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아이는 총채주가 될 자격이 없소! 따지고 보면 호반영채는 총채에 부속된 별원(別院)! 마타룡이 총채주가 되려는 것은 총채의 전주와 당주가 총채주가 되려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소!" 도연오는 별다른 말도 꺼내지 않았었다. 그러나 천태림은 숨도 쉬지 않고 위무일을 힐난했다. "외형(外刑)으로 보면 그렇지. 하지만 장강에 끼친 호반영채의 업적을 생각하면 누가 호반영채의 후계자를 총채주의 자격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소. 고집스럽게 밀어붙일 수는 있겠지만 장강 동도들의 비웃음은 면치 못할 것이오. 천 채주께서는 호반영주를 총채에 부속된 일개 수하로 다루셨소?" " .... " 천태림은 할 말이 없었다. 외형이야 어쨌든 실상 호반영주는 항상 그의 위에 있었고 그도 그렇게 대우했었다. 그리고 장강의 모든 동도들도 총채주 다음의 서열을 호반영주로 생각하는 터였다. "마타룡이 총채주 자리에 마음이 있다고 하오?" 천태림이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물은 것이 아니오. 마타룡이 총채주에 마음이 있다면 민강 채주의 마음도 달라지겠지." "다시 말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그 만한 능력이 없소.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고립무원(孤立無援)! 그 놈은 한 마디로 툭 튀어나온 돌과 같소. 외숙이라고는 하나 민강의 채주가 놈을 도울지도 의문이오. 총채의 수하들도 놈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고..." "그건 그렇게 생각합시다. 허나 마타룡, 그 아이가 단심호의 뜻을 이어 백씨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 " .... " 천태림의 안색이 변했다. "도 채주께서는 놈을 지나치게 과대평가(過大評價)하는 것 같소. 놈이 장강의 파랑에 어떤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하오?" "내가 묻고 싶소. 마타룡이 장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판단이 스스로 명확히 옳다고 생각하시오?" " .... " 도연오의 물음에 천태림은 얼굴을 찌푸렸다. 보고 들은 자는 알 것이다. 만로방과의 싸움에서 보여주었던 마타룡의 위력을... 역시 부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우리 아이도 그 만한 능력은 있소. 그리고 예전에 내가 우리 아이에게 듣기를... 마타룡, 그 아이는 백씨 가문의 하수인(下手人) 노릇에 염증을 느낀다고 합디다." "화인, 그 아이가 직접 들었다고 합니까?" "마타룡, 그놈이 어디 자신의 심중을 남에게 발설하는 놈입니까? 감(感)으로 그렇게 느낀 것이겠지요." " .... " 가릉강의 채주, 도연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 채주, 놈이야 어쨌든 이 나이에 다른 눈치를 보고 대사(大事)를 논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역시 도 채주의 결심입니다." "허허허... " 도연오가 다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한수와 상강의 채주는 무슨 연유로 천 채주를 돕겠다고 하던가요?" 그가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장강에는 서로 주인이라고 내세우는 자가 너무 많소. 내 아들놈이 총채주가 되면 소강의 채주들은 대강의 분타로 전락할 것이오. 한수는 감강, 요강, 무하, 신강, 수강을 포함한 파양호 수계를 맡고 상강은 자수, 예수, 원강이 포함된 동정호 수계를 맡을 것입니다." "허허허! 나에게도 돌아올 것이 있소?" "형강과 삼협(三峽)! 도와주시오." 천태림이 계집으로부터 술병과 잔을 뺏었다. 그가 잔이 철철 넘치게 술을 부어 도연오에게 권했다. "허허허... " 도연오는 술잔을 받으며 실없는 웃음만 흘렸다. 그가 술을 들이킨 후, 술잔을 천태림에게 건넸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소. 관심이 없다면 벌써 말을 끊었을 것이오." 도연오가 술병을 기울여 천태림의 잔을 채웠다. "무례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천 채주는 믿지 않소. 하지만 화인이라는 놈은 믿지. 언제 가릉강에 한 번 놀러 오게 하구려. 우리 집에도 괜찮은 여식(女息)은 있소. 허허허!" 그가 수염을 쓸며 웃었다. 천태림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한수, 상강, 이제 가릉강까지... 벌써부터 춘절이 기다려지고 있었다. 제 5 장. 회유시(會有時). - 요하의 물살을 타고 내려와 삼 년만에 중원을 평정했던 천하제일고수, 조양인! 그는 천하제일고수라는 칭호를 얻자 벽부를 세우고 은거에 들어갔다. 벽부는 원래 한 채의 조그마한 장원(莊園)이었다. 조양인이 벽부를 세운 뜻은 한적한 곳에서 마지막으로 자신과 끝없는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큰 장원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 주위로 추종자(追從者)들이 모여들며 상황은 달라지고 말았다. 벽부는 천하제일무문(天下第一武門)으로 철옹성(鐵甕城)이 되고 만 것이다. 조양인이 끝없는 무도(武道)의 길을 찾아 자신에게 매진하고 있는 동안 그의 아들들이 이룬 작품이었다. 양대(兩代)에 걸친 영웅은 없다. 남 보다 한 발 먼저 가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스스로에게 전력을 쏟아야 가능한 일! 따라서 영웅은 화려해도 대부분 그 주위는 빈곤하다. 조양인도 예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유일하게 조양인과 닮은 바가 있다면 웅대한 야심뿐! 하지만 아들들의 야심은 '무(武)'에 쏟는 조양인의 야심과 너무도 달랐다. 그들의 야심은 강호의 패권을 움켜쥐는 데 있었다. 조양인의 아들들은 추종자를 규합해 강호의 패자(覇者)로 행세했다. 조양인의 신위와 더불어 그 아들들도 강호인이 찬탄할 몇 수의 무공은 가지고 있었다. 벽부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을 일이었다. 하지만 힘과 권력은 쥐고 있으면 휘두르고 싶은 것이 속성! 악행이 하나, 둘 늘어났다. 그러나 조양인은 그 때에도 아들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었다. 예전처럼 관심은 오직 그 스스로였다. 조양인은 자신이 세운 벽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체 석굴(石窟)에서 한 자루 칼과 씨름하다 생을 끝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벽부의 행동이 이제 만행(蠻行)으로 불려질 때였다. 조양인에게 스스로의 시간에서 벗어날 사건이 일어났다. 벽부에 일어난 소란이었다. 그 소란이 주위에 대한 조양인의 관심을 일깨웠다. 단심호 위호연은 약관에 이미 강북칠걸(江北七傑)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벽부에 의해 세상이 어수선하게 돌아가자 위호연은 이꼴 저꼴 보기 싫어 스물 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거를 택했다. 그가 본향(本鄕)인 산동(山東) 제남(濟南)으로 돌아가 위가장(魏家莊)을 소일 할 때였다. 하남(河南) 허창(許昌)으로부터 한 통의 비보(悲報)가 날아왔다. 유운보(流雲堡)의 멸문! 유운보는 그의 누이가 시집을 간 곳이다. 그리고 그때 그의 어머니는 딸을 만나기 위해 유운보에 가 있었다. 위호연은 풍마(風馬)처럼 유운보를 달려갔다. 어머니, 누이, 매부, 그리고 유운보 모든 식솔들의 죽음! 위호연은 통곡했고 흉수를 찾아 눈에 불을 켰다. 흉수는 곧 밝혀졌다. 조양인의 셋째 아들! 그는 평소에 눈독을 들이던 누이를 겁간(劫姦)하고 유운보를 멸문함으로써 함구(緘口)를 했던 것이다. 위호연은 복수를 위해 앞 뒤 생각 않고 벽부를 향했다. 그런 그의 발길을 잡은 사람이 위가장의 여(呂) 총관이었다. 여 총관은 홀로 벽부와 싸우는 것은 개죽음뿐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는 강호 협사들에게 통첩을 보내 벽부의 만행을 호소하고 벽부를 같이 칠 자들을 모아 일전을 벌이라고 말했다. 위호연은 잠시 분노를 참고 여 총관의 말을 따랐다. 위호연의 비분이 담긴 통첩은 강호 곳곳으로 전해졌고 위호연은 허창에서 강호 협사들이 모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강호는 비정한 곳! 강호인들의 의기는 벽부의 힘 앞에는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호형호제하던 강북칠걸도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위호연은 분루(憤淚)를 삼키며 독행을 결심했다. 허창을 막 떠나려 할 때 그의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장강의 물길을 평정하느라 여념이 없던 수룡왕, 그리고 그의 지기인 추운객이 그들이었다. 수룡왕은 오로지 의기 하나로 허창에 왔고 추운객은 친구가 가는 길이라 어쩔 수 없이 수룡왕을 따라 온 것이었다. 위호연은 수룡왕이나 추운객과 그렇게 교분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수룡왕과 추운객의 동행을 거부했다. 죽으러 가는 길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룡왕과 추운객은 돌아가지 않았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오로지 의기 하나로 묵묵히 따라 주던 수룡왕과 추운객! 그 때 수룡왕과 추운객에게 느낀 위호연의 마음이 어떠했을 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벽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감히 벽부에 도전해 올 놈이 있으랴 하며 방심을 한 탓인지 위호연 일행은 쉽게 벽부의 현판을 박살내고 외당을 넘어섰다. 그러나 조양인의 아들들이 나타나며 승부는 달라졌다. 원래 이란투석(以卵投石)의 싸움이었다. 위호연은 전신에 피를 철철 흘리며 생각했다. '두 명이나 되는 지인(知人)을 얻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단지 그 소중한 지인들이 자신의 일로 목숨을 잃게 되어 안타까울 뿐...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앞이 흐릿했다. 그가 협명(俠名)을 떨치기 위해 적에게 선사하던 바로 그 '죽음'이 촌각(寸刻)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줄기 바람 스치는 소리와 함께 조양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굴에서 검로(劍路)에 고심하던 그는 벽부에 들리는 칼부림에 놀라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위호연은 칼끝을 조양인으로 바꾸었다. 벽부의 주인은 조양인이니 모든 파랑을 일으킨 자도 조양인이라 위호연은 생각하고 있었다. 강호인들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하지만 정작 조양인은 자신에게 향하는 칼끝의 이유를 몰랐다. 그가 위호연의 공세를 가볍게 막아내며 전후 사정을 물었다. 수룡왕이 큰소리로 위호연에 얽힌 혈원(血怨)과 벽부의 횡포에 대해 토로했다. 조양인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하늘을 우러르며 수염을 떨었다. 그의 칼이 번뜩이는 한 순간, 조양인의 어깨에는 한쪽 팔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팔을 자른 그 칼을 셋째 아들에게 내밀었다. "죽음으로 사죄하라. 그리고 나머지 놈들은 영원히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마라. 이 순간부터 벽부는 없다. 벽부의 이름을 내거는 놈이 있다면 모조리 죽이겠다." 조양인의 공허한 외침이 벽부를 울렸다. 벽부의 수하들은 두 아들과 함께 슬금슬금 꼬리를 뺏고 남은 자는 셋째인 그의 막내아들뿐이었다. 셋째는 눈물로 사정했다. 그러나 조양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셋째가 스스로의 목에 칼을 찌름으로써 벽부의 일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외의 결말이었다. 벽부의 일전이 끝난 후, 위호연은 수룡왕, 추운객과 의형제(義兄弟)를 맺었다. 그리고 위호연은 수룡왕을 따라 장강으로 향했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 악양의 한적한 호변에 호반영채라는 장원이 들어섰다. - 무일, 은혜를 잊지 마라. 은혜를 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너에게 말하듯 너도 네 아이에게 그렇게 말해야 한다. 삼 대(三代)를 목숨 바쳐도 모자랄 은혜다. * * * "돌아가시기 전에 총채주께서는 종종 위 공자를 찾았습니다." 중년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심유(深幽)한 눈빛, 한 손에 학익선(鶴翼扇)을 들고 한숨을 쉬는 중년인은 장막(帳幕)에 앉아 천리 밖에 이는 장강의 파랑까지 읽는다는 와룡전주 주숙예(朱肅禮)였다. 위무일은 주숙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 좋아라고 꾸며낸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솔직히 전임 총채주, 백승명을 사심 없이 만나지는 못했다. 언제나 꿈틀거리던 반역의 꿈! 그러나 백승명은 달랐다. 그를 친동생 이상으로 유별나게 아끼던 사람이 그였다. '좋은 사람이었지.' 이인자(二人者)라는 자리가 죽도록 싫던 한 때, 위무일이 꾼 반역의 꿈은 더 이상 자랄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귀따갑게 들은 선대(先代)의 은혜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을 품어낼 듯한 인자함, 그것을 뚫고 반역의 씨앗을 키울 독기(毒氣)는 위무일에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좌절했다. 생각하니 그 좌절은 피끓는 한 때의 치기 어린 꿈이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는 달랐다. 그는 그 좌절을 피바람과 장강을 떠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로 인해 두 번이나 쓴맛을 봐야 했다는 것을 물론 백승명은 모를 것이다. 죽은 후에는 알았을까? "승마를 배우던 일, 악양에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일... 만약 위 공자께서 곁에 계셨다면 총채주께서는 보다 편안히 숨을 거두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와룡전주 주숙예는 계속 백승명과의 일을 들먹였다. 옛 정을 들춰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함인가? 딱딱하게 굳은 위무일의 가슴은 옛 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주숙예도 그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가 소매를 뒤져 한 통의 서신을 꺼냈다. 주숙예가 서탁에 서신을 펼쳤다. - 무일,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는다. 도와 다오. 누구의 핏줄이던 상관 않겠다. 누구의 핏줄이던... 장강의 평화! 방법은 네가 알리라 믿는다. 술에 취한 듯 휘적이며 쓴 글씨... 이미 자신의 목숨이 반은 명부(冥府)에 가 있음을 알고 쓴 백승명의 서신이었다. '장강의 평화... 물론 나는 방법을 안다. 주숙예도 알 것이다. 그런데도 핏줄을 두 번씩이나 운운하다니... 형님답지 않군. 이후의 일이 그렇게 걱정되었는가?' 위무일이 실소를 흘렸다. 칼을 닦고 있던 엽광이 서신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핏줄을 상관 않겠다는 말은 소영주에게 총채주를 맡긴다는 이야기가 아니오?" 그가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 " .... "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위무일도 주숙예도 알고 있었다. 장강에 평화를 가져올 방법을... 장강의 총채주는 그 누구도 될 수 없다. 위무일도 될 수 없고 수채의 채주, 그 누구도 될 수 없다. 될 수 있는 자는 백씨 가문의 후예뿐! 수채의 그 누구가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총채주가 되더라도 수로연맹은 삐꺽거릴 수밖에 없다. 새로이 임명된 총채주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동열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머리를 숙이려 들지 않을 것이고 일부는 총채주를 옹립시켜준 공을 물어 장강을 할거하려 들 것이다. 장강의 결속과 평화! 그럴 바에야 어린 핏덩이지만 백씨 가문의 후예가 총채주로 나을 것이다. 수룡왕의 전설을 이어 받은 고귀한 피, 작금의 위기만 넘긴다면 그들은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 총채에 충성을 다질 것이다. '결국 형님이 나에게 맡기려는 짐도 백씨 가문에 대한 충성인가?' 위무일의 눈빛이 무심함을 더했다. "총채주의 죽음 보다 더 큰 타격은 단심호 어르신의 죽음과 호반영채의 겁화였습니다. 도와주시오. 호반영채는 다시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강의 위기를 넘겨 줄 사람은 이제 호반영주가 될 위 공자뿐입니다." 주숙예가 결국 참았던 말을 내던졌다. " .... " 위무일은 하빈, 주숙예와 나누었던 몇 마디의 말에서 이미 수로연맹의 상황을 그림 보듯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왠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련하기만 했다. 간혹 백승명에 대한 기억들만이 현실로 따끔거릴 뿐... "정말 이상한 일이군. 하빈이라는 놈은 총채의 일에 간섭을 하면 찢어 죽일 듯 하던데... " 주숙예가 위무일을 총채주에 모실 뜻이 없음을 안 엽광이 실망된 표정으로 말했다. "상황이 그와 같소. 이 전, 칠 당의 모든 자들이 총채에 품고 있는 마음은 한 마음이오. 그러나 중심이 없으니... 생각도 분분하고 행동도 분분하오. 하 당주 딴에는 잘해 보려고 한 말이니 이해하기 바라오." 주숙예가 엽광에게 머리를 숙였다. "결국 무가(武家)를 지탱하는 것은 힘! 위 공자, 태부인의 영(令)에 힘을 실어 주시오. 그것만이 작금의 총채와 수로연맹의 혼란을 막을 길이오." 그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위무일이 언제 떠질지 모르는 폭약 같기는 주숙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선이 없으니 차선을 선택할 도리밖에... "하빈이 틀린 말만 하지는 않더군. 소영주는 이제 자유라고... 소영주는 주 전주의 부탁이 없더라도 당연히 호반영주가 되실 분! 하지만 이제 호반영채는 예전처럼 총채를 예우로 대하지 않을 것이오." 엽광이 냉랭하게 말했다. "도와 달라고 분명히 말했소. 우리는 호반영주에게 총채의 어려움을 덜어 달라고 부탁 드릴 따름이오." 주숙예가 미간을 좁혔다. "주 전주를 비롯한 모든 총채 사람들의 마음은 백흥악이라는 그 어린 소주인에게 있는 모양이군. 만약 대소강(大小江)의 채주들이 백씨 가문이 아닌 다른 자를 총채주로 선임하면 어떻게 하겠소?" 엽광이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우리의 처지는 엽 선주도 잘 알 것이오. 우리는 어차피 총채주라는 자리에 매인 자들... 장강의 주인이 바뀐다면 그 자를 따라야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차후의 일! 지금 소주인이 총채를 지키고 있는 이상 우리는 소주인을 총채주로 옹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오. 우리가 어찌 잊겠소? 수룡왕과 전임 총채주께서 우리에게 베푼 은덕(恩德)을... " 주숙예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주 전주의 생각도 나와 같구려. 나도 영주로부터 숱한 은혜를 입었소. 그래서 소영주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지. 어떻소? 이전에 호반영채가 총채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이번에는 총채가 호반영채에 도움을 주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장강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총채주가 될 만한 분은 소영주밖에 없소!" " ...위 공자도 물론 훌륭한 분이시지요. 공자께서도 그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주숙예가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 ..... " 위무일은 여전히 침묵만 지켰다. 엽광이 수염을 억세게 쓸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지금은 총채주 운운할 때가 아닌 듯 하오. 지금 나와 소영주의 관심은 만로방 놈들을 쓸어버리는 것! 나는 주 전주로부터 먼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소. 하빈은 만로방과 싸울 의사가 없는 듯 하던데... " "하 당주도 싸우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오. 싸움은 필연! 다만 언제, 어떻게 싸울 것인가의 문제는 각자가 좀 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생각하는 동안 만로방 놈들이 쳐들어오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위 공자의 힘을 빌어 서둘러 총채를 정돈하려는 것 아닙니까? 총채와 수로연맹이 제멋대로 노는 상황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 "아하! 그 일이라면 걱정 마시오. 만로방 놈들은 소영주와 나만으로도 충분하니... 주 전주께서는 소주인을 총채주에 옹립할 일만 신경 쓰시오." " .... " 주숙예의 심유한 눈빛에 한 가닥 한기(寒氣)가 흘렀다. 총채와 수로연맹의 사활(死活)이 걸린 일을 엽광이 너무 장난스럽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가 위무일에게 눈길을 돌렸다. "총채와 수로연맹만 정리된다면 우리가 먼저 만로방 놈들을 진격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복수를 그때까지만 참아 주실 수 없습니까?" " .... " "위 공자, 이곳 장강은 호반영주를 비롯해 수룡왕, 전임 총채주, 위 공자를 아끼던 모든 분의 영혼이 깃든 곳입니다." " .... " "장강을 왜 떠났는지 모르오. 하지만 도와주시오. 한 달여 후에 태부인께서 원강과 무하를 방문합니다. 만로방의 수작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만큼 그곳의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황룡당주(黃龍堂主)와 적룡당주(赤龍堂主), 집법당주(執法堂主)가 태부인을 모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원강과 무하에 위협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태부인을 도와주십시오. 따라 가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주숙예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위무일의 입가에 실소가 흘렀다. '떠난 이유도 모르고 도와 달라니... 그것도 그 여자를... ' 그가 묵언으로 등을 돌렸다. 주숙예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위무일의 등뒤에 포권을 했다. 뚜벅! 뚜벅! 영빈각을 나서는 주숙예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휭! 창문을 타고 들어온 강바람이 그에게 남긴 백승명의 서신을 날렸다. 서신은 펄럭이며 방안을 날았다. 위무일은 턱을 매만졌다. 백승명인가? 누구를 향한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애잔함이 잠시 그의 가슴에 통증을 남겼다. 위무일은 자신의 감정을 냉소로 흘려 보내려 했다. 그러나 역시 잊으려는 노력만큼 반대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도와주시오." 검게 그을린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 귀밑에서 턱까지 이어진 미세한 도흔만 아니라면 무사의 자취를 전혀 찾을 길 없는 노인이었다. 승룡전주 장능(張能)! 그는 단도의 대접전 당시 전임 총채주를 업고 수백 리 길의 사로(死路)를 헤치며 총채로 귀향한 자였다. 전임 총채주가 죽고 난 후, 장강 총채는 후계자가 없었다. 소주인인 백흥악은 아직 뱃속에 있는 상태. 장강 총채의 새로운 주인을 맞기 위해 십팔수채의 채주들은 군산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의 회합은 재론(再論)을 전제로 결국 결론 없이 끝을 맺었다. 총채주를 누구로 할 것인가를 두고 수채간에 이해 충돌이 발생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쌍극(雙戟)을 움켜쥐고 뱃속의 아이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능의 기세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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