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릉의 눈물, 자천릉의 분노, 그리고 자천릉이 지녀왔던 그 모든 삶의 과정들이 뿌리째 뒤흔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 아버님! 도대체 왜?" 자천릉의 입에서 부르짖음같은 낮은 반문이 흘러나오는 순간 자륭극이 다시 천천히 창 쪽으로 등을 돌리며 잔잔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아비는 북경 용황(龍皇) 자(紫)씨의 삼십 이 대 손으로 태어나 무도 에 취미가 있어 무예의 길에 들어선 후 호승심을 느껴 십팔만사천백와마 루에 들었다." 흘러나오고 있는 독백처럼 담담한 자륭극의 음성은 자륭극이란 이름이 곤오풍우라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대신되기까지의 멀고 먼 역정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십 년... 태대각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중원인으로서 나의 혈관에 흐르고 있던 피는 이민족 원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 중토의 끝에서 끝까지 원의 무인과 왕족, 재상들, 그리고 그에 부화하는 쓸개빠 진 중원인들을 휩쓸어 버리게 했지." 풍운아 곤오풍우의 대장정! 간접적인 대명태조건국공신으로서, 오천 년 무림사가 낳은 초유의 거인으로서, 하늘 없는 땅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살아 이미 하늘이 된 난세의 거목으로서, 그렇게 화려하고도 장쾌하게 살아온 검조 만세제일신마 곤오풍우의 위대한 대장정의 사연들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그후 삼십 년... 뿌리가 얕았던 대명의 국운은 다시 때 이르게 기울기 시 작했단다. 허나 나는 대명에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본루와 황실은 서로 손을 대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기에. 결국 대명을 돕기 위해 본래의 자륭 극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지." 천세의 신비고수인 자륭극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륭극 에서 곤오풍우로, 곤오풍우에서 다시 자륭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필연의 고뇌! 그것은 연왕반정을 막후에서 주재하며 지상에 또하나 역사의 이정표를 세워 놓은 자륭극이라는 한 위대한 이름을 천하인의 뇌리에 심어 놓았던 것이다. 자천릉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륭극의 음성이 조금 열기를 띄어 가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대명제국의 천년영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본 십팔만사천백 와마루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대명의 천년영화를 위해서 이 땅에 더 이 상 두 개의 성역은 없어야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시의 난세가 있 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아비의 결단이었단다." 십왕들의 전쟁. 백마성의 하늘에 보름달이 뜨고 세 번째로 십왕벌이 열 리며 천하에 선포된 곤오풍우의 한 마디로부터 시작된 그 난세지난세의 진정한 원인이 밝혀지고 있었다. "허면... 왜 나를 끌어들인 거지?" 불현듯 또다시 반문하는 자천릉을 향해 자륭극이 부드럽게 웃었다. "본루를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본루의 중추인 백마와 십왕을 제거해야 했단다. 물론 이 아비도 그들을 제거할 수는 있었지. 하지만 내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릉아가 해 왔던 것처럼 하나하나 죽여야 했다." "...!" "그러나 태대각의 입장에 있는 내가 그들을 차례로 죽여 간다면 우선 본 루의 율법에 의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 십왕과 백마의 반발 때문에 결국 나는 죽고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겠지. 십왕 중 다섯 명이 한꺼 번에 공격해 올 경우 나는 그것을 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란다." 자륭극의 눈동자가 암울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물론 자륭극의 신분으로 나타나면 두 개의 성역이 진정으로 격돌할 우 려가 있었지. 해서 때마침 이방십칠인이 너를 이용해 중원으로 탈출할 것을 꿈꾸는 것을 알고... 너를 선택한 것이란다." 자신을 이용한 부친 자륭극의 거대한 음모가 밝혀지고 있음에도 자천릉 의 대답은 침묵일 뿐이었다. 그 음모의 뿌리는 너무도 깊고 거대하며 또한 무섭지 않은가? 자륭극의 신분으로 자신의 또다른 얼굴인 곤오풍우에 도전, 십팔만사천 백와마루가 중원에 진출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고, 후계자계승싸움이라 는 지극히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십왕과 백마가 절대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고 상잔하도록 유도했으며, 거기에 자천릉이라는 하나의 변수를 던 져 놓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자천릉에 의해 십왕과 백마가 제거되도록 만 들어 둔 자륭극의 이 거대한 음모를 대체 뉘라서 짐작이나 할 수 있 었으랴. 이때 다시 자륭극의 뱉는 듯한 한 마디가 자천릉의 가슴을 강하게 때려 왔다. "물론 너를 택한 가장 큰 원인은 나의 아들인 릉아를 가장 믿었기 때문 이다." 자천릉은 그러나 아무 말이 없었다. 이어지던 자륭극의 음성도 할 말을 맺은 듯 더 이상 울리지 않고, 그 음성이 남겨놓은 충격의 격랑 속에서 한 동안의 침묵이 무겁게 내리깔렸다. 그러던 한 순간 문득 무표정하게 굳어 있던 자천릉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후후후, 왠지 자꾸만 이용을 당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한 사람의 손아귀 에 의해." "자존심이 상하느냐?" "예!" "그렇다면 덤벼라. 너의 아비 자륭극이 아닌 곤오풍우로서 싸워 주마." 또한번 실로 의외의 말이 자륭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허나 자천릉은 익히 짐작하고 있기라도 하듯 계속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알겠습니다." "와라! 천요만방의 부방주, 자천릉! 본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제 사십 일 대 태대각 곤오풍우는 본루의 수좌로서 본루의 제자인 그대에게 도전을 허락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번쩍! 백마척섬불극도가 짧은 무지개를 그리며 자천릉의 손에 쥐어졌다. 동시 에 자천릉의 신형이 민첩한 고양이처럼 사뿐히 지면을 박찼다. 그 때 기 다렸다는 듯이 자륭극의 손에 황금빛 찬란한 거검(巨劍)이 들려졌다. "만세천하(萬歲天下)!" 스파아앗! 잇달아 한 줄기 찬연한 황금검화의 폭죽 속에 자륭극의 신형이 허공에 솟구쳐오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아버지와 아들, 자륭극과 자천릉, 아니 하늘 없는 땅 십팔만사 천백와마루의 현임 태대각과 십왕과 백마의 도산(刀山) 검림(劍林)을 단 신으로 헤치고 정상에 올라선 젊은 도전자, 그 위대한 승부의 마지막 끝 이 지금 작렬하듯 퍼져 나가는 저 검광과 도기의 장렬한 축제 속에 부딪 쳤는가? 늙고 젊은 두 사내의 신형은 교차되며 자리를 바꾸어 내려서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정지되어 버리기라도 한 듯 한 동안 화석처럼 등을 돌 린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고요한 침묵이 얼마나 내려앉고 있었을까? 한 순간 웃음이 가슴 속에서부터 격랑쳐 오르는 그 어떤 감정의 회오리 가 입술을 거쳐 소리로 바뀌며 새어나오는 듯한 그런 웃음이 처음에는 젊은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들먹이게 하며 흘러나오더니 이내 늙은 거목 의 입가에 이르러 하늘이라도 씻어 낼 듯 시원한 소성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후후후, 아버님! 왜 저를 베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이놈아! 어찌 아비가 자식을 벨 수 있겠느냐." "간접적으로 죽이려고는 했지만 말입니다." "꽃바람을 말하는 게로구나. 릉아야. 너는 모르느냐? 실전무예는 하루아 침에 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허면 꽃바람의 끝없는 도전을 이용해 릉아의 무예를 다듬어 주셨단 말 씀입니까?" "그렇지. 친구를 잘 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후후, 그렇게 해서 나를 이용한 것이군요." "이놈! 이용이라는 말을 쓰지 마라. 네가 나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 아 비는 그렇게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너를 낳아 준 아비이기에, 너 는 나의 아들이기에 시킬 수가 있었던 거지." "......." "어찌 타인으로 하여금 그토록 고달프고 참담한 길을 걷게 할 수 있겠느 냐? 나의 아들아!" "훗! 내가 아들을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런대로 이해는 하겠군요. 허나 조금은 씁쓸합니다. 아버지가 있지 않았다면 그래도 한 번쯤 천하제일인 자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놈! 천하의 진리 중 만고에 불변하는 것은 인륜이니라. 아비는 항상 아비이고 아들은 항상 아들일 뿐, 아들이 아무리 높다해도 아비는 그 위 에 있지." "후후훗!" "하하하하." - 아비는 항상 아비이고, 아들은 항상 아들일 뿐 아들이 아무리 높다 해 도 아비는 그 위에 있지.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언젠가 한 열두 살의 소년이 처음 대곤륜의 산역에 발을 들여 놓던 그날 처럼 소담한 꽃눈이 깊고도 많았던 사연들을 묻으며 조용하게 쏟아져 내 리고 있었다. 언제나 침묵할 뿐인 대곤륜의 희디흰 그림자와 <만황>의 위대한 역정마 저 덮어버리는 이 겨울의 눈은 유난히도 고요한 폭설이었다. - 대미(大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