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장풍파랑 - 51편 (51/61)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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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장풍파랑 - 51편 (5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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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무일이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끝없이 부정해도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이상한 행보도 마음에 걸렸다.
묘하게도 그 행보는 백부의 죽음과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확인을 해야 했으나 확인을 해야 하는 일이 겁났다.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위무일은 청류동의 벽에 털썩 몸을 기댔다. "장강……! 정말 우스운 곳이군.
후후후……" 그가 칼칼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은 청류동을 울리고 군산을 울리고 동정호를 공허하게 울렸다.
제 25 장.
만추(晩秋).
삐걱! 삐걱! 동정호의 물살을 가르는 나룻배는 당장이라도 물에 가라앉을 것 같은 폐선(廢船)이었다.
사실 나룻배의 여기저기서는 물이 샘물처럼 펑펑 솟구치고 있었다.
철벅! 철벅! 배 바닥에 물이 고일 때마다 작은 체구의 여인이 쪽박으로 물을 퍼냈다.
얇은 입술, 가는 눈초리, 오밀조밀한 얼굴에 귀염성이 뚝뚝 흐르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귀여운 여인의 입에서 터진 말은 욕이었다. "육시할!" 여인이 쌍심지를 치켜 뜨고 고개를 휙 돌렸다.
나룻배의 뒤에는 긴 수염을 늘어뜨린 팔척거한의 노를 젓고 있었다.
배 위에 길게 놓인 칼은 염왕도…… 거한은 양웅이었다.
그리고 여인은 연홍…… "호변에 금방 닿는다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연홍이 쪽박으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글세…… 과연 소문대로 동정호는 넓군.
하지만 이제 다 왔으니 걱정하지 마." 양웅이 찔끔거리며 말했다. "산과 들은 아직도 까마득히 멀기만 한데 무슨 소리예요? 동정호는 말이 호수지 바다라는 이야기를 나도 들었는데 기어코 고집을 부리더니……" "어쨌든 내 말대로 물놀이는 실컷 하고 있잖아." "이게 물놀이야? 이게!" 연홍은 쪽박을 흔들며 분통을 터뜨렸다.
유선을 타고 악양으로 가자는 것을 양웅은 반대했다.
양웅은 이왕 동정호에 온 것, 악양까지 나룻배를 타고 가며 실컷 물놀이나 하자고 했다.
동정호 물놀이의 풍취를 예전부터 들은 연홍이었다.
그녀는 그 말에 마음이 동해 양웅의 뜻에 따랐다.
나룻배를 한 척 얻었고 동정호에 배를 띄웠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동정호의 물굽이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살 때부터 의심스러웠던 나룻배는 물까지 새니…… 연홍은 살기 위해 죽자고 손을 놀려야 했다.
물놀이가 그 어렵다던 물질로 변한 꼴이니 연홍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동정호가 과연 넓긴 넓구나.
나는 하도 넓다기에 통천하의 물굽이 서너 배쯤 되는 줄 알았지." 양웅이 미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양웅의 말에 연홍은 더욱 기가 차 욕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연홍, 화 많이 났어? 돌아갈까?" 양웅의 그 말은 결국 연홍의 화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이 원수야! 같이 죽자!" 연홍이 쪽박을 들고 양웅에게 달려들었다. "어! 어!" "아이고!" 그 바람에 배가 거세게 흔들리며 양웅과 연홍은 한 덩이로 배 바닥을 뒹굴었다.
아래에 깔린 자는 연홍이었고 양웅은 그럴듯한 자세로 연홍을 짓누르고 있었다. "연홍, 괜찮아?" 양웅이 황급히 물었다.
연홍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냅다 이마로 양웅의 머리를 받으려 했다.
독사처럼 머리를 곤두세우던 그녀가 갑자기 배 바닥에 털썩 머리를 떨구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머리를 치켜 세우는 순간, 자신의 아랫도리를 누르고 있는 양웅의 거북한 그것이 갑자기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니 그 짓을 안 한 지도 한두 계절은 넘긴 듯했다.
때문에 갑자기 치솟은 연홍의 방정(芳情)은 쉽게 잠들 줄을 몰랐다.
연홍을 짓누르고 누운 양웅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새근거리는 숨소리, 연홍의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비로소 양웅은 자신이 취하고 있는 이상한 자세와 연홍의 방정을 깨달았다.
양웅은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늘에는 새털구름, 호반에는 가는 파랑뿐…… 뱃길이 아니라서 그런지 배 한 척 보이지 않았다.
가을바람은 시원하게 불었다.
그가 연홍과 가랑이를 맞대고 있는 곳은 좁고 꽉 막힌 방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어우러진 망망대해였다.
양웅은 묘한 정취를 느꼈다.
배는 출렁이며 절로 살과 살의 짜릿한 교감(交感)을 이뤄 내고…… 어느 순간, 양웅은 자신의 아랫도리가 불쑥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는 행여 기회를 놓칠세라 연홍의 치마를 걷고 내고를 벗겼다.
앙증맞은 배꼽, 기름진 구릉, 나이답지 않게 무성한 초지(草地), 오동통하게 뻗은 다리…… 양웅의 눈은 그 모든 진귀한 유혹들을 감상할 틈이 없었다.
다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그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허리띠를 내리고 연홍을 다시 덮쳤다.
철썩! 철썩! 나룻배는 가는 파랑에도 폭풍을 만난 것같이 흔들렸다. "음…… 응……" 연홍의 달짝지근한 신음은 동정호의 수십 장 물밑까지 미쳐 하백(河伯)의 심신까지 어지럽게 했다. "음…… 양 랑……" 그녀는 오랜만에 느끼는 희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것은 양웅도 마찬가지였다.
희열도 희열이었지만 그 구박과 설움이 이제야 끝났다고 생각하자 만근 짐을 벗어 던진 듯 홀가분했다.
철썩! 철썩! 양웅은 연홍의 몸이 부서져라 노질을 했다.
만약 그가 나룻배의 노질을 그렇게 열심히 했더라면 동정호가 중원 땅덩어리만큼 크다 해도 벌써 육지에 닻을 내렸을 것이다. "양 랑……" 연홍은 울상을 지으며 양웅에게 매달렸고 양웅은 연홍의 눈물을 보고 말아야 속이 후련해질 것인지 그녀를 더욱 두들겨 팼다.
콸! 콸! 콸! 나룻배의 요동이 심할수록 물은 콸콸 배로 스며들었다.
종내 연홍의 머리는 물에 잠길 듯했다.
연홍의 코와 입에 물이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 얻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좌위(座位)…… 좌위……" 연홍이 단내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양웅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연홍을 일으켜 무릎에 앉히고 자신의 절륜한 정력을 과시했다.
한번 불이 붙은 양웅과 연홍은 나룻배가 꼬르르 동정호에 가라앉을 때까지 서로를 위해 자신들의 기교를 아끼지 않았다.
심신이 쾌활하니 아무리 멀어도 별걱정이 되지 않았다.
노를 젓는 양웅의 손은 여유로웠고 쪽박으로 물을 퍼내는 연홍도 군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물길을 가다 보니 갈색으로 물들어 가는 산하(山河)가 바로 지척이고 호변도 보였다. "연홍, 이제 의생을 찾아갈 일도 없다.
그러니 이 서신은 그냥 마타룡에게 줘버리자." 양웅이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의 눈은 절애 위에 세워진 작은 목채를 쫓고 있었다.
호반 영채! 사공들에게 길을 물어 찾은 곳이었다. "다른 부탁은 다 들어줘도 그 부탁만은 안된다고 했잖아요.
그 짓만으로 사람이 살 수는 없잖아요!" 연홍이 눈초리를 치켜 뜨며 소리쳤다.
말이 매서운 것은 여전했으나 역시 독기는 없었다. "글세…… 이제 자신감을 찾았다니깐! 다른 일을 해도 문제없어.
나는 변황을 주름잡던 양웅이라구, 양웅!" 양웅이 가슴을 두드리며 위세를 부렸다. "안 돼!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어딘데…… 양 랑은 수고가 아깝지도 않아요?" "놀았다고 생각하면 되지.
수고는 무슨…… 그리고 생각해 봐! 호반 영채가 불탔다는 소문 들었지? 불난 집에 가서 돈을 요구하는 일이 얼마나 염치없는 짓이야.
그것도 생명의 은인에게…… 정말 강호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짓이라구." "잘됐네요, 그 일로 강호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니…… 나는 쓸데없이 칼질이나 하고 다니는 강호인가, 뭔가 하는 것에 진작부터 진저리를 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부자(富者)는 죽어도 삼대를 간다고 하잖아요.
또한 양 랑도 들었을 거예요.
지금 장강의 실권자가 누구인가를…… 마타룡! 바로 우리가 찾는 그 사람이잖아요! 장강의 실권자라는 자가 황금 몇 관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한다면 그걸 누가 믿겠어요?" 연홍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이고! 모르겠다." 양웅은 가슴을 쳤다.
그로서는 도저히 연홍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사내의 인격 고하(高下)는 그의 아내가 결정지어 준다는 말을 양웅은 절감하고 있었다. "욕을 먹어도 내가 먹을 테니 양 랑은 모른 척하고 계세요.
어디 남의 은자를 집어 가는 일이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연홍이 못을 박았다. '어쩔 수 없구나.
은자를 번다고는 했으나 어디 가서 번다는 말인가? 못 이기는 척, 연홍에게 맡겨 두자.
은자가 있으면 귀신도 부리고 은자가 없으면 귀신에게도 팔려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양웅은 내키지 않았으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가 노로 물살을 더욱 세차게 찼다.
철썩! 철썩! 나룻배는 기세 좋게 호반 영채를 접한 호변으로 나아갔다. "저 여자는 누구예요?" 호변에 발을 디디며 연홍이 호반 영채가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호반 영채가 자리한 절애의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여인은 동정호를 바라보며 피자를 바람에 흩날렸다.
왠지 쓸쓸함이 가득 느껴지는 여자였다. "호반 영채의 식솔이겠지." 양웅이 염왕도를 들고 나룻배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연홍은 치마를 둥둥 걷은 채 가파른 샛길을 올랐다.
호반 영채로 향하는 길이었다.
양웅은 동행하지 않았다.
도저히 그런 일로 마타룡과 대면할 수 없다고 뻗대는 바람에 호변에 남겨 두었다.
사실 그녀도 양웅이 따라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마타룡은 낭군의 은인…… 아무리 매정하려 해도 양웅이 곁이 있으면 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헉! 헉! 나이든 사람과 같이 사니 나도 늙어진 것 같군.
예전 오라버니의 산채(山寨)에 있을 때는 몇 구비의 산도 단숨에 뛰어넘었는데……" 샛길을 오르며 연홍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나뭇가지와 풀뿌리를 잡고 가파른 샛길을 올랐다.
멀리 호반 영채의 목채가 형상을 보일 때였다. "악!" 연홍은 비명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은 수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풀 속으로 끌려 들어간 연홍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바둥거렸다.
털이 숭숭한 팔이 그녀의 목을 쥐고 놓아 주지 않았다.
다리는 허공에 둥둥 뜬 상태였다.
연홍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파랗게 질려 갔다.
그녀의 숨이 꼬르륵 넘어가려 할 때였다. "놓아 주어라!"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가 연홍의 머리위에서 들려 왔다.
연홍이 붙들린 자리 위의 나무에는 채찍을 든 중년인이 박쥐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무 아래에는 서너 명의 무사들…… 원숭이처럼 전신에 털이 난 자가 연홍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놓았다. "컥! 크억!" 연홍은 막힌 숨을 삼키느라 켁켁거렸다.
휙! 채찍을 든 중년인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견혼수를 쫓던 놈을 죽이고 어디를 가는가 했더니 호반 영채였군.
견혼수라는 놈이 마타룡에게 그 사실을 전해 주라고 하던가?" 중년인이 음산한 얼굴로 물었다.
연홍은 겁먹은 표정만 지었다. "노파심에서 네놈들이 견혼수에게서 얻은 비밀을 전해 주려던 그놈까지 죽이려 했다.
그렇지 않다면 공안(公安)에서 벌써 네놈들을 죽였겠지.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서신을 전할 자가 마타룡이라…… 마타룡! 득검에 오른 우리도 감히 다루기 힘든 상대! 아쉽게 되었어.
후후후!" 중년인이 연홍을 가만히 바라보며 음소를 흘렸다. "괜찮은 계집이군.
하지만 죽어 줘야겠다." 그가 연홍의 목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구세요? 무엇 때문에…… 저는 견혼수라는 자도 모르고 그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없어요." 연홍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항상 혼자서 움직이지 않아.
한 놈이 움직이면 그 뒤를 또 한 놈이 뒤따르지.
뒤따르던 놈이 이미 모든 사실을 전했다.
곽원이 견혼수를 만났다고……" "다 죽어 가던 자가 무슨 말을 했겠어요.
그리고 견혼수를 만난 자는 양 랑이지.
제가 아니에요." "견혼수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든 듣지 않았든 상관없다.
죽어야 할 이유는 견혼수를 만났기 때문이야.
그리고 네년이 죽고 나면 곧 네 서방도 죽을 것이다.
염려 마라!" 중년인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연홍의 목을 졸라 왔다. "잠깐!" 연홍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녀가 재빨리 자신의 옷고름을 풀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한 장의 서신이 뚝 떨어졌다. "견혼수의 비밀은 그 서신에 담겨 있어요.
그 서신은 저뿐만 아니라 양 랑도 가지고 있다구요." 연홍이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조잘댔다. "뭐야?" 중년인이 떨어진 서신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순간, 그녀는 중년인을 걷어차며 죽을힘을 다해 소리쳤다. "양 랑!" 그녀의 목소리가 호변을 짜랑하게 울렸다.
여인이 아니라고 보통 사람의 경우, 목숨을 달라는 자 앞에 서면 삶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끝까지 매달리기 마련이다.
채찍을 든 중년인도 그래서 연홍에게 약간의 경계를 풀고 있었다.
하지만 연홍은 달랐다.
그녀는 녹림 출신이라 배포가 유달랐다.
어쨌든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천에 하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양웅을 부르는 것뿐! 중년인은 연홍의 발길질을 가볍게 피했다. "이년이!" 그가 흉광을 흘리며 연홍의 목을 비틀었다.
연홍의 목이 닭 모가지처럼 휙 꺾일 때였다.
파팟! 날카로운 칼바람이 연홍의 목을 쥔 중년인의 팔을 노렸다.
중년인은 놀라 연홍을 내던지고 다급히 채찍을 휘둘렀다.
날렵한 인영! 연홍을 위기에서 구한 자는 앳된 얼굴의 여인이었다.
연홍은 엉금엉금 기었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땅바닥에 놓여 있는 서신을 재빨리 품속에 넣었다. "양 랑!" 그녀가 불현듯 나타나 자신을 구해 준 여인의 뒤로 내빼며 고함을 질렀다.
양웅은 연홍의 찢어지는 고함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쨍! 쨍! 쨍! 칼 부딪치는 소리…… "아이고, 연홍!" 그는 염왕도를 들고 허둥지둥 달렸다.
팔척거한 양웅의 발놀림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는 가파른 샛길을 산양(山羊)처럼 훌쩍 뛰어 단숨에 연홍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연홍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 앞에는 손에 쥔 협도만큼이나 날렵하게 움직이는 여인…… 양웅은 그 여인이 호반 영채의 절애에서 본 여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여인은 물론 산고였다.
위무일을 기다리며 절애에 서 있던 그녀의 눈에 연홍을 노리고 달려들던 암습인들의 거동이 걸려든 것이었다.
쨍! 쨍! 쨍! 산고는 네 명의 적을 맞아 몸을 가누기도 힘든 가파른 산길을 종횡으로 움직이며 적들을 상대했다. "아!" 산고의 솜씨는 너무도 경쾌하고 유연해 양웅은 절로 탄식을 터뜨렸다.
반면에 적들은 네 명의 합공으로도 계집 하나를 처치하지 못하자 더욱 흉수를 난무했다. "뭐 해요? 빨리 도와 주지 않고!" 연홍이 고함을 질렀다.
양웅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놈들! 감히 누구에게!" 양웅이 천둥 같은 고함을 터뜨리며 벼락같이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쐐액! 양웅의 염왕도는 역시 당대 일절이었다.
우지끈! 콰쾅! 그의 염왕도는 가파른 산길에 이리저리 매달린 나무와 풀들을 닥치는 대로 베며 적들을 육박했다.
파팟! 팟! 채찍으로 산고를 공격하던 중년인은 안색을 찌푸렸다.
두 명의 합공이면 곽원 양웅과도 대등하게 싸울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네 명이나 온 것은 양웅의 실력을 배는 높이 평가해 실수를 절대 없게 하려는 주인의 명령 때문이었다.
비록 촌음의 시간이라 하나 그런 실력을 가졌는데도 그들은 협도를 든 계집을 처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양웅까지…… 중년인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 얼굴까지 드러난 마당에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팟! 팟! 중년인이 채찍을 들고 빳빳하게 세우며 산고를 재차 쓸어 갔다.
파팟! 챙! 챙! 가파른 산길에 창, 도, 채찍이 뒤섞이며 광풍을 일으켰다.
산고의 협도는 날렵했고 양웅의 염왕도는 우직했으나 힘이 넘쳤다.
그들의 창과 칼은 미리 손발을 맞춘 것처럼 절묘하게 암습인들을 휩쓸었다.
암습인들도 자랑할 만한 실력을 갖춘 자들임에는 분명했다.
그들은 산고와 양웅에 맞서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
백중지세(伯仲之勢)! 누가 덜컥 나무 뿌리에 걸려 자빠지는 실수를 하지 않는 한 싸움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였다.
싸움이 장기화되면 암습인들이 불리할 것은 없었다.
아무래도 힘에서는 아직 산고가 밀렸다.
가파른 산길을 날뛰느라 산고의 호흡은 벌써 흐트러질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암습인들도 한가락하는 자들인데 그 같은 상황을 놓칠 리 없었다.
암습인들의 출수가 산고에게로 쏠렸다.
양웅의 염왕도는 너무 정직해 임기응변의 술수에는 약했다.
따라서 그는 제때에 산고를 응원하지 못했다.
파팟! 팟! 산고는 적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자 아미를 찌푸렸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협도를 더욱 빨리 놀리며 적들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산고의 초식은 강호 일반의 초식과는 너무도 상이했다.
따라서 암습인들은 산고를 처치할 듯 말 듯하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피를 보지는 못했다.
양웅의 염왕도는 위신력을 더해 갔고 암습인들도 발악적인 공세를 펼쳤다.
챙! 챙! 챙! 산고와 양웅, 암습인들이 각자의 절초를 자랑하며 혼전을 벌일 때였다. "웬 놈이냐? 이곳이 어디라고!" 뇌성(雷聲) 같은 목소리가 암습인들의 귓가를 쩌렁하게 울렸다.
중년인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강바람에 그을린 얼굴, 강인한 턱에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는 자였다.
채찍을 든 중년인의 기억 속으로 재빨리 한 사내가 스쳐 갔다.
엽광! 중년인은 아차 했다.
호반 영채가 바로 코앞이었다.
물론 마타룡이 있었다면 호반 영채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타룡의 부재는 중년인도 알았다.
하지만 엽광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실 엽광을 잊은 까닭은 그의 실력을 경시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양웅과 새파란 계집, 그들만 하더라도 벅찬 상태였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후퇴일 뿐이다.
엽광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의 쌍수도가 바람을 가르며 암습인들의 배후를 공격했다.
챙! 챙! 챙! 숫자는 많았지만 몰리는 것은 이제 암습인들이었다.
산고, 엽광, 양웅이 삼면에서 거칠게 공세를 시도하자 암습인들은 어깨를 맞대고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내뺄 수 있었다면 천운(天運)을 자랑했을 것이다.
암습인들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겔겔겔!" 한 가닥 음산한 웃음이 산길을 울렸다.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에 털이 숭숭한 사내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가 피화살을 쏟으며 땅바닥으로 굴렀다.
절명! 암습인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뒤에는 입가에 치기 어린 웃음을 담은 세 늙은이들이 서 있었다.
삼악오! 영채에 누워 히히대고 있던 그들이 칼 부딪치는 소리에 쾌재를 부르며 달려온 것이었다.
삼악오가 일제히 암습인들을 노리고 흑살장을 쏟았다. "모두 죽이지 마시오!" 엽광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삼악오가 어디 위무일과 산고를 제외하고 남의 말을 듣는 자인가? 그리고 그들의 출수는 엽광의 말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암습인들은 죽기 살기로 각자의 병기를 내뻗었으나 당랑거철(螳螂拒轍)이었다.
퍼펑! 펑! 펑! 둔탁한 굉음과 함께 암습인들이 비칠비칠 물러났다.
그들이 입가에 피를 주르르 흘리며 풀썩 나뒹굴었다. "누가 나오라 했어?" 산고가 와락 고함을 질렀다.
암습인들을 단 합에 처치하고 득의 양양해 하던 삼악오들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그들이 앞 다투어 호반 영채로 사라졌다. "쯧! 칼을 쓰는 것으로 보아 제법 내력이 있는 놈들로 보였는데……" 엽광이 죽은 자들의 면면을 살피며 쓴웃음을 흘렸다.
슥! 산고는 협도를 꽂았다.
그녀도 삼악오를 따라 단번에 호반 영채로 신형을 감췄다. '으…… 과연 마타룡은 장강 최고의 실권자라 불릴 만하구나.
수하들도 모두 기라성(綺羅星) 같으니……' 양웅은 산고, 엽광, 삼악오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엽광이 양웅의 곁으로 다가갔다. "양 채주 아니십니까?" 그가 포권을 하며 물었다. "나를 아시오?" 하대(下待)는 양웅의 주특기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존대를 하고 있었다.
영채의 사람이라면 괜히 우러러 보이는 그였다. "통천하의 대호걸(大豪傑), 양 채주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엽광은 양웅과는 면식이 없었다.
그러나 염왕도를 보는 순간, 눈앞의 팔척거한이 양웅임을 알아보았다. "핫하하! 대호걸이라니 무슨……" 양웅이 염왕도를 흔들며 기분좋은 표정을 지었다.
이역(異域) 천리(千里)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그 쟁쟁한 호반 영채의 식솔이라 양웅은 더욱 기분이 좋았다. "이놈들과는 어떻게 시비가 붙었습니까?" 엽광이 쓰러져 있는 암습인들의 시신을 발로 툭 차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소.
연홍, 어떻게 된 일이냐?" 양웅이 연홍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난들 어찌 알겠어요?" 연홍은 고개를 저었다.
견혼수를 들먹이는 것을 보며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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