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장 모(謀) 제 29 장 칠화섬검수(七花閃劍手) 제 30 장 약속(約束) 제 31 장 단심혈겁(丹心血劫) 제 32 장 살인(殺人) 제 33 장 역리(逆理) 제 34 장 소년(少年) 제 35 장 군림마천성(君臨魔天城) 제 36 장 파천일해(破天一解) 제 28 장 모(謀) 넓은 연무장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연무장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모두가 간편한 경장에 병장기들을 하나씩 지니고 살기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들을 하고 있었다. 살벌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리고 그 살기의 한가운데 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소림방장 허영대사의 얼굴이 보이고 무숙신개도 있었다. 무궁수사 남궁격과 취우선인, 진천창로, 검제 금수근이 있었고 그 앞에는 전신에 피칠갑을 한 추혼수 노강이 버티고 있었다. 십방좌 중 일곱 명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새로이 단심백결회의 회주가 된 무당신검 장경신과 무당파의 장문인 소진도장이 빠져 있었다. "무엇을 주저하시오, 대사!” 노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고 상당한 부상을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일신에서 발산되는 기세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것이었다. "아미타불……." 허영대사가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노시주, 이 일은 경솔하게 취급할 수 없는 일이오." "경솔하게 취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외다!" 노강이 답답한 듯 발로 땅을 탕 굴렀다. "내가 암습을 당했소이다. 내가 직접요. 설마 하니 내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말씀이오?" "그런 것은 아니외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워낙 중대한 일이기에……." "대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남궁격이 옆에서 거들었다. "이 일은 확실히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노각주께서 암습을 당하셨다는 것은 회주가 반대파를 처단하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설마 하니 회주가 그런 일을 벌이겠습니까. 이제 겨우 회주 자리에 오른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남궁격의 말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겉으로는 장경신을 변호하는 것 같았지만 그 말을 곰곰이 새겨보면 회주의 내심을 일동에게 폭로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이 일이 나 한 사람에게서만 끝났다면 말도 안하오!" 노강이 여전히 성질을 삭이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일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하고 있소이다. 조금 전 화화궁이 참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대사께서도 들었지 않소이까? 화화궁의 소궁주를 제외한 화화궁의 사람 전부가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그들의 몸에는 분명 무당파의 검법에 당한 흔적이 뚜렷했소이다." "아미타불…… 어찌 이런 일이……." 화화궁으로 돌아가던 화화궁주 일행이 기습을 당했고 그 결과 화화궁주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단심백결회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추혼수 노강이 장경신의 부름을 받고 갔다가 기습을 당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이 더해지자 단심백결회는 그야말로 끓는 가마솥처럼 되어버렸다. 새로운 회주를 맞이하여 들뜨고 흥분했던 마음은 잠깐이고 이제는 서로를 의심하며 믿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책임은 결국 회주인 장경신에게로 귀착되었다. 그러기에 십방좌가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언제나 명쾌하게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기에 십방좌의 수좌인 허영대사는 당혹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로 힘을 합쳐 다가오는 재난에 대비하여도 모자랄 판인데 자중지란이 일어나다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옳을지 모르겠구나.' "대사, 결정을 내리셔야만 합니다. 아무리 회주라도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오. 당장 이 자리에 회주를 불러 진상을 규명해야만 하오이다!" "노시주, 그게 옳은 일인 줄은 알지만……." 허영대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그 모든 일이 회주의 소행이라는 증거도 없지 않소?" "증거라니? 이보다 더 명확한 증거도 있단 말이오!" 이번에 소리치고 나선 것은 검제 금수근이었다. "애당초 장경신 같은 위인을 회주로 뽑은 것이 잘못이오. 세간에는 금룡을 대단한 인물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흥!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소.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 아니오!" "금시주의 말씀이 틀리다는 건 아니지만 이 일은 좀더 신중하게 결정해야……." 허영대사가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일 때였다. 갑자기 장내가 술렁이더니 한쪽 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복장으로 보아 철궁도의 사람들인 것 같았으며 선두에 선 것은 백보신궁 국충이었다. 국충 뒤로 일단의 철궁위대가 따르고 있었다. "아룁니다." 국충이 허리를 숙이며 우렁차게 고했다. "무슨 일이냐?" 남궁격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철궁도의 사람들이니 그가 나서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수상한 자를 잡아왔습니다. 노각주께서 이자를 한 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수상한 자라?" 이름이 불린 노강이 그들에게로 갔다. 그러자 국충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뒤에 있던 장한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손에 들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걸 바닥에 내려놓았다. 들것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물체가 있었고 그 위에 거적이 덮여 있었다. 거적 밑으로 벌건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게 뭐냐?" 남궁격이 의아해서 물었다. "보시지요." 국충이 덮여있는 거적을 훌쩍 걷었다. "아니!" 놀라움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거적 밑에는 도복차림을 한 중년인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슴에 깊은 검상을 입고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이것은?" 노강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바로 이자외다. 이자가 회주의 명이라며 나를 유인한 자외다!" "그럴 수가……." 허영대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사람은 국시주가 손을 쓴 것이오?" "아닙니다." 국충이 말했다. "산기슭에 버려져 있는 것을 수하들이 찾아냈습니다. 우리는 손을 대지 않았으며 이자는 발견할 당시 이미 이처럼 죽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남궁격이 고개를 들어 허영대사를 보았다. "살인멸구, 이자의 배후가 일이 실패한 것을 알고 이자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미타불…… 참으로 잔인한 짓이구려." 허영대사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기왕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명확하게 규명을 해야겠소이다. 누구 이 사람을 아는 사람이 없으시오? 이 사람이 무당파의 사람이오?" "틀림없습니다." 대답을 한 것은 주위에 있던 화산파의 제자였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앞으로 나서더니 그 도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소생이 이자를 압니다. 이자는 무당파의 제이십칠대 제자인 청하(靑何)입니다. 소생은 지난날 몇 차례 이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반신반의하던 일이었다. 설마 대무당이 그런 술수를 부리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뭔가 내막이 있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화산파의 제자가 무당파의 사람을 확인한 이상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럴 수가……." "설마 하니 무당신검이……." 술렁임은 파도처럼 일어나 좌중으로 번져갔다. 믿는 마음이 컸던 만큼 일단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그 충격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아미타불……." 허영대사가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높여 불호를 외웠다. "이제 이 일은 더 이상 덮어놓을 수 없게 되었소. 노납이 회주를 만나 진상을 따져봐야 되겠소." "뭘 따진다는 말씀입니까?" 우렁찬 외침에 이어 중인들의 한편이 물결처럼 갈라지더니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삼색수술이 달린 보검을 등에 진 백의공자. 바로 현 단심백결회의 회주인 무당신검 장경신이 아닌가! "장회주……." 허영대사가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장경신은 허영대사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고 오연한 기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게 대관절 무슨 일입니까? 어째서 이 밤중에 이처럼 사람들이 모여있으며, 또 이처럼 사람들이 모여있는 데도 내가 몰라야 한다는 말입니까? 내게 알리지도 않고 대체 무슨 일들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장경신의 질문은 위엄이 있었고 은은한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무당신검이라는 별호를 등에 지고 있던 한 청년검사의 태도가 아니었다.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단심백결회 회주의 당당한 위용이었다. 장경신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중인들이 다급히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누구도 그와 눈길이 마주치기를 원치 않았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약간씩의 두려움이 번져가고 있었다. "잘못이 있다면 노납에게 있는 것이니 회주는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오." 다행히 허영대사가 앞으로 나서 주었다. "그보다 회주, 기왕에 오셨으니 한 사람을 확인해 주셨으면 하오. 여기 있는 이 사람이 혹시 무당파의 제자가 아니오?" 허영대사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한 사람이 재빨리 나서 들것 위로 횃불을 비춰주었다. 횃불 아래 청하도장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홉뜨고 있었고 입가에는 한 줄기 가는 피가 흘러 말라붙어 있었다. 가슴에 난 검상은 극히 깊은 것이어서 단 일검에 이 도장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분명했다. "이건?" 장경신이 놀라움을 얼굴에 드러냈다. "이 사람은 우리 무당파의 제자가 맞소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처럼 잔악한 짓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감히 단심백결회 내에서 무당파의 제자를 암살하다니요?" 장경신의 음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는 눈앞에 벌어진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전신을 노여움으로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당연히 설명이 있어야 하건만 모두들 앞으로 나서서 설명을 하는 대신 경멸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건?' 장경신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이들이 누구인가. 한때 그가 회주가 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가 일단 회주의 자리에 오르자 앞다투어 아첨을 하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간사한 자들이 지금은 자신을 마치 더러운 벌레라도 보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참다 못해 장경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청하도장을 죽인 자가 누구며, 이 일과 여기에 모인 분들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이오?" "장경신, 정말 모르느냐?" 노강이 앞으로 나서며 노여움에 잠긴 음성으로 소리쳤다. "난 모르겠소." 장경신이 무겁게 말했다. "하지만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니오? 여기 모인 분들은 분명 무슨 일인가를 알고 있는 듯한데 회주인 나만 모르고 있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오냐, 그렇다면 내가 말해주마." 검제 금수근. 그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장경신, 우리는 여기 있는 무당 제자를 이처럼 무참하게 살해한 것이 네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을 이용하여 노각주를 암습한 것도 너의 소행이며, 화화궁을 암습하여 화화궁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 또한 너의 짓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뭐라고?" 장경신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금수근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에게는 철퇴를 내리치는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노각주가 암습을 당하였다는 말이오? 더구나 화화궁주까지 죽었다고? 그런데 그 일을 내게 알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일이 내가 한 짓이라고?" "우리는 정말이지 그렇게는 믿고 싶지 않았소." 남궁격이 고개를 저으며 어둡게 말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소. 장회주, 이 일에 대하여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 같소. 회주는 혹시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이처럼 잔인한 살수를 쓴 것이 아니오?" "남궁도주,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장경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장경신이오. 나 장경신이 그런 교활한 술책을 부릴 것 같소! 흥, 사람을 대단히 잘못 보았소. 나는 설사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하여도 그런 치졸한 짓은 벌이지 않소." "우리도 그렇게 믿고 있었소이다." 허영대사가 무겁게 말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회주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구려. 회주, 우리는 회주의 명확한 해명을 원하오." "이제는 대사까지 나를 의심한단 말씀입니까?" 장경신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극도의 노여움으로 얼굴이 붉어져 있었는데 그 안색이 점차 창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천하가 나를 의심한다 하여도 나는 결백하오. 나 장경신은 이제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일을 해본 적이 없소이다. 그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오. 나는 사내요. 사내라면 의당 자신이 한 일은 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오." "맞소이다." 장경신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하기에 허영대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으면 회주의 말을 십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외다. 하지만 지금은 워낙 사항이 중대하니 그렇게 가벼이 처리할 수가 없소이다. 회주는 이 모든 일을 회주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소이까?" "내가 안했다면 안한 것이지, 또 무엇을 증명한단 말씀이오!" 장경신이 소리쳤다. "대사, 난 모르는 일이오. 하지만 여러분이 끝내 의심을 풀지 못하겠다면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명확하게 조사하여 여러분의 의심을 풀어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소. 그럼 됐소이까?" "그걸로는 모자르오." 노강이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회주는 이 모든 일을 벌인 흉수로 의심을 받고 있소이다. 그런데 회주가 직접 조사를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소? 물론 이 일은 철저하게 규명이 되어야 할 것이오. 하지만 그 조사 당사자가 회주가 되어서는 아니 되오." "노각주, 그럼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이건 내가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오. 비록 내가 암습을 당한 당사자이지만 이 일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오. 그리고 그 조사는 회주가 아닌 제삼자가 해야 할 것이며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회주는 회주의 권한을 반려해야 할 것이오." "뭐라고?" 장경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분노를 넘어 이제는 거의 허탈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회주의 권한을 반려하라는 것. 그것은 사실상 그가 이 모든 일을 벌였다고 단정하고 회주의 자리에서 쫓아내겠다는 것이 아닌가! "노각주, 그게 노각주 혼자의 생각이오, 아니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생각이오?" "물론 나 혼자의 생각이오." 노강이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하지만 다른 분들도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오.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대한 오해가 풀릴 때까지 회주가 회주의 권한을 반려하고 근신하기를 바라오." "하하하!" 장경신이 돌연 하늘을 우러러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허탈하기 그지없었으며 주먹은 굳게 움켜쥐어져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노각주, 자고로 선인들이 말씀하시기를 목숨은 뺏어도 좋으나 모욕은 주지말라고 하였소. 나보고 회주의 권한을 반려하라는 것은 곧 이 모든 일을 내가 하였다고 인정하라는 말인데 내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 이 장경신은 죽으면 죽었지 그런 모욕적인 제의는 받아들일 수 없소." "아미타불…… 회주, 부디 감정을 앞세워 경솔한 행동은 삼가하시오." 허영대사가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굴욕은 일시간이나 대업은 길고 기오. 회주는 부디 일시간의 치욕을 참고 우리의 뜻을 따라주기를 바라오. 이 일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한 아무도 회주의 명에 따르지 않을 것이며 우리 단심백결회는 무너지게 될 것이오. 그러니 이번만은 회주가 양보를 해주었으면 좋겠소." "대사, 아무리 대사의 말씀이라 하나 그것은 정말로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장경신이 화로처럼 노여움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허영대사를 바라보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장경신은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이오. 이 일이 지극히 불행한 사태이기는 하나 나는 정말로 모르오. 이 장경신이 모른다면 모르는 것이지 다른 말은 필요없소." "장경신!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생각이 있다!" 노강이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는 장경신이 교묘한 말로 위기를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그를 참지 못하게 했다. "생각이라니? 그럼 힘으로 나를 굴복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정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마." 노강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어느새 발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강이 누구인가. 십방좌의 일인이며 당당한 용호뇌권각의 각주가 아닌가. 그가 일단 손을 쓴다면 무서운 기세가 뻗쳐나올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러나 장경신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좋소이다. 어디 노각주가 얼마 만한 능력이 있는가 보여주시오." 장경신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중앙으로 걸어나가 두 다리를 벌리며 노강을 바라보았는데 그 태도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중인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미타불…… 인재로다. 과연 무당신검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 편협함이 문제다. 자존심이 강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편협함은 버려야 한다.' "노각주, 당신이 과연 나를 이길 수 있겠소?" 장경신이 냉랭하게 말했다. 사실 그의 이러한 말은 지독한 자신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패해본 적이 없는 장경신이 아닌가. 비록 지난날 쇠마에게 한차례 좌절을 겪기는 했지만 그 일은 불복하는 마음이 십분이었다. "장경신! 하늘 아래 너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물러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안 노강이 장경신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역시 장경신의 능력이 무림삼룡 중 제일로 손꼽힐 만큼 출중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을 전부 믿을 수는 없는 일이고 그가 전력을 다한다면 패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은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중인 환시리가 아닌가! 새파란 후배를 맞이하여 약세를 보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노강은 두 손에 공력을 잔뜩 주입한 채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에 장경신의 태도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는 곤란한 처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조금도 꺼려 하는 기색이 없었다. 일촉즉발. 언제라도 폭발할 것 같은 팽팽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나직한 탄식소리가 들리더니 검제 금수근이 울적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노각주! 패륜적인 위인을 잡는 데 무림의 도의를 따질 수는 없는 일이오. 본인이 비록 대단한 능력은 없으나 노각주를 돕겠소." "고맙소." 노강이 사례했다. 그 역시 삼 푼 정도는 꺼리는 마음이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금수근이 자청해서 도와주겠다는 데야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하하! 좋군, 좋아." 장경신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또 누가 나서겠소? 이 장모는 비록 하늘로 오르는 재주는 없고 삼두육비의 괴물도 아니지만 원한다면 여러분 모두를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 "장경신! 너무 광망하구나!" 벌컥 화를 내며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인물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개방의 무숙신개였다. 그는 착잡한 눈으로 장경신을 노려보았다. "내 가급적이면 이런 일에 상관하려 하지 않았지만 너의 광망함이 도에 지나치니 어쩔 수가 없다." 순간 장경신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노강이나 금수근은 십방대동에서 그를 반대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에게 못마땅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숙신개는 다르다. 그는 장경신이 단심백결회의 회주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몸소 나선 것으로 보아 이 일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지 않은가! 장경신은 곧 오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습니다, 좋아요. 이 장모, 이제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왔건만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을 가지고 이토록 의심하다니, 이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덕이 없었는가를 알 수 있겠소이다." 그는 당당한 시선으로 세 고인을 바라보았다. "자, 오시오!" 그러자 금수근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는 어느새 보검을 꺼내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노강도 움직였다. 그는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이었는데 그 손이 청동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무숙신개도 옆으로 이동하며 푸른빛이 도는 죽장을 꺼내 들었다. 세 고인이 장경신을 세 방향에서 품자 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천하를 떨어울리게 하는 십방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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