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알지 못했다.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그러나 생각에 앞서 그녀의 높고 가는 목소리는 밤바다를 찢어 놓고 있었다. "무랑(無郞)!" * * * - 쏴아! 쏴! 엄청난 빗줄기였다. 그 빗줄기 속에서 손가락 사이의 작은 물체를 본 것은 정말 용한 일이었다. 용봉(龍鳳)이 어우러진 반지(斑指)! 그 반지는 이미 모든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고집스럽게 손가락을 지키고 있었다. 더 남은 말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악양루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그 나무 아래에서 그녀는 떠난다고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쏴아! 쏴! 비는 계속 내리고 장강의 토사(土砂)는 바다를 매울 듯 밀려들었다. 그는 그 물결 속을 부유(浮游)했다. 칼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외침... 꿈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었다. 그는 침상에서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손을 들었다. 한 동안이 지나도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쥐어지지 않았다. 그가 부스스 일어나 술병을 잡았다. 술병을 흔들던 그가 일순간 몸을 경직시켰다. 해풍에 가느다랗게 들려 오는 소리! "무랑... " 누군가를 부르는 외침은 꿈이 아니었다. 그가 천천히 목채(木寨)의 문을 열고 나섰다. 목채는 해안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그가 무심한 눈빛으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삼본장선, 그리고 그곳을 향해 출렁거리며 가고 있는 쾌선...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는 그 쾌선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그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다시 목채에 들어갔다 나오는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칼과 인피면구(人皮面具)가 들려 있었다. * * * 삼본장선의 선장(船長) 하자드는 팔짱을 끼고 턱수염을 매만졌다. 쇠사슬에 칭칭 감겨 뱃전으로 오르는 여인... "흠! 이 계집이오? 이 계집이 바로 도주의 귀한 아들을... " 하자드가 입을 닫았다. 적해도주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의 말문을 닫게 한 것이다. "앙칼지게 생겼군. 사자(獅子)와 싸우는 계집이라... 선저(船底)에 묶어 둔 그놈과 함께 저 계집을 팔아 넘긴다면 금냥이나 쥐겠어." 그가 흘깃 적해도주를 바라보았다. 적해도주는 팔짱을 끼고 냉랭하게 서 있었다. "ㅉ... 정말 아깝군. 노예 열 명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계집이야." 그가 선실로 끌려가는 여인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하자드의 삼본장선은 항주(抗州)를 끝으로 본국(本國)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귀향길에 오르는 그의 배는 중원을 떠나기 전 반드시 들리는 곳이 있다. 적해도! 그는 적해도의 해적들이 노략질한 물건들을 싼값으로 사들여 매양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이번에는 풍랑이 거세 적해도에 며칠을 정박했었다. 다시 출항을 서두르는 그의 배를 이곳으로 끌고 온 자는 적해도주였다. 풍랑길에 노략질을 나간 아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다. 바람은 점차 자고 있었으나 아직 물길은 거칠었다. 적해도의 해적선(海賊船)은 빠르기는 하나 거센 파랑을 이겨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해도주는 삼본장선에 물길을 의뢰했다. 하자드는 노예 다섯 명을 얻는 대가로 적해도주의 청을 들어주었다. 팽호열도에서 영남의 해안으로 이어지는 섬에는 반 어부, 반 해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적지 않다. 적해도주는 그들에게 쉽게 아들의 행방을 물을 수 있었다. 적해도주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이틀 전이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의 아들은 수하들의 목과 함께 산고라는 여자의 손에 깨끗이 잘려진 후였다. "도주!" 하자드가 뱃전에 묵묵히 서 있는 적해도주를 향해 걸어갔다. "좋은 술이 있소. 그만 심려를 가라앉히고... " " ... " 적해도주는 묵묵부답이었다. 툭! 툭! 하자드가 두툼한 손끝으로 현측판(舷側板)을 두들겼다. 그가 어색함을 풀기 위해 말꼬리를 돌렸다. "이번에는 물건이 제법 많은 것 같소. 그 동안 재미가 괜찮았던 모양이오?" "적해도에 더 이상 물건을 쌓아 둘 수 없기 때문이지. 다음에는 적해도에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적해도주가 냉랭하게 말했다. "도주, 그게 무슨 말이요?" 하자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손왕(海孫王)! 그자가 우리 적해도에 통첩(通牒)을 보내 왔다. 나를 수하로 삼고 싶은 모양이야." 적해도주가 안색을 찌푸렸다. 해손왕! 바다의 제왕(帝王). 바다에서는 수군(水軍)보다 더 영향력을 떨치는 자! "설마 그가 해적... 아니, 바다의 호걸(豪傑)들까지 수족으로..." "본도(本島)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여의지 않다면... 물귀신이 될 도리밖에... 용의 꼬리는 원하지 않는다!" 적해도주가 휙 등을 돌렸다. 그가 선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해손왕... 올 때마다 힘이 커지는군. 앞으로 도독(都督)들 보다 그자에게 더 신경을 써야겠구나. ...돛을 올려라!" 하자드가 고함을 쳤다. 선원들이 닻을 올리고 돛을 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때였다. "선장!" 수하 한 명이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하자드가 우현(右舷)을 향해 걸어갔다. 수하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던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바다는 밀물이 몰아칠 때라 더욱 꿈틀거렸다. 반 장으로 치솟는 물길 속에 한 척의 뗏목이 그의 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뗏목에 탄 자는 단 한 명! 구부정한 자세, 뗏목에 놓아둔 칼은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뒹굴며 철컹거렸다. 하자드가 턱수염을 매만졌다. "좋은 일로 올 리 없고... 쫓아 버려!" 그가 소리쳤다. 서너 명의 수하들이 히히닥거리며 총포(銃砲)를 꺼냈다. 뗏목과 삼본장선의 거리는 이제 십 여장 남짓한 거리였다. 그들은 각기 뗏목에 탄 자의 한 부분을 겨누며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지지직! 심지에 불이 붙는 것을 보며 하자드는 등을 돌렸다. "어!" "이런!" 갑자기 수하들의 탄성이 들렸다. 수하들의 총구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우왕거리고 있었다. 타당! 탕! 매캐한 화약 냄새가 하자드의 코를 찔렀다. 하자드는 수하들의 총탄(銃彈)이 빗나갔음을 금방 알아챘다. 사람 꿰뚫는 소리가 아니었다. "음... " 그가 신음을 흘렸다. 타타탁! 뗏목에 탄 자가 노를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해면(海面)을 차고 있었다. 노가 해면에 부딪히며 파도를 거세게 부수자 뗏목은 단숨에 삼장 여를 나아갔다. 뗏목은 출렁거리는 바다 속을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며 선저판(船底板)에 달라붙고 있었다. "한족(漢族) 놈들 중에는 우리들이 상상도 못하는 무공을 가진 자가 부지기수라 더니... 행색이 처음부터 어쩐지 이상했다! 총포수(銃砲手)!"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수하들이 웅성대며 총구를 우현에 걸쳤다. 순간, 뗏목에 탄 자가 새우처럼 몸을 튀기며 허공을 날았다. 그가 허공에서 신형을 비틀며 삼본장선의 측판(側板) 중앙에 칼을 꽂았다. 측판에 박힌 칼의 떨림이 멈추기도 전에 뗏목에 탄 자가 칼의 반동을 이용 신형을 뱃전으로 재차 도약했다. 하자드의 수하들이 총포를 내던지고 다급히 칼을 잡아 나갔다. 파팟! 그러나 그들이 채 칼을 뽑기 전에 허공에서 어지러운 빛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으악!" "칵!" 잠깐 사이 대 여섯 개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하자드가 황망히 뒷걸음질을 치며 칼을 뽑았다. 뗏목에서 뛰어오른 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헉!" 하자드는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다. 구부정한 허리, 긴 회색 머리칼과 수염, 뗏목에서 뛰어오른 자의 얼굴은 문신과 상처로 악귀(惡鬼)를 연상시켰다. 나이는 이순(耳順)을 훨씬 넘은 것 같았다. 그러나 손은 기이하게도 주름살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사람을 상대해 본 적이 오래여서... 이 칼로는 적당하지 않군." 느릿한, 마치 유부(幽府)에서 들려 오는 듯한 아주 느릿한 목소리... 그가 칼을 서서히 휘었다. 칼이 낫처럼 휘청 구부러졌다. 그가 칼을 가슴에 대자 비로소 칼날은 수직으로 섰다. 하자드의 수하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양(大洋)을 누비는 자들답게 과연 재빨랐다. 총포수들은 잠깐 사이 총포에 불을 붙이고 순수(盾手)들은 하자드를 지키기 위해 방패로 벽을 쌓았다. 지지지직! 뱃전이 화약 냄새와 푸른 연기로 뒤덮였다. 뗏목에서 오른 자가 휘청 휜 칼을 가볍게 휘둘렀다. 휙! 그가 허공을 솟구치며 총포수들을 노려 갔다. 피핑! 핑! 순수들이 단창(短槍)을 던지고 쇠뇌를 날렸다. 그러나 쇠뇌와 단창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팟! 한꺼번에 세 개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목에서 뿜어 나오는 피가 뱃전을 적시기도 전에 다시 서너 명의 총포수들이 뱃전을 뒹굴었다. 타당! 탕! 탕! 목을 잃은 총포수의 손에서 방향을 잡지 못한 총탄들이 어지럽게 날았다. "으으으... " 하자드의 수하들이 전의를 잃고 비칠비칠 물러섰다. 그때였다. 촤르륵... 쇠사슬이 진동을 일으키며 겸도가 두 방향으로 날았다. 겸도가 포승줄처럼 엮이며 뗏목에서 뛰어오른 자의 손목에 정확히 감겼다. "도주!" 하자드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선실에서 나타난 자는 적해도주와 그의 수하들이었다. 촤ㅊ! 적해도의 수하들이 양팔을 뜯어낼 듯 겸도를 좌우에서 끌어당겼다. 그러나 뗏목에서 오른 자는 꼼짝도 않았다. 적해도주가 음침하게 눈빛을 빛냈다. "산공... 내가 깜빡했었군. 산고 곁에는 산공이 있다는 것을... 나는 산공에 대한 이야기가 한낱 해풍에 떠다니는 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가 천천히 장도를 뽑아 들었다. '산공... ' 뗏목에서 오른 자의 입가에 실소(失笑)가 흘렀다. 일순간, 그의 눈빛이 흉흉한 빛을 뿌렸다. 카락! 그가 손을 틀어 손목에 매달린 쇠사슬을 잡았다. 그가 쇠사슬을 세차게 당겼다. "으앗!" 쇠사슬을 쥔 왜인들의 몸이 허공을 붕 날아 뗏목에서 오른 자, 산공을 향해 날아왔다. 산공이 두 주먹을 내밀었다. 퍽! 퍼퍽! 왜인들의 머리통이 육편(肉片)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찰카닥! 산공이 손목에 감긴 쇠사슬을 천천히 풀었다. 그가 겸도를 돌렸다. 윙! 윙! 윙! 겸도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선풍(旋風)을 일으켰다. "크핫!" 산공이 한 소리 고함을 지르자 겸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재빨리 돌았다. 그의 신형이 겸도의 그림자에 가려 흐릿하게 사라질 때였다. 콰쾅! 쾅! "으악!" "악!" 겸도가 쇠도리깨처럼 돌아가며 부딪히는 모든 것을 산산이 박살냈다. 쾅! 우지끈! 우르르르... 삼본장선의 그 큰 돛을 떠받치는 기둥도 겸도에 부딪히는 순간,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서졌다. "크악!" "칵!" 겸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동강난 육신만이 꿈틀거리고 뱃전은 질퍽한 피로 끈끈했다. 하자드는 정신이 없었다. 그가 겸도를 피해 선실로 달려갔다. 선실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는 먼저 몸을 피하기 위한 수하들의 다툼으로 아수라장이었다. 하자드도 그 싸움에 끼여들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뱃전을 바라보았다. 콰쾅! 쾅! 그의 삼본장선은 이미 광풍(狂風)에 시달린 난파선이었다. 돛대와 측판은 박살나 없고 갑판도 숭숭한 구멍 투성이었다. 망연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는 적해도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장도를 휘두르며 겸도의 망을 뚫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한 발자국도 산공에게 근접을 못했다. 오히려 겸도의 예기(銳氣)를 피해 다니기도 바쁜 처지였다. 풍덩! 다급해진 그의 수하들 중 몇이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바다도 그들이 안심하고 피할 곳은 못되었다. 갑판에서 흐른 피로 상어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고 있었다. "아악!" 들리는 것은 겸도의 파공음과 수하들의 비명 뿐! '이런 일이 있다니... ' 하자드는 도대체 지금 일어나는 일을 실감할 수 없었다. 악명 높은 열대(熱帶)의 해적들과 싸울 때에도 이런 패배는 겪지 않았었다. 어렵게 구한 총포 덕분이었다. '꿈인가?' 꿈은 아니었다. 수하들의 목에서 뿜어 나오는 피가 갑판을 적시고 그의 발까지 끈끈하게 흘렀다. 웅! 겸도의 파공음에 하자드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크악!" 지척에게 서너 개의 머리통이 굴렀다. 그가 수하들을 떠밀며 선실로 막 들어서려 할 때였다. 쿵! 선실로 몸을 피한 자들이 선실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하자드가 선실문을 걷어차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문 열어라! 이놈들아!" 그러나 선실에 들어간 자들은 산공의 흉악한 출수에 놀랄 만큼 놀라 문을 꽉 닫고 열어 주지 않았다. 선실 밖에 남은 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윙! 윙! "으으으... " 겸도가 돌아가는 소리에 하자드의 수하들이 신음을 흘렸다. "크악!" "카악!" 서너 차례 비명이 더 울리자 하자드의 수하들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겸도를 들고 미친 듯이 날뛰는 자를 상대하느니 피에 굶주린 상어를 상대하는 편이 살아날 희망이 조금이라도 더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철컹! 산공이 손목을 꼬며 쇠사슬을 끌었다. 겸도가 뱃전에 '탁' 꽂히며 핏물을 튀겼다. 뱃전은 파편들뿐이었다. 뱃전에서 움직이는 자는 산공을 포함, 이제 단 세 명... 산공이 고개를 들었다. 하자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무심하게 빛났다. 하자드가 선실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내... 내가 아니오. 저기... 저자가... " 그가 벌벌 떨리는 손길로 적해도주를 가리켰다. 철컹! 철컹! 우측의 겸도가 산공의 손길에 갑판을 차고 일어났다. "제... 제발... 원하는 것은 모두... 모두 드리겠소. 이 배에 있는 모든 것을... " 하자드가 서툰 한어(漢語)로 다급히 소리쳤다. 산공이 구부정한 허리를 더욱 깊게 숙였다. 핑! 겸도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하자드의 목에 착 달라붙었다. "제발... 악!" 하자드는 목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겸도가 그의 살을 파고들며 뼈를 자르고 목줄을 끊어 놓고 있었다. 떼구르르르... 하자드의 목이 갑판을 굴렀다. 하자드는 어이가 없었다. 목이 없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아야 하는 심경은 당해 보지 않은 자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틀어졌다. 두터운 눈까풀이 스르르 내려오며 그의 눈을 가렸다. 암천(暗天).... 땡그랑! 산공은 겸도를 내던지고 낫처럼 구부린 칼을 잡았다. 그의 등뒤에는 오른손에는 장도를 왼손에는 두 자 길이의 칼을 든 왜인이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그린 채 서 있었다. 적해도주... 타타타탁! 적해도주가 그의 날렵한 가죽신만큼 경쾌하게 산공의 주위를 뛰었다. "핫!" 그가 허공을 날아 일도양단의 기세로 산공을 갈랐다. 그 전에 두 자 길이의 소도(小刀)는 이미 그의 왼손을 떠나 산공의 심장을 찔러 가고 있었다. 산공이 오른발을 반보 정도 빼며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그가 칼등으로 그의 심장을 향해 달라붙는 소도의 칼잡이를 후려쳤다. 깡! 소도가 낫처럼 휜 그의 칼등을 따라 빙글 꼬리를 틀었다. 그가 소도의 칼잡이를 퉁기자 소도는 쏜살 같이 적해도주의 가슴으로 되돌아갔다. 허공에서 회심의 절초를 날리던 적해도주의 신형이 멈칫했다. 그가 황급히 신형을 비틀었다. 챙! 그의 장도에 소도가 동강나 떨어졌다. 순간, 산공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치달았다. 느닷없이 치솟은 붉은 손 그림자. 우드득! 적해도주는 가슴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산공의 손이 그의 갈비뼈 사이에 요지부동으로 박혀 있었다. "으아!" 적해도주가 분노에 찬 고함을 터뜨렸다. 산공, 한낱 바다의 풍문으로만 떠돌던 자. 그 이름 없는 자에게 자신의 명이 끝난다고 생각되자 적해도주는 이를 갈았다. 산공이 적해도주의 가슴에서 손은 뺐다. 퓨퓨퓨! 적해도주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수막(水幕)을 이루며 솟구쳤다. "이... 이... " 적해도주가 장도를 들고 비틀거렸다. 장도를 들고 산공을 향해 서너 걸음 걸어가던 그가 순식간에 푹 쓰러졌다. * * * "크악!" 바다는 피로 물들고 상어 떼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콰직! 산공의 발길질에 선실문이 걸레 짝처럼 부서졌다. 후다닥! 선실에 숨어 있던 하자드의 수하들은 감히 싸울 생각도 못했다. 그들은 산공이 나타나자 뒷문을 통해 내빼기에 바빴다. 우지직! 콰쾅! 산공이 회랑(回廊)처럼 긴 선실을 걸어가며 선실의 방문을 하나 하나 박살냈다. 선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무감(無感)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서너 명의 여자들 뿐... 알몸으로 나뒹굴고 있는 여자들은 뱃길의 객고(客苦)를 풀기 위한 여자들이었다. 긴 여정에 아이를 갖지 않는다면 노예로 팔려 갈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물고기 밥으로 던져져야 하는 것이 그녀들의 운명이었다. 산공은 선실을 지나 선저(船底)로 향했다. 선저는 노예들을 싣고 나르기 위해 뇌옥(牢獄)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깜깜한 어둠... 단지 한 곳만이 횃불로 이글거렸다. 산고는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쇠사슬을 잡고 씨름을 벌이는 중이었다. 산공이 나타나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산공이 그녀가 갇힌 뇌옥을 향해 걸어갔다. 우두두둑! 그의 억센 손아귀에 자물쇠가 우겨져 떨어졌다. 그가 산고의 몸에 칭칭 감긴 쇠사슬을 풀었다. 팟! 산고가 아직도 옆구리에 달랑거리는 겸도를 뺐다. 선홍색 피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겸도를 들고 후다닥 뱃전으로 뛰어나갔다. 행여 살아남은 적의 목을 몇 개라도 잘라야 분이 풀릴 것 같은 그녀였다. 산공이 그 뒤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그때였다. "서라!" 걸걸한 목소리,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산공을 불렀다. 선저에 갇혀 있는 자는 산고만이 아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봉두난발(蓬頭亂髮)의 사내, 나이는 사 십 정도. 그의 몸도 거미줄 같은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었다 "크흐흐... 장강이 좁다고 날뛰던 내가 이제는 노예로 팔려 가는 신세까지 되었다니... 나를 풀어라!" 중년인이 자신의 처지도 있고 냉막하게 소리쳤다. 장강(長江)... 산공이 고개를 들었다. 중년인을 바라보던 산공의 눈이 기이한 빛을 뿌렸다. 산공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중년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칼을 번쩍였다. 철컹! 중년인을 묶은 쇠사슬이 삽시간에 떨어져 내렸다. "흐흐흐... 색목인(色目人)들의 구경거리로 사자(獅子)와 싸우며 한평생을 마치는 줄 알았다. 혀를 깨물고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군." 쇠사슬에 풀려 난 중년인이 몸을 으쓱거렸다. "윽!" 그가 비명을 질렀다. 중년인의 전신은 심한 상처로 뼈가 뒤틀려 있는 상태였다. 그가 산공을 오만하게 바라보며 어깨를 폈다. "이렇게 두터운 쇠사슬을 단숨에 끊다니... 제법 실력이 있는 자로구나. 명호(名號)를 밝혀라. 그러면 훗일 충분한 대가를 치러 줄 것이다." 다짜고짜 반말을 지껄이는 그는 산공이 그를 구해 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탁! 탁! 산공이 칼을 뇌옥에 부딪히며 무심한 눈빛을 빛냈다. 그가 뱃전을 향해 걸어갔다. "흐흠! 대가 같은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빚을 지고 사는 일은 내가 참지 못할 일! 군산(君山)의 장강 총채(總寨)에서 나의 이름을 물어라! 엽광(葉廣)! 단 당분간은 장강에서 나를 찾기가 수월치 않을 것이다. 그가 선저가 윙윙거릴 정도로 고함을 쳤다. " .... " 산공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선실을 지나며 비로소 그가 입을 열었다. "장강수로연맹(長江水路聯盟)... 그 이름을 이곳에서 들을지 몰랐군."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행로난... " 그가 입에 박힌 말을 되뇌었다. 순간, 엽광이라는 자의 안색이 변했다. - 인생길 어려워라. 엽광의 머리 속은 습관처럼 그 말을 내뱉던 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눈빛을 빛내며 산공을 유심히 살폈다. 장대한 기골!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노인의 기골은 아니었다. "누구냐?" 엽광이 성급히 물었다. " .... " 산공은 발걸음만 옮겼다. 엽광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휙! 그가 금나수(擒拿手)로 돌연 산공의 등을 찍어 갔다. 산공의 손은 그보다 빨랐다. 타타탓! 허공에서 산공과 엽광의 손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엽광의 맥박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자신의 상처도 있고 있었다. 타타타타탓! 산공과 엽광이 장권(掌拳)으로 산타(散打)를 벌이며 수십 초를 겨루었다. 엽광이 노리는 곳은 오로지 산공의 등과 얼굴이었다. 산공은 엽광의 장영(掌影)을 막아내기만 했다. 파파팟! 엽광의 초식이 갈수록 맹위를 떨었다. 그러나 그는 산공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엽광이 신형을 우뚝 세웠다. 엽광이 눈을 부릅떴다. 그를 상대로 이토록 여유자적한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자는 강호(江湖)에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자들의 대부분은 그가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엽광이 산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머리 속은 웅웅거리고 몸은 나락으로 굴렀다. 엽광이 가슴을 쥐어짰다. "보여 주시오!" 그의 눈은 핏발로 곤두서 있었다. " .... " 산공이 눈길을 돌렸다. "보여 주시오! " 엽광이 재차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털썩! 그가 허물어지듯 뱃전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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