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에게 직접 이유를 묻지 않은 이유를 묻기가 송구스러웠기 때문이다. "영채의 겁화를 듣고 아버님은 몇 몇 수하들과 함께 다급히 악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중도에서 괴한들을 만났지요." "괴한들이라니?" "아버님도 내력을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과 혈전을 벌였는데 수하들은 모두 죽고 아버님만 간신히 살았다고 합니다." "다리를 잃고 어떻게 놈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버님이 다리를 자른 것은 독 때문입니다. 복면 괴한들 중의 한 명이 암기를 사용했는데 아버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리에 암기가 적중되었던 모양입니다. 암기에는 염백음분이 발려 있었습니다. 수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손을 쓰기가 늦은 상태였습니다." "염백음분?" 위무일이 안색을 찌푸렸다. 만로방으로 가는 도중 벽부의 잔당들과 일전을 치렀었다. 그 중 야효가 염백음분을 사용했던 것을 위무일은 기억했다. "외숙의 다리에서 나온 암기는 무엇이었느냐?" 위무일이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백호정(白虎釘)인 것 같았습니다." "백호정?" 위무일이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야효는 쇠발톱을 암기 대용으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쇠발톱 대신 백호정을 암기로 사용했는지. 호반영채에서 철경을 얻지 못하자 외숙이 철경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위무일은 야효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풀지 않았다. "의심 가는 곳이 있습니까?" 마원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다." 아직 심증 뿐이라 위무일은 외숙을 암습한 자들이 벽부의 잔당이라고 확정하기 힘들었다. "형님, 아버님은 춘절의 만회도 저에게 맡겼습니다. 아버님은 화인 형님을 총채주에 앉히고 싶은 모양이더군요. 형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마원을 비롯한 수로연맹 전체의 관심은 만로방과의 일전보다 총채주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쏠린 듯 했다. " .... " 위무일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저도 아버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화인 형님은 충분이 자격이 있지요. 그를 제치고 총채주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형님뿐입니다." 마원이 위무일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나를 화인과 비교하지 마라. 나는 그의 반에 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최소한 화인에게는 자신의 목표가 있다." 위무일이 실소를 흘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 * * 주숙예는 보고했다. 원강, 예수를 비롯 호남, 호북을 종횡하며 날뛰는 한 떼의 비적을 처치하는 일을 결국 엽광이 맡기로 했다고... 엽광은 처음에는 투덜댔다고 한다. 비적들을 상대하는 일에 자신을 보낸다고. 하지만 비적들이 원강, 예수를 마음대로 짓밟고 다니는 실력있는 무리라는 소리를 듣고 엽광은 마음을 바꾸었다. 굶주린 늑대의 무리, 기랑대(飢狼隊)! 비적들은 강호인들부터 그럴듯한 이름까지 얻은 상태였다. 몇 명의 화룡대원들을 이끌고 엽광은 떠났다. 주숙예는 또 다시 보고했다. 예상대로 사대행회를 상대로 한 대강들의 싸움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이었다고. 단지 금사강은 달랐다. 천화인! 그녀가 주황보다 더 경계하는 상대... 그는 홀로 용전분투, 황사로를 괴멸시켰다고 한다. 그녀의 눈에 장강 동도들이 천화인을 연호하는 것이 보였다. 역시 그는 무서운 존재였다. 이번에는 주숙예가 하빈으로부터 받은 한 통의 서신을 건넸다. 주황으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주황은 다시 화해를 청했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주숙예로 하여금 화해를 해서 얻게 될 이득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지시했다. 아침부터 몸이 으스스 하더니 결국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편치 않았기에 담청은 주숙예의 보고를 한 귀로 흘려듣고 말았다. 만사가 귀찮았다. 일이 이렇게 하기 싫은 적은 생전 없었던 듯 했다. 괜한 짜증만 났다. 그녀는 서가의 한 편에 놓아두었던 옥빙주(玉氷酒)를 꺼냈다. 술을 마시는데 몸이 좋아질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취하고 싶었다.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술이란 참 묘한 것이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지려 하고 있었다. 담청은 술잔을 들었다. "화간일호주(花間一壺酒) 독작무상친(獨酌無相親)!" - 꽃 속에 묻혀 한 동이 술을 놓고 홀로 잔 기울이는데 벗조차 없구나. "호호호!" 담청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라버니는 좋겠군요. 미쳤다는 것은 제 정신이 아니다는 뜻! 술로 잊어야 할 시름도 없을 테니." 그녀의 붉은 입술이 술잔에 닿았다. 그녀는 연이어 술잔을 비웠다. 머리 속이 빙글빙글 돌고 호흡이 가빠 왔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취기가 더 빨리 도는 모양이었다. 챙캉! 술잔을 기울이던 담청이 잔을 떨어뜨렸다. 술이 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각난 잔을 바라보며 아미를 찌푸렸다. 그녀가 털썩 의자에 몸을 기댔다. 방 전체가 빙빙 돌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담청은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어. 언제나 마지막은 어렵다. 이만큼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담청! 너는 잊지 말아야 한다. 천대받던 유년의 기억을... 어떻게 해서라도 나는 내 자리를 지킬 것이다. 모두의 위에 당당히... ' 술기운이 그녀의 의식을 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혼몽 중에서도 이를 악물었다. 제 21 장. 강상지교(江上之交). 동정호계에서 불기 시작한 피의 폭풍은 걷잡을 수 없이 파양호계로 번지고 있었다. "커악!" "아악!" 수하들의 비명! 신강의 채주, 전충일(全充溢)은 이를 악물었다. 기랑대라는 비적 집단을 미리 대비했기에 이 정도 버틸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수채는 불에 탔을 것이다. 묵빛 장영을 쉴새없이 번뜩이며 수하들을 도살하는 늙은이들! 그들의 정체는 얼마 전, 긴급 전언을 통해 모든 수채에 알려졌다. 한수의 이 채주가 보낸 전언이었다. 전대 사파의 고수, 삼악오! 신강으로 그들이 쳐 들어오면 상대 할 수 있을까를 내내 고민했다.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선다는 것은 강호 동도들의 손가락질을 받기에 딱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싸움을 택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선조들의 피땀이 서린 이곳 수채! 물러서면 다른 수채들과 마찬가지로 잿더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삼악오는 강호에 전해 내려오는 소문보다 더 흉악했다. 그리고 기랑대에 속해 있는 일남이녀, 그들의 무공도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특히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계집은 마치 야차와 같았다. 전충일은 암기를 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러가더라도 그냥 물러가지는 않겠다!' 휘휙! 그가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파파팟! 그의 손에서 서너 개의 비표가 뇌전처럼 바람을 갈랐다. 백오의 등을 노리고 날린 비표였다. 마치 닭 잡듯이 신강 수채의 수하들을 상대하던 백오가 등을 돌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기민한 몸놀림이었다. "흥!" 백오가 흑살장으로 수십 개의 원무를 그렸다. 비표는 백오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소매에 빨려들어갔다. 쉬쉭! 이번에는 백오가 소매 속의 비표를 뿌렸다. 경미한 바람 소리가 들리는 순간, 비표는 이미 전충일의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충일은 다급히 천근추를 발휘 신형을 하강(下降)시켰다. 피핑! 비표가 아슬하게 그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충일의 안색이 더욱 해쓱해졌다. "후퇴!" 그가 다급한 고함을 질렀다. 채주의 명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신강의 수하들이 출행랑을 쳤다. "크악!" "악!" 삼악오가 흑살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그 뒤를 쫓았다. 전충일은 채주로서의 체면도 잊었다. 그가 수하들의 비명을 외면하며 담장을 뛰어넘을 때였다. 타타타타탁! 한 떼의 무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엽 선주!" 전충일이 담장에 서 희색(喜色)을 띄며 소리쳤다. 십 여명의 화룡대원들을 이끌고 급히 수채로 달려오는 자는 엽광이었다. 전충일이 엽광을 마중 나갔다. "늦었습니까?" 엽광이 수채에 치솟는 불길을 보고 급히 달려오너라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늦고 말고가 어디있소? 우리로서는 상대할 자가 아니오.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까? 삼악오!" "들었소!" 엽광이 갑자기 전충일을 떠밀었다. 쉬익! 간발의 차로 흑살장이 전충일을 비켜갔다. 전충일에게 흑살장을 날린 자는 황오였다. 파파팟! 엽광의 쌍수도가 빛을 뿌렸다. 그가 황오의 흑살장에 정면으로 맞섰다. 화룡대가 엽광과 황오를 둘러싸며 칼을 세웠다. 파파팟! 파팟! 쌍수도에서 이는 바람, 황오의 소매에서 일어난 바람이 세찬 폭풍으로 사방을 휘몰아쳤다. 탁! "이놈 봐라!" 황오가 엽광의 쌍수도를 손등으로 쳐내며 잠시 싸움을 멈추었다. 그가 흥미로운 눈길로 엽광을 바라보았다. 엽광은 자세를 낮추고 쌍수도에 모든 심력을 쏟았다. 파팟! 황오가 파리를 쫓듯 손바닥을 몇 번 뒤집어 흔들었다. "낄낄낄! 통쾌하게 죽여주마!" 그가 흑살장의 위력을 배가 하며 엽광을 육박했다. 한수의 이민도 상대하지 못한 자다. 이를 악물고 대항했으나 엽광의 실력으로는 삼악오를 상대하기에 요원했다. "더러운 노물!" 전충일이 비표를 날리며 응원했고 화룡대도 차륜전(車輪戰)으로 황오를 공격해 갔다. 엽광, 전충일의 합공에 화룡대까지 가세하자 황오의 보법이 흔들렸다. 그러나 위기를 느끼는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싸움이 난전으로 치닫자 더욱 흥겨운 모양이었다. "낄낄낄!" 황오는 괴소를 흘리며 연신 흑살장을 쏟았다. "전 채주!" 엽광이 죽을 힘을 다해 쌍수도를 휘두르며 전충일을 불렀다. "귀는 열려 있소!" 전충일도 비표를 날리며 소리쳤다. "나머지 두 노물이 가세하면 우리는 갈 곳 없이 죽게 생겼오! 전력을 다해 일시에 공격합시다!" 엽광이 재빠르게 말했다. 원래 엽광은 상대가 강하다고 피하는 성격이 아니다. 지금 그가 피하려는 이유는 전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반영채의 원수를 갚는 일! 그 일을 해결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다. 엽광은 일도필살의 수법을 펼치기 위해 쌍수도의 도세를 전환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쌍수도는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이내 허우적거렸다. 입을 놀리느라 심력을 분산시켜 황오의 흑살장에 사면이 봉쇄되고 만 것이다. 엽광이 위기에 처하자 전충일이 나섰다. "쳐라!" 그가 엽광을 대신해 명을 내렸다. 파파팟! 십 여자루의 칼과 비표가 한꺼번에 황오를 향해 폭사되었다. "캇!" 황오가 원을 그리며 신형을 틀었다. 수 십, 수 백개의 묵빛 장영이 황오의 신형을 따라 움직이며 팔방을 수놓았다. 퍽! 퍼퍽! 퍽! "으윽!" "악!" 둔중한 격타음과 함께 화룡대원들이 피를 뿜으며 튕겨났다. 엽광도 가는 피를 흘리며 십 여 걸음을 물러났다. 눈 앞이 깜깜해지고 스물스물 피가 역류했다. 스쳐가는 흑살장에 맞았는데도 그 정도였다. "웩!" 엽광이 피화살을 쏟았다. "엽 선주, 피합시다. 사람이 아니오." 다행히 전충일은 암기를 날린 덕에 흑살장의 폭풍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황오의 눈치를 살피며 엽광을 부축했다. "낄낄낄! 낄낄낄!" 황오는 선 자세에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것을 보니 그도 이번 일 장(一掌)에 상당한 내력을 소비한 모양이었다. 전충일이 엽광을 부축한 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아나려 했다. 그때였다. "이상한 놈이네. 싸움을 걸었으면 끝까지 싸워야지." 적의 노인이 그의 앞을 턱 가로막고 섰다. 적오였다. 전충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엽광은 전충일의 부축을 풀었다. 전충일의 실력은 그를 부축하고 달아날 만큼 고강하기 못했다. 엽광이 눈썹을 꿈틀대며 쌍수도를 세웠다. 쌍수도의 무게는 천근이었다. 순간, "핫!" 마음이 급했던지 전충일이 먼저 비표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훌쩍 신형을 날렸다. 엽광을 남겨둔 채 도주를 택한 것이다. "어딜!" 적오가 비표를 걷어내며 전충일을 뒤쫓았다. 그들이 쫓고 쫓기며 삽시간에 수채에서 사라졌다. 엽광은 미간을 좁혔다. 추적전(追跡戰)을 보니 전충일이 얼마 도망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달아날 생각을 포기했다. 한 판 승부로 깨끗한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젠장! 이렇게 이이없는 일을 당하다니... 삼악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물러나는 것인데. 쓸데없는 만용이 화를 불렀구나. 죽어서 영주와 대부인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엽광은 한숨을 쉬었다. 자리 펴고 죽을 준비를 끝내면 죽지 않고 살아서 할 일이 태산이면 반드시 죽음이 찾아온다는 말을 실감하는 그였다. 하긴 상대가 남의 처지까지 이해하며 죽이지는 않을 테니... "너는 왜 달아나지 않아?" 황오는 기력을 되찾은 듯했다. 그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섰다. 엽광은 들끓는 기혈을 누르며 쌍수도에 마지막 힘을 모았다. 그가 황오를 상대하려 할 때였다. 엽광은 미간을 좁히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은 불타는 목채 앞에 서 있는 한 여자에 머물고 있었다. 여인도 팔짱을 낀 채 그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산고... ' 엽광이 본 여자는 죽은 줄 알았던 산고였다. "산고, 산고가 아니냐?" 엽광이 놀라 소리쳤다. 산고는 차가운 눈빛만 빛냈다. 순간, 황오가 금나수로 엽광의 맥문을 잡아왔다. 파팟! 엽광이 쌍수도를 휘두르며 몸을 휘청 눕혔다. 하지만 황오의 좌수는 성난 독사처럼 엽광을 따라붙었다. "헉!" 엽광이 신음을 터뜨렸다. 맥문으로부터 전신 기혈이 뜯기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고 있었다. 황오에게 맥문을 제압당한 것이다. "낄낄낄! 겁없는 애송이! 감히 나에게 덤비다니... 사지를 찢어서 죽여줄까 아니면 뇌수를 파 먹어 죽여줄까?" 황오가 엽광을 붙잡고 히히닥거렸다. 엽광은 산고와 황오를 번갈아 바라보며 안색을 찌푸렸다. 그는 산고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엽광은 입을 딱 벌렸다. 전신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다시 밀려들었다. 황오가 투살기를 쏟고 있었다. 엽광의 머리 속은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득해져갔다. 그가 고통으로 혼절 하려 할 때였다. "이봐! 이봐!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 황오가 투살기를 거두며 잔망스럽게 물었다. 엽광은 전신에 맥이 빠졌다.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황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투살기를 쏟았다. 엽광의 신형이 뇌전을 맞은 사람처럼 다시 빳빳하게 굳었다. "낄낄낄!" 황오가 괴소를 터뜨리며 좋아라 했다. 엽광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입에서 가는 피가 흘렀다. 황오는 이번에는 엽광을 황천(黃泉)으로 보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는 내력을 더욱 높이고 있었다. 엽광의 신형이 뻣뻣하게 굳은 채 서서히 무너졌다. 엽광을 지켜보던 산고의 눈빛이 흔들렸다. 수로연맹에 관련된 자들은 누구 하나 살려주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엽광! 산공이 가장 아끼는 수하... 그를 죽인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에 굴복하기 싫었다. 산고는 짧은 순간, 수십 번을 망설였다. "그만!" 어느 순간, 그녀가 꽥 고함을 질렀다. 위무일에 대한 미련을 전부 떨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엽광으로서는 천만 다행한 일... 황오가 화들짝 놀라 엽광에게서 손을 뗐다. "우웩!" 손을 놓자 마자 엽광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산고가 그를 향해 걸어갔다. 황오는 마치 죄를 지은 아이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한 쪽으로 피했다. 산고는 엽광의 곁에 섰다. "산고... 맞구나. 영주와 나는 네가 죽은 줄... 악!" 엽광이 비명을 질렀다. 산고가 협도로 엽광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다. "엽광, 다시 지껄여 봐라. 노류장화로 떠돈 남만의 비천한 계집이라고... 해해해!" 그녀가 헤픈 웃음을 흘렸다. 웃음 소리는 같았지만 이전의 그 웃음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웃음은 진한 살기로 가득했다. 엽광은 연이은 고통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산고가 허벅지에 꽂힌 협도를 천천히 뺐다.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엽광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칼끝을 엽광의 심장에 겨누었다. "죽인다!" 산고가 발작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녀가 엽광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둔중한 격타음과 함께 엽광은 의식을 잃고 나뒹굴었다. * * * 삼협을 지나자 수채의 수하들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강폭은 넓어지고 곡류(曲流)를 흐르는 물은 마치 고여 있는 듯했다. "술을 풀어라!" 외당당주가 소리쳤다. 그는 삼협을 지나온 수하들의 노고를 한 잔 술로 풀어주려는 모양이었다. "형님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위무일에게 다가서며 마원이 물었다. "너는 생각이 있느냐?" "삼협을 지나면 왠지 기분이 이상합니다. 화려한 옷, 사람의 간이라도 빼 먹을 같은 말투, 마치 시골 서생이 대도에 발을 들이는 기분입니다." 마원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아버님이 그러시더군. 어머님은 영채를 시집 온 후, 한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누군가가 당신을 흉보는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아마 어머님도 처음에는 너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어머니는 민강의 사람이었지. 어머님은 금방 깨달았다. 화려함에는 자존심이 없다는 것을... 사람도 마찬가지다." 위무일은 뱃전에 몸을 기댔다. 그가 수심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민강에서의 며칠은 정말 마음 편한 날들이었다. 삼협을 넘기자 그의 마음은 다시 난풍(亂風)에 흔들렸다. "술을 가져 오도록 하겠습니다. 요(堯) 당주!" 마원이 외당당주를 불렀다. "여기도 술을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외당당주가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수하 한 명이 걸직한 술상을 들고 왔다. 비곗살이 두툼한 삶은 돼지고기와 오리고기였다. 수하가 물로 갑판을 대충 씻었다. 그가 갑판 위에서 양손에 기름을 범벅해 가며 돼지고기를 썸벅썸벅 썰었다. 오리고기는 반으로만 쫙 쪼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있게 드십시오." 수하가 한귀퉁이에 굵은 소금을 부은 후, 읍을 했다. 마원이 털썩 갑판에 주저앉았다. "앉으십시오." 그가 위무일에게 자리를 권했다. 위무일도 갑판의 맨 바닥에 엉덩이를 걸쳤다. "우리 뱃놈들의 술이야 이게 제격이죠." 마원이 주발에 콸콸 술을 부었다. 위무일과 마원은 주발을 부딪히며 일 배를 들었다. "이렇게 술은 마시기도 오랜만이구나." 위무일이 돼지고기를 한 점 집으며 말했다. "아하! 중원 물길에 선 수채의 놈들은 모두 호화기루에서만 술을 마시는 줄 알았는데. 그곳의 사람들 중에도 우리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지. 그곳의 소공자들은 다들 고상했지. 하지만 승명 형님은 조금 달랐다." "전임 총채주 말입니까?" "좋은 분이었지." 위무일이 다시 한 사발의 술을 들이켰다. 마원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전임 총채주에 대한 정을 거론하며 총채주로 그의 어린 아들을 논할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위무일은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그는 푸른 산, 물 나라를 응시하며 주발만 기울였다. "형님, 이번 쌍십절의 회맹이 끝나면 바로 만로방과의 일전이 시작되겠지요." "그렇겠지.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으니... " "그 긴 싸움도 이번으로 끝나겠군요." 위무일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자주 끊기고 있었다. 위무일과 마원은 침묵 속에 술을 나누었다. 배가 의창을 바라보고 지날 때였다. "어이!" "어이!" 우렁찬 고함 소리가 강상을 울렸다. "어이!" 외당당주도 손을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그가 후다닥 마원에게 달려왔다. "소채주, 금사강의 배입니다." "금사강?" 마원이 벌떡 일어났다. "속도를 늦추시오." 그가 외당당주에게 명을 내린 후, 뱃전에 섰다. 위무일은 앉은 채 술만 기울였다. 촤아악! 금사강의 유선이 포말을 일으키며 마원을 향해 다가왔다. "어이! 마원!" 유선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형님!" 마원이 반갑게 고함을 질렀다. 금사강의 유선에서 손을 흔드는 자는 천화인이었다. 위무일도 천화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형님도 쌍십절의 회맹 때문에 삼협을 넘었습니까?" 마원이 소리쳤다. "그렇다! 지금 아버님을 모시고 가는 길이다!" "형님, 이리 건너오십시오. 무일 형님이 마침 여기 계십니다!" "무일?" 찰나간에 천화인의 안색이 굳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곧 평색을 되찾았다. 마원이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자 위무일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가 주발을 들고 마원의 곁에 섰다. "화인, 나일세!" "하하하! 무일, 잠깐 기다리게!" 천화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등을 돌렸다. 금사강의 배가 용두를 뒤틀며 민강의 배에 다가왔다. 민강의 배와 금사강의 배가 이삼 장여를 격하고 나란히 물살을 가를 때였다. "마원, 줄을 붙잡고 있거라." 천화인이 줄을 휙 던졌다. 마원이 줄을 팽팽히 잡았다. 천화인도 수하에게 줄을 잡게 했다. 그는 흔들리는 줄에 교묘히 발을 올린 후, 신형을 날렸다. 휙! 천화인은 중도에 줄을 한 번 밟고 다시 신형을 허공에 솟구쳐 마원의 곁에 멋지게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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