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견혼수라는 자가 미간을 좁혔다. 사실 추운객은 이번 춘절의 만회까지 그가 머물고 있는 청류동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양웅과 견혼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추운객을 만나기 힘들다면... 수로연맹에 혹시 하는 사람이 있소?" 견혼수가 물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나 처음 만난 자에게 다짜고짜 추운객을 찾아라 할 수는 없었다. "친한 자는 없어도 웬만한 자는 다 알지." "그렇겠지. 통천하의 채주께서 수로연맹의 사람들을 모른대서야." "나를 알아?" "팔척 거한에 염왕도! 나도 장강의 물밥을 먹은 사람이오. 어찌 통천하의 대 호걸을 모르겠소. 당신의 호쾌함을 알기 때문에 또한 부탁을 하려는 것!" "해해해!" 양웅은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채주들은 모두 사욕에 물든 자들이오. 비밀을 알면 그 비밀을 무기로 어떻게 제 이익을 늘일까만 생각하겠지. 그리고 총채의 수하들은 적과 아를 구분할 수 없으니... 그들 외에 혹시 장강에 아는 사람이 있소?" "채주들 외에는... 마타룡!" 양웅이 문득 생각난다는 듯이 소리쳤다. "위 공자? 위 공자께서 돌아오셨소?" 견혼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돌아왔어. 지금 중원은 그 자로 떠들썩하지." " .... " 견혼수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맺혔다. 마타룡! 장강을 폭풍으로 휘몰아치는 자. 피의 복수를 위한다면 추운객보다 마타룡이 백 배 나았다. "추운객 어른을 만나기 힘들다면... 처마 밑의 서신을 위 공자에게 전해 주시오." 그가 한광을 쏟으며 말했다. "전해 주는 일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도대체 무슨 일로..." 추운객과 마타룡이 거론되는 것을 보니 심상치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양웅은 직감했다. "미안하오. 수로연맹 내부의 일이라... 말하지 못하는 고충을 이해해 주시오." 견혼수의 눈빛이 다시 빛을 잃어 갔다. 할 이야기를 모두 끝낸 후라 그의 목숨은 급격히 명부로 치달았다. "이봐! 이봐! 사실 나는 보양제를 얻기 위해... 양기(陽氣)가 부족해서 밤마다... 처방은 이야기 해 주고... " 양웅이 견혼수의 어깨를 흔들었다. '젠장! 죽어 가는 사람에게 지금 무슨 짓이야?' 그가 견혼수의 어깨에 손을 떼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견혼수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렸다. 순간, "이 더럽고 추악한 것!" 견혼수가 양웅이 놀랄 정도의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세월을 거스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얼마나 추잡한 짓인 줄은 나도 안다. 하지만 어쩌겠어. 사는 낙이 그 짓인데." 양웅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견혼수의 고함을 지레짐작으로 자신에 대한 욕으로 듣고 있었다. "아이고! 하나 같이 되는 일이 없구나. 이 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연홍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가 탄식을 터뜨렸다. "어떻게 되었어요?" 연홍이 뽀르르 달려오며 물었다. "죽었어." "왜 죽였어요? 그렇게 그 의생이 싫던가요?" 연홍이 쌍심지를 치켜뜨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구." 양웅이 연홍의 대책 없는 고함에 황당해 했다. "어떻게 찾아왔는데." 연홍은 크게 낙담했다. 그녀는 견혼수라는 자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양웅이 머리를 긁적이며 초옥의 처마 밑으로 갔다. "무엇이 들어 있다고?" 그가 처마 밑을 더듬었다. 처마 밑에는 견혼수의 말대로 서신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뭐예요? 혹시 그 작자가 죽기 전에 처방전을?"" 연홍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왔다. 양웅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뭔지 모르겠다. 그 의생이라는 자가 이것을 수로연맹에 전해주라 하던데." 그가 서신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수로연맹? 그딴 자들의 심부름을 왜 들어요?" 연홍이 독살스럽게 소리쳤다. 천화인은 연홍의 오라버니인 식인랑을 죽였다. 그리고 수채도 빼앗았다. 따라서 그녀는 금사강이 속해 있는 수로연맹 전체에 이를 갈았다. "중요한 일 같아서... " "그자들이야 중요하든 말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에요?" 연홍이 서신을 뺏어 들었다. 그녀는 서신을 찢으려 했다. "어! 어! 안돼!" 양웅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실랑이를 벌였다. "이거 못 놔! 원수도 못 갚아 주는 주제에 적의 심부름까지... " 그녀가 양웅의 손목을 깨물었다. "악!" 양웅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펄떡 뛰었다. "연홍, 제발... 죽음으로 맡긴 서신이야. 중요하지 않다면 내가 왜 이렇게 하겠어. 그리고 나는 그자와 이미 약속을 했어. 서신을 전해 주겠다고. 강호인들에게 약속은 천금(千金) 같이 중요하다구. 뿐만 아니라 서신을 전해 줘야 할 사람이 누군지 알아? 마타룡! 나의 생명의 은인이야." 그가 우는소리를 냈다. "흥!" 그러나 연홍은 양웅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서신을 비틀었다. 서신이 반에 반 정도 찢어졌을 때였다. 무슨 생각인지 연홍이 서신을 찢는 것을 멈추었다. "정말 중요하다고 했어요?" "물론! 죽음으로 맡긴 서신이라 했잖아!"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 연홍이 서신을 펼쳤다. 서신에는 많은 글자가 적혀 있지 않았다. 짤막짤막한 몇 개의 문장뿐. "음... " 연홍이 아미를 찌푸렸다. 까만 것이 글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무슨 뜻이에요?" 그녀가 양웅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양웅이 서신을 들었다. "중요한 이야기야." 그가 서신을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무슨 뜻이냐니깐?" "중요하지. 아무렴!" " .... " 연홍이 반(半) 눈으로 양웅을 바라보았다. "그 나이까지 무엇을 했어요? 채주라는 작자가 글자 하나 읽을 줄 모르고. 이리 줘요!" 그녀가 양웅에게서 서신을 뺏었다. "가요!" "어디를?" "글을 읽어 줄 유생(儒生)이라도 찾아봐야 할 것 아니에요?" "내용을 알아서 무엇하게? 그리고 그 서신은 추운객이나 마타룡에게만 전해 줘야 할 기밀 문서라구." 연홍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서신을 소매에 넣고 바쁘게 걸어갔다. * * * 각진 얼굴, 딱 벌어진 어깨, 외골수라는 인상을 지울 길 없는 초로인이 음풍곡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민(李珉)! 한수의 채주로 이만의 아버지인 그였다. 이민의 뒤에는 형형한 안광을 빛내는 백 여명의 무사들이 서 있었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이민이 특별히 가려 뽑은 한수의 정예들이었다. 그리고 이민의 주위에는 한수 무사들의 복장과는 다른 십 여명의 무사들이 더 있었다. 상강의 무사들! "저희들이 조사하기로는 음풍곡을 지키는 놈들은 저들 외에 더 없습니다." 이민에게 말을 거는 자는 상강 수채의 총관을 맡고 있는 나기(羅基)라는 자였다. 형산은 상강의 관할 하에 있는 곳이라 상강의 담 채주는 이번 이만을 구출하는 싸움에 제법 관심을 가져 주는 척 하고 있었다. 남뇌로와의 싸움 준비만 아니라면 상강의 전 힘을 기울여 도와주었을 것이라며 생색도 냈다. 음풍곡에는 담 채주의 누이인 담향도 잡혀 있다. 이민은 담향을 젖혀 두고 자신의 아들인 이만에게 관심을 더 보이는 담 채주가 한 편으로는 우스웠다. 그러나 어쨌든 담 채주는 음풍곡의 사정부터 길 안내까지 세세한 모든 것을 챙겨 주고 있었다. 가릉강의 도 채주도 위로의 서신을 보내주었고 진강의 오 채주도 선전(善戰)을 당부했다. 금사강의 천 채주는 만약 이만을 구출하는데 실패하면 황사로를 박살낸 후, 곧장 한수를 지원해 주러 오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민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어려울 때 느끼는 한 손의 도움은 얼마나 큰가? 더구나 이만은 그가 장중보옥(掌中寶玉)으로 아끼는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에 반해 총채는... 이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머리를 숙이기 싫어 총채에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었다. 그의 사정을 안다면 말을 하지 않아도 적당한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총채로부터는 고작 몇 마디의 위로 서신이 전부였다. 만로방과의 일전을 앞두고 물론 무사들을 분산시킬 능력이 없을 것이다. 파양호에서 상당한 손실도 입었었고... 그리고 따지고 들자면 형산의 싸움은 그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개인적인 싸움에 불과하다. 개인의 일에 일일이 총채의 힘을 동원할 수 없는 일! 십분 총채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사대행회와의 싸움에서 한수는 빼 주었으니 오히려 고마워 할 만도 했다. 하지만 제 발등의 불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마음! 총채를 대하는 이민의 심사는 엄정함을 잃고 꼬이고 있었다. 이민은 음풍곡에서 시선을 뗐다. "고작해야 이십 여명... 별반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놈들이다. 그럼 저 안에 무엇인가 있겠군." 그가 상강의 총관 나기에게 말했다.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곳으로 불렀겠지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만한 크기의 땅에 매복이 숨어 있으면 얼마나 숨어 있겠습니까?" 나기가 장방형의 분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산줄기 곳곳에 무사들을 숨겨 두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민이 좌우 산을 가리켰다. "현지 지리에 정통한 초부들까지 동원 만로방 놈들의 종적을 염탐했습니다. 저 골짜기와 산에는 만로방 놈들이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나기가 단언했다. "그렇다면 결국 기관으로 상대하겠다는 말인데... " 이민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학윤( 倫)!" 그가 외당당주를 불렀다. 땅딸한 체구의 중년인이 이민의 앞에 섰다. "학윤, 네게 수고를 당부하려 한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외당당주 학윤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삼십 여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좌측 산을 타고 올라 저 분지 주위에 포진하라. 내가 저 앞에 있는 놈들을 쓸어버릴 테니 그것을 신호로 분지로 나아가라. 놈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물론 위험한 일이지. 폭약을 설치해 두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겠느냐?"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전격적으로 놈들에게 공격을 가하면 놈들이 공자께 위해(危害)를 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먼저 타협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외당당주 학윤이 우려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타협을 원했다면 먼저 조건을 제시해 왔겠지. 하지만 주황은 일절 그런 마음을 비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나오는 가를 보고 협상을 요구할 생각인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강하게 나가야 한다. 처음부터 끌려 다니면 끝까지 끌려 다니게 된다. 협상은 놈들에게 우리의 힘을 명확히 인식시킨 후, 시작해도 늦지 않다. 주황은 무지한 놈이 아니므로 만에게 위해를 가해 나의 화를 더욱 돋구게 할 짓은 않을 게다." 이민이 고집스런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가라!" 그가 명을 내렸다. 학윤이 읍을 한 후, 수하들 앞에 섰다. 그가 이삼십 여명의 수하들을 추려 우회로(迂廻路)로 산길을 올랐다. 이민은 칼을 풀었다. 그가 수하들을 두 패로 나눠 만로방의 수하들이 히히닥거리고 있는 분지의 입구를 은밀히 나아가도록 했다. 이민은 달랑 두 명의 수하만 대동한 채 마지막으로 발길을 옮겼다. "학 당주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만약 놈들이 이 공자를 인질로 삼아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강의 총관 나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 .... " 이민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만로방이 아들을 인질로 내걸 조건은 너무도 뻔했다. 수로연맹과 만로방의 일전에 한수는 방관자로 남는 것! 이민으로서는 아들을 돌려 받는 것을 포기해야 할만큼 어려운 조건임이 분명했다. 만로방의 일전에 빠진다는 것은 수로연맹의 맹원(盟員)임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 그것은 곧 장강에서 한수라는 수채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들과 수로연맹! 아무리 생각해도 이민은 선택할 수 없었다. 그저 부딪혀 볼 뿐... 이민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그 같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민은 자신의 아들을 만로방의 가장 큰 인질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황은 이만과 담향은 인질로도 생각지 않았다. 산고! 주황의 목적은 오로지 마타룡을 죽이는 것뿐! 형산을 찾아 올 한수와 상강은 덤으로 피해를 받으면 좋은 일이고... 가을빛은 화려함을 더해 갔으나 음풍곡을 부는 바람은 언제나 일정했다. 어쩌면 음풍곡을 부는 바람은 겨울에는 따뜻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음풍곡의 바람은 아직은 찼다. 산고는 벽호(壁虎)처럼 바위에 앉아 가을볕을 쬐고 있었다. 며칠을 무슨 생각으로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괴노(怪老)들은 정체를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을 백오, 적오, 황오, 삼악오라고 밝혔다. 당연히 그녀는 삼악오의 내력을 몰랐고 알 생각도 없었다. 한동안은 삼악오들과 싸운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싸움에 곧 싫증을 느꼈다. 삼악오는 그녀를 보면 피하기만 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얼굴에서 피가 나도록 두들겨 맞아도 묵묵히 있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쩔쩔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산고는 삼악오의 돌변한 태도를 알지 못했다. 이유를 찾지도 없었다. 단지 적의(敵意)를 터뜨릴 상대를 잃어 허전함만 더할 뿐. 모든 것이 귀찮았다. 마음 속의 울분은 심연의 저편으로 가라앉고 그녀는 황량한 바닥을 걸었다. 음풍곡에는 이제 그녀를 잡을 사람이 없었다. 삼악오라는 괴노들은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고 만로방의 무사들은 곡구(谷口) 외에는 경계를 서지 않았다. 산줄기를 타고 훌쩍 떠나면 그만인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도 귀찮았다. 음풍곡을 떠나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영남의 그 바닷가? 그곳은 산공의 체취가 듬뿍 베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 더욱 갈 수 없는 곳! 어릴 때 떠나 온 남만의 고향은 기억에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산고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해해해!" 그녀가 돌연 헤픈 웃음을 흘렸다. 산공을 따라 중원에 온 이후, 습관이 되어 버린 웃음이었다. 뱀의 꼬리를 잡고 놀고 있던 적오, 소도(小刀)로 목각 인형을 만들던 황오,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어지럽게 적어 놓고 고심하던 백오, 그들이 일제히 그녀의 웃음에 고개를 돌렸다. 산고는 맹하니 삼악오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삼악오들은 불장난을 하다 들킨 아이들처럼 찔끔하여 분주히 시선을 내리깔고 자신의 일에 매달렸다. "해해해!" 산고는 다시 웃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작 음풍곡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파양호에서 겪은 두 번은 쓴 경험으로 그녀의 마음은 좌절의 바닥을 걸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는 아직도 조그마한 희망이 있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산공이 나타나리라는 희망! 그 희망 때문에 그녀는 음풍곡을 벗어나지 못했다. 챙! 챙! 챙! "크악!" "악!" 한적하던 음풍곡은 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으로 삽시간에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나무에 기대 먼 산을 바라보던 산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굴에서 이만과 담향이 뛰쳐나왔다. 삼악오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분지로 모여들었다. 산고의 가슴은 뛰었다. 그녀가 고개를 뽑았다. 나무 그늘에 가려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곡구의 정경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곡구로 뛰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발길을 멈추었다. 좌절의 고통 속에 여자를 배워 버린 그녀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마음! 산고는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곡구에서 올라 올 자를 기다렸다. 가슴은 더욱 두근거렸다. 그때였다. 좌측 산을 타고 한 무리의 인영이 우르르 쏟아졌다. "학 당주!" 이만이 반가움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소리쳤다. 그녀의 맥이 한 풀 빠졌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자들은 이만을 구하기 위해 온 한수의 무사들인 모양이었다. 한수의 무사들이 왔다는 것은 자신들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이 수로연맹 전체에 알려졌다는 증거! 곡구를 바라보는 산고의 기대는 다시 커졌다. "소채주! 채주께서도 오셨소!" 한수의 외당당주, 학윤이 이만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나는 괜찮소! 먼저 저 늙은이들을 죽이시오!" 기세가 살아난 이만이 삼악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삼악오는 지금 일어나고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산고의 눈치만 살폈다. "적들은 더 없소?" 학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저 늙은이! 저 늙은이들밖에 없소!" 이만이 곡구로 내빼며 소리쳤다. 담향도 이만을 따라 황급히 달렸다. 그제야 삼악오가 움직였다. "어딜 가?" 적오가 단번에 이만과 담향을 따라잡았다. "너희들은 대사께서 보낸 사람이 아니잖아. 주황은 네놈들을 끝까지 잡아 두라고 했다고." 적오가 이만과 담향의 머리카락을 잡고 개구리처럼 내던졌다. "아이고!" "아얏!" 이만과 담향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굴렀다. 외당당주 학윤의 안색이 변했다. 이만과 적의 괴노와의 거리는 물경 오륙 장여! 그 거리를 적의 괴노는 단숨에 날아 이만과 담향을 나포(拿捕)했었다. '예사로운 늙은이들이 아니다.' "조심하라!" 그가 수하들의 경각심을 돋군 후, 삼악오를 포위해 갔다. 학윤을 비롯한 한수의 무사들이 원형진(圓形陣)을 짜고 삼악오를 공격했다. 학윤이 거느린 무사들은 한수의 정예! 파파팟! 흙먼지와 함께 날카로운 경기가 삼악오를 휘몰아쳤다. 하지만 삼악오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타닥! 탁! 탁! 그들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칼 그림자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막아내며 산고만 바라보고 있었다. 성질대로 하자면 한수의 무사들을 벌써 피떡으로 만들었을 텐데 산고의 눈치를 보느라 살기를 참고 있음이 역력했다. 그들이 산고만 바라보며 전전긍긍할 때였다. 산고의 눈빛이 빛났다. 한 떼의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산고의 눈동자가 유심히 그들을 쫓았다. 순간,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산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해해해! 원래 꾸물거리는 성격이니... ' 산고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나 한 떼의 무사들이 분지에 들어서기까지도 산공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산고는 배반감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빛이 당장이라도 핏물을 떨어뜨릴 듯 붉게 변했다. "해해해! 해해해!" 그녀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사방 천지가 암흑(暗黑)이었다. "죽인다! 해해해!" 그녀가 휘청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들었어?" 기다렸다는 듯이 적오가 물었다. "무엇을?" 황오가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두 자루의 칼을 쳐내며 다시 물었다. "죽인다고 했어!" "그래? 그럼 죽여야지!" 적오와 황오가 새가 날개짓 하듯 팔을 쭉 폈다. "죽어라!" 그들이 손바람을 일으키며 학윤과 수하들을 쓸어 갔다. 삽시간에 검은 손 그림자가 사방을 압도했다. "으악!" "컥!" 한수의 무사들이 삼악오의 공세에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졌다. 학윤도 일 장을 얻어맞고 비칠거리며 물러섰다. 수하들을 이끌고 학윤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이민이 주춤했다. 가공할 공세! 그는 눈앞의 상황에 아연실색(啞然失色)했다. '누구인가?' 의문과 동시에 이민은 신형을 날렸다. 개구리처럼 너부러져 있는 이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괴노인들의 정체는 일단 아들을 구해 놓고 생각해 볼 일이었다. 그가 막 이만의 팔을 잡을 때였다. "어딜!" 검은 장영이 태산압정(泰山壓頂)으로 그의 머리를 눌러 왔다. "헉!" 이민이 신음을 터뜨리며 다급히 물러났다. "누구냐?" 그가 자신의 애도(愛刀) 분광도(分光刀)를 번뜩이며 물었다. "낄낄낄! 황오, 이놈은 제법이야." 이민을 공격하는 자는 적오였다. 그가 씨익, 웃으며 소리쳤다. 파팟! 팟! 이제야 제법 그럴듯한 상대를 만난 적오의 장영이 기세를 뿌렸다. 이민은 과연 대강의 채주다웠다. 찌르고, 자르고, 베고, 노도(怒濤) 같이 휘몰아치는 이민의 공격! 엽광도 이민에게는 한 수 실력을 접어야 함이 분명했다. 그러나 상대는 전 전대의 고수, 삼악오! 천외천(天外天)의 무학을 자랑하는 소림, 무당의 고수들도 감히 쉽게 상대할 수 없었던 자들이 그들이었다. 십여 합도 지나지 않아 이민의 분광도는 묵빛 장영에 빛을 잃었다. 몇 초만 더 주고받으면 장영(掌影)에 갇혀 달아날 기회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뒷걸음질을 칠 수가 없었다. 아들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채주의 위기를 본 한수의 무사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었다. 학윤이 거느린 무사들은 모두 쓰러지고 없었다. "우히히! 신난다. 백오, 이렇게 싸우는 것이 몇 년 만이야?" 황오가 뒤늦게 달려드는 무사들을 쓸어 가며 소리쳤다. "일 년!" 백오가 엄숙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도 황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으악!" "악!"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수하들의 응원으로 잠시 한숨을 돌린 이민이 이마를 찌푸렸다. 순간, 그의 안색이 변했다. 황오! 백오! 괴노들이 저희들끼리 부르는 호칭! 전혀 기억에 없는 별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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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은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랐다. 이민의 생각은 한 때, 흑살장으로 천하를 시끄럽게 하던 사파(邪派)의 고수에 머물고 있었다. 이민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음풍곡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