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정당은 엄청나게 큰 힘이 자기의 팔을 후려치는 것을 느 끼고 그만 몸이 뒤로 벌렁 젖혀지게 되었다. 하마터면 고물에 있는, 오봉(烏峯)을 지탱하도록 세워둔 나무기둥을 분지를 뻔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그만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욕을 퍼부었 다. "무자비한 사람 같으니! 아내를 죽이려는 거예요? 그토록 무지막지 하게 손을 놀리다니!" 석파천은 재빨리 사과했다. "아니오. 미안하게 되었소. 나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오." 정당은 자기의 팔을 바라보았다. 팔은 순식간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으며 이미 많이 부어올라 있는게 아닌가! 갑자기 그녀는 고운 얼굴에 기쁜 빛을 떠올리더니 석파천의 두 손 을 잡고 흔들며 기쁨에 찬 어조로 말했다. "천 오라버니, 알고보니 당신은 나를 속이고 있었군요?" 석파천은 아연해졌다. "무엇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오?" 정당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무공을 한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고 했지만 무공을 전혀 상 실하지 않았었군요." 석파천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무공을 전혀 할 줄 ?." 정당은 뾰루퉁해져서 말했다. "다시 또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한다면 나는 더이상 상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손을 뻗쳐 그의 왼쪽 뺨을 때리려고 했다. 석파천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면서 손을 뻗쳐 그녀의 손길을 막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당이 가전 장법은 절묘하여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석파천은 막는다고는 막았으나 전혀 무술을 모르는 그의 손짓이라 자연 허공을 치게 되었고 그 순간, 뺨에 통증과 더불어 기척도 없이 정당의 손이 따귀를 후려치는 것을 얻어 맞고 말았다. 정당은 석파천의 따귀를 후려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순간 에 그녀는 자기의 손바닥이 석파천의 빰에서 뻗쳐나오는 반탄력에 퉁기듯 튀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만 어이쿠, 하는 비명을 내질렀 다. 놀람과 당황함은 조금전보다 더욱 더 컸다. 그녀는 석파천의 무공이 상실되지 않았으니 사랑싸움이라고나 할 까, 귀여워서 하는 손찌검을 가볍게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 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본문의 음유한 기운을 손바닥에 돋우게 되었던 것인데 뜻밖에도 석파천이 막는 수법이 그토록 느릴 수가 없었다. 전혀 무공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살짝 건드렸을 때 다시 그 내력의 강맹한 반탄력에 튕겨나고 말았으며, 얼마나 아픈지 왼손으로 자 기의 오른손을 거머쥐어야 했다. 그러나 이때 석파천의 왼쪽 빰에 새카만 손자국이 나있지 않은가! 그녀의 흑살장(黑殺掌)은 조부로부터 친히 전수받은 것이라 정말 무섭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조예가 깊지 않았고, 석파천의 내력이 심후했기때 문에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으로 끝난 것이다. 새카만 손자국이 끝내 남게 되었으며 적어도 반달쯤 되어야 자국 이 없어지게 되는지라 그녀로서는 가슴이 쓰리고 아팠으며 또한 미안한 마음 그지없었다. 그녀는 그의 허리께를 붙잡고 얼굴을 그의 왼쪽 빰에 부비며 속 삭였다. "천 오라버니, 저는 정말 몰랐어요. 당신은 아직도 원래의 무공 을 회복하지 못했군요." 석파천은 아릿따운 소녀가 안아주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도 한 결 가셔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띵땅, 당신이 금방 화를 냈다가 금방 좋아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소." 정당은 이 말에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러나 저러나 이를 어떡하죠? 이를 어떡하죠?" 그녀는 몸을 바로하고 품속에서 자기로 된 병을 꺼내 한 알의 알 약을 그에게 먹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 흉터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와 같은 일을 겪게 된 두 사람은 더욱 더 친밀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 기댄 채 뱃고물의 난간에 기대어 섰다. 잠시 동 안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정당은 그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 나직이 속삭 였다. "천 오라버니, 그 병을 앓고 난 뒤 초식을 다 잊어버렸으나 내력 만은 잃어 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금나수법을 가르쳐줄 테니 잘 배워두세요. 이 금나수법을 익히게 된다면 크게 도움이 될 거예요." 석파천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신이 가르쳐 준다면 내가 힘써 배우겠소." 정당은 손가락을 내밀어 가볍게 그의 얼굴에 나있는 새카만 손자 국을 쓰다듬었다. 정말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손자국이 난 그의 얼 굴에 입맞춤을 하였다. 순간, 두 사람은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하나같이 마음속이 감미롭고 흐뭇했다. 정당은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은 후 십팔 초의 금나수법을 그에 게 펼쳐보였다. 그날 그 자리에서 여섯 가지 수법을 가르쳐 주었다. 석파천은 금새 여섯 가지 수법을 모조리 기억하게 되었고, 곧이 어 두 사람은 서로 대련까지 했다. 이튿날 다시 여섯 초를 가르쳤다. 사흘이 지나게 되었을 때 석파천은 십팔 초의 금나수법을 매우 익숙하게 펼칠 수 있었다. 이 금나수법은 십팔 초에 불과했으나 이 가운데 변화가 무궁무진했다. 사흘 동안 석파천은 줄곧 정당과 대련을 했는데 정불삼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다 칭찬의 말을 던지기도 했다. 나흘째 되던 날 석파천의 가슴팍 상처는 어는 정도 아물게 되었 다. 정당은 석파천의 진전이 매우 신속한 것을 보고 속으로 여간 기 뻐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불삼은 여전히 백치라고 욕을 했다. 정당은 화가 나서 따졌다. "할아버지, 우리 정씨 집안의 십팔 초 금나수법을 백치에게 가르 친다면 며칠을 걸려서 가르칠 수 있겠어요?" 정불삼은 일시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석파천이 그 금나수법을 완전히 배운 것을 보고 석파천이 결코 바보 멍청이가 아닌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 역시 석파천이라는 이 녀석이 도대체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옛날의 일은 깡그리 잊어버린 것인 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지고 싶지 않아서 억지를 썼다. "어떤 백치는 총명하고 어떤 백치는 우둔하지. 총명한 백치이면 반나절이면 다 배울 수 있소 바보같은 백치인 너의 신랑같은 사람 은 사흘이 지난 후에야 겨우 배울 수 있지." 정당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과거 이 금나수법을 배울 때 며칠이 걸렸 죠?" 정불삼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그때 며칠이라는 시일을 요하지 않았다. 너의 증조부께서 는 나에게 한번만 설명해 주었는데 반나절이 되지 않아서 이 할아 버지는 모조리 배웠단다." 정당은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호......그렇다면 할아버지께서는 알고보니 총명한 백치에 불과하군요." 정불삼은 안색을 굳히며 호통을 내질렀다. "아래 위도 모르는 그런 말버릇이 어디 있으냐? 고약한 것 같으 니!" 바로 이때 한 척의 조그만 배가 하류 쪽에서 위로 쏜살같이 쫓아 오는 것이 보였다. 이곳은 양쪽 언덕과 상당한 간격이 있었고 또한 물살이 매우 잔 잔한 편이었다. 그 배는 돛을 높이 달고서 네 사람이 급히 노를 젓고 있었기 때 문에 조그만 배는 점차 정불삼 등이 타고 있는 배와 점점 가깝게 되었다. 이때 뱃머리에 서 있던 두 명의 백의 사내 가운데 한 사람이 소 리 높여 외쳤다. "그 석가라는 녀석이 바로 앞쪽의 배에 있소? 빨리 배를 멈추시 오. 빨리 배를 멈추시오!" 정당은 나직이 코웃음쳤다. "할아버지, 설산파의 사람들이 또 쫓아왔어요." 정불삼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백치를 잡아가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면 내 속이 시 원해지겠다." 정당은 얼굴을 치켜들고 야릇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총명한 백치를 잡아가라는 거예요? 아니면 우둔한 백치를 잡아 가라는 거예요?" 정불삼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물론 우둔한 백치를 잡아가라는 것이지, 누가 감히 총명한 백치 를 사로잡겠다고 나선단 말이냐?" 정당은 빙그레 웃었다. "맞았어요. 총명한 백치는 무공이 그토록 고강한데 감히 그 누가 그의 비위를 거슬리겠어요?" 정불삼은 어리둥절해져서 노해 부르짖었다. "이 계집애야, 감히 말을 돌려서 이 할아버지를 욕해!" 정당은 찔끔하여 변명하듯 말했다. "설산파에서 할아버지의 손녀사위을 죽인 후에 장락방에서 사람 을 요구해도 내놓지 못할 때 정 셋째 나으리께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강호에서 행세할 수 있겠어요?" 정불삼은 크게 노하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는 것이냐? 얼마든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해봐도 그 말은 그럴싸한 대답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감히 이 정 셋째 나으리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당장 그 녀석의 목을 비틀어 놓고 말겠다." 정당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넷째 할아버지가 남에게 손녀사위를 죽이도 록 내버려 두었다고 비난을 한다면 할아버지가 감히 친아우의 목 을 비틀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설사 그와 같은 배짱이 있다 하더 라도 그만한 재간이 없을 걸요." 정불삼은 대노해서 말했다. "너는 넷째의 무공이 나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느냐? 어림없 는 소리! 근거없는 추측이지. 그는 나보다 무공이 훨씬 약하다." 그러는 사이에 그 조그만 배는 다시 가까워지게 되었고 두 명의 백의 사내 가운데 한 사람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것 봐! 너는 바로 장락방의 석중옥이라는 녀석 같은데 어째서 배를 멈추지 않는냐?" 석파천은 정당에게 물었다. "띵땅, 누가 쫓아오고 있는데 어떻게 하지?" 정당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다 큰 사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단 말이에요?" 이때 그 조그만 배는 이미 일 장의 간격밖에 되지 않는 곳에 이 르러 있었다. 두 명의 백의 사내는 일제히 호통을 내지르며 몸을 훌쩍 날려 석 파천의 뱃고물로 뛰어 오르려고 했다. 그들 두 사람은 가기 손에 장검을 들고 있었는데 장검에서는 눈 부신 광채가 번쩍이고 있었다. 석파천은 두 사람이 바로 토지묘에서 만난 적이 있던 설산파의 제자인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귀찮 게 슛아오는 것일까?' 바로 이때 획,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검으로 그의 어깻죽 지를 찔러왔다. 석파천은 요즘 사흘 동안 정당과 금나수법을 연마했는데 손발이 조금이라도 느리게 되면 귀나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등 쓴맛을 단 단히 맛본 덕택에 이제는 손놀림이 옛날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그는 검이 찔러오는 것을 보자 생각도 해보지 않고 대뜸 금나수 법의 제팔 초인 봉미수(鳳尾手)를 펼쳐 오른손으로 반원을 그리듯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상대방의 손목을 덥썩 움켜잡고 비틀었다. 그 사람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석파천은 오른팔로 그 여세를 몰아 쳐들어서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의 아랫턱을 후려쳤다. 그 사람의 아랫턱이 깨지면서 입안 가득히 선혈과 함께 열 몇개 나 되는 이빨이 빠져 바닥에 뱉아졌다. 석파천은 자기의 봉미수가 이토록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리라고 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그만 깜짝 놀라서 가슴을 두근거려야 했 다. 다른 설산파의 제자는 이때 앞으로 달려나와 협공을 하려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태에 그만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자기가 달려들어 보았자 아무런 송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자기의 사형을 안아 일으켰다. 이때 조그만 배와 이쪽 석파천이 타고 있는 배는 어깨를 나란히 한 상태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상처 입은 사람을 안더니 자기의 배로 되돌아가서는 호통을 쳐 돛을 내리게 했다. 조그만 배가 뱃머리를 돌리더니 물결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내려 가게 되었고, 얼마 후 두 배의 간격은 뚝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 나 바람결에 욕을 퍼붓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석파천은 멍하니 서 있다가 배바닥 위에 낭자한 선혈과 열 몇개 나 되는 이빨을 보고 놀람과 의아함에 잠기게 되었고 매우 미안하 게 생각했다. "이건.......정말 미안하게 됐는걸?" 이때 정당은 선실에서 걸어나와 그의 옆으로 다가서며 미소를 짓 더니 말했다. "천 오라버니, 그 일 초의 봉미수는 정말 깨끗했어요." 석파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한 수가 상대방에게 그와 같이 심한 상처를 입히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소? 나는 그와 같은 재 간은 배우지 않겠소." 정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멍청이가 또 바보병이 재발하는 모양이군.'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무공을 배우는 이상 그 무공이 매서우면 매서울수록 훌륭한 거 예요. 방금 봉미수 일 초를 알맞게 펼치지 않았더라면 그의 장검 이 이미 오라버니의 어깻죽지를 찌르게 되었을 거예요......" 그녀는 똑바로 석파천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당신을 해치 려 드는 판국이에요. 남에게 얻어맞아 상처를 입는 것이 좋겠어 요? 아니면 남을 때려 상처를 입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이빨 몇 대가 빠지는 것 쯤은 가장 가벼운 상처예요. 무림에서 손을써 서 싸우게 될 때 언제라도 목숨이 끊어질 위협을 받게 되는 거예 요. 알았어요?" 이어 그녀는 달래는 투로 다시 말했다. "당신의 마음씨는 곱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의 마음씨도 고으라는 법은 없어요. 만약에 당신이 상대방의 일 검에 죽게 된다면 마음 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석파천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나는 역시 사람을 때려 상처를 입히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으면 서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지 못하도록 하는 무공 을 배웠으면 좋겠군. 그러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 아니겠 소?" 정당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바보같은 소리만 하는군요. 무공을 배우는 사람들은 손을 쓰게 되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예요. 숨바꼭질이나 하고 모래사 장에서 모래성을 쌓는 장난으로 알고 있었나요?" 석파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숨박꼭질하고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는 일을 좋아하오. 걸핏하면 손을 써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런 놀이는 좋아하지 않 소. 그래서 나와 숨바꼭질할 상대자가 없고 또 아황은 할줄을 몰 라 그동안 매우 아쉬워했고 적적하게 세월을 보내 왔소." 정당은 들으면 들을수록 울화가 치미는 말만 듣게 되자 그만 은 근히 화가 치밀어 톡 쏘아붙였다. "이 멍청이, 당신이 그와 같은 말만 하니까 바보지." 화가 나 그녀는 몸을 돌려 선실로 들어가 옷을 입은 채 누워버렸 다. 정불삼은 그러한 그녀를 보고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를 백치라고 했지 않느냐? 역기 백치는 백치야. 무공이 좋아도 백치이고 나빠도 백치는 백치이니, 차라리 일찌감치 죽여 버리면 그만큼 속도 덜 썩을 게 아니냐?" 정당은 신중히 생각해 보았다. '천 오라버니가 정말 영영 그와 같은 멍청한 말만 하고 그런 짓 만 한다면 내가 어떻게 그와 더불어 한평생을 보낼 수 있겠는가? 차라리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한칼에 죽여없애는 것이 오히려 속시 원할 것 같구나.' 그녀는 그가 병을 앓기 전에 달콤한 말로 그녀늘 추켜주던 석파 천을 머리에 떠올렸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자기를 한번 바라보는 시선만 하 더라도 그녀는 그 시선에서 은근한 정을 느끼고 흐뭇해 하지 않았 던가! 헤어지게 된 후 그립고 보고픈 마음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고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크게 병을 앓고 난 직후 헌칠하고 준수하며 현 명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낭군이 지금은 이렇게 멍청이로 변하고 만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만 아프고 혼잡하 였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만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말 았다. 정불삼은 냉랭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운다고 뾰족한 방법이 있겠느냐? 운다고 해서 백치가 재주 꾼이 될 성싶으냐?" 정당은 화가 나서 이불을 밀쳐내며 뾰루퉁해서 쏘아붙였다. "나는 울어서 바보 멍청이를 총명한 백치로 만들어 보이겠어요. 그러면 되겠죠?" 정불삼은 눈을 부릅뜨며 노해 말했다. "터무니 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정당은 더욱 흐느끼면서 생각했다. '설산파 화만자 소저의 표정을 볼 때 천 오라버니와는 아무런 관 계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이가 아릿따운 소저를 보고도 희롱 을 하거나 천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내대장부답지 않 은 행동이 아니겠는가? 내가 정말 그같이 고지식한 멍청이에게 시 집을 간다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 밤이 다 새도록 울면서 거듭 생각에만 몰두했다. 이미 혼례를 올려 부부의 명분이 서게 되었으나 이 며칠간 대낮 에 무공을 연마한답시고 비번히 살과 살이 맞닿게 되었는데도 석 파천은 목석처럼 자기에게 어떤 의미 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보았다. 더군다나 밤에 잠자리는 불과 몇 자리의 거리를 두었는데도 가까 이와서 한번이라도 입맞춤을 해주기는켜녕 손 한번 잡아주는 적도 없으니 세상에 이런 신혼부부도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혼부부는커녕 칠팔십이 넘은 늙은 부부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석파천은 뱃고물 쪽에서 길고 깊은 숨소리를 내면서 한참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그 숨소리를 듣자니 그녀는 더욱 더 약이 올라 곁에 놓인 유엽도 (柳葉刀)를 가볍게 검집에서 뽑아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 바보같은 녀석을 이 세상에 남겨 두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러한 생각이 들자 그녀는 살그머니 뱃고물 쪽으로 서서히 다가 갔다. '당신이 백치로 변하여 이와 같은 참변을 당하는 것이니 나의 마 음이 악독하다고 원망은 말아요.' 그녀는 칼을 치켜들고 그의 머리를 내려치려 하였다. 그러나 칼 을 쳐든 그녀는 순간, 다시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 다. 천천히 칼을 한쪽으로 내려뜨리고 죽이기 전에 한번 더 볼 양 으로 석파천의 어깨를 잡고 자기쪽을 향하도록 가볍게 돌려서 그 의 얼굴을 훑어 보았다. 석파천은 잠결에 몸이 정당 쪽으로 돌아 눕혀지게 되었으나 알아 차리지 못했다. 담담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쳐주었다. 달콤한 미소가 담긴 그 의 얼굴은 온화하며 사랑스러웠다. 무슨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당은 생각했다. '어차피 죽게 될 몸, 죽이게 되더라도 달콤한 꿈이라도 다 꾼후 에 죽이도록 하자. 어찌 되었든 간에 좀 늦춘다고 해서 이런 시각 에 무슨 지장이야 생기겠는가?'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녀는 그의 곁에 다소곳이 앉아 그의 얼 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 웃음빛이 거두어지기만 하면 칼을 들어 내려 칠 심산이었다. 잠시 후 갑자기 석파천은 중얼거리 듯 말했다. "띵땅, 당신은 어째서 화를 내는 거요? 하지만......당신이 화를 내니 더욱 예쁘군. 정말이오......정말 예뻐......백날, 천날 보 아도 부족해......아니! 일만날 이만날 아니, 십만날을 보아도 부 족하오......" 정당은 그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만 가슴이 울렁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천 오라버니, 천 오라버니는 꿈속에서도 저를 잊지 못하고 있군 요.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을 낮에 나에게 들려준다면 얼마나 좋겠 어요? 아! 언젠가 당신의 그 바보같은 병이 치유되고 건강이 다시 회복만 된다면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수없이 들려주겠지요!' 그녀는 뱃전에 이슬로 인해 나무판대기가 촉촉히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석파천이 입고 있는 옷은 매우 얇았다. 측은한 생각이 들은 그녀는 선실의 이불을 가져와 그의 몸을 덮 어 주었다. 그리고는 한참 석파천을 내려보더니 칼을 들고는 선실로 돌아왔 다. 이때 정불삼이 투덜대며 비꼬듯이 말했다. "야밤 삼경에 쥐새끼가 오락가락하는구나. 정말 쥐새끼만도 못하 게 담이 적군. 손을 쓰려고 하면서 손을 쓰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소용이람. 우리 정씨 집안의 후손답지 않게 한심하다!" 정당은 자기의 행동을 할아버지가 모조리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마음이 기쁘기만 했다. 할아버지의 그와 같은 비웃음을 전혀 개의치 않고 조금전 석파천 에게 들은 달콤한 말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를 내니 더욱 예쁘군......일만날 아니, 이만날, 십만 날 보아도 부족해.......' 갑자기 그녀는 훗, 하고 웃음소리를 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백치 같은 천 오라버니, 꿈속에서도 멍청하기는 여전하군요. 한 평생은 기껏해야 백년에 지나지 않고 백년은 삼만 육천날에 불과 한데 어떻게 십만날을 본다는 걸까?......" 그녀는 울다가 웃다가 했다. 그녀는 사경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잠속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잠자고 있던 석파천 쪽에서 놀람에 찬 음성이 들 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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