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이야기를 계속하게. 만일 그녀가 자네에게 부탁할 수 없었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기야 그녀 주위에는 놈팽이들이 벌떼처럼 둘러싸고 있기는 하지만, 키티가 그런 치들에게 도움을 청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정말로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면 좀더 나이가 든 사람을 골랐을 겁니다. 그녀를 길러준 숙모가 살아 있다면 물론 숙모에게 부탁을 했겠지요. 하지만 2년 전에 돌아가셨고......그녀의 관리인 -- 부드러운 성품의 노인인데 그녀를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지요 -- 그가 아니면 레이몬드 셸레이 정도입니다. 셀레이 변호사는 그녀의 친척이나 다를 바 없어서 키티는 어려서부터 그분을 따랐고, 특히 나와 아버지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나서는 나를 위해 애를 쓰면서 더욱 친해진 것 같습니다. 대충 그런 정도입니다만, 별로 도움이 안되겠는걸요." "아니, 그렇지도 않네." 조지가 말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돕고자 하는 것은 키티지 당신이 아닙니다. 언짢아 하실지는 모르지만 -- 당신은 이런 일이 하나의 일거리겠지만, 나는 경찰관이 아닙니다. 키티의 친구이지요." "아, 그건 잘 알고 있네." 조지는 시민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것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도미니크는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하던가?" 그는 레슬리의 눈에 떠오른 미소가 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도미니크가 그것을 실행하고 동시에 그의 입장이 쾌히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았다. 조지는 문까지 걸어가서 뒤돌아보았다. "또 하나, 이건 자네에게 좋은 소식인데, 자네가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시간을 어떤 남자가 확인해 주었네. 워렌 탄광의 광부인데, 이 골목 안쪽에 살고 있지. 그날은 잔업 때문에 늦게 돌아왔는데, 저 앞 네거리에서 탄광 버스에서 내렸을 때 자네가 집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는 거야. 그걸로 15분 전 11시라고 한 자네의 귀가시간은 1~2분 차이는 나지만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 셈일세. 지금으로서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하지만 그게 입증됐다니 기쁩니다. 이틀 전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탄광 버스를 조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바로 어젯밤이었거든. 좀더 일찍 그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아무튼 자네의 그 '즐거운 여자'에 행운이 깃들기를 비네. 어떻게 가져갈 생각인가? 버스로 갖고 가기에는 너무 큰걸. 차를 마련해 줄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버니 윌슨의 차를 쓸 수가 있습니다. 그는 예비 열쇠를 만들어, 내가 필요할 때는 쓰라고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같이 차고도 없는 터라, 그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어서 아주 편리합니다." "자네는 사람들의 신망이 두텁군." 조지는 계단 위에서 말했다. "자네라면 마누라를 빌려줘도 안심이 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야." 그는 동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며 계속 생각했다.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울화가 치밀 정도로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하여간 레슬리와 한 대화에서 상당한 수확이 있었다는 느낌만은 확실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그 '즐거운 여자'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데 그 빈틈없는 그림 장사가 600파운드나 내겠다던 그 그림 말이다. 그 간판의 여자가 아마이저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그림은 어제 키티를 만나본 이래 그의 가슴속 깊이 뿌리를 내린 어떤 추리와는 들어맞지 않았지만, 일단 대단히 값진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앞세운다면 그 가능성은 상당히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만일 이 사건의 동기가 돈이었다면, 범인이 계산하고 있는 보수는 -- 그걸 크게 웃도는 막대한 금액이 틀림없다. 아마이저가 생애의 마지막에 도락을 위해 쓴 돈만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돈의 전부가 바야흐로 그 사람의 품속으로 굴러 들어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레슬리는 그런 막대한 유산이 남의 손에 들어간다는 현실을 진짜로 단념한 것일까? 비록 그가 생활력이 없어서 자초한 생애 최초의 고생에 길들여졌다고 하더라도, 만일 운명이 뜻하지 않게 엄청난 유산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그날 밤 레슬리가 걸어서 집에 돌아간 것 이후로는 아무런 악한 의도도 품지 않고 '즐거운 술집 하녀'를 떠났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럴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 광부의 증언이 명확하게 그걸 증명하고 있다. 그가 밖을 어슬렁거리다가 키티가 황급히 달아나는 것을 목격하고, 다시 한 번 되돌아가서 그녀가 우연히 떠밀어 기절시킨 아버지를 짓이겨 놓았다는 가정은 성립되기 어렵다. 그 시각에 레슬리는 현장에서 2킬로미터나 떨어진 코마번에 있었으니까. 만일 그가 범인이라면 그는 아버지를 죽일 목적으로 되돌아간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살의는 마치 번갯불처럼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쳤을 것이다 --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예를 들어 뜻하지 않는 키티의 비명소리와 같은 계기가. 그런 가정에 도달했을 때, 조지는 자신이 키티의 결백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입장에 서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원인이 키티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도미니크의 탓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스스로의 변화에 조금도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적어도 지난 24시간 동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늦게나마 깨달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키티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 우즈엔드에서 그녀가 전화를 건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령 누군가가 당황한 키티의 입을 통해 아마이저가 기절해서 별채에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평소에 아마이저를 죽이고 싶은 절실한 이유를 갖고 있었거나, 그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하자. 키티가 살인죄를 뒤집어쓸 무대는 마련되어 있고, 더구나 그녀 자신이 범인으로 하여금 아마이저의 숨통을 끊을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런 기회는 생전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착상을 조지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 것은 키티 자신이었다. 그것은 비탄의 나락에 빠지긴 했지만, 만족스럽게 내뱉은 그녀의 말 한마디가 그 계기가 된 것이다. "만일 제가 유죄로 확정되면 저는 아마이저 씨의 재산을 상속할 수 없게 되겠죠? 그러면 그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리고 자못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었다. "어머나, 잘됐네! 그렇게만 되면 레슬리와 진은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엄청난 돈이 생기니까." 우연이라고는 하나 무대는 완벽했다. 더구나 그녀가 말한 대로 이건 1급 살인사건이 아니므로, 범인은 키티가 사형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1급 살인이든 가벼운 살인이든 그런 구별은 살인범이 피해자의 재산을 상속할 수 없다는 법규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유죄가 선고된 키티는 당연히 상속권을 박탈당할 것이다. 하지만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그녀는 여전히 부유하고 또 젊을 것이다. 100만 파운드의 4분의 1을 걸고 있는 범인은 그녀가 그 정도의 희생을 치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를 수도 있다. 큰 돈은 때때로 사람의 양심을 마비시킬 수도 있으니까. 조지가 갑자기 생각을 굳히고 일요일 아침 레슬리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둘 있었다. 우선 레슬리는 차를 갖고 있지 않아서 그날 밤 급히 별채로 되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레슬리가 키티가 했다는 말로써 깨우쳐 주었듯이 그의 셋집에는 전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뛰어넘기 어려운 장애였지만, 그중의 하나는 가까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버니 윌슨의 차를 언제라도 쓸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예비 열쇠는 가지고 있었고, 차는 가까운 시청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그럼, 나머지 하나의 장애는 어떤가? 그것도 과연 허망한 장애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 ? 사건은 시시각각 복잡성을 더해 가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자로 그은 직선처럼 혼돈 속을 꿰뚫는 한 줄기 실이며, 그것이 공교롭게도 동기나 감정 등의 색실과 얽혀 있을 뿐이라고 조지는 낙관하고 있었다. 더구나 명백한 실타래가, 그리고 분명한 동기에다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이미 거기에 있었다. 100만 파운드의 4분의 1이 눈앞에 오락가락하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불과 600파운드의 푼돈을 참아 넘긴다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 레슬리의 집에는 전화가 없다. 제 11 장 그날 저녁, 도미니크는 진지한 얼굴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무엇인가 중대한 제안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그의 표정에 역력했다. 밴디는 교회에 가고 집에 없었다. 조지는 아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도미니크는 살인사건이라는 충격적인 문제 토의에 여성인 어머니를 참가시키는 것은 피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할 것이 뻔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조지가 오랜 세월 동안 어머니에게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온 것을 비난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 저는 장갑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요." 도미니크는 조지의 의자 반대쪽의 테이블 끝에 의젓이 앉아 말을 꺼냈다. "그래서?" 조지가 재촉했다. 꺼내놓은 이야기가 그가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들을 만했다. 장갑 문제는 어쨌든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 "레슬리의 장갑은 깨끗이 결말이 났지만, 범인은 그날 범행 뒤에 피투성이의 장갑을 없애버려야 했겠지요? 샴페인 병은 코르크 마개가 있는 데까지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으니까요. 물론 경찰에서 그 장갑을 찾느라고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 그런 페인트투성이의 장갑을 갖고도 소동을 벌였을 정도니까요. 입고 있던 옷에도 피가 튀었을 테지만, 장갑에는 틀림없이 피가 묻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범인이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안 그래요?" "그야......그래서?"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키티가 그날 밤 장갑을 끼고있었나요?" 그는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그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추리의 전개에 필요한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실내에서는 끼고 있지 않았었지." 조지가 대답했다. "하지만 차 속이나 어디에 벗어둘 수도 있지. 그녀는 정장을 했었으니까. 아마도 차를 운전할 때는 장갑을 꼈을걸." "알겠습니다. 하지만 가택수색에서는 피묻은 장갑이 나오지 않았고요?" 그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혼자 단언하고는, 상대방의 기색을 살피듯 예리한 눈길을 보내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마치 만족할 만한 결과라도 얻은 듯 말했다. "저는 말입니다. 그 장갑을 염두에 두고 그날 밤의 사건을 정확히 추적해 보았습니다. 키티는 그 댄스 홀에서 정신없이 달려나가 집을 향해서 차를 몰았어요. 그러나 몇 백 미터도 못 가 기름이 떨어졌지요. 그녀는 당황했습니다. 아마이저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 혹시 치명적일 수도 있는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한시바삐 달아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차고 같은 곳에 전화를 걸 수는 없었죠. 그래서 전화 박스로 달려간 키티는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자기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 만큼의 휘발유를 한 통, 또는 휘발유를 차에서 차로 옮길 수 있는 호스라도 좋으니 급히 갖고 와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하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겠죠.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졌으니까요. 여기에서 가령 그녀가 말을 건 사람이 아마이저를 죽이고 싶어할 어떤 강력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고 해보세요. 그는 실제로 그런 일을 실행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었지만, 키티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바로 지금이다, 그를 해치울 수 있는 기회는 -- 그렇게 혼자 생각을 합니다. 아마이저는 지금 댄스 홀에 기절해 있어요. 만일 자기가 거기에 달려갈 동안에도 그대로 있다면, 마치 나무인형을 두들겨 부수는 정도밖에 안 되겠지요. 더구나 그녀는 그 죄를 뒤집어 씌워달라는 듯이 기다리고 있고요. 어쩌면 그는 그때 아마이저를 죽이려는 생각을 완전히 굳히고 있었던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기회였던 겁니다. 모험이기도 했겠지요. 아마이저는 그냥 몇 분 동안 정신을 잃은 것인지도 모르고, 혹시 그 남자가 도착했을 때는 의식을 회복할지도 모르고, 아니면 의식을 회복해서 그 자리를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그 남자에게는 밑져야 본전일 겁니다. 아마이저가 자취를 감추었다면 그뿐이고, 만일 그가 몸을 일으켜 머리를 감싸고 있다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차 있는 데로 데려가 직원들에게 데려다 주고 나서 그곳을 떠나, 키티를 만나서 안심시키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만의 하나 아마이저가 굴러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뻗어 있다면 -- 그건 바라고 바라던 100만분의 1의 기회가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총알처럼 차를 몰아 달려갔습니다. 키티가 있는 곳이 아니라 댄스 홀로 말이지요. 그곳에 가보니 정말로 아마이저는 그대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100만분의 1의 기회가 온 거지요."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조지는 낮게 신음하듯 말하고, 테이블 너머로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진지한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들 부자는 아무리 손을 저어 아니라고 해도 서로 놀랄 만큼 닮은 데가 있었다. 특히 그들이 밴디의 속을 썩일 때 보면 그것은 명백히 나타난다. 조지가 보기에 아들의 추리는 마치 자신의 마음을 거울로 비춰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전에도 그들이 한 가지 관심사에 마음을 빼앗겼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도미니크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자기 뒤에 착 달라붙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쪽이 실체고 어느 쪽이 메아리인지 구별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졌다는 거냐?" "대충 이렇습니다." 도미니크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일을 저지를 생각은 있었지만, 현장을 직접 볼 때까지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흉기도 준비하지 않았지요. 그러는 편이 안전하기도 했고요. 그가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은 서늘한 밤중에 차를 운전했기 때문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바라고 바라던 기회를 만났습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아마이저가 아직도 거기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본 그는 순간적으로 눈에 띄는 흉기를 손에 들었습니다. 그것은 입구 가까이 벽을 파고서 올려놓은 석고상이지요. 이건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그 석고상은 속이 텅 비어 의외로 가벼웠습니다. 그는 그걸로 아마저의 머리를 내려치려고 들어올렸지만 너무나 가벼워 생쥐의 머리도 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집어던졌을 겁니다. 석고상은 벽에 부딪쳐 깨졌습니다. 그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계단을 달려올라가 이번에는 샴페인병을 들고 내려와 그걸로 아마이저의 머리를 짓이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병이 깨지자 제정신이 든 그는 아마이저가 완전히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에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치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장갑을 말입니다. 더구나 신속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따라서 그는 현장에서 몇 백 미터 범위 내의 어딘가에 그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시바삐 키티에게로 가서 약속한 대로 그녀를 도와주어야 했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살인사건이 발견되었을 때 비록 아무도 그 사건을 그와 연관시키지 않는다 해도 그녀만은 의심을 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범행을 결행하게 한 무대 설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가 나중에 경찰을 유도해서 키티에게 혐의를 두게 하는 방법은 있다고 해도, 그녀나 또는 그녀의 차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겁니다. 만일 현장 가까이에서 그녀가 붙잡힌다면 그녀는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테지요. 예를 들어, '이러이러한 이유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는데 그는 곧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오지를 않았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키티는 그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다 해도 경찰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틀림없이 그에게 혐의를 둘 것이 뻔하지요. 안 그래요?" "그야 키티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로서는 감을 잡게 되겠지." 조지는 아들의 추리에 동의했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키티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만일 그 자신이 주목을 받게 되면 그때 가서 그녀에게 방향전환을 꾀했을는지는 모릅니다만. 어쨌거나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악의를 품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무사히 빠져 나오기를 바랐을 겁니다 -- 물론 그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이 확실한 경우에 말입니다만. 아무튼 그는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간 것처럼 보여야 했습니다. 댄스 홀에서 있었던 일은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시간상으로 크게 늦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는 우선 장갑을 처리하고, 그리고 나서 키티를 만나 휘발유를 넣어 주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갑을 주머니에 넣거나 자기 차 속에 숨겨둘 수는 없었을 겁니다. 만일 주머니에 밴 얼룩이 키티의 눈에 띄면 의심을 받게 되고, 또 차 안 어딘가에 피가 묻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결국 그녀를 만나기 전에 장갑을 마땅한 곳에 버리거나 숨길 수밖에는 없었겠지요." "그래, 너는 그 장소에 대해 짐작되는 거라도 있다는 거냐?" 조지가 결론을 서둘렀다. "자, 그가 어디에 장갑을 치웠는지 말해 봐." "시간이 급해서 먼 곳까지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키티에게 발각되면 큰일이지요. 그래서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댄스 홀을 나와 왼손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왜냐하면 왼쪽 장갑에는 피가 별로 묻어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는 그가 문의 손잡이에 지문을 남기지 않아야 했었던 것처럼, 비록 댄스 홀 안에 장갑을 숨길 만한 장소가 있었다고 해도 거기에는 감추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손잡이에 지문을 남기는 것보다는 장갑의 피가 조금 묻는 것이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나서 그는 장갑을 벗어, 그것을 뒤집어서 피가 다른 데 묻지 않도록 아마도 오른쪽 장갑을 말아 왼쪽 장갑 속에 넣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부근을 샅샅이 살펴봤어요. 그 별채 뒤쪽에 쇠창살이 덮인 하수구가 있더군요. 거기에 관심이갔었지만, 그건 너무나 눈에 띄기가 쉬워요. 하수물이 세차게 흘러내려간다면 몰라도 거의 물이 없는 상태라, 장갑은 하수구에 그냥 남아 있게 되고, 그러면 경찰의 눈이 맨 먼저 미칠 것이 뻔하니까요 -- " "으음, 거기는 우리도 벌써 조사를 해봤었지. 물론 별채 안을 샅샅이 조사한 뒤였지만, 그래서?" "그 밖에는 도로와 나무 울타리 속과 도랑이 그럴듯한 장소였고, 반대쪽에는 제법 울창한 숲이 있더군요. 그 숲은 의심은 가지만, 상당히 넓어서 샅샅이 뒤지려면 많은 인원과 시간이 걸릴 것 같았습니다. 도로 가까운 곳을 집중적으로 수색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요. 땅에는 여러 해 동안 쌓인 낙엽이 꽉 차 있거든요. 그러므로 아무리 공을 들인다고 해도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짙습니다. 어쨌든 저라면 거기를 택할 겁니다. 급히 숲속으로 뛰어들어 낙엽이 썩은 흙 속에 그 장갑을 묻어버리는 겁니다. 감쪽같죠. 그리고 나서 그는 차를 몰아 키티에게로 달려갑니다. 걱정에 가득한 표정으로 달려온 그는 키티의 차에 휘발유를 넣어주고는, 그 악바리 영감은 별일 없을 거라고 -- 키티의 신경과민이라고 -- 걱정할 것 없으니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라고 -- 하며 그녀를 달랩니다. 그를 보고 마음이 놓인 키티는 기뻐서 그에게 매달렸을 테지요. 그녀는 폭이 넓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자락이 피가 튄 그의 바지에 스쳤고, 그의 소매 어디에선가 피가 한 방울 떨어져 그녀의 구두 끝에 떨어졌지만, 어둠 속이어서 두 사람은 모두 그걸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경찰측의 이른바 증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대강 이런 걸로 짐작합니다만, 잘못 짚었나요?" 조지는 도미니크의 추리에 크게 무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무거운 숨을 몰아쉬고 나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범인은 키티를 집에 돌려보내기 전에 이미 아마이저를 살해했다 -- 돌려보내고 난 다음에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너는 생각하는구나." "물론이지요! 아마이저가 언제까지나 기절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만일 키티를 먼저 돌려보내고, 그자가 뒤에 남았다면, 기회가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는 없었을 겁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15편 →
16편부터
16편
죽음과 즐거운 여자 - 엘리스 피터스 - 16편 (16/23)
도미니크는 추리를 전개하는 동안 대단한 자신에 차 있었으나, 조지가 침묵에 잠기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모든 희망을 한꺼번에 건 뒤에 허전하고 불안한 바람이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이...