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들의 연수합격을 받아낼 수 있는 인물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중인들은 장경신이 아무리 초절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하여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장경신은 그런 중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손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여유있게 웃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돌연 땅이 뒤집어질 만큼 쩌렁쩌렁한 고함소리를 내며 한 사람이 급히 장내로 걸어나왔다. "대사형……." 그 사람을 본 장경신이 멈칫했다. 무당의 소진도장이었던 것이다. "경신아, 경솔한 짓은 삼가하거라. 이 무슨 추태냐!" 소진도장이 장경신에게로 가며 소리쳤다. "네가 감히 회주된 몸으로 단심백결회의 원로인 십방좌에게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십방좌가 이러는 데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설사 억울한 점이 있더라도 말로 해명할 일이지 무력을 사용하려고 하다니. 네가 이러고도 단심백결회의 회주라고 할 수 있느냐!" "하지만 대사형……." "닥쳐라!" 소진도장이 수염을 뻣뻣하게 곤두세우며 발을 굴렀다. "약간의 재간이 있다 해서 그 힘을 아무데서나 쓴다면 그것은 실로 옳지 못하다.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오해가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잔말 말고 십방좌의 뜻에 따르거라." 소진도장, 그는 무당의 장문인이기 이전에 장경신의 대사형이었다. 장경신이 도저히 반항할 배분이 되지 못한다. 장경신이 참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대사형, 대사형까지도 저를 오해하시고 계신 것입니까?" "웬 말이 그렇게 많으냐!" 소진도장이 노성을 질렀다. "지금 너는 사사로운 신분이 아니다. 엄연한 단심백결회의 회주가 아니냐. 지금 네가 무엇보다 우선하여 생각하여야 할 것은 회의 단합이다. 그런데 이렇게 잠시의 치욕을 참지 못하여 자중지란을 일으킨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무림동도들을 대하려 하느냐! 너의 행동은 옳지 못하다." "알겠습니다." 장경신이 힘없이 말했다. "대사형의 뜻을 따르기로 하지요." 장경신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휘청 뒤로 물러나더니 입가에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허영대사를 보았다. "대사, 잠시 제가 실수를 하였소이다.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이제 어찌하면 됩니까?" "아미타불……." 허영대사가 침중하게 불호를 외우며 앞으로 나섰다. 이 순간 그의 얼굴에는 고뇌가 가득하여 단번에 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장회주, 미안하지만 노납이 죄를 범하겠소.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공정하게 조사할 것을 약속드리겠소. 그리고 다행히도 회주가 이 일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이 늙은 것이 직접 회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오늘의 죄를 청하겠소." "대사의 말씀은 언제나 천금과 같았지요. 그 말씀을 믿겠소이다." "부디…… 용서하시오." 허영대사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장경신의 혈도 몇 군데를 점하였는데 그 간단한 동작을 하면서도 몹시 힘든 일을 하는 것처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허영대사의 손가락이 몸에 닿자 장경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으며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미타불……." 마침내 장경신의 혈도를 짚어 무공을 봉쇄한 허영대사가 두 손을 모았다. "회주를 거처로 모셔라.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회주는 죄인이 아니니 정중하게 모셔야 한다. 그리고 이 시간부터 그 누구도 단심백결회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한다. 이 명을 어길 때에는 중벌에 처할 것이다." "대사." 소진도장이 참혹한 얼굴로 허영대사를 불렀다. "소진도우, 무슨 가르침이 있소이까?" "조사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대사의 말씀을 믿겠소이다. 하지만 무당은 오늘의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무당은 이번 조사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나 만에 하나라도 불공정한 점이 엿보인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소. 이 점을 염두에 두어 주셨으면 하오." "염려 마시오." 허영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속한 시일 내에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않을 것을 약속드리오. 그리고 조사가 끝났을 때는 소진도우도 그 결과에 반드시 승복하게 될 것이외다." "부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소." 소진도장이 몸을 돌렸다. 그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휑하니 가버렸다.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소진도장의 경고. 그것은 일종의 도전장과 같았다. 대무당이 이 일로 인해 크게 감정을 상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별다른 충돌없이 무당신검 장경신을 제압하기는 하였지만 중인들의 가슴속에 납덩이가 하나 들어앉은 것처럼 무거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모든 일은 계획대로 잘 되었다." 남궁격이 국충을 앞에 두고 무서운 눈빛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 장경신이 멋모르고 날뛰는 바람에 일이 의도했던 것보다 잘 풀렸다. 이제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든 사람들의 마음속엔 한 가닥 의심이 남게 될 것이다." "이제는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국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전의 일은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무당의 청하도장을 죽이고 그 죄를 장경신에게 덮어씌우는 일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 일만 생각하면 국충은 지금도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허영대사는 꼬장꼬장한 사람이다. 그가 소진도장과 굳은 약속을 하였으니 필경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 이 일이 장경신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지겠지."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하오면……." "장경신을 탈출시켜라." 남궁격이 잘라 말했다. 그는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린 국충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탈출시키라 하심은……?" 국충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남궁격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죄다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경신이 탈출한다면 조사고 뭐고 흐지부지될 것이며 그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일을 더욱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남궁격은 잠시 말을 끊고 국충을 빤히 바라보았다. "할 수 있겠느냐?"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일은 단순하게 장경신을 탈출시킨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살아있다면 두고두고 후환거리가 된다. 그러니 장경신은 이곳을 탈출함과 동시에 영원히 사라져 주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자고로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알고 있습니다. 장경신은 다시는 도주님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을 오늘밤 안으로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가보아라." "예." 국충이 허리를 굽혔다. 그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혼자가 된 남궁격은 깊은 눈으로 벽을 보고 있었다. '내일이다. 내일이면 내가 새로운 회주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 후후후.' 회심의 미소. 남궁격은 사실 큰소리로 웃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럴 입장이 되지 못하기에 숨죽여 웃고 있었다. * * * 장경신의 거처 앞에는 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용호뇌권각의 사람들로 단심백결회 내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고수들이었다. 조금 전의 풍운이 너무나 각별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장경신의 거처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더니 서슴없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누구냐?" 한 사람이 벌떡 몸을 세우며 침중한 목소리로 힐문했다. "나요." "아, 국대장." 그가 긴장을 풀며 입을 열었다. "백보신궁이 여기엔 웬일이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국충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는 얼굴에 가득 웃음기를 띠우고 있었다. "긴한 얘기라니……." 그 사람이 한 걸음 국충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국충의 손에서 차가운 한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엇!" 그는 경호성을 지르며 다급히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어느새 국충의 손에서 튀어나온 비수가 그의 심장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그가 스르르 국충에게로 쓰러졌다. 그러자 국충이 그의 몸을 안아들며 더욱 깊숙이 비수를 박아넣고 있었다. "미안하오.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국충의 목소리는 마치 연인에게 속삭이는 듯이 다정했다. "앗!" 그 광경을 본 다른 하나가 다급히 등에 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는 검을 미처 절반도 뽑지 못하고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의 등에는 강전이 하나 박혀서 깃촉을 흔들고 있었다. "너무 쉽군." 국충이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몇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모양의 병기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사방을 살펴라. 혹시라도 눈에 뜨이는 자가 있다면 죽여도 좋다." 나직하게 명령한 국충이 품에서 검은 수건을 꺼내어 얼굴에 덮어쓰고는 장경신의 거처로 다가갔다. 장경신의 방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장경신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복면인들을 보았다. "누구냐?" "알아 뭐하게?" 중앙에 있는 복면인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매서운 경풍이 일어나며 장경신의 가슴을 강타했다. "음!" 장경신은 신음소리를 내며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거 너무 싱겁군." 국충이 바닥에 쓰러진 장경신을 보며 히죽 웃었다. "하기야 무공을 쓰지 못하는 무당신검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지." 국충이 눈짓을 하자 뒤에 있던 복면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 온 자루를 열어 그 속에 장경신을 밀어넣고 주둥이를 봉했다. "가자." 국충이 짧게 명했다. 흐트러진 방안의 집기가 간단하게 정리되었다. 이어 촛불이 꺼지자 복면인들은 자루를 등에 메고 밖으로 나왔다. "동북쪽으로 가자. 그쪽의 경비는 우리 철궁도가 맡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국충의 명에 따라 그림자들은 소리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밤고양이처럼 날렵한 동작이었다. 깊은 밤. 회주의 거처에서 벌어진 감쪽 같은 변사였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역시 이 모든 것이 남궁격의 음모였구나.' 그는 어둠 속에서 부드득 이를 갈았다. '화화궁이 참변을 당했다고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여겼다. 하지만 설마 했는데 남궁격 그가 이런 일을 벌이다니. 으으…… 한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에 의해 이제 단심백결회는 끝이다. 그 어른의 노심초사가 아무런 소득도 없게 되었구나.' 그는 훌쩍 몸을 날려 그림자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아무런 기척도 없는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경공의 대가가 아니면 흉내조차 내지 못할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런 날렵함으로 그림자들의 뒤를 쫓는 그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큰일이다. 저들이 필경 무당신검을 그냥 두려 하지 않을 텐데…… 천노살성에게 연락하여 무당신검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림자들을 뒤쫓는 또 하나의 그림자. 그는 만리추종 섭등이었다. 제 29 장 칠화섬검수(七花閃劍手) 미명이 밝아온다. 동쪽 하늘이 검은색에서 군청색으로, 다시 은회색이 되었다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산이 빛나고 하늘도 빛난다. 대지와 나무와 산천초목이 모두 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감상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의 흑의인들이 산길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발이 거의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날렵한 몸놀림을 구사하고 있었으며 곳곳에 남아있는 잔설에 행여라도 발자국이 남을까봐 극도로 조심하여 마른땅만 골라 디디며 가고 있었다. 단심백결회를 나온 지 두 시진.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은 그들의 몸은 땀으로 목욕을 한 듯이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먼길을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힘에 겨운 기색은 아니었다. "이쯤이 좋겠다." 선두에 선 복면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의 앞에는 아득한 벼랑이 있었고 벼랑 아래로 실처럼 가늘게 물 흐르는 것이 보였다. 벼랑은 어찌나 험한지 송곳 같은 바위들이 삐쭉삐쭉 솟아있어서 내려다만 보아도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도 생명을 가진 것치고 이런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면 살아날 것이 없을 것이다. "여기라면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중얼거린 복면인이 복면을 훌떡 벗었다. 그러자 땀으로 번들번들한 국충의 얼굴이 나타났다. "끌러라." 국충이 낮게 명령했다. 복면인들이 자루를 끄르려고 했다. 그러나 자루주둥이가 지나치게 단단하게 묶여있는지 쉽게 끄르지 못하다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베어버리고 말았다. 자루주둥이가 열리면서 장경신이 힘없이 굴러 나왔다. 장경신은 깊은 잠이 든 것처럼 두 눈을 굳게 감고 있었으며 안색은 극도로 창백했다. 그러나 숨소리가 규칙적인 것이 살아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국충은 잠시 장경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금룡, 이자는 영웅이다. 그러나 시대를 잘못 태어난 영웅이다. 그러기에 개죽음을 당하는구나.' "이자를 밑으로 굴릴까요?" 복면인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다. 그랬다가 만에 하나, 이자가 천우신조로 살아나기라도 한다면 후환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죽일 때는 확실하게 죽여야만 한다." 수하들을 만류한 국충은 성큼 앞으로 나서며 장경신의 혈도를 풀었다. 장경신은 잠시 멍하니 누워있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록 무공을 쓰지는 못하지만 행동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몸을 바로 세운 장경신은 주위에 둘러선 복면인들을 바라보더니 시선이 국충에게로 멎었다. "그대는 철궁위대의 백보신궁이로군." 그의 입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일이 이렇게 되다니 다소 의외로군. 남궁격이 시킨 짓인가?" "곧 죽을 위인이 그런 것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 "하긴……." 장경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피하기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화화궁주가 죽음을 당하고 추혼수가 기습을 당했다기에 어떻게 된 일인가 했지. 그런데 이제 보니 남궁격이 꾸민 일이로군." "장경신." 국충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너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감히 네가 단심백결회의 회주가 된 것이다. 그 자리는 우리 도주님을 위해서 예비된 자리. 그러니 네가 사라지는 것은 운명이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라……." 장경신이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그런 말을 함부로 쓰다니……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궁격이다. 힘을 하나로 모아도 십마를 이길까 말까인데 이런 식으로 힘을 분산시키다니……." "그런 일은 네가 걱정할 게 아니다. 모든 것은 도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 너는 그저 죽어주기만 하면 된다." 국충이 품에 손을 넣더니 한 개의 화살을 끄집어냈다. 화살은 검은빛을 띠고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뒷부분이 시위에 걸게 되어있는 게 아니라 손으로 쥘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미안하다." 국충이 선뜻 다가서며 흑시(黑矢)로 장경신의 가슴을 찔렀다. 그의 동작은 너무나 신속하여 설사 장경신의 무공이 원래대로라 해도 피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요란한 쇳소리가 일어나며 국충이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쨍!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막 장경신의 가슴을 흑시로 찌르려는 순간 어떤 강력한 힘이 그만 흑시를 쳐내고 만 것이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국충은 뒤로 물러서며 힘의 대부분을 감소시켰건만 여전히 손아귀가 저려왔다. 하지만 국충이 더욱 놀란 것은 흑시를 밀어낸 힘의 정체를 안 다음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것은 작은 돌멩이가 아닌가! '돌멩이를 날려 나의 흑시를 쳐내다니.' 국충은 방해자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자리에 어디 눈이 하나 둘인가! 그런데 누구도 청년의 접근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청년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키가 컸다. 안색은 다소 흰 편이었고 여자처럼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깨끗한 얼굴에는 은은한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천노살성!" 국충이 신형을 휘청이면서 소리쳤다. "나를 아는군." 천노살성, 복청양이 한 걸음 다가섰다. '천노살성이라고? 저자가?' 장경신은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청년을 유심히 보았다. 천노살성의 이름은 그 동안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그를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본 천노살성의 인상은 그저 유약한 청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무서운 살기를 흘리지도 않았고 대단한 절기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여린 몸집에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깨끗한 용모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 몸 어디에서도 짙은 피비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첫인상이었을 뿐이고 장경신은 천노살성의 맑은 눈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은은한 빛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무서운 고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장경신은 천노살성을 보는 순간 전신을 팽팽하게 조여오는 긴장감을 느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자는 이미 나의 능력에 버금가는 것 같구나. 그런데 천노살성이 왜 나를 돕는단 말인가?' 남궁격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궁격은 야망이 큰 자였다. 그가 회주의 자리에 보이고 있는 집착은 그의 상상을 벗어날 정도였다. 그러니 남궁격이 회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무슨 짓을 하건 그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천노살성은 다르다. 천노살성은 그의 적이었다. 듣기로는 저자는 십마와 한패거리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저자가 왜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후, 우습군. 설마 하니 친구가 적이고 적이 친구란 말인가.' 장경신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천노살성, 네가 살아있었단 말이냐?" 조금은 겁에 질린 국충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보다시피." 복청양이 담담하게 말했다. "으…… 용케 목숨을 건졌으면 얌전히 엎드려 있을 일이지, 왜 쓸데없는 일에는 끼여들려 하는 거냐?"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간사한 무리가 교활한 짓을 하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더구나 나는 철궁도와 쌓인 감정이 많거든." "천노살성, 너는 실수했다. 이런 일에는 네가 끼여드는 것이 아니었다." 국충이 중얼거리며 눈짓을 했다. 수하들에게 천노살성을 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수하들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무얼 하는 거냐?" 국충이 버럭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천노살성이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았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수하들은 바로 그 이름에 짓눌려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정말로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이 자리에서 전력을 다한다면 그래도 한 가닥 살아날 희망이 있겠지만 항명하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어서 저자를 쳐라!" 국충의 살기어린 경고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제야 복면인들이 몸을 떨면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일렬로 산개하더니 검을 빼들었다. 아무래도 그들에게는 눈앞의 천노살성보다는 보이지 않는 남궁격이라는 존재가 더 두려움을 안겨주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좋겠지." 복청양이 중얼거리며 다시 한 걸음을 다가들었다. 동시에 그의 손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복면인을 쳐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껏 상대가 공격을 해야만 손을 쓰던 것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건?' 복면인은 눈앞으로 다가오는 천노살성의 주먹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천노살성이라고 해서 머리가 세 개에 팔이 여섯 개의 괴물인 줄 알았는데 이건 숫제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주먹질이 아닌가! 갑자기 자신이 생긴 복면인은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검을 들어 다가오는 주먹을 베어버리려고 했다. '베었다.' 분명 검은 천노살성의 주먹을 베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검끝에 살이 베어지는 싸악, 하는 감촉을 음미하려는 순간 믿어지지 않는 각도로 주먹이 휘어지면서 그의 안면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욱!" 복면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섰다. 그의 복면 아래로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큰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저, 저게……!" 보고 있던 중인들은 일시에 멍청해졌다. '저건 도대체 무슨 초식인가. 저런 초식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가장 놀란 것은 장경신이었다. 그는 분명 천노살성의 손씀을 자세히 보았건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복면인에게 부상을 입혔는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2편 →
3편부터
3편
[야설록]천객 - 4 - 3편 (3/17)
하지만 장경신은 그래도 그 평범해 보이는 주먹질에 담겨있는 오묘한 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라도 저 일격은 피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저 일격에는 현기(玄氣)가 숨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