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뿐만이 아니었다. 혈마가 거느리는 일진과 가장 중요한 쇠마가 거느리는 주력군이 개방과 중원검보의 연합군을 뒤에서 무찌르기 시작했으며 거기에 힘을 얻은 환마가 진정 사나운 기세로 백도의 고수들을 쳐죽이고 있었다. 난전이었다. 그러나 그 난전의 결과는 점차 자명해지고 있었다. 단심백결회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미타불……." 허수대사가 가슴에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의 불호소리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허수대사의 곁에는 어느새 일곱 명의 소림십팔나한이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하지만 허수대사를 포함한 소림십팔나한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방금 허수대사를 척살한 검마 역시 피를 흘리며 신형을 휘청이고 있었던 것이다. "으…… 소림사가 이렇게 무섭단 말이냐!" 검마는 신음을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끝에서 하얀 백광이 일었다. 검도의 최고경지 중 하나인 검강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으악!" "아아악!" 비명소리가 일어나며 검마를 에워싸고 공격하던 소림십팔나한이 다시 세 명을 잃었다. 그러나 검마 역시 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신형을 휘청였다. "아미타불…… 검마시주!" 검마가 몸을 빙그르르 돌려 뒤에 버티고 서 있는 허영대사를 보았다. 허영대사는 전신이 피범벅이었으며 평소의 자애롭던 모습은 간곳이 없고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미타불, 시주는 악행을 너무 많이 저질렀소. 그러니 시주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을 세존께서도 아마 용서하실 것이오." 허영대사가 쌍장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러자 상상할 수도 없는 막강한 장세가 일어나 검마를 덮쳐왔다. 대반야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어림없다!" 검마가 소리치며 양손으로 검을 움켜쥔 채로 경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르르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검마의 검끝에서 하얀 검강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검강은 제 위세를 펼치지 못하고 대반야장의 경기에 눌려 점차 시들어갔다. 검마의 검이 마치 강풍을 만난 갈대처럼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검마는 그런 중에도 조금씩 허영대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허영대사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가 받는 압력은 더했다. 검마의 옷이 찢겨져 나가고 전신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검마는 여전히 검을 움켜쥔 채로 허영대사를 향해 다가왔다. 허영대사의 눈에 굵은 핏발이 돋더니 마침내 툭툭 터져 혈루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영대사는 여전히 강기를 늦추지 않고 검마를 압박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검마의 검이 허영대사의 가슴에 일 촌 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검마의 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춰 섰다. "으…… 진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검마의 입에서 울컥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아미타불, 용서하시오." 허영대사가 갑자기 몸을 쑥 뽑아올리며 일성의 진력을 더하는 순간이었다. 꽝! 벼락치는 소리가 나더니 허영대사의 허리가 반으로 꺾였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패마가 허영대사의 등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크윽!" 허영대사의 입에서 피화살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허영대사는 그런 중에도 자신이 받은 일격에 다시 힘을 더하여 검마를 후려치고 있었다. "아악!" 검마가 비명을 지르며 가랑잎처럼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검마를 꺾은 허영대사 역시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 세존이시여……." 허영대사는 짙은 어둠을 보았다. 한 점의 빛도 없는 짙고 짙은 어둠을……. 그것이 그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노강, 네 차례다!" 패마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수십 명의 흑의인들에게 둘러싸여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추혼수 노강을 덮쳐가고 있었다. 무숙신개는 허공으로 몸을 빼올리며 일장을 내리쳤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는 거듭된 악전으로 일신조차 가누지 못하고 기진맥진해진 환마가 있었다. "허억!" 환마는 환영을 만들어내며 무숙신개의 일격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기진한 그의 반응은 한 걸음 늦을 수밖에 없었고 그 틈을 무숙신개의 일격이 내리쳤다. 퍽! 두부 깨지는 소리가 나며 환마의 머리가 부서져 나갔다. "흐흐, 내가 죽였다. 내가 환마를 죽였다!" 무숙신개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광소는 이내 놀라움으로 변했다. "억!" 거대한 회색 기류가 무숙신개의 등을 덮쳐오고 있었다. 그 기류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기류에 대항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생각할 수도 없었다. "회회마라강!" 그것이 무숙신개가 내지른 마지막 말이었다. "또 하나가 끝났다." 무숙신개를 쳐죽인 쇠마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환마를 보았다. 그는 같은 십마인 환마의 죽음에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죽을 자는 죽어야지." 쇠마는 옆을 돌아보았다. 멀리 검제 금수근이 혈마와 악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금수근은 놀랍게도 혈마와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이 유일하게 용맹을 뽐내고 있을 뿐이었고 나머지 개방과 중원검보의 연합군은 이미 괴멸 직전이었다. 이충개의 당랑개가 이미 죽었고, 지주개만이 남아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조금 거들어야겠군." 담담하게 중얼거린 쇠마가 지주개를 향해 덮쳐갔다. 마지막 청소를 하려는 것이다. 진천창로 육등손은 암담한 절망감을 느꼈다. 도무지 전마의 빠른 움직임을 잡을 길이 없었다. 전마는 마치 수십 개의 환영을 거느리고 있는 것 같아서 어디를 보나 그가 있었고 어디를 보아도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바에는!' 육등손은 이를 악물며 전마의 환영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그 일장은 그의 전력이 담긴 것으로 무시무시한 위력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전마의 환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전력을 다한 육등손의 일격은 당연히 허공을 쳤으며 그의 신형이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쏠렸다. '흐흐, 걸려 들었다.' 전마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바람같이 육등손의 앞으로 다가들며 그의 가슴에 일격을 가했다.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번개 같은 일격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육등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당한 것은 바로 너다." 육등손은 자신의 가슴으로 닥쳐오는 일격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전마를 끌어안았다. "앗!" 그때 마침 육등손의 가슴을 꿰뚫고 있던 전마는 다급히 뒤로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이 아무리 빠르다 하나 그 움직임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으드득 육등손의 팔에 안긴 전마의 허리가 부러져 나갔다. 전마는 육등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가 참으로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피가 이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것이 그가 느끼는 마지막 피의 감촉이었으므로. 전마와 진천창로 육등손은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싸악 얇은 종이가 베어지는 소리가 났다. 쾌마는 취우선인의 몸이 두 동강나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지도 않았다. 취우선인에게 일격을 맞은 자신의 허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검을 검집에 밀어넣으며 약간의 허탈감을 느꼈을 뿐이다. "끝났군." 그가 중얼거렸다. 쾌마의 말마따나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무모하리만치 정면공격을 한 십마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십마 중 오 인이 죽었으며, 그들이 이끌고 온 흑도의 고수들도 절반 가량이 시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단심백결회의 피해는 더욱 엄청난 것이었다. 단심백결회를 이끌던 십방좌는 거의 대부분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여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으며 삼천여 명이 넘는 고수들도 칠 할 가량이 숨을 거두었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제는 십마과 맞서 싸우는 게 정의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도주하여 목숨을 건지는 것이 정의였다. 단심백결회는 사실상 괴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후, 긴 싸움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쾌마가 만족한 웃음을 흘릴 때였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단심백결회의 서쪽, 목책 위에서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일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전의 주인공은 혈마였다. 그는 짙은 혈선을 그리며 한 사람을 덮쳐가고 있었는데 그 기세는 가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혈마를 맞이하는 사람은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현 단심백결회의 회주인 무궁수사 남궁격이었기에. 혈마가 발출하는 가공할 혈류가 남궁격을 휘어감았다. 남궁격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모든 싸움이 끝난 것을 알았다. 너무나 철저한 자신의 패배로……. 그가 그토록 소망하던 야망도 이 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오너라." 남궁격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소매가 둥글게 부풀어 오르더니 무서운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기세는 혈마의 붉은 기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우르릉 천둥치는 소리가 났다. "크윽, 이 정도였단 말인가!" 혈마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도주하는 남궁격을 발견하고 그를 뒤쫓아 앞을 막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오히려 손해를 보고 만 것이다. 그러나 혈마는 물러서지 않고 머리칼을 뻣뻣이 곤두세우며 다시 쌍장을 흔들었다. "남궁격, 너는 오늘 내 손에 죽는다!" 우우웅 공기가 거센 파동을 일으켰다. 무형의 공기가 거대한 바윗돌처럼 유형화되어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 엄청난 기세였다. 그러나 남궁격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유형화된 공기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차앗!" 그의 우수가 투명하게 변하며 경기를 내리쳤다. 그러자 공기가 두 쪽으로 갈라지며 혈마의 놀란 얼굴이 드러났다. "혈마, 가거라!"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남궁격이 바싹 혈마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동시에 그의 소매가 펄럭이며 검은 빛줄기 하나가 혈마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지금까지 그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 무궁시가 시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무궁시를 피한다는 것은 아무리 혈마라 하나 무리였다. "으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검고 가는 화살 하나가 혈마의 목젖에 꽂혀 있었다. 혈마의 목에서 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혈마의 피도 일반 사람이나 똑같이 붉었던 것이다. 그러나 혈마는 그런 와중에서도 바싹 접근한 남궁격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끄윽, 끅!"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혈마는 뭔가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조금만 힘을 주면 남궁격을 죽일 수 있는 이 상황에서 뭔가 결정적인 말을.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목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면서 그의 손에 잡혔던 남궁격의 가슴에서 살점이 한줌 떨어져 나갔다. "으윽!" 남궁격이 가슴을 움켜쥐며 휘청했다. 혈마는 단순히 그의 살점만을 가져간 것이 아니었다. 살점과 함께 그의 손에서 주입된 진력이 내장을 진탕시켜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남궁격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남궁격." 뒤에서 차가운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남궁격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보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너무도 날카로운 기세가 그의 등판을 둘로 갈라왔기 때문이었다. "으악!"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씻은 듯이 검광이 사라진 자리에 아직도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팔 하나가 떨어져 퍼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팔 하나를 떼어준 남궁격은 어느새 목책을 넘어 달아나고 있었다. "제법이군." 쾌마가 피 묻은 검을 든 채 중얼거렸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그의 검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남궁격은 겨우 팔 하나만을 던져주고 달아나 버렸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백 번 칭찬을 해주어도 모자랄 것이다. 쾌마는 피 묻은 검을 옷에 닦고 검집에 밀어넣었다. "왜 쫓아가서 그를 죽이지 않았나?" 쾌마가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쇠마를 보았다. "나는 두 번 손을 쓰지 않소." "하긴……." 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언제나 그랬지." "차라리 잘 되었지요." 말을 거든 것은 지마였다. 그는 거대한 체격의 패마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는데 처절한 격전을 치른 것치고는 옷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그는 십마 중에서 직접 손을 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인 것이다. "마주께서는 무궁수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으셨소. 그를 죽일 사람은 따로 있지요." "날수염적 군성초 말인가?" "그렇습니다." "마주는 그 여자에게 너무 깊이 빠져 있어. 그게 걱정이야."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지마가 웃음을 흘렸다. "영웅에게는 언제나 여자가 따르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마주도 여자를 하나 맞이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군성초는 그런 의미에서 적임자지요." 목책 아래에서는 아직도 처절한 살육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마무리였을 뿐이었다. 이미 조직적인 저항은 끝났기 때문에 십마가 직접 나설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우리 넷만 남았나?" 쇠마가 남아있는 일행을 둘러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십마. 그 공포의 이름이 이제 겨우 넷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넷이라면 좋은 숫자지요. 아주 적당합니다." 놀랍게도 지마는 그 와중에서도 웃을 여유가 있었다. "단심백결회를 무너뜨린 대가로 여섯을 버렸다면 아주 양호한 게 아닐까요? 모든 것이 계획대로입니다." "그렇군. 이제 마무리만 남았어." "그렇죠. 마무리만……." 지마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태양은 밝다. 하지만 저 하늘은 그가 예전에 보던 하늘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그가 원하던 세상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우린 모두 밑거름입니다. 그걸 실행할 때가 되었습니다." * * * 소문은 바람보다도 빠르다. 단심백결회가 붕괴되었다. 그 놀라운 소식은 무림인들의 가슴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설마 설마 하던 일이었다. 십마가 아무리 무섭다 하나 단심백결회는 무사할 줄 알았다. 단심백결회는 백도 그 자체였으며 천하무림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희망이었기에. 그러나 그 단심백결회가 무너졌다. 그것도 악의 대명사인 십마에 의해서. 아…… 이제 밝음은 끝나고 어둠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세인들은 문을 꼭꼭 처닫고 두려운 눈망울을 굴렸다. 그들이 보기에 희망은 전혀 없었다. 악이 창궐하고 짙은 어둠이 천하를 지배할 시간은 이제 그리 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짙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빛은 존재했다. 그리고 그 빛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천하대협 단황. 그가 빛의 근원지였다. 세인들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의 탄성을 질러야 했다. 십마가 무너졌다. 단심백결회를 무너뜨리고 영원한 악의 제국을 건설한 것 같던 십마. 그들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의 제국은 단 삼일천하로 끝이 났으며 밝음이 다시 찾아왔다. 정의지성의 성주이며 천하대협이기도 한 단황이 일백정의단(一百正義團)을 이끌고 십마를 친 것이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던 십마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쾌마가 단 일검에 쓰러졌으며 무참하게 패한 패마는 분을 못 이겨 스스로 자결을 했다고 한다. 십마의 우두머리인 쇠마는 십여 초를 단황과 싸웠지만 끝내는 그의 검 아래 이슬이 되었다고 하던가. 십마의 두뇌 역할을 하던 지마도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불명이었다. 아마 그도 죽었으리라. 깊은 산속에서 쓸쓸하게, 이리의 먹이가 되어……. 일백정의단. 새롭게 떠오른 찬란한 이름. 그들 중에는 백도의 인물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한때 흑도를 휩쓸던 거마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괘념치 않았다. 그저 십마가 쓰러진 것을 기뻐하며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며 눈물을 흘렸다. 천하대협 단황. 그는 새롭게 떠오른 무림의 중심이었으며 태양이었다. 그리고 단황은 놀라운 선언 하나를 했다. 천노살성 복청양. 그 잔인한 살수가 단황에 의해 사로잡혔는데 곧 그를 처형한다는 것이다. 제 32 장 살인(殺人) 어둠이 짙다. 그 짙은 어둠 속을 하나의 그림자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림자는 검은 야행의를 걸쳤는데 어둠 속에서 움직이면서도 어둠과 하나로 동화된 듯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오늘따라 달도 없는 밤이다. 그믐이 가깝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눈이 내리려는 참이거나……. 단심백결회. 그림자는 그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단심백결회는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호성하는 시체로 뒤덮였고 물은 말라 있었다. 그토록 단단하던 목책도 사방이 부서져서 형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수많은 전각들도 거의 허물어져 황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두 번에 걸친 대격전. 그것이 단심백결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단심백결회 내에는 지금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백정의단이라고 했으며 흑도와 백도를 망라한 초절한 고수들이었다. 몇 개의 성한 전각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여기에 사람이 기거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단심백결회 곳곳에는 아직도 시체가 널려 있었고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치운다고 치운 모양이지만 워낙 엄청난 일이 있었던 후라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림자는 그 어수선한 사이를 교묘하게 누비며 잠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천노살성.' 그림자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한 것이다. 사람이다. 그는 그늘로 몸을 숨겨 그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다시 움직였다. '가짜 천노살성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를 내 대신 죽게 할 수는 없다. 그자를 구해내면 단황의 음모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니 이 모험은 해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 소리없이 움직이는 그림자. 그는 복청양이었다. 운유애를 내려온 그는 단심백결회로 달려오다가 이미 단심백결회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어 천하대협 단황이 십마를 처단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것은 분명 음모였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그 검은 속을 알 수 있는 음모. 도대체 단황이 십마를 처단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십마와 단황은 원래부터 한 몸이 아닌가. '단황은 우리의 예측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그자는 흑도가 아니라 백도의 탈을 쓰고 나타났다.' 지금 세인들은 단황의 존재를 구원의 등불로 여기고 있었다. 검은 구름을 일거에 몰아낸 태양 같은 존재.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허황된 속임수인가. 더구나 단황은 이제는 완전히 악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천노살성을 처단한다 하지 않는가. 그 소식이 복청양을 결심하게 만들었고 이처럼 단심백결회로 스며들게 한 것이다. '그가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단황의 야망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피해자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를 구해야만 한다.' 천품신성이나 만리추종이 알았으면 기겁을 했을 무모한 도전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복청양은 몇 개의 전각을 타고 넘었다. '저곳이다.' 복청양의 눈이 번쩍인다. 멀지 않은 곳에 절반쯤 부서진 전각이 한 채 있었다. 다른 전각들이 겨우 가는 불빛만을 흘리고 있는 데 반해 이곳에는 입구에 커다란 횃불이 너울너울 타고 있다. 횃불 주위에는 네 명의 백의검수가 둘러앉아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지만 다른 두 명은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사방을 감시하고 있다. 확실히 다른 전각들과는 차이가 나는 곳이다. 복청양은 단심백결회로 잠입하면서 이미 일백정의단 하나를 잡아 천노살성이 갇혀있는 곳을 알아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이곳에 이를 수 있었다. 복청양은 어둠에 숨어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저 안에 가짜 천노살성이 있다.' 누구일까. 그의 행세를 하며 저들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고 다시 저곳에 갇혀 처형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일단 그런 생각은 다음에 하자.' 복청양이 움직였다. 그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응?" 백의검수 하나가 돌연 신경을 곤두세우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왜 그래?" 옆에 있던 동료가 물었다. "모르겠어." 처음 신경을 곤두세운 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은밀하고 신속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살기는 아니었다. 살기라면 그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가 모를 리 없다. 부드러우면서도 은밀한 기운. 그것은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따뜻한 훈풍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였다. 그자의 코앞에 불쑥 하얀 손이 솟아오른 것은. "앗!" 그자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각도로 휘어지며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욱!" 그자는 칠공에 피를 흘리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혼절하고 만 것이다. "누구냐?" 남은 하나가 다급히 검을 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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