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불리 성가시게 굴었다가는 희생자가 한 사람 더 늘어나는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키티는 어제 비운과 고독과 굴욕의 눈물에 젖어 조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도미니크는 다행히 그 반 시간에 걸친 애절한 장면을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앞으로도 알 기회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상상력이 아무리 풍부하다 해도, 그건 실제로 조지가 보고 들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오늘의 키티는 처음부터 솔직하게, 멋적은 표정조차 보이지 않은 채 담담했다. 어제 같은 눈물은 이미 지나가 버려서 다시는 반복될 것 같지 않았다. "어제는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런 심정이 되리라고는 저 자신도 생각지 못했거든요. 저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어요. 정말 인간이란 언제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모를 일이에요. 저는 스스로를 상당히 냉정한 성격으로 생각했었는데." 조지가 말했다. "나는 아들 녀석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당신을 위해 힘껏 애쓰고 있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그녀는 얼굴을 들어 미소를 띠었다. 그건 당연히 도미니크에게로 던져진 미소일 것이라고 조지는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은 혈색은 좋지 않았으나, 극심한 비탄이 그 겉모습에 끼친 변화라고는 단지 그녀의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만든 것과 가냘픈 입 언저리의 곡선이 한결 애처롭게 일그러져 있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아파트에서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중간색의 스커트와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옆에는 책 한 권이 읽던 페이지에서 엎어져 있었다. 마치 졸업시험을 일주일 뒤에 앞둔 초조해진 여대생을 연상시켰다. "제가 진심으로 감사하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제가 살해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그뿐일 거예요. 아직 아기처럼 순진해서 -- " 그녀는 문득 말을 끊고, 마치 그 조심성 없고 용서하기 어려운 말을 거두어 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황황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말은 그에게 전하지 마세요. 그건 진심이 아니고, 그가 들으면 기분을 상할 거예요. 그냥 마음으로부터 고마워하더라고 -- 그리고 사랑하고 있다고 -- 만 전해 주세요." 그녀는 끝머리의 말을 약간 주저했으나 취소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야무지게 다문 입이 활처럼 굳은 곡선을 그렸다. "그런데 당신이 휘발유가 떨어져서 차를 나무 울타리 곁에 댔던 장소를 알아냈소." 조지는 지나가는 말처럼 운을 뗐다. "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지 않았지요? 우리가 조만간 그걸 알아낼 것이라는 것쯤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찾아냈군요." 키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 역시 도미니크에게 던진 것이리라. "정말 똑똑한 아이군요!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라고 해도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펠스 씨. 어쨌든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세요. 강요해도 소용없어요. 내친 김에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더 이상 사람들의 보살핌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요. 아무도 저를 찾아오지 말라고 하세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당신을 만나는 것이 한결 마음이 편해요. 셸레이 영감님은 너무 슬픈 얼굴만 하시니 저까지 슬퍼지고 말아요. 달리 누가 찾아올 사람도 없겠지만." "친구들이 많을 텐데요?" 조지는 슬쩍 화제를 바꿨다. "많았었지요.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고 나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사람이 저였으니까요. 더구나 레슬리의 가치가 떨어지고 나서는 저와 결혼하겠다는 젊은 구혼자가 아주 많았지요. 그 중의 일곱 명은 실제로 정식 결혼신청을 했고, 그럴 생각으로 만나기를 원한 사람이 다섯 명 가량 되었어요. 그런데 오늘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만나러 온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단 한 사람, 그것도 저를 사랑한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던 레슬리뿐이었다고요."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 얼굴에 번지는 아름답고 기쁨에 찬 웃음이었다. 조지는 그때서야 비로소 어떤 사실이 이해가 갔다. 키티는 결국 이 불행한 재난 속에서 어떤 귀중한 것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 "레슬리가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허가를 받았던가요?" "네, 그는 피살자의 아들이고, 또 저와는 남매처럼 자란 사이니까요. 그는 정말 상냥하게 저를 위로해 주었어요." 키티는 앞자락에 모은 손을 내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남자라면 누구나가 사랑과 충성을 맹세하고 싶어질 그런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놀라는 얼굴이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이나 개인적인 기쁨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것을 조금도 마음에 두는 것 같지 않았다. 인생에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고 거기에 마음이 온통 쏠렸을 때는 위장이나 망설임이나 수치조차 말끔히 가셔지는 것이다. "살해된 사람이 그의 아버지였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는 저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어요 -- 마치 자기가 잘만 했다면 이런 불상사를 미리 방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가 이런 꼴이 된 것이 자기 탓이라는 -- 그런 가책을 받고 있는 거지요. 하지만 이건 저 자신이 불러일으킨 일이지 다른 누구의 책임도 아닙니다. 단, 오해가 없도록 말해 두겠습니다만, 이건 고백이 아닙니다." "즉, 당신은 어느 특정 인물을 감싸기 위해 이런 재난을 감수한다는 거군요." 조지가 갑자기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확실한 반응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는 움직임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녀가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나타낸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이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 상대 말입니다." 조지는 추적을 멈추지 않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규명이 되었습니다. 우즈엔드의 전화 박스 문에 당신의 스카프 끝자락이 걸려 있더군요. 당신은 설마 우리가 거기까지 밝혀내랴 하고 마음을 놓았던 모양입니다만. 자, 그 막간의 사건에 대해서 진실을 털어놓는 것이 이로울 겁니다. 어차피 밝혀질 이야기니까. 단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저는 별로 서둘지 않아요." 키티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조지는 그녀의 행동거지나 말투 여기저기에 긴장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도대체 그게 누굽니까, 키티? 우리가 밝혀내는 것보다는 당신 스스로가 말해 주는 편이 현명할 텐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참, 궁금한 일이 있어요. 만일 제가 유죄로 확정되면 저는 아마이저 씨의 재산을 상속할 수 없게 되겠죠? 그러면 그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 셸레이 영감님을 달래느라고 그걸 여쭈어보는 것을 깜박 잊고 말았네요. 당신은 아시죠?" "글쎄......자세히는 모르지만 자동적으로 가장 가까운 혈연에게 넘어가는 게 아닐까 -- 그걸 거부하는 별도 조항이 유언장에 없는 한 말입니다." 조지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옳은 해답인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엄연한 현직 경찰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는 그녀가 말을 돌리려고 일부러 그런 걸 물어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허세를 부려 유산에 관한 생각을 마음에서 떨쳐 버리려고 그러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 분명히 그녀는 질문의 방향을 돌리고 싶어하기는 했지만, 그 질문을 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 답을 알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어머나, 잘됐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만 되면 레슬리와 진은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네요. 엄청난 돈이 생기니까요. 저도 유언장 같은 걸 만들어 둘까 봐요." 조지는 할말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단절된 세계가 그의 충격에 의한 침묵 때문에 한 순간 흔들린 것이다. 거기에서 그녀는 그 까닭을 깨닫고 엉뚱한 지레짐작을 했다. "어머,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잽싸게, 그리고 정중하게 말했다. "본심으로 한 말이 아니니까. 저는 잘 알고 있다고요! 비록......최악의 경우가 생긴다고 해도, 그건 1급 살인사건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 10 장 "저것이 그 여인입니다. 이른바 '즐거운 여자'이지요." 레슬리는 테이블에서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당신의 조언에 따라 어제 클렌머 화장에서 이걸 다시 가져왔습니다만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여자?" 조지가 만일 그 질문에 대해서 솔직히 답변했다면, "별로 신통치 못한걸!"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창에서 들어오는 광선을 받게 하기 위하여 벽에 기대놓은 그 그림은 구름이 낀 오늘 일요일의 아침 하늘처럼 우중충했다. 여자의 살갗의 엷은 황갈색과 그 짙은 그림자는 비바람에 시달려 전반적으로 탁해져서, 담배와 같은 갈색으로 퇴색되어 있었다. 술집의 간판으로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니며,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기 50cm 가량으로, 더구나 그 안에 있는 여자의 초상은 화면에 상당한 여백을 남기고 있었다. 그전에는 짙은 녹색이나 청색이었을 바탕색이 갈색의 니스로 여러 번 덧칠이 된 위에 그 여자는 거의 허리까지 상반신만 그려져 있었다. 화판의 아래쪽에는 아무렇게나 그려진, 모슬린 숄에 싸인 소녀처럼 작은 가슴 아래 그녀의 양손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숄 아래로 여자의 어깨는 조금 뒤로 젖혀져 있었고, 목은 유난히 길고 불안정하게 묘사되어, 시든 꽃대처럼 뒤로 쏠린 머리와 평형을 이루기 위해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여자는 오른쪽으로 얼굴을 비스듬히 해서 넓고 부드러운 이마를 광선 쪽으로 향하여 웃고 있었다. 서툴고 거친 화법과 그녀 얼굴의 조잡한 조형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이 우스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환희의 웃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누군가 이야기 상대와 웃음을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웃음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었다. "나는 그림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지만 -- " 조지는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의견을 말했다. "그림이 웬지 어수선해 보이는걸. 목 둘레의 장식이라든가 날개 모양으로 땋아올린 머리와 양쪽의 소용돌이 모양의 귀밑머리 같은 건 빅토리아 시대 초기 리얼리즘의 흔적이 엿보이긴 하지만, 여자의 포즈는 빅토리아 시대의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리얼리즘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걸. 오히려 수녀 같은 포즈라고 생각하는데 -- 엉터리 비평일까?" "아니, 훌륭한 안목입니다. 그런데 어수선해 보인다는 것은 전체적인 인상입니까, 아니면 세부적으로?" "아마 세부적일 걸세.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힌 느낌이니까. 물감의 사용도 전체적으로는 거칠긴 하지만, 그건 그림이 낡아가면서 아마추어가 몇 번이고 덧칠을 한 탓으로 생각되네." "상당하십니다.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 자칫하다가는 미술 평론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 -- " 레슬리는 우중충한 이 미술품에 열중한 나머지, 그와 조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심과 잠재적인 반목의 관계에 있었던 것까지 말끔히 잊고 있었다. "이 여자는 지금 말씀하신 대로 수난을 거의 2세기 동안이나 겪어왔습니다. 수선이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덤벼들어 솔질을 하고 값싼 물감으로 모자이크 모양의 덧칠을 한 것 같습니다. 때로는 화가가 지나가다가 멋대로 고친 흔적도 있는데, 저 소용돌이 모양의 귀밑머리 같은 것이 그겁니다 -- 즉, 당신이 웬지 어수선해 보인다고 한 것도 그런 이질적인 것이 뒤섞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질적인 것은 두서너 겹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 여자의 균형잡힌 모습이나 아름다운 포즈 등, 이른바 구도는 원래 그대로의 것이며, 매우 잘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저 여자를 관에서 꺼내주려고 합니다. 팔려 나가기 전의 그녀를 보고 싶은 거지요. 그 여자는 처음부터 술집 간판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간판이 되기 전에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진은 명색뿐인 부엌으로 가다 말고 잠깐 걸음을 멈추고서 간판의 웃고 있는 여자를 눈여겨보고는, 들고 있던 포크의 자루를 입에 물며 끼어들었다. "누군가를 닮은 느낌이 들어요 -- 누군지는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처음부터 웃고 있는 그림이었을까?" "그럴걸. 머리가 조금 젖혀진 걸 보더라도. 어쨌든 곧 알게 될 거야." 거기서 레슬리는 조지에게 설명했다. "실은 오늘 오후 대학에서 화랑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걸 갖고 가기로 했습니다. 어제 브랜던 루카스라는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흥미 있을 것 같다면서 곧 갖고 오라더군요. 나는 그분의 아들과 옥스퍼드에서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조지가 물었다. "클렌머 화랑에서 간판을 갖고 올 때 그 영감이 딴소리는 하지 않던가?" "아뇨, 전혀. 하기야 좀 아쉬워하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당신이 드나들기도 한 그림이라 무작정 붙들고 늘어질 수도 없었겠지요." "간판을 팔라는 말도?" "팔라고는 했습니다." "값은 얼마에?" 조지는 그 순간 방안의 온도가 갑자기 내려가는 듯한 쑥스러운 냉기와, 부부 사이에 흐르는 전류 같은 것을 느끼면서 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늦었다. 정말 쑥스러운 질문이었다. 금전적인 궁핍, 재산 상속의 부당한 소외, 경제적인 원조를 구하기 위해 자존심을 굽혀야 했었던 굴욕감 -- 그런 것들이 그들의 짧은 결혼생활에 줄곧 그늘을 던져 온 것이다. "600파운드라더군요." 진이 내뱉듯 말하며 문 쪽으로 갔다. 담배를 쥔 레슬리의 손가락이 갑자기 떨렸다. "당신은 아버지가 500파운드 주겠다고 했을 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그 제안을 거절했을 때 당신은 기뻐하기까지 했소. 이번 이야기도 그것과 별 다를 게 뭐 있지?" "100파운드 많잖아요." 그녀는 단조롭고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 아버지의 돈이 아니라는 점. 그림 가게에서 직접 받는 돈이라 꺼림칙하지도 않고 마음편하게 쓸 수가 있거든요." 딴은 맞는 말이었다. 제시된 금액이 상당한 액수여서 그녀가 그것을 팔고 싶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임신중이다 --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편안한 둥지가 아쉬운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불해야 할 희생은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만일 레슬리에 대한 믿음이 지금도 확고한 것이라면, 그녀는 남편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그대로 받아들여 충실하게 그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떤 성급한 행위가 신혼의 맹세를 한꺼번에 날려 버린 것이다. 이제 그는 그녀의 믿음에 어긋남이 없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다시는 신용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받고, 냉혹한 평가를 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건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태어날 아이를 위해 탐욕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인 이 초라한, 발들여놓을 곳조차 넉넉지 못한 방안을 둘러보며 조지는 미래의 호강을 꿈꾸기보다는 오늘의 실리를 잡고 싶어하는 그녀를 책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 내가 간판을 처분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10배가 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쩌지? 말이 쉬워 단념이지, 단념할 수 있을 것 같아 ?" 레슬리는 신랄하게 퍼붓고 나서, 불현듯 자신의 가시돋힌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이런 하찮은 말싸움을 그만두기 위해 흥미가 가시고 만 간판 그림을 주워들었다. 그는 조지 앞에서 부부간의 불화를 드러낸 것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아마 진도 그랬을 것이다. 복도에서 걸음을 멈춘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어쨌거나 이미 팔지 않겠다고 한 것을 새삼스럽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서 뭐해요. 이젠 운에 맡기는 수밖에." 조지는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부인. 만일 그 그림을 클렌머가 600파운드로 봤다면 그것보다 비싸게 팔 자신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재미로 그런 장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감정 결과가 나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보십시오." 조지는 레슬리 곁으로 가서 그림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소녀와도 같은 가슴 사이에 뭔가 기묘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조각이 된 문양이 있는 타원형의 커다란 브로치 같은 것이었다. 그 아래쪽에 길고 파리한, 형태가 분명치 못한 손가락이 깍지를 낀 채로 모아져 있었다. "자네도 이 그림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을 갖고 있을 텐데?" 조지는 살피듯 물어보았다. "네. 하지만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라서, 누군가 이런 것에 박식한 사람의 의견을 들을 때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낡은 천으로 그것을 싸서 방 한구석에 소중히 세워놓았다. "죄송합니다 -- 저 그림에 정신이 팔려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당신은 설마 간판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키티에 관한 일입니까?" 레슬리는 그녀에 관한 것이 머리에 떠오르자 그림에 대한 가슴 설레는 기대감 같은 것도 날아가 버리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맞아, 그녀에 관한 일로 왔지......자네는 어제 아침 키티를 만나러 갔었다더군." "네, 가게 일의 틈을 보아 급히 찾아가 보았습니다. 나는 직장에 나가기 전까지는 그녀가 체포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녀를 만나러 간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그게 문제가 될 리야 없지. 나는 단지 그녀가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자네에게 이야기했나 해서......실은 그날 밤 11시에서 12시까지 한 시간 동안의 그녀의 행동이 밝혀지지 않고 있네. 그녀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아마도 누군가 또 한 사람이 그녀가 침묵하고 있는 원인인 것 같아.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그날 밤의 행동을 모두 털어놓는 것이 그녀에게 유리할 것 같은데." "유죄든 무죄든 말입니까?" "그럼." 레슬리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 "그렇겠지요. 당신이 하는 말이니 틀림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을 나에게 이야기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 짚으신 겁니다. 그녀는 나의 아버지나 그날 밤에 관한 것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그런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녀는 자기는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고 했고, 나 역시 그녀가 그랬으리라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대꾸했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녀의 결백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협력을 하는 겁니다." "그야 자네가 그렇게 믿는 건 나무랄 수 없지. 그런데 얼마 동안이나 키티와 함께 있었나? 30분 가량? 그래, 그 동안 별로 하는 이야기도 없이 뭘 했나?" 레슬리의 잘생긴 광대뼈 언저리에 갑자기 노여움이 떠올랐다. "그녀는 울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달래고 위로하느라고......" 그의 눈에 한 순간 격정의 빛이 스쳤는데, 그건 불꽃처럼 확 타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녀는 필요한 것 이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신이 문제로 삼고 있는 한 시간 동안의 일에 관해서도 전혀 말한 것이 없습니다. 하기야 나에게 그것에 관해 물어본 사람은 당신뿐만은 아닙니다. 실은 어제 당신의 아드님이 나를 만나러 왔었지요." "허, 그래? 그건 몰랐군, 놀랄 일도 아니지만." 도미니크는 수사 결과를 전혀 보고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얻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부자는 마치 합동수사라도 하는 모양이 되었군." 조지는 멋적은 웃음을 띠었다. "그래, 그 녀석이 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더라 이 말이지? 만일 키티가 궁지에 빠져, 급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생겼을 때, 한밤중에라도 달려와 그녀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누굴까 하고?" "아뇨. 정확히 말해서 그런 건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같은 문제를 파고들었다고는 할 수 있겠죠. 옛날에는 키티가 여러 가지 문제로 자주 나를 찾아오곤 했었습니다. 우리는 사이가 좋았고, 그녀는 나를 오빠처럼 따랐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의 탐욕스러운 계획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만 겁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간 거지요. 키티는 구김살없고 쾌활한 성격이지만, 상당히 외로움을 잘 탑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 역시 아버지가 일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나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어려움에 빠졌다면 왜 나에게 전화 한 통화라도 걸어 상의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나에게 전화가 없는 것이 그녀의 인생에서 나를 제외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바보스러운 말을 하며 울기만 하지 뭡니까......뭐라고 하셨나요?" 조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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