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표는 묵묵히 옆에 지켜서서 조자건이 식사하는 광경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 다. 들어온 사람은 수염을 기르고 체구가 우람한 흑삼인이었다. 흑삼인의 나이는 대략 삼십 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남자답게 생긴 용모에 눈빛이 아주 강렬했다. 그를 보자 진표는 곧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빈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흑삼인은 조자건의 유일한 친형인 조립산이었 던 것이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조립산은 이번에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돌아왔다. 허나 조자건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조립산은 묵묵히 상처투성이인 조자건의 전신을 쓸어보았다. 한동안 그는 쏘는 듯한 시선으로 조자건의 상세를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 상처들은 어떻게 된 거냐?" 조자건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제 한 사람과 결투를 했습니다." "상대는 누구였느냐?" "섬전도 서귀였읍니다." 조립산의 눈빛이 조금 더 강렬해졌다. "서귀의 칼은 제법 빠르지. 그는 어떻게 되었느냐?" "다시는 빠른 컬솜씨를 자랑할 수 없게 되었읍니다." 조립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걸을 수 있겠느냐?"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길을 떠날 준비를 해라." 조자건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조립산에게 그런 걸 묻는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조립산이 알려주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어디로 간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려주고 싶지 않다면 어느 누가 물어보 아도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조립산은 그런 사람이었다. 조자건은 곧 행낭(행낭)을 꾸렸다. 행낭이래 보았자 간단한 옷가지 몇 벌과 약간의 은자가 전부 였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물건 들은 아무리 가난한 도둑이라도 훔쳐갈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 었다. 조립산은 묵묵히 조자건이 행낭을 꾸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이 집을 맡기도록 해라." 그 말에 조자건은 몸을 움찔했다. 전에도 그는 조립산을 따라 여행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허나 그 기간은 보통 십 일 안팎이었고, 길어야 한 달정도였 다. 헌데 다른 사람에게 집을 부탁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번의 여행은 다른 때와는 약간 틀린 모양이었다. 행낭을 다 꾸 린 후 조자건은 밖으로 나왔다.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진표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또 여행을 떠나려고?"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집을 좀 맡아 주시오. 훔쳐갈 물건은 없으니 가끔 먼 지나 청소해 주면 될거요.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내버려두고." "이번에는 좀 오래 걸릴 것 같은가 보군. 어디로 가려는가?" "그건 아직 모르겠소." "올해안으로는 돌아오겠지?" 진표는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조자건은 씁씁한 미소를 머금었 다. "모르겠소." 진표의 얼굴에도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보다 다 섯 살이나 어리지만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친구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기가 싫었던 것 이다. 허나 그는 마음속의 서운함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밝게 웃 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네. 상처가 덧나지 않 도록 조심하게." "자당(자당)께는 못뵙고 간다고 말씀 전해 주시오." "알겠네." 두 사람은 뚫어지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진표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조자건은 조립산과 함 께 길을 떠났다. 허나 그들중 어느 누구도 그들이 다시 만나기까지 그토록 오 랜 세월이 걸리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 괴 인 평강(평강). 평강은 하남성의 중부. 복우산(복우산)의 초입에 위치한 작 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복우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요로(요 노)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주루와 객잔이 성행했다. 사방이 땅거미로 어둑어둑 해질 무렵. 평강에서 가장 큰 영빈루(영빈루)로 들어서는 두 인영이 있 었다. 그들은 흑의와 백의를 걸친 대조적인 인상의 인물들이었다. 흑의인은 얼굴에 수염이 가득했고, 체구가 우람했으며 당당 한 기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백의인은 이목구비가 남 달리 수려했고, 눈빛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준수한 청년이었다. 그들은 바로 길을 떠난 조립산과 조자건 형제였다. 허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형제라는 사실을 좀 처럼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외모나 풍기는 이상이 너무도 판이하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진표도 이것이 궁금해서 조자건에게 물은 적이 있었 다. "자네의 형님과 자네는 정말로 친형제가 분명한가?" 조자건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우리는 같은 부모밑에서 한 핏줄을 이어받은 사 이요." "나도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두 사람이 너무 닮은 곳이 없어서 말일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없소. 형님은 아버지를 닮았고, 나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기 때문에 그런거요." "그랬었군. 하지만 한 가지만은 두 사람이 똑같네." "그게 무엇이오?" 진표는 메마른 얼굴이 삐식 웃음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모두 엄청난 고집불통이라는 것일세." "하하...... 그건 아마도 우리 조씨문중의 혈통때문일 것이 오. 선친(선친)께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고집쟁이이셨소." 조립산과 조자건은 주루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는 음식을 주 문했다. 그들이 간단한 음식을 시키고 몇 젖가락 먹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등 뒤로부터 극히 나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구료. 무림 역사상 그 자와 같 이 단시일내에 이름을 떨친 자를 나는 아직껏 들어 본 적이 없 소." "이형의 말이 맞소. 그는 진정 무서운 자요."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뒤이어 말했다. "뭐가 진정 무섭다는 거요?" "그 무적초자(무적초자) 화군악의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의 손속 또한 매우 잔인해서 아직까지 그와 겨루어 살아남은 사람 이 없으니까 그렇지." "정말 그와 겨룬 사람들이 모두 죽었단 말이오?" "그렇다네. 벌써 수라마검 손우곤을 시초로 해서 무영마장 전무극, 혈화도 진궁, 철필선생(철필선생) 노자량(노자량), 태 행일괴(태행일괴), 통비신수(통비신수) 황무(황무), 독목염라 (독목염라) 여궁회(여궁회), 음조(음조) 혁상(혁상) 등 흑백양 도의 절정 고수들 뿐 아니라 얼마전에는 천하최강의 고수라는 우내십대고수 중의 섬전창이 꺾였다지 않나?" 조자건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등 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탁자에 세 사람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모두 청의를 입었는데 하나같이 이목이 청수하여 신태비범한 모습들이었다. 조자건은 조립산에게 나직이 소근거렸다. "저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조립산은 세 중년인을 흘끗 보고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 었다. "저들은 이 일대에서 제법 명망(명망)이 높은 고수들인 하남 삼수(하남삼수)이다. 왼쪽부터 산수재(산수재) 고경명(고경 명), 삼절서생(삼절서생) 마종기(마종기), 신기수사(신기수사) 이환(이환)이라고 부른다. 저들중에서 신기수사 이환은 제법 재주가 많은 사람이지." 그때 마침 이환이 말을 잇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이건 내가 얼핏 들은 이야기 이지만 상당히 신 빙성이 있는 말인데......사절(사절) 중의 홍황도마저 얼마 전 에 무적초자에게 꺽였다는 소문이 있소." 그 말에 고경명과 마종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 다. "그게 정말이오?" "믿을 수 없군. 홍황도라는 사절 중 최고의 고수가 아니오?" 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소근거렸다. "그렇소. 홍황도 우문황은 비록 사절에 속해 있지만 삼기(삼 기) 보다 오히려 강한 고수요. 그의 무공은 거의 쌍마(쌍마)에 필적하는데 그마저 패했다는 소문이 있으니 무적초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지 않소?" "아...... 정말 놀라운 일이오. 우문황은 백년 내 제일도객 (제일도객)으로 불린 고수였는데......" 마종기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무적초자 화군악의 무공은 과연 천하무적이란 말이 오?" 이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이르오. 무학(무학)의 길이란 하 늘 밖에 또다른 하늘이 있듯이 그 층계가 부지기수요. 따라서 각기 남이 흉내내지 못하는 절예들을 모두 한두 가지씩은 가지 고 있어 현금(현금)의 무림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천하무적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오." "하지만 그가 홍황도마저 꺽었다면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겠 소?" "홍황도가 비록 도(도)의 일면에서는 천하무적이라고 불리웠 지만 무학이 어찌 도법뿐이겠소. 더구나 아직 당금 무림의 최 고 고수라는 일협(일협)과 쌍마가 있으니 속단하기 어렵소." "아아...... 그렇군!" 마종기가 다시 탄성을 터뜨렸다. 이환은 더욱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일협부터 사절까지 뭉뚱그려 우내십대고수라고 말하지 만 그들의 무공은 서로 상당한 격차가 있소. 예를 들어 사절 중의 홍황도는 삼기보다 오히려 고강하다고 알려져 있고, 삼기 중의 제일인자(제일인자)인 천기노인(천기로인)은 같은 삼기 중의 다른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한 인물이오." 이환은 갈증이 나는 듯 술을 한 잔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특히 이것이 일협과 쌍마에 가서는 더욱 심해 천기노인과 홍황도를 뺀 다른 고수들은 쌍마와 상당한 차이가 있고, 쌍마 또한 일협에는 모두 한참 뒤진다고 하니 아무리 무적초자라도 쉽사리 승세를 장담하기는 어려울 거요." "아! 그렇다면 일협의 무공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요?" "글쎄...... 나도 직접 그를 본 적은 없지만 그의 무공은 거 의 천인합일(천인합일)에 이르러 있다고 하오." "만일 그와 무적초자가 싸운다면 이형은 누구에게 더 점수를 주고 싶소?" 마종기의 질문에 이환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척 어려운 질문이구료. 그들은 각기 두번 다시 나오 기 힘든 불가일세(불가일세)의 인물들이니 우리같은 사람들로 써는 쉽게 승산을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겠소? 아마, 만에 하나 그들이 격돌한다면 그거야 말로 경천동지할 무림사(무림사) 이 래 최고의 격투가 될거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고경명이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말했다. "만일 그들이 결투를 벌이게 된다면 나는 무슨일이 있더라도 그 공전절후(공전절후)의 결투를 구경하고 말테요." "그거야 이를 말이오? 그런 일생일대의 구경거리를 놓칠 바 보가 어디있겠소?" 마종기가 껄껄 웃으면서 술잔을 쳐들었다. "자, 그런 꿈같은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술이나 듭시다." 조자건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조립 산을 돌아보았다. "그 일이 과연 꿈같은 일일까요?" 조립산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조자건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주루를 나오자 어느덧 밖은 어두어졌다. 허나 그들은 객잔에 머무르지 않고 어두운 밤길을 계속 걸어 갔다. 그동안에도 조립산은 그들의 목적지가 어딘지에 대해 조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조자건은 어림짐작으로 자신들이 복우 산중(복우산중)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들이 복 우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어 져서 한 치 앞 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조립산은 걸음을 멈출 기 색이 조금도 없었다. 조자건은 말없이 조립산의 뒤를 따라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 을 올라갔다. 주루를 나올때부터 그들은 한 마디로 입을 열지 않았으나 조 자건은 조금도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조립산은 평소에도 반드시 필요한 말만 하는 성격이었고, 조 자건 자신도 별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 형제 는 하루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 형제가 서로 서먹서먹하거나 거리가 먼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의 다른 어떤 형제들보다 우애 (우애)가 돈독했고, 서로를 끔찍이 아끼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형제에 대한 정을 나타냈 다. 구 년전, 조자건이 겨우 열 살의 철모를 어린아이였을 때 하 루는 조립산이 지시한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놀이에 열중한 적이 있었다. 조립산은 그에게 매일 당시(당시)를 열 개씩 암 기하라고 했는데 그때 그는 마을 어린이들과 들불놀이를 하다 가 그만 당시를 외우지 못했던 것이다. 조립산은 그에 대한 벌로 그에게 커다란 물동이를 지운 채 하루종일 마을밖을 돌게했다. 그 일은 열 살의 어린 아이에게 는 너무나 힘에 겨운 일로, 조자건은 꼬박 열흘동안 몸져 누어 있어야만 했다. 그때 조립산은 열흘만에 간신히 침상에서 일어난 조자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는 나에게 매일 당시(당시)를 외우겠다고 약속을 했다. 도둑질을 했을 지라도 네가 당시를 외웠다면 나는 너를 꾸짖 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무릇 자신이 한 번 내뱉은 말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조자건은 단 한 번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어겨본 일이 없었다. 삼 년전, 조립산이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불쑥 조자건을 찾 아왔을 때 조자건은 그를 방안에 남겨두고 한참동안 밖으로 나 갔었다. 다시 돌아온 그는 자그만 술상을 들고 둘어왔다. 술상위에는 칠색향병(칠색향병)과 오향장육(오향장육), 녹두 활어(녹두활어)의 요리와 소도자(소도자)라는 술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조립산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술이었다. 또 한 일반인들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가장 비싼 음식이기도 했 다. 조립산은 돈도 없는 빈털털이인 조자건이 무슨 수로 이런 값 비싼 음식들을 장만할 수 있었는지 조금도 묻지 않았다. 조자 건 또한 자신이 음식값 대신 근처에서 가장 큰 요리집인 수강 관(수강관)에서 한 달동안 막일을 해주기로 했다는 것은 입밖 에도 내지 않았다. 다만 그날은 조립산의 서른 한 번째 생일날이었고, 그는 형 에게 생일상을 대접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너무도 사소한 것이라 구태여 떠들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허나 이런 사소한 일들은 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말보다는 보이지 않는 행동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했다. 복우산은 진령(진령)의 동부산맥으로, 일명 천식산(천식산) 이라고도 한다. 복우산이라 이름붙은 것은 산의 형태가 꼭 소(우)가 엎드려 있는 (복) 형상이기 때문이었고, 천식산은 산이 너무 높고 가 파라서 하늘도 이곳을 보고 한숨을 내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었다. 초경이 가까워 올 무렵. 조립산과 조자건은 복우산의 어느 험준한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골짜기는 형세가 몹시 기이하여 흡사 하늘의 천신(천신) 이 예리한 도끼날로 찍어 놓은 듯 가파른 절벽 사이에 협소하 게 위치해 있었다. 골짜기의 입구로 들어서자 양쪽으로 깍아지 를 듯한 절벽이 하늘끝까지 뻗쳐올라 있어 아찔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골짜기로 들어갈수록 길은 조금씩 넓어졌으나 지형은 오히려 더욱 험준해져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 어 제대로 걸어가기도 힘이 벅찰 지경이었다. 조자건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 암석군(암석군)과 수림(수림) 들이 그냥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한 진식(진식)을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오행진(오행진) 같기도 했고 팔괘진(팔괘진)같기도 했으나 오행진도 아니고 팔 괘진도 아니었다. 그것을 알려준 사람은 조립산이었다. "이것은 무극연환미혼진(무극연환미혼진)이라는 것이다. 통 과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정신없이 헤매다가 엉뚱한 곳으 로 빠져나가 버린다. 너는 내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따라 오너 라." 조립산은 연환보법(연환보법)을 밟으며 앞으로 전진해갔다. 조자건은 신중한 동작으로 조립산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일 각쯤 지나자 그들은 무극연환미혼진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암석 군과 울창했던 수림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들의 눈앞에는 높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절벽이 우뚝 서 있었다. 절벽의 한쪽끝에는 시커먼 동굴이 입을 쩍 벌린 채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조립산은 서슴없이 동굴을 향해 다가갔다. 그 때 갑자기 동 굴안에서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하는 누구요?" 조립산은 짤막하게 말했다. "나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동굴속의 인물 은 짤막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조대협(조대협)...... " 조립산은 동굴안으로 들어섰다. 조자건도 묵묵히 그를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안은 너무도 어두워 바로 앞에서 걸어가는 조립산의 모 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밤이 아니라 밝은 대낮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외지고 깊숙한 동굴 속라면 칠흑같이 어두울 것이다. 헌데 이런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기거하는 사람이 있다니 기이 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쿵!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조자건은 조립산의 뒷등에 부딪쳤 다. 조립산이 걸음을 멈추었던 것이다. 조자건은 앞을 바라보다가 흠짓 놀랐다. 동굴은 어느 새 끝 나 있었다. 동굴의 끝에 한 명의 괴이한 인물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 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자건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 인물을 알아본 것은 그 가 어렸을 적부터 특수한 훈련을 해서 안력(안력)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괴인은 전신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였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 없었다. 괴인은 좀처럼 햇살을 받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색이 창백한 것은 당연한 일이 다. 이상한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그의 눈동자도 흰색이었다. 신비스러울만치 흰 눈동자. 검은 부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동굴 속의 괴인은 장님이었던 것이다. 삼, 심 등 괴인은 조립산이 서 있는 쪽으로 얼굴을 쳐들었다. "조대협의 신태(신태)는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구려." 이 말을 듣자 조자건은 괴이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괴인은 분명 앞이 안 보이는 장님인데도 마치 정상적인 사람 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조립산은 나직한 음성을 입을 열 었다. "당신도 여전하오. 그동안 잘있었소?" "이곳은 물을 구하기가 좀 힘들뿐 나머지는 모두 괜찮소. 나 는 지금 아주 만족하게 지내고 있소." 조자건은 괴인의 얼굴에 진정으로 안락하고 만족한 듯한 표 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 릴 수 있었다. 누구라도 이런 어둡고 후미진 동굴에서 생활하라고 한다면 단 하루도 견듸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 것이다. 허나 괴인은 이 런 동굴에서 지내는 것에 커다란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만족이란 원래 상대적인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부족함을 모르고 지내 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안락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 각한다면 그곳이 차디 찬 동굴 속이든, 호화로운 궁궐이든 마 찬가지인 것이다. 괴인은 다시 물었다. "조대협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요?" 조자건은 내심 흠칫 놀랐다. 그는 원래 동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단 한 마디도 입을 열 거나 기척을 내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 았었다. 장님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없으니 장님은 물론 들을 리 도 없었다. 그런데도 괴인은 동굴 속에 들어온 사람이 몇 명인지를 정확 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립산은 짤막하게 말했다. "내 동생이오." 괴인은 다시 물었다. "조대협이 이곳에 온 것은 과거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요?" 조립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처음으로 무표정하던 괴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찌보면 격동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희열같기도 한 무 어라 표현하기 힘든 야릇한 표정이었다. 괴인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해졌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조립산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직이 되물었다. "당신의 심등대법(심등대법)은 완성되었소?" "그렇소." "내 동생에게 심등대법을 전수해 주시오." 괴인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탄 식을 했다. "지난 십일 년 동안 이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 소. 조대협은 한 달 후에 다시 와서 그를 데려 가시오." 조립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는 조자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동굴을 벗어났다. 조립산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름은?" "조자건이오." "좋은 이름이군. 몹시 젊은 것 같은데 몇 살인가?" "스물이오." 조자건은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 자신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정말 장님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정확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조자건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자 조자건은 비로소 눈 앞의 괴인이 틀림없는 장님이라고 단정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3편 →
4편부터
4편
[무협지]태극문 - 4편 (4/87)
괴인의 눈동자는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 이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눈동자를 지니고 있을 리 없다. 설사 흉내를 내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괴인은 홀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