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폭 풍 의 사 나 이 수라마검(수라마검) 손우곤(손우곤)! 그는 당금 강호가 배출해낸 최절정의 고수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그를 백 년내의 마도제일검사(마도제일검사)라고 불렀다. 그는 수라단홍검(수라단홍검)에서 뿜어지는 빛살같은 칠절마왕검법(칠절마왕검법)은 수십 년간 적수를 만나지 못했 다. 헌데 어느 날 그에게 조용히 한 사나이가 찾아왔다. 허름한 백의에 녹슨 철검(철검)을 찬 그 사나이가 비무(비 무)를 청해 왔을때 손우곤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 이었다. 허나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백의인의 단 일검(일검)에 피를 토하고 쓰러지며 그 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외쳤다. "다... 당신은 누구요?" 백의인은 자신의 녹슨 철검 철검 끝에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화군악(화군악)!" 그것이 수라마검 손우곤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말 이었다. 무영마장(무영마장) 전무극(전무극)! 그는 오직 쌍장(쌍장)만으로 강북무림계(강북무림계)를 석권 한 일대의 고수였다. 수 백번의 생사를 건 격투중 그는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헌데 자신의 사십 세 생일을 맞는 날, 그는 한 장의 하얀 배 첩을 받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 비무를 청하오. 화군악 배상(화군악 배상). 전무극은 그 배첩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다가 친구들을 술좌 석에 남긴 채 잠시 밖으로 나갔다. 바로 화군악이라는 이 겁없 는 미친 놈을 때려잡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친구들이 살아있는 그의 모습을 본 마지 막 순간이었다. 진궁(진궁)이 그 사나이를 처음 본 것은 어느 이름모를 허름 한 산봉에서 였다. 마치 한 개의 바위처럼 그 사나이는 묵묵히 서 있었다. 비무첩을 받고 산정(산정)으로 올라온 진궁은 장대한 체구를 백의에 감추고 산발한 머리를 들어 오연히 천공(천공)을 바라 보고 있는 그 사나이에게서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귀하가 화군악이오?" 산서성(산서성) 제일의 고수로 알려진 혈화도(혈화도) 진궁 은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진 궁은 자신이 신(신)을 보았음을 느끼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청천벽력(청천벽력)! 구주천하(구주천하)가 온통 한 줄기 노도와 같은 폭풍에 휩 싸여 버렸다. 한 사나이가 나타난 것이다. 허름한 백의 한 벌. 무표정한 얼굴에 냉막함을 가득 담고 녹슨 검 하나를 허리에 달랑 매단 채 그는 나타났다. - 아무도 그의 일검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노라하는 절정의 고수자(고수자)들만 찾아다니며 비무를 하건만 아무도 그의 비무행(비무행)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다. 그는 무(무)의 신(신)으로 여겨졌고, 무적(무적)의 초인(초인) 으로 불리웠다. 오직 그 하나로 인해 백 년 동안 잠잠하던 강호가 온통 풍운 으로 뒤덮혔고, 일협쌍마삼기사절(일협쌍마삼기사절)로 대변되 던 당금 강호의 최고 고수의 서열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흡사 한 줄기 거대한 폭풍처럼 나타난 사나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제1장 천 하 제 일 일, 미 여 그 사나이가 온 것은 해가 막 서산마루를 넘어가려 할 때였 다. 세상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그는 장원(장원)으로 들어섰다. 허름한 백의.... 장대한 체구.... 머리를 산발해 장발을 어 깨에 늘어 뜨린 채 허리에는 녹슨 장검 한 자루를 차고 그는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허나 몹시 규칙적이 어서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는 일정한 보폭을 때며 넓은 연무장(연무장)의 한 가운데 로 들어섰다. 반경 오십 여장이나 되는 연무장의 주위에는 청 의무복(청의무복)을 걸친 장한들이 수 백명이나 늘어서 있었 다. 허나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의 시선은 경외 (경외)와 두려움의 빛을 띈 채 허름한 백의사나이에게 고정되 어 있었다. 백의사나이는 연무장의 중앙에 우뚝 선 채 하늘을 올려다 보 았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섬전창(섬전창) 섭자웅(섭자웅)은 어디 있느냐?" 그의 목소리는 비록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것에는 사람의 마 음을 움직이는 기이한 힘이 실려 있어 듣는 사람의 가슴을 떨 리게 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희미한 잔광(잔광)이 그의 철탑같은 몸과 산발한 얼굴에 비치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 금 공포스럽고 거대하게 느끼게 했다. 섭보옥(섭보옥)은 그 백의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 해서 시력을 돋구었다. 보면 볼수록 가슴이 떨리는 모습이었다. 산발한 머리는 금시 라도 휘날려 귀신의 호곡성(호곡성)을 울릴 것 같았고, 희미하 게 드러난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굳어 있어 정녕 석고상 을 보는 듯 했다. 허나 그녀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남을 두려워 해 본 적이 없 었다. 남자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그 녀를 한 번 본 후에는 그녀에게 두려움을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오랜 장마끝에 떠오른 태양(태양)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나타나면 주위의 모든 것이 빛을 잃어 버 렸다. 그녀의 나이가 열 일곱이 되었을 때 그녀는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들의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녀를 한 번이 라도 본 사람은 누구나가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고, 눈이 게슴츠레 해지기 때문이었다.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볼때마다 얼굴을 붉히지고, 말을 더듬지도, 눈 이 게슴츠레 해지지도 않았다. 다만 온화한 미소를 머금을 뿐 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 그녀의 뒤에 우뚝 선 채 그녀와 마찬가지로 백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비단으로 된 청의(청의)를 입은 준수한 중년인이었다. 청의중년인은 문득 고개를 돌려 섭보옥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의 걸음걸이가 무척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의 음성은 진중하며서도 부드러웠다. 섭보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는 마치......"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혀로 붉은 입술을 살짝 적시며 입을 열었다. "자(척)로 잰 듯 걷고 있군요." 청의중년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공교롭게도 네 말은 아주 정확했다. 일전에 확실히 누군가 가 저 사람의 보폭을 자로 잰 적이 있었지." "그런 쓸모없는 일을 한 사람이 누군지 알겠군요. 그는 필시 남이 일에 참견하기 좋아한다는 평지풍파객(평지풍파객) 사마 결(사마결)이겠지요?" "그렇다. 사마결은 무려 한 달간이나 저 자의 뒤를 몰래 따 라 다니며 발자국의 흔적이 남아 있을 때마다 자로 그 간격을 쟀다. 한 달동안 그는 천 이백 열 아홉 번을 쟀는데 결과는 언 제나 똑같았다. 그의 보폭은 정확하게 한 자 일곱 치였다. 조 금도 더 걷거나 적지 않고 언제나 일정하게 한 자 일곱 치를 유지했지." 섭보옥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청의중년인의 표정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한 가 지 사실을 뜻한다. 그것은 저 자의 전신(전신)이 완전히 자신 의 의지(의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다." "의지의 지배라고요?" "그렇다. 아무리 무공이 높은 무예의 달인(달인)이라 하더라 도 자신의 몸을 자신의 생각대로 완전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허나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전신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자야 말로 무(무)의 신(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섭보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청의 중년인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 다. 우내십대고수(우내십대고수) 중의 한 사람이며, 한 평생 누 구를 두려워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냉정하고 자신 만만하며, 한 번 창을 잡으면 천하에 적수가 없는 무적(무적) 의 고수였다. 허나 지금 그녀는 마음 한 구석에 불안이 솟구치는 것을 억 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다른 사람을 이토록 칭찬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이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의 불안을 씻으려는 듯이 청의중년인을 바라보 며 물었다. "하지만 아버님의 상대는 되지 않겠지요?" 청의중년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아직 내 몸을 완전한 의지의 지배하에 두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문득 청의중년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또한 그 녀가 태어나서 처음보는 모습이었다. "사실 저 자의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십중 칠팔의 승산(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헌데 직접 그를 보게 되 니...... 아무래도 자신이 없구나." 그녀의 안색이 조금 더 파리해졌다. 청의중년인은 두툼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 만졌다. "너는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여자다. 여인(여인)의 몸 으로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르기는 무척 어렵다. 여인은 남자에 비해 선천적으로 체질이 뒤지기 때문이지. 하지만 너라면 충분 히 여중제일인(여중제일인)이 될 수 있다." 청의중년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직하나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내가 패하거든 너는 즉시 길을 떠나거라." 섭보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산(화산)의 태극동(태극동)에 가면 동곽선생(동곽선생)이 란 분이 계시다. 네가 내 복수를 하고 싶거든 무슨 수를 써서 라도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아버님......" 섭보옥의 영롱한 눈가에 뿌연 물막이 피어 올랐다. 청의중년 인은 온화하나 엄격한 눈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했 다. "군자(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법 이다. 나의 목숨은 이미 무도(무도)의 정신(정신)에 바친 것이 다. 너라면 나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이어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 어나갔다. "내가 바로 섭자웅이오!" 일협쌍마삼기사절의 십대고수중 창절(창절)로 알려진 섬전창 섭자웅은 백의인을 마주 보고 우뚝 섰다. 이, 기 재 산정(산정)의 바람은 차가웠다. 모용수(모용수)는 불어오는 산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무릎 을 꿇은 채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화군악은 칠십 년 전 천하제일가(천하제일가)로 이름을 떨 치던 화씨세가(화씨세가)의 유일한 혈맥이다. 당시 화씨세가는 천하일통(천하일통)의 야망을 품었다는 이유로 전 무림인들의 협공을 받아 무너졌지." 모용화린(모용화린)은 자상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보아도 모용수는 준수했다. 나이 세 살 때 처음 글을 읽기 시작했고, 다섯 살 때 사서오 경(사서오경)을 독파했으며, 일곱 살 때는 벌써 스스로 시를 지었고, 나이 열두 살 때는 더 이상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 그 뒤로 오 년 동안 천하의 서고(서고)를 돌아다니며 온갖 서적을 탐독한 일대의 천재가 바로 모용수였다. 자신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모용수는 정녕 고금제일(고금제 일)의 기재라 할 만 했다. 모용화린은 자신에게 그런 아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한 기쁨과 함께 씁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화군악은 당시 혈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화비홍(화비홍) 의 손자이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검을 잡았고, 이십 세 때는 스스로 일가를 이룰 만큼 뛰어난 무예의 경지에 올라섰으며, 나이 삼십에 천하무적(천하무적)이 된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당금 무림에서 그의 적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모용화린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협쌍마삼기사절을 합쳐 우내십대고수라고 부르지만 그들 의 무공은 서로 같지가 않다. 얼마 전에 화군악에게 쓰러진 사 절(사절) 중의 섬전창 섭자웅은 비록 천하의 고수이지만 쌍마 (쌍마)나 삼기(삼기)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쌍마나 삼기도 일 협(일협)에게는 한 수 뒤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협만이 화군악과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모용화린의 별빛같이 서늘하게 빛나는 눈은 준수한 모용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너는 그들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천하제일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용수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휘이---이---잉! 다시 한차례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백의와 머리에 맨 두건을 휩쓸고 지나 갔다. 모용수가 태어나기 전에는 천하제일의 기재라 불리웠던 모 용화린은 임풍옥수같은 아들의 모습을 응시하다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너는 이제 화산으로 가야 한다. 태극문(태극문)의 무공만이 화씨세가의 무공과 겨룰 수 있다. 네 머리라면 충분히 태극문 의 절기를 익혀 화군악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사이로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 다. "천문서생(천문서생) 모용화린(모용화린)! 화군악이 왔소." 그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이상한 힘이 실려 있어,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에서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척에서 외 치는 듯 했다. 모용화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한 곳을 바라보 았다. "정각에 나타났군." 모용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허나 그의 몸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용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그를 내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네 지혜는 확실히 전하제일이다. 네가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너는 십 년 내로 내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용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용화린의 음성은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모용수는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무릎을 꿇고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화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 다. 모용수는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산정의 저 너머를 바라보다 가 몸을 돌렸다. 그는 아주 똑똑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자신의 부친이자 우내십대고수의 삼기(삼 기)중 하나인 천문서생 모용화린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 을....... 삼, 도 객 도(도)는 날카로웠다. 무시무시한 칼바람을 내며 질풍처럼 회전하고 있는 도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순식간에 상대를 베어 넘길 것 같았다. 슈슈슈슈슈--! 사방천지가 온통 칼날로 인해 시퍼렇게 변해 버린 것 같았 다. 허나 미친 듯 휘몰아쳐 오는 칼바람속에 우뚝 서 있는 백의 사내는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허리에 찬 장검을 뽑지도 않았 고 두 눈마저 감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파파파파파...! 칼날이 다시 찰나간에 열 여섯 번의 변화를 일으키며 무시무 시한 도광(도광)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누가 보기에도 백의사내의 몸이 순식간에 피를 뿌리며 쓰러 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번---쩍! 사방을 뒤덮은 섬찝한 도광사이로 한 줄기 하얀 광채가 번뜩 였다. 그것은 마치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한 가닥 뇌전(뇌전)이 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도광은 어느 새 씻은 듯이 걷혀졌다. 그와 함께 도광속에 갇혀 있던 백의사내의 모습이 다시 드러 났다. 어느 틈에 뽑아들었는지 백의사내의 오른 손에는 녹슨 장검 이 쥐어져 있었다. 장검의 끝부분에서 한 방울 한 방울씩 진한 선혈이 흘러내렸다. 백의사내는 천천히 장검을 허리춤에 집어 넣은 후 몸을 돌려 사라져 갔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무시무시하게 도를 휘두르던 인물은 그가 사라져 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쿵! 그의 몸은 썩은 고목이 벼락을 맞듯 맥없이 땅에 쓰러졌다. 그제서야 위지혼(위지혼)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쓰러진 사람의 양미간에는 두 치 가량의 검흔(검흔)이 나 있 었고, 그 사이로 미미한 혈흔(혈흔)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억지로 눈을 떠 위지혼을 바라보았다. "자... 잘 보았느냐?" 그의 입에서 미약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위지혼은 묵묵히 고 개를 끄덕였다. 그 인물의 입가에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는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이... 인간의 무예에는 무엇이든 헛점이 있기 마련이다. 화 씨세가의 검술은 전문적으로 이 헛점을 노리는 것이기 때문 에...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허... 허나 칠십 년전 화씨세 가가 혈겁을 당했을 때 그들의 무공을 깬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태극문의 창시자인 태극천자(태극천자)다..." 쓰러진 인물은 숨이 가뿐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미 약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태극천자가 죽은 후 그의 절기를 익힐만한 인재(인재)가 없 어서 태극문은 비록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당금의 문주(문주) 인 동곽선생은 태극천자의 무공을 익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 이다..." 이어 그는 흐릿한 눈으로 위지혼을 올려다 보았다. 마치 야수를 연상시키는 위지혼의 차갑고 무심한 눈은 조금 도 변하지 않은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냉정한 태도와 거친 모습에 쓰러진 인물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려냈다. "너... 너는 천부의 승부감각을 지니고 태어난 놈이다. 그 감각에 태극천자의 무공이 합쳐진다면... 화군악을 물리칠 수 있을 것... 이... 다..." 그의 목소리가 점차 약해지다가 나중에는 끊겨 버렸다. 아울 러 그의 고개 또한 힘없이 수그러졌다. 위지혼은 식어가는 그의 몸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거의 들 리지도 않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게는 훌륭한 사부였소, 우문황(우문황)! 하지만 당신은 패했소."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이 밀림속에서 포효하는 맹수의 그것처럼 무시무시하 게 번쩍거렸다. "나는 절대로 패하지 않을 것이오. 누구에게도......" 우내십대고수의 일인(일인)이자 천하제일의 도(도)의 명인이 라 불리우는 도절(도절) 홍황도(홍황도) 우문황의 시체를 뒤로 하고 위지혼의 몸은 멀어져 갔다. 사, 대 협 번우량(번우량)은 몸을 굳힌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를 가장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그의 할아버지는 차디찬 시 신이 되어 그의 눈앞에 쓰러져 있었다. 번우량은 자기의 눈으로 보고도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 다. 자신이 아는 한, 그의 할아버지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열 명 의 고수중 하나였고, 온 천하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협객(대협 객)이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할아버지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건곤일수(건곤일 ) 번일악(번일악)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한참을 충격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번우량은 문득 할 아버지의 가슴이 유달리 불룩한 것을 보고 조심스레 품속을 뒤 져 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그에게 보내는 번일악의 서신(서신) 이 있었다. 낮익은 번일악의 필체를 대하자 번우량은 반가움에 앞서 눈 앞이 뿌얘지는 것을 느꼈다. 우량! 네가 이 글을 보고 있을 즈음이면 아마도 이 할애비는 이 세 상사람이 아닐 것 같구나. 네게는 미처 알리지 않았다만 나는 화군악의 비무첩(비무첩)을 받았다. 이제 일각(일각)후면 그가 이곳으로 올 것이다. 나는 아직 직접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승패를 예상할 수는 있다. 우내십대고수의 무공은 일협인 신주대검협(신주대검협)을 제 외하고는 거의 백지 한 장 차이인데 벌써 세 명이 그에게 쓰러 졌다. 그중에는 나와 같이 삼기(삼기)에 속해있는 천문서생 모 용화린도 있다. 그들이 별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진 것으로 보아 나도 화군악의 적수는 되지 않을 것 같구나. 그래서 마지막으로 너에게 이 글을 쓴다. 네 부모가 죽은 후 나는 너를 손자라기 보다는 나의 분신(분 신)처럼 키워왔다. 너는 내 기대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인물로 자라왔다. 너의 대범한 성격과 넓은 포용력, 불의(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는 장차 나를 능가하는 천하제일의 대협(대협)이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허나 한 가지 불안스러운 점이 있구나. 네가 노부의 복수에 눈이 어두어 화군악에게 무모한 도전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 이다. 화군악의 무공은 단순히 화씨세가의 무공을 완성한 것 뿐만 이 아니고 자신의 천부적인 능력과 엄청난 노력으로 상상을 불 허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다. 그는 그야말로 무(무)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인물이다. 그와같은 무공의 소유자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타나기 힘들 것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네가 노부의 복수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 는다. 네 무공으로는 도저히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 다. 허나, 네가 정 복수를 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만물(만물)에는 상극(상극)하는 것이 있듯이 천하제일로 알 려진 화씨세가의 무공에도 유일하게 극성되는 무공이 있는 것 이다. 그것은 이제는 거의 몰락해 버린 태극문의 무공으로... 후략 (후략) .... 번우량은 편지를 꽉 움켜 잡았다. 편지가 그의 손에 먼지가 되어 흩날릴 때 그의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오, 고 수 화창한 날씨였다. 조자건(조자건)은 반쯤 열린 창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신 듯 눈을 몇번 껌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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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이군.) 그는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나 길게 숨을 둘이마셨다. 아침의 차갑고 청명한 공기가 폐속 깊숙히까지 가득 밀려 들 어왔다. 그러자 마음이 개운해지며 무슨 일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