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놈이라도 목을 잘라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크핫!" 유백이 한소리 괴성을 터뜨리며 건곤권을 팔방풍우로 휘둘렀다. 그의 기세는 사뭇 음험해 삼악오들도 주춤 쌍장을 회수해야 했다. 삼악오들이 다시 흑살장으로 유백을 휘감아 갈 때였다. 유백이 돌연 건곤권을 날렸다. 우-웅! 건곤권이 섬전처럼 양웅과 연홍을 노리며 날아갔다. 유백은 일의 단초가 양웅과 연홍에게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분풀이와 동시에 유백은 그들을 처치함으로써 도주의 명을 반이나마 지킬 생각이었다. 산고와 엽광은 도저히 건곤권을 어찌해 볼 틈이 없었다. "연홍!" 양웅이 자신의 안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홍에게 달려들었다. 찌찍! 퍽! 퍽! 퍽!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육타음(肉打音)이 들린 것은 동시였다. 땡그랑! 마지막으로 건곤권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모든 소리를 정리했다. 유백은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비틀거렸다. 건곤권을 날리는 사이, 그의 몸은 삼악오의 흑살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육타음은 흑살장이 그의 몸에 떨어지며 난 소리였다. 유백은 미간을 좁혔다. 그의 입에서 선혈이 줄줄 흘렀다. 그의 몸이 스스르 쓰러지며 찬 대지를 굴렀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파의 고수, 이후 해손왕의 아버지였던 벽부 대공자의 눈에 들어 벽부에 입신, 그의 심복으로 활약, 조양인의 죽음 후 벽부 내부 쟁투에 참가, 주인으로 모시던 대공자의 패배로 은거, 그 은거 덕분으로 강호인들의 추살령에서 비켜 가는 행운을 얻음, 소주인인 해손왕의 초빙으로 해륭도에 발을 들임, 해손왕을 도와 해륭도를 바다의 제왕으로 만듦, 그리고 악양 교외…… 나뒹구는 시신은 해륭도의 제이인자 유백이었다. 양웅은 천생(天生)의 신력을 가진 자다. 자질구레한 일을 싫어하고 술과 사람을 좋아해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었다. 중년에 주위의 충고로 안착을 택했고 그곳이 통천하다. 양웅은 통천하에 정착한 후, 가진 바 무위로 당당히 변황 패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말년에 천화인에게 패해 강호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악양 교외…… 양웅은 등뒤에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건곤권이 할퀴고 간 상처였다. 연홍은 양웅의 품속에서 벗어나 황급히 양웅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양웅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눈을 까뒤집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눈을 감은 양웅은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다. "양 랑!" 연홍이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다. 생각하면 양웅은 그 호쾌한 행동으로 하늘의 은덕(恩德)을 입을 만도 했다. 그러나 하늘은 양웅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강호인들의 하늘에 걸린 것은 언제나 앞뒤 가릴 줄 모르는 차디찬 칼이었다. 양웅의 장례는 호반 영채에서 치러졌다. 초혼(招魂), 욕시(浴屍)로 입관(入棺)을 끝내고 그 관은 불태워졌다. 뼈는 가루로 부숴져 장강에 흩날렸다. 연홍이 매장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원래 떠돌기를 좋아하던 양웅이다. 그녀는 양웅의 뼈를 장강에 뿌려 그가 사해(四海)를 실컷 유람하기를 바랬다. 양웅의 장래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났다. 떠나고 나서야 그 자리를 느끼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연홍은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얼굴은 수척했고 치기라고는 이제 찾아볼 도리가 없었다. 조석곡전(朝夕哭奠)으로 눈물도 말라 있었다. 멍하니 동정호만 바라볼 뿐…… 연홍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를 잃은 산고는 영채의 뜰을 배회했고, 엽광은 자신이 죽으면 저렇게 슬퍼해 줄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쓴맛만 다셨다. 그렇게 이삼 일이 더 지났을 때였다. "엽 선주!" 연홍은 엽광을 불렀다. 엽광이 그녀의 곁에 섰다. "견혼수라는 분을 아세요?" 연홍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견혼수? 아! 총채의 전의를 맡고 있었던 자요? 지금은 총채에서 보이지 않던데…… 그자는 갑자기 왜?" 엽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자로부터 부탁받은 게 있어요." 연홍은 소매를 뒤졌다. 그녀는 처마 밑에서 찾은 견혼수의 서신을 비로소 엽광에게 건넸다. "이게 뭐요?" 엽광이 봉해져 있는 서신의 앞뒤를 살피며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견혼수라는 자가 죽기 전에 양 랑에게 건넨 서신이에요. 그 서신 때문에……" 연홍은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적들은 그 서신을 노리고 있었어요."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흠……" 엽광은 안색을 찌푸렸다. 전후 사정을 생각할 때 이 서신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그는 단번에 짐작했다. "견호수가 이 서신을 나에게 주라 했소?" "호반 영주나 추운객……" "아! 원래 영주게 전해질 서신이었군. 이 서신을 전하기 위해 그 같은 고초를 겪었다고 하니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영주께 반드시 이 서신이 전해지도록 하겠소." 엽광이 감사의 읍을 했다. 서신을 둘러싼 궁금증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하 된 자가 함부로 서신을 개봉할 수는 없었다. 그가 서신을 품속에 감추었다. "그 동안의 환대 고마웠습니다. 저는 이만 통천하로 돌아갈까 해요." 연홍이 씁쓸하게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 연홍은 고개를 떨구었다. 오라버니가 죽고 양웅마저 죽었으므로 통천하로 돌아가도 그녀가 기댈 곳은 없었다. "꼭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가야겠지만…… 그 먼 길은 여자 혼자 가기에는 너무 험합니다. 영주가 오면 말씀드려 사람을 붙여 주겠습니다." "……" "그리고 놈들이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안심도 되지 않습니다. 주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영채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영채는 사람이 없어 씁쓸할 지경입니다." 엽광이 연홍의 발길을 잡았다. "나와 같이 있으면 되지." 마당을 얼쩡거리던 산고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 연홍은 간다 온다는 말도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길을 재촉할 생각은 않는 것을 보니 영채에 남기로 생각을 굳힌 모양이었다. * * * 오랜 만로방과의 싸움에서 얻은 최종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태부인은 축하연(祝賀宴)을 제의했다. 각 채주들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수로연맹의 모든 무사들이 의기 양양 군산으로 향했다. 사실 개봉에서의 싸움은 조금 싱거운 감도 없지 않았다. 호반 영주에 의해 주황, 여맹, 이세명이 죽은 후 바로 싸움이 끝났기 때문이다. 나머지 일을 맡은 사람은 천화인이다. 당연히 태부인이 일을 맡아야 했지만 각 채주들이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최고의 공로자라 할 수 있는 호반 영주도 그에게 이후를 맡기고 떠났기 때문에 태부인이 나설 자리도 없었다. 천화인은 서문중과 단판을 벌였다. 그는 서문중에게 탕백기, 철기대, 보갑대의 해체를 요구했다. 만로방의 무력을 해체하라는 소리였다. 서문중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일기이대의 해체를 약속했다. 사대행회가 거느린 모든 분회의 해체도 요구했다. 분회를 해체하라고 한 이유는 각 지방 표국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육로를 만로방이 독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만로방이 육로를 독식하면 언젠가 다시 충돌이 일어날 것은 필연이었기 때문이다. 서문중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분회의 해체도 약조에 포함되었다. 일기이대, 분회의 해체…… 만로방은 이제 거대한 표국 이상의 세력이 아니었다. 천화인과 서문중은 그외 잡다한 몇 가지 약조를 더 맺은 후, 수결(手決)로 약조를 확인했다. 이로써 긴 싸움은 수로연맹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오장하의 일전은 수로연맹으로 보자면 설원의 자리였고 강호 제일방파임을 확약받은 자리였다. 그리고 또한 그 일전은 천화인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장강의 주인임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협상을 주도한 자도 그였고 약조에 수결을 한 자도 그였기 때문이다. 천화인은 연맹의 무사들과 떨어져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축하연(祝賀宴)을 위해 군산으로 가는 길에 허창 근교에서 위무일이 보낸 통인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통인은 악양루에서 위무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워낙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악양루로 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통인의 표정이 워낙 급해 천화인은 아버지에게 적당한 핑계를 댄 후, 악양루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장하에서 위무일은 춘절 만회 전에 한번 볼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조금 빠른 감은 있었으나 천화인은 그 때문에 위무일이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다. '무슨 중요한 일인지?' 악양루로 향하며 천화인은 머리를 굴렸다. 솔직히 위무일의 입에서 또 어떤 충격적인 이야기가 터져 나올지 천화인은 불안했다. 꿈자리가 다시 뒤숭숭해졌기 때문에 더했다. '아마 익의 일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일로 은밀히 부를 이유가 없었다. 천화인은 그 같은 생각으로 자신의 불안을 누르며 악양루로 향하는 발길을 서둘렀다. * * * 휘-잉! 한풍이 몰아치는 나루터는 쓸쓸했다. 위무일은 장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그 물결은 보기만 해도 피로가 느껴졌다. 빨리 장강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일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갔다. 호반 영채를 불태운 흉수들의 종적은 개방 방도들에 의해 조금씩 밝혀지고 있었다. 물론 이제껏 그들이 밝혀 낸 것은 야효를 비롯한 적도들이 강소. 절강의 해안에 가끔씩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뿐이지만…… 범위가 강소, 절강의 해안으로 좁혀졌다면 수색은 더 빨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백부와 담익의 일이었다. 솔직히 위무일은 백부와 담익의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을 생각하면 괜히 짜증부터 났다. 의욕이 생기지 않음도 물론이다. 천화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훌쩍 떠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영채로 돌아가면…… 어쨌든 그 일부터 매듭 지어야겠다.' 위무일은 장강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모든 것이 짜증스런 와중에도 그 일을 생각하면 그래도 마음 한편이 훈훈했다. 원래 백부, 추운객에게 부탁하려던 일이었다. 그는 산고와 혼인할 생각이었다. 마음을 굳히기까지의 과정이 힘들었지 이미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담향과 선실에서 정사를 나눌 때 그가 말했던 여자도 바로 산고였다. 그러나 육례(六禮)를 맡기려 했던, 백부의 죽음, 담익과의 만남, 주황과의 일전으로 혼례는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늦출 수 없었다. 영채로 돌아간 후, 곧 혼례를 올릴 생각이었다. 천화인에게 춘절 전에 볼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산고에 대한 애정이 나날이 새로웠다. 그는 더 이상 부유를 원하지 않았고, 산고가 자신을 정착시켜 줄 닻줄로 이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장풍이 장강의 물결을 통째로 뒤집어엎지 않는다면…… 제 29 장. 흑운번묵(黑雲飜墨). 천화인은 어스름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악양루에 올랐다. 그는 악양루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악양루의 겨울은 겨울대로 또한 운치가 있었다. 그러나 해질녘이라 사람의 발길은 금방 끊겼다. '아직 오지 않았나 보군.' 천화인은 악양루에서 내려와 주변을 서성거렸다. 해가 지고 어둠은 금방 깔렸다. 으스스한 바람이 추위를 몰고 달려들었다. '이상하군. 이 친구는 항상 먼저 와 사람을 기다리는데.'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였다. 쉭! 날카로운 파공음이 천화인의 귀를 울렸다. 천화인은 다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의 머리를 스쳐 간 것은 비표였다. "누구냐?" 천화인이 비표가 날아온 방향으로 퍼뜩 고개를 돌리며 고함을 질렀다. 나무 사이로 인영 하나가 후닥닥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천화인은 검을 빼 들었다. "서랏!" 그가 암습인을 추적했다. 암습인은 기습이나 일삼을 자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그이 신법은 엄청나게 빨라 천화인도 간신히 따라갈 정도였다. 서문(西門)을 빠져 나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던 암습인은 소나무가 촘촘한 작은 야산에서 우뚝 발걸음을 세웠다. 휙! 천화인이 암습인의 곁에 신형을 착지했다. "누구냐? 누군데 감히 시비를 거는 게냐?" 그가 검을 치켜 들며 소리쳤다. 검은 야행복을 입은 자가 두건을 벗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대춧빛처럼 붉은 얼굴, 까만 머리칼…… "헉!" 천화인은 헛신음을 터뜨렸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자…… 그는 놀랍게도 해손왕이었다. 해손왕은 느릿하게 자신의 애병, 자전도를 빼 들었다. "자네를 만나고자 한 사람은 마타룡이 아니라 바로 나일세." 그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천화인은 안색을 찌푸렸다. "무슨 일로?" 그가 냉랭하게 물었다. 해손왕은 대답 대신 자전도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자전도가 불에 달군 것처럼 붉게 이글거렸다. "흐흠…… 이유를 모른 채 싸우기 싫지만…… 원한다면!" 천화인이 검을 세웠다. 그가 칠십이파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해손왕의 자전도는 붉은 홍무를 피웠고 야행복도 팽팽하게 부풀었다. 천화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전도에 어린 붉은 기운은 위무일의 칼에서도 보던 것이었다. 순간, "미안하네, 젊은이!" 해손왕이 한소리 고함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그 칼이 붉은 홍무를 넘실거리며 천화인을 덮쳐 왔다. 천화인은 그제야 해손왕이 펼치는 도법이 위무일의 도법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홍운행파도법! 바로 철경에 실린 그 무공이었다. 천화인은 해손왕이 어떻게 해서 철경의 무공을 익혔는가를 궁금해 할 틈도 없었다. 해손왕이 펼치는 홍운행파도법은 단연코 위무일에 비해 한 수 위였다. 도세의 부드러움과 변화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천화인은 손속에 사정을 두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파파팟! 그의 검이 현란함을 더했다. 칠십이파검법은 과연 현문의 절예였다. 귀기(鬼氣)까지 느껴지는 자전도의 공세에 맞서 멋지게 어울렸다. 하지만 해손왕의 공격은 시작일 뿐이었다. 수를 더할수록 그의 자전도는 붉은 색채를 더해 갔고 천화인은 마치 홍무의 덩어리가 미궁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강한 자였다니……' 천화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동시에 그는 맹렬한 호승지심을 느꼈다. 천화인은 반보를 물러나며 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섬전 같은 일검이었다. 천화인은 검세를 바꾸며 해손왕을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청운적하검법! 현란한 빛무리, 천화인의 검은 마치 바람이 안개를 가르듯 자전도에 서린 홍무를 휘날렸다. 해손왕의 눈빛이 변했다. 자신의 칼이 밀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자전도가 나아가는 방향을 좁혔다. 챙! 챙! 챙! 천화인의 검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검막이 첩첩이 해손왕을 에워쌌다. 그러나 해손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칼의 변화뿐만 아니라 진퇴도 아는 자였다. 오히려 그는 검막을 차단하며 조금씩 천화인을 육박해 갔다. 천화인은 초조했다. 천하제일이라 칭송받던 조양인의 무공은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홍운행파도법은 방어식으로 바뀌자 또한 철벽을 자랑했다. 그의 검은 해손왕을 일방적으로 몰아치고 있었지만 해손왕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공격은 분명 그가 하고 있었지만 조금씩 뒷걸음을 쳐야 하는 것도 그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단전에 은근히 통증을 느꼈다. 애초에 청운적하검법은 그가 사용하기에 무리인 검법이었다. 해손왕은 상대의 작은 틈도 놓치지 않는 자다. 그는 천화인의 검끝이 무거워져 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좌수가 붉게 물들었다. 해손왕의 보법이 갑자기 질풍처럼 빨라졌다. 자전도가 그에 호응했다. 챙! 챙! 챙! 챙! 챙! 챙! 천화인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검에 수십 번에 도력(刀力)을 느껴야 했다. 검이 점차 방향을 잃고 허공으로 비켜 갔다. 검세를 가다듬기 위해 천화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한번 방향을 잃기 시작한 검은 원래의 자리로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놀란 천화인은 칠십이파검법으로 급히 검초를 변화시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청운적하검법에 비교하면 현묘함에서 많은 차이가 나지만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는 가장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검법이 칠십이파검법이기도 했다. 해손왕은 그 틈도 주지 않았다. 자전도를 쓸어 가며 해손왕은 천화인은 바짝 육박했다. 천화인을 지척까지 따라붙은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좌수를 날렸다. 홍운산수! 수(手)와 도(刀)를 같이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해손왕이 철경에 든 무공을 자유자재로 펼친다는 증거…… '틀렸다.' 천화인은 아득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자전도의 칼 바람 소리는 그의 귓가를 찢고 좌수는 연신 그의 요혈 근처를 맴돌았다. 종내 천화인은 자신의 검이 어디로 뻗어 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검은 상대의 공격에 반사적으로 대응하고 있을 뿐…… 어느 순간. 퍽! 둔중한 격타음과 함께 천화인의 생각은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눈앞은 깜깜했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입으로 울컥 치솟았다. 퍽! 퍽! 연이어 해손왕은 홍운산수로 천화인은 가격했다. 천화인은 거세게 몸을 떨었다. 땡그랑! 검이 손아귀에서 스르르 빠져 나가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도 얼어붙은 땅을 뒹굴었다. 철컥! 해손왕이 자전도를 꽂고 천화인 곁으로 다가섰다. "제법 괜찮게 클 놈이었는데…… 하지만 화발다풍우(花發多風雨)라 했다. 오래 산다고 꼭 좋은 일만 본다는 법이 없으니 너무 섭섭해 하지 마라." 그가 뒷짐을 지며 하늘을 우러렀다. * * * 호반 영채를 오를 때까지 기분이 좋았다. 산고의 반가운 얼굴을 봤을 때는 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엽광을 만나고 나서 그의 얼굴은 흐려졌다. 엽광이 양웅의 죽음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바탕 한 후였다. "이것이 바로 놈들이 노리던 서신입니다." 엽광은 품속을 뒤져 서신을 꺼냈다. 그가 견혼수의 서신을 위무일에게 건넸다. 위무일은 서신을 받으며 그 서신에 들어 있는 무게를 짐작했다. 엽광이 서신을 건네고 뒤로 물러섰다. 찌익! 위무일은 봉서를 뜯었다. 서신은 모두 수로연맹의 비문으로 적혀 있었다. 먼저 그의 눈에 서신 상단에 촘촘히 적힌 글이 들어왔다. <이번에 드리는 서신은 두 번째입니다. 굳이 밝히는 이유는 첫 번째 서신이 가는 도중 외부로 흘러 들어갔지 않았나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노야께서 첫 번째 서신을 받았다면 분명 연락이 왔을 텐데 연락이 오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적어 둡니다.> 위무일은 서신에서 잠시 눈을 뗐다. 서두로 볼 때 견혼수가 서신을 보이고자 했던 사람은 백부, 추운객인 모양이었다. 견혼수는 이미 백부에게 서신을 한 번 보낸 듯했다. 백부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그 서신을 백부에게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백부는 없었다. 위무일은 서신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서두 아래는 전부 검안(檢案) 소견서(所見書)였다. 원래 강호 제 문파들은 문파의 주요한 인물이 요절하거나 급사할 경우 부검(剖檢)을 하는 것이 관례다. 강호는 워낙 음험한 곳이라 누구에게 암습을 당해 죽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전임 총채주 백승명의 경우는 이미 앓고 있던 병이 있어 부검은 하지 않고 검안만 한 모양이었다. 견혼수는 검안 소견서에서 상처들을 하나하나 들추며 사인을 찾았다. <좌측 어깨에서 혼문(魂門)까지 이어진 자상은 사오 년 전의 상처로 추증됨. 사인과 직접 관련 없음.> 그 상처는 위무일도 알고 있는 상처였다. 같이 출행했었고, 만로방의 전임 북풍로의 회주에 의해 어깨에 상처를 입고 뒹구는 그를 구해 준 자도 바로 그였다. 위무일은 그 상처를 떠올리자 백승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을 달릴 때가 생각나 가슴이 찡했다. <양문(梁門), 태을(太乙)에 독기가 퍼진 흔적이 있음. 화살이나 노에 맞아 철독(鐵毒)을 제대로 빼지 못해 생긴 흔적인 듯함. 이 년 전, 완치. 사인과 직접 관련 없음. 장문(章門)의 상처는……> 견혼수의 검안 소견서는 백승명의 몸에 난 조금의 상처라도 찾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인과 관련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견혼수가 검안 소견서를 그같이 쓰는 이유는 죽은 자를 보내는 자들이 그렇게 쓰기를 원했고, 그것이 지금은 강호 제 세가의 관례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검안서를 통해 사자(死者)의 몸에 난 상처를 확인함으로써 사자의 용맹을 기억하려 했다. 그리고 사자의 몸에 상처가 난 연유를 검안서를 통해 되새기며 사자의 원한을 잊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검안 소견서나 부검 소견서는 실상 사자가 걸었던 무사로서의 흔적을 말해 주는 전적서(戰績書)와 같았다. 그래서 전의들은 사자의 상처를 하나라도 더 찾으려 혈안이었다. 견혼수도 물론 백승명의 상처를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눈을 부라렸음이 분명했다. 최소한 검안서가 두세 장은 되어야 모두가 만족함을 견혼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백승명은 요절이었고 싸움에는 많이 참가하지 못해 상처가 많지 않았다. 견혼수의 검안서는 끝을 맺어 가고 있었다. <하근(下根)에 입은 큰 부상은 단도의 대접전 당시 폭약에 당한 상처로…… 사인과 직접 관련 없음.> 위무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견혼수가 검안서에 적어 놓은, 단도에서 입은 백승명의 상처는 남자구실을 전혀 못 할 상처였다. "쯧……" 위무일은 쓴맛을 다셨다. 싸우다 보면 어찌 그런 일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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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이 다시 검안서를 쫓았다. 견혼수는 백승명의 사인을 그와 같이 적고 있었다. 위무일은 견혼수의 검안서를 접었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그 난리를 부렸는지 위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