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행(김용) - 48편 (48/82)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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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48편 (4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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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천허는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져서는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석청은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닥쳐라.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느냐?] 석파천은 고개를 숙였다.
[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진작 독 있는 손바닥을 묶 어서 칼만 가지고 싸웠더라면 그런 일도……그 두 사람도……] 그러다가 그는 자기가 조허와 통허 두 사람의 도사를 죽이게 된 사 실이 밝혀진다면 크게 소란이 일어나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 그만 멈칫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천허 등은 속으로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어서 다투어 호통을 쳐 물었다.
[너의 손에 독이 있다고?] [두 분 도인은 바로 네가 죽인 것이냐?] [그 두 조각의 동패는 네가 훔쳐간 것이 아니냐?] 그러는 가운데 여러 도사들 중에 장검을 다시 뽑아든 사람도 있었 다.
석파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그들을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소이다.
그런데 손을 한 번 쳐들 자마자 그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소이다.] 충허는 분노가 극에 달해서는 석청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석 사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가 한 마디라도 해보 게.] 석청은 매우 마음이 어지러워져 고개를 돌렸다.
이때 민유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역시 두려움과 죄송하다는 표정 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입을 열었다.
[사문의 의리가 더 중합니다.
저 조그마한 짐승같은 녀석이 곳곳에 서 화근만 불러 일으키니 저희 부부들로서는 보호할래야 보호할 수가 없군요.
장문 사형께서 처리하십시오.] 충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리고 그는 장검을 쳐들고 앞으로 걸어나와 다른 도사들과 협공을 하려고 했다.
민유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잠깐!] 충허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매, 또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민유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 사형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소이다.
어쩌면 구할 수 있을지 도 모르겠군요.] 충허는 싸늘히 냉소를 흘렸다.
[허허허……두 사제가 이미 기이한 독에 중독되었는데 어떻게 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사매의 그 한마디는 사람을 놀리는 것이 아니겠는 가?] 민유 역시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슬쩍 석파천을 향해 물었다.
[얘야! 너의 손바닥의 독은 어떻게 된 것이냐? 해약이 없느냐?] 그러면서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며 다시 말했다.
[너의 주머니에 해약이 있는지 없는지 보아야겠다.] 석파천에게 다가선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척하면서 석파천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빨리 도망쳐라.
아버지와 엄마는 너를 구할 수가 없다.] 석파천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버지와 엄마라고요? 누가 아버지고 엄마란 말인가요?] 그는 조금전 천허가 자제분이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듣긴 했 으나 자제분이니 영랑(令郞)이니 하는 말이 곧 아들이란 뜻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 듣지를 못했던 것이었다.
또 석청 부부가 얘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그저 보통 부르는 말 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 부부는 바로 자기를 자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등심에 딱딱한 느낌이 전해왔다.
바로 석청 이 그의 등심을 검의 끝으로 가볍게 누른 것이다.
그리고 석청은 민유에게 말했다.
[사매, 우리는 이 녀석 때문에 사문의 의리를 저버리고 이 녀석을 도망치게 할 수는 없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매우 괴로운 빛이 서려 있었다.
민유는 떨리는 음성으로 석파천에게 물었다.
[얘야, 두 분 백부님께서 중독되셨단다.
정말……구할 수 없겠느 냐?]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던 도사는 영허라고 했다.
그는 그녀의 표정이 크게 변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혹시 아들에 대 한 사랑이 너무 지나쳐 손을 써서 덤비든가 또는 자결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섯 손가락을 뻗쳐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손에 든 장검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때 민유는 온 정신을 석파천에게 쏟고 있어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전혀 주의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영허는 쉽게 그녀의 장검을 뺏을 수가 있었다.
석파천은 그가 민유의 장검을 빼앗는 것을 보고 부르짖었다.
[당신! 뭣 하는 짓이오!] 그리고 그는 오른손을 뻗쳐 민유의 장검을 도로 빼앗으려고 했다.
영허는 검을 옆으로 휘둘러 그의 손바닥을 베려고 들었다.
석파천은 손을 내리더니 되려 영허의 손목을 움켜 잡으려고 들었다.
정당이 그에게 가르쳐 준 십팔 초의 금나수법 가운데 일 초인 구연 환(九連環)이었다.
이 일 초에는 아홉 가지의 변화가 숨겨져 있으며 금나수법으로서는 절묘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허와 같은 상청관의 고수를 상대로 할 때는 별로 효력이 없었다.
영허는 갑자기 호통을 내질렀다.
[좋아!] 그는 검을 빙글 돌려 막았다.
그러나 별안간 그는 몸을 휘청하더니 털썩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석파천은 손바닥에 서려있는 독이 금나수법을 펼치게 되었을 때 뻗 쳐나온 것이었고 영허가 좋다는 한마디를 던지게 되었을 때 자연히 바람에 섞인 독기를 들어마시게 되어 중독이 된 것이었다.
뭇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을 물러섰다.
모두들 안색이 크게 변해서는 마치 유령을 대하듯 두려운 눈초리로 석파천을 바라보았다.
석파천은 이번에야 말로 더욱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했다.
뭇 도사들이 물러서기는 했으나 각기 장검을 들고 사방을 에워쌌는 지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다면 반드시 많은 사람을 해쳐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방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마침 영허가 두 손으로 아 랫배를 얼싸 안은 듯하고서 자꾸만 배를 문질러대는 것을 흘낏 발견 하게 되었다.
아마도 심한 복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상청관의 뭇 도사들은 내력이 심후한 관계로 철차회의 무리들처럼 극독을 들이마시자마자 절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몇 시진 동안은 견디어 낼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는 있 었다.
석파천은 갑자기 장삼과 이사 두 형이 철차회의 지하 대청에서 중독 되었을 때 그들 역시 이토록 격렬한 복통을 느꼈던 광경과 나중에 장 삼으로부터 그들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침 받아 자기가 그들의 극독을 해소시켜 준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앞으로 다가가 영허를 부축해서 단정히 앉혔다.
사방에 늘어서 있는 뭇 도사들은 검광을 번뜩이며 곧 그를 찌를 기 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는 그는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에 그와 같은 형세를 아랑곳 하지 않고 왼손을 영허의 등뒤에 있는 영태혈에 갖다대고 오른손으로 는 가슴팍에 있는 전중혈로 가져갔다.
그리하여 장삼이 가르쳐 준 요결대로 왼손으로는 진기를 주입시키고 오른손으로는 영허의 몸안에 있는 독기를 빨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영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뜸 화를 벌컥 냈다.
[제기럴! 이 조그만 녀석이……] 뭇 사람들은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영허가 도사의 신분으로 그와 같은 욕지기를 내뱉는다는 것은 출가 인으로서 매우 수양이 모자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의 말에 모든 사람들은 그가 생명을 건지게 되었음 을 표시하는 것이므로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민유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얘야, 조허와 통허 두 사백께서도 중독되셨으니 빨리 구원을 하도 록 해라.] 이렇게 되자 두 명의 도사가 잽싸게 한 가닥 숨만 붙어있는 조허와 통허를 안아서 석파천의 앞으로 다가와 그의 앞에다 앉혀 놓았다.
석파천은 똑같은 방법을 사용해서 극독을 해소시켰다.
물론 그들은 중독 상태가 심한지라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두 사람에게 각기 향 한 대 피울 시간을 들여서야 그들 몸안의 독기 를 가까스로 빨아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조허는 정신을 차리게 되자 크게 욕을 했다.
[제미럴!] 그런가 하면 통허는 다음과 같은 욕을 했다.
[개새끼가 기른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감히 독을 써서 너의 이 도사 를 나으리를 해쳐!] 석청 부부는 너무나 기뻐 세 사람의 욕지거리에 전혀 개의치 않았 다.
다만 속으로 평소 세 사형이 존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올바르지 않는 일에는 좀처럼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던데 반해 이번에는 정말 득도한 고인답지 않게 거치른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것이 우습게만 느 껴졌다.
이때 민유는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얘야! 너의 조허 사백부님의 동패를 네가 가졌다면 사백부에게 돌 려드려라.
이 어미는 필요치 않다.] 석파천은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라구요?] 그러면서 그는 동패를 꺼내 망연히 조허에게 내주고는 중얼거렸다.
[아주머니가……저의 어머니란 말이에요……] 천허는 이때까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석 청과 민유에게 말했다.
[사제와 사매,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네.] 그는 이번에 헤어지게 되다면 다음에 만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고 일행을 이끌고 돌아 갔다.
석파천은 멍하니 민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뭉개구름과 같은 짙은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유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를 띠었다.
[바보 같은 녀석! 너는……너는 너의 아버지와 에미도 몰라보느냐?] 그리고 그녀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를 끌어안았다.
석파천은 철이 든 이후로 이토록 따뜻하고 애틋한 정을 받아 본 적 이 없었다.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격정에 무어라고 입을 열 줄을 몰랐다.
한참 후에야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석 장주가 저의 아버진가요? 저는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아주머니는 저의 어머니가 아니에요.
전 우리 어머니를 찾고 있어 요.] 민유는 석파천이 자기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는 말에 서글픔이 복 받쳐 올라 터지려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불쌍한 녀석, 네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오랜 세월이 흘 러서 아버지와 에미의 모습을 잊어버렸겠지……]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대견하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현소장을 떠날 때 이 에미의 가슴에 닿던 너의 키가 이제 너의 아 버지보다 커졌구나.
얼굴 모습도 변해서 지난번 토지묘에서도 백만검 에게 잡혀 있지 않았더라면 못 알아볼 뻔했다.] 석파천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게 여겼다.
자기의 어머니 얼굴은 싯누렇고 키도 민유보다는 작은데 잘못 보았 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석 부인,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요.
난……난 당신네들의 아들이 아닙니다.] 민유는 석청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형, 이 애를 좀 보세요……] 석청은 아들이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말에 잔꾀가 많은 자기 아들 석중옥이 또 무슨 꿍꿍이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그리고 능소성에서 큰 화를 불러일이켰고 장락방에서 나쁜 짓을 많 이 저질러 악명이 낭자한 나머지 부모님을 인정할 면목이 없든가 책 벌이 두렵기도 하고 부모에게 누를 끼치게 될까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슬쩍 물었다.
[그럼 너는 장락방의 석 방주이냐?] 석파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들 나를 석 방주라고 하는데 사실 모두 잘못본 것이지요.
난 석 방주가 아닙니다.] [너의 이름은 뭐냐?] 석파천은 얼굴에 망연한 빛을 띠었다.
[잘 모르겠소이다.
저의 어머니는 저를 개잡종이라고 불렀지요.] 석청 부부는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진지한 석파천의 얼굴 표정에서 그는 석파천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석청은 눈짓을 하여 민유를 십여 걸음 떨어진 한쪽으로 불러 나직이 물었다.
[우리 옥아가 맞소? 옥아가 장락방의 방주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 는데 저 애처럼 멍청한 녀석이 방주가 될 수 있겠소?] 민유는 흐느끼며 말했다.
[이미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모습이 조금은 달라진 것이 당연 하죠.
난……우리 아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석청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그럼 당신은 아무 의심도 느끼지 못하오?] 민유는 주저주저하는 빛을 보이며 대답했다.
[의심은 약간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나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지 만……꼬집어서 이유를 말할 수 없으나 자꾸만 우리 아들같이만 생각 돼요.] 석청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들뜬 어조로 나직이 외쳤다.
[아! 방법이 있소.
사매, 그날 그 계집이 당신을 해치려고 했을 때 ……] 그 일은 이들 부부가 한평생 가장 한스럽게 여겼던 일이라 두 사람 은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은 들먹이기도 싫어했던 나머지 그는 애매하게 한 마디를 하고 얼버무렸다.
민유는 그 말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래요.
내가 그에게 이야기하죠.] 그리고 그녀는 옆에 있는 바위 곁에 앉아 석파천에게 손짓을 했다.
석파천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민유는 바위를 가리켰다.
그녀는 석파천을 자기 옆 바위에 앉히고 입을 열었다.
[얘야, 네가 첫 돌이 지난 얼마후의 일이었다.
어느 여도적이 이 에 미를 헤치려고 집으로 잠입했다.
그 당시 너의 아버지도 집에 없었고 이 에미는 너의 동생을 낳은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대적할 힘이 없었 다……]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그 여도적은 이 에미만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죽이고 너의 아우마저 죽이려고 했다.] 석파천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래 나를 죽였어요?] 그러나 그는 곧 실소를 했다.
[나도 멍청하군.
지금 이렇게 살아있으니 당연히 죽지 않았는데.] 민유는 웃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나는 왼손으로 너를 안고 오른손에 검을 들고 억지로 버티어내고 있었다.
그 여도적은 무공이 대단했거든.
정히 위급해진 그때 너의 아버지가 돌아오시게 되었지.
그 여도적은 세 개의 금전표를 던졌다 ……] 계속되는 그녀의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세 개의 금전표 가운데 두 개는 민유가 검으로 쳐서 떨어뜨릴 수 있 었으나 한 개는 그만 석중옥의 엉덩이에 적중되었다.
몸은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놀란 나머지 민유는 기절을 했는데 그때 마침 석청이 나타나자 그 여인은 도망을 쳤다.
석청은 그녀를 쫓으려고 했으나 몰래 그녀가 잠복시킨 고수가 있을 지도 모르고 또 민유를 구하기 위해 멀리까지 쫓을 수가 없었다.
그때 석청은 여도적이 갓난 아기를 데리고 가기는 했으나 정말 아기 를 죽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데 사흘 째 되던 날 빼앗긴 동생이 시체가 되어 되돌아왔다.
어린 가슴에 두 자루 장검이 꽂혀 있었는데 한 자루는 검은 검이고 한 자루는 흰 검이었다.
뿐만 아니라 두 자루의 검에는 각기 석청과 민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을 때 눈물이 비오듯 흘릴 뿐 민유는 더 이야 기를 계속하지 못했다.
석파천은 의분을 느끼고 부르짖었다.
[그 여도적은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어린애가 무엇을 안다고 그와 같은 독수를 써서 죽이다니……] 그리고 그는 아쉬운 듯 다시 말했다.
[저에게 동생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석 부인, 우리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답니다.] 민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얘야, 너는 정말 너를 낳아준 친에미를 잊었단 말이냐? 내가……바 로 널 낳은 친에미란다.] 석파천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 다.
[아닙니다.
사람을 잘못보셨을 것입니다.] 민유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날 금전표가 너의 왼쪽 엉덩이에 꽂혔는데 그 흔적이 아직도 남 아 있을 것이다.
바지를 벗어보아라.] 석파천은 말을 더듬거렸다.
[난……난……] 그는 자기 어깨에 정당이 깨물었다는 잇빨자국과 설산파의 요사숙 (寥師叔)이 찔러냈다는 여섯 송이 눈 모양의 검에 입은 상처 자국을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했다.
그때 그는 한사코 부인했으나 일단 옷을 벗고 살펴보니 그와 같은 자국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는데 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도 석 부인 민유의 말을 듣고 정말 왼쪽 볼기짝에 금전표의 자 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슬그머니 손을 볼기짝에 가져가 만져 보았으나 어떤 상처자국도 있 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의 선례가 있었던 터라 그만 더럭 겁이 나 간이 조마조 마해졌고 안색도 수시로 변하게 되었다.
민유는 그가 난처해 하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의 친에미다.
어릴 때 기저귀를 수없이 갈아준 에미인데 부 끄러워 그러느냐?] 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굳이 난처하다면 너의 아버지에게 보이도록 해라.] 민유가 저만치 물러난 반면 석청이 다가왔다.
[얘야, 바지를 좀 벗어보아라.] 석파천은 다시 한 번 만져 보았으나 어떤 흔적이 있는 것 같지 않아 허리춤을 끄르고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았다.
이게 왠일인가? 길이가 칠팔푼 정도 되는 상처자국이 희미하나마 그곳에 있지 않은 가! 순간 석파천은 경악하고 말았다.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하며 대지 가 요동을 치는 것 같았다.
자기 자신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인지라 너무나 놀랍고 엄 청나고 무서워서 그는 그만 울어버렸다.
민유는 울음소리에 급히 달려왔다.
석청은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 덕였다.
민유는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녀는 석파천을 껴안고 눈물 을 흘렸다.
[옥아, 울지 말아라.
아무리 큰일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와 이 에미가 있지 않느냐? 우리가 알아서 처리해주마.] 석파천은 울면서 말했다.
[나는 옛날의 일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석 부인이 어 머니고 석 장주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처 자국이 있는 것도……아무것도 몰랐던 일입니다.] 이를 듣고 있던 석청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너의 그 심후한 공력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석파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석청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독장은 이 며칠 동안에 배운 것 같은데 누구에게 전수 받 은 것이냐?] 석파천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그런데 모든 것이 멍하기만 하네 요.
내가 어떻게 된 거지요? 내가 정말 석파천이며 석 방주란 말이오 이까?] 그는 더듬거리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성이 석가고……당신들 두 분의 아들이라는게 사실이오이까?] 놀라 안색마저 변한 그는 허리띠를 매는 것도 잊고 두 손으로 엉거 주춤하니 바지를 잡고 있었다.
석청 부부는 그가 그토록 겁에 질린 것을 보고 가여운 생각이 들었 다.
[옥아, 겁낼 것 없다.
겁내지 말아라.] 석청 역시 이 몇 년간 석중옥에게 느꼈던 노여움을 깡그리 잊어버리 고 골똘히 생각했다.
(머리에 커다란 충격을 받거나 큰 병을 앓고 나면 기억상실증이라 하던가 좀처럼 회복하기 어렵다고 하는 증세를 일으켜 옛일을 까맣게 잊어버린다고 하던데 옥아도 그런……증세에 걸린 것이 아닐까?)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를 일시 바로 감히 처에게 들먹이 지를 못했다.
그런데 민유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부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다가 약속이나 한 사람들처럼 불쑥 내뱉 았다.
[기억상실증!] 석청은 이와 같은 증세가 있는 사람들에게 만약 재촉을 하거나 다그 치게 된다면 오히려 환자의 질환을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다.
따라서 오직 이끌거나 유도를 해서 천천히 그를 도와 기억력을 되찾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 즉시 부드러운 얼굴과 어조로 입 을 열었다.
[오늘 우리 골육이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실로 기쁘기 짝이 없는 일 이다.
얘야, 너도 아마 틀림없이 배가 고플 것이다.
우리들은 저 앞 으로 나가 술과 밥을 사먹기로 하자꾸나.] 석파천은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물었다.
[나는……나는 도대체 누구지요?] 민유는 손을 뻗쳐서 그를 대신해서 바지를 끌어올려주고 한쪽 모퉁 이를 집어서는 허리띠를 매준 이후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얘야, 너는 혹시 세게 넘어져서 머리를 아프도록 세차게 부딪친 일 이 없느냐? 그리고 그 누구와 싸우다가 머리를 얻어맞아 상처를 입은 적도 없느냐?] 석파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요.
없다구요!] 민유는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 몇 년 동안 너는 심한 병을 앓아본 적이 없느냐? 혹시 높은 열을 낸 적도 없단 말이냐?] 석파천은 그제서야 제정신이 조금 드는 듯했다.
[있어요.
몇 달전 저는 온몸에서 높은 열이 났었지요.
그야말로 커 다란 화로 속에서 지지고 볶아지는 것 같았지요.
나중에는 또 전신이 얼음과 같이 차가워지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날……그날 황량한 산속 에서 정신을 잃고 난 이후부터는 아무것도 모르게 되고 말았어요.] 석청과 민유는 이제 그의 병원(病原)을 알아내게 되자 속으로 기뻐 하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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