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장풍파랑 - 30편 (30/61)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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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 장풍파랑 - 30편 (3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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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립이 절망스런 표정으로 심우를 바라보았다.
심우는 장립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은 물론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칼을 들었던 무사가 두 팔을 잃었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형벌...
심우는 산발 괴인이 차라리 장립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이 장립에게 덕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산발 괴인이 장립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며 전신의 힘을 칼 끝에 모았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장립이 입을 쫙 벌렸다.
산발 괴인이 장립의 가슴에 쑤셔 넣었던 손을 쑥 뺄 때였다.
팟! 심우가 비호처럼 달려들며 칼을 번뜩였다.
산발 괴인도 신경은 심우에게 모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심우가 움직이자 마자 산발 괴인이 펄쩍 뛰었다.
탓! 산발 괴인이 야수처럼 껑충 뛰어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으으..... " 장립의 눈이 까뒤집어졌다. "나와라!" 심우가 흉광을 쏟으며 고함을 쳤다. "담익! 나와라!" 그가 다시 소리쳤다.
담익...
처음에는 산발 괴인을 담익이라고 전혀 상상하지 않았었다.
산귀라 불려지고 머리까지 이상해졌다고 들었으나 설마 저렇게 변해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발 괴인이 입고 있던 걸레처럼 헤진 옷은 분명 수로연맹 화룡대의 복장이었고 산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은 그가 들었던 담익의 얼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서랏!" 심우가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수풀 속을 달리던 담익은 심우가 부르는 소리에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담익?' 그의 눈빛이 일순, 빛을 뿌렸다. '그랬었지.
그랬었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니 자신은 담익이라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럼 그 동안의 나는 무엇이었나?' 담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기억을 회상했다.
신녀봉에서 순무당주 모삼풍과 칼부림을 한 기억은 났다.
앵앵의 시신을 들고 호출까지 온 기억도... '그 이후는... ' 아마 호출에 먼저 자리잡고 있던 비적과 대판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담익은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으려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 같은 몰골로... ' 담익은 곤혹스러웠다.
호출이라는 낯선 곳을 서성이는 것도 의아스러웠지만 산도둑 같은 몰골에 손에는 뚝뚝 흐르는 피! '왜? 왜? 내가... ' 담익은 자신에 대해 계속 물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가 인상을 험악하게 그렸다.
벼락을 맞은 듯한 강한 충격이 그의 정수리를 때렸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올 때 보다 더 빠르게 그의 머리 속에서 지워졌다.
의식 저편 깊숙이 숨어 있던 죄책감이 그의 회상을 재빠르게 몰아낸 것이다.
담익의 눈빛이 희미하게 흐려져 갔다.
그가 심우를 바라보며 두 주먹을 꼼지락거렸다.
맹렬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여기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의 영역이었다.
담익은 이곳을 지켜야 했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자세를 낮췄다.
휙! 주먹만한 돌이 그의 머리를 노리고 쏜살 같이 날아왔다.
심우는 다급히 머리를 숙였다.
콰직! 돌이 나뭇가지를 부수며 날아갔다. "젠장!" 심우는 속이 바짝바짝 탔다.
분노는 이제 뒤편이었다.
이 기괴하고 추잡한 싸움...
심우가 상상도 못한 싸움이었다.
수풀 속을 오가며 벌인 싸움은 몇 시진을 넘기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지 오래였다.
쉭! 이번에 날아오는 것은 창처럼 끝이 뾰족한 나뭇가지였다. "개자식!" 와직! 우지끈! 심우가 나뭇가지를 쳐내며 주위의 수풀을 닥치는 대로 벴다. "상종할 놈이 아니구나!" 그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심우는 호리(狐狸)처럼 교활하게 공격해 오는 담익을 더 이상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네 놈의 그 더러운 짓거리를 떠벌려 모든 강호인들의 조롱을 받게 하겠다!" 그가 욕설을 퍼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심우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화영에게로 다가갔다.
담익이 수풀 속에서 불쑥 일어섰다.
달이 떠오르자 그의 눈빛은 더욱 번들거렸다.
그가 씩, 웃으며 심우를 뒤따라왔다.
심우는 칼을 고쳐 잡고 담익을 재차 육박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칼을 내렸다.
이렇게 쫓아가다 허탕만 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화영의 옆에 있는 바위에 털썩 엉덩이를 걸쳤다.
담익이 이장 여까지 따라와 그의 앞에 섰다.
심우는 칼을 잡은 손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거리 중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조금 더 지켜보다 결정적 기회를 잡을 생각이었다.
심우는 바위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명색이 화룡대주였다는 놈이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다니...
쯔쯔!" 그가 혀를 차며 조소를 보냈다. "그렇겠지.
필경 제 누이 덕에 화룡대주라는 자리에 올랐을 테니.
남편을 잃은 지 제법 오래 되었다고 들었다.
아마 남자가 그립겠지.
어떠냐? 나에게 소개 시켜 주는 것은...
네 누이를 첩으로 준다면 해륭도의 타수 자리 하나는 보장하지.
해해해!" 심우가 다리를 쭉 뻗었다.
담익의 눈빛이 잠깐 빛을 뿌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원래의 눈빛으로 흐릿해져 갔다. "어미, 아비도 모르는 호로 자식! 네 놈 같은 자식을 낳은 것을 보니 네 어미는 필경 노류장화였을 것이고 아비는 춘풍공자(春風公子)였을 것이다.
이리 와서 내 다리나 주물러라." 심우는 조소를 멈추지 않았다.
흐릿해져 가던 담익의 눈빛이 다시 한기를 뿜었다. "네 사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 사부가 추운객이라 했나? 그 작자도 비루한 칼 하나로 남의 등이나 처먹는... " 담익의 눈이 돌연 붉게 충혈 되었다.
심우의 다음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추운객...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담익의 심장은 터질 듯 했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담익의 눈빛이 야수처럼 희번뜩 돌아갔다.
심우는 담익의 그 같은 변화에 쾌재를 불렀다.
미친 자를 상대로 무슨 격장지계냐 싶었던 그였다.
하지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심우는 그 차에 결판을 보려 했다. "혼자 힘으로 힘들면 어미, 아비, 사부, 동생, 이미 죽은 네 매부까지 다 끌고 오너라! 다 덤빈다고 하더라도 칼은 필요 없겠지." 휙! 심우가 칼을 내던졌다. "크악!" 담익이 괴성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담익이 심우를 찢어 죽일 듯 달려들었다. '걸렸다!' 담익이 코앞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심우가 수도를 번쩍 세웠다.
그의 손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쉭! 홍무(紅霧)가 섬전처럼 담익의 심장을 찔러 갔다.
엄청난 빠르기였다.
그러나 눈이 뒤집어진 담익은 생사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담익의 권장과 심우의 수도가 어울렸다. "큭!" 담익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굴렀다.
심우의 수도는 다행히 담익의 심장을 비켜 가 그의 어깨 근처를 찔러 피를 솟구치게 하고 있었다. '어떻게 배운 무공인데...' 심우는 회심의 절초를 숨겨 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칼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회심의 일격으로도 담익은 쓰러지지 않았다.
심우는 담익의 권장과 부딪히며 생긴 손등의 둔중한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휙! 그가 나려타곤(懶驢打滾)으로 구르는 담익을 쫓아가며 연이어 붉은 손 그림자를 번뜩였다.
파파팟! 심우의 손에서 붉게 치솟은 손 그림자는 삭풍처럼 매섭게 담익을 몰아쳤다.
담익의 육신과 혼은 모두 본능에 의지한 채 였다.
심우의 살수를 피해 몸을 구르던 담익의 눈에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체가 들어왔다.
심우가 내던진 칼이었다. "크앗!" 담익이 맹호출동(猛虎出動)의 기세로 펄떡 뛰며 심우의 칼을 잡아갔다.
심우가 '아차' 하는 마음에 다급히 장영을 뿌렸으나 담익은 이미 칼을 움켜쥔 후였다.
담익의 손과 발은 칼을 쥔 순간,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랜 습관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파파팟! 칼 그림자가 달빛을 휘감으며 심우를 쏘아 갔다.
추운객의 절학, 추운백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펼치는 초식이었기에 위력은 배나 더했다.
찰나간에 승부는 역전됐다.
심우는 자신이 고심해서 배운 절초를 아직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추운객의 무공은 원래 장강삼협 중에서도 으뜸으로 뽑혔었다.
심우가 허둥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상대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는 담익의 도세에 눌려 겁까지 집어먹고 있었다.
곱게 큰 귀공자의 풍모가 바닥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더해서 실전 경험의 부족까지...
파파팟! 그에 반해 담익의 칼은 더욱 빛을 뿌렸다.
사삭! 삭! 스쳐 가는 어떤 것도 그의 칼 아래 무사하지 못했다.
담익은 칼을 휘두를수록 더욱 신명이 나는 모양이었다. "악!" 심우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심우가 이를 드러내며 험악한 인상을 그렸다.
그러나 그 표정은 겁에 질릴 때로 질린 개가 혹시나 상대를 위협해 볼까 해서 짓는 표정 이상은 아니었다.
손 그림자도 점차 힘을 잃어 갔다.
이제 승부는 심우가 해손왕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 못할 정도였다.
이미 기를 모두 뺏겼기 때문이다. '강호에서 저지른 한 번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 더니... ' 심우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담익의 칼 그림자가 거미줄처럼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크억!" 심우는 가슴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 .... " 그 다음 정수리...
팔이 허전했다.
그리고 다리가 허전하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몸은 기울고 있었다.
척주가 뚝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 잠시 찾아 들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같은 시각, 그의 머리도 허공을 날아 몸뚱이와 고통을 공유하지 못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떼굴떼굴! 심우의 머리가 초가을의 바람에 일찍 떨어진 가랑잎 위를 굴러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국부(局部)에서 퍼지기 시작한 쾌감은 그녀의 전신을 들뜨게 했다. "으음...
음... " 결국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신음을 터뜨렸다.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기녀들이 말한 비몽사몽(非夢似夢)을 헤맨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지...
난폭하고 거칠었지만 화영은 좋았다.
오히려 그녀는 심우가 좀 더 거칠게 대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녀가 심우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심우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 어깨를 꽉 눌러 꼼짝 못하게 했다.
아무리 거친 것도 좋지만 이것은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어깨뼈가 부러질 듯 아팠고 등도 아팠다.
돌멩이에 박힌 모양이었다.
순간, 그녀는 문득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었는가도...
심우는 그녀가 딴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더욱 더 힘차게 노질을 했다.
국부에서 전신으로 밀려드는 쾌감에 그녀는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을 놓치지 않았다. '찢겨진 시신을 보고 정신을 잃었었지...
아!' 화영은 비로소 무엇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상황은 정사를 나눌 만큼 한가하지 않았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정말 뜨기 싫은 눈이었다.
의문을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만큼 국부에서 이는 쾌감은 격렬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눈을 떴다. '헉!' 화영이 눈을 치켜 떴다.
산발에 가려진 얼굴...
심우가 아니었다.
그녀의 나신 위에 몸을 꿈틀거리고 있는 자는 산발 괴인이었다. "아악!" 화영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나신을 꿈틀대며 산발 괴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산발 괴인은 화영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더욱 힘차고 빠르게 화영을 공격했다. "아악! 음... " 화영이 공포에 질린 외침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을 터뜨렸다.
산발 괴인은 초원을 달리는 준마였다.
그는 자신의 수욕(獸慾)을 채우기까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 화영은 자신의 내부에서 화려한 폭발을 느꼈다.
그리고 여진이 채 그치기도 전! 가슴에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화영이 힘없는 눈빛으로 산발 괴인을 바라보았다.
야수처럼 번들거리는 눈! 그녀가 자신의 가슴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홍빛 피가 망막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담익은 손바닥 위에 붉고 말랑한 덩어리를 올려놓고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윤기 있게 빛나는 붉고 말랑한 덩어리는 금방이라도 펄떡펄떡 뛸 것 같았다.
그가 그 덩어리를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그의 입에 침이 고였다.
담익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그는 칼을 들었다.
담익은 손바닥에 올려놓은 붉은 덩어리의 끝을 살짝 베었다.
그가 베어 낸 조각을 입에 넣고 씹었다.
물컹한 촉감! 담익은 마치 영약(靈藥)을 삼키듯 입안에 든 조각을 조심스럽게 삼켰다. "컹!" 느닷없이 담익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개 짖는 소리였다.
사실 담익은 알 수 없었다.
그가 개인지 개가 그인지...
담익이 손바닥의 붉은 덩어리에 코를 처박았다.
그는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하듯 핏발 선 눈으로 우걱우걱 핏덩이를 서둘러 씹었다. * * * 대파산(大巴山)은 촉의 잔도가 곳곳에 널려 있는 산이다.
한 때, 통천하를 누비던 양웅은 금사강 수채에 통천하를 내어 준 후, 하릴없이 이리저리 헤매다 대파산의 산줄기까지 이르러 있었다.
투둑! 툭! 툭! 본격적인 가을을 알리는 빗줄기가 산림을 쓸었다. "젠장! 벌써 추위를 느끼다니... " 양웅은 몸을 움츠렸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허물어져 가는 관제묘(關帝廟)의 처마 밑이었다.
그는 비를 피하기 위해 처마 밑을 이리저리 쫑쫑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비를 피하려 해도 듬성듬성 드러난 처마 사이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그의 덩치가 보통 큰가? "에잇!" 양웅은 염왕도를 땅에 쑤셔 박았다.
비속에 고스란히 몸을 맡기고 있는 스스로의 행색에 화가 치밀었다. '천하의 양웅이 이렇게까지 몰락하다니... ' 양웅이 팔뚝으로 눈을 가리는 빗물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해야 하나?' 그가 빗줄기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통천하를 나선 후, 양웅은 그가 머물 적당한 자리를 찾아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늙은 무부(武夫)가 자리 잡을 마땅한 곳은 좀 체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찾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전혀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그에게 신세를 졌던 자들이나 통천하에서 떨어져 나가 장원(莊園)이나 보(堡)를 세운 수하들에게 부탁하면 자리 하나 쯤 못 얻을 그도 아니었다.
하지만 양웅에게는 그런 체면이 없었다.
죽어도 신세를 지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 작은 장원이라도 하나 세워 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장원을 세워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가 배운 것이라고는 고작 싸움질 뿐! 이 나이에 패거리들을 이끌고 싸움이나 하러 다닐 수는 더 더욱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장원을 세울 만한 은자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한두 달 지낼 만한 은자 뿐! 통천하를 해체할 때 모든 재보를 깡그리 수하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능력도 없으면서 수하들에게 은자는 왜 모두 나누어주었어? 나는 수하들에게 은자를 펑펑 나누어주기에 먹고 살 궁리는 따로 해 두었을 줄 알았지!' 연홍의 질책이 매섭게 그의 귀를 때렸다. '맞는 말이다.
먹고 살 능력도 없는 것이 콧대만 높아서... ' 양웅이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그건 그렇고 정말 이 비에 종일을 세워 둘 참인가?' 그가 부서진 벽 사이로 눈을 댔다.
관제묘의 내부는 보기와 달리 깨끗했다.
당연한 일로 그가 머리에 거미줄을 엉켜 가며 반 시진을 청소했기 때문이다.
양웅이 노력한 덕으로 깔끔하게 치워진 관제묘에는 모닥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모닥불에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토끼 고기가 놓여 있었고 그 주위로는 여자의 옷이 치렁치렁 걸려 있었다.
연홍의 옷이었다.
연홍은 속살을 드러낸 채 앉아 토끼 고기를 구웠다.
그가 애써 잡은 고기였다.
양웅은 문을 박차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연홍에게 가까이도 오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그였다.
양웅은 맥빠진 표정으로 벽 틈에서 눈을 뗐다.
흰머리가 희끗 해도 그는 나이를 몰랐었다.
그런데 늙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천화인이라는 애송이에게 패한 후였다.
갑자기 그 싱싱하던 하초가 말을 듣지 않았다.
밤이 무서웠다.
연홍을 멀리했다.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아 주지 않는다고 가랑이를 결단코 열어 주지 않던 연홍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그에게 매달렸다.
연홍의 추근거림을 이기지 못해 용기를 내어 몇 번 시도를 해 보았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관제묘를 깨끗이 청소한 후, 연홍을 불렀었다.
관제묘로 들어선 연홍은 비에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옷을 벗었다.
뽀얀 속살...
양웅은 웬일로 불쑥 그것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됐다!' 그는 쾌재를 불렀다. "해해해! 연홍!" 그가 다짜고짜 연홍을 덮쳤다. "왜 이래?" 연홍이 그를 때리며 투정을 부렸다.
금방 눈가가 촉촉이 젖는 것을 보면 연홍도 어지간히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양웅은 불면 날아갈새라 연홍을 한참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기세등등하게 입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놈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가!" 연홍이 씩씩대며 소리쳤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참괴함...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관제묘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다!' 양웅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먹고사는 문제는 별 대수가 아니다.
화부(火夫)를 한다고 하더라도 연홍을 먹여 살릴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문제였다.
불안했다.
연홍이 언제 훌쩍 떠난다고 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독수공방을 못 참겠다는 데야...
양웅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피 끓는 젊은 여인을 조롱 속에 가두어 둘 위인은 못 되었다. '그렇지.
내가 먼저 보내 주어야 한다.
연홍을 잡고 있는 것은 추악한 나의 욕심일 뿐이야.' 양웅은 쓴웃음을 흘렸다. '빈손으로 보내 줄 수는 없고...
은냥이나 장만해 주어야 하는데.
어미, 아비도 없는 계집이라 은냥이라도 없으면 실컷 괄시를 받겠지.
그렇지 않으면 어디 노류장화로 떠돌던가.' 그는 딸을 시집 보내듯 연홍의 이후를 생각했다.
생각은 언제나 그와 같았다.
연홍을 보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맹세까지 했다.
하지만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연홍을 보내고 나면 무슨 낙으로 사나?' 양웅이 이마에 주름살을 그렸다.
투둑! 툭! 툭! 그 사이에도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으! 춥다!" 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산 속이라 추위는 더한 듯 했다. "으헛!" 양웅은 염왕도를 뽑아 들었다. "핫! 핫! 핫!" 그가 팔로(八路)를 밟으며 염왕도를 번뜩였다.
복잡한 생각도, 추위도 잊기 위해서였다.
그가 흙탕물을 질벅이며 한바탕 검무를 출 때였다.
삐꺽! 관제묘의 문이 열렸다. "뭐해요?" 내고만 달랑 입은 연홍이 문 앞에 서서 물었다. "음...
저...
그냥 있기에 심심해서... " 양웅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런 곳에 쓸 힘은 펄펄 넘치는 모양이죠?" " .... " 양웅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 오셔요!" 연홍이 그를 불렀다.
양웅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한 걸음으로 관제묘에 들어섰다.
연홍이 그의 앞에 섰다.
그녀가 빗물이 줄줄 흐르는 양웅의 옷을 벗겨 불 옆에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른 천으로 양웅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연홍이 양웅을 불 옆으로 이끌었다.
연홍이 불쑥 호로병을 내밀었다.
양웅이 주저하며 그녀가 내미는 호로병을 받았다.
연홍이 그의 곁에 바짝 기대앉았다.
생각 밖의 행동이었다.
지나치다 싶을 연홍의 애교에 양웅은 불안했다.
이런 날이면 언제나 연홍은 그가 견뎌 내기 힘든 일을 시켰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했죠?" " .... "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게 부부라 했는데... " 연홍이 살포시 말했다. "고기가 다 익었을지 모르겠네?" 그녀가 단도로 토끼 다리 살을 발랐다. "드세요." 그녀가 토끼 고기를 양웅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양웅은 콧등이 찡했다.
나중에 연홍이 무슨 소리를 할 망정 그 순간만은 쉽게 감동하는 그였다.
자칫하면 눈물이라도 보일 것 같아 양웅은 허겁지겁 술을 들이켰다.
연홍도 토끼 살을 한 점 벴다. "양(陽) 랑(郞), 백사(白沙)에 한 번 갔으면 해요." 그녀가 토끼 고기를 깨작거리며 말했다. "백사에는 왜?" 양웅이 토끼 다리를 통째로 쭉 찢으며 물었다. "그곳에 신묘한 의생(醫生)이 있다고 해요.
오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예요." "의생?"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보양제(補陽劑)라도 몇 첩 지어서... " " .... " 연홍의 애교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양웅이 물고 있던 토끼 고기를 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진 것이다. "그까짓 벽촌(僻村) 의생 놈에게 무엇을 기대할 게 있다고?"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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