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무공을 놀랍도록 빨리 흉내내는 기술이다. 그 어렵다던 위무일의 홍운행파도법도 흉내낸 그녀였다. 따라서 산고의 도법은 홍운행파도법에 야성의 살기, 이것저것 잡다한 초식까지 더해져 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복잡했다. 이달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 어깨에 주르르 흐르는 것은 피였다. 퇴각을 하고 싶었으나 산고의 협도는 팔방풍우(八方風雨)로 휘몰아치며 이달을 금방 협도의 그늘 아래 꼼짝 못하게 했다. 이달은 금방 자신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하들과 싸울 때는 별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로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을 상대하는데 산고가 전력을 쏟았을 리는 없었다. 그것은 삼악오도 마찬가지였다. "낄낄낄!" 황오의 괴소가 카랑하게 원강 수채를 울렸다. 쉬쉭! 쉭! 연자당의 공세가 만만치 않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황오가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장심(掌心)에 서린 묵빛이 손바닥 전체로 번져 나갔다. 파팟! 팟! 흑살장이 한랭한 바람을 일으키며 송완을 휘감았다. 송완이 흠칫 놀라며 그의 절학 산화십팔연환도법(散花十八連環槍法)으로 황오를 상대했다. 그 둔중한 연자당이 바람에 우수수 휘날리는 꽃잎처럼 어지럽게 황오를 몰아쳤다. "겔겔겔!" 황오의 괴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가 연자당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타타탁! 황오가 절묘한 손놀림으로 연자당을 쳐냈다. '윽!' 연자당이 황오의 쌍수와 부딪힐 때마다 송완은 얼굴을 찌푸렸다. 투살기가 연자당을 통해 그의 내력을 진탕시켰다. 처음에는 그저 견딜만 했는데 십 여합 부딪히고 나자 송완은 통증으로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웩!" 그가 돌연 한줄기 피화살을 쏟았다. "낄낄낄! 더 덤벼 보시지!" 황오가 공세를 늦추었다. 그는 오랜만에 손 볼 만한 상대를 만나 금방 죽이기가 아까운 모양이었다. "크억!" "캑!" 그 사이, 백오와 적오는 원강 수채를 쑥밭으로 휘저었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송완은 눈앞이 깜깜했다. 마타룡에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할 것 같지 않았다. "크악!" 그의 눈에 총관 이달이 협도에 가슴이 쫙 갈려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산고가 이달을 베자 황오의 눈빛이 변했다. "너도 죽어라!" 파팟! 팟! 황오의 흑살장이 송완을 몰아쳤다. 송완이 신형을 허우적댔다. 황오가 금나수로 송완의 연자당을 낚아챘다. 송완이 연자당을 뺏기지 않기 위해 힘을 썼다. 그러나 송완은 연자당을 놓고 말았다. 투살기가 물밀 듯이 밀려들며 그의 전신을 강타하고 있었다. 휙! 연자당이 허공을 날았다. 순간, 퍽! 황오의 흑살장이 송완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송완이 칠공에서 피를 흘렸다. 그가 선 자세에서 몸을 거세게 떨었다. 송완이 맥없이 나뒹굴었다. "또 누구야?" 황오가 어슬렁거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싸울만한 상대가 없었다. 송완이 쓰러지자 마자 원강 수채의 잡졸들은 놀란 새 떼처럼 이리저리 출행랑을 치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만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장난기라곤 없었다. 창백한 표정, 붉게 충혈된 눈이 그의 고뇌를 대신했다. 근자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에게서 세상의 쓴맛을 백 번 느끼게 하고도 충분했다. 아무리 웃고 넘어가려 해도 자신의 처지는 노예에 불과했다. 그것도 동도의 가슴에 칼을 들이미는 살인을 위한 노예! 이만은 이를 악물었다. 한가닥 기대만 없었다면 벌써 삼악오와의 한 판 승부로 죽음을 택했을 그였다. "담 소저, 괜찮소?" 그가 담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이만이 담향을 진심으로 걱정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사람은 고통을 겪어야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이해의 폭이 깊어지는 모양이었다. " ... " 담향은 대꾸할 마음도 기력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는 여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인 듯했다. 상강의 오라비는 구원군(救援軍)을 보내 줄 생각도 않고 그녀를 끌고 다니는 여자는 그녀가 천대하던 바로 남만의 그 미천한 여자였다. 평소에 죽음을 우습게 알던 그녀였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벌써 자결을 했을 그녀였지만 그녀는 죽지 않고 있었다. 죽음이란 그렇게 녹녹치 않음을 깨닫고 있는 그녀였다. "조금만 참아 봅시다. 무일 형님이 오실 것이오." 이만이 말했다. 그의 한가닥 기대란 바로 위무일의 출현이었다. 원강까지 박살이 났으니 총채에서 더 이상 삼악오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총채에서 위무일을 보낼 것이라 그는 확신했다. 담향은 아미를 찌푸렸다. 위무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파양호에서 이미 그녀는 위무일의 마음을 확인했었다. 그렇게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련도 크지 않았다. 단지 가릉강의 도신행에 대해서는 섭섭했다. 죽을 듯이 매달리더니... '가볍게 생각하고 가볍게 만난 대가가 결국 이것이었나?' 담향이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쉬움은 들었다. 하지만 후회는 않았다. 그녀라고 어찌 요조숙녀(窈窕淑女)를 꿈꾸지 않았을까? 엉덩이가 가벼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천성(天性)이다. 그녀는 그 천성을 뒤바꿀 수 없음을 이미 경험했다. 요행히 위무일의 손에 구해진다면... 애송이라 생각했던 이만도 가까이 보니 제법 남자다운 기개가 있는 듯했다. 도신행 보다는 분명 나은 것 같았다. "담 소저, 근자에 산고라는 저 여자의 행보가 이상한 것 같지 않소?" " .... " "이전에는 문만 크면 아무 곳을 가리지 않더니... " 이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저 여자가 노리는 곳은 오직 수로연맹이오. 주형(朱亨), 안원(安源), 분의... 모두 수로연맹의 분타들! 우연인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아무래도 그 유생이라는 작자가 거짓말을 한 것 같아요." "그 자가 왜 거짓말을?" "원래 벽촌의 유생들 중에는 짐짓 유식한 척 하면서도 문장 하나 제대로 못 읽는 자들이 허다하다고요. 내가 처음 사귀던 남자만 하더라도... " 연홍이 합 입을 닫았다. "어쨌든 수상해요. 비문(秘文)이 뭐예요? 비문이... 틀림없이 글을 읽을 줄 모르는지라 그 같은 소리를 한 것일 거예요." 그녀가 견혼수라는 의생이 쓴 서신을 흔들며 말했다. "왜 그렇게 의심이 많아?" 양웅이 안색을 찌푸렸다. "통천하에도 비문을 사용했나요?" "우리 통천하야 비문을 사용할 일이 어디 있어? 지킬만한 비밀이 있어야지." 양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긴 글도 모르는데 비문까지야... 여하튼 다른 유생을 찾아보도록 해요." "비문이 맞다니깐! 장강의 물굽이가 얼만 줄 알아? 그 먼길을 오가는데 중요 기밀이 유지되겠어? 당연히 수로연맹은 요인(要人)들 만이 아는 비문이 있다구. 내가 듣기로 오 년에 한 번씩 와룡전이라는 곳에서 비문을 만들어 바꾼다고 하던데... " "그래요? 그럼 결국 수로연맹의 사람에게 해독(解讀)을 부탁할 수밖에 없나?" 연홍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문이든 아니든 도대체 남의 서신을 왜 보려는 거야? 예의를 몰라도 분수가 있지." 양웅이 투덜댔다. 연홍의 눈초리가 찢어졌다. "딴소리 말고 수로연맹에 이 비문을 해독해 줄 만한 절친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나 말하세요!" 그녀가 소리쳤다. "수로연맹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연홍도 잘 알잖아. 가장 절친한 사람이라 해 봐야 마타룡... 잘 됐군. 어차피 서신은 그에게 가기로 되어 있으니 해독까지 부탁하면 되겠군." "아이고! 생각하는 꼴하고는... 마타룡인지 뭔지 하는 작자에게 줄 모양이면 내가 왜 이 고생을 해!" 연홍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사람 갑갑하게 하는군.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왜 남의 기밀을 알려는 게야?" 양웅이 가슴을 쳤다. " .... " 연홍이 아미를 찡그리며 양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 서신에는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어요." "맞아! 견혼수라는 자가 죽음으로 맡긴 서신이라구. 그리고 전해 주라는 사람들이 어디 보통 사람인가? 추운객! 마타룡! 수로연맹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자들이지. 그만큼 중요 하니까 비문으로 썼겠지." "호호호!" 양웅의 말에 연홍이 느닷없이 웃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아 떨어져서였다. "따지고 보면 이 서신이 수로연맹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양 랑이 이 서신을 탈취하려던 자에 맞서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겠죠?" "목숨까지야... 하지만 만만치 않은 자임에는 분명했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까지 갔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이 서신을 전해 주기 위해 우리 일도 마다하고 수로연맹까지 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일이 어디 있어?" 양웅이 실소를 흘렸다. "있다면 있는 줄 아셔요! 어쨌든 나는 양 랑의 목숨 값을 포함, 군산까지 가는데 드는 비용과 수고비를 받아야겠어요." "이제 보니... " 양웅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요. 이곳에는 대단한 기밀까지 들어 있어요. 나는 이 서신을 전해 주는 대가로 마타룡인가 추운객인가 하는 자에게 한 밑천을 단단히 얻어낼 생각이에요. 수로연맹이야 원래 통천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재력이 튼튼한 곳이잖아요." 연홍이 재빠르게 말했다. "나는 못해! 그런 염치없는 짓을... 그렇게 한다면 강호인들은 변황의 패주였던 나를 황금충(黃金蟲)이라 부를 것이다! 황금충은 그 듣기 싫은 곽원이라는 별호보다 더 나쁘잖아. 어떻게 그런 못된 생각을... " 양웅이 시근덕거렸다. 그는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연홍은 양웅을 다루는데 이골이 난 여자였다. "가세요!" "뭐?" "가라고!" 연홍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헤어지자고?" 양웅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다 늙은 당신이 뭐가 좋다고 혼인을 했겠어요?" "이 수염이 멋있어서 혼인을 결심했다고 말했잖아." 양웅이 자신의 긴 수염을 쓸었다. "흥! 수염이라도 없으면 한 살이라도 적게 보이지." 연홍이 눈을 샐쭉하게 떴다. "내가 양 랑과 혼인을 한 것은 전적으로 양 랑이 통천하의 채주였기 때문이에요. 늙은이와 혼인하는 대가로 그 정도의 호의호식(好衣好食)을 바란 제가 부당한가요?" " .... " 양웅은 할 말이 없었다. "받으세요." 탁! 연홍이 견혼수에게서 얻은 서신을 양웅의 손바닥에 얹었다. "내 팔자는 결국 녹림 비적의 첩이나 기녀로 뒹구는 게 딱 맞아요. 마침 장안에 아는 언니가 기루를 한다고 하니... " 연홍이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맥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연홍! 연홍!" 양웅이 황급히 연홍의 앞을 가로막았다. "글세... 내 생각은 굳이 호의호식을 원한다면야... 어렵지 않지. 어렵지 않아." 그가 두서없이 주절댔다. "무슨 수로?" "험! 방법이야 찾으면 되지." "저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 가요?" 연홍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녀가 휙 발걸음을 옮겼다. "연홍! 연홍! 정말 장안의 기루에 갈 생각이야?" " .... " 연홍은 입을 악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렵구나. 어려워! 세상살이가 이렇게 어려운 줄 예전에는 몰랐다." 양웅이 한숨을 쉬었다. "굶어 죽게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양 랑의 실력이면 기루의 호화무사(護花武士)로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호화무사? 호화무사라면 기루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술값을 떼먹고 달아나는 자들을 두들겨 패는 자들이잖아. 기녀들의 등이나 처먹고... 천하의 양웅이 고작 호화무사?" 양웅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좋지 않아요? 술도 마음껏 마시고 여자들도 이 여자 저 여자 상대할 수 있으니... " "나를 어떻게 보는 게야? 술을 마시고 여러 여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좋다고 치자. 하지만 연홍이 다른 남자와 히히닥거리는 꼴을 어떻게 봐?" "그럼 방법을 찾으세요. 저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아요. 양 랑은 멋진 분이잖아요. 그저 작은 주막이라도 열어 호구라도 삼으면 그만이어요." 연홍이 양웅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었어?" 양웅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제가 이 서신으로 마타룡인가 하는 자에게 황금 수십 관을 요구할 줄 알았어요?" 고작해야 두 입, 그 중 한 입은 오래 먹지도 않을 거잖아요." "연홍, 그 일이라면 안심하지 마라. 우리 양씨 집안은 대대로 명이 길다. 하지만 그래도 먹어 봐야 얼마나 먹겠어?"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그 정도의 대가라면 당연한 요구가 아니겠어요? 저도 막되 먹은 여자는 아니에요. 대가를 바라고 남의 중요한 서신을 볼모로 잡는 것은 분명 잘못이죠. 만약 군산으로 가는 도중 호구를 마련한 일을 찾으면 그냥 서신을 전해 주면 되잖아요." "하하하! 연홍, 옳은 말이다!" 양웅이 급히 서신을 연홍에게 건넸다. "그럼 더 이상 이 서신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마세요." "물론!" 양웅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쳤다.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라 양웅은 잠깐 사이에 처음 자신이 했던 말을 잊고 있었다. * * * 白草原頭望京師(백초원두망경사) 黃河水流無盡時(황하수류무진시) 秋天曠野行人絶(추천광야행인절) 馬首東來知是誰(마수동래지시수) - 흰 쑥대 우거진 돌 언저리에서 서울 쪽 바라보면 황하 물만 끊임없이 흘러내릴 뿐이다. 가을 하늘 펼쳐진 광야에 나그네 모습조차 끊겼는데 동쪽 향해 말 달리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거친 산하(山河), 휘날리는 모래 바람... 금사강도 변황이기는 하나 이곳만큼은 황량하지 않다. 천화인은 그 황량함이 좋았다. 그래서 괜한 시도 읊조려 보았었다. '일이 뜻대로 되고 되지 않고는 하늘의 뜻! 만약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화의에게 금사강을 맡기고 이곳에서 자리를 잡으리라.' 천화인은 팔짱을 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대황산(大黃山)이다. 동서로 끝없이 이어진 길이 지나가는 곳... 변황은 벌써 가을이 깊어 길가의 나무들은 모두 울긋불긋 했다. 살갗에 닿는 바람도 찼다. 황사로를 치라는 총채의 명이 떨어지자 마자 천화인은 황평과 수하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왔다. 이곳은 황사로가 오가는 요충지였다. 동생 천화의는 아버지가 올 때까지 출행을 말렸었다. 총채의 농간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라고 어찌 총채의 수작을 모르랴? 하지만 그는 출행을 서둘렀다. 천화인의 생각은 이미 굳어 있었다. 만로방은 수로연맹의 당연한 적! 싸워서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자신이 수로연맹의 총채주 자격이 있음을 공포하리라. 위무일이 문제가 된다면 피할 생각도 없었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없는 법, 그는 위무일과의 승부를 사실화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도 편했다. 철컹! 철컹! 황평이 서너 명의 수하들과 함께 다급히 산을 올랐다. "소채주,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그가 산길을 오르며 소리쳤다. 수하들이 웅성거리며 일제히 천화인의 주위로 몰렸다. "황 당주!" 그가 황평을 불렀다. 황평이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앞에 섰다. "수하들을 길 양옆으로 포진시키시오." "매복을 하라는 말입니까?" "그럴 필요 없소. 싸움은 내가 할 것이오. 정 급하면 도와주시오." 천화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가 산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천화인은 길 가운데 버티고 서 검을 풀었다. 따각! 따각! 뽀얀 흙먼지와 함께 한 떼의 무사들이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만로방 황사로의 무사들이었다. "정말 혼자서 싸울 것입니까? 황사로는 사대행회 중 북풍로 다음으로 강하다고 합니다." 황평이 수하들을 포진하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무일도 한 일을 내가 왜 못하겠소." 천화인이 걱정 말라는 투로 말했다. 황평이 걱정을 지우지 못한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히히힝! 말들이 소란을 떨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황사로의 무사들이 그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선두에 선 자는 독안(獨眼)의 중년인이었다. 황사로의 회주, 두억(杜億)! 그가 말고삐를 채며 독안을 빛냈다. 두억이 채찍을 들었다. 스릉! 슥! 쨍! 황사로의 수하들이 바쁘게 창칼을 뽑았다. 천화인이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을 완보로 걸어가던 그가 돌연 발걸음을 빨리 했다. 두억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삼첨도(三尖刀)를 치켜들었다. "하!" 두억이 말을 달려나오며 천화인을 내리쳤다. 챙! 가을 햇살이 도검(刀劍)에 걸려 찬연하게 빛났다. "핫!" 두억과 한 합을 겨루고 난 천화인이 재차 두억을 육박하며 생각했다. '무사는 언제나 칼로 이야기 한다.' 생각하니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잔꾀였다. * * * 황산(黃山)의 주봉(主峯)은 천도봉(天都峯)이다. 천도봉의 동쪽 봉우리 아래로 흐르는 물이 주사천( 砂川)으로 이곳의 샘물로 차를 끓이면 미홍색(微紅色)이 나며 차 맛이 훌륭하다. 주사천을 낀 계곡에는 오랜 세월 풍우가 만들어 낸 동굴이 많은데 심영은 그 중에서도 사람의 발길이 전혀 이를 수 없는 동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야광주(夜光珠)가 반짝이는 동굴에는 그 외에도 해륭도로 그를 찾아왔던 구부정한 노인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심영과 노인은 황산을 오르며 흘린 땀을 주사천의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동굴에는 풍혈(風穴)이 있는 지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커흠!" 노인이 헛기침으로 먼저 침묵을 깼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의 한쪽 벽면에 손을 댔다. 스르릉! 동굴의 벽이 차륜(車輪)처럼 빙글 돌며 내부에 석실(石室)을 드러냈다. 석실에도 야광주가 빛을 뿜고 있었다. 은형문! 석문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이었다. 석실에는 여러 개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었다. 노인은 향을 꽂고 제단을 깨끗이 닦았다. "들어오십시오." 노인이 심영을 불렀다. 심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석실로 들어섰다. "선대 문주들입니다. 향을 사르고 배례(拜禮)를 올리십시오." 노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영이 무심한 표정으로 향을 사르고 삼 배를 올렸다. "은형문이 일인으로 내려옴은 사실이나 핏줄로 문주를 계승하지는 않습니다. 살수란 별반 유쾌한 직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임 문주께서도 불시에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면 아마 은형문의 후인을 다른 핏줄에게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회한으로 젖었다. "저기 마지막 위패가 바로 문주의 아버님이며 전임 문주이십니다. 향과 술을 올리고 다시 예를 드리십시오." 그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마지막 위패에는 능표(凌剽)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심영의 무심하던 눈빛이 흔들렸다. 능영(凌榮)! 그렇게 불러져야 마땅했을 자신의 이름이었다. 심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 ' 그 순간에도 떠오르는 사람은 능표라는 낯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해손왕이었다. 눈앞의 노인이 불쑥 찾아와 전후를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심영으로 살았을 그였다. 그만큼 해손왕은 그를 친자식처럼 아껴 주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뼈저린 고마움이었다. "문주께서 명하신 대로 청부를 받아 두었습니다." 그에게 배첩을 쭉 내미는 구부정한 노인은 상노(上奴)였다. 은형문은 물론 일인 살수문이다. 자객은 오로지 문주 한 명이라는 뜻! 청부를 접수하고 대가를 받는 일은 상노의 몫이다. 상노는 은형문의 재산 관리는 물론 심영의 경우처럼 문주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후사까지 책임진다. 한마디로 실질적으로 은형문을 이끌어 가는 자는 상노라 할 수 있었다. 상노가 아무리 청부에 뛰어나다고 해도 혼자서는 비밀을 지키기 힘들다. 따라서 그는 한 번의 청부에 수십 명의 사람을 동원한다.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식으로 청부를 수락하고 대가를 받기 때문에 은형문은 아직도 비밀 유지가 가능했다. "많이도 들어왔군." 심영이 상노가 내미는 배첩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강호가 서로 못 죽여 안달인 곳이라는 것을 심영은 또 한 번 실감했다. 그가 배첩을 하나 하나 훑었다. 청부자와 살인 대상, 살인의 대가로 지불할 은자의 양이 적힌 배첩을 하나 하나 살피던 심영이 문득 안광을 빛냈다. "의외군." 그가 상노에게 배첩을 툭 던졌다. 상노가 배첩에 눈길을 돌렸다. "그렇군요." 상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상노는 강호의 인물들은 물론 강호 정세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 자로 하겠소." 심영이 칼잡이를 만지며 말했다. "위험합니다. 첫 상대로 너무 무거운 상대입니다. 듣지 못했습니까? 그는 조양인의 무공을 이어 받았습니다." 상노가 안색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벽해발산식이 조양인의 무공보다 못하다는 말이오?" "은형문은 살인을 위한 일살필도의 무공입니다. 강호의 일반 무공들과 비교가 힘들지요. 승부의 관건은 그 때의 상황일 것입니다." "그럼 됐소. 청부를 수락하시오." "위험합니다. 생각을 다시 해 주십시오." "아! 아! 그만 두시오. 상노와 싸울 시간에 차라리 벽해발산식을 좀 더 익혀야겠소. 상대가 만만치 않다니... " 심영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은형문의 문주는 상대를 살인 가능한 확률이 구할에 가까워도 쉽게 칼을 뽑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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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문주들은 그랬겠지." 심영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상노가 미간을 좁혔다. "그 자를 반드시 상대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 .... " 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