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황이 펼친 그 초식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가장 적절한 초식이었다. 천련은사는 위무일의 곁에 이르는 순간,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위무일의 장도와 팔뚝을 휘감아 왔다. 위무일은 천련은사는 개의치도 않았다. 그의 눈빛이 잠깐 사이에 핏빛으로 달아올랐다. 쐐액! 엄청난 파공음이 은사를 휘날리며 쌍백도에 그대로 부딪혀 갔다. 위무일의 칼에 실려 있는 힘은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챙! 챙! 쌍백도가 허공으로 튕겨 나가며 주황은 충격으로 허공에서 몸을 거세게 떨었다. 순간, 위무일의 칼은 그림자를 감추고 있었다. "……" 주황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위무일의 칼은 주황의 심장을 뚫고 등으로 삐죽이 나와 있었다. "잘 가시오." 휙! 위무일이 주황의 몸에서 칼을 뺐다. 첨벙! 주황의 몸이 오장하의 물속으로 떨어지며 오장하를 붉게 물들였다. 오장하에 몸을 맡긴 주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물결에 흔들릴 뿐! "으으으……" "방주!" 여맹은 신음을 흘렸고 이세명은 피눈물을 쏟았다. 그들이 오장하로 뛰어들며 주황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방주!" "방주……" 여맹과 이세명이 대성 통곡을 하며 오장하를 굴렀다. 서문중도 정문을 굳게 지킨 채 소리없이 눈물을 뿌렸고 수하들고 오열했다. "이거 괜히 내가 미안해지는군" 천화인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대로지. 주황은 그런 자일세. 수로연맹에서 보자면 갈갈이 찢어 죽일 자이지만……" 위무일이 오장하를 걸어나오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가 장도에 묻은 주황의 피를 털며 등을 돌렸다. "이 찢어 죽일 놈!" "서랏!" 여맹과 이세명이 핏발 선 눈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여 기주! 이 대주! 멈추시오!" 서문중이 다급히 소리쳤으나 소용없었다. 여맹과 이세명은 앞다투어 창칼을 번뜩였다. 챙! 챙! 위무일은 그들은 창칼을 세차게 뿌리쳤다. 여맹과 이세명은 위무일의 도력 팔이 떨어져 나가는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파파팟! 위무일이 서너 차례 장도를 휘날렸다. "컥!" "으윽!" 여맹과 이세명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생각하면 주황에 대한 의리를 죽음으로 지키려 하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여맹과 이세명은 살려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래서 죽여야 했다. 그들은 주황의 복수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복수를 갚기 위해 수로연맹을 끝없는 소요에 빠뜨릴 자들이 그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단칼에 여맹과 이세명을 죽였다. 길게 끌면 만로방 수하들의 흥분만 고조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위무일은 주황을 따라 오장하에 몸을 파묻는 여맹과 이세명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죽여야 하는 자들은 언제나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자들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화인!" 위무일은 천화인을 불렀다. 천화인이 다가왔다. "나머지는 자네에게 모두 맡기겠네. 내 할 일은 여기서 끝이다." 위무일이 오장하에 칼을 내던지며 말했다. "주황의 요구를 들어주란 말인가?" "……" 위무일은 대답없이 등을 돌렸다. "어디 가는가?" 천화인이 따라오며 물었다. "개봉에 온 김에 개방 총단에 한번 들러 봐야겠어. 그들에게 부탁한 일이 있다." "개방에 들렀다가 호반 영채로 바로 갈 생각인가? 그럼 당분간 만나기 힘들겠군. 춘절의 만회 때나 볼 것 같군." "글쎄…… 어쩌면 그 전에 한번 봐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익의 일 때문인가?" "아니네." 위무일은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나중에 보세." 그는 천화인이 붙잡을 틈도 없이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오장하에서 삽시간에 사라졌다. * * * 푹신한 침대, 기름진 음식…… 죽선루의 생활은 통천하보다 나았다. 그러나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연홍의 얼굴은 오히려 수척했다. 언제 불쑥 나타날지 모르는 암습자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덜컹! 덜컹! 창 밖으로는 겨울바람이 거세게 불고, 삼경에 가까워지는 시각이라 인적은 뚝 끊겨 있었다. 연홍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여 했으나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잠을 자도 토끼잠이었다. 드르릉! 드르릉! 연홍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웅은 네 활개를 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차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연히 걱정도 되지 않겠지. 쳇!'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양웅을 바라보며 연홍은 아미를 찌푸렸다. "거친 음식, 돌베개에 누웠어도 마음 편히 뒹굴 수 있는 산채가 나았었는데." 연홍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지금 잠을 자긴 자야 하는데. 양 랑이 새벽이면 또 잠을 깨울 거잖아. 아이고, 내 팔자야. 양 랑이 이제 원기를 찾아 한시름 덜었다 했더니 이제는 또 다른 일로……' 그녀는 가슴을 치며 창가로 걸어갔다. 환기를 위해 빠끔히 열어 놓은 창문을 닫기 위해서였다. 연홍은 창문을 닫으며 정적에 잠긴 악양의 거리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순간, 좌측 지붕 위로 검은 그림자 몇 개가 휙휙 죽선루를 향애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연홍도 늘상 양웅이 무공을 연마하는 것을 지켜봐 강호인들의 실력을 어림 짐작할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검은 인영들이 예사로운 도적들로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놈들……' 연홍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가 창백한 안색으로 창문에서 물러났다. "양 랑!" 연홍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양웅을 흔들었다. 그러나 양웅은 한번 잠들면 죽은 시체와 별다를 바 없었다. 연홍은 다급했다. 그녀는 바늘을 꺼내 양웅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렀다. 양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염왕과 같은 눈으로 사방을 부라렸다. 하지만 종내 그는 침상으로 다시 스르르 쓰러졌다. 연홍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젠 정말 이판사판이었다. 그녀가 바늘로 양웅의 손톱 사이를 쑤셨다. 이만한 고문이 어디 있을까? "아!" 양웅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는 다짜고짜 염왕도부터 잡았다. "누구야?" 양웅이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다. "쉿! 조용히 하세요. 놈들이에요" 연홍이 나직이 말했다. "놈들?" 양웅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암습인들을 벌서 잊었어요. 한두 명이 아니에요." 연홍은 울상을 지었다. "뭐야?" 양웅이 창가로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선루의 후문에 야행복(夜行服)을 입은 두 명의 괴한이 언뜻 보였고 맞은편 지붕에도 두 명의 괴한이 보였다. "젠장! 하필이면 신나게 자고 있을 때에……" 양웅이 투덜대며 연홍에게 다가왔다. 연홍은 그제서야 견혼수가 건넨 서신을 챙기고 엽광이 위기게 처했을 때 사용하라고 준 죽통도 챙겼다. 양웅은 연홍의 손을 잡고 객방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침입자들은 아직 자신들의 동정이 들킨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양웅은 자세를 낮추고 재빨리 자신이 머물던 방에서 좌측으로 세 번째 떨어진 방에 들어섰다. 그 방에는 팔자 좋게 생긴 중년인과 기녀로 보이는 계집이 알몸으로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양웅은 그들이 깨지 않게 조심하여 바깥의 동태에 귀를 세웠다. 일 각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이 머물던 방에 적들이 난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 마디 두런거리는 말소리도 들렸다. 쾅! 그와 동시에 옆 객방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야행인들은 양웅이 아직 죽선루를 떠나지 못했음을 알고 객방과 주루를 뒤지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요. 양 랑?" 연홍은 발을 굴렀다. "잠깐 있어." 양웅이 염왕도를 들고 알몸으로 얽힌 채 잠들어 있는 투숙객(投宿客)에게 다가갔다. 철썩! 철썩! 그가 사내와 계집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며 그들을 깨웠다. 뺨을 맞은 사내와 계집이 눈을 번쩍 떴다. 아닌밤중에 홍두께로, 뺨을 맞은 그들은 한마디 항의라도 해볼 수 있으련만 꿀 먹은 벙어리였다. 양웅의 무시무시한 표정과 목에 걸린 염왕도! 사내와 계집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양웅은 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몇 군데 부러지는 것은 감수해라." 그가 사내와 계집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에잇!" 양웅이 사내와 계집을 내던졌다. 우당탕! 객방의 문이 부서지며 사내와 계집은 일층 주루로 낙하(落下)했다. 객방을 뒤지던 야행인들은 재빨리 주루로 신형을 날렸고 양웅은 연홍을 껴안고 창문을 박찼다. "속았다!" 객방을 뒤지던 야행인들이 소리쳤다. 그사이 양웅은 벌써 몇 채의 지붕을 밟고 있었다. 바깥을 지키던 야행인들이 추적을 해왔다. 양웅의 경신술은 그들에 비해 앞서는 바가 있었지만 연홍을 안고 있어 거리는 점차 좁혀졌다. 천상 한바탕 칼질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 연홍은 엽광이 건네 준 죽통에 불을 붙이기 위해 열심히 불씨를 일으켰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서인지 불시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양웅이 몇 번 신형을 날리자 쭉 늘어선 대가(大家)의 지붕들이 끊겼다. "으샤!" 양웅은 지붕에서 소로로 뛰어내렸다. "빨리! 빨리! 곽원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도 않나요?" "연홍이 뒤를 바라보며 고함을 쳤다." 두 명의 야행인은 지척으로 달라붙고 있었고 삼사 장여 뒤에 다시 서너 명의 야행인이 추적을 해오고 있었다. "젠장! 부끄러워해야 할 일도 많다. 연홍, 너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양웅이 툴툴댔다. 그는 거미줄에 얽힌 작은 길을 지나 악양의 서북 방향으로 달렸다. 물론 그가 몸을 피하여 하는 곳은 호반 영채였다. 그가 죽을힘을 다해 악양의 교외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됐다!" 연홍이 희색을 띠며 소리쳤다. 치치치치칙! 죽통이 푸른 연기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연홍은 죽통의 끝에 달린 대나무를 쥐고 죽통이 날아갈 방향을 잡았다. 핑,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죽통이 푸른 불꽃을 튀기며 허공을 날았다. 펑! 죽통은 정확히 호반 영채 위에서 화려하게 폭발했다. "조금만 더 버텨…… 악!" 연홍은 비명을 질렀다. 양웅이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혀를 깨문 것이다. 양웅은 연홍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뭐야?" 좌우도 모르고 연홍은 신경질부터 부렸다. 양웅은 느끼고 있었다. 엄청난 기파…… 아니나다를까 메마른 나무 사이에서 세 명의 야행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웅의 시선은 선두에 선 백발노인에게 가 있었다. 회색 장포에 건곤권(乾坤圈)을 양손에 든 노인은 족히 팔순은 되어 보였다. 물론 그는 해륭도의 최고 원로 유백이었다. 양웅은 상대로부터 위압감을 느끼기로는 천화인 이후, 유백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액을 면하기가 힘들겠구나.' 양웅은 염왕도를 들며 한숨을 쉬었다. 야행인들만 하더라도 벅찬 상대였다. 그러나 양웅도 기세만큼은 여전했다. "으핫!" 그가 몸을 회전하며 염왕도를 날렸다. 양웅을 추적하던 두 명의 야행인이 칼을 번뜩이고 있었다. 챙! 챙! 양웅과 두 명의 야행인이 어울렸다. "연홍, 달아나라!" 양웅이 눈앞에 적들을 쓸어 가며 소리쳤다. "달아날 곳이 어디 있다고? 아이고! 괜히 험한 곳에 발을 디뎠다가……" 연홍은 후회로 눈물을 글썽였다. 펑! 호반 영채를 수놓은 불꽃을 먼저 발견한 자는 산고였다. 산고는 원래 밤낮의 구별이 없었다. 자고 싶으면 자고 일하고 싶으면 일했다. 영남의 오지에서 배운 습관이었다. 그 습관을 가르쳐 준 자는 위무일이다. 위무일 역시 영남에 있을 때는 밤낮의 구별이 없었다. 취하면 자고 취하지 않은 시각은 대부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덜컹! 불빛이 꼬리를 감출 때쯤 엽광도 쌍수도를 들고 다급히 뛰어나왔다. "양 채주가 위험에 처한 모양이군." 휙! 엽광은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산고가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제야 삼악오가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공력이 높아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들의 잠귀오 유난히 밝은 편이었다. "따라가 볼까?" 황오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백오와 적오가 맹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연신 하품을 해대며 마치 어미 개를 따르는 새끼 개처럼 산고의 뒤를 졸졸 따랐다. "양 채주!" 엽광이 양웅을 찾았을 때는 양웅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야행인들의 합격이 원래 매서운 데다 연홍까지 지키느라 양웅은 자신의 안위를 돌볼 틈이 없었다. 양웅을 공격하던 자들은 사십사 타수와 사십오 타수였다. 엽광이 나타나자 유백은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 틈에 양웅은 간신히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핫하하! 엽 선주, 잘 왔소." 그가 염왕도를 지팡이삼아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저놈들이 그런대로 제법 하더군." 죽을 고비까지 갔어도 그의 큰소리는 여전했다. 엽광은 안색을 찌푸렸다. '변황의 패자라고도 할 수 있는 양웅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역시 예사로운 자들이 아니다.' 그는 경각심을 돋우었다. 특히 건곤권을 들고 있는 노인이 신경 쓰였다. "엽 선주, 이곳은 내가 어떻게 맡아 보겠소. 연홍을 좀 부탁하오." 양웅이 인상을 쓰며 염왕도를 들었다. 유백은 백미를 꿈틀거렸다. "이놈들이 모두냐?" 그가 곁에 서 있는 사십구 타수에게 물었다. 사십구 타수는 이전의 싸움을 숨어서 지켜보던 자다. "몇 놈이 더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사십구 타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싸우다 보면 오겠지. 목을 따라." 유백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사십사 타수, 사십오 타수, 사십육 타수, 사십칠 타수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그들은 각기 사방에 자리를 잡았다. 엽광과 양웅은 연홍을 사이에 끼고 등을 졌다. "카핫!" 사십사 타수가 호수구(護手鉤)를 번뜩이며 먼저 양웅을 쓸어 갔다. 사십오 타수가 좌측으로 돌며 양웅을 협공했다. 사십육 타수와 사십칠 타수는 엽광을 공격했다. 챙! 챙! 챙! 악양의 한적한 교외에 다시 칼바람이 불었다. 엽광은 삼십육, 사십칠 타수를 상대로 그런대로 견뎌 냈다. 하지만 양웅은 적들의 공세에 금방 비틀거렸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였다. 거세게 염왕도를 놀리느라 엉거 붙은 피딱지가 떨어지며 다시 그의 전신은 흥건한 피로 물들었다. '개개인이 각 문파(門派) 당주급 이상의 실력자다. 이렇게 많은 실력자들을 보유한 문파가 강호에 있었다니……' 엽광도 적들을 상대로 땀을 흘렸다. "험!" 유백은 헛기침을 했다. 그의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엽광과 유백은 제법 한 수 있는 자들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처럼 타수들만으로도 충분히 처리 가능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보내다니…… 유백은 내심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챙! 챙! 챙! 싸움은 더욱 혼전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유백은 싸움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양웅의 보법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유백은 싸움판에서 눈을 뗐다.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그가 호반 영채를 바라보며 뒷짐을 졌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유백은 둔중한 발걸음 소리에 안색을 찌푸렸다. 경신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촌부들의 발걸음 소리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유백은 이내 눈빛을 바구었다. 발걸음으로 인한 지면의 진동은 지표(地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심(地心)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퍼뜩 주위로 눈을 돌렸다. 날렵한 인영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세 명의 노괴……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눈을 비비며 천연덕스럽게 나타난 그 노괴들이었다. 유백은 황급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건곤권이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났다. 산고는 양웅을 응원하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윙! 그 순간, 건곤권이 백오, 적오를 노리고 날아갔다. "아이고!" 백오, 적오는 갑자기 날아온 건곤권에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건곤권은 륜(輪)처럼 생긴 병기다. 건곤권이 허공을 가르며 다시 유백의 손으로 돌아갔다. "이런 찢어 죽일 놈! 수염을 몽땅 뽑아 주마!" 적오가 노화를 터뜨렸다. 그가 성난 소처럼 유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백이 건곤권을 교차시키며 신형을 날렸다. 응! 응! 적오와 유백이 뒤엉키는가 싶더니 잠시 후, 적오가 헛. 하는 신음을 터뜨리며 분분히 물러났다. 그의 어깨에서는 건곤권에 긁힌 상처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벽오와 황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이 쌍수를 묵빛으로 물들였다. 놀라기는 사실 유백이 더했다.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그는 흑살장의 위력에 은근한 두려움을 느꼈다. 유백은 그 두려움을 선제 공격으로 만회하고자 했다. 윙! 그가 건곤권을 날렸다. 건곤권이 허공을 빙글 돌며 삼악오를 쓸어 갔다. 유백은 되돌아오는 건곤권을 뛰쳐 나가며 회수했다. 그는 그 기세를 몰아 삼악오를 육박해 갔다. 삼십팔, 삼십구, 사십, 사십구 타수가 유백을 응원하며 달려들었다. 강호에 삼악오를 상대로 몇 초를 나눌 수 있는 고수는 흔치 않다. 유백은 해륭도의 이인자답게 당당히 그 흔치 않는 고수의 반열에 들 만했다. 그의 건곤권은 도검의 장점에 암기로서의 역할까지 충분히 해냈다. 몸의 일부로 익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백을 응원하는 타수들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삼악오들이 한 순간에 승리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확했다. 휘휙! 휙! 삼악오와 유백, 타수들이 살초로 돌풍을 일으켰다. 그사이, 산고와 엽광, 양웅의 싸움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산고는 양웅을 도와 두 명의 타수들을 상대했다. 엽광이 싸우는 중심권에서는 한 발 물러난 상태였다. 그는 연홍을 호위한 채 산고와 엽광을 좌우로 응원했다. 시각이 흐를수록 엽광은 점점 밀리는 듯했다. 그러나 산고의 협도는 더욱 빛을 뿌렸다. 채챙! 챙! 챙! 그녀의 협도는 바람처럼 빠르고 매서웠다. 하루 보지 않은 사이에 달라져 있다. 산고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종내 타수들은 여우처럼 재빠르게 날뛰며 공격해 오는 산고의 공세를 막기에 급급했다. "크악!" 첫 번째 비명이 터진 것은 싸움이 벌어지고 일 각이 흐른 후였다. 일 각은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고수들에게 있어 일 각은 억겁의 시간…… 그만큼 싸움이 백중지세로 치달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제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은 전운이 한쪽으로 급격히 기운다는 뜻! 비명을 터뜨린 자는 사십 타수였다. 그는 황오의 장력에 가슴을 얻어맞고 절명한 상태였다. "우히히!" "겔겔!" 삼악오들이 득의에 찬 괴소를 터뜨리며 흑살장의 위력을 배가했다. 유백은 이를 악물고 대항했다.그러나 그로서는 전대 노마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한번 균형이 무너지자 희생자는 속출했다. "카악!" 백오의 장력에 사십구 타수가 뇌수를 뿌리며 쓰러졌다. 유백은 속수무책이었다. 적오가 일침을 맞은 데 대한 앙갚음으로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를 핍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백이 위기에 처하자 산고와 엽광을 상대하는 타수들도 흔들렸다. 타수들의 손발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가뜩이나 산고를 상대하기 힘들어 하던 자들이다. 상대의 동요를 눈치챈 산고가 적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손발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파파팟! 적들은 비틀거리고 협도의 푸른 섬광이 위용을 더해 갔다. 사십오 타수가 결국 산고의 공세를 견디지 못해 게걸음을 걸었다. 양웅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혼신의 힘으로 염왕도를 뻗었다. "아악!" 사십오 타수가 염왕도에 꽂혀 비명을 질렀다. 그가 옆구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염왕도를 잡고 쓰러졌다. "으악!" "악!" 때를 같이해 백오, 황오가 삼십팔, 삼십구 타수를 명부에 보내고 있었다. 유백은 이제 삼악오의 협공을 혼자서 견뎌 내야 했다. 살아남은 타수들도 기가 꺾여 변변한 대항도 못 했다. "컥!" 사십사 타수의 수급이 협도에 잘려 허공으로 치솟는 것을 보며 유백은 흉광을 번뜩였다. 그는 한 명의 적이라도 목을 베야 속이 시원할 듯했다. 지금 상황에서 삼악오의 목을 베는 것은 하늘에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일…… 그의 시선은 엽광과 양웅에 가 있었다. 하지만 삼악오는 유백이 몸을 뺄 틈을 주지 않았다. 유백은 치욕과 좌절로 백미를 부르르 떨었다. 이만큼 살았으면 나이에 어울리는 죽음이 주어질 줄 안 그였다. 그러나 짐작컨대 자신의 죽음도 삼류 무사의 죽음처럼 검하의 고흔을 면치 못할 듯했다. 휘휙! 휙! 악에 받친 그가 이판사판으로 건곤권을 휘둘렀다. 승리가 점쳐지자 당장 쓰러질 듯한 양웅도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산고, 엽광의 공격, 양웅의 가세, 사십육, 사십칠 타수는 혼백을 이미 내놓고 있었다. 해륭도의 타수들은 무공은 뛰어난 데 비해 임기응변의 술수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해적들이나 해상의 군소방파만을 상대하느라 제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본 실력에서 자신의 실력을 반푼 깎아야 했고 사투를 밥 먹듯 하던 엽광, 양웅은 반대였다. 양웅의 염왕도는 적을 베는 데 딱 적당한 병기인 모양이었다. "……" 양웅의 염왕도에 허리가 잘린 사십육 타수가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쓰러졌다. "컥!" 곧이어 엽광의 쌍수도에 사십칠 타수가 그 뒤를 따랐다. 타수들의 전멸! 유백의 노안(老眼)이 분노로 더욱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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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놈이라도 목을 잘라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크핫!" 유백이 한소리 괴성을 터뜨리며 건곤권을 팔방풍우로 휘둘렀다. 그의 기세는 사뭇 음험해 삼악오들도 주춤 쌍장을 회수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