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그는 마케팅 부서 중에서도 직접적인 대인 홍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동안 대학 전공인 화학을 잘 살려서 여러 가지 향수나 반짝이는 색깔 등의 아이디어를 내보고는 했지만 번번히 팀원들에게 묵살당했다.
마케팅 부서 중에서 그와 같은 방에서 근무하는 팀원은 경석까지 모두 4명.
다른 3명은 전부 여자들이다.
평소 대학 다닐 때 혼자만의 연구에 몰두하던 경석으로서는 사람들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는 일이 여간 힘들고 낯선 게 아니었다.
거기다 학창 시절부터 여자들에게는 쑥맥이었던지라 미혼 여상사들을 만족스럽게 모시기는 거의 불가능이었다.
경석이 있는 부서가 신설된 하부 조직이어서 틀을 잡아주기 위해 잠시 내려와 있는 중이다.
일처리가 워낙 완벽하고 깔끔하며, 동시에 남자들에게는 지극히 사무적으로만 대해서 얼음여왕이라는 별병을 지니고 있다.
이지적인 얼굴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 그리고 검은색 바지 정장을 고집하는 게 트레이드 마크다.
자기 능력만큼이나 남자들을 무시하기로 유명하다.
회사에서는 그녀의 탁월한 업무 능력을 높게 사주고 있으며, 특히 회장이 여성이고 임원의 70% 이상이 여성인 이 회사의 특성과도 부합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 보니까 어느새 집에 오면 항상 냉장고에 가득찬 병맥주를 꺼내 취할 때까지 마시다 쓰러져 자는 게 일이 된지 오래였다.
토익은 900점도 안 되었고 학교 성적은 평점 2.8이었다.
마침 경석이 지원했을 때 운좋게도 (회사 입장에서는 운 나쁘게도) 지원자가 일시적으로 미달되어서 합격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렸었다.
즉석에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라...흐음...
대학교 때 경석이 몰입하던 분야가 바로 동물 페로몬이었다.
당시에는 졸업에 급급해서 본격적인 연구는 하지 못 했지만, 각종 전문 서적과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 그 누구보다도 페로몬의 구조식과 성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계획서를 작성해서 내면 분명 승희가 트집 잡고 비아냥 거리고 자를 게 뻔하기 때문에 일단 무언가를 만들어서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다.
누군가 실험 대상이 필요한데...그래!’
출근시간보다 1시간이나 더 이른 시간이어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여자 화장실에 몰래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고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뚜껑을 닫자 방향제가 자동으로 시약을 분무했다.
한번 분무할 때마다 시약 1ml씩 나오니까 3-4일이면 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여자들은 모두 이 합성 페로몬의 영향을 받게 될 거다.
어차피 실패해도 난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고.
아...떨리는구나.’
승희에게 먼저 말을 건 여자는 부팀장인 안지원이었다.
28살로, 승희를 우러러 보며 자신도 승희와 같은 커리어우먼이 되고자 마음 먹고 사는 여자다.
승희와는 달리 경석을 갈구기보다는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며 상대를 안 하는 편이다.
뭐라고 할까...말로 표현하기는 좀 그런데 암튼 평소 나던 그 향기는 아닌 것 같더라.
그래도 뭐...방향제가 상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될데로 되라.
어차피 이런 식으로 사느니 된통 당하고 회사를 떠나던가 하자.’
순간...지원은 약간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죠 뭐.
마경석씨도 같은 팀원이니까 한잔 갖다주죠 뭐.”
입사해서 4개월이 지난 동안 출퇴근 시간 때 인사 외에는 거의 해본 적도 없는 지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그래...한번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은혜는 나이는 24살로 경석보다 아래지만 회사는 먼저 들어왔다.
단아하고 동양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으며, 두 여자 선배들에게는 깍듯이 대하지만 경석은 나이와 상관 없이 완전 아랫 사람 부려 먹듯이 대하고는 한다.
게다가 자신이 해야 할 일들도 거의 항상 경석에게 맡기는 편이라, 경석은 그 때문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곤 했다.
“정선배님!”
호호호.
”
특히 정선배 다리가 정말 예뻐요.
각선미가 아주 죽이는데요? 평소에도 항상 치마 입고 다녀봐요.
굳이 아름다운 몸매 숨기려고 하지 말구요.”
은혜에게 이런 말투로 편하게 얘기한 건 입사 첫날 뿐이었다.
경석은 그 날 이런 식으로 만만하게 말했다가 하루종일 질책 당하고 1주일을 밤샘 근무로 시달린 뒤 어제까지 깍듯한 존대말만을 써왔다.
경석은 이미 뒤가 없었다.
은혜의 표정은 아까 지원의 표정처럼 약간 미묘해진 순간이 나타나더니 이내 곧바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그리고는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그런가? 알아주는 사람이 경석 씨밖에는 없네?”
천만에요.”
그리고는 상념에 잠겼다.
은혜와 지원은 외부 계약 수주 건으로 출장을 나갔고, 사무실에는 승희와 경석 둘만이 남았다.
“팀장님.”
“네? 무슨 일이죠?”
“계속 그렇게 일만 하시느라 많이 피곤하시죠?”
“아 네에...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오래 일하면 목이 뻣뻣해서 안 되요.
아무래도 목과 어깨 부위 마사지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네? 마사지요?”
“네, 자, 마우스 놓고 이렇게 의자에 몸을 기대보세요.
제가 확실하게 주물러 드릴께요.”
게다가 경석의 말을 들으면서 실제로 자신의 목과 어깨가 굳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감촉 좋다...’
내 손이 약손이에요.
점점 목과 어깨에 힘이 빠질 거에요.”
승희는 점차 몸이 나른해지는 걸 느끼며 정신도 몽롱해져갔다.
완전히 내 손아귀에 떨어지는구나.
이 참에 아예 최면까지 시도해볼 수도 있겠는데?’
하나아...두우울...세에엣...네에엣...”
“자아...좋아요...이제 승희씨의 몸은 완전히 풀렸어요.
몸 어디에도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요.
지금은 단지 그동안 회사를 위해 혹사했던 승희씨의 몸에게 소중한 휴식 시간을 주는 거에요.”
“하지만 몸만 휴식을 취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에요.
몸과 마음은 하나이니까, 몸이 쉬면 마음도 소중한 휴식을 취해야겠죠?”
“네에...”
“좋아요.
그동안 승희씨는 너무나 많은 결정을 내리고 너무나 많은 생각들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어요.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내 목소리를 듣기만 하면 되요.
알겠죠?”
“네...그럴께요...아무 생각도 없이...듣기만 할께요...”
“좋아요...내 목소리는 믿음직스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질 거에요.
그런가요?”
“네...듣고 보니까 정말 그래요.
경석씨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 수록 더 듣고 싶어지고...부드러우면서도 강해요...아...계속 말씀해주세요.”
“네.
승희씨는 그동안의 내 모습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나는 게 있나요?”
“아마 생각하려 해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을 거에요.
그냥 자기 맡은 일 열심히 하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생각 밖에는 없었을 거에요.
그렇죠?”
그동안 따로 관심을 갖지 않아서...그냥 워낙 혼자 일을 열심히 잘 하니까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생각해서 믿는 게 아니라, 믿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생각하거든.’
“자...지금 이순간부터 승희씨는 나, 마경석의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될 거에요.
내 목소리만큼이나 자상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남자답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런 모습들 말이에요.”
“네...그럴 거에요...”
“그리고 당분간은 매일 내가 특별히 시간을 내서 승희씨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거에요.
승희씨는 단지 나에게 몸과 마음을 그대로 맡기기만 하면 되요.”
“네...전부 당신께 맡길께요.”
“그래요.
말을 잘 들어서 참 착하네요.
평소에도 승희씨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마음이 편해지고 나에게 따르고픈 마음이 들 거에요.
왜냐면...당신은 이미 나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맡기기로 했으니까요.
그렇죠?”
“네...그래요.
저는 경석 씨에게 저의 몸과 마음을 모두 맡기기로 했어요.
평소에도 경석씨 목소리와 눈빛에 따를 거에요.”
그럼 지금 눈을 떠서 나를 쳐다봐요.”
앞에는 자신만만한 표정의 경석이 따뜻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훗.
승희씨, 오늘 내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아주 편해질 거에요.
앞으로도 계속 내 말에 따르도록 해요.
그럴 수록 승희씨는 점점 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겠죠?”
“네...경석씨의 말에 계속 따르겠어요.
아...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봐요.”
“자...그럼 이 행복한 기분을 그대로 느끼면서 내가 다섯에서부터 하나까지 세는 동안 승희씨의 몸에 점점 힘이 돌아올 거에요.”
“네에...”
“자아, 다서엇...네엣...세엣...두울...하나아...”
그리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경석을 바라보았다.
“아...경석씨 너무 고마워요.
몸과 마음이 진짜 상쾌해요.
정말 앞으로 매일 해주시는 거죠?”
승희씨에게 도움이 돼서 다행이에요.”
‘이 도도했던 년이 완전히 야들야들하게 녹여서 제발 박아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만들테다.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