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장풍파랑 - 54편 (54/61)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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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장풍파랑 - 54편 (5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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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화인은 말을 잊고 있었다. "화인, 나는 모르겠다.
놈이 미쳐서 백부를 죽였는지 백부를 죽였기 때문에 미쳤는지……" "……" "백부를 죽였기 때문에 미쳤다면…… 이유를 찾아 다오.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가 싫다.
생각하기가…… 그 때문에 너를 만나러 왔다." 위무일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잠도 자지 못했다.
친구, 잠시 눈을 붙여도 되겠나?" 그가 물었다.
그의 눈은 정말 침침하게 감겨 가고 있었다.
천화인은 위무일의 시선을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위무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차례 몸을 비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이층 객방(客房)으로 올랐다.
천화인은 억지로 눈을 떴다.
그가 술독에 손을 댔다.
술독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술……" 천화인은 자신 앞에 놓인 빈 술병을 들고 점소이에게 손짓을 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풍파…… 세상의 요란함은 사부 청명 진인의 말 그대로였다. * * * 그 비둘기는 허공을 천천히 선회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은 자신의 집으로 익숙하게 날아들었다.
해손왕의 설렘은 점점 커졌다.
그는 비둘기가 안착하기를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중이었다.
비둘기가 날개를 접자 해손왕은 비로소 창 밖에서 시선을 뗐다.
그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턱이 긴 중년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곽원 양웅이라는 놈이 머무는 곳은 죽선루로 밝혀졌습니다.
속히 조치를 취하셔야……" 중년인은 해손왕의 모든 관심이 비둘기에 가 있는 줄도 모르고 보고를 계속했다.
해손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릴 수 없었다. "알았다." 그는 중녀인의 보고를 더 이상 들을 것 없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중년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읍을 한 후 첨각에서 사라졌다.
해손왕은 비둘기를 향해 걸어갔다.
비둘기의 다리에는 첩지(牒紙)가 매달려 있었다.
해손왕은 그 첩지를 정성스럽게 펼쳐 들었다.
첩지를 읽으며 해손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다면……" 그가 회한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손왕은 호법들의 좌장(座長)이자 해륭도에서 가장 높은 연륜을 지닌 유백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불렀소?" 유백은 해손왕의 초대가 의외인 모양이었다.
해손왕은 웬만하면 사람을 첨각으로 부르지 않았다.
찾아오는 자들만 대접할 뿐…… 그만큼 해륭도는 도주가 명을 내릴 일이 없었다.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도주는 공자들로 하여금 일을 해결하게 했다. "무슨 일로 부른 것 같습니까?" 해손왕이 반문했다. "공자들의 일이겠지요.
삼공자가 해륭도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근자에는 대공자도 모습을 볼 수 없고…… 무슨 변고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유백이 노안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는 이미 수하들을 보내 종적을 찾도록 했습니다.
영은 일이 있어 해륭도를 떠났소.
앞으로 해륭도의 일은 모두 화가 처리할 것이오." "이공자에게 해륭도의 일을 모두 맡긴다 함은…… 대공자께 다른 일을 맡겼다는 말씀입니까?" 유백이 놀라 물었다. "아니, 다른 일을 맡기지는 않았소.
그 아이는 자신의 일을 찾아 떠났을 뿐이오.
앞으로 그 아이를 보기 힘들 것이오." 해손왕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 유백은 백미를 꿈틀거렸다.
심영을 아끼는 사람이 어디 도주인 그뿐일까? 유백도 심영을 가장 아꼈고 후계자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 중요한 일을 왜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유백은 조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영을 보내고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소.
이해해 주시오.
유 노야." 해손왕은 실소를 흘렸다. "음…… 알겠소이다.
늙은 것이 잠시 도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소.
그런데 무슨 일로 떠났기에 앞으로 대공자를 보기도 힘들단 말이오?" "그런 일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지요." 해손왕은 심영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유백은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입을 닫았다. "내가 유 노야를 부른 것은 아이들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갑자기 두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유 노야가 맡았으면 합니다." "허허허! 이 늙은 것이 필요한 일도 있었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유백이 수염을 쓸며 말했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제 개인의 일!" 해손왕이 안광을 빛냈다. "개인적인 일?" 유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큰놈이 있었다면 그놈에게 일을 맡겼을 텐데 그놈이 없으니 천상 유 노야께 부탁을 해야겠군요.
둘째 놈은 실력이 의심스럽고……" "부탁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도주, 명을 내려 주시오!" 유백이 소리쳤다. "곽원 양웅이라는 놈을 처치해 주십시오.
놈을 따르는 계집도……" "아니, 맡길 일이라는 것이 고작 곽원이라는 놈을 처치하는 일이었습니까? 놈을 처치하는 일은 득검에 든 타수 몇 명만 보내도 될 텐데……" 해손왕이 어떤 명을 내릴지 잔뜩 기대하고 있던 유백은 실망의 표정을 지었다. "삼십칠(三十七) 타수, 사십삼(四十三) 타수, 사십팔(四十八) 타수, 오십(五十) 타수! 유 노야의 말대로 놈을 처치하기 위해 득검을 든 자들을 네 명이나 보냈소.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소.
삼십구(三十九) 타수는 대파산에서 그 이전에 죽었고……" "허어! 곽원이라는 놈이 그렇게 강했단 말인가?" 유백은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득검에 든 자들 두세 명의 합공이면 해륭도의 웬만한 호법들도 상대하기 힘들다.
유백 스스로도 득검에 든 자들 네 명이나 합공할 경우,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득검에 든 자들은 도주가 친히 몇 수의 무공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그만한 실력을 가졌다.
그런 자들을 곽원이 이겼다고 하니…… "물론 곽원이라는 놈 혼자서 그들을 처치하기는 힘들지.
협조자가 있었소.
호반 영채 놈들……" "마타룡!" 유백이 소리쳤다. "마타룡은 아니오.
놈은 호반 영채에 없소.
호반 영채에는 엽광이라는 놈과 마타룡을 따르는 계집뿐이오." "그럼 그들이……"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십구(四十九) 타수의 보고로는 그들 외에 몇 명이 더 있었다고 하던데…… 사십구 타수는 적의 이목을 꾀하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까지 알아 내는 데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다만 그들이 합세한 후, 싸움이 금방 끝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고수일 거라고 하더군요." "호오! 호반 영채는 이제 마타룡과 엽광이라는 놈밖에 남지 않았는 줄 알았는데, 놈들이 어느새 호반 영채를 다시 범의 소굴로 만들었군." 유백이 노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유 노야께 부탁을 드립니다.
죽선루에 숨어 있는 곽원과 그의 계집을 처치해 주십시오.
그리고 호반 영채의 남은 식솔들도 모두…… 마타룡은 없습니다.
놈은 당분간 호반 영채에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옛일도 있고 하니 호반 영채 놈들을 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곽원은 무슨 일로?" 유백이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일이라 했습니다.
유 노야, 만약 다른 일이 없었다면 내가 직접 갔을 것입니다." "다른 일? 아! 두 가지 일이 있다고 했지요.
어쨌든 밝히기를 원치 않으니…… 떠날 준비나 하겠습니다." 유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십팔 타수, 삼십구 타수, 사십 타수, 사십사 타수, 사십오 타수, 사십육 타수, 사십칠 타수, 사십구 타수를 데려가십시오." "너무 많소.
나는 아직 늙지 않았소이다." 유백은 해손왕이 득검에 든 자들을 여덟 명이나 붙여 주자 불만을 표시했다. "유 노야, 노야는 저의 숙부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신다 생각하고 그들을 데려가십시오." 해손왕이 정중하게 말했다. "허흠! 도주의 마음이 그렇다면……" 유백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해손왕의 청을 수락했다. "사십일 타수, 등요라는 놈은 밀직(密職)으로 데려가십시오.
큰놈이 갑자기 사라진 후 기운이 많이 빠져 있더군요.
바깥 바람이나 쐬게 할 생각입니다." 밀직은 일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 배후에 숨어 일의 전모를 파악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띠는 자다.
호반 영채 아래에서의 싸움은 사십구 타수가 밀직을 맡았었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 둘째에게 명을 내려 주십시오.
강호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타수들 오십여명을 급히 뽑으라고……" 해손왕이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타수들은 왜?'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궁금증을 이내 접었다. "알았소.
그럼 다녀오겠소이다.
도주!" 유백은 해손왕을 향해 백발을 조아렸다. "유 노야, 조심하십시오." 해손왕도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으로 예를 올렸다.
유백이 성큼성큼 첨각을 걸어나갔다.
해손왕은 등뒤 벽면으로 향했다.
십장생(十長生)이 어우러진 벽면에는 고색 창연한 칼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자전도(紫電刀)! 스스릉! 해손왕은 그 칼을 들고 도신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기운이 첨각을 일렁거렸다. "……이제야 나를 불렀구나.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늦게 나를 불렀다면…… 내가 참지 못했을 것이다." 해손왕은 자전도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자전도에 붉은 기운이 저녁노을처럼 피어올랐다.
그가 바람처럼 움직이며 자전도를 뿌렸다.
파파팟! 붉은 기운이 삼황오해를 휘감을 듯 맹위를 떨치며 뻗어 나갔다.
그가 가전(家傳)의 절예로 자랑하는 홍운행파도법이었다.
강호인들이 조양인이라 명하던 할아버지는 평생을 한 자루 칼에 바쳤던 분이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별반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분을 가까이서 뵙게 된 것은 벽부가 세워지고 나서였다.
하지만 그 생활도 지속되지 않았다.
장강삼협의 벽부 침공, 수룡와은 벽부의 죄악상을 할아버지께 낱낱이 고했다.
할아버지는 진노했고 그는 결국 아버지, 숙부와 함께 낭인으로 강호를 떠돌아야 했다.
할아버지를 다시 뵙게 된 것은 연로한 할아버지를 곁에서 보살피라는 아버지의 명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말을 쫓아 벽부로 다시 찾아온 그를 할아버지는 마다하지 않았다.
아들들에게는 매정했지만 손자인 그는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아마 나이가 들수록 육친의 정이 그리웠을 것이다.
마침 전인(傳人)을 찾고 있던 할아버지는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듯했다.
그는 할아버지를 모시며 무공을 익혔다.
홍운산수, 홍운행파도법은 그렇게 얻었다.
그리고 이 삼년의 세월이 흐른 듯하다.
밤중에 아버지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철경을 원했다.
그는 아버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철경을 얻기 위해 벽부로 자신을 보낸 아버지였다.
또 다른 밤…… 그는 철경을 훔쳐 들고 달린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가? 조양인!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스스로는 한쪽 팔을 자른 분…… 더해서 믿었던 손자에 대한 분노! 백광(白光)이 번뜩이는 순간, 철경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은 허공을 날았다.
그의 손에 의수는 그렇게 채워졌다.
의수를 끼우며 그는 맹세했다.
도둑질을 시키고 피붙이를 난도질해야 하는 강호! 그 강호를 영원히 떠나리라.
수년을 풍마처럼 떠돌았다.
정착을 꿈꾼 것은 한 여자를 만나고 난 후였다.
하지만 강호의 풍파는 그와 그 여자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믿었던 친구가 일으킨 풍파였고 그 풍파의 대가로 친구는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미 강호의 쓰디쓴 경험을 한 번 맛본 그였다.
그 정도의 풍파는 견딜 만했다.
해륭도에서 여인과 안착했다.
하지만 여인은 그 풍파의 상처를 견뎌 내지 못했다.
몸은 안착했지만 마음은 계속 허공을 맴돌았다.
아이들이 태어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외로움은 조금씩 커졌다.
그러나 여인이 살아 있을 때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여인이 죽음으로써 그는 망망대해의 고독을 버릇처럼 껴안고 살아야 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벽부의 주도권을 놓고 아버지와 숙부가 다투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호인들의 추상령에 숙부도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그 소문들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추상령에 이리저리 쫓기던 벽부의 잔당들을 해륭도로 불렀다.
그들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강호인들이 모두 그들을 욕할지 몰라도 어쨌든 그들은 그를 아껴 주고 귀여워해 주던 자들이었다.
덕분에 벽부만큼은 못했지만 해륭도도 성체로 커 나갔다.
아이들도 자라고…… 잠시 고독을 잊은 듯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자라 제 갈 길을 분주히 찾고 해륭도가 안정 될 무렵, 그는 다시 일상의 친근함으로 고독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생각하면 사람의 생이란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그는 자탄을 하며 첨각에서의 밤을 지샜다.
다시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언제쯤인가? 너무 화려했던 날이라 그는 계절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한 척의 꽃배가 해륭도에 도착했다.
그 배에는 한 여자가 타고 있었다.
모래밭에 당혜를 살짝 내미는 여인…… 담청! 그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로부터 미친 듯한 폭풍의 세월이었다.
제 27 장.
한천한설(寒天寒雪).
천화인은 한 떼의 무사들이 맞은편 객잔에 몰려드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轎子)를 둘러싼 채 웅성거리고 있는 자들은 총채의 무사들이었다.
교자에 탄 여인은 태부인이다.
그리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자는 승룡전주 장능, 집사당주 하빈의 얼굴도 보였다.
그는 수하들의 여장을 서둘러 풀게 했다.
탁! 천하인은 객방의 창문을 닫았다.
총채가 도착함으로써 이제 만로방과 일전을 겨룰 수로연맹의 모든 힘들이 모인 셈이었다.
천화인은 장포를 걸치고 검을 허리에 찼다.
그는 총채 무사들의 눈을 피하며 교외를 걸었다.
쉬-잉! 바람에 살갗이 시려 왔다.
하루 사이에 기온은 뚝 떨어져 입김이 날 정도였다.
그는 교외에 자리잡은 작은 객잔으로 향했다.
위무일이 그곳에 있었다.
객잔으로 들어가기 전, 천화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위무일은 객잔에 있지 않았다.
술은 마시지 않은 듯했다.
의복도 의외로 단정했다.
천화인은 가슴을 쓸었다.
만로방과의 일전이 코앞이었다.
아무리 절세의 무공을 자랑한다지만 흐트러진 마음으로 적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천화인은 그 때문에 위무일을 찾았었다.
위무일을 다독거리기 위해…… "어서 오게." 위무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화인을 맞았다.
천화인도 위무일과 나란히 맨땅에 엉덩이를 붙였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어.
이맘때면 원래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는지 잘 모르겠다." "추워질 때가 됐지.
계절이 바뀐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난 지난 계절은 영원히 가지 않을 줄 알았네." 위무일이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익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천화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위무일은 미간을 좁혔다.
담익은 그 이름만으로도 그에게 고통이었다. "누구도 이유없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익이 추운객을 죽여야 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었겠지.
나는 찾지 못하겠어.
야심? 아니다! 익의 야심은 사부의 후광이 있어야 더욱 빛을 볼 수 있지.
재물? 추운객 어른께 무슨 은자가 있었나? 우스운 일이다.
생각의 차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익이 제 사부를 거역해 죽일 생각까지 할 정도의 뿌리 깊은 견해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별 생각을 다 해봤다.
그런데 종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풍덩! 천화인이 수로에 돌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화인, 자네는 의외로 생각이 깊지 못하군." "무슨 말인가?" "익에게 가장 중요했던 한 가지를 빼먹었단 말일세." "중요했던 것이라니?" "그런 게 있어.
당연히 모르겠지.
자네는 나만큼 익에 대해 알지 못하니……" 말끝이 흐려지며 위무일의 안색도 흐려졌다. "의심 가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군." "……" 위무일은 입을 닫았다.
천화인은 끝없는 궁금증으로 위무일의 시선을 쫓았다.
그러나 위무일은 종내 입을 열지 않았다.
천화인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태부인이 입성했네.
이로써 수로연맹의 모든 힘이 다 합류를 한 셈이지." "많이 늦었군." "아마 내일 당장 개봉으로 출발할 걸세.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싸움이 될지도 모르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지.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왔네.
주황을 자네가 맡기로 했었지." "걱정이 되어서 찾은 모양이군.
술독이나 끼고 앉았는지…… 걱정말게.
마원과 함께 출발하기로 했네.
마타룡은 가끔 심술을 좋아해서 그렇지.
그렇게 약하지는 않아." "물론!" 천화인이 위무일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었다. "일단 주황과의 싸움부터 먼저 해결하세.
그 다음에 익의 문제를 해결해도 늦지는 않아." 천화인의 말에 위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천화인이 창천을 우러렀다. "천지는 얼어붙은 듯 차고 나는 갑자기 술 생각이 나는군.
자네가 술독에 파묻혀 있느가 걱정이 되어서 왔는데 말일세."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위무일도 담담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술 생각이 전혀 없는지 천화인의 권주가(勸酒歌)에 화답하지 않았다. * * * 밤중에 희끗희끗 진눈깨비가 날렸다.
위무일은 전전반측(輾轉反側)이었다.
막 잠에 들려 하면 추운객의 시신과 담익의 수급이 망막에 꽉 잡혀 그의 잠을 방해했다.
위무일은 결국 자리를 박찼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는 벌써 몇 날, 몇 밤을 그 어둠속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눈발은 조금씩 굵어져 갔다.
위무일이 분분히 날리는 설화(雪花)를 감상하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마을 어귀에서 한 사람이 그를 맞았다.
짧은 칼에 날렵한 경장, 여린 몸매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추위를 더 느끼게 했다.
위무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을 어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는 담청이었다.
위무일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오라버니를 쭉 찾았어요.
마 공자께서 이곳에 있다고 하더군요." 담청이 휘날리는 눈발 속에서 말했다.
그녀는 위무일을 꽤 기다린 모양이었다.
머리칼과 어깨에는 눈이 제법 묻어 있었다.
갑자기 담청을 만나자 위무일은 잠시 할말을 잊었다.
할말이 태산이라 입은 연신 달싹거렸으나 종내 목구멍이 열리지 않았다. "가세요." 담청이 길을 열었다.
그녀는 위무일이 머무는 객잔으로 향했다.
위무일이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쪼르르! 담청은 위무일의 술잔에 여아홍을 채웠다.
엉겁결에 차린 술상이라 소채가 전부였다.
위무일은 술상을 제사상(祭祀床)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냉막하게 앉아 담청의 손을 무안하게 했다.
담청이 자작으로 먼저 술잔을 비웠다. "그 동안 어디에 가셨었나요? 소식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면 총채에서의 제 간호가 섭섭했었나 보군요." 담청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위무일의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무슨 사정이 있었나 보군요." 담청은 자신의 술잔에 다시 잔을 채웠다. "좋아요, 더 이상 묻지 않겠어요." 그녀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어차피 바라지도 않았던 도움이었어요.
이제까지 도움을 주었던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고……" "……" "오라버니를 원망하지 않겠어요." 담청은 입술을 깨물었다.
휘-잉! 낡은 객방이라 바람이 사정없이 실내를 맴돌았다.
담청은 취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잔을 잡아 권하는 이 없어도 꼬박꼬박 술을 들이켰다.
볼이 붉어지고 목덜미가 붉어졌다.
원래 담청은 술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위무일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빼 밀었다.
피곤했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올해 처음으로 보는 눈이에요.
금방 그칠 것 같지가 않군요." 담청이 술을 들이키며 속삭였다.
위무일에게 눈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었다.
영남의 오지에서는 눈을 보기가 힘들다.
햇수로 따지면 눈을 본 지가 사 년! 그렇게 따지자 기분이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호호호! 얼마 전만 해도 눈 소식이 들리면 백 랑의 손을 잡고 곧장 달려가곤 했는데…… 이제는 냄새나는 객방에서 혼자 술이나 마시는 신세군요." 담청은 탄식을 터뜨렸다.
굳이 백승명을 거론함은 무엇인가? 저 여자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있다고 위무일은 생각했다.
조소가 흘러나왔지만 유치한 기분에 같이 놀아 주는 것 같아 참기로 했다.
물어 볼 말도 많았다.
그러나 입을 열기가 싫었다.
나른한 심신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술은 담청이 마시는데 취하기는 자신이 취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잠이 쏟아졌다.
며칠 밤을 자지 못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점차 깊은 나락으로 떨어짐을 느꼈다.
오랜만의 잠이었다.
그 잠은 끝도 없이 깊을 뻔했다.
그러나 위무일은 눈을 떠야 했다.
방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입술에 느껴지는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 위무일이 눈을 뜨자 담청은 비로소 자신의 붉은 입술을 뗐다.
담청은 무릎을 꿇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가 위무일의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에 갖다 댔다.
뭉클한 감촉! 확실히 처녀 때 느꼈던 것보다 풍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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