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중의 설명은 한 시진 가깝게 이어졌다. "어떻소?" 화톳불만이 반짝일 때가 되어서야 서문중이 양피지를 접었다. 서문중의 계책을 머리 속에 담느라 여념이 없던 각 대주들과 부회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백 년 내 천하제일고수라는 조양인이라 하더라도 이 올가미에 걸려들면 꼼짝을 못하겠군요." 탕백기주 여맹이 탄식을 터뜨렸다. "그렇게 보셨소? 사실이 그렇소. 방주께서는 마타룡을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나는 마타룡을 조양인이라 생각하고 계획을 짰소이다. 껄껄껄!" 서문중이 양피지로 손바닥을 치며 웃었다. "출발은 내일 새벽! 모두 일찍 쉬시오." 그가 산회(散會)를 선언했다. 제 9 장. 무 하(撫 河). 파파팟! 무하 수채로 들어가는 선착장에는 온통 깃발뿐이었다. 형형색색의 깃발! 무하 수채의 내당당주, 최안은 그가 타고 온 배에서 내려 먼저 선착장에 도열했다. 총채의 선단을 맞는 그의 표정이 유난히 어두웠다. "감강, 요강, 수강, 신강... 소집령을 받은 채주들은 모두 모였습니다." 집법당주 종우상이 선착장에 휘날리는 각 수채의 깃발을 보며 말했다. "모두 내리도록 하세요." 담청이 명을 내렸다. 세척의 투함이 이물을 뒤틀며 포말을 일으켰다. 적룡당, 황룡당의 무사들이 선착장을 사오 장여 벗어난 곳에 차례로 도열했고 화룡대의 부대주, 정필이 이끄는 무사들이 선착장에 날개 모양의 벽을 쌓았다. 종우상이 내리고 담청이 내리고 엽광과 호반영채의 수하들이 내렸다. 위무일은 산고, 이만, 담향과 함꼐 마지막으로 선착장에 발을 디뎠다. 삐꺽! 투함에 탄 자들이 모두 내리자 투함을 젓던 사공들이 배를 강심(江心)으로 옮겼다. "길을 인도하겠습니다." 최안이 담청에게 읍을 한 후, 선두로 나갔다. 대부분의 수채들은 강변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무하 수채만은 강변과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무하 수채로 가는 길은 소롯길이다. 그들이 좁은 길을 일다경 걸었을 때였다. 최안이 발걸음을 멈추고 적룡당, 황룡당의 무사들도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에요?" 굽이를 돌던 담청이 종우상에게 선두의 사정을 물었다. 종우상이 후다닥 선두로 달려갔다. 잠시 후, 그는 적룡당주, 황룡당주와 함께 돌아왔다. "상(商) 노야(老爺)이십니다. 상 노야께서 길을 막고 계십니다." 종우상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상확(商穫)?" 담청이 물었다. 종우상 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무슨 이유로?" 담청이 종우상 등을 이끌고 선두로 향했다. 반백의 머리칼, 강바람에 거칠 대로 거칠어진 얼굴, 그러나 눈빛만은 젊은 날의 고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상 노야." 담청이 숙연한 표정으로 노인 앞에 섰다. " .... " 노인이 눈을 질끈 감으며 담청에게 고개를 숙였다. 상확! 장능과 비슷한 시기에 무하 수채에 입당, 장강과 무하 수채에 그의 전 생애를 바친 인물이었다. "수채에서 물러나 쉬고 계신다더니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담청이 존경의 염을 표하며 물었다. 눈앞의 상확이라는 노인은 무하 수채의 외당당주를 끝으로 일 여년 전에 해검(解劍)을 한 터였다. 상확이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태부인을 이곳까지 오게 한 죄, 드릴 말씀이 없소." 그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의 일이 어찌 상 노야의 잘못 때문이겠습니까? 모두 총채가 자신의 일을 못했기 때문..." 담청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장강에 끼친 공은 한낱 티끌에 불과함은 잘 압니다. 하지만 그간 수룡왕과 전임 총채주를 모신 공을 생각해서... 태부인, 제 체면을 봐서 이만 총채로 돌아가 주십시오." 상확이 힘겹게 말을 끝냈다. " ... " 잘그닥! 잘그닥! 담청의 손안에 든 구슬이 소리를 내며 그녀의 난감함을 대신했다. 그녀가 머리칼을 쓸며 입을 열었다. "상 노야께서 장강에 끼친 공을 모르는 이가 그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의 일은... " "제가 채주를 다시 설득해 보겠습니다!" 상확이 백미(白眉)를 꿈틀대며 말했다. "장강의 동도들은 알고 있습니다. 상 노야가 무하 수채에서 떠난 이유를... 상 노야께서는 만로방과 손을 잡는 홍 채주에게 반대하시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해검을 하신 것이 아닙니까?" " .... " "상 노야의 설득을 들었을 자라면 벌써 들었을 것입니다. 상 노야, 길을 비키시지요." "총채에서 출행까지 했으니 채주도 생각에 변함이 있을 것입니다." 상확은 고집스럽게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는 삼 대(三代)에 걸쳐 무하의 채주를 모신 가신(家臣)! 그리고 작금의 홍 채주는 그가 아들 같이 받들어 오던 인물이다. 따라서 아무리 홍 채주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홍 채주가 총채에 의해 무릎을 꿇는 모습을 장강의 동도들에게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호호호!" 담청이 짜랑하게 웃었다. "상 노야께서는 마치 우리 총채가 무하를 칼로 난도질하기 위해 가는 줄 아시는 모양이군요. 우리는 홍 채주와 작금의 사태를 논하고자 할 따름이에요." "칼로 난도질하기 위해 간다고 하셨소? 맞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상확이 자르듯이 말했다. 담청이 상확을 바라보며 아미를 찌푸렸다. "상 노야, 무슨 연유로 그 같은 생각을 하셨습니까?" 종우상이 물었다. "마타룡! 그는 왜 데려왔소?" 상확이 안광을 빛내며 위무일에게 눈길을 돌렸다. "대답하시오?" 묻기는 담청에게 묻고 있었으나 상확의 눈길은 위무일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 .... " 위무일은 무심한 눈빛만 빛냈다. "상 노야!" 격한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엽광이었다. "영주를 총채의 일과 연관시키지 마시오! 영주는 다만 원수를 처치하기 위한 행로(行路)를 걷고 있을 뿐! 만로방에 협조하는 자도 원수요. 그리고 원수는 지위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죽여야 한다는 것이 영주의 생각!" 엽광이 소리쳤다. 상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영주... 그렇겠지. 전임 영주께서 돌아가셨으니... " 상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영주께 묻겠소. 영주의 생각도 엽 선주와 같소?" 상확의 물음에 군웅들의 시선이 모두 위무일에게 몰렸다. 위무일이 이마를 찌푸리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길을 비키시오!" 엽광이 성큼 걸어나갔다. "엽 선주, 나의 이름과 함께 무하 수채의 이름을 묻으시오." 상확이 체념 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가 등뒤에 꽂혀 있던 두 자루 단창(短槍)을 들었다. "왜 이러십니까? 상 노야!" 무하 수채 내당당주, 최안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상확의 팔을 잡았다. "태부인께서는 아직 채주를 만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결과가 나쁜 쪽으로만 나리라 생각하십니까?" 최안이 매달렸다. "나는 홍 채주를 안다. 눈앞의 이익에만 급해 한 치 앞도 못 보는 어리석은 자! 결과는 뻔하다. 마타룡... 저자가 호반영채의 영주를 자처하며 온 이상... 비켜라!" 상확이 최안을 밀치며 단창을 굳게 잡았다. "상 노야, 무례를 용서하시오. 상 노야의 존명을 욕되게 하기 위해 칼을 드는 것은 절대 아니오." 팟! 엽광이 쌍수도를 빼 들었다. "알고 있소!" 챙! 상확은 단창을 엇갈리게 부딪히며 궁보를 취했다. 최안이 담청과 위무일을 바라보며 싸움을 말리기를 호소했다. 그러나 상확의 단창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이미 노도처럼 엽광을 쏘아 가고 있었다. 파파팟! 엽광의 쌍수도도 빛을 뿌렸다. 챙! 챙! 챙! 단창과 쌍수도에서 현란한 불꽃이 튀겼다. 원래 상확의 단창은 사정을 모르고 엽광의 쌍수도 역시 패도적인 바는 상확에 못지 않은 터! 상확의 단창과 엽광의 쌍수도는 초가을의 현란한 빛살을 더욱 현란하게 뿌렸다. "무하제일인(撫河第一人)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군." 종우상이 중얼거렸다. 나이가 들어 완력에만 엽광에 밀릴뿐 상확의 기세는 엽광을 능가했다. 쨍! 쨍! 쨍! 십 여합을 넘기자 상확은 엽광을 압도해 갔다. 쉬쉭! 상확의 단창이 은사(銀絲)로 수를 놓자 엽광의 쌍수도는 그물에 갇힌 것처럼 허둥댔다. 초식은 요란했지만 사실 상확의 단창에서 펼쳐지는 천라지망(天羅之網)은 숭숭한 헛점 투성이었다. 그러나 엽광은 그 빈곳을 노려 상확에게 살초를 펼칠 기분이 아니었다. 상확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상확은 단창을 드는 순간 이곳에서 죽기를 각오했다. 그는 엽광을 핍박해서 서둘러 엽광의 칼에 죽고자 할 따름이었다. 이곳에서 죽는 것만이 무하 수채의 오명(汚名)을 보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챙! 챙! 챙! 죽음을 모르고 육박해 오는 상확의 공세에 엽광의 손발은 합을 넘길수록 더욱 어지러워져 갔다. 결국 엽광은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종우상을 비롯한 당주 급의 인물들은 무공에 대해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상확과 엽광이 벌이는 일전의 속사정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엽광에게 살수를 펼치라고 말할 수 없었다. 상확은 무하뿐만 아니라 수로연맹 전체의 몇 안되는 원로(元老)다. 그에게 어찌 살초를 펼치라고 주문하랴? 그 사이, 엽광은 상확의 단창에 당장이라도 꿰뚫릴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안되겠소. 합격으로 엽 선주를 도웁시다." 종우상이 판관필(判官筆)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슥! 황룡당주와 적룡당주가 동시에 칼을 뽑았다. 그들이 엽광을 응원하기 위해 신형을 날릴 때였다. "카핫!" 엽광이 괴성을 지르며 쌍수도를 번뜩였다. 챙! 쌍수도와 단창이 얽히며 무사들의 귀를 멍하게 할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음... " 상확이 주춤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단창을 쥔 그의 손은 엽광의 엄청난 도력(刀力)에 손 마디마디가 늘어날 정도였다. 엽광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좌수로 상확의 오른쪽 단창을 잡아가며 우수로는 상확의 왼족 단창을 후려쳤다. 팟! 상확이 왼쪽 단창으로 엽광의 가슴을 노리고 오른쪽 단창으로 쌍수도를 막았다. 챙! 쌍수도와 단창이 어우러지는 소리와 함께 또 한 자루의 단창이 엽광의 팔뚝을 찢으며 그대로 심장으로 육박했다. 찰라간에 군웅들의 안색이 변했고 상확의 안색도 변했다. 상확은 엽광을 죽일 마음이라고는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칼을 맞댄 상황에서는 언제나 의식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이 손발이다. 엽광의 무모한 출수에 부지간에 대응하느라 상확은 손속에 사정을 둘 틈이 없었다. 원래 고수들의 승부는 그렇게 생사(生死)를 찰나간에 결정 짓는 법! 엽광도 짧은 순간 후회를 했다. 상대는 한 자루 칼로는 무하에서 당할 자가 없는 자! 무모한 출수를 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상대가 상확이 아니라 그가 반드시 죽여야 할 자였다면 그런 위험한 출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적이 아니다.' 그런 생각의 차이가 그의 경각심을 가볍게 했고 그 풀려진 경각심이 암묵 중에 무모한 출수를 불렀던 것이다. 엽광은 그의 심장을 득날같이 달려드는 단창을 보며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격검에서 '심력(心力)'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은 때가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상확이 급히 단창을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신바람을 일으키며 내달리는 단창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상확도 엽광도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쐐액! 백광(白光)이 쏜살같이 엽광과 상확을 가르며 지나쳤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상확이 퍼뜩 단창을 들었다. 그의 단창은 두부처럼 뚝 잘려져 있었다. 촌음(寸陰)에 날아간 그의 단창이었다. 그리고 그의 단창은 한철(寒鐵)로 만들어져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했다. 그런 단창을 부러뜨리다니... '누구... ' 상확이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군웅들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들의 시선은 위무일에게 몰렸다. '귀두도!' 위무일의 허리에 달린 칼은 원래처럼 어눌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지... 위무일의 곁에는 호반영채의 수하 한 명이 서 있었다. 칼이 없는 자는 그였다. 그는 아직 자신의 칼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상확과 군웅들이 위무일의 무위에 아득한 벽을 느낄 때였다. "에잇!" 엽광이 화를 내며 부러진 단창을 발로 찼다. "상 노야! 단창을 다시 드시오!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한 번 싸워 봅시다!" 그가 고함을 질렀다. 엽광은 상확의 단창에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한광을 빛내며 쌍수도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상확은 싸울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잘려 나간 자신의 애병기(愛兵器)를 만졌다. "상 노야! 그만하면 상 노야의 뜻이 우리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습니다." 담청이 나섰다. "무하 수채는 우리와 한 집안입니다. 아무리 잘못이 있더라도 피까지 보기야 하겠습니까? 좋은 말로 일을 매듭 지을 테니 그만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녀가 사정했다. 상확은 침묵을 지켰다. 군웅들도 상확을 지켜보며 침묵을 지켰다. 휘-잉! 강바람이 나무를 휩쓰는 소리만 요란할뿐 정적! 그 정적을 깨뜨린 것은 발걸음 소리였다. 뚜벅! 뚜벅! 위무일이 총채의 수하들을 헤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화룡대, 황룡당, 적룡당 무사들을 지나치고 최안을 지나쳤다. 위무일이 상확까지 무심히 스쳐 지날 때였다. 팟! 상확의 단창이 묵선(墨線)을 그리며 위무일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위무일이 우수를 내뻗어 단창을 휘감아 갔다. 엽광과 다를 바 없는 출수였다. 하지만 거리는 더욱 짧고 위무일은 비켜 선 자세였다. 그럼에도 결과는 판이했다. 위무일의 팔은 상확의 단창을 영사처럼 휘감았다. 위무일이 팔에 힘을 주며 단창을 끌어당겼다. 단창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상확의 손을 떠났다. 휙! 위무일이 단창을 내던졌다. 그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소롯길을 걸어갔다. 엽광이 상확을 노려보며 그 뒤를 따랐고 호반영채의 수하들이 따랐다. "종 당주, 길을 인도하세요." 담청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철컹! 철컹! 적룡당, 황룡당의 무사들이 물결 갈라지듯 상확을 비켜 가며 대열을 전진했다. 담청은 상확을 지나치며 그에게 읍을 했다. 상확은 그녀의 인사에 응대하지 않았다. 그는 총채의 대열이 이미 먼발치로 지나간 후에도 그가 선 곳에서 꼼짝을 않았다. 무하 수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을 좌우로 무하 수채의 수하들이 도열해 있었고 문 앞에서 사십대 후반의 중년인과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들은 무하 수채의 총관과 외당당주였다. "장강군림(長江君臨)! 총채일세(總寨一世)!" 총채의 깃발이 보이자 무하 수채의 무사들이 입을 맞춰 소리쳤다. "총채일세라... 초대 총채주 이후, 오랜만에 듣는 연호(連呼)입니다. 홍 채주께서 총채의 환대에 신경을 적지 않게 썼군요." 종우상이 웃으며 말했다. "겉이 이렇게 요란스럽다는 것은 내심에 딴 마음이 있다는 증거! 어디 그간의 일을 어떻게 변명하는지 봅시다." 엽광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태부인, 어서 오십시오." 담청이 무하 수채의 현판 아래 이르자 무하 수채의 총관과 외당당주가 깊게 머리를 숙였다. "채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하 수채의 총관 이준(李俊)이 담청에게 들어가기를 권했다. 담청이 화룡대의 호위를 받으며 무하 수채로 들어섰다. "주원(周元), 오랜만이다." 엽광이 무하 수채로 들어서며 무하 수채의 외당당주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엽 선주." 무하 수채의 외당당주, 주원이 머리를 숙였다. "상 노야를 밀쳐 내고 얻은 네놈의 외당당주 자리는 물론 만로방과 손을 잡는데 앞장선 공로로 얻은 것이겠지?" " .... " 주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도 이제 예전의 향주(香主)가 아닙니다. 수하들이 듣고 있습니다." 그가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흐흠! 이제 당주니 당주로 대우해 달라 이 말인가? 웃기는 놈이군. 홍 채주를 만난 후, 네놈과 저기 총관이라는 놈의 죄는 따로 묻겠다." 엽광이 무하 수채의 총관, 이준을 가리키며 한광을 쏟았다. "무슨 자격으로 그 같은 말을 하시는 게요?" 주원이 내심 엽광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며 냉랭하게 물었다. "자격? 맞는 말이다. 적과 연통한 놈들에게 자격 운운해서 무엇하랴? 껄껄껄!" 탁! 엽광이 주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악력으로 주원의 어깨를 눌렀다. 주원이 어깨를 곧추세우며 엽광의 악력에 맞섰다. 통상 각 수채의 외당당주들은 채주의 식솔들을 제외하고 최고의 무위를 자랑하는 자들이다. 무하가 작은 강이고 주원이 삼십대 중반의 이른 나이에 당주를 맡았다고는 하나 그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는 뜻! 주원은 총채 수하들이 모두 무하 수채로 들어갈 때까지 엽광의 악력에 저항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실력은 엽광과 견줄 바는 못되었다. 이마에 심줄을 꿈틀대며 저항했으나 그의 어깨는 자꾸 기울어져 갔다. 엽광이 몇 푼의 힘만 더 실으면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기우뚱 게걸음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엽광은 주원의 체면을 그 정도까지는 깎지 않았다. 엽광이 주원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더니... 주원, 제법 실력이 늘었구나. 껄껄껄! 나중에 본격적으로 어우러져 보자." 엽광이 호탕하게 웃으며 무하 수채로 입성(入城)했다. "젠장!" 주원이 칼잡이를 잡으며 흉광을 흘렸다. 무하 수채의 현판을 지나면 연무장(鍊武場)이다. "태부인, 채주께서는 내당(內堂)에 계십니다. 당주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곳에 머물게 함이... " 최안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담청이 황룡당주와 적룡당주에게 눈짓을 했다. "각 향주들은 적당한 그늘을 찾아 수하들을 산개하라!" 적룡당주가 소리쳤다. "우리 화룡대는 원래 어디를 가던 따를 자격이 있음을 최 당주도 잘 아실 것이오." 화룡대의 부대주, 정필이 말했다. "물론이오." 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당으로 담청 등을 안내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반영채의 수하 중 한 명이 엽광에게 물었다. "당연히 영주를 모셔야지!" 엽광이 쌍수도를 철렁이며 걸어갔다. 내당을 향하던 그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길이 뚝 떨어져 걷고 있는 한 무리를 향했다. 이만과 담향, 그리고 산고였다. 산고는 이만, 담향과도 거리를 둔 채 느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생기(生氣)라고는 느낄 수 없는 수척한 얼굴.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엽광은 참았다. 저런 류의 아픔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것이었다. 파르르... 만장(輓章)처럼 길게 늘어진 분홍빛 휘장이 내당을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길게 놓여진 탁자와 의자... 무하 수채는 담청을 내당의 너른 정원(庭園)에서 환대할 모양이었다. 탁자에는 다섯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철중쟁쟁(鐵中錚錚)의 눈빛을 빛내는 그들은 파양호 수계의 다섯 명의 채주들이었다. 상석(上席)에서 담청을 기다리는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 무하 수채의 채주, 홍관연(洪官燕)이었다. 홍관연의 우측으로는 감강의 명(明) 채주, 요강의 하(河) 채주, 신강의 전(田) 채주, 수강의 신(申) 채주가 차례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 같이 무거웠고 담청이 내당을 들어설 때까지 누구 하나 일어서지 않았다. "태부인께서 오십니다!" 조랑 걸음으로 먼저 내당에 도착해 있던 무하 수채의 총관 이준이 소리쳤다. 채주들이 부시시 움직였다. 그들이 의자에서 일어나 담청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태부인." 홍관연이 채주들을 대표해서 담청에게 인사를 했다. "앉으시지요." 그가 담청에게 그를 마주보는 자리를 가리켰다. 무하 수채의 이 총관이 담청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뺐다. "오랜만이에요. 홍 채주. 그리고 여러 채주분들도... " 담청이 머리를 가볍게 숙이며 의자에 앉았다. 담청이 앉자 채주들도 장포를 젖히며 의자에 앉았다. "이준, 당주 분들도 앉을 수 있도록 하라." 홍관연이 말했다. 이준이 집법당주, 종우상과 황룡당주, 적룡당주, 화룡대의 부대주, 정필의 자리를 마련했다. 종우상 등은 이준이 마련해 준 의자에 앉았고 정필은 의자에 앉기를 거부했다. 그는 수하들과 함께 담청의 뒤에 서 철벽 같이 담청을 호위했다. 무하 수채의 외당당주, 주원도 질세라 수하들을 이끌고 홍관연의 뒤에 서 위용을 과시했다. '이놈들이!' 엽광의 눈이 찢어졌다. 홍관연은 처음부터 위무일을 본 척도 않더니 결국 자리조차 내어 주지 않았다. 위무일을 무시하기는 다른 채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위무일에게 눈길을 주는 자가 없었다. '영주를 무시하기로 작정을 했군.' 엽광이 이를 깨물었다. 한바탕 난장을 벌이고 싶었지만 상대는 채주들이다. 아무리 성질 급한 엽광이지만 채주들을 상대로 미친 듯이 날뛸 수는 없었다. "반선(潘善)!" 엽광이 호반영채의 수하 한 명을 불렀다. "저기 의자가 한 개 비어 있구나. 가지고 오너라." 그가 정필이 앉기로 되어 있던 의자를 가리켰다. 반선이라는 수하가 뽀르르 달려가 의자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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