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4 - 4편 (4/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본문 바로가기

[야설록]천객 - 4 - 4편 (4/17)

💬 0 👁 9
☰ 목록
책갈피와 음성 읽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하늘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저 하늘 너머에 펼쳐지는 그의 화려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실패하지 않는다.
장경신과 복청양은 절대로 그들을 막아 낼 수 없다.
절대로." 마지막 말은 소리를 내어 중얼거린 것이었다. * * * 단황은 짧게 심호흡을 했다.
마당에는 아침에 내린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깨끗하기 그지없는 눈이다.
새벽부터 함박눈을 퍼붓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눈발이 아주 가늘어져 간간이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가면 곧 그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고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눈을 머금은 구름이다.
단황은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차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상의를 벗고 있었고 아래에는 짧은 바지만을 걸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추위를 느낄 옷차림이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긴 회랑을 걸어 들어가자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문 앞에는 두 명의 어린 시비가 무릎을 꿇고 있다가 그가 오자 당황하여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안에 계시느냐?" 단황이 물었다. "예, 그게……." 왼쪽의 어린 시비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무슨 일이냐?" 단황은 의아해서 시비를 보았다.
감히 시비의 신분으로 그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마주님.
지금은 들어가시기가 곤란합니다." 시비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녀는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얼굴 가득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감히 마주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유가 뭐냐?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단황의 음성에는 약간의 짜증이 담겨 있었다.
비록 겉으로 표출되지는 않은 감정이었지만 그가 그런 내색을 보이자 어린 시비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게 아니라 아가씨께서 지금 목욕중이셔서……." "그래?" 단황의 입가에 살짝 미소라는 것이 피어올랐다. "그럼 기다려야지.
얼마나 기다려야 되겠느냐?" "그게……." 어린 시비가 다시 당황하여 우물거렸다. "소녀가 들어가 아뢰겠습니다." "그래라." 단황은 뒷짐을 지고 몸을 돌렸다.
조금의 불쾌함도 엿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실 단황은 아랫사람들에게 상당히 잘 대해주고 있었다.
설사 아랫사람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너그럽게 감싸주었으며 사소한 일에는 일체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랫사람들의 그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힘으로 누르는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었다.
다만 그의 일신에서 풍기는 무서운 기도가 거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황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시비는 한참이 지나서야 나왔다.
그녀는 다소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고맙다." 그가 다시 웃자 시비가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숙였다.
감히 마주가 하찮은 시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다니.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안의 일을 관장하고 있는 백마가 죽음을 내릴지도 모른다.
그는 단황의 너그러움과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잔인한 인물이었으므로.
문이 좌우로 열렸다.
안에는 다시 두 명의 시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들은 단황이 들어오자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단황은 또 한 겹의 작은 문을 몸소 열어야만 했다.
정갈한 방이었다.
화려한 면은 없었지만 규방 특유의 은은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사방에 붉은 휘장이 쳐 있고 안에는 둥근 침상이 보였는데 침상 역시 붉은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휘장 앞에는 탁자와 의자가 있었고 의자에는 얇은 옷을 걸친 군성초가 앉아 있었다.
군성초는 단황이 안으로 들어오자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시비들처럼 두려움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소를 지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내가 방해를 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소." 의자에 몸을 앉히며 단황이 말했다. "여기는 당신의 집이니까 설사 방해를 했다 해도 할 수 없지요." 군성초의 음성에는 약간 자조적인 빛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요즘 들어 다소 의기소침했는데 그런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단황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는 내 집이 아니오.
당신 집처럼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소?" "생각을 그렇게 한다 해서 내 집이 되는 건 아니죠.
여기는 화화궁이 아니잖아요?" 군성초가 걸치고 있는 옷은 상당히 풍성했지만 매우 얇은 것이어서 몸매의 미묘한 굴곡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더구나 몸에 묻은 물기로 인해 옷의 상당 부분이 피부에 밀착되어 차라리 벗은 것만도 못했다.
그녀의 머리는 흑단처럼 검었으며 아직도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를 푼 채로 어깨에 가득 내려뜨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고혹적이었다.
그러나 단황은 그녀를 보면서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상한 감정의 동요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저 잘 그려진 명화를 감상하는 듯한 담담한 눈길이었다.
그런 단황의 눈길이 부담스러운지 군성초는 살짝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녀가 남자의 앞에서 먼저 시선을 돌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쩐 일인지 가슴이 뛴다. '내가 왜 이러지.' 군성초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저 사람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과는 상관없이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남자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군성초는 애써 자위하며 고개를 돌려 단황을 똑바로 보았다. "몸은 좀 어떻소?" 단황이 물었다. "많이 좋아졌어요.
이제는 행동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어요." "다행이오." 무엇을 다행이라 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화화궁에는 언제 돌아갈 거요?" "내가 돌아가기를 원하나요?" 단황이 어떤 의도에서 그런 말을 했건간에 왈칵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건 당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일이오.
나로서는 당신이 영원히 여기에 있는다고 해도 좋고 오늘 당장 떠난다고 해도 상관없소." 단황의 음성에는 아무런 기복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킨 적이 없었다.
아니, 이 사람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모를 일이다. "당신이 알아두면 좋을 소식이 있소." "그게 뭐죠?" "단심백결회 내에서 이변이 생겼소.
듣기로는 장경신이 회주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하더군.
죄목은 사람을 보내서 화화궁을 친 것이라오." "어리석은 사람들이로군요." 군성초는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화화궁을 친 것은 장경신이 아니라 남궁격이었다.
그가 무당의 도사로 변복한 수하들을 풀어 화화궁을 기습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소위 십방좌란 자들이 그같은 얄팍한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단심백결회 내에는 인재가 없소.
그래서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오." "당신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죠? 단심백결회 내에 첩자가 있나요?" "내게도 사람은 있소." 그게 다였다.
단황은 구구한 설명을 하려 하지 않았고 군성초도 들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당신이 그런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죠?" "그냥…… 당신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그리고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알고 싶기도 하고." "뭘 어떻게 해요?" "단심백결회로 가서 그 모든 일이 거짓이라고 폭로할 수도 있지 않소?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텐데." "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나요?" "그런 것 같소?" 단황의 눈에 처음으로 빛이 일었다.
그러나 그 빛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오." "내가 그렇게 한다면 남궁격의 야망은 일거에 무너지고 말 거예요.
그리고 단심백결회는 수습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지게 되겠죠." "아마 그럴 것이오." "그리고 그건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되겠죠?" "물론이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군성초가 잘라 말했다. "단심백결회가 어떻게 되든 그건 내 관심 밖이에요.
화화궁은 이제 단심백결회가 아니니까요.
남궁격이 그렇게 회주가 되고 싶다면 하라죠.
흥! 그가 단심백결회를 어떻게 말아먹나 봐야겠어요.
내가 이렇게 나와서 실망했나요?" "그런 것 같소?" "난…… 모르겠어요." 군성초가 턱을 괴고 단황을 빤히 보았다.
마치 그의 눈을 통해 내심을 읽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황의 눈은 여전히 심유하기만 할 뿐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침내 군성초는 쓸데없는 노력을 포기하고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봐요.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뭐죠?" "내가 원하는 건 단심백결회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내 손에 쥐는 거요.
아니, 이런 표현은 적당하지 않군.
나는 천하가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바라오.
그뿐이오." "당신은 그렇게 될 거예요." 군성초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화화궁은 기꺼이 당신의 힘이 되어 주겠어요." "고맙군." 단황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돕건 돕지 않건간에 결과는 마찬가지요.
단심백결회의 최후는 멀지 않았소.
그들은 앞으로 한 달 이내에 무너지게 될 것이오." 나직하지만 단황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엄청났다.
바로 한 달 이내에 천하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엄청난 말을 단황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고 듣는 군성초 또한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일에 화화궁의 도움은 필요없소.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소.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으니까.
나는 사실 단심백결회 내에서 이번에 일어난 이변이 그다지 반갑지 않소.
나는 단심백결회가 더 강해지기를 바랬소.
적어도 나 단황의 적이라면 그래야 되니까.
하지만 단심백결회는 내게 실망을 안겨주었소.
그들은 너무나 무력했소.
그런 무력한 자들이 나의 상대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제는 그들을 무너뜨리는 일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소.
이건 사실이오." "당신다운 말이로군요." 군성초가 말했다. "당신은 강해요.
아마 세상에서 가장 강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을 꺾을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이 맞소." "나는 강한 남자가 좋아요." 군성초는 이제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저 정염이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단황을 보고 있었다. "좋아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면 구태여 관여하지 않겠어요.
나는 이제 편한 마음으로 화화궁으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하지만 당신이 언제든 화화궁을 한 번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입은 신세에 보답을 해야 할 테니까요." "그러겠소." 단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오." 군성초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시오." "물론 당신이 들어줄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이 들어줄 수 없는 일도 있나요?" 군성초가 말했다. "내 부탁은 아주 간단해요.
남궁격을 죽이지 말아 주세요." "그건 왜 그렇소?" "남궁격, 그자는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니까요.
그자는 내 몫이에요.
아시죠?" "알겠소." "그럼 됐어요." 군성초가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지만 나가 주시겠어요? 나도 좀 쉬어야겠어요.
그리고 내일 화화궁으로 돌아가자면 준비해야 할 것도 있고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축객령이기도 했다.
단황은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편히 쉬시오." "잘 가세요." 얼굴에 떨어지는 눈의 감촉이 좋다.
단황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 사이 하늘은 더욱 어두워졌으며 많은 눈을 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폭설이 될 것 같다. "좋은 눈이로군." 나직이 중얼거린 단황이 천천히 걸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한 그림자가 방금 단황이 있었던 자리에 서서 군성초의 거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로써 화화궁도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다." 음침하게 미소짓는 얼굴.
그는 지마였다. "망외의 수확이다.
후후…… 화화궁이 이처럼 쉽게 무릎을 꿇을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화화궁마저 떨어졌으니 이제 단심백결회의 전력은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지마는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두 눈에서 새파란 청광이 일었다. "한 번.
이제 한 번이다.
단 한차례의 싸움으로 천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스스슷 지마가 사라졌다.
그것은 그의 거대한 야심과는 달리 너무나 흔적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지마는 알지 못했다.
그 시간 또 하나의 눈이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눈이…… * * * 밤이 깊어지면서 눈은 더욱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휘이잉 휘잉 바람이 분다.
바람은 창문을 두드리고 달아났다.
창문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가는 틈새로 황소바람이 스며 들어온다.
하지만 그런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창문이 열렸다.
한 사람이 창문턱에 손을 얹은 채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었다.
백의의 청년이었다.
청년의 눈은 우물처럼 깊었으며 눈가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안색은 파리하고 창백하다.
어딘가 병색이 깃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각진 턱과 고집스레 다물어진 입만은 여전했다.
장경신이었다.
그가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고 있는 것이다. "뭘 보느냐?"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경신은 놀란 기색없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뒤에 만리추종이 서 있었다. "그냥……." 장경신이 중얼거렸다. "눈을 보고 있습니다." "이 밤에 눈이라…… 갑자기 감상적이 되다니 너답지 않군." 만리추종이 옆으로 와서 나란히 섰다.
그의 눈길 또한 펄펄 내리는 눈을 쫓고 있었다.
천결의를 걸친 노인과 병색의 백의청년이 나란히 서서 눈을 구경하는 모습은 조금 기이한 광경이었다.
한밤에 내리는 눈은 어쩐지 처연한 느낌을 준다.
눈이란 비와 달라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계절은 언제나 변함이 없군요.
작년에도 눈이 왔었죠.
그 전 해에도…… 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이 오고 봄이 되면 눈이 녹지요.
계절은 이처럼 변함이 없는데 사람만 자꾸 달라지는 것 같군요."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어째 듣기가 껄끄럽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장경신이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제가 가장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보니 이제껏 헛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든 남궁격이 원망스러우냐?"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장경신이 말했다. "남궁격을 원망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는 정직한 사람이지요.
그는 언제나 회주가 되기를 원했고 그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이제껏 살아왔으니까요.
사실 그처럼 자신의 목표에 정직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원망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소위 십방좌라는 사람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간사한 말 몇 마디에 속아 자신의 손으로 뽑은 회주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그들 역시 약하니까.
그들도 사람이니까……." "그렇죠." 장경신은 만리추종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도 사람이니까요.
이것이 약한 우리네의 모습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군요.
세상을 살아가는 게 참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은 네놈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삶이라는 것은 누구나 힘이 들지."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장경신이 고개를 돌려 만리추종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입니까?" "그게 궁금하냐?" "그렇습니다.
설마 십마한테 가는 건 아니겠죠? 전 아직 아저씨가 십마와 한패거리가 되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저씨는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후후! 너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놈이 그런 말을 하다니." "아무리 발등을 찍히고 거듭 속아도 다시 믿고 싶은 것이 바로 사람이니까요.
방금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약한 거라고." "네가 그처럼 궁금하다면 말을 하지 못할 것도 없지.
우리가 만나려는 사람은……." 그러나 만리추종은 말을 맺지 못했다.
장경신의 눈빛이 갑자기 변한 것이다.
그가 손을 뻗어 만리추종의 팔을 잡아챘다. "누가 있습니다." 그의 음성은 지극히 나직해서 겨우 만리추종의 귀에만 들릴 정도였다. "난 모르겠는데?" 만리추종은 얼떨떨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음성을 낮추고 있었다. "아닙니다, 분명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제겐 느껴집니다." 장경신이 소매를 흔들어 불을 껐다.
동시에 그는 만리추종의 팔을 끌어 옆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만리추종은 청력을 극도로 곤두세워 사방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장경신은 현재 무공이 폐쇄되어 몸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만리추종의 감각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또한 만리추종은 감각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청력을 돋우고 인체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도 아무런 느낌도 얻을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그가 평생 익숙하게 맡아온 살기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눈이 쌓이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릴 뿐이다. '이상하다.' 그런데도 장경신은 분명 누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경신이 느끼는 것을 그가 어째서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우리를 노리는 자들입니다.
하나가 아닌 것 같군요.
좋은 목적으로 온 자들은 절대로 아닙니다.
좋은 목적이라면 이렇게 완벽에 가깝게 자신을 감출 리가 없죠.
살기마저도 찬바람에 감추고 있는 자들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장경신이 만리추종의 귀에 더운 김을 뿜어내며 속삭였다. "아저씨, 정말로 저의 혈도를 풀 수 없습니까?" "안 된다." 만리추종의 음성이 장경신의 귀를 파고들었다.
전음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허영대사의 불현대비봉혈법은 불가의 독특한 점혈법이라 아무나 함부로 해혈할 수가 없다.
그 어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 어른이라뇨?" "그건……." 팟! 만리추종은 말을 맺지 못했다.
하나의 그림자가 유성처럼 날아가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림자는 섬전 같은 속도로 곧장 담 저쪽에 있는 노송을 덮쳐가고 있었다. "천노살성이다!" 만리추종이 소리쳤다.
어느새 삼절묵창을 뽑아든 복청양이 노송을 두 쪽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노송의 껍질이 갈라지면서 하나의 그림자가 치솟아 올랐다.
그림자는 허공에서 두 번 재주를 넘더니 마치 매가 병아리를 덮치는 것처럼 거꾸로 복청양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대단하구나!" 만리추종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그는 노송에서 나온 그림자가 검은 복면인이고 손에 짧은 검을 들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가슴에는 화려한 꽃 한 송이가 은실로 새겨져 있었다.
은화인(銀花人)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데도 복청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삼절묵창을 어지럽게 흔들어 무수한 창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창영의 수비망은 너무나 조밀해서 은화인의 무서운 기세에도 불구하고 뚫고 들어오지를 못한다. "쇄금십팔창법이로구나." 견문이 넓은 만리추종이 복청양이 전개하고 있는 수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은화인은 자신의 공격이 삼절묵창의 수비벽에 막히자 다시 신형을 뒤집어 위로 올라갔다.
이처럼 신형을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은 만리추종도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자가 누굽니까?" 장경신이 속삭였다. "글쎄…… 어디서 저런 자에 대한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데 얼른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만리추종이 이마에 깊은 주름을 그리며 낡은 머릿속을 뒤지는 사이 상황은 다시 변하고 있었다.
은화인은 허공에서 연속으로 세 번을 덮쳐왔으며 그때마다 복청양은 어김없이 그를 격퇴했다.
그다지 힘을 들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장경신이 내심 복청양의 능력에 감탄할 때 담이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속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쩌억 검은 곧장 복청양의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앗!"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놀라움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 검이 복청양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복청양은 여전히 삼절묵창으로 어지러운 창영을 만들어내면서 왼손을 뻗어 흐릿한 권영을 그려내고 있었다.
권영은 곧장 담에서 나온 자의 어깨에 떨어졌다. "좋다!" 장경신은 저도 모르게 신이 나 소리쳤다.
복청양의 일권이 암습자의 어깨를 부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암습자는 기묘하게 몸을 뒤틀더니 복청양의 손길을 피하여 그의 곁으로 바싹 들어왔다.
복청양의 주먹이 권(拳)에서 조(爪)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왼손을 수시로 변화시켜 암습자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상대의 병기와 손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HTML/스크립트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댓글은 최대 120자이며 페이지를 이동하지 않고 바로 등록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Copyright © webstoryboard.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