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 위무일을 외계(外界)에서 떨어진 그 무엇으로 바라보던 자신의 생각에 하빈은 실소를 흘렸다. 그 순간! 집사당주의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광란으로 이글거리던 그 눈빛. 꿀꺽! 하빈이 침을 삼켰다. 꽉 다문 입술, 무심한 표정! 하빈은 순간적으로 마타룡의 무심한 얼굴 뒤에 가려져 있는 분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분노는 장강에 얼마만큼의 피의 파랑을 일으킬 것인가? 하빈이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어쩌면 그는 만로방과의 화해조차 문제 삼을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단심호를 죽인 자와 손잡은 자들... ' 그의 안색이 더욱 해쓱해졌다. 그가 등골에 식은땀을 흘렀다. 만로방과의 화해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물론 그가 아니다. 총채주의 부상, 동도들의 죽음... 그런 분위기에 백 번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화해는 아랫사람이 꺼낼 말이 아니었다. 만로방에서 화해를 요구했을 때, 수로연맹은 한동안 침묵으로 답했다. 만로방의 제의가 있은 보름 여가 지난 후, 먼저 태부인이 화해를 받아들일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다. 논쟁(論爭)이 벌어졌다. 만로방과의 화해를 전면 거부하고 단도 일전의 복수를 서두르자는 강경파(强硬派)! 오랜 싸움, 관부의 눈총, 화해는 어쩔 수 없는 대세(大勢)라고 주장한 온건파(穩健派)! 호반영채는 당연히 강경파를 주도했다. 호반영채를 제외하고 만로방에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수채는 만로방과의 싸움에서 피해가 적었던 금사강을 비롯한 장강 상류(上流)의 수채들이었다. 그리고 온건파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심했던 진강을 비롯한 중하류(中下流)의 수채들... 총채의 입장도 나누어졌다. 승룡전(乘龍殿)과 승룡전 소속의 외사당(外四堂)은 강경한 노선을 와룡전과 와룡전 소속의 내삼당(內三堂)은 화해를... 장강에 칼부림 대신 때아닌 설전(舌戰)이 벌어졌다. 부상으로 반 은거(隱居) 상태에 있던 총채주는 깊은 침묵만 지켰다. 논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열돼 나중에는 자칫 이 일로 수로연맹이 분열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다. 심각한 입장의 분열을 지켜보다 못한 태부인이 수로연맹의 전 채주들을 군산으로 모이게 했다. 그녀가 총채주를 대신해 총채주의 신물인 반령패를 들었다. 반령패는 집행(執行)을 강제할 수 있어도 의사(意思)를 강제할 수는 없다. 중요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각 수채다. 원래 총채는 다양한 수채의 이해를 조율하는 조정자(調停者)의 입장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생긴 귀결이었다. 하지만 열 여덟이나 되는 수채, 머릿수만큼 생각도 많은지라 의사가 분분할 수밖에 없고 그런 까닭에 강화된 것은 총채의 집행권(執行權) 뿐이었다. 그리고 수로연맹을 결성한 수룡왕의 전설적(傳說的) 위명(威名)에 더해 무력(武力)까지... 수룡왕 이후, 총채의 권위가 점차 약해지는 추세라고는 하나 반령패의 권위를 전면으로 무시할 수채는 아직 없었다. 태부인이 반령패를 내세우며 화해를 종용했다. 결과는 대화해의 결의! 화해가 결정되자 더 이상 왈가왈부 하는 자들이 없었다. 실상 총채의 강경파도 화해가 어쩔 수 없는 대세임을 알고 있던 터였다. 다만 죽은 동도들과 총채주께 죄송한 마음이라 싸움의 목소리를 높였을 뿐. 장강 상류의 수채들도 화해에 쉽게 손을 들었다. 그들은 중원의 이해와 한 발 떨어져 있는지라 만로방과의 일전을 목숨 걸고 주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호반영채만이 끝까지 만로방과의 일전을 고집했다. 그러나 호반영채의 전통은 총채의 뜻을 고수하는 것! 태부인이 반령패로 화해를 결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호반영채도 어쩔 수 없이 화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만로방과의 화해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단도의 대접전이 있은 지 이삼 개월 후의 일이었다. 집사당은 와룡전 소속 내삼당의 하나다. 따라서 하빈도 당연히 화해를 주창(主唱)했었다. 화해가 결의된 후, 만로방과의 교섭을 맞은 자도 그였다. 말하자면 그는 대화해의 일등(一等) 공신(功臣)! 하빈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깊어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일순간에 다시 변화를 보였다. 그가 장심뢰를 꽉 움켜쥐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야? 한낱 애송이의 눈치를 두려워해서... ' 하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위무일을 흘깃 바라보았다. 역시 마타룡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 어떤 생각의 흔적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의 행보(行步)가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겠지.' 하빈이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유선은 악양의 강변을 따라 절경들을 유람했다. 유선이 강변에 불쑥 튀어나온 절애를 지나 군산으로 본격적으로 뱃머리를 돌릴 때였다. 강바람에 취흥(醉興)을 즐기던 엽광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절애(絶崖)의 끝을 가리켰다. 송림(松林)으로 덮인 절애의 끝에는 불에 타서 앙상한 기둥들만 남은 장원(莊園)이 언뜻 보였다. "호반영채! 장강의 힘!" 엽광이 내뱉듯이 말했다. 하빈이 이마에 주름살을 그렸다. "엽 선주께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생각 하오만... 주인이 없어 중수(重修)는 생각도 못했소. 이제 주인이 나타났으니 태부인께 중수를 말해 보겠소." 그가 변명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소. 저곳은 당분간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위무일이 고개를 저었다. 지난 밤, 그는 엽광과 함께 호반영채의 폐허에서 꼬박 밤을 세웠었다. 무수히 피어오르던 귀화(鬼火)... 혈채를 잊지 못해 남은 혼불이라면 호반영채는 아직 그들의 쉼터로 남아 있어야 했다. 재건은 그 이후의 일! "흉수에 대한 단서라도 얻었습니까?" 하빈이 물었다. "흉수?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설마 흉수를 알지 못해 아직 만로방과 손을 잡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엽광이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는 역시 만로방과의 화해를 문제 삼고 있었다. 호반영채의 겁화가 들리자 마자 엽광은 당장 동정호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총채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총채가 만로방과의 일전을 요구하는 그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기 때문이다. 결국 엽광은 피눈물을 흘리며 총채에서 발을 돌렸다. 소영주를 찾는 길이 혈채를 청산하는 더 빠른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엽광이 호반영채의 흉수로 지목한 자들은 만로방이다. 하지만 총채의 생각은 달랐다. "만로방이 호반영채의 겁화와는 무관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지지 않았소." 하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만로방이 겁화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백 가지 증거를 보이시오. 내가 놈들을 믿는가?" 엽광이 코웃음을 쳤다. "만로방은 아니오. 화해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어차피 수로연맹과 만로방은 공존할 수 없는 적대적(敵對的) 관계! 정체를 숨기고 어쩌고 하는 구차한 방법을 찾을 이유가 없지. 그리고 호반영채를 쓰러뜨린 놈들이 만로방이 맞다면 놈들이 왜 아직 칼날을 숨기고 있겠소? 호반영채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수로연맹에 대한 재 진격(進擊)의 신호! 하지만 만로방 놈들은 대화해 이후, 한 번의 칼도 뽑지 않았소." 하빈이 말했다. "눈에 가시 같은 호반영채를 먼저 처리하고 적당한 때를 기다려 장강을 칠 생각이겠지." 엽광은 만로방에 대한 혐의를 풀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시다니... 생각이야 자유 아니오.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하빈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꿀꺽! 위무일이 마지막 남은 술을 비우고 술병을 산고에게 건넸다. 그가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로방은... 아니오." 엽광, 하빈, 묵룡당주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호반영채의 겁화 때 살아 남은 자는 아무도 없다고 들었소." 위무일이 동정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산 자가 있었다면 총채를 찾았겠지요." 성급히 대답하는 자는 오히려 하빈이었다. "엽 선주! 어머니께서는 보통 분이 아니었잖소?"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장강에 대부인의 지용(智勇)을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위무일의 느닷없는 물음에 엽광이 영문도 모른 체 말했다. "누선주(樓船主), 몽충선주(蒙衝船主), 유정선주, 그분들의 실력도 마찬가지지." 누선주, 몽충선주는 해골선주, 유정선주와 함께 호반영채의 사대선주들이다. "그분들을 상대로 생존자 하나 없이 쓸어버릴 정도의 실력이 만로방에 있는 것 같소? 내가 생각하기에는 없는 듯 한데. 주황이 직접 나섰다고 하더라도... " 위무일이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측판에 등을 기댔다. 엽광이 침을 삼켰다. 사대선주의 서열(序列)은 누선주, 몽충선주, 해골선주, 유정선주로 이어진다. 따라서 누선주와 몽충선주의 실력이 웬만한 수채의 채주들을 눈 아래로 바라보는 엽광의 실력 보다 뛰어났다는 이야기다. 엽광도 만로방과 한두 번 싸운 것이 아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가 자신의 머리를 쳤다. 경험이 증명하는 바는 역시 만로방은 생존자 하나 없이 호반영채를 쓸어버릴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대부인을 구하기 위해 누선주, 몽충선주, 유정선주는 사력(死力)을 다했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날뛰었다면 퇴로쯤은 충분히 확보할 그들이었다. 엽광의 이마에 그려진 주름살이 더욱 깊어졌다. '그럼 도대체 흉수는 누구란 말인가?' 그가 멍한 얼굴로 위무일을 바라보았다. 위무일은 측판에 몸을 기대고 생각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쉽게 찾지 못할 이유도 없다.' 비록 영주, 소영주가 없었으나 호반영채는 아무나 호락호락 불 지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강호에 만로방을 제외하고 호반영채를 상대할 세력이 몇이나 있을까? 엽광의 생각이 미궁(迷宮)을 헤매고 다녔다. 탁! 순간, 하빈이 기세 좋게 장심뢰로 손바닥을 쳤다. 그는 안도의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만로방에 대한 오해가 풀렸으니... " 불쑥 튀어나온 말! 말을 꺼내고 당황한 자는 하빈 자신이었다. 장강에 찾아 든 오랜만의 평화! 하빈은 그 평화가 지속되기를 절절히 원했기에 무심코 내던진 말이었다. "다행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이오?" 예측대로 엽광은 벼락같은 노화를 터뜨렸다. 하빈이 자신의 말을 수습하지 못해 허둥댔다. "기억하실 것이오. 단도에 뿌려졌던 영주와 동도들의 피를!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만로방은 자신들의 죄값에서 벗어날 수 없소!" 엽광이 고함을 질렀다. " .... " 하빈은 말문을 닫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처럼 후끈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엽광의 노화가 하빈을 서둘러 비켜 갔다. "만로방에서 제 삼의 암중인(暗中人)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닐까요?" 엽광의 관심은 온통 흉수의 정체였다. "생각해 봅시다." 너무도 간단한 위무일의 대답! 그가 집사당주 하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로연맹의 사정이 별반 좋지 못하다고 들었소." 위무일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입니다. 장강의 평화는 연맹 내부의 결속을 이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지요. 원강과 무하는 이미 공공연히 만로방과 거래를 하는 터고... " 하빈이 쓴맛을 다셨다. "총채가 각 수채의 일을 나 몰라라 하니 그럴 도리밖에..." 엽광이 조소를 흘렸다. "총채는 각 수채의 입장을 조율(調律)할 뿐 간섭할 수는 없소. 엽 선주도 그 사실은 잘 알지 않소?" 계속 시비조로 나오는 엽광에게 하빈이 얼굴을 찌푸렸다. "장강이 마르지 않는 한 만로방이 우리의 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오. 적과 내통하는 수채를 방관하다니... 총채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책무를 포기하고 있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모든 수채의 생각이 엽 선주와 같지는 않을 것이오. 이 년 전의 대화해 이후, 만로방은 공개적으로 한 번의 칼도 들지 않았소." 하빈이 목소리를 높였다. "완강과 무하가 놈들의 마수에 넘어갔다고 방금 이야기하지 않았소?" 엽광도 고함을 질렀다. 하빈이 한숨을 쉬었다. "그간 총채의 사정은 엽 선주도 잘 알 것이오. 소주인께서는 고작 첫 생일을 맞으셨소. 구심점(求心點)이 없고 단도의 접전에서 입은 피해도 복구되지 않은 상태요. 무엇보다 이제 단심호 어른의 호반영채도 없지 않소!" "내가 원하는 것은 한가지 대답이오. 장강수로연맹은 결코 만로방과 공존을 원치 않는다는 것! 화해는 없다!" 엽광이 흉흉하게 눈빛을 빛냈다. 하빈의 안색이 굳어졌다. "위 공자의 생각도 엽 선주와 같소?" 이왕 나온 이야기, 하빈이 내친김에 물었다. 그러나 위무일은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소주인... ' 참으로 이상한 어감(語感)이었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결국 만로방과 일전을 벌일 생각이군요." 하빈은 위무일의 묵언(默言)을 만로방과의 일전에 대한 시인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엽광이 소리쳤다. 하빈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빛났다. 만로방과의 싸움이 필연이라는 것은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총채는 지금 표류(漂流) 중! 그 같은 상태에서 마타룡이 만로방과의 분쟁(紛爭)을 일으킨다면 하빈은 총채의 안전을 자신할 수 없었다. 하빈에게 중요한 일은 수로연맹의 만로방에 대한 승리가 아니었다. 총채가 장강의 주인으로 계속 활보하게 하는 것! 그는 수로연맹의 수하가 아니라 총채의 수하였다. '피해 갈 일도 아니고 피할 수도 없다.' 하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단심호 어른께서는 수룡왕에 대한 은혜를 이미 충분히 갚았소. 선대(先代)의 은혜를 빌미로 이제 위 공자의 발길을 잡을 자는 아무도 없소. 위 공자는 자유요." 마타룡과 총채의 선을 긋는 일! 단심호 어른을 생각해서라도 되도록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마타룡이 당장 싸움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빈이 심중(心中)의 말까지 꺼낸 후, 장심뢰로 무겁게 손바닥을 쳤다. "소영주께서 만로방과 일전을 선언해도 네 일이니 모른 척 하겠다는 말이오?" 엽광이 하빈의 말뜻을 눈치채고 눈을 부라렸다. "권한(權限) 밖의 물음이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태부인과 전주(殿主)들께 직접 들으시오. 다만 나는 위 공자의 입장만 말했을 뿐이오!" 하빈이 짤라 말했다. 엽광의 인상이 사천왕(四天王) 보다 더 사납게 변했다. "하빈! 권한밖에 일이라면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리고 나는 무식해서 구별을 모른다.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적과 우리뿐!" 쿵! 그가 사정없이 현측판을 후려쳤다.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묵룡당주가 가슴을 내밀었다. 엽광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도 엽광 못지 않게 흉흉했다. 만로방과의 일전은 그도 원하는 바였다. 하지만 엽광의 협박을 받아 싸울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빈이 음침한 눈으로 엽광을 바라보았다. 그가 장심뢰로 손바닥을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근자에 좋은 얼굴로 사람을 대하기가 너무도 힘드오. 위 공자, 이해해 주시오. 오랜만의 만남인데 총채의 사정이 이 같으니... 만로방과의 일전은 뜻대로... 뜻대로 하시오." 그가 등을 돌렸다. 집사당주와 묵룡당주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실로 걸어갔다. "흥! 눈앞의 안락(安樂)에 취해 수로연맹이 기둥 째 썩어 가는 것도 모르는 놈들!" 엽광이 찢어 죽일 듯 하빈을 노려보았다. "소영주, 총채의 분위기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들에게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위무일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돌연 우수(右手)를 내밀며 수도(手刀)에 내력(內力)을 실었다. 그의 장심(掌心)이 붉게 달아올랐다. 파팟! 손바닥을 몇 번 뒤집었을 뿐인데도 세찬 경기가 엽광의 옷자락을 흔들리게 했다. 위무일이 다시 팔짱을 끼고 호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 ..... " 엽광은 말문을 잃고 있었다. 붉게 치솟은 손그림자! 적해도주의 가슴뼈를 박살내던 그 장영(掌影)이었다. "호... 홍운산수(紅雲散手)가 아닙니까?" 엽광이 다급히 물었다.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이오." 위무일은 시인도 부정도 않았다. 엽광의 몸이 초조함으로 달아올랐다. "홍운산수가 맞습니까?" 그가 재차 물었다. 삼십 여년 전, 요하(遙河)의 물결을 타고 한 사내가 아침 햇발 속에 나타났다. 조양인(朝陽人)! 천하의 내놓아라 하는 패주(覇主)들이 그의 무공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긴 세월도 필요치 않았다. 햇수로 삼 년! 조양인의 이름 앞에는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라는 칭호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중원을 평정한 그는 벽부(碧府)를 세운 후, 은거에 들어갔다. 강호에는 더 이상 상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거에 들어간 그는 오로지 무공의 정진에만 매달렸다. 제자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조양인의 무공은 그의 은거와 함께 강호에서는 이미 사라진 터였다. 홍운산수는 조양인의 무공 중 하나다. 이미 삼사 십년 전에 사라진 조양인의 무공이 위무일의 손에서 펼쳐졌으니 엽광이 얼마나 놀랐나 하는 것은 당사자만이 알 일이다. "소영주께서 어떻게 조양인의 무공을... " 흉수의 정체에 이어 엽광의 머리 속은 혼미(昏迷)에 혼미를 거듭했다. 위무일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엽 선주, 내가 총채를 찾은 이유는 복수를 부탁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혈채를 청산하는 일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오. 내가 총채를 찾은 이유는... " 위무일이 잠시 말문을 닫고 선로의 아슬한 끝에 신형을 세웠다. 그가 동정호를 오연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총채는 아버님, 어머님께서 목숨으로 충성을 바쳤던 곳. 내가 총채를 아예 모른 척 한다면 그분들께서 섭섭해하실 것이오. 하지만 총채를 찾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 ...총채 사람들과 다투지 마시오." 위무일이 담담하게 말했다. 쏴아! 강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흩날리고 지나치며 동정호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 * * 수룡채(水龍寨), 군룡전(群龍殿), 승룡전(乘龍殿), 와룡전(臥龍殿), 화룡대(火龍臺), 영빈각(迎賓閣)... 전각들이 용등(龍登)의 기세로 군산의 한 곳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장강 십팔로(十八路) 물길의 패주(覇主), 장강 총채! 번쩍이는 도검(刀劍), 형형한 신색의 무사들... 이전에 비해 세가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역시 장강 총채는 장강을 군림하는 수왕(水王)다웠다. 위무일은 장강 총채의 현판(懸板)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묘한 감회가 그의 가슴을 스쳐 갔다. "위 공자, 먼저 방명첩(芳名帖)에 이름을 올리시오." 총채의 현판 아래에는 두 명의 무사가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문사(文士) 차림의 사내가 지필묵(紙筆墨)이 준비된 궤안( 案)을 지키고 있었다. 하빈이 그곳을 가리켰다. 엽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빈은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방명첩! 장강 총채를 방문한 외인(外人)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곳. 위무일은 이제 외인이었다. 이왕 드러낸 본색(本色), 하빈은 위무일과 엽광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로서는 총채의 미래가 걸린 일이었다. 엽광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다투지 말라는 위무일의 명이 없었다면 벌써 하빈에게 칼을 들이밀었을 그였다. 그가 궤안으로 다가가 붓을 뺏듯이 들었다. 엽광이 먹에 붓을 푹 담갔다. 그러나 막상 방명첩을 눈 앞에 대하자 엽광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했다. "하빈, 이 찢어 죽일 놈!" 엽광이 붓을 하빈에게 던지며 칼을 빼 들었다. 그가 앞 뒤 가리지 않고 하빈에게 달려들었다. 하빈이 놀라 다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챙! 엽광의 칼을 가로막은 자는 묵룡당주였다. "비켜라!" 분노가 폭발한 엽광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가 난도(亂刀)로 묵룡당주를 쓸어 갔다. 묵룡당주도 방명첩에 위무일과 엽광의 이름을 올리라는 집사당주의 말은 내심 심했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러나 엽광이 미친 듯이 하빈을 주살하려 하자 그도 쾌초로 엽광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묵룡당주는 승룡전의 사대당주 중 최고의 실력자다. 엽광에 비해 한 수 아래였으나 쉽게 쓰러질 자는 아니었다. 챙! 챙! 챙! 장강 총채가 돌연한 칼 부딪히는 소리로 요란했다. 묵룡당주로 인해 하빈을 단칼에 베지 못한 엽광이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하빈! 개자식! 총채가 개판이라는 네놈의 말은 틀리지 않다! 감히 네놈이 소영주께 탈당(脫黨) 운운하고 방명첩을 내밀다니! 나는 네놈의 머리를 쪼개 감히 네놈이 소영주에게 그만한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를 묻겠다!" 파팟! 팟! 엽광의 출수가 갈수록 흉악해져 갔다. 칼 부딪히는 소리, 고함에 놀란 총채의 수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총채는 순식간에 도산검림(刀山劍林)으로 가득했다. 총채의 수하들이 묵룡당주를 공격한 자를 향해 포위망을 펼쳤다. 투삭(投削)으로 묵룡당주를 응원하려던 총채의 수하들이 하빈에게 다급히 의문의 눈길을 던졌다. 묵룡당주를 상대하는 자는 그들도 잘 아는 자였다. 해골선주 엽광! 수하들이 영문을 몰라 우왕거렸다. 그때였다. "마타룡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총채 수하들의 시선이 일제히 위무일에게 쏠렸다. 하빈도 창백한 표정으로 위무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있었다. 엽광의 말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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