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방풍우! 무림에 갓 입문(입문)한 풋내기 무사라도 펼칠 수 있는 하찮 은 초식이 아닌가? 그런데 그 팔방풍우가 백의사내의 손에서 펼쳐지자 그 위력은 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막비 자신도 직접 당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팔방풍우에 이와 같은 엄청난 위력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막비가 입으로 폭포수같은 피를 흘리며 경악어린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백의사내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 다. "왜 더 손을 쓰지 않는거요? 내게 뭘 느끼게 해주겠다고 큰 소리쳤던 것 같은데 그새 마음이 달라졌소?" 그 말에 막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번에야 비로소 그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백의사내가 한 말은 얼마전에 자신의 입으로 했던 말과 같은 것이 아닌가? 막비는 그제서야 무언가를 느낀 듯 안색이 창백 해졌다. "너...너는 진표와 어떤 사이냐?" 백의사내는 그의 물음에는 대답도 없이 다시 씨익 웃었다. 그 순간 번개같은 그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쐐액! 막비는 뻔히 상대의 발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서도 이상하게 도 피할 수가 없었다. 쾅! "크윽!" 어이없게도 그는 상대의 발길질에 옆구리를 격중당해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조금전에 다쳤던 반대쪽 갈비뼈가 부 러지며 그의 코에서 뜨거운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막비는 고통을 억누르며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다시 상대방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막비도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상대의 발길질을 피하려 했으나 역시 피하지 못했 다. 아니 피할 수가 없었다. 상대의 평범한 발길질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교묘한 변 화가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어서 그가 어느 곳으로 움직이던 완 벽하게 피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퍽! "우욱!" 이번에는 아랫배를 정면으로 강타당하고 앞으로 푹 꼬꾸라졌 다. 이번의 발길질은 상당히 충격이 강해서 막비는 한 순간 고 통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공을 익힌 후 그가 남에게 이렇 게 세게 맞은 적은 아직 없었다. 한참후에야 막비는 간신히 바닥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허나 그가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다시 예의 발길질이 날아 들었다. 막비는 사력을 다해 비마보(비마보)를 시전했으나 소 용없었다. 단순한 대좌골퇴법(대좌골퇴법)같았는데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백의사내의 발은 한 치도 사정없이 막비의 아래턱을 그대로 강타해 버렸다. 쾅! 이번에는 아주 벼락치는 듯한 음향이 들렸다. 막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의 입 뿐만 아니라 코와 귀에서까지 피가 흘러나왔다. 그 의 눈빛이 아주 희미해지며 얼굴이 회색으로 변했다. "끄으으...!" 그의 입이 열리며 부서진 이빨들이 시뻘건 핏물에 섞여 꾸역 꾸역 흘러나왔다. 막비는 아래턱 뼈가 완전히 박살난 채 바닥에 엎어져서 일어 날 줄을 몰랐다. 그제서야 백의사내는 발길질을 멈추며 냉혹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떤 기분인지 알겠지?" 막비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속은 잘려진 혓바닥과 부서진 이빨들로 피범벅이 되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는 것 이다. 백의사내는 잠시 그를 내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곧 그의 훤칠한 신형은 금화루를 벗어나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 다. 백의사내가 사라진 직후, 다시 하나의 인영이 금화루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장내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막비를 발견하자 그에게로 다가왔다. 막비는 가물가물한 눈을 억지로 치켜 뜨고 자신에게 다가오 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갈의를 입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 이었다. 갈의청년은 막비의 앞으로 다가오자 그를 내려보며 히죽 웃 었다. 그 웃음을 보자 막비의 두 눈에 불안과 공포의 빛이 떠 올랐다. 갈의청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잔인한 살기가 번뜩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갈의청년은 음산한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 다. 막비의 얼굴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렸다. 갈의청년의 오른손이 푸르스름하게 변한 것을 본 것이다. 순 간 갈의청년은 오른손으로 세차게 막비의 두개골을 내리쳤다. 쾅! 비명도 없었다. 막비는 머리통이 박살난 채로 즉사하고 말았다. "쳇!" 갈의청년은 막비의 피로 더러워진 자신의 손을 인상을 찡그 리며 내려보다가 피묻은 손을 막비의 옷으로 대충 닦은 후 허 공을 올려보며 다시 웃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모든 일을 성취한 후 기뻐하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갈의청년은 한참을 소리없이 웃다가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제14장 추 살 명 영 일, 화 원 사나이는 꽃을 하나 꺾어 그 향기를 음미하듯 가만히 입가에 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기 시 작했다. 화원(화원)은 무척 넓었다. 각양각색의 꽃들로 이루어진 그 화원은 거의 끝도 보이지 않 을만큼 넓고 거대했다. 사나이는 한동안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화원의 여기저기를 걸 어다녔다. 때로 잠깐 걸음을 멈추고 꽃 몇 송이를 꺾어 그 향 기를 맡거나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하는 일없이 그저 돌 아다니고 있었다. 한동안 느긋한 표정으로 화원을 걸어다니던 사나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어느 새 나타났는지 그의 삼 장 뒤에 두 인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늙고 젊은 두 남녀(남녀)였다. 우측의 남자는 오십 대 초반쯤 되었는데 노인답지 않게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수려했다. 젊었을 적에는 많은 여인들이 방심을 끓였을게 틀림없을 것이다. 노인은 푸른 학창의에 은빛 요대를 했는데 몹시 잘 어울려 보였다. 여인은 궁장(궁장)을 한 절세(절세)의 미녀(미녀)였다. 나이는 대략 이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눈빛이 호수처럼 맑 았고 적당한 키에 피부가 백옥처럼 고왔다. 몸매는 궁장에 가 려 있어 알 수 없었지만 침어낙안(침어낙안)의 표현이 어색하 지 않는 화사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청의노인은 사나이가 돌아보자 즉시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무림대회(무림대회)의 준비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사옵니 다." 사나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표정도 없었고 그냥 무감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 었다. 청의노인은 사나이의 그런 모습에 많이 익숙한 듯 조금도 어 색해 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이미 강호무림의 예순 두개 대소문파(대소문파)에서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연락해 왔고 멀리 관외(관외)와 동영(동영), 운 남(운남)지방에서도 고수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읍니다." 청의노인의 음성은 정중하면서도 일종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우내십대기문병기의 주인들도 모두 참석한다면 그야말로 무 림사상 두 번 다시 없을 대성회(대성회)가 될 것입니다. 대협 (대협)께서 의도하신대로 이번에 우승하는 사람은 진실로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제일인자)라고 불리워도 모자람이 없을 것입 니다." 사나이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자신의 앞에서 공손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청의 노인도, 말없이 한쪽에 서 있는 궁장미녀도 눈에 들어오지 않 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은 그저 자신과 청의노인 사이의 텅빈 공간에 고정되어 있었다. 청의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대협께서 부탁하신 물건은..." 그 말이 떨어지자 처음으로 사나이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 다. "은정지모(은정지모)를 구했소?" 그의 음성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듯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나 어딘지 모르게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진한 여운이 담겨 있었다. "아직 구하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것의 행방을 알아냈읍니다. 한달 안에 대협께 전해 드리겠읍니다." 사나이는 다시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묵묵히 청의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자 천천히 몸을 돌려 화원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동안에도 그는 궁장미녀에게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청의노인은 멀어져가는 그의 뒷등을 응시하다가 그의 몸이 보이지 않게 되자 굽혔던 허리를 폈다. 허리를 펴자 청수하고 공손했던 그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칼 날같이 예리한 기상이 풍겨나왔다. 청의노인은 한동안 의미모 를 시선으로 사나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는 보았느냐?" 궁장미녀는 그에게로 다가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는 살기(살기)가 많이 억제되었더군요." 청의노인은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억제된게 아니라 없어진 것이다." 궁장미녀는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청의노인은 말을 이었다. "그는 원래 천성적으로 살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제 그는 자신의 살기를 내면으로 흡수시켜 아무런 살기조차 보 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돌연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그의 무공진경(무공진경)이 저와같은 경지에 접어 들었는데 이제 누가 그의 적수가 되겠느냐?" 궁장미녀는 여전히 의문의 빛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님 말씀은..." "그가 마음속의 살기를 내뿜었을때도 그를 당해낼 사람이 없 었는데 이제 그 살기마저 없앴으니 어느 누가 그를 당해내겠느 냐? 이제 그는 천하무적(천하무적)이 되어 버렸다." 그의 말은 깊은 뜻이 있어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궁장미녀는 이해를 했다. 세상의 이치(이치)는 오묘한 데가 있어서 어떤 일이건 극도 에 이르면 오히려 평범해 지는 법이다. 물은 세차게 흐를수록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너무 깊은 물은 오히려 소리를 내지 않고 흐른다. 사람의 무공 또한 그 조예가 깊을수록 풍기는 기세나 살기가 대단하지만 그것이 어느 한계 에 도달하면 오히려 기세나 살기가 보이지 않게 되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비범(비범)이 지나치면 오히려 평범(평범)해 보 인다는 말이다. 궁장미녀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는 무엇때문에 은정지모를 찾으려 하는걸까요?" 청의노인은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다가 담담한 표정이 되었 다. "은정지모는 비록 천하의 보물(보물)이지만 한 군데 밖에는 사용할 수가 없다." "그게 무언가요?" "바로 검(검)이다. 은정지모는 천하의 보검(보검)을 만드는 데 가장 훌륭한 재료가 되는 것이다." 궁장미녀는 눈을 반짝였다. "그의 무공이 그와같은 경지에 도달해 있다면 무엇때문에 그 에게 은정지모가 필요한 걸까요? 다시 말해서 그의 무공이라면 그의 손에 쥐어진게 보검이든 나무토막이든 같은 위력을 발휘 할텐데 왜 굳이 보검을 만들려고 하는걸까요?" 청의노인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네 생각도 무척 치밀하구나.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제게 세 가지 생각이 있어요." 청의노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엇이냐?" 궁장미녀는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입술을 살짝 열었다. "첫째는 그의 무공이 아직 절대(절대)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 해 보검의 위력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청의노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저도 그럴거라고 생각해요. 둘째는 그에게 보검을 사용해야 할 일이 생겼을 거라는 거지요." "보검을 사용해야 할 일이라..." "예를 들면 무언가 아주 질기거나 단단한 것을 끊거나 자르 기 위해 보검이 필요한 경우이지요." 청의노인은 한동안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가 고개를 흔들었 다. "그건 잘 모르겠구나. 세번째는?" 궁장미녀는 혀로 피처럼 붉은 입술을 살짝 축이며 말했다. "그가 새로운 검법(검법)을 만들었는데 그걸 펼치기 위해서 보검이 필요했을 때이지요." 청의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음...그럴 듯 하군. 내가 보기엔 세 번째가 가장 유망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저는..." 그녀가 막 입을 열려 할때 갑자기 화원 너머에서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맹주(맹주)님! 미시(미시)가 다 되었읍니다." 청의노인은 그 음성을 듣자 퍼뜩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군. 아영(아영)아. 늦기 전에 어서 나가자." 이어 그는 먼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궁장미녀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꼭 오시(오시)에서 미시 사이의 한 시진밖에는 열리 지 않나요?" "그렇다." 그는 갑자기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모두 공손축(공손축), 그 늙은 괴물때문이다." "공손축이라면 신공원(신공원)의 그...." "그렇다. 공손축이 그를 위해서 화원을 만든 것 까지는 좋았 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 화원에 천하의 누구도 뚫을 수 없 는 무시무시한 기관매복을 해 놓았다. 그래서 오시에서 미시까 지의 한 시진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아버님도 뚫을 수 없나요?" 청의노인의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다. "다른건 몰라도 기관매복이라면 천하에서 공손늙은이를 따라 갈 사람이 없다. 교수노반(교수노반)이란 외호가 그냥 붙은게 아니지. 그는 무슨 심보에서인지 이걸 만들어 놓고는 자신은 신공원에 쳐박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를 않으니..." "그럼 공손축은 이 화원을 세운 다음에 신공원에 들어간 겁 니까?" "그렇다. 벌써 삼 년전이지. 그는 이 화원을 세우고는 신공 원에 들어가서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실 처음 맹을 만들었을때 그 자의 신변을 어떻게 보호할 까하고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는 이미 강호무림의 모든 고수 들의 표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칫하면 암습(암습)이나 살 수(살수)를 당할 여지가 많았다. 그때 마침 공손축이 자청해서 그의 거처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쾌히 승락을 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되려는지 공손늙은이가 이곳을 철옹성 (철옹성)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에게도 출입하는 방법을 알려주 지 않았으니...." 궁장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정말 소문대로 괴팍하군요." 청의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괴팍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골치덩어리다. 맹주인 내 말도 듣지 않고 오직 그 자의 말만 듣는다." "그건 신공원에 있는 인물들 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 신공원의 팔대신공(팔대신공)은 모두 그 자의 열렬한 추종자들이다. 무적검수맹 자체가 그래서 생겼지만...그 자들 은 맹목적인 광신도들이다." 말을 하는 도중 그들은 어느 새 화원을 벗어났다. 궁장미녀는 자신들이 나온 화원을 돌아보며 이리저리 살펴보 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시가 지났는데도 별로 이상한 기미가 안보이는데요." 청의노인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네가 아직 공손축의 실력을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기관매복이 발동된 흔적이 보인다면 그건 공손축의 솜씨가 아 니지. 하지만 지금부터 내일 오시까지는 천하의 누구라도 화원 을 뚫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곳이 정말 그처럼 무서운가요?" 청의노인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용담호혈(용담호혈)이란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 단 기관이 발동되면 대라신선(대라신선)이라 해도 이곳을 침입 하지 못한다." 궁장미녀의 눈에서 혜성같은 빛이 반짝거렸다. "아무도 침입할 수 없다면 아무도 나올 수 없겠네요?" 청의노인은 의아한 기색이다가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버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아무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 고요. 그렇다면 그도 또한..." 청의노인은 안색이 굳어진 채 냉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궁장미녀는 그의 기색에 놀라 몸을 움찔했다. "아버님..." 그때 마침 그들앞으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두 분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나누십니까?"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영롱한 음성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취 하게 하는 그윽한 향기가 밀려왔다. 궁장미녀는 그 향기만 맡 아도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었 다. "조(조)이모! 언제 오셨어요?" 궁장미녀가 금시라도 뛰어들듯 반색을 하며 달려오자 나타난 인영은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호호...영아(영아)는 언제 보아도 생기발랄하군. 이러니 우 리 척아(척아)가 반할 만도 하지." 궁장미녀의 손을 잡고 짤랑짤랑 웃고 있는 여인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흑의미녀였다. 정확한 나이는 추측할 수 없지만 약간 나른한 눈매와 풍만한 몸매를 지녀 누가 보아도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반쯤 감긴 눈과 입가에 걸려 있는 묘한 미소는 보는 이의 가슴을 괜히 두근거리게 만드는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의 조금 권태스러우면서도 화사한 용모는 몸에 걸치고 있는 착 달라붙은 흑의와 어울려 사람의 마음에 이상한 충동을 일으키게 했다. 궁장미녀는 얼굴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이며 흑의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사공(사공)...대장(대장)님도 오셨나요?" 흑의미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호...우리 척아가 마음에 있긴 한가보군? 왜 그전처럼 사 공오라버니라고 하지 않고...?" 궁장미녀는 아예 목덜미까지 홍조를 띄며 고개를 떨구었다. "조이모님도...." 그때 마침 청의노인이 그들에게 다가와 헛기침을 했다. "흠...그동안 별고 없으셨소?" 흑의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띄며 인사를 했다. "덕분에. 맹주님께서도 무고하신지요." "허허...나야 별일 있겠소. 아...그리고 사공대장도 왔소?" "예. 취의청(취의청)에서 두 분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음...사공대장을 못만난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빨리 보고 싶군." 그는 궁장미녀를 향해 미소지었다. "아영아. 너도 빨리 가자. 사공대장이 보고 싶어 매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렸지 않았느냐?" 궁장미녀는 자신의 아버지까지 이렇게 말하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면서 눈을 곱게 흘겼다. "아버님도...제가 언제...." 흑의미녀가 깔깔 웃으며 그녀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호호...천하의 기녀(기녀)라는 궁아영(궁아영)이 이렇게 부 끄럼많은 여자인줄 남들이 알았다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을거 다. 너무 얌전빼지 말고 어서 가자. 척아도 너를 무척 보고 싶 어한다." 궁장미녀, 궁아영은 못이기는 척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앞으 로 걸어갔다. 청의노인은 흐뭇한 시선으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천천히 그들을 따라갔다. 이, 추 살 소소(소소)는 눈물을 흘리며 침실로 뛰어들었다. "흑흑...." 그녀의 배꽃같은 얼굴은 흐르는 눈물로 촉촉히 젖어 있었고 머리는 풀어 헤쳐져 삼단같은 흑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런채로 남자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가가(가가)...어쩌면 좋아요...어쩌면 좋아요..." 남자의 털이 수북한 가슴은 금새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로 흠뻑 젖어 버렸다. 남자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은 듯 털이 많이 나 있는 두툼한 손으로 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소...무슨 일이냐? 울지 말고 말해 보아라." 소소는 얼굴을 남자의 가슴에 묻은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흐흑....우리 비아(비아)가....우리 비아가..." 남자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마 몸에 이렇게 털이 많은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드러 난 가슴과 팔은 물론이고 거의 전신에 남들보다 훨씬 많은 털 이 가득했다. 손바닥과 발바닥을 제외하고는 전신이 털로 뒤덮 히다 시피한 인물이었다. "그 놈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이냐?" 남자의 물음에 소소는 도리질을 쳤다. "그게 아니에요...비아가...비아가 죽었어요. 흐흑...." 그녀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남자는 그녀의 흑단같은 머리결을 쓰다듬으며 눈썹을 찌푸렸 다. "그 놈이 죽었다고? 누가 죽였느냐?" "흐흑...조씨 성을 가진 놈에게....흑흑...머리가 완전히 부 서진 상태로...흐흐흑..." 소소의 음성은 울음소리에 뒤섞여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남자 는 알아들었다. "흠...머리가 부서져 죽었다고?" 소소는 고개를 들어 눈물범벅인 얼굴로 그를 애처롭게 쳐다 보았다. "비아는 우리 집안의 마지막 남은 아들이었어요....그가 죽 었으니 우리 집안은 이제 대(대)를 잊지 못하게 되었으니... 다...당신은 이 원수를 꼭 갚아주세요..." 남자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소소는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흐흑....가가...우리 비아의 복수를 꼭 갚아주세요. 불쌍한 우리 비아...더구나 그렇게 처참하게 죽다니..." 남자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그녀의 비통한 울음 소리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흠...소소...울지마라. 내가 그 놈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 소소는 반색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가가...정말이세요?"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걸 보았느냐? 그러니 울음을 거두어 라." 소소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기쁨에 찬 웃음을 띄었다. "가가...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있는 탁자로 갔다. 탁자위에 놓인 붓을 들고 탁자의 모퉁이에서 빨간 쪽지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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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동생을 죽인 자의 이름이 무어냐?" 소소는 급히 대답했다. "자건. 조자건이라고 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간 혈첩(혈첩)에 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