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남명분회의 십장(什長)이었다. "분회주{分會主)는 어디 갔느냐?" 그가 정문을 지키던 무사에게 물었다. "순무(巡撫)께서 오셨습니다. 내원에서 순무를 배알하고 있습니다." "순무께서 오셨다고? 근자에 발길이 잦구나. 일이 터지기는 터질 모양이다." 십장이 중얼거렸다. 순무는 분회 내부의 업무를 관장하는 자로 회주가 파견한다. 남뇌로는 두 명의 순무가 있다. 상인들이 취급하는 산물(産物)이 해안(海岸)과 내륙(內陸)으로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남창분회는 좌순무(左巡撫)의 관할이다. "순무께서 오셨다니... 분회주는 나중에 뵙겠다. 잠시 잠을 청할 작정이니 분회주께서 찾으시면 불러라." 십장이라는 자가 어슬렁거리며 회당(會堂)으로 걸어갔다. "헛!" 어스름한 횃불 사이를 걸어가던 그가 돌연 신음을 삼켰다. 화톳불을 사이에 두고 검은 베옷을 입은 자들이 십 여명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술잔을 돌리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씹고 있었다. 화톳불에 구수한 냄새를 내며 타고 있는 것은 뱀이었다. 몇 마리의 뱀은 아직 살아 불 속에서 꿈틀댔다. 검은 베옷, 짧은 칼,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 그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은 독염(毒鹽)! '염노(鹽奴).... ' 십장은 목을 움츠렸다. 만로방이 표행만으로 오늘 같은 부를 축적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도 강호인들도 믿지 않았다. 염노! 양어깨에 각기 한 자루씩의 소금을 얹고 백 리 밤길을 뛰어간다는 자들... 그들은 만로방과도 거래했다. 소금은 나라에서 거래를 금하는 물건이다. 잡히면 중죄(重罪)에 처해졌다. 하지만 소금은 형벌의 두려움을 무색하게 할만큼 이득이 높았다. 방주(幇主)가 굴러다니는 은자를 놓칠 리 없다. 실상 만로방의 분회는 염노들이 날라주는 소금을 처분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염노와의 거래가 드러나면 대란(大亂)이 일어나기 때문에 각 분회에서는 염노와의 접촉에 철저한 신중을 기했다. 그런데 오늘은 염노들이 당당히 분회에 나타나 술까지 들이키고 있었으니 십장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십장이 염노들의 눈길을 피해 게걸음을 걸었다. 밀염상(密鹽商) 끼리의 세력(勢力) 쟁탈전(爭奪戰)은 잔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 잔혹한 자들과 부딪혀 봐야 득 볼 것이 없었다. 그가 몇 발자국 게걸음을 걸을 때였다. "헉!" 십장은 자신의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염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기 때문이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난처해했다. "나는 이곳 남창분회의... " 자신의 신분을 밝히던 십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염노들의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염노들의 시선은 그를 지나 언덕을 향하고 있었다. 십장이 고개를 돌렸다. 따각! 따각! 세 필의 말이 느긋하게 남창분회를 향하고 있었다. 여자는 말을 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두 명의 사내는 승마술(乘馬術)을 익히지 못했는지 걸어오고 있었다. 말에 실린 짐 때문에 말을 타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필의 말에는 칼, 비단, 보석함, 육포, 술 등 온갖 것들이 실려 있었다. "저놈들은 누구... " 십장이 그들을 바라보며 이마를 좁혔다. 순간, 말을 타고 오던 여인이 분회를 향해 비조(飛鳥)처럼 신형을 날렸다. 중년인도 그녀를 따라 질풍처럼 치달았다. "그래서 염노들을 데리고 오셨군요." 훤한 이마, 게슴츠레한 눈, 여자께나 밝힐 것으로 보이는 중년인은 남창의 분회주 주정인(朱正仁)이었다. 그의 앞에는 뱃살이 축 늘어진 초로인이 앉아 있었다. 좌순무 오온(吳穩)! 그가 부챗살을 펄럭였다. 예사 더위가 아니었다. "그렇다. 호반영채는 쓰러지고 십팔로(十八路) 물길의 채주들은 총채주(總寨主) 자리를 다투느라 정신이 없다. 원강(沅江)과 무하(撫河)마저 우리와 공공연히 연통(聯通)을 하는 마당이니...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느냐? 총채의 그 계집이 어떻게 날뛸지는 아무도 모르지. 염노 뿐만 아니라 지금은 힘이 될 만한 자들은 모두 모아 우군(友軍)으로 써야 한다. 놈들의 숨통을 끊을 날이 곧 다가오고 있어." 좌순무 오온이 가래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도대체 호반영채를 쓰러뜨린 놈들이 누구일까요? 정말 우리 만로방은 아니었습니까?" 주정인이 의혹의 눈빛으로 물었다.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우리 만로방은 아니야. 방주께서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호반영채를 쳤는지는 모르지." "다른 세력이라니요?"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오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정인이 찔끔 놀라 자라목을 했다. "어쨌든 호반영채는 쓰러졌다. 호반영채가 쓰러졌다는 것은 수로연맹 놈들이 자신의 힘을 삼 할 이상 잃었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 있다. 보이지 않느냐? 수로연맹의 분열... 십팔 수채를 주도하는 총채의 권위(權威) 태반은 사실 호반영채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수채의 채주들이 이제껏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 이유는 호반영채의 눈길이 두려워서였지." "단심호의 장강 총채(長江總寨)에 대한 붉은 마음이 어디 보통이었습니까? 그런데 방주께서는 일전의 날을 언제쯤 잡고 계시던가요?" 주정인이 재빠르게 물었다. "방주와 총사(總師)께서 판단하실 일이야." 좌순무 오온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어쨌든 방비를 단단히 하라. 당분간 분회의 일도 줄이고..." "염노들과의 거래도 줄여야 합니까?" "회주께서는 은자의 양은 계속 늘기를 원하신다." "원강, 무하처럼 다른 곳도 은자로 밀어붙일 모양이군요." "칼을 들어도 이긴다. 우리는 이 년 전에 비해 더 강해졌고 놈들은... " "크악!" 날카로운 비명이 오온의 말을 잘랐다. 쾅! 오온과 주정인이 동시에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쨍쨍쨍! 칼 부딪히는 소리는 요란해도 침입자는 몇 되지 않았다. 종횡으로 날뛰며 수하들을 도륙하는 자! "엽광.... 저놈이 어떻게... " 오온이 신음을 흘렸다. "카악!" "악!" 그의 눈이 비명이 들리는 또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여자였다. 경쾌한 발놀림, 여인은 좌충우돌로 부딪히며 수하들의 목을 베고 있었다. 그가 주정인에게 손짓을 했다. 주정인이 두 명의 십장을 거느리고 여인의 목을 베러 달려갔다. 염노들이 오온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염노들의 오른손에는 한자 반 길이의 칼이 들려 있었고 왼손에는 독염이 든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오온이 허리에 감긴 비조(飛 )를 풀었다. 찰칵! 그가 비조에 달린 쇠발톱의 날을 세우며 엽광에게 다가갔다. 염노들이 날개 모양으로 그의 좌우를 포진했다. '염노들을 데려 다니기 잘했군.' 엽광이 어떤 자인가? 삼명에서 엽광을 포획할 당시 오온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우순무(右巡撫)를 통해 그는 그때의 일을 들을 수 있었다. 쇠그물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처지였는데도 엽광은 그를 결박하려던 십 여명의 수하들을 죽였다고 한다. 결국 삼명분회는 엽광을 제압하는 것을 포기했고 부회주(副會主)가 와서야 엽광을 포획할 수 있었다. 엽광은 그런 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온은 갑자기 두려움이 들었다. 그가 흘깃 염노들을 바라보았다. 염노들의 표정은 무감(無感)했다. '그렇지! 놈들은 원래 핏속을 뒹굴었으니... 그러고 보니 이 년만의 싸움이군.' 오온이 자신의 나약함을 변명했다. 그가 비조를 출렁이자 수하들이 우르르 길을 열었다. 천천히 비조를 돌리던 오온이 일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먼발치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적수공권의 사내는 남창분회에서 이는 피의 바람에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 '천지를 모르는 놈이군.' 오온이 엽광에 시선을 꽂으며 비조에 신경을 모았다. "핫!" 비조가 매의 발톱으로 엽광의 심장을 찍어 갔다. 챙! 비조가 엽광의 칼에 부딪혀 허공을 날았다. 엽광은 수십 번의 싸움에 단련되고 단련된 자다. 그의 관심은 오온을 둘러싼 자들에게 가 있었다. 검은 베옷, 짧은 칼... '밀염상들... ' 엽광이 천천히 신형을 움직였다. 바람을 등 지기 위해서다. 각종 독물을 섞어 볶은 소금, 독염은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도려내야 하는 무서운 암기였다. 염노들도 엽광을 따라 움직였다. "핫!" 어느 순간, 엽광이 돌연 신형을 솟구치며 좌측 끝에 선 염노를 공격했다. 팟! 작자가 짧은 칼을 휘두르며 염낭(鹽囊)을 뿌렸다. 그와 동시에 비조와 몇 개의 염낭이 그의 등뒤를 덮쳤다. 뿌연 가루가 날리자 엽광은 다급히 신형을 뽑았다. 오온과 염노들은 독염의 독기(毒氣)를 막는 유약(油藥)을 이미 전신에 발라 둔 터라 독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엽광이 이마를 찌푸렸다. 독물을 상대해야 하는 싸움은 짜증나는 싸움이다. 하지만 오온에게는 즐거운 싸움이었다. 뒷걸음 치는 엽광! 오온이 입을 꽉 다문 채 미소를 지었다. 엽광의 목을 베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엽광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건지고 남창분회를 지킬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대전과(大戰果)를 거두는 셈이었다. 더해서 계집의 목까지 얻을 수 있으니... 엽광을 따라온 계집은 주정인과 수하들의 도막(刀幕)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었다. 휘휙! 휙! 오온의 비조가 신바람을 일으키며 날았다. 염랑과 비조를 피해 이리저리 뛰던 엽광이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분분히 피해 다니는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 따위 놈들에게! 흡!" 엽광이 길게 숨을 들이키며 호흡을 꽉 막았다. 그가 맹호(猛虎)로 염노들을 재차 공격하려 할 때였다. 팟! 파팟! 기왓장이 빙글 돌며 허공을 날았다. 퍼퍽! 퍽! 기왓장이 염노들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쪼갰다. "어느 놈이?" 오온이 기왓장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남창분회의 정문 담에는 한 청년이 기왓장을 빼 들고 있었다. 자주 본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오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조를 든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 " 수하들에게 달아나라는 명을 내려야 하는데 목구멍이 열리지 않았다. 퍽! 퍽! 그 사이 다시 두 명의 염노가 뇌수를 뿌렸다. 염노들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엽광의 칼이 그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크악!" "악!" 염노들의 목이 남창분회를 떼굴떼굴 굴렀다. '달아나야 하는데... ' 오온이 발을 굴렀다. 그러나 그의 발은 오금이 저려 꼼짝을 않았다. 마타룡! 귀가 따갑게 듣던 자다. 비로소 그의 발이 움직였다. 그가 휙 등을 돌렸다. 순간, 우두둑! 엽광의 칼이 오온의 두툼한 비곗살을 뚫고 가슴뼈를 부수고 있었다. " .... " 오온의 목이 푹 꺾였다. "예전 같으면 이름만 듣고도 달아날 놈들이... 삼명에서의 일 이후, 이제 별놈들이 다 달려드는군." 엽광이 위무일을 바라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산고를 응원하기 위해 칼을 치켜들었다. 하수(下手)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눈치다. 특히 주정인은 눈치에 빠른 자였다. 그는 산고와 싸우면서도 주위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후다닥! 주정인이 두 말 않고 줄행랑을 쳤다. 남창분회의 수하들도 그제야 사태를 눈치챘다. 남창분회의 수하들이 돌팔매질에 놀란 새떼처럼 사방으로 뛰었다. 엽광과 산고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몇 놈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툭! 엽광이 주정인의 목을 던졌다. 소영주가 한 팔의 힘만 보탰더라도 남창분회의 수족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영안, 삼명분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마 소영주는 몇 놈은 살려주리라고 계획했을 것이다. 마타룡이 몰고 오는 폭풍을 알리기 위해... "이제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동정호!" 위무일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혹시 모르고 계실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총채주께서도 돌아가셨습니다." " .... " 위무일이 얼굴을 휙 돌렸다. 엽광을 쏘아보는 그의 안색이 냉랭하게 굳었다. "단도의 대접전에서 입은 상처로... 사오 개월 여를 고생하시다가 결국... " 엽광이 띄엄거리며 말했다. " ...삼 년 사이에... 많은 사람이 죽었군." 위무일이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행로난... " 그가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 위무일은 이제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소문이 그를 앞서 지나갔다. 마타룡의 출현! 영남에서 불기 시작한 바람은 장강에 이르러 거센 풍랑(風浪)으로 출렁거렸다. * * * 장막처럼 길게 늘어진 깃발! 깃발에는 불구덩이 속을 치솟는 화룡(火龍)이 새겨져 있었다. 화룡을 영기(令旗)로 삼는 곳. 화룡대(火龍隊)! 화룡대는 장강 총채의 이 전(二殿), 칠 당(七堂), 일 대(一隊)의 하나로 총채주를 보위(保衛)하는 호위대(護衛隊)다. 화룡대의 깃발 아래는 얇은 입술에 백옥(白玉) 같은 피부, 여인들이 한 눈에 반할 청년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화룡대의 깃발 아래 팔짱을 끼고 설 수 있는 자는 총채 내에 몇 없다. 총채주나 전주들, 그렇지 않으면 화룡대주(火龍隊主) 본인(本人). 여인들이 한 눈에 반할 청년은 화룡대주가 맞았다. 담익(譚益)! 약관에 각 당의 당주(堂主)들 보다 우위의 서열인 화룡대의 대주를 당당히 꿰어찬 인물. 담익의 뒤에는 붉은 허리띠에 '火(화)' 자를 새긴 옥패(玉牌)를 단 각진 턱의 사내가 서 있었다. "위(魏) 공자(公子)께서 오신 다니 이제 제 밥그릇에 눈이 먼 채주들의 행각(行脚)도 끝입니다! 만로방 놈들도!" 그가 안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는 화룡대의 부대주(副隊主) 정필(鄭弼)이라는 자였다. "무엇 때문에 오는가? 반기는 자도 없을 텐데. 후후후... " 담익이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대주께서는 위 공자와 특별히 각별하지 않으셨습니까? 마중을 나가셔야지요." "가까웠지. 예전에는.... " 담익이 고소를 흘렸다. 그가 팔짱을 풀고 허리춤의 호로병을 들었다. 꿀꺽! 꿀꺽! 담익이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한 병의 호로병을 비웠다. 그가 창가에 앉아 멍하니 호반(湖畔)을 바라보았다. 찬란한 붉은 빛. 군산(君山)의 일몰(日沒)! 담익이 창가를 훌쩍 뛰어 내렸다. "어디로 가십니까?" 정필이 안색을 찌푸리며 물었다. "알 것 없소!" 담익이 냉랭하게 말했다. "안됩니다. 지금 태부인(太婦人)께서 찾으십니다." "무슨 일로?" "제가 어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늘이 소주인(少主人)의 첫 생신이라고.... 진강(鎭江), 가릉강(嘉陵江), 한수(漢水)의 소공자(少公子)들께서 온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닙니까." "첫 생일? 벌써 그렇게 되었나?" 담익의 눈빛이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어쨌든 관심 없소. 제 아이를 보기 위해 모인 자들... 자신이 접견하면 될 일! 나까지 왜?" 그가 화룡각을 휙 걸어나갔다. "태부인께서는 해륭도에서 온 자들을 접견하고 계십니다. 먼길을 온 소공자들을 주인 없이 앉혀 둘 작정입니까? 대주께서는 소주인의 외숙(外叔)이니 당연히..." "뭐라고 했소? 누가 왔다고?" 담익이 갑자기 정필의 말을 잘랐다. "해륭도에서 온... 자들... " 정필이 흠칫 놀라 띄엄거리며 말했다. 그는 담익의 잿빛 눈에 번들거리는 한 가닥 광기(狂氣)를 보고 있었다. "그 놈들이 왜?" 해륭도가 강호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고작 오륙 년! 그 이전에는 강호와 일체 접촉이 없었다. 근자에 가끔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하나 강호인들과의 접촉을 삼가기는 마찬가지였다. "해손왕이 보낸 사절입니다. 주먹만한 진주(珍珠)를 네 개나 보냈다고 하는군요. 소주인의 첫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정필이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담익의 전신에는 터질듯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 .... " 그의 가는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음울(陰鬱)을 떨구던 잿빛 눈동자는 한광을 뿌렸다. 쾅! 담익이 담을 세차게 후려쳤다. 화룡각의 담이 벼락을 맞은 듯 우르르 무너졌다. "개자식!" 담익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영빈각(迎賓閣)을 향해 질풍처럼 치달았다. "휴 - " 담익이 사라진 후, 정필은 긴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알 수 없다. 대주가 변해 가는 이유를... 예전에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 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화룡대주 담익! 스물 셋의 나이에 화룡대주의 자리에 올랐어도 장강의 동도들은 그의 영광(榮光)이 총채주를 매부(妹夫)로 둔 덕분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담익은 장강 총채주였던 유룡(柔龍) 백승명(白昇明), 호반영채의 소영주인 마타룡 위무일, 금사강의 소채주(少寨主)인 곤룡(困龍) 천화인(千和仁)과 함께 장강사룡(長江四龍) 중의 한 명인 옥룡(玉龍)으로 이미 명성을 날렸었다. 장강사룡은 장강의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니 원래 그의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던 터였다. 담익의 출신은 별 대단치 않다. 그는 상강(湘江) 전임 채주의 서출(庶出)로 지금 상강의 채주인 담웅(譚雄)은 그의 이복형이다. 어머니까지 피를 같이 나눈 자는 총채의 안주인이 된 그의 누이 담청(譚淸)뿐. 하지만 사부는 달랐다. 추운객(追雲客)! 장강수로연맹의 초대(初代) 총채주였던 수룡왕(水龍王), 호반영주인 단심호 위호연과 함께 장강삼협(長江三俠)으로 불려지던 인물. 추운객은 원래 장강 수채의 사람이 아니다. 수룡왕의 절친한 벗이고 단심호와 의형제(義兄弟)를 맺은 사이라 수로연맹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맺었을 뿐! 하지만 그가 장강에 끼친 업적을 무시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수룡왕이 죽은 후 장강의 동도들은 그를 최고의 원로(元老)로 대우했다. 사부 추운객의 위명, 총채주인 매부의 후광(後光), 본신의 실력까지 더해 담익은 위무일이 사라진 후 장강 최고의 후기지수로 떠올랐었다. 그러나 담익은 근자에 술독만 끼고 살았다. 그를 아끼던 매부, 백승명의 죽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없는 추락(墜落)이었다. 하얀 백의(白衣)에 희미하게 새겨진 꽃 그림, 매화(梅花)! 눈을 부라리고 살펴보지 않으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문양이었다. 그러나 매화 문양은 은연중에 백의의 초라함을 청초한 아름다움으로 꾸며 주고 있었다. 옷의 주인인 여인이 그랬다. 균형 잡힌 얼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눈에 툭 튀는 화려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인은 남자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강 총채의 안주인 담청! 총채 동도들이 태부인이라 부르는 여자로 전임 총채주의 미망인(未亡人)이 그녀였다. 그녀의 눈은 주먹만한 흑진주(黑珍珠)에 담겨 있었다. 은쟁반에 담긴 네 개의 흑진주에서 빛나는 요요(妖妖)로운 묵빛은 군자(君子)의 물욕(物慾)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담청이 진주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흑진주를 은쟁반에 구르며 물었다. "해륭도에서 무슨 연유로 이렇게 귀한 선물을?" "저희 도주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장강 총채 소주인의 첫 생신을 축하하는 뜻에서... " 해륭도의 사십칠(四十七) 타수(舵手)라고 자신을 밝힌 자가 말했다. "의외군요. 도주께서는 원래 중토를 멀리 하는 것으로 아는데."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단지 도주께서는 수로연맹과 보다 가까워지기를 바랄 뿐이라 했습니다. 사해(四海)는 동도(同道) 아닙니까?" "사해가 동도라는 말은 이전에도 할 수 있었던 말이에요." 담청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은 채 한동안 흑진주를 은쟁반에 굴렸다. "애써 여기까지 들고 왔는데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 해륭도의 사십칠 타수라는 자가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담청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어쨌든 주신 선물이니... 도주께 고맙게 받았다고 전해 주세요." "도주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십칠 타수라는 자가 희색을 띄며 포권을 했다. "영빈각의 한 곳에 노독(路毒)을 풀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쉬었다가 가십시오." 담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으악!" "커악!" 날카로운 비명이 영빈각을 울렸다. 담청이 놀라 황급히 문고리를 잡았다. 쾅! 문은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거칠게 열렸다. 얇은 입술, 백옥(白玉) 같은 피부의 청년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문밖에 서 있었다. " .... " 담청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비명을 지른 자들은 해륭도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벌써 어육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오라버니!" 담청이 청년을 향해 소리쳤다. 청년은 담익이었다. 담익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가 성큼 향화각으로 들어섰다. 담익이 대뜸 은쟁반에 담긴 흑진주를 잡았다. "죽어라!" 휙! 그가 흑진주를 해룡도에서 온 자에게 내던졌다. 우당탕! 해륭도에서 온 자가 날아오는 흑진주를 피하기 위해 탁자 사이로 뛰어들었다. 쾅! 세 알의 흑진주가 탁자를 산산이 박살내고 나머지 한 알의 흑진주는 해륭도에서 온 자의 정강이에 내리꽂혔다. "악!" 해륭도에서 온 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다리를 잡고 굴렀다. "무슨 짓이에요?" 담청이 아연실색 담익의 옷깃을 잡았다. 담익이 웃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4편 →
5편부터
5편
[무협] 장풍파랑 - 5편 (5/61)
"누이, 앞으로 해륭도에서 온 놈들에게는 접대를 이런 식으로 하라." 그가 해륭도에서 온 자를 향해 걸어갔다. "으으으... " 해륭도에서 온 자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뒷걸음질을 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