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 " 말문이 막힌 오유는 헛기침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태부인이라는 여자는 지금 궁지에 몰려 있소. 더 이상 쫓으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지. 쌍십절의 만회는 우리가 승리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만 만족합시다." 도연오는 짐짓 오유를 달랬다. "승리했다는 것이 확실하오?" 이민이 되물었다. "만회를 서둘러 끝낸 것만 보면 모르오. 기세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태부인이라는 여자가 이번 만회를 순순히 넘겼겠소? 솔직히... " 도연오가 잠시 말을 끊으며 눈빛을 빛냈다. "관건은 언제나 마타룡이었지. 놈이 변했다는 이런저런 증표를 듣고도 나는 마음을 놓지 못했소. 하지만 방금 태부인과 주숙예, 장능의 표정을 보니 마타룡에게 문제가 있긴 있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태부인을 비롯한 총채 수뇌부들은 낙담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소. 그들이 낙담하고 있는 이유야 뻔하지 않소." 도연오는 타심통까지 익히지는 못했지만 신언(身言)으로 사람의 속마음을 읽어 내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실 천태림 등의 마음도 마타룡의 진위를 의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도연오가 마타룡의 변화를 끊듯이 확인해 주자 천태림 등은 기꺼운 마음을 감출 길 없었다. "자! 모두 만로방과의 일전에 대비합시다. 이제야 말로 정말 우리 대강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인 것 같소. 총채주의 자리야 순리대로 돌아갈 테고.... " 도연오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천태림 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나중에 봅시다." 그들이 소매를 휘적이며 연무장에 도열한 각자의 수하들을 향해 걸어갔다. 도연오는 후미에 처져 그들을 뒤따랐다. "타룡은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술수를 자랑하는 기물(奇物)…… 나는 타룡에 대한 의심을 풀어 본 적이 없소. 설혹 변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변할 수 있는 자는 나중에 다시 변할 수도 있지."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천태림 등은 발길을 멈추었다. 그들이 미간을 좁히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중천에서 내리쬐는 가을 햇살은 눈이 부시도록 투명했다. 그 햇발 속으로 채주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창백한 이마, 피로에 지친 표정…… 담청은 창에 기대 뿔뿔이 흩어지는 채주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위세를 부리며 걷고 있는 오유, 옹골찬 기상을 발걸음에도 나타내는 천태림, 산책을 하듯 느린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도연오…… 담청은 울컥 가슴에서 불덩이가 치솟았다. 핏덩이로 치솟은 불덩이는 전신을 데워서 태워 버릴 것 같은 증오와 분노였다. "망할 노물들……" 그녀의 입에서 신음 섞인 욕이 흘러나왔다. 충혈된 눈은 햇발 속에 더욱 붉게 타올랐다. 무엇인가 손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그녀였다. 쌍십절의 만회! 얼마나 기다려 왔던 날인가? 그녀는 믿었었다. 쌍십절의 만회가 대강의 노물들을 몰아칠 통쾌한 날이 될 것임을……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쫓기듯, 쫓기듯 서둘러 산회를 선언했었다. 분노와 증오의 회오리 속에 담청은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격정을 주체하지 못해 지쳐 갔다. 촤악! 담청은 신경질적으로 차양을 내렸다. 그녀는 태사의를 향해 걸어갔다. 몸이 천근 만근이라 태사의까지 걸어가는 데도 그녀의 이마에서는 땀이 솟구쳤다. 털썩! 태사의에 앉았을 때는 몸은 만 장 심해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머리를 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승전가(勝戰歌)를 부를 때가 엊그제였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민강!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호반 영체의 권속(眷屬)들…… 그들은 만로방과 화해를 선언할 때도 줄기차게 그녀를 괴롭혔었다. 찌지직! 담청의 날카로운 긴 손톱이 단도처럼 예리하게 태사의의 모피를 찢었다. 대강주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이제는 한 사람에게로 치닫고 있었다. 새벽! 투명한 햇살이 희뿌옇게 물상을 밝힐 때까지 그녀는 뜬눈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오지 않았다. 담청은 배신의 아픔을 잘근잘근 씹었다. 생각하니 그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의 이치는 주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물며 자신은 그를 위해 아무것도 주지 않았었다. 그러나 주고 주지 않음을 떠나 그는 당연히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해왔고, 장강으로 귀환한 후에도 그렇게 할 것임을 눈빛으로 약속했으므로…… 알고 있다. 떠들지 마라. 막연한 약속에 대한 기대로 모든 대가를 바라고 있음이 얼마나 간교한 행위인가를…… '하지만 무일 오라버니, 당신은 알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급했는가를…… 사면의 적들과 홀로 분투하던 때의 고통을……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의 영원한 연인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치사하게 달라붙지 않았을 것이다.' 담청의 두 눈에서 한광이 쏟아졌다. 그녀는 소매에 얼굴을 파묻었다. 되씹으면 되씹을수록 자신의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감정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패배를 자인(自認)하는 것…… 잠시 모든 생각을 접고 평상심을 찾아야 했다. 담청은 눈을 감았다. 해가 짧아졌는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둑했다. 잠깐 동안인 듯했는데…… 그녀는 면경(面鏡)을 꺼내 얼굴을 비췄다. 심력을 너무 쏟아 잠깐 사이에 호호백발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기 때문이다. 까맣게 빛나는 머리칼, 윤기는 덜 했지만 얼굴도 아직을 팽팽했다. 담청은 얼굴에서 면경을 떼며 피식 웃었다. 이 순간에도 굳이 젊음을 확인하려 드는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담청은 면경으로 태사의를 때렸다. 딱! 딱! 딱!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수룡채를 공허하게 울렸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담청은 묻고 있었다. 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위무일을 찾아가 통사정을 해서라도 다시 한 번 기대어 보는 것! 아니면 먼 곳의 우군을 불러들이든가. '어떻게 할 것인가?' 딱! 딱! 딱! 담청은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은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가 숨기고 싶었기 때문! 왜냐하면 일을 결정하는 데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킬 수는 없었다. 무슨 사적인 감정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담청은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것을 수치스러운 감정으로 생각했다. 의지할 필요가 있다면 의지할 계획을 짰다. 그러나 지금은 계획조차 없이 무조건 기대려 하고 있었다. 일이 힘들면 힘들수록 일을 힘들게 만드는 그 사람에게 더욱 기대려하는 것이 담청의 감정이었다. 활화산처럼 치솟는 배신에 대한 분노, 지친 몸을 눕힐 넉넉한 자리에 대한 그리움…… 담청의 감정은 두 마리 미친 말들로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스러움을 뚫고 결국 그녀의 가슴에 먼저 안착한 말은 후자였다. '한 번만 더……' 그녀는 지친 몸을 태사의에 기대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엽광은 언덕을 단숨에 뛰어오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비수로 찌르는 듯한 다리의 통증을 참기 위해서였다. "죽일 년……" 엽광은 다리를 주무르며 욕설을 내뱉었다. 산고의 칼에 관통된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솔밭 사이를 걸었다. 두세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어갈 만한 크기의 샛길이었다. 샛길 사이로 펼쳐진 솔밭은 그와 각 선주들이 영채의 수하들을 단련시키던 곳이다. 지난번에 영주와 왔을 때는 밤중이었고 호변을 따라왔으므로 이곳을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소나무 이곳저곳에 ㄱ힌 칼자국을 보는 엽광의 심정은 남달랐다. 그 소나무들 중에는 전임 영주 단심호가 사대선주로 무공을 높이기 위해 직접 검무를 펼쳐 보였던 자국도 있었다. 엽광은 괜히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참으려 애썼다. "영주, 대부인, 누선주, 몽충선주, 유정선주…… 이제 안심하고 잠드시오. 신임 영주의 무위를 보지 못했소? 원수의 목은 곧 동강날 것이오." 그가 머리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엽광은 걸음을 빨리 했다. 송림 뒤로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다. 호반 영채의 울타리가 되어 주던 곳! 대나무 숲 사이로 펼쳐진 것은 이제 웅장한 전각들이 아니라 초라한 몇 채의 목채뿐이었다. '하빈, 개자식! 아무리 영주께서 영채의 증축을 크게 하지 말라고 했기로서니……' 엽광은 대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소택(小宅)에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저러나 알 수 없군. 왜 쌍십절의 만회도 거부한 채 돌연 영채로 귀환했는지.' 그 역시 위무일의 돌연한 변화를 알지 못했다. 단지 천화인으로부터 위무일이 영채에서 자신을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급히 왔을 뿐! 대나무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엽광은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긴장된 표정으로 쌍수도를 잡아 갔다. 파파팟! 대나무 숲에서 들려 오는 소리가 파공음이었다. 엽광은 그 소리가 무엇에서 나는 소리인지 단번에 맞추었다. 날카로운 칼이 바람을 가르며 내는 소리…… 엽광은 대나무 숲을 향해 쏜살같이 신형을 날렸다. 타탁! 탁탁탁! 대나무 숲에서는 서너 개의 인영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엽광의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영채의 뒤뜰에서 어지럽게 날뛰고 있는 인영들은 그의 눈에 너무도 익은 자들이었다. 산고! 그리고 죽었다던 삼악오! 산고는 삼악오를 상대로 연신 협도를 날리고 있었다. 엽광의 신형이 빳빳하게 굳었다. '영주는……' 영채의 뒤뜰을 삼악오가 멋대로 날뛰고 있다는 것을 영주에게 어떤일이 있다는 증거! 엽광은 앞이 캄캄했다. "찢어 죽일 놈들!" 그가 천둥 같은 노호를 터뜨리며 쌍수도를 뽑았다. 그의 쌍수도가 앞뒤 가리지 않고 삼악오를 쓸어 갔다. "이건 뭐야?" 삼악오가 엽광의 흉흉한 기세에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안광을 번뜩였다. 그들이 엽광을 향해 흉수를 날리려 할 때였다. 날렵한 인영이 먼저 엽광의 칼을 받아 나갔다. "비켜!" 삼악오에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가는 자는 산고였다. 챙! 엽광의 쌍수도와 산고의 협도가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엽광의 눈이 찢어졌다. 방금까지 삼악오를 상대하던 계집이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다니…… "삼악오와 어울려 다니더니 네년까지 미쳤느냐? 영주는?" 엽광이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산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흘렸다. 파파팟! 그녀의 칼이 쌍수도를 타고 흐르며 성난 뱀처럼 엽광의 요혈로 달려들었다. 산고의 칼끝에서 느껴지는 매서움은 예전과는 다른 천양지차였다. "헛!" 엽광은 헛신음을 터뜨리며 다급히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선수로 승기를 잡은 산고는 엽광을 협도의 그늘 속으로 몰아 갔다. 파팟! 팟! 세우(細雨)처럼 부드럽고 가늘게, 때로는 뇌전처럼 빠르게…… 산고의 협도는 엽광을 사면초가로 몰아갔다. "이 계집이!" 엽광은 고함을 지르며 쌍수도에 쏟는 힘을 배가했다. 그러나 종내 그는 반경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아무리 선수를 빼앗겼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고전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죽기 살기로 달려들지 않으면 상황만 더 나빠질 뿐이라는 것을 엽광은 깨달았다. 그가 흉광을 빛내며 쌍수도에 전력을 쏟았다. 엽광은 똬리를 튼 뱀처럼 몸을 납작하게 낮추며 산고의 빈틈을 노렸다. 동패구상이 되든 일도양단으로 결판을 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그만!" 나직한 목소리가 대나무 숲을 울렸다. 천지를 난분(亂分)하며 치닫던 산고의 협도가 갑자기 그림자를 잃었다. 엽광도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영주!" 그가 고함을 질렀다. 뒤뜰을 걸어오는 자는 유생(儒生) 차림의 위무일이었다. "잠시 기다려라!" 엽광은 산고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본 후, 후닥닥 위무일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가 산고와 삼악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껄껄걸! 엽 선주, 어떠했소?" "어떻다니요?" "아남의 칼 솜씨를 물었소." "칼 솜씨?" 엽광이 산고에게 눈길을 돌렸다. "커흠!" 그가 헛기침을 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삼악오라는 전대의 노마(老魔)들과 매일 비무를 벌이는데 무슨 재주로……" 위무일은 미소를 지었다. "……" 엽광은 멍한 표정으로 위무일을 바라보았다. 죽었다던 삼악오는 버젓이 살아 있었고, 그들은 또한 산고에게 무공까지 가르치고 있었다. 영주는 영채를 제멋대로 활보하는 삼악오를 본체도 않고…… 엽광은 갑자기 호반 영채가 복마전처럼 느껴졌다. "삼악오가 하도 심심해 하는 것 같아 아남으로 하여금 같이 좀 놀아주게 했소. 무료에 지쳐 또 사고를 저지를 것 같아 내린 명이오. 그랬더니 며칠을 신나게 놀더군.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지. 한데 으외로 삼악오들은 산고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일에 재미를 붙인 것 같소. 미치광이가 되었어도 자신의 절기를 후학에게 남기고 싶은 무인의 꿈은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오. 원래 아남은 칼에 대한 재질도 있고…… 조만간 나도 아남의 적수가 되지 못할지 모르지. 하하하!" 위무일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된 것이군요. 하지만 죽었다고 소문난 삼악오가 어떻게……" "그럴 사정이 있었소. 천천히 이야기하리다. 지금은 한 식구라는 것만 알면 되오. 아남! 모처럼 영채의 모든 식구들이 모였으니 향저라도 한 마리 구워야지." 위무일이 말했다. 산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삼악오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엽광은 위무일을 뒤따르며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삼악오의 출현도 출현이지만 영주의 태도도 의문이었다. 영주의 전신에는 언제나 짓누르는 듯한 어두운 느낌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은 쾌활하게까지 보여 엽광은 마치 다른 사람을 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향저는 모남족이 즐겨 먹는 통돼지 구이다. 영채에 입성하던 그날, 산고는 위무일을 위해 향저를 구워 주었다. 예닐곱 살에 노예상들에게 잡혀 떠나야 했던 환강 가의 고향. 향저를 어떻게 만드는지 산고가 기억할 리 없었다. 단지 불에 타고 있는 통돼지에 대한 기억뿐…… 중원의 음식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영채에서의 첫 주연을 산고는 잘 알지도 못하는 향저로 고집했었다. 향저…… 산고에게는 향저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혼인식과 같은 길일(吉日)에만 올려지는 음식! 그 귀한 음식이 다시 불길 속에 기름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엽광을 위해서였다.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엽광은 산공의 유일한 수하, 호반 영채의 가솔(家率)…… 산고는 아깝다는 생각을 털어 버리며 불길을 조절하고 양념을 골고루 뿌렸다. 산공은 엽광을 상대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엽광은 연신 탄사를 터뜨렸다. 향저 맛을 이미 한 번 본 삼악오는 단도를 들고 생살이라도 베어먹을 기세로 침을 꿀꺽였다. 하늘에는 총총한 별들로 달이 흐를 자리도 없어 보였다. 영채에는 구수한 냄새…… 산고는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떨구었다. 속 모르는 엽광이 향저를 돌리는 쇠꼬챙이를 대신 잡았다. 그는 아마 산고가 연기에 눈이 매워 눈을 붉히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민강에도 다녀오시고…… 금사강의 대공자, 성진 대사라는 분도 만나시고…… 제가 곁에 없는 사이 많은 일이 있었군요." 위무일의 이야기를 듣고 난 엽광이 말했다. "그렇소.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소." 위무일이 불길을 지피며 중얼거렸다. "다른 이야기는 묻지 않겠습니다. 총채의 일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아직 주황은 건재하오." "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총채주……" 위무일은 손을 들었다. "나는 채주들의 선택권을 뺏을 자격이 없소."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영주께서는……" "이제까지는 그랬었지. 그간 영채에서 많은 생각을 했소. 결국 내가 승명 형님의 아이를 총채주에 앉혀야 할 이유가 있다면 수룡왕과 승명 형님에 대한 의리뿐이더군. 그 의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소. 자신의 손자와 아이를 총채주에 앉히는 것을 수룡왕과 형님이 좋아할지. 수룡왕은 모르겠소. 하지만 형님은 분명 반대하셨을 것 같소." 위무일은 잠시 말을 끊었다. 향저가 다 익었는지 산고가 고깃살을 한 점 베어 건네 주었다. 위무일은 엽광에게도 향저를 권했다. 엽광이 허리춤의 칼로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향저의 목살을 베어 들었다. 그가 위무일의 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을 채웠다. "결국 영주께서는 흥악이라는 아이의 뒤를 후원하는 일을 포기하셨군요." 엽광이 잔을 들며 말했다. "포기하지 않았소. 백부님이 돌아가시면 누가 그 아이의 후견인이 되겠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이니 그때는 내가 후견인이 되겠지. 나는 나를 숙부라 부르며 따를 그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소. 그 아이가 정말 총채주의 자리를 좋아할지…… 승명 형님을 닮았다면 그 아이는 분명 총채주 자리를 별반 좋아하지 않을 것이오. 만약 그 아이가 자라서 총채주 자리에 마음을 품는다면……" 위무일은 엽광과 술잔을 부딪쳤다. 그가 한 잔의 술을 들이킨 후 향저를 입에 넣었다. "맛이 괜찮군." 엽광이 향저를 씹으며 말했다. 위무일은 향저에 소도를 꽂았다. 삼악오는 소도를 서로 잡으려고 난리를 부렸다. 산고가 잘라 주는 고기만 받아 먹고 있기에는 도저히 양이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엽광은 식탐으로 다투는 삼악오를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화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오?" 위무일이 돌연 물었다. "영주를 제외하고 장강에 그만한 인물은 없지요. 나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화인은 나보다 낫소. 그래서…… 만약 흥악이 자라 총채주를 꿈꾸고 총채주에 오를 만한 능력이 있다면 화인은 순순히 그 아이에게 총채주의 자리를 물려줄 것이오. 친구로서 장담하오." "그럴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어디 총채주라는 자리가 한 사람만의 입장으로 하다가 말다가 할 수 있는 자리입니까? 그리고 세월은 한철(寒鐵)도 녹슬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야……" 엽광이 가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먼 훗날의 일을 지금 나의 마음은 그와 같소." "알겠습니다. 제가 영주의 결정에 어찌 가타부타 할 수 있겠습니까?" 엽광이 다시 한 잔의 술을 쭉 들이켰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가 향저를 자르며 물었다. "호반 영채를 불사른 흉수에 대한 사냥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오." "단서는 잡았습니까?" "그래서 엽 선주에게 부탁하고자 하오." "명령만 내리십시오." 엽광은 머리를 조아렸다. "일전에 벽부의 잔당들이 찾아왔소. 철경을 얻기 위해서라고 하더군. 나중에 놈들의 용모를 상세히 말해 주겠소. 솜씨 좋은 화공을 물색해 놈들의 형상을 뜨고 개방( 幇)을 찾아가 놈들의 행방을 물으시오. 개방의 눈과 귀는 하늘도 따돌리기 힘들다고 하니 잘만 하면 놈들의 소굴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내일 당장 개방 악양 분타를 찾아가도록 하지요. 마침 개방의 악양 분타주는 저와 몇 번의 면식이 있습니다." "개방이 찾기 전에 흉수가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오. 아직 철경은 나의 손에 있으니……" "영주,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마십시오." 엽광이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위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악양 분타를 찾은 후, 곧장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백부님을 찾아봐야 겠소." "추운객 어르신을……" "장강에 돌아온 지 몇 개월이 지났어도 찾아뵙지 못했소. 섭섭해 하실 것입니다. 지금 내 판단이 옳은지도 물어 보고…… 그리고 부탁드릴 말씀도 있소." 위무일이 고개를 숙이며 불을 지폈다. 불씨가 작은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어디 먼 길을 떠나신 듯하던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 혼란한 시기에 종적조차 묘연할 리 없지 않습니까?" "주황과의 일전이 예고된 상태…… 지금쯤은 돌아와 계실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 동안 영채는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자! 너도 한잔 마셔라!" 엽광이 자신의 잔을 비운 후 산고에게 건넸다. "흥!" 산고는 코웃음을 치며 엽광의 잔을 거부했다. 그녀는 위무일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들고 마셨다. "하하하! 내가 대신 마시리다." 위무일이 권할 자리를 잃은 엽광의 술을 산고 대신 받아 마셨다. 향저에서 흐르는 기름기는 점점 줄어들었고 가을밤은 깊어만 갔다. "이제 영채에 안거를 하신 것입니까?" 몇 잔의 술을 비운 후, 엽광이 문득 물었다. "……" 위무일은 술잔을 잡고 빙빙 돌렸다. "그 동안 지난 일을 정리하기에도 바빴소. 이후의 일은 아직 많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타오르는 불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후에 대해 어찌 생각한 바가 없었을까. 하지만 생각의 잔꾀를 한두 번 겪은 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추운객을 서둘러 찾아보려 했다. 한 가지 부탁으로 자신의 생각에 못을 박기 위해서였다. * * * 검게 그을린 주름살투성이의 얼굴…… 장능의 얼굴은 잠깐 보지 못한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승룡전주의 일도 벅찬데 화룡대까지 맡았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힘들어 할 것인가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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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무일은 시종일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장능도 이제는 침묵만 지켰다. 장능의 얼굴은 세상의 번뇌를 모두 지고 있는 듯했다. 위무일의 고집을 이미 겪은 그였다. 장능이 마침내 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