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행(김용) - 46편 (46/82)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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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46편 (4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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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천은 그들 두 사람의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장락방주이니 또 백만검에게 사로잡혀 갔느니 하는 말들은 마치 자기를 두고 말을 하 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옥아니 무엇이니 하는 말은 또 자기 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본래 자기의 신세에 관해서 가슴 가득히 의문을 느끼고 있었던 것인데 이때 풀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상대방의 의표 를 찌르고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겸연쩍은 일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아예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끝까지 숨어서 들어보자 고 작정을 하게 되었다.
사방의 들판에서는 벌레소리가 요란했고 맑고도 잔잔한 바람이 불어 와 나뭇가지를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석청 부부는 이제 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석파천은 혹시 자기의 종적이 두 사람에게 발견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고 크게 숨 한 번 제도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게 되었을 때에야 겨우 석 부인 민유가 한숨을 내 쉬더니 곧이어서는 나직이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석청은 천천히 말했다.
[당신과 나 이렇게 두 사람은 강호에서 의협의 길을 펼쳐왔으며 한 평생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
이 몇 년 동안 옥아가 편 안함을 보중할 수 있도록 더욱더 애써 여로모로 착한 일들을 했소.
그런데도 만약에 하늘이 정말 우리 두 사람의 대를 이을 사람이 없도 록 만든다면 그것 역시 사람의 힘이 하늘을 이길 수 없는 결과를 보 여주는 것이 아니오? 더군다나 중옥과 같이 불칙한 아들 녀석은 차라 리 없는 것만 못하오.
그러니 우리들은 그와 같은 아들을 낳지 않은 것으로 생각토록 합시다.] 민유는 나직이 말했다.
[옥아는 어릴적부터 짓궂고 장난꾸러기였지만은 그……그애 역시 우 리들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보배가 아니겠어요? 어찌 됐든 간에 견(堅)아가 남의 손에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이후 우리들은 옥아에 대해서 유난히 총애를 한 끝에 그만 오늘과 같은 누를 입게 된 거예 요.
하지만……하지만 저 역시 시종 원망하는 마음은 없어요.
그날 그 토지묘에서 나는 그 애를 찬찬히 관찰했는데 그 애 역시 결코 아 주 나빠진 것 같지는 않았어요.
만약에 내가 실수를 해서 그 애에게 일 검을 찌르지 않았더라면 또한……또한……]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그만 말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하게 되었고 자 기 자신을 원망하고 괴로워하여 마지 않는 것이었다.
석청은 부드러운 말로 달래듯이 말했다.
[나는 줄곧 당신에게 그 일로 인해서 괴롭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설사 그날 우리가 그를 구출해낸다 하더라도 다시 그들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외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 이상 하구려.
설산파의 그 사람들이 어째서 갑자기 하나같이 어디로 간 것 인지 중원무림에서 다시 그들의 소식을 조금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오.
그러니 내일 우리는 바로 능소성으로 달려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서는 어찌되었든 간에 모든 사정을 밝혀보도록 합시다.] 민유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우리들이 만약에 몇 명의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협조자들을 모셔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능소성이라는 용담호혈로 들어가 옥아를 구출 해 낼 수 있겠어요?] 석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사람을 구하는 일이 어찌 그리 수월하겠소? 만약에 중도에서 가로채지 못하게 되고 옥아가 일단 능소성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 은 양이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간 격으로 다시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 이오.] 민유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 눈을 한 번 훔치더니 잠 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이번 일은 전적으로 옥아의 잘못이라고 느껴지지 않아 요.
당신도 보셨지만 옥아의 설산검법이 그토록 생소하지 않아요? 설 산파에서 틀림없이 그에게 제대로 무공을 잘 가르치지 못했을 거예 요.
거기다가 옥아는 또한 자존심이 강하고 오기가 많은 애인지라 틀 림없이 적지 않은 사람들과 원한을 맺었을 거예요.
그러니 이 몇년 동안 그는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당했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은 다시 흐느낌으로 변하고 있었다.
석청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가 내가 생각을 잘못했기 때문이오.
따라서 당신에게 대해서는 정말 미안스럽게 생각하오.
그때 한사코 그 애를 설산파로 보내 무예 를 익히도록 하자고 주장을 한 것이 잘못이었소.
물론 그 당시 당신 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이 마음속으로 여간 아쉬워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소.
그런데 뜻밖에도 풍화신룡(風火神 龍) 봉만리(封萬理)와 같은 쟁쟁한 사내대장부가 우리 부부와도 그토 록 절친한 교분을 가지고 있는데 옥아를 푸대접하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구려.] 민유가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 일이야 어떻게 당신만을 탓할 수가 있겠어요.
당신께서 옥아를 능소성으로 올려보낸 것은 전적으로 저를 위해서 내린 조처가 아니겠 어요? 당신께서는 그 당시 말씀을 하지 않았지만 내 어찌 그 뜻을 모 를리 있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더욱더 고즈넉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견아의 원수를 갚고자 하나 저 혼자의 힘으로는 이루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고비길에 당신이 또 나서서 손을 쓰기도 거북 한 처지인데다가 상대방이 본문 무공에 대해서 무척 잘 알고 있기 때 문에 틀림없이 해소시키는 방법이 있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지 않겠 어요? 만약에 옥아가 설산검법을 다 익히게 된다면 우리 모자 두 사 람이 손을 맞잡고 싸우게 되었을 때에 적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그 누가……아!] 석파천은 그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모조리 듣고 있기는 했으나 태반은 좀처럼 풀이를 할 수가 없었다.
(석 부인께서는 저토록 그녀의 자식을 그리워하는구나.
아마도 저분 들이 말씀을 하는 소리를 들으니 그녀의 아들이 설산파의 사람에게 잡혀간 모양이다.
나는 차라리 저분들을 따라서 능소성으로 들어가 저분들을 도와서 사람을 구해야겠구나.
그녀는 몇 명의 힘이 되는 협 조자들을 구했으면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는 정히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십여 필 의 말이 달려왔다.
석청 부부는 말이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 더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얼마 후 십여 필의 말이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고 누가 외치는 소리 가 들렸다.
[여기 있습니다.] 곧이어 충허 도인의 음성이 들렸다.
[석 사제와 민 사매, 할 말이 있어서 달려왔네.] 석청은 민유는 쌍쌍히 달려나가며 입을 열었다.
[충허 사형, 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이까?] 그러고 보니 천허와 충허 등 십여 명의 사형제들이 모두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은 각기 한 사람씩 안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안기 사람이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 다.
충허는 낭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석 사제 그리고 민 사매.
관에서 상선벌악의 두 동패를 얻지 못했 다고 해서 간계를 써서까지 동패를 빼앗아가다니 그럴 수가 있는가… …] 그렇게 말하는 그는 숨이 가쁜 듯 숨을 몰아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구나 독수를 써서 조허와 통허(通虛) 두 사제를 죽이려 하다니… …너무 지나친 행동이 아닐까?] 석청과 민유는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 조허와 통허 두 사형이 독수를 입었다는 말입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정말 두 분 사형이 피살되셨나요?] 그들 부부는 두 사형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미처 변명도 하지 못했 다.
충허는 노기등등하여 외쳤다.
[자네들이 비열한 자들과 결탁하여 독약을 쓰지 않았다면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냔 말일세.] 그리고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조허와 통허는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지만 아마 지금쯤 숨을 거두 었는지도 모를 일이네.] 석청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저에게 좀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조허와 통허에게로 다가가려고 했다.
한데 바로 이때 휙 하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더불어 몇 명의 도사 들이 일제히 장검을 뽑아들고 석청의 앞을 막았다.
천허는 탄식하고 입을 열었다.
[길을 터주어라.
석 사제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몇 명의 도사들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검을 거두고 한켠으로 물러섰 다.
석청은 품속에서 화섭자를 꺼내 두 도사의 얼굴을 찬찬히 비춰 보았 다.
조허와 통허의 얼굴이 검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극독에 중독된 것 이 틀림없었다.
콧김을 맡아보니 겨우 한 가닥의 숨만 붙어 있었다.
상청관의 무공은 뛰어난 편이었다.
그리고 조허와 통허는 내공이 매우 심후했다.
거기다가 직접 석파천 의 독장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손에서 뻗쳐나온 독기를 들 이마셨기에 어지러워 쓰러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일시 삼각을 견뎌낼 것 같지 않았다.
석청은 잠시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어서 민유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사매, 어느 파의 독인지 살펴보구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칠팔 명의 사형제들이 자기들을 완전히 에 워싸고 검을 뽑아들 채 서 있는 것을 알았다.
민유는 주위의 그와 같은 사태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석청이 내미는 화섭자를 받아들고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이때 그녀는 두 사람의 입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데 그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 아닌가! 그녀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암담하게 말했다.
[강호에 이와 같은 극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 이어 그녀는 천허와 충허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두 분 사형은 어떻게 하다가 중독된 것인가요? 독약을 잘못 복용한 것인가요? 아니면 적이 독을 묻힌 암기에 맞은 것인가요? 그렇다면 상처는 또 어디죠?] 충허는 노해 부르짖었다.
[자네들에게 물어보려고 달려온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아마도 식사를 할 적에 자네들이 몰래 술에 독을 탄 것이 아닌가?] 석청은 충허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형, 그게 무슨 말씀이오?] 충허는 노해 부르짖었다.
[생각해보게.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유독 동패를 가지고 있는 조허 만이 중독되었으니……그리고 동패도 사라졌으니 자네들의 행위가 아 니고 누구의 짓이냔 말일세.] 민유는 그와 같은 다그침을 받자 한없이 억울했다.
본래 온순하고 단정한 그녀는 어릴적부터 사형들에게 따뜻하면서 예 의바른 행동을 해왔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 눈물만 글썽이며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것 같았다.
석청은 이 가운데 필시 어떤 곡절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상청관에서 떠나온 사람이고 또 동패를 손에 넣 으려고 했던 만큼 혐의를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허나 석청은 처의 온순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위로의 뜻으로 처의 오른손을 꼭 쥐어주었다.
민유는 억울하기 이를 데 없어 말을 더듬었다.
[나는……나는……] 그러다가 그녀는 끝내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검술에 조예가 깊고 강호에 명성이 드높은 여걸이었지만 이와 같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될 때는 역시 여느 여자와 다를 바가 없이 약해 지는 모양이었다.
충허는 노기등등하여 외쳤다.
[운다고 죽게 된 우리 두 사제가 살아날 수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 의 죽음에 눈물을……]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불쑥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당신들은 어째서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좋은 분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오?] 바로 충허의 등뒤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뭇 사람들은 그 소리가 우렁찬 것을 느끼고 놀라 일제히 고개를 돌 려 소리난 곳을 바로보았다.
수 장 밖에 옷차림이 남루한 사람이 서 있었다.
동녘이 점차 밝아올 무렵이라 그 사람의 얼굴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었는데 매우 젊은 사람이었다.
석청과 민유는 그 젊은이를 발견하자 크게 기뻤다.
민유는 탄성까지 발했다.
[아! 네가……] 그러나 그들은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만치 옥아라고 부르지는 않았 다.
나탄난 젊은이는 바로 석파천이었다.
석파천은 풀속에서 숨어서 사태를 지켜볼 뿐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나서게 되면 도사들과 싸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또 사람을 죽 이지 않겠느냐 하는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충허의 말이 갈수록 사나워지고 자기에게 호의를 보여준 다 정하고 인정많은 아주며니가 자기 때문에 수모를 당한 끝에 눈물까지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때 충허가 큰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어째서 빈도가 죄없는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다고 하는가?] 석파천은 늠름한 태도로 말했다.
[석 장주와 석 부인은 당신네들의 동패를 갖지 않았는데 당신이 자 꾸 가졌다고 하니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충허는 검을 든 채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외쳤다.
[자네와 같이 어린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나서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가?] 석파천은 자기가 그 동패를 가졌다는 것을 시인하려고 했다.
그러면 상대방이 빼앗으려고 할 것이고 자기가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들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신중히 대답했다.
[물론 내가 알고 있기에 하는 소리외다.] 충허는 그 말을 듣자 이 젊은이가 사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누가 가져간 것이지?] 석파천은 석청 부부를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
[어쨌든 석 장주와 석 부인이 가져간 것은 아니오.
당신은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며 석 부인으로 하여금 눈물까지 흘리게 했소.] 그리고 그는 엄숙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그야말로 큰 실수를 저지른 셈이니 빨리 석 부인에게 사과를 하시 오.] 민유는 그동안 그렇게 그리워하고 근심했던 아들이 무사한 것을 보 자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더구나 그 아들에게 무수한 심혈을 기울인 그녀가 아닌가? 또 그동안 남모를 눈물도 많이 흘린 그녀였다.
그러한 그녀에게 아 들이 나서서 어머니를 편들 뿐 아니라 충허에게 사과를 하라는 말까 지 하는 것을 보고 한없이 위로를 받았다.
이십 년간 아들을 위해 고 생하며 받은 굴욕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석청 역시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석중옥이 못된 짓을 하지만 어머니를 위하는 효성은 지극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충허는 그가 반박하고 나서는 것을 보자 소리높여 외쳤다.
[네 녀석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나보고 석 부인에게 사과를 하라고 하느냐?] 민유는 이때 기쁨에 충만되어 충허의 불손한 인사마저 잊어버렸다.
오히려 아들이 그와 충돌을 일으키면 사문의 화목을 깨뜨린다는 생각 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충허 사형은 일시 오해를 한 것이고 모두 한 집안 사람이니 사과할 것까지는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석파천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모두 너의 사백과 사숙이시다.
빨리 인사 드려 라.] 석파천은 본래 민유에 대해 포근한 감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지금 눈물을 글썽이는 눈동자에 사랑스럽고 애처롭다는 듯한 빛을 띠고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대하자 가슴속으로부터 뜨 거운 것이 확 치밀었다.
한평생 그와 같은 정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라난 그는 지금 죽으라고 해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며 그까짓 절 몇 번 하는 것 쯤 뭐가 어 려우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즉시 그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서 무릎을 끊고 충허쪽을 향해 절 을 했다.
[석 부인께서 절을 하라시니 당신들에게 절을 하는 것이오.] 천허와 충허 등은 어리둥절해졌다.
석파천이 석 부인에게 그토록 순종하는 것을 보고 아들 하나는 죽었 고 다른 아들 하나는 그 누구에게 사로잡혀갔다고 했으니 아마도 석 청 부부의 제자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충허는 성질이 급한 편이었으나 현문(玄門)의 사도인지라 석파천이 그와 같은 대례를 행하는 것을 보고 화가 가라앉았다.
그는 즉시 말에서 내려와 석파천을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뭐 그렇게 겸손해 할 것은 없네.] 한데 석파천은 석 부인이 자기에게 큰 절을 하라고 했으니 일일이 절을 다 해야겠다는 생각에 충허가 부축해 일으키려고 하는데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충허는 부축을 하려는 그 순간 석파천의 몸이 천근같이 무거워진 것 을 느꼈다.
동시에 울화가 치밀었다.
(흥! 이 녀석이 자기의 내력을 믿고 윗어른인 나에게 자랑을 하려고 하다니.) 그리고 그는 내력을 두 팔에 돋우고 힘을 주어 들어올리려고 했다.
들어올렸다가 왈칵 밀어버리면 석파천이 곤두박질치게 되는 것이다.
석청 부부는 충허의 자세를 보고 동문으로 같이 무예를 배운 만큼 이미 자기 아들의 버릇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석청은 약간 울화가 치밀어 속으로 코웃음쳤으나 충허가 자 기의 사형이니 부득이 아들로 하여금 쓴맛을 약간 보도록 하는 수밖 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민유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형!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한데 갑자기 휙 하는 소리와 더불어 충허의 몸뚱아리가 허공으로 치 솟더니 뒤로 날아가 바로 자기 말에 부딪쳤다.
그리고 몸이 휘청하는 것을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을 써서 간신히 자세를 바로 잡았다.
한데 이번에는 말이 길게 울부짖더니 앞발굽을 었다.
원래 석파천의 웅후한 공력이 충허의 압박하는 힘에 반탄력이 생기 게 되어 충허가 오히려 곤두박질 칠 뻔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모두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석청 부부는 양주성 밖의 토지묘에서 석파천과 검법을 대련한 까닭 에 그의 내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웅후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역시 어리 둥절해지고 말았다.
충허는 자세를 가다듬더니 왼손을 허리로 가져가 장검을 뽑아들었 다.
그는 극도의 분노에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좋아……좋아 좋아!] 연거푸 세 번 좋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남몰래 자기를 조절한 것이었 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제와 사매가 키워낸 제자는 과연 비범하군.
빈도는 가르침을 받 아보야겠네.] 이어 그는 장검으로 석파천의 가슴을 겨누었다.
석파천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오.
나는 당신과 싸우지 않겠소.] 천허는 석파천의 무공조예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사백부인 충허가 석파천을 이겨도 영광스러울 것이 없지만 진다면 크게 창피를 당하는 일인데 마침 석파천이 사양하자 잘 되었다고 판 단하고 즉시 입을 열었다.
[모두 한 집안 사람끼리 무엇을 겨룬다는 것인가? 무공을 대련하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것이네.] 석파천은 냉큼 그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당신들은 석 장주와 석 부인의 사형들이신데 내가 손을 써서 당신들을 죽인다면 크게 잘못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독장을 펼쳤다가는 다시 상대 방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의구심을 그대로 말해버린 것이었다.
상청관의 뭇 도사들은 평소 무공에 자부하는 바가 많았다.
그들은 석파천이 호의로 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그만 발끈해졌다.
십여 명이나 되는 도사들 가운데 칠팔 명이 치를 떨며 야단이었다.
석청은 호통을 내질렀다.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 함부로 그런 말 하면 못쓴다.] 충허는 장문사형의 말에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멸시의 말을 듣고 보니 더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 었다.
충허는 다시 성큼 앞으로 나서며 호통을 쳤다.
[좋다.
도대체 네가 우리들을 어떻게 모조리 죽일 것이지 두고 보아 야겠다.
어서 손을 써 보아라!] 석파천은 연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당신과 손을 쓰지 않겠소.] 충허는 더욱 노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크게 외쳤다.
[흥! 나같은 사람하고는 싸울 만한 가치도 없다는 게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휙 하니 석파천의 어깻죽지를 노리고 찔 러왔다.
석파천에게 무기가 없는 것을 보고 요혈을 노리지 않는 예의를 보인 것이다.
상청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는 적과 싸워본 경험이 석청 부부에 비해 적기는 하지만 검술의 조예는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석파천은 일시 피하지 못하고 그만 퍽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어 깻죽지를 찔리고 말았다.
어깨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민유는 놀라 부르짖었다.
[어마!] 충허는 노기등등하여 천천히 호통을 쳤다.
[빨리 검을 뽑아라!] 석파천은 이미 석 장주의 두 사형을 죽였는데 다시 손을 써서 사람 을 죽인다면 자기는 나쁜 사람이 될 것이고 석 부인에게 미안한 노릇 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충허가 검을 찔러올 때 그는 장력으로 상대방 의 검을 밀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 손바닥에서 독이 뻗쳐난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뒷짐을 지었다.
아예 손을 쓰지 않을 결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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